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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4일 토요일

클라라 슈만: 세 개의 로망스, Op. 22 / 브람스 피아노 트리오 3번 c단조, Op. 101

클라라 슈만: 세 개의 로망스, Op. 22

로망스는 낭만적·애상적 감성으로 가득한 악곡을 뜻한다. 본디 성악곡을 일컫는 말로 발라드와 동의어에 가까웠으나 18세기 이후 기악 로망스가 정착되었다. 세도막 형식 또는 론도 형식이 일반적이다. 클라라 슈만의 로망스(Op. 22)는 19세기 풍의 짙은 애수가 가득한 작품으로, 발표 당시부터 호평받았으며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다.

1853년에 작곡된 이 곡은 클라라 슈만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이다. 남편 로베르트 슈만은 이듬해인 1854년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자살을 시도하기에 이르렀고, 1856년에 향년 46세로 타계했다. 남편과 사별한 이후 클라라 슈만은 작곡 활동을 중단했다.

브람스: 피아노 트리오 3번 c단조, Op. 101

19세기 유럽에서 기악 음악의 역사는 베토벤이 남긴 딜레마를 극복하려는 투쟁의 역사이기도 했다. 베토벤은 낭만주의 시대를 열어젖힌 작곡가였지만, 낭만주의 시대의 ‘로망스적인’ 선율이 베토벤의 주제 발전 기법과 맞지 않았던 까닭이다.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리스트 등이 저마다 ’아이디어’를 짜내 문제에 도전했고, 바그너는 음악 외적인 요소인 ’드라마’를 음악과 결합해 새로운 방향에서 혁신을 이끌었다.

브람스는 섣부른 ’꼼수’를 쓰는 대신 베토벤의 유산을 극한까지 발전시킴으로써 문제를 정면 돌파했다. 브람스 음악의 낭만적 선율의 이면에는 짧은 음형을 씨앗으로 삼아 ’논리 전개’를 이어 가는 정교한 구조가 있으며, 훗날 쇤베르크는 이것을 ’발전적 변주’라 이름 붙였다. 또한 브람스 파벌이 바그너 파벌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교향곡 작곡에 신중했던 브람스를 옹호하는 논리로 ’고급 감상자는 실내악을 듣는다’는 속설이 생겨났고, 적어도 형식 논리 측면에서는 브람스가 베토벤의 진정한 계승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브람스 피아노 트리오 3번 c단조는 발전적 변주 기법이 모범적으로 나타나는 작품이다. 1악장 첫 마디에 제시되는 짤막한 음형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발전하며, 이로부터 1악장을 넘어 곡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여러 주제가 파생한다. 주제 발전은 소나타 형식의 발전부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곡의 시작부터 끝까지 꾸준히 나타나고, 그래서 이를테면 소나타 형식의 경과구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마치 새로운 주제가 나타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재현부는 제시부의 단순 반복이 아니라 제시부와 발전부의 음악적 논리가 전개된 결과로써 이음매 없이 등장한다.

세도막 형식으로 된 2악장과 3악장에서도 발전적 변주는 간소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소나타 형식으로 된 4악장에서 발전적 변주는 특히 리듬에 집중된다. 치밀한 음악적 논리가 이 모든 과정을 뒷받침한다.

2023년 9월 20일 수요일

브람스: 교향곡 3번 F장조

브람스와 각별한 친분이 있었던 당대의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은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Frei aber Einsam)'를 삶의 모토로 삼았다고 하며, 브람스는 이 모토의 머리글자를 딴 ‹F.A.E. 주제에 의한 소나타›를 작곡해 요아힘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브람스의 전기작가 막스 칼베크는 브람스가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를 살짝 비튼 '자유롭게 그러나 즐겁게(Frei aber Froh)'를 교향곡 3번의 모토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학술적으로 그다지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작품 곳곳에서 'F-A♭-F' 음형이 반복·변형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전체 악곡의 조성 계획 또한 이 음형과 무관하지 않다.

이 작품의 원 조성은 F장조이고, 2악장과 3악장은 C음을 으뜸음으로 하는 장·단조인데 여기서 C음은 F음의 딸림음(dominant)에 해당한다. 결국, 전체 악곡은 F-C-F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F-A♭-F라는 F단조 화음에 생략된 5음인 C가 악곡의 전개에 중요한(dominant) 역할을 맡고 있다. 게다가 4악장에는 F-C-F라는 거시적인 구조가 다시 한번 축약되어 있기도 해서 전체 악곡이 4악장을 향한 구조적 추진력을 부여한다.

'즐겁게'와 '고독하게'가 공존하는 1악장과 평화로운 2악장을 지나면, 3악장에서는 브람스의 장기라 할 수 있는 애수 가득한 c단조 선율이 느린 왈츠 리듬을 타고 나온다. '살짝 발랄하게'(Poco allegretto)라는 나타냄말이 반어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쓸쓸한 이 악장은, 그래서 템포를 얼마만큼 느리게 할 것인지가 지휘자의 숙제이자 관객의 감상 포인트이기도 하다. 또한 이 악장은 잉그리드 버그먼(잉그리드 베리만) 주연 영화 ‹굿바이 어게인›에 사용된 것으로 유명하며, 영화의 원작은 프랑수아자 사강이 쓴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이다.

변종 소나타 형식으로 된 4악장은 f단조에서 시작해 역동적인 과정을 거쳐 F장조로 나아가는 짜임새이다. 빠르고 꾸준한 템포로 달리다가 재현부에 이르면, 이제까지 쌓인 음악적 긴장감이 선명한 f단조에 의해 폭발함으로써 악곡의 전체 조성 구조가 절정에 이른다. 코다에 이르러 마침내 F장조가 회복되고, 이미 앞선 f단조 부분에서 모든 긴장을 폭발시켰으므로 일반적인 교향곡과는 달리 평화롭게 끝난다. 이때 연주가 완전히 멈춘 뒤 마지막 몇 초의 여운을 살리는 일은 관객의 몫이다.

2022년 12월 5일 월요일

브람스: 피아노 트리오 B장조, Op. 8

브람스는 자신이 20살 때 작곡한 피아노 트리오 1번을 36년 뒤에 새로 썼다. 그는 원곡의 길이를 상당 부분 줄이고 주제 선율을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는 등 적극적인 재창작 과정을 거쳤고, 그렇게 56살 거장의 손에 재탄생한 작품은 브람스 초기 양식을 유지하면서도 완숙하고 세련된 짜임새를 갖추게 되었다. 브람스 피아노 트리오 1번은 1854년 출판본과 1891년 출판본이 존재하며, 오늘날 흔히 연주되는 것은 1891년 판본이다.

소나타 형식으로 된 1악장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희망찬 주제로 시작한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때때로 단조 영역이 침투하지만, 끝내 1악장의 전체 조성인 B장조로 돌아와 밝게 끝난다. 스케르초와 트리오 형식으로 된 2악장에서 분위기는 반전된다. 조성은 b단조가 되고, 마치 슈베르트의 악마적인 스케르초를 순화한 듯 섬뜩한 에너지가 절제된 우아함과 공존한다.

세도막 형식으로 된 3악장에서 조성은 B장조로 돌아온다. 그러나 3악장을 이끄는 것은 1악장의 희망이 아니라 가슴의 응어리를 종교적으로 승화하는 듯한 코랄풍 주제이다. 중간 부분에서는 우울하고 서정적인 선율이 g♯단조로 나온다. 론도 형식으로 된 4악장에서 조성은 다시 b단조가 된다. 쫓기는 듯한 선율과 리듬이 4악장을 지배하며, 1악장의 희망을 소환하는 D장조 주제가 그에 맞선다. 그러나 음악이 흐를수록 단조 영역이 세를 넓히고, 격동하는 b단조가 끝내 승리를 선언한다. '순화된 슈베르트'의 우아한 비극으로 음악이 끝난다.

2020년 11월 20일 금요일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1번 '비의 노래'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글입니다.


이정경: 슈만이 죽고 클라라가 혼자 애들을 키웠잖아. 막내아들이 많이 아프다가 결국 죽었거든. 그 소식을 듣고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짧은 멜로디를 써서 편지를 보냈어. 그게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 2악장이야.

한현호: 그게 브람스식의 위로고 위안이었구나. 말보단 음악으로… 근데 직접 찾아서 위로해 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윤동윤: 브람스가 그런 행동파였으면 진작 클라라랑 이어졌게?

이정경: 브람스는 말보다 음악이 더 편했나 보지. 준영이처럼…

윤동윤: 근데 음악이 진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현호 말대로 진짜 슬프고 힘들 땐 말 한마디가 더 큰 힘이 되는 것 같은데…

채송아: 그래도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 음악이 위로가 될 수 있다고요. 왜냐면… 우리는 음악을 하기로 선택했으니까요.

얼마 전 종영한 SBS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은 이 드라마에 제법 중요한 소재로 나오는 작품이지요. 채송아(박은빈 분)가 박준영(김민재 분)의 반주로 이 작품을 연주하는 장면도 있지만, 음악이 스쳐 지나가는 소품 정도로 쓰였을 뿐 음악의 힘이 드라마를 이끌어 가게끔 연출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했습니다.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1번에는 ‘비의 노래’(Regenlied)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브람스가 가곡 ’비의 노래’에서 따온 선율을 3악장에 사용했기 때문인데, 브람스는 이 작품에 대해 “비 오는 저녁의 달콤씁쓸한 분위기”라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는 비 오는 장면이 때때로 극의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브람스 가곡 ‘비의 노래’ Op. 59 No. 3의 가사이자 클라우스 그로트(Klaus Groth, 1819~1899)가 쓴 원작 시는 이렇습니다.

쏟아져라, 비야, 쏟아져라, / 나 어릴 적 꾸었던 그 꿈에서 / 다시 한번 나를 깨워다오 / 빗물이 모래 속에서 거품 짓는 시간에!

(중략)

쏟아져라, 비야, 쏟아져라, / 우리가 문 앞에서 불렀던 / 옛 노래를 깨워다오 / 빗방울이 밖에서 소리치는 시간에!

나 다시금 듣고 싶어라 / 달콤하고 촉촉한 소리를 / 내 영혼 부드럽게 젖어들어라 / 어린이의 순수한 경외감에.

비 오는 저녁 느낌은 사실 1악장을 시작하는 선율에서부터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이사벨러 판 쾰런이 지난 2015년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이 곡을 연주했을 때, 저는 프로그램 노트에 이렇게 썼습니다. “브람스는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살살 녹는 첫 주제를 들으면 바로 알 수 있어요.”

브람스가 말한 ’달콤씁쓸한 분위기’는 1악장에서는 달콤함이 우세하고, 2악장에서는 씁쓸함이 우세합니다. 세도막 형식으로 된 2악장의 가운데 부분은 장송행진곡입니다. 3악장에서는 슬픈 선율로 시작해 조금씩 달콤함을 회복해 나가다가 슬픔을 새로운 희망으로 승화시키며 끝맺습니다.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첼리스트 한현호는 바이올린을 하는 사람은 다들 브람스 소나타 1번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또는 어쩌면 드라마를 본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이 곡을 더욱 좋아하게 되어서일까요? 11월 22일에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남훈, 12월 12일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이석중이 윤이상기념관에서 이 곡을 연주합니다. 아무쪼록 바이러스가 잘 통제되어서 두 공연이 무사히 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0년 7월 16일 목요일

브람스 소나타 E♭장조 Op. 120-2, 코다이 아다지오, 브루흐 콜 니드라이

브람스: 소나타 E♭장조 Op. 120-2

소나타 f단조와 소나타 E♭장조를 묶은 Op. 120은 브람스의 마지막 실내악곡이자 브람스 후기 음악 양식의 정수가 담긴 걸작이다. 본디 두 곡 모두 클라리넷 소나타였으며, 클라리넷 대신 비올라로 연주할 수 있도록 편곡된 악보 또한 출판되었다.

소나타 E♭장조는 1악장 제1주제를 느리고 포근한 선율로 시작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주제를 이루는 요소들이 정교한 논리로 변형·발전하면서 악곡이 이어지는데, 이것은 쇤베르크가 훗날 발전적 변주(developing variation)라 부른 기법으로 브람스 음악 언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1악장의 구조 자체는 비교적 깔끔한 소나타 형식으로 귀로 듣고 따라가는 데 그다지 어렵지 않다. 2악장은 겹세도막 형식, 3악장은 변주곡 형식이다. 그리고 브람스 음악 어법의 핵심이 ’발전적 변주’임을 생각할 때, 이 곡의 마지막 악장인 3악장이 변주곡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브람스가 남긴 더 장대한 변주곡도 여럿 있지만, 이 악장은 그리 길지 않으면서도 브람스 변주 기법의 정수를 훌륭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걸작이라 할 만하다.

코다이: 아다지오

헝가리 작곡가 졸탄 코다이가 부다페스트 음악원 재학 시절에 쓴 출세작이다. 코다이는 이후 헝가리 민요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그 성과를 작곡 활동에도 반영했는데, 이 작품은 그와는 사뭇 다르며 오히려 브람스 음악을 닮았다. 본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1905년 작품이었고, 작곡가가 1910년에 비올라와 피아노,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편곡을 내놓았다.

A-B-A’ 꼴 세도막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느리고 달콤씁쓸한 선율로 시작했다가 가운데 부분에서는 슬픔이 더욱 커진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맑게 반짝이는 피아노 아르페지오, 다채롭게 변화하는 셈여림과 빠르기 등과 더불어 마치 눈물이 별빛으로 승화하는 듯 탐미적인 음악적 연출이 두드러진다.

브루흐: 콜 니드라이

“모든 서약, 금기, 맹세, 봉헌, 코남, 코나 또는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건 […] 복되게 우리에게 올지어다.”

모세가 두 번째 십계명을 받아온 날에서 유래했다는 유대인 명절 ‘욤 키푸르’(속죄의 날 또는 신의 날)에 유대인들이 암송하는 전례문 또는 맹세문을 ‘콜 니드레이’(모든 서약)라 부른다. 독일 작곡가 막스 브루흐는 유대인이 콜 니드레이를 암송할 때 사용하는 곡조를 사용해 곡을 썼고, ‘콜 니드레이’(Kol Nidre)를 ‘콜 니드라이’(Kol Nidrei)라고 독일어 식으로 고쳐서 곡 제목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브루흐는 개신교인이었으며, 다만 유대인 음악을 ’색다른 요소’로 활용해 이 작품을 썼다.

콜 니드레이는 엄밀히 말하면 기도문이 아니지만, 이 작품에서 비올라(원곡은 첼로) 소리는 마치 비탄에 잠겨 기도하는 것처럼 들린다. 곡이 후반부에 이르면 마치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오는 듯한 주제가 나타나며, 비올라(첼로)가 그 빛에 이끌리듯 선율을 따라간다.

2020년 6월 22일 월요일

모차르트 클라리넷 퀸텟 A장조 K. 581 / 브람스 클라리넷 퀸텟 b단조 Op. 115

모차르트: 클라리넷 퀸텟 A장조 K. 581

“음악이 즐겁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레오폴트 모차르트)

모차르트 클라리넷 퀸텟은 1789년 작품으로, 작곡가의 삶이 경제적으로나 건강상으로나 개인사로나 본격적인 고난에 시달리던 시기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모차르트 음악에서 밝은 표정 뒤에 슬픔이 숨어 있거나 때로는 그 슬픔이 제법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즐거움으로 가득하고 슬픔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작품에는 또한 형식상의 파격이나 실험적인 음악 어법이 그다지 나타나지 않고, 때로는 파티용 유흥 음악인 세레나데 또는 디베르티멘토 느낌이 나기까지 한다. 소나타 형식으로 된 1악장에서도 그런 특징이 두드러지며 발전부마저도 가볍다. 발전부부터 1악장 끝까지를 한 차례 되풀이하는 점이 독특하다.

2악장은 클라리넷과 제1바이올린이 마치 깊은 밤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듯한 짜임새로 되어 있다. 3악장은 미뉴엣과 두 가지 트리오가 론도처럼 엇갈리는 형식이다. 내용적으로는 a단조로 된 첫째 트리오를 A장조로 된 다른 부분이 감싸는 짜임새이며, 클라리넷과 제1바이올린이 춤을 추는 듯한 A장조와 제1바이올린이 홀로 탄식하는 듯한 a단조가 대비된다.

4악장에서는 ‘반짝반짝 작은 별’ 선율을 쏙 빼닮은 해맑고 즐거운 주제가 변주된다. 3번째 변주에서 조성이 a단조로 일탈하는 것을 제외하면 조성은 A장조를 거의 벗어나지 않고, 5번째 변주에서 템포가 갑자기 느려지는 것을 제외하면 템포는 해맑은 ’작은 별’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브람스: 클라리넷 퀸텟 b단조 Op. 115

브람스 클라리넷 퀸텟은 작곡가 만년의 걸작으로 1891년에 작곡되었다. 교향곡을 실내악 편성으로 줄여놓은 듯한 텍스처, 그리고 정교한 형식논리 속에 낭만주의적인 ’드라마투르기’가 녹아 있는 점 등이 브람스답다.

이 작품의 1악장은 장조와 단조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이것이 어떤 ’이야기’를 매개하는 듯한 짜임새가 흥미롭다. 이를테면 b단조로도 D장조로도 볼 수 있는 바이올린 선율이 1악장을 시작했다가 비올라와 첼로가 나타나 b단조를 분명히 한다. 짧은 도입부가 끝나고 클라리넷과 함께 시작되는 제1주제는 D장조이며, 다시 비올라와 첼로가 주선율을 이끌면서 b단조로 되돌아간다. 1악장 전체 조성은 b단조이지만, 마치 비극 속의 작은 희망처럼 제2주제의 조성인 D장조의 영향력이 1악장 시작부터 나타난 듯한 짜임새이다.

2악장은 세도막 형식으로, 행복한 추억을 떠올리는 듯한 아련한 선율이 특징이다. 악보에는 ‘돌체’(부드럽고 달콤하게)라는 나타냄말이 붙어 있다. 가운데 부분에서는 조성이 B장조에서 b단조로 바뀌고, 탄식하는 듯한 클라리넷의 독백이 나온다.

3악장은 간소화된 소나타 형식이며, 내용적으로는 도입부-스케르초-코다 구성에 가깝다. 도입부에서는 D장조로 된 민요풍 선율이 마치 제1주제인 것처럼 제법 길게 이어진다. 조성이 b단조로 바뀌고 템포가 빨라지는 중간 부분은 조성 구조 등의 형식논리상 제시부-발전부-재현부로 구분되지만, 청감상으로는 리듬과 텍스처의 일관성이 유지되며 한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코다에서는 도입부 주제로 짧게 끝맺는다.

4악장은 변주곡 형식으로 되어 있다. 브람스는 변칙적인 리듬, 변칙적인 박절 구조의 대가이지만, 이 악장은 의외로 네 마디 박절 구조가 거의 바뀌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 샤콘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조성 또한 몇 마디쯤 장조로 일탈했다가 돌아오거나 제4변주에서 B장조가 되는 것을 빼면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b단조로 유지된다. 코다에서는 1악장 주제로 돌아온다. 조성은 b단조 속에 G장조가 섞여 있다. G장조는 다름 아닌 1악장 재현부 제2주제의 조성으로, 이것은 마치 음악이 비극으로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작은 희망을 미련처럼 부여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2024. 4. 19. 영문 번역 추가:

J. Brahms: Clarinet Quintet in B minor, Op. 115

Brahms’ Clarinet Quintet, composed in 1891, stands as a pinnacle of the composer’s later works. With a texture reminiscent of a symphony condensed into a chamber music setting, and a romantic narrative woven into intricate formal logic, the piece showcases Brahms’ distinctive style.

The opening movement of the quintet is marked by its ambiguity in key, blurring the lines between major and minor tonalities. The initial violin melody, initially heard in what could be perceived as either B minor or D major, is confirmed in B minor by the viola and cello. After a short introduction, the primary theme, introduced by the clarinet in D major, is led back to B minor by the viola and cello. While the overall tonality of the first movement is B minor, the influence of D major, the tonality of the secondary theme, persists from the beginning alongside the prevailing B minor tonality, akin to a glimmer of hope amidst tragedy.

In the second movement, structured in ternary form, a tender melody invokes nostalgia, underscored by the indication ‘dolce’. Transitioning from B major to B minor in the central section, the clarinet delivers a lamenting soliloquy.

The third movement adopts a simplified sonata form, but its storyline resembling an introduction-scherzo-coda structure. A folk-like melody in D major unfolds for quite a long time in the introduction, as if it were the primary theme of the sonata form. The tonality shifts to B minor as the tempo accelerates in the middle section, which can be divided into exposition-development-recapitulation in terms of tonal structure and other logic of sonata form, but this middle section feels like a single block in terms of cohesive rhythm and texture. It culminates in a brief return to the introduction theme in the coda.

The fourth movement is in theme and variation form. Although Brahms is a master of irregular rhythmic patterns and bar structures, he departs from it in this movement, opting instead for a consistent four-bar structure reminiscent of a chaconne. Almost the entire movement is predominantly in B minor, with fleeting excursions into major keys and the fourth variation into B major. The movement culminates with a return to the thematic material of the first movement in the Coda, intertwining G major among the predominant B minor. G major is none other than the tonality of the secondary theme in the recapitulation of the first movement, which evokes a sense of fleeting optimism amidst the overarching tragedy.

2019년 8월 29일 목요일

브람스: 피아노오중주 f단조 Op. 34

젊은 브람스가 초기 양식에서 벗어나 완숙한 기량을 보이던 시기의 걸작이다. 브람스는 처음에 현악육중주 편성으로 이 곡을 썼다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로 개작한 뒤 다시 피아노오중주 편성으로 완성했으며, 개작을 거듭하며 완성에 이르기까지 2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소나타 형식으로 된 1악장에서 브람스는 장조 영역을 사실상 무력화함으로써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소나타 형식에서 f단조 제1주제에 대응하는 제2주제의 조성은 흔히 D♭장조가 되는데, 이 곡에서는 얼핏 새로운 주제로 들릴 수 있는 경과구에서 딴이름한소리(C♯=D♭) 등으로 D♭ 장조를 내비치며 '가짜 제2주제' 역할을 하지만, 피아노가 이끄는 진짜 제2주제는 D♭장조가 아니라 딴이름한소리를 뒤집은 c♯단조로 나온다.

세도막형식으로 된 2악장은 이 곡에서 유일한 장조 악장으로, 서정적인 분위기가 1악장의 비극적이고 투쟁적인 색채와 대비된다. 단순한 구조에 비해 선율, 리듬, 화성이 단순하지 않으며 치밀하게 조직된 텍스처가 세련된 느낌을 준다. 스케르초와 트리오 짜임새로 된 3악장은 화성진행과 텍스처 등에서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영향이 동시에 느껴지는데, 베토벤다움이 슈베르트다움을, 빛을 향해 나아가는 목표지향성이 악마적 냉소를 중화시키는 것이 특징적이다.

론도 형식으로 된 4악장은 대체로 규칙적인 비트(beat)와 더불어 암울한 공기 속을 꾸준히 달려 나가는 짜임새이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제외하면 4악장에서 장조 영역은 없으며, 그렇게 비극으로 정해진 결말이 한 걸음씩 분명한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이따금 드러나는 희망이 반복되는 비탄과 냉소 속에서 질식하는 과정은 때로는 담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2016년 12월 29일 목요일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K. 304, 윤이상 바이올린 소나타,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2번,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통영국제음악당 공연 프로그램북에 실릴 글입니다.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21번 e단조 K. 304

"강요하지 않는 슬픔이 우리 귀를 휘감습니다. 태연한 얼굴로 가슴 아프게 하기, 바로 모차르트의 특기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인용할 만한 문구가 있을까 싶어 검색했더니, 중앙일보 김효은 기자님이 이렇게 쓰셨네요.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많이들 공감할 말이지요. 모차르트 음악은 밝으면서 이상하게 슬픈 느낌이 들고, 슬픈 듯하면서 또 밝아요. 때로는 슬프지 않은 척하는 표정이 눈에 보이는 듯해서 더욱 슬프기도 합니다.

모차르트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1778년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e단조 소나타를 썼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는 슬픔이 겉으로 제법 드러나는 편이지만, 슬픔을 감추려는 억지웃음 또한 음악에 가득한 점이 역시 모차르트답습니다.

윤이상: 바이올린 소나타

윤이상 음악 양식은 1975/76년부터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과 그에 따른 후유증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들 하지요. 이때부터 작곡가는 추상적인 구조보다는 음악 외적인 '메시지'를 음악에 담고자 했고, 그에 따라 더 자유로운 짜임새로 더 감성적인 음악을 쓰고자 했습니다. 바이올린 소나타는 작곡가가 죽기 4년 앞선 1991년에 남긴 작품입니다.

음악학자 볼프강 슈파러는 이 곡에서 바이올린이 작곡가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분석합니다. 그렇다면 바이올린 소리를 사람 목소리라 생각하고 음악을 들어 보세요. 바이올린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어도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목소리에 실린 감정만큼은 생생하게 느껴질 거예요. 이 곡에서 바이올린은 울고, 웃고, 고통받고, 절규하고, 탄식하고, 저항합니다.

곡 전체의 클라이맥스라 할 만한 곳에서 바이올린은 자꾸만 높은 음으로 노래하다가 끝내 '해탈'에 이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느껴지는 감정은 깨달음을 얻은 환희가 아닙니다. 그냥 세상 번뇌를 다 놓아버리는 것이 '해탈'의 실체인 듯해요. 그렇게 슬픈 카타르시스가 가장 높은 음에서 별빛처럼 아름답게 반짝입니다. 그리고 속세에 찌꺼기처럼 남은 먹먹함이 천천히 음악을 끝맺습니다.

2024. 9. 26. 수정 텍스트:

윤이상은 더 한국적인 (또는 동아시아적인) 울림을 담아내는 방향으로 자신의 음악 양식을 꾸준히 변화시켰다.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을 겪고 그 후유증에 시달리던 1975/76년 이후의 변화는 특히 뚜렷하다. 이때부터 작곡가는 추상적인 구조보다는 음악 외적인 메시지를 작품에 담고자 했고, 음악을 통한 '해탈'을 추구했으며, 그에 따라 더 자유로운 짜임새로 더 감성적인 음악을 쓰고자 했다.

유럽인의 시각으로 본 윤이상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더 많은 '협화음'을 작품에 허용하고 있었고, 이것은 최첨단 현대음악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음악에 담긴 동아시아적 요소를 서양인들은 그다지 섬세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일본이나 중국과 다른 한국적 요소에 관한 서양인의 이해는 더욱 얕을 수밖에 없었다. 윤이상의 음악은 더 쉬워지는 동시에 더 어려워졌다. 바이올린 소나타는 작곡가가 죽기 4년 앞선 1991년에 남긴 작품이다.

음악학자 볼프강 슈파러는 이 곡에서 바이올린이 작곡가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바이올린 소리를 사람 목소리라 생각하고 음악을 들어 보면 어떨까. 바이올린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어도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목소리에 실린 감정만큼은 생생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곡에서 바이올린은 울고, 웃고, 고통받고, 절규하고, 탄식하고, 저항한다.

곡 전체의 클라이맥스라 할 만한 곳에서 바이올린은 자꾸만 높은 음으로 노래하다가 끝내 '해탈'에 이른다. 그러나 여기서 느껴지는 감정은 깨달음을 얻은 환희가 아니며, 세상 번뇌를 다 놓아버리는 것이 '해탈'의 실체인 듯하다. 그렇게 슬픈 카타르시스가 가장 높은 음에서 별빛처럼 아름답게 반짝인다. 그리고 속세에 찌꺼기처럼 남은 먹먹함이 천천히 음악을 끝맺는다.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2번 A장조 Op. 100

이 작품은 브람스가 교향곡 4번을 초연한 이듬해인 1886년, 작곡가로서 명성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남긴 걸작입니다. 브람스는 적어도 형식적인 측면에서 베토벤을 가장 훌륭하게 계승한 19세기 작곡가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베토벤이 음악 유산으로 남긴 작곡 기법이 낭만주의 시대의 '노래하는 선율'과 맞지 않았던 딜레마를 브람스는 정면 돌파해 해결했지요.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2번은 정교한 구조 속에서 주제를 변화 · 발전시키는 일이 노래를 닮은 아름다운 선율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탁월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브람스 작품이 흔히 그렇듯, 이 곡은 그래서 악보를 분석할수록 그 짜임새에 탄복하게 됩니다. 브람스는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쓴 가곡들을 이 작품에 슬쩍 인용하기도 했는데, 얼핏 들어서는 알아채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편, 1악장 첫 세 음과 그에 딸린 화음이 바그너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중 '발터'가 부르는 노래 "Morgenlich leuchtend im rosigen Schein"(아침 햇살 장밋빛으로 빛나네)과 같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브람스가 이것을 일부러 인용한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제 생각에 브람스가 모르고 그랬다고 믿기는 어려워요. 브람스와 바그너 중 베토벤의 진정한 후계자가 누구인가를 놓고 유럽 음악계 전체가 '패싸움'을 벌인 역사적 사실까지 헤아리면 더욱 재미있죠.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

"[…] 오케스트라 전체를 감싸는 촘촘한 그물을 형성하며 매 순간 그 구조를 결정한다. […] 이러한 그물은 베토벤이 주제를 다루는 방식과 한 가지 근본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균형 잡힌 선율적 악절보다는 모티프의 논리에 의해 음악 형식이 이루어진다."

음악학자 카를 달하우스가 바그너의 라이트모티프(Leitmotiv)를 설명한 말입니다. 특정한 음악으로 인물 · 사건 · 감정 등을 떠올리게 하는 기법은 요즘에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곧잘 쓰이지요. 이것을 흔히 '라이트포티프'라고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연상작용만으로 라이트모티프라 할 수는 없어요. 달하우스가 설명한 것은 주제를 발전시키는 방법이고, 결국 베토벤 음악 어법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엮여 있습니다.

라이트모티프에서 '드라마'를 빼고 나면 세자르 프랑크가 사용한 주제 발전 기법이 됩니다. 주제 선율의 원형을 중심에 놓고 주변 요소를 그물망처럼 엮어 바꿔나가면, 듣는 사람이 인지할 수 있을 만큼 적당히 달라진 선율과 리듬이 자꾸만 되풀이되면서 음악의 뼈대가 형성되지요. 바그너는 사실 리스트가 사용한 기법을 받아들였고, 프랑크는 리스트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기법을 개발했습니다. 소수 의견이지만 리스트보다 프랑크가 먼저라는 주장도 있어요.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는 이런 음악 어법이 원숙한 형태로 나타나는 작품입니다. 1악장에 나오는 주제 선율이 다른 악장에서 달라진 모습으로 되풀이되지요. 서늘하고 쓸쓸한 바이올린 소리와 두텁게 쌓인 화음으로 신비롭게 들리는 피아노 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 악장의 즐거운 돌림노래가 백미입니다.

2016년 10월 1일 토요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 베토벤 교향곡 3번

통영국제음악당 공연 프로그램북에 실릴 글입니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 77

브람스는 이 곡을 쓰면서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고 하지요. 작품에서 때로 느껴지는 즉흥적인 충동이 그 결과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풍부한 감성의 이면에 치밀한 논리가 있는 것이 브람스 음악의 특징인데, 이 작품에서는 논리와 충동의 긴장 관계가 나타난다고요.

브람스는 1악장 제시부에 4가지 주요 주제를 사용했습니다. 소나타 형식에 흔히 나오는 제1주제, 제2주제와 더불어 종결구 주제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오케스트라 제시부에 없던 제3주제를 독주 바이올린이 제시하지요. 그런데 제2주제는 제1주제와 조성 관계로 구분되면서도 얼핏 제1주제와 비슷하게 들리기 때문에 자칫 헷갈릴 수 있습니다. 오히려 격렬한 종결구 주제가 앞선 주제군과 대조됩니다.

독주 바이올린이 처음 나오는 대목은 살짝 카덴차 느낌으로 앞서 말씀드린 즉흥적 충동이 두드러집니다. 격렬한 음형과 극적인 전개가 마치 기악 레치타티보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이 음형은 제1주제를 변형시킨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좀 더 뒤로 가서야 독주 바이올린이 제1주제를 온전히 제시합니다. 제2주제와 제3주제로 이어지는 과정 또한 제법 복잡합니다.

2악장은 세도막 형식, 3악장은 론도형식으로 1악장과 견주면 나머지 악장은 단순한 편입니다. 2악장에서는 애수 가득한 선율이 매력적이고, 3악장에서는 독주자의 불꽃 튀는 테크닉과 신나게 달리는 오케스트라가 흥미진진한 한판 대결을 펼칩니다.

베토벤: 교향곡 3번 E♭장조 Op. 55 ‘에로이카’

‘에로이카’(영웅)라는 제목의 유래에 관해 오늘날 정설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베토벤의 제자였던 페르디난트 리스가 한 말입니다. 표지 제목에 ‘보나파르트’를 이탈리아식 철자로 쓰고 하단에 자신의 이름 또한 이탈리아식으로 ‘루이지 판 베토벤’이라 쓴 악보를 봤다고요. 그리고 널리 알려진 것처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베토벤은 격분해서 그 표지를 찢어 버렸다고 하지요.

아마도 베토벤의 자필 악보였을 그 악보는 유실되었습니다. 그 대신 베토벤이 감수한 필사본이 남아 있는데, 표지에는 ‘보나파르트’라고 썼다가 지운 흔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박박 지웠는지 종이에 구멍이 나 있다지요. 베토벤은 나중에 ‘보나파르트’ 이름을 필사본에 다시 썼고, 악보를 출판하면서는 제목이 ‘보나파르트’가 맞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제목에 흥미를 느낄 것이라고도 했고요. 그러나 베토벤은 결국 제목을 ‘에로이카’로 확정했습니다.

이 작품의 짜임새는 제목만큼이나 장대합니다. 1악장만으로도 당시에 연주되던 어지간한 교향곡 전체 길이와 맞먹을 정도이지요. 악상을 전개하는 방식 또한 파격적입니다. 베토벤은 이 작품에서 단순 명료함을 미덕으로 여기던 고전주의 음악 양식에서 벗어나, 화성적 · 조성적 안정성을 계속 뒤로 미루면서 그야말로 ‘영웅의 투쟁’처럼 파란만장한 짜임새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완전히 새로운 음악에 충격을 받았고, 새로운 작곡 기법은 19세기 서양음악사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되었습니다.

음악학자 베리 쿠퍼는 이 작품의 내러티브를 영웅의 삶(1악장) → 영웅의 죽음(2악장) → 영웅의 부활(3악장) → 신격을 얻는 영웅(4악장)으로 보았습니다. 2악장이 장송행진곡인 까닭을 설명하는 해석으로 참고할 만하지만, 제 생각에 3악장을 ‘부활’로 보는 건 좀 억지스러워요. 이를테면 3악장을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4악장에서는 발레 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피날레 주제를 따서 쓰고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진흙상을 사람으로 만들어 파르나소스 산으로 데려간다는 줄거리인데, 베리 쿠퍼는 ‘폭풍 → 진흙상 → 생명을 얻음 → 신격을 얻음’ 짜임새가 ‘에로이카’ 4악장에 비슷하게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는 ‘폭풍’에 이은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주제가 베이스 성부만으로 시작해 조금씩 온전한 형태를 갖춘 다음 변화하고 발전하지요.

베토벤은 공화정을 완성할 ‘현실의 프로메테우스’로 나폴레옹을 지목했고, 신화 속에서 프로메테우스의 도움으로 사람이 문명을 깨우친 것처럼 현실의 인류 또한 예술과 학문으로 신의 광휘에 끝없이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작품의 조성은 거룩한 음악에 곧잘 쓰이던 E♭ 장조이며, 특히 4악장에서 E♭ 장조 화음이 찬란함을 더해 가는 과정이 백미입니다.

이 작품을 연주할 때 베토벤 당시보다 오케스트라 크기를 늘리고, 당시 금관악기로는 낼 수 없던 음을 덧붙여 연주하는 등 웅장함을 부풀리는 관습이 특히 20세기에 유행했지요. 그러나 요즘에는 되도록 악보 그대로 연주하려는 경향이 우세합니다. 하노버 NDR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앤드루 맨지 또한 그런 추세를 이끌어 왔지요. 음악학자들이 새로 밝혀낸 것들이 반영될 이번 연주는 어떨지 기대 됩니다.

2013년 7월 8일 월요일

작품 설명: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서곡,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 책자에 실릴 글입니다.

▶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서곡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는 성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왕과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히브리 백성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나부코'라는 이름은 '느부갓네살'을 이탈리아식으로 축약한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지요. 이번에 경기필이 연주할 서곡에도 그 선율이 담겨 있습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히브리가 전쟁에서 바빌로니아에 패합니다. 예루살렘 왕의 조카인 이스마엘레는 예루살렘에 인질로 잡혀 온 바빌로니아의 페네나 공주와 사랑하는 사이로, 페네나를 탈출시키고 싶어합니다. 페네나의 언니인 아비가일레는 히브리 포로를 모두 풀어줄 테니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말하지만, 이스마엘레는 거절합니다. 자카리아는 솔로몬 성전을 파괴하려는 나부코 군대에 맞서 페네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인질극을 벌이고, 이스마엘레가 페네나를 구합니다.

아비가일레는 자신이 노예의 몸에서 태어났으며, 나부코 왕이 페네나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포로로 잡혀 온 자카리아는 페네나에게 유대교 율법을 가르치고, 페네나를 구한 이스마엘레를 히브리 사람들 앞에서 변호합니다. 한편, 나부코는 자신이 신이라고 선언했다가 벼락을 맞고 쓰러집니다. 아비가일레가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페네나가 포함된 히브리 포로를 처형하고자 제정신이 아닌 나부코에게 승인 서명을 받아냅니다. 뒤늦게 사실을 깨달은 나부코가 아비가일레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겠다고 협박하지만, 아비가일레는 증거를 없애고 나부코를 감금합니다. 노예가 된 히브리 포로들이 조국을 그리워하며 노래합니다.

페네나가 형장으로 끌려갈 때, 나부코가 제정신을 차리고 히브리 신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충신 압달로가 부하를 거느리고 나타납니다. 나부코가 앞장서며 페네나와 히브리 사람들을 구하고, 바빌로니아 신상이 저절로 부서집니다. 나부코는 히브리 사람들을 풀어 주고, 바빌로니아 백성으로 하여금 히브리 신을 찬양하게 합니다. 아비가일레는 독약을 마시고, 페네나와 이스마엘레에게 용서를 구하며, 히브리 신에게 자비를 구한 뒤 죽습니다.

▶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작곡가가 최초 구상 후 개정하는 과정에서 교향곡이 될 뻔했던 작품으로, 일반적인 협주곡과 달리 교향곡처럼 몰아치는 관현악에 피아노가 홀로 맞서야 하는 까닭에 협연자에게 엄청난 도전이 되는 작품입니다. 특히 1악장은 짜임새도 매우 길고 복잡해요.

1악장은 확장된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시부―발전부―재현부'를 기본 형태로 하는 소나타 형식에 관해 대충 아시는 분이라면, 강렬한 오케스트라 총주에 이어 여리게 흐르는 대목을 제시부 제2 주제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소나타 형식의 짜임새를 분석하려면 음 소재, 텍스처, 조성 구조 등을 복합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여러 주제로 된 '제1 주제군(thematic group)'이 한참 더 이어지고, 피아노가 처음 나올 때에도 제1 주제군을 이어가지요. 마침내 피아노 독주로 나오는 제2 주제는 느리고 달콤합니다.

▲ 1악장 제2주제

2악장은 그냥 편하게 들으면 됩니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애틋한 추억 한 자락,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보세요. "잘있나요? 저는 잘있어요!"

브람스는 자필 악보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Benedictus qui venit in nomine Dominus)"라고도 썼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말씀으로 레퀴엠 가사로도 곧잘 쓰이는 구절이지요. 이 곡을 쓰는 동안 브람스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슈만이 죽음을 맞기도 했습니다.

3악장은 들뜬 분위기로 마구 달리는 즐거운 악장입니다. 론도 형식으로 A―B―A'―B'―푸가―A"―B"―카덴차―종결구 꼴 짜임새이고, 론도 주제(A)와 에피소드 주제(B)는 잘 들어보면 음악적 뿌리가 같지요. 사실은 1악장 제2 주제와도 뿌리가 같습니다. 푸가에서는 론도 주제와 에피소드 주제가 뒤섞이면서 마치 소나타 형식의 발전부와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가만 보면, 3악장 짜임새가 론도 형식이면서도 소나타 형식과 닮은꼴이기도 하지요! 종결구에서는 에피소드 주제(B)와 론도 주제(A)가 느리게 나온 다음, 곧바로 결승점으로 마구 달려갑니다. 마지막에 짧은 카덴차가 또 나옵니다.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곡을 통틀어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곡이지요. 구소련에서는 스탈린상을 받은 이 작품을 공산당을 찬양하는 걸작으로 선전해 왔지만, 오히려 이 곡은 스탈린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읽을 수 있는 양면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과 관련해 기막힌 사연이 있어요. 쇼스타코비치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부인》을 발표했다가 스탈린 정권에 단단히 밉보입니다. 스탈린이 그 공연을 관람하고는,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서 쇼스타코비치를 직접 비판했거든요. 작품 속에 부패한 소련 경찰이 등장하는 등 스탈린의 심기를 거스르는 내용이 있기도 합니다. 서슬 퍼렇던 스탈린 정권 때 그런 일이 있었으니, 작곡가가 얼마나 큰 위협을 느꼈을지 짐작할 수 있겠죠?

그래서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4번 발표를 미루고 5번 교향곡을 작곡해 먼저 발표합니다. 베토벤 교향곡 5번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어둠에서 광명으로’ 짜임새를 사용하고, 어마어마한 승리의 팡파르로 곡을 끝맺었지요. 스탈린 정권은 이것을 '공산당의 위대한 승리'로 받아들였나 봅니다. 그러나 훗날 밝혀진 여러 증거는 예술가를 탄압하는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이 작품에 담겼음을 시사합니다.

1악장은 현악기의 돌림노래로 시작합니다. 목놓아 울부짖는 듯한 이 대목은 소나타 형식의 도입부, 그리고 바로 이어 나오는 바이올린의 느린 선율이 제1 주제라 할 수 있겠는데, 이곳에 나온 음형이 곡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제2 주제에 해당하는 음형은 도입부 음형과 뿌리가 같아요. 그러니까 첫 열두 마디쯤이 조각조각 나뉘어 1악장이 끝날 때까지 변형, 발전하는 짜임새입니다. 사실은 곡이 끝날 때까지 이 음형이 계속 변형되어 나오지요.

골치 아픈 얘기를 더 늘어놓지는 않을게요. 스탈린 시대 러시아를 상상하면서 들어 보세요.

▲ 1악장 바이올린 악보 1~14마디. 연필로 써놓은 흔적은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의 해석이며, 출처는 뉴욕필 디지털 도서관(http://archives.nyphil.org).

2악장에서는 무시무시한 냉소가 음악을 지배합니다. 작곡가가 일부러 듣기 싫게 잔뜩 꼬아놓은 음표로 가득해요.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대목이 없다시피 하므로, 집중해서 '시퍼렇게 날을 세워' 연주해야 제맛이 나는 악장입니다. 세상이 어딘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생각에 공감하고 분노해야만 이 악장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3악장은 현을 중심으로 서럽게 울어대는 악장입니다. 금관악기는 아예 나오지 않고, 가끔 목관악기와 하프가 거드는 정도이지요. 울다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게 아니라, 그냥 목놓아 울고 나서 허무하고 쓸쓸하게 끝납니다.

4악장은 '혁명이다!' 이 한 마디로 설명이 됩니다. 문제는 이 혁명이 어떻게 끝나느냐인데요, 앞서 이 작품이 스탈린 정권을 찬양하거나 비판하거나, 어느 쪽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양면적인 작품이라 했지요. '혁명'의 끝 또한 어느 쪽인지 애매합니다. 빛나는 승리일 수도 있겠지만, 또 어찌 들으면 그저 뜬금없고 과장되기만 한 정신승리 같기도 하거든요.

4악장 종결구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끝없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D 장조 으뜸화음입니다. 으뜸화음이 무려 74마디 가까이 음악을 지배하지요. 물론 중간에 화음이 조금씩 바뀌기는 하지만, 금관악기가 연주하는 주선율이 다른 화음을 불러올 때에도 현악기와 목관악기가 거의 같은 음을 고집스럽게 연주하면서 으뜸화음의 '중력권'을 벗어나지 않게끔 합니다. 말러 교향곡 1번이 비슷하게 끝나는데, 아마도 쇼스타코비치가 말러를 흉내 냈을 거예요.

2011년 10월 5일 수요일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브람스 교향곡 1번》 연주회 (지휘: 구자범 · 협연: 장성)

poster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브람스 교향곡 1번》 연주회

  • 2011년 10월 14일 금요일
  • 경기도문화의전당 행복한대극장
  • 중학생 이상 입장가
  • 입장권: A석 3만원 / B석 2만원

프로그램

  • 본 윌리엄스 ―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 라벨 ― 피아노 협주곡 G장조 (협연: 장성)
  • 브람스 ― 교향곡 1번 c단조

본 윌리엄스 ―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레이프 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 1872-1958)는 이름 표기를 주의해야 할 음악가이다. 영어 이름 "Ralph"는 '랄프' 또는 '레이프'라고 읽는데, 본 윌리엄스의 둘째 아내 우르술라가 쓴 전기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레이프'[Rayf]로 읽어야 한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은 16세기 영국 작곡가 토머스 탈리스(Thomas Tallis)가 쓴 찬송가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교회선법을 따르는 정선율(cantus firmus)과 16세기식 대위법, 아멘 종지(plagal cadence) 등으로 나타나는 고음악 양식에 영화 《반지의 제왕》에 배경음악으로 써도 어울릴 듯한 영국풍 선율이 더해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이 모든 것이 현대적인 음악 어법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본 윌리엄스 음악 양식을 이룬다. 화성과 조성 구조는 후기 낭만주의의 반음계적 어법과 통하며, 불균등하고 불규칙한 악구(phrase) 구조는 영국 음악 전통에서 유래했으면서도 20세기 초 음악사적 흐름과도 맞닿는다.

그런가 하면 작곡가가 교회 오르간 연주자였던 만큼 16~17세기 영국 오르간 소리를 흉내 낸 대목이 작품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 작품은 현악 사중주단과 현악 오케스트라, 그리고 현악 연주자 2-2-2-2-1명으로 이루어진 제2 오케스트라로 편성되어 있고, 음악학자 에드윈 에반스(Edwin Evans)를 좇자면 이것은 영국 오르간을 이루는 서로 다른 건반들(Solo, Great, Choir)에 각각 해당한다. 본 윌리엄스는 제2 오케스트라를 제1 오케스트라와 되도록 떨어트려 놓으라고 지시했는데, 이것이 오르간 음향 효과를 얼마만큼 재현할지는 연주회장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라벨 ― 피아노 협주곡 G장조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는 라벨이 1929~31년 사이에 쓴 곡으로 작곡가의 후기 음악 양식이 잘 드러나 있으며, 밝고 즐거운 선율과 재즈 리듬, 화려한 음색, 바스크 지방의 민속음악적 요소 등이 특징적이다. 바스크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걸쳐 있는 지방이며, 라벨은 바스크계 어머니에게서 음악적인 영감을 받은 듯하다. 음악학자 이내선은 이 작품을 두고 "그 음악적인 성격으로 보아서 바스크 광시곡[rhapsody]이라 해도 무방하다"라고 논평했다.

라벨은 관현악법의 대가로 화려한 색채를 음악에 담아내는 능력이 탁월한 작곡가였다. 이 곡에서는 프랑스 음악 양식과 스페인 음악 양식이 어우러진 음 소재가 화려한 관현악법을 만나 더욱 빛나며, 채찍과 우드블록(Wood Block), 탐탐, 트라이앵글 등 다양한 타악기가 쓰이기도 했다. 이 곡은 또한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만큼 악기 하나하나에 까다로운 기교를 요구한다.

라벨이 이 작품에 재즈 리듬을 사용한 일은 재즈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으며, 이것을 두고 라벨은 “재즈는 현대 작곡가에게 매우 풍부하고 생생한 영감의 원천이며 재즈에 영향 받은 미국 작곡가들이 너무도 적다는 사실이 놀랍다”라고도 했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한국에서 영재 교육을 착실히 밟고 현재 독일에서 활동 중인 젊은 피아니스트 장성 씨가 협연을 맡는다. 지휘자 구자범이 이끄는 젊은 오케스트라 경기필이 어떤 해석으로 보여주게 될지 기대 된다.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는 음악 만화·드라마로 국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던 『노다메 칸타빌레』 (니노미야 토모코 원작, TV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등으로도 알려짐) 전체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곡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브람스 ― 교향곡 1번 c단조 작품 68

브람스 교향곡 1번은 양식적·미학적으로 베토벤 교향곡을 계승한 작품이다. 당시에 이름난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우는 이 작품을 두고 '베토벤 교향곡 10번'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말은 베토벤의 아류라는 뜻이 아니라 베토벤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극찬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피날레 주요 주제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피날레 주요 주제와 닮은꼴이며, 도입부는 베토벤 교향곡 5번 제1 주제와 닮은꼴이다.

베토벤은 고전주의를 완성하고 낭만주의 시대를 열어젖힌 작곡가이며, 그 뒤로 베토벤은 후대 작곡가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었다. 따라서 베토벤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베토벤의 '후계자'라는 호칭을 얻는 일이 당시 작곡가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브람스―한슬리크 진영과 바그너 진영이 파벌 싸움을 벌인 일은 널리 알려졌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와 관련한 논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베토벤은 고전주의를 넘어서 낭만주의 시대를 열었지만, 한편으로는 낭만주의적 선율과는 맞지 않는 모티프 변형 기법을 유산으로 남겼다. '베토벤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작곡가마다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닮은 도입부 선율을 발전부에서 앞세워 펼쳐 나가며 베토벤을 흉내 냈다. 멘델스존은 달콤한 가락을 대위법으로 겹쳐 베토벤을 이으려 했다. 리스트와 프랑크는 모티프 원형을 중심에 놓고 주변 요소를 네트워크로 묶어 바꿔나가는 기법을 개발했고, 바그너는 리스트를 흉내 냈다. 슈만은 짧게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아이디어로 '사투'를 벌였다.

브람스는 '편법'에 매달리지 않고 정공법을 썼다. 베토벤의 모티프 변형 기법을 극한으로 발전시킨 것이 그것이며, 쇤베르크는 이것을 '발전적 변주'(developing variation)라 이름 붙였다. '모범답안'을 내놓은 브람스는 작곡 기법만 따진다면 누구나 인정할 만한 베토벤의 후계자가 되었다.

협연자 : 피아니스트 장성

1986년생, 현재 하노버 국립음대 실내악 석사, 피아노 최고 연주자 과정 중
독일 하노버 국립음대 피아노 전문 연주자 과정 졸업 (블라디미르 크라이네프 사사)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사 졸업 (임종필 사사)
한국예술종합학교 16세 영재 입학
예원학교 수석 입학

Chopin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2011(Germany) 1등, 청중상
Valsesia Musica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Italy) 1등
KIMF Competition (U.S.A) 1등
Schubert International Piano Duo Competition (Czech) 1등, 슈베르트 특별상
Nagoya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Japan)최연소 1등, 일본 엑스포협회상, 실내악상
중앙일보콩쿠르, 난파음악콩쿠르, KBS신인음악콩쿠르 1등

KBS교향악단,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전시향, KNUA 심포니오케스트라 등 협연

지휘자 : 구자범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 후 동 대학원 철학과 재학 중 도독
독일 만하임 음대 대학원 지휘과 졸업
독일 하겐 시립 오페라 극장, 다름슈타트 국립 오페라 극장 지휘자
하노버 국립 오페라 극장 수석 지휘자
광주 시립교향악단 지휘자
현,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 티켓 예매 ―

인터파크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MN=Y&GoodsCode=11012294

2011년 6월 28일 화요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9번 /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 슈트라우스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 휴 울프 / 서울시향

2011-06-03 오후 08:0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 휘 : 휴 울프
바이올린 :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프로그램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9번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슈트라우스,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을 15곡 남겼다. 그러나 9번 교향곡을 들어보면 쇼스타코비치가 '9번의 저주'를 의식했음을 역설적으로 알 수 있다. 베토벤 이래 교향곡 9번이라 하면 작곡가가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운 진지한 작품, 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작품 등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런데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9번은 숫자가 주는 상징성과는 달리 유머로 가득하다. 웃음으로 저주를 물리치고자 했다는 뜻이다. 번스타인은 '9번'이라는 숫자 자체가 이 작품에서는 유머라고도 했다.

분위기가 가벼워서인지, 이 작품은 지휘자가 개성을 드러낼 만한 대목이 좀처럼 없다. 음반을 들어 봐도 비슷비슷한데, 지휘자 휴 울프는 그래도 나름대로 자기 색깔을 넣고자 노력하는 듯했다. 2악장 템포를 악보에서 지시한 ♩= 208보다 두 배나 느리게 잡은 대목은 그다지 특이하지 않다. 그런데 마디를 잘게 나눠 박자를 저어준 대목은 참 인상 깊었다. 템포가 이처럼 느리면 리듬이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이른바 '만득이 현상'이 일어나기 쉽다. 이 문제를 가장 손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휴 울프처럼 해주는 것이지만, 모양새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더 좋은 앙상블을 이끌어 내고자 지휘자가 그만큼 노력했다는 뜻이니 칭찬해 마땅하다.

휴 울프는 단원들에게 맡겨도 될 만한 독주 악구까지 지휘봉으로 모두 통제하는 듯했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4악장에서 5악장으로 넘어갈 때 템포 변화였다. 악보에서 지시한 템포는 4악장 ♪ = 84, 5악장 도입부 ♩= 100이다. 4악장에서 5악장으로 곧바로 넘어가면서 바순 독주가 갑자기 템포를 바꾸고 리듬도 빨라진다. 점잖은 유머다. 그러나 휴 울프는 이 대목을 좀 더 매끄럽게 다스리고 싶었나 보다. 4악장에서 5악장으로 넘어가면서 템포 변화를 거의 주지 않았고, 주제 선율이 두 번째로 되풀이될 때에 아첼레란도를 주었다. 현악기가 주제 선율을 받을 때에는 악보에서 지시한 ♩= 100보다 좀 더 빠른 ♩= 120쯤으로 달렸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9번만큼 멋진 바순 독주가 있는 관현악곡은 드물다. 바순은 다른 악기와 섞이면 존재감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바순은 독주 악기라기보다는 다른 악기와 섞어서 음색에 변화를 주는 악기이며, 이런 바순에 독주를 맡기려면 다른 악기를 조심해서 써야 한다. 오케스트라 바순 주자에게는 억울한 일이다. 그런데 이날 오랜만에 곽정선 수석이 멋진 솜씨를 뽐냈다. 곽정선은 얼마 전까지 직책이 수석대행이었지만, 이번에 시향 홈페이지에 가 보니 수석으로 바뀌었다. 연주가 끝나고 지휘자가 곽정선을 홀로 일으켜 세운 일만 세 차례나 되었다.

또 지금은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수석이 된 전임 트럼펫 수석 알렉상드르 바티가 오랜만에 객원으로 솜씨를 뽐냈다. 트롬본 수석 노릇을 한 객원 연주자도 훌륭했는데, 누군가 싶어서 알아보니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 앙투안 가네(Antoine Ganaye)라고 한다. 2악장에서 클라리넷 수석 채재일과 함께 멋진 연주를 들려준 못 보던 클라리넷 연주자가 있어서 시향 홈페이지에 가 보니 이름이 정은원이다. 3악장에서 피콜로를 연주한 장선아도 훌륭했다.

슈트라우스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에서는 E♭ 클라리넷을 연주한 임상우 부수석이 돋보였다. 본디 악보에는 D조 클라리넷으로 연주하라고 나오지만, 이 악기는 요즘 거의 사라진 탓에 E♭ 클라리넷으로 이조해 연주하는 일이 보통이다. 지난해 3월 스테판 애즈버리 지휘로 같은 곡을 연주했을 때에도 임상우가 E♭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이날도 그때처럼 곧고 날카롭고 빈틈없는 소리가 멋졌다.

지난해 연주와 견주자면 이날 앙상블이 좀 더 깔끔했지 싶다. 그날 몇몇 연주자들이 실수했던 대목이 이번에는 모두 말끔하기도 했다. 다만, 매끄럽고 균형 잡힌 소리 때문인지 음향 효과를 과감하게 살리는 맛은 조금 모자랐다. 템포 변화도 애즈버리와 견주면 평면적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가 녹음한 협주곡 음반을 들어 보면, 바이올린 소리가 작아서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지 못해 답답하다는 느낌이 든다. 아티큘레이션에서도 절제가 묻어난다. 그런데 이날 브람스 협주곡을 들어보니 음반과는 달리 남들보다 소리가 아주 조금 작을 뿐이었다. 이날 연주는 모든 면에서 이성과 감성이 브람스답게 조화를 이룬 명연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악기를 온몸으로 연주하는데 소리가 저렇게밖에 안 난다고? 현대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더니 그 때문일까?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과연, 소리가 작은 악기인데 테츨라프라서 티가 덜 나는 것이란다. 현 네 줄에서 뽑아내는 음색이 테츨라프만큼 고른 연주자도 없는 듯한데, 이 또한 악기 때문일까, 아니면 연주법에 무슨 비밀이 있을까? 테츨라프가 쓰는 그라이너 바이올린이 모델로 삼았다는 과르네리 바이올린을 테츨라프가 연주하면 어떨지 궁금하다. 또는, 옛날에 썼다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으로 브람스 협주곡을 연주하면 어떨지도 궁금하다.

2009년 8월 28일 금요일

2007.12.27.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 교향곡 4번 - 넬손 프레이리 / 정명훈 / 서울시향

2007년 12월 27일(목)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넬손 프레이리 (Nelson Freire, 피아노)

Brahms : Piano Concerto No. 2 in Bb Major, Op.83 (44')
Brahms : Symphony No. 4 in e minor, Op.98 (39')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협주곡 1번과 마찬가지로 협주곡이라기보다는 교향곡에 가깝다. 이 때문에 협연자는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음량에 맞서 일단 살아남아야 하며, 연주 테크닉 또한 매우 뛰어나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브람스 음악이 가진 치밀하고 논리적인 구성을 풍부한 감성으로 풀어내는 일도 만만치 않다. 이처럼 연주자가 삼중고를 떠안아야 하는 까닭에 매우 유명한 작품인데도 국내에서 연주되는 일이 거의 없다.

넬손 프레이리의 피아노 연주는 여러모로 지난 5월 18일에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개리 그래프만을 떠올리게 했다. 커다란 밑그림이나 악상의 자연스러운 흐름, 다양하고 적절한 음색 등은 훌륭했으며, 이 점에서는 지난 2005년 11월에 리카르도 샤이가 지휘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여 음반으로도 나온 명연과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실수가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리듬이 곧잘 망가지곤 하는 것이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다 싶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손가락 골절 때문에 제 실력을 내지 못했단다.

아픈 손가락으로 이렇게까지 연주해낸 것을 보면 역시 일류 연주자라 하겠지만, 아무래도 정명훈과 서울시향은 뒷감당하느라 고생이었다. 오케스트라 소리를 되도록 작게 내려고 벌서는 듯 연주하기 일쑤였고, 어택(attack)을 죽이고 여린 음에 크레셴도를 주는 식으로 협연자를 배려하기도 했다. 피아노 리듬이 망가질 때마다 정명훈이 재빨리 수습하려고는 했으나 서울시향은 아직 그런 돌발사태에 재빨리 대처하는 능력은 충분히 기르지 못한 모양이라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서로 발목을 잡기도 했다. 3악장 첼로 독주가 매우 뛰어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밤베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 출신 객원이었다고 한다.

앙코르로 연주한 글룩의 "멜로디"(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가운데 '정령들의 춤'을 스감바티(Giovanni Sgambati)가 피아노곡으로 편곡)는 여린 음만으로 그윽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어 손가락 골절을 손쉽게 감추어주는 영리한 선곡이었다.

브람스 교향곡 4번은 특히 1악장에서 여러 성부가 조각조각 정교하게 맞물리는 독특한 텍스처 때문에 앙상블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멍덩한 소리가 되어버릴 위험이 있는데, 이날 연주가 이따금 그랬다.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기운이 빠져버렸던 것일까. 결코 졸연은 아니었지만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치고는 뭔가 좀 모자란 듯했다. 물론 이것은 연주회장 탓도 크다. 소리가 무뎌지곤 했던 것은 단원들이 큰 실수를 해서가 아니라 미세하게 리듬이 서로 어긋나거나 순간적으로 밸런스가 안 맞거나 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연주회장의 음향이 개선되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렵다고 본다.

팀파니 소리가 이날따라 이상했으며, 악기에 이상이 생긴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을 만큼 평소 실력에 못 미치는 연주였다. 오케스트라 총주를 휘감아 올라 결정적인 '한 방'으로 터트리지 못하고 자신감 없이 뒤로 빠질 때도 더러 있었다(이를테면, 마디 129). 저음 현 또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왠지 끌려다니는 듯했다. 작품에 담긴 '다크 포스'를 4악장에 몰아서 '거대한 크레셴도'를 만들어내려고 지휘자가 의도한 것은 아닐까도 잠깐 생각해보았으나, 또 달리 생각하면 마에스트로가 1악장을 그렇게 간단히 희생시키려고 했을 리는 없다.

2악장은 템포가 대략 ♪= 60 정도로 꽤 느렸는데, 3악장의 빠른 템포와 대비시키는 것은 크게 보면 타당한 해석이라 하겠으나 느린 만큼 집중력 있는 앙상블이 뒷받침되지 못해서 설득력을 충분히 얻지는 못했다. 마디 84에서는 힘없는 클라이맥스가 되었고, 마디 88에서는 바이올린이 흐느끼는 듯한 소리는 좋았으나 두터운 화음을 이루지는 못했다. 다만, 현악기군의 피치카토 음형은 깔끔했으며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3악장부터는 명쾌한 리듬을 업고 썩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반복되는 16분음 스타카토 음형을 나무랄 데 없이 깔끔하게 일치시켜 놀라운 소노리티(sonority)를 만들어내었고, 서울시향의 앙상블이 사실은 뛰어난데 작품이 작품이라 이제껏 고전했음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돌이켜보건대 이토록 훌륭한 앙상블을 이룰 수 있는 악단인데도 음형이 복잡하게 얽힐 때에는 영 제 실력을 내지 못했다면 연주회장의 음향이 요술을 부린 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려우며, 이것만 보아도 시향 전용 연주회장이 절실히 필요함을 알 수 있다.

템포는 ♩= 135 정도로 꽤 빠른 편이었고, 군데군데 리타르단도를 써서(이를테면, 마디 5) 뚜렷한 템포 대비를 준 것이 인상깊었다. 앙코르로 3악장을 다시 한 번 연주했는데, 이때는 가운데 부분(마디 35-223)을 생략하고 템포 변화도 거의 없이 신나게 달려서 그야말로 앙코르다웠다.

4악장은 3악장에서 되찾은 기운을 살리고 파사칼리아(passacaglia) 특유의 반복과 점층 구조에 힘입어 마치 예고된 파국처럼 한 발 또 한 발 무게를 더해가는 거대한 크레셴도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마디 33에서 바이올린의 비장한 선율도 훌륭했고, 마디 193의 셋잇단음은 절망에 빠져 목놓아 부르짖는 듯했다. 다만, 마디 97의 플루트 독주는 기술적으로는 흠 잡을 데 없이 깔끔했으나 너무 무덤덤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름대로 루바토를 쓰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일부러 무표정한 연주를 의도한 것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구슬프게 흐느끼는 연극적인 표현이 낯 간지러웠던 게 아닐까 싶다.

정명훈이 서울시향을 이끈 지도 벌써 두 해가 지났다. 그동안 서울시향은 눈부신 성장을 보였지만, 세계적인 악단을 목표로 했던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기대에 못 미친다. 정명훈이나 시향 단원들이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처음부터 목표가 너무 컸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시향 전용 연주회장도 없이 '남의 집 살이'를 하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정명훈과 계약하면서 시향 전용 연주회장을 마련하기로 약속했음을 잊지 않기 바란다.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27일 목요일

2007.11.28. 브람스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 / 독일 레퀴엠 - 정명훈 / 서울시향

2007년 11월 28일(수) 오후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김영미(소프라노), 사무엘 윤(바리톤), 서울시합창단, 서울모테트합창단

Brahms, Variations on a Theme of Joseph Haydn, op. 56a (17')
Brahms, Ein deutsches Requiem (68')



브람스가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한 것은 교향곡 1번을 완성하기 3년 전인 1873년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작곡가 브람스가 완숙기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분수령이라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청년 시절부터 써오던 변주곡 시리즈를 끝맺는 '마지막 습작' 같은 곡이기도 하다.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해석 방향이 갈릴 수 있겠는데, 정명훈은 드물게 '습작'에 적지 않은 무게를 둔 것 같다. 그러한 의도는 첫 번째 변주부터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다. 템포를 ♩= 105 정도로 잡아 관습적인 템포(대략 ♩= 88)에 비해 빨라도 너무 빨랐던 것이다. 이에 따라 두텁고 어두운 화음을 강조하기보다는 비교적 가볍고 생기있는 '젊은 브람스'를 내세워 브람스에 대한 굳은 생각을 깨트리도록 관객을 도발하는 듯했다.

두 번째 변주부터는 점점 낯설지 않은 템포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오히려 점점 느려져서 거대한 리타르단도(점점 느리게) 효과가 나타났다. 마지막 아홉 번째 변주에서는 다시 살짝 아첼레란도(점점 빠르게)를 사용하여 대칭을 이루도록 했는데, 이것은 마지막 변주가 저음 반복(ostinato)을 바탕으로 또 다른 변주곡 형태인 파사칼리아(passacaglia)를 이룬다는 점에서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다만, 이러한 특징이 관객에게 얼마나 잘 전해졌는지는 의문이다.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연주회장 탓에 소리가 뭉개지기 일쑤였는 데다가 변화무쌍한 템포에 단원들이 미처 충분히 자신감을 느끼지 못한 듯 리듬과 다이내믹이 그다지 또렷하지 못한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휴식 시간 없이 이어진 <독일 레퀴엠>. 이 작품은 예배용 음악이 아니다. 원어 제목인 "Ein deutsches Requiem"에서도 드러나듯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를 가사로 했을 뿐 아니라 경외서(The Apocryphia)에 나오는 글귀도 일부 가사로 썼으며, 무엇보다 내용 구성이 미사 전례를 따르지도 않고 예수의 속죄나 심판의 날을 준비하는 종말 신앙을 앞세워 드러내지도 않는다. 또 가사를 성서에서 따왔을 뿐 사실은 특정 종교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부분도 없다. 요컨대 이 작품은 삶과 죽음에 대한 보편적인 고뇌를 담고 있으며,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을 달래는 곡이다. 이날 연주는 대규모 합창단을 앞세워 고통과 환희와 위안을 생생히 그려낸 한 편의 드라마였다. 2악장에서 팀파니가 이끌어내는 땅울림과 저 깊은 곳에서 북받쳐 오르는 합창의 흥분을 지나 6악장의 '죽음(Tod)'과 '지옥(Hölle)' 가사에 맺힌 절규와 사이 사이를 잇는 푸가토가 특히 좋았다. 마지막 7악장을 들으면서는 문득 김종철의 시구(詩句)를 떠올렸다. 느릿한 템포로 이완된 분위기가 '설레이는 神의 겨울, 그 길고 긴 먼 복도를 지내나와' '어머니 나라에 누운 듯' 편안했다.

합창단과 독창진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했으며, 그 가운데 바리톤 사무엘 윤이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바그너 전문 가수답게 풍부한 성량, 깊고 안정된 음색, 나무랄 데 없는 딕션과 독일인보다 더 독일인다운 '그르릉' 소리, 독일어 무성음을 타악기처럼 활용하는 솜씨, 유럽 오페라 극장에서 잔뼈가 굵은 경험에 힘입은 배우 본능, 연주회장을 압도하는 제왕의 카리스마! 무엇보다 그는 관현악을 멋대로 끌고 가는 대신 음악의 흐름에 맞게 어우러질 줄 알았다. 이것은 오페라 아리아 한 가락 멋지게 부르는 데에만 익숙한 한국 가수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값진 능력이다. 이런 가수가 더 많이 나와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한다면 그 얼마나 멋지겠는가! 재작년 성남 아트센터에서 있었던 구노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로 나와 신들린 연기와 노래를 들려준 가수를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가 이날 또 한 번 관객을 사로잡은 그 가수다. 사무엘 윤. 장담하건대 열 몇 해 안에 거물이 될 사람이니 그 이름을 꼭 기억해두기 바란다.

소프라노 김영미는 사무엘 윤에게 가려 빛이 바래버렸지만 사실은 나름대로 꽤 훌륭했다. 5악장 독창부는 고음으로 갈수록 음정과 리듬이 잘 맞지 않으면 듣기 싫은 소리가 되기 쉽지만, 김영미는 위험한 부분을 대부분 잘 처리했다. 사무엘 윤과 마찬가지로 '독창'이 아닌 '협연'을 할 줄 아는 가수였다는 점도 반가웠다. 다만, 초반에 고음에서 음정이 살짝 흔들린 것이나 5옥타브 B♭이 나오는 마디 56에서 잠시 템포를 떨어트린 것 등은 옥에 티였다. 목소리가 소녀처럼 맑고 가녀려서 마치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노래하는 듯했으나 성량이 좀 작은 듯해서 아쉽기도 했다. 말러의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Des Knaben Wunderhorn> 중 "천상의 삶 Das himmlische Leben"(교향곡 4번 4악장이기도 함)에 무척 잘 어울릴 듯싶다.

합창단에게는 솔직히 말해 별로 기대하지 않았으나 웬걸, 생각보다 너무 잘해서 깜짝 놀랐다. 1악장 여린 음부터 감탄을 자아냈는데, 흔히 대규모 합창단이 메조포르테보다 여린 소리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이날 연주에서는 피아노까지는 꽤 안정적이었고 피아니시모도 나쁘지 않게 소화했다. 푸가에서도 성부 균형이 잘 맞았고, 지휘자의 지시에 반응하는 것도 재빨랐다. 물론 흠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 합창단 사정이 어려운 것은 안 봐도 뻔한데 이렇게까지 해내다니 그저 기운을 북돋워주는 말만 해주고 싶다. 그리고 바라건대 합창단도 서울시향처럼 재단의 든든한 지원을 업고 선진화된 시스템으로 관리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상식 하나. 레퀴엠을 연주할 때에는 박수를 치지 않는 게 관례다. 장례식장에서 웃고 떠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독일 레퀴엠>은 정식 미사 레퀴엠도 아닌데다 연주회장에서 연주가 끝났을 때 박수를 치지 않고 멀뚱멀뚱 있는 것도 이상하지만, 적어도 연주가 끝나자마자 요란한 박수가 터져 나오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 이날 정명훈은 마지막 잔향이 완전히 사라지고도 10초 이상 지휘봉을 내리지 않고 침묵을 '연주'했다. 이른바 '안다 박수'가 막판에 분위기를 깨는 일이 잦은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연주자에게도 관객에게도 축복을, Selig s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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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5일 화요일

2007.08.19.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 브람스 교향곡 3번 - 김선욱 / 정명훈 / 서울시향

2007년 8월 19일(일) 오후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김선욱, pf.

Brahms, Piano Concerto No. 1 in d minor, Op. 15
Brahms, Symphony No. 3 in F major, Op. 90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최초 구상이 교향곡이었다고 잘못 알려지곤 하는데, 원래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였다. 다만, 수차례의 전면적 개정 과정에서 교향곡이 될 뻔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 흔적이 작품 곳곳에 나타나 있다. 특히 1악장에 그러한 특징이 뚜렷한데, 일반적인 협주곡과는 달리 독주 악기에 대한 배려가 많이 부족해서 피아노 협연자에게는 연주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테크닉 문제를 떠나 우선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음량에 맞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부 표현은 그다음 일이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강력한 타건으로 협주곡으로는 흔치 않은 대 편성으로 위압하는 서울시향과 팽팽히 맞섰으며, 그러면서도 정교한 테크닉과 섬세한 감성을 놓치지 않아 과연 유명세가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1악장에서 다소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의견도 더러 있었으나, 내 생각에는 이 정도면 이제 약관에 이른 연주자라 믿기 어려울 만큼 훌륭했다. 작품이 워낙 까다로우니만큼 이보다 더 잘한다면 차라리 대가라 불러야 할 것이다.

김선욱의 피아노는 단단했으며 확신에 차 있었다. 때때로 살짝 쇼팽을 연상시키면서도 밝은 톤을 잃지 않는 루바토를 드러내기도 했는데, 그러면서도 나이 어린 연주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의식 과잉으로 유치해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오케스트라와 교묘하게 줄다리기를 해가며 음악에 긴장감을 더해가는 솜씨가 특히 놀라웠는데, 이것은 혼자 연습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역시! 김선욱은 평소에 실내악 연주를 너무 좋아해서 주위에서 말릴 정도란다. 남다른 '앙상블 내공'을 쌓게 해준 것이 다름 아닌 실내악 연주일 테니 말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권장할 일이 아닐까.

서울시향의 연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악장 마디 66부터 비올라를 유난히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의 열악한 음향 환경이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지는 못했다. 마디 190에 아첼레란도를 쓴 것은 차분한 상태에서 재빨리 긴장감을 끌어올리기에는 좋았으나, 그 폭이 너무 커서 약간은 어색한 감이 있었다. (나중에 라디오로 들었던 22일 연주회에서는 아첼레란도의 폭을 약간 좁혀서 딱 적당했다.) 2악장은 4분 음표의 연속에 따르는 두터운 화성이 피아노와 상승작용을 하는 것이 매력적이지만, 서울시향은 투명한 현의 칸타빌레로 두터운 화성을 희석시키며 피아노와 미묘한 음색 대비를 이룬 것이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3악장이 특히 훌륭했으며, 기대했던 푸가토(마디 238) 역시 좋았다. 다만, 약간 더 욕심을 부리자면 악센트를 좀 더 분명하게 살렸으면 싶었다.

교향곡 3번은 '자유롭게 그러나 즐겁게(Frei aber Froh)'라는 모토에서 머리글자를 따온 것으로 알려진 F-A♭-F 모티프로 유명하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사실관계는 학술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일단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전체 악곡의 조성 계획 또한 이 모티프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원 조성은 F 장조이며, 2악장과 3악장은 C 음을 으뜸음으로 하는 장·단조인데 여기서 C 음은 F 음의 딸림음(dominant)에 해당한다. 결국, 전체 악곡은 F-C-F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F-A♭-F라는 F 단조 화음에 생략된 5음인 C가 악곡의 전개에 중요한(dominant)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4악장에는 F-C-F라는 거시적인 구조가 다시 한 번 축약되어 있기도 해서 전체 악곡이 4악장을 향한 강한 추진력을 가진다.

정명훈의 해석은 이러한 목표지향적 구조를 매우 잘 드러내었으며, 그런 의도는 1악장에서부터 드러난다. 우선 템포가 꽤 빨랐고(시작 부분의 템포는 대략 ♩♩ = 85), 그런데도 1악장의 제시부 반복을 생략했다. 교향곡 1악장의 제시부 반복 생략은 19세기 작품을 연주할 때 흔히 있는 일이지만, 브람스 교향곡 3번과 같은 짤막한 곡에는 그런 경우가 흔치 않다.

2악장은 아기자기한 맛을 잘 살렸으며, 3악장은 감정의 낭비를 자제하여 4악장을 향한 방향성을 분명히 밝혔다. 유명한 3악장은 자칫 신파조가 될 위험이 있는데, 이것은 브람스답지 않을 뿐만 아니라 4악장의 무게감을 줄일 위험이 있어 좋지 않다. 서울시향은 첼로의 부점 리듬을 약간 무디게 연주했으며, 바이올린의 부선율을 적당히 살렸고, 목관 등의 투명한 음색을 놓치지 않아 신파조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지나치게 무표정하지는 않도록 중용의 묘를 보여주었다.

4악장의 재현부에 해당하는 마디 172 이후는 전체 조성 구조가 절정에 이르는 곳이라 할 수 있는데, F-C-F로 이어지는 조성 구조에서 F 장조로 마침내 해결되기 직전에 이제껏 쌓인 긴장이 선명한 f 단조에 의해 폭발하기 때문이다. 서울시향의 집중력 또한 이 부분에서 절정을 이루었으며, 객석에 전달된 긴장감은 연주회장의 열악한 음향으로 상당 부분 무뎌지고도 여전히 강력했다.

이날 연주에서는 모든 악기가 훌륭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강력한 집중력을 보여준 현의 역할이 컸다고 판단된다.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의 악장 출신인 스베틀린 루세브(Svetlin Roussev)가 서울시향의 악장을 맡은 것이 효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일까.

4악장이 진정한 F 장조를 회복하는 것은 코다에 이르러서인데, 이미 f 단조 부분에서 모든 긴장을 폭발시켰으므로 일반적인 교향곡과는 달리 조용하게 끝난다. 그런데 곡이 차분히 끝나는 만큼 연주가 완전히 멈춘 뒤의 마지막 몇 초의 여운이 중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열광적인 '브라보'에 익숙한 관객이 그 몇 초를 견디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이날 연주에서는 고작 3-4초 정도의 여운을 바리톤 음성의 '브라보'가 깨트렸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직 지휘자가 팔을 내리기 전이었다. 며칠 뒤에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연주회에서는 아예 연주가 끝나자마자 이른바 '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앙코르로 베르디의 <운명의 힘> 서곡을 연주하기 전에 정명훈이 했던 말이 걸작이었다. "한국에서는 음악이 조용히 끝나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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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4일 월요일

2007.06.27. 브람스 이중협주곡 / 교향곡 2번 - 김수빈 / 지안 왕 / 정명훈 / 서울시향

2007년 6월 27일(수)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김수빈(vn), Jian Wang(vc)

Brahms: Double Concerto in a minor, Op. 102 (32')
Brahms: Symphony No. 2 in D major, Op. 73 (40')



정명훈이 지휘를 맡는 연주회에 대해 내가 개인적으로 품은 불만 한 가지는 대부분 연주회장이 세종문화회관이라는 것이다. 객석이 많은 만큼 수익성이 높다는 장점을 무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연주회장의 음향이 열악한 만큼 마니아들의 반응도 차가운 법이라 세종문화회관에 너무 의존하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수익에도 악영향을 끼치리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연주회가 드물게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것이 반갑다. 과연 소리 자체가 주는 감동의 깊이가 달랐다.

오케스트라의 전체적인 음량 또한 기대 이상으로 컸다. 이는 연주회장의 음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명훈 표 브람스'라서 더욱 그랬지 싶다. 이것은 협연자로서는 그다지 반가운 일만은 아닐 것인데, 지안 왕과 김수빈은 특히 1악장에서 오케스트라의 육중한 소리에 대적하려고 현과 활의 강력한 텐션을 만들어 내느라 고생하는 듯했다. 김수빈은 이 때문인지 아니면 평소 습관인지 유난히 풀 보잉(full bowing)을 자주 사용했고, 지켜보기에 불안할 만큼 뻣뻣한 자세를 자주 보였다. 그러나 겉보기와는 달리 연주는 상당히 훌륭했으며, 뒤로 갈수록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2악장에서의 서정미도 뛰어났고, 3악장에서는 바이올린과 첼로가 얽히고설키는 스타카토 음형에서 보여준 두 협연자의 정교한 앙상블이 백미였다.

3악장 첫머리에서 나는 지안 왕의 운지법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레가토로 연주하면서 무려 5도 도약을 해야 하는 난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무리한 '손가락 찢기' 대신에 현을 바꾸어 연주하는 속 편한 방법을 택했으며, 결과적으로 5도 도약은 논 레가토(non legato)가 되었다. 김수빈 역시 마찬가지로 논 레가토로 처리했다. 외람된 의견이지만 이 음형의 도발적인 매력을 살리려면 포르타멘토를 써서라도 현을 바꾸지 않고 최대한 레가토의 느낌을 살리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이 경우 L-포르타멘토, 즉 도약을 먼저 한 다음 미끄러지는 방법이 적당하다.)

브람스 교향곡 2번에서는 국내 오케스트라의 고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인 악기군 간의 앙상블 문제가 상당히 해결된 듯해 보였다는 점이 놀라웠다. 서울시향은 특히 개인적으로 앙상블 난조를 예상했던 2악장 푸가토(마디 17) 부분에서 매우 깔끔한 연주를 들려주었으며, 그 가운데 호른의 역할이 유난히 돋보였다. 1악장 마디 137의 D조 호른과 마디 144의 E조 호른 역시 적당한 밸런스에 호른끼리 꼬이는 일도 없이 안정된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날따라 금관이 전반적으로 훌륭했으며, 객원으로 보이던 팀파니 주자의 깔끔한 연주도 기억에 남는다.

악기군 간의 앙상블이 좋으니 이제는 악기군 내의 앙상블에 더 욕심을 부릴 만하다. 특히 현악기군의 앙상블이 유럽 수준으로 발전하기를 희망해 본다. 이날 연주에서 아쉬웠던 부분으로는, 이를테면 3악장 트리오 부분에서 악센트가 두드러지지 않아 심심한 연주가 되어버렸다.

정명훈의 해석에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1악장의 템포를 상당히 느리게 잡았다가 2악장부터 차츰 빠르게 함으로써 거대한 아첼레란도를 구현한 것이었다. 게다가 4악장 코다에서는 이음매마다 가속하여 곡이 끝날 무렵에는 ♩♩= 120 정도의 아찔한 템포로 광란의 토카타를 연출했다. 4악장 마디 118에서 E조 호른의 포르테를 제대로 살린 것도 색달랐다.

관객의 반응 또한 대단했다. 예전에는 정명훈의 이름값에 혹해 과장된 환호를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나, 이날 연주회에서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정명훈이 아닌 '음악'에 진심으로 감동한 듯한 우렁찬 박수가 연주회장을 뒤흔들었으며, 기립박수 등 과시적인 행동을 보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정명훈에게는 그것이 불만이었나 보다. 몇 번의 커튼콜에 화답하던 그가 갑자기 객석을 향해 기립 사인을 보냈던 것이다. 정명훈의 연주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객 전원 기립 사태가 발생했다. 물론 나는 정명훈의 '정치적인' 제스처와 그 바탕의 자신감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는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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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1일 금요일

2007.02.27.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3번 Op. 108, 현악 오중주 1번 Op. 88, 현악 육중주 1번 Op. 18 - 서울시향

서울시향 브람스 스페샬 실내악 시리즈 1
2007년 2월 27일(화) 오후 7시30분
세종 체임버 홀

Violin Sonata No. 3 in d minor, Op. 108 (21')
String Quintet No. 1 in F Major, Op. 88 (26')
String Sextet No. 1 in Bb Major, Op. 18 (33')

Op. 108: Marko Komonko(vn), Park, Jong-Wha(pf)
Op. 88 : Violin 임가진,유미나 / Viola 진민호, 안톤 강 / Cello 강찬욱
Op. 18: Violin 데니스 김, 김효경 / Viola 헝웨이 황 , 임요섭 / Cello 박은주, 김민경



한국의 음악계에서 오케스트라 단원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시각은 그들이 독주자로 성공할 능력이 없어서 오케스트라를 한다는 것이다. 스타 시스템과 콩쿠르 위주의 교육제도 때문에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며, 심지어 오케스트라 단원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듯하다. 이것은 물론 한국만의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유명 오케스트라 단원이 독주자나 실내악 활동을 겸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모양이니 오케스트라 단원의 위상이 한국보다는 훨씬 높다 하겠다. 이런 현실에서 서울시향의 브람스 실내악 시리즈가 가지는 의의는 실로 크다. 실내악 연주회는 단순히 시향 단원들의 직업 만족도를 높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실질적인 연주력 향상을 가져올 것이다. 그것은 첫째로 현재의 열악한 음향 환경에서 수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쾌적한 조건에서 파트별로 호흡을 맞출 기회가 제도적으로 확보되고(세종문화회관 체임버 홀의 음향은 꽤 훌륭했다), 둘째로 지휘자에 의존하던 작품 해석을 스스로 해보는 경험을 바탕으로 지휘자의 의도를 능동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며, 무엇보다 연주자 개개인이 주인공이 될 기회와 연주자 간에 더욱 친밀해진 교감을 통해 단원들 스스로 음악을 진심으로 즐기는 방법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날 연주에서는 아무래도 이들이 실내악 전문 연주자가 아닌 탓인지 다소 미숙함을 보이기도 했다.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3번 Op. 108을 연주한 Marko Komonko는 긴장이 심했는지 특히 초반에 실수가 많았고, 전체적으로 자신감이 부족해 보였다. 곡 해석이 특별히 모난 곳은 없었지만 4악장 마디 104에서 스타카토 음형을 또렷하게 살린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어지는 레가토 음형과의 구분도 필요하겠지만 이를 위해서는 데타셰로도 충분하다. 문제의 스타카토 음은 내림박이기도 하거니와 다섯 마디에 이르는 딸림화음의 긴장감이 마침내 해결되는 음이기 때문에 종지감(終止感)을 충분히 살리려면 지나치게 짧게 연주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게다가 레가토 음을 시작하는 E 음은 비화성음은 아니지만 선율 진행상 보조음(neighboring tone)에 가깝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아쉬움이 많았던 연주였지만, 실내악 시리즈는 이제부터 시작이니 앞으로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또 있을 것이다.

글머리의 논점에 비추어 가장 큰 칭찬과 격려를 보내고 싶은 연주자들은 현악 오중주 1번 Op.88을 연주한 임가진 등이었다. 물론 이들의 앙상블이 썩 훌륭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며, 이날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훌륭한 연주를 들려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때때로 어수선한 앙상블과 다소 밋밋한 곡 해석을 뜨거운 열정으로 보완했다. 이들의 연주에는 실황 연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있었고, 특히 제1 바이올린과 첼로의 교감이 보기 좋았다. 두터운 화음이 강조되는 부분(이를테면 1악장 마디 20)에서 템포를 일시적으로 늦추곤 했던 것은 갑자기 눈에 띄게 변한 템포가 음악적 긴장감을 떨어뜨렸던 까닭에 그 자체로는 공감하기 어려웠지만, 그것을 기회로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마음을 새로 모으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들은 진심으로 자신의 연주를 즐기는 듯했고, 얼굴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앙상블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을 기회는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날의 초심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다.

현악 육중주 1번 Op.18을 연주한 데니스 김 등은 각 파트의 수석급 연주자들로 과연 서울시향의 뛰어난 앙상블에 이들의 역할이 컸음을 이날 연주로 새삼 알 수 있었다. 세련된 바이올린과 열정적인 비올라의 대립구도가 흥미진진했으며, 특히 유명한 2악장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임가진 등보다 열기는 부족했으니 두 팀이 서로 장점을 본받으면 좋겠다. 해석상의 옥에 티 한 가지를 지적하자면, 스타카토 음형의 분절적 느낌을 맥락에 따라 좀 더 다채롭게 표현했더라면 더욱 훌륭한 연주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브람스 작품의 스타카토는 보통은 데타셰 주법으로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이 좋은 경우가 많은데, 앞서 지적한 바이올린 소나타 3번의 경우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때로는 스타카토를 또렷하게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때도 있다. 이를테면 1악장 발전부 렌틀러(ländler) 주제 직전의 스타카토 음형(마디 190)이 그렇다. 이날 마디 189에서 템포를 살짝 늦추면서 마디 190으로 이어지며 데타셰로 부드럽게 넘어간 것은 앞 마디의 으뜸화음이 이어지면서 화성적 긴장이 해소되는 국면인데다가 데크레셴도까지 동반했다는 점에서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마디 190의 스타카토가 지나치게 불명확하면 마디 188에서 190에 이르는 동안 음가(音價)가 점점 늘어나면서 자칫 음을 질질 끄는 느낌이 들 수 있다. 또한, 마디 189에서 텍스처가 갑자기 엷어진 것은 오히려 음악적 긴장감을 살짝 높임으로써 전체적인 이완이 지나치지 않도록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음악적 긴장이 극에 달했을 때 갑자기 텍스처를 엷게 함으로써 특별한 효과를 일으키는 것은 19세기 이후의 작품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마디 190의 스타카토 음형은 데타셰 주법을 사용하더라도 분절적인 느낌을 충분히 살리는 것이 좋으며, 템포 변화도 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2악장 마디 79는 2악장 전체의 클라이맥스로 볼 수 있으므로 스타카토 음형을 좀 더 날카롭게 처리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4악장에서는 첼로와 바이올린이 같은 모티프를 연주하면서도 첼로(마디 3 등)는 스타카토를 또렷이 처리했지만 바이올린(마디 19 등)은 부드럽게 넘어감으로써 일관성을 잃었던 것이 옥에 티였다.

지난 정기연주회 리뷰를 쓰면서 나는 서울시향이 타성에 젖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그래서 단원들에게 그들이 연주하는 작품을 진심으로 사랑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런데 브람스 실내악 시리즈야말로 현재 서울시향에 가장 훌륭한 처방일지 모른다. 서울시향의 브람스 시리즈에 실내악이 들어간 것은 브람스가 기본적으로 실내악 작곡가이기 때문일 것인데, 어쩌면 시향의 공연기획자는 지금의 상황마저 예견했던 것은 아닐까. 실내악 시리즈의 시작은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시향은 진정한 기본기를 쌓아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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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0일 목요일

2007.01.09. 브람스 대학축전서곡, 바이올린 협주곡, 교향곡 1번 - 카바코스 / 정명훈 / 서울시향

브람스 스페샬 관현악 시리즈 1
2007년 1월 9일 오후7시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Brahms: Academic Festival Overture in c minor, Op.80(10')
Brahms: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77 (38')
Brahms: Symphony No.1 in c minor, Op.68 (45')
 
정명훈 지휘
Leonidas Kavakos (Vn.)



브람스에 대해 얘기하려면 그에 앞서 언급해야만 하는 작곡가가 있다. 베토벤! 그는 고전주의 양식을 완성한 사람이면서 스스로 그것을 해체하여 낭만주의 시대를 열어젖힌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목표지향적 주제 발전 기법, 리듬과 화성에 담긴 역동적인 에너지,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어둠에서 광명으로" 나아가려는 영웅적 정신은 후대 작곡가들이 추구해야 할 이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기도 했다. 그 자체로 완벽한 것에는 새로운 것을 덧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낭만주의 음악의 분수령이었던 베토벤의 양식은 본격적인 낭만주의 정서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음악학자 달하우스(Karl Dahlhaus)에 따르면 이 아이러니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슈베르트는 <미완성 교향곡>에서 베토벤적인 도입부(intro) 주제를 발전부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멘델스존은 <스코틀랜드 교향곡>에서 리트(Lied)적인 주제를 부분적으로 병치시키면서 대위법적인 효과를 노렸으며, 베를리오즈는 <환상교향곡>에서 온음계적 주제선율의 배경에 반음계적 시퀀스(동형진행)를 사용해 주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들은 근본적인 해답이 되지 못했으며, 마침내 모범답안을 내놓은 사람은 낭만주의라는 시류와 다소 거리를 두고 베토벤이라는 근본적인 화두로 고민한 브람스였다.

그는 베토벤의 주제 발전 기법을 극한까지 확장하여 단일 음정마저도 모티프(motif) 변형의 단위로 삼았고, 원 주제의 마디 구조와 화성, 리듬 등을 끊임없이 변형시켰으며, 이러한 기법을 전체 악곡의 진행 원리로 삼았다. 이렇게 변형된 모티프의 조각들은 베토벤보다 훨씬 촘촘한 그물망을 이루었으며, 나아가 전체 악곡의 구조를 지탱하는 정교한 논리가 되었다. 20세기 작곡가 쇤베르크가 "발전적 변주(developing variations)"라 부른 이 기법은 베토벤의 후계자를 자처하던 바그너(또는 리스트)의 기법보다도 세련된 것이었으며, 이로써 적어도 음악 형식에는 브람스야말로 베토벤의 진정한 후계자라는 데에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게 되었다. (사견을 말하자면, 베토벤의 정신적 계승자는 바그너라 할 수 있다.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도 많겠지만, 이 글의 주제는 바그너가 아니므로 더 자세한 내용은 나중을 기약하기로 하자.)

베토벤과 브람스의 이러한 관계를 살펴볼 때, 기본기부터 확실히 쌓겠다며 작년 한 해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연주한 정명훈과 서울시향이 다음 목표로 브람스를 택한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정통 레퍼토리에 도전하는 서울시향의 자세는 베토벤을 정면으로 마주한 끝에 베토벤의 적통이라는 월계관을 거머쥔 브람스와 통하기도 한다.

대학축전 서곡은 폴란드 브로츠와프(Wrocław; 당시는 프로이센의 영토였으며 독일식 이름은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브람스에게 수여한 명예박사 학위에 대한 답례로 작곡되었으며, 브람스가 괴팅겐(Göttingen)에서 배운 4곡의 학생가를 인용하고 있다. 대학축전 서곡은 브람스의 여느 작품과는 달리 유쾌한 분위기로 가득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브람스 시리즈를 여는 서곡의 역할로 제격이었다. 이날 연주에서는 브람스의 유머를 정명훈 특유의 세련된 감성으로 살려냈다. 마디 24에서 바이올린의 피치카토(현을 손끝으로 튕기는 연주법)를 솔로 바이올린으로 강조한 것도 흥미로웠고, 학생가 가운데 "신입생의 노래 Was kommt dort von der Höhe"가 인용된 마디 157에서 템포를 관습적인 수준보다 더 빠르게 변화시킨 것도 좋았으며, 여기서 목관과 현의 아기자기한 앙상블도 훌륭했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신입생의 노래"와 또 다른 음악적 모티프의 조각들이 섞이면서 거대하게 부풀었다가 갑자기 멈추면서 약음기를 낀 호른이 우스꽝스러운 음색으로 '빼액' 하는 부분(마디 259)이었다. 몇몇 음반에서는 이 부분이 무표정하거나 심지어 화난 듯한 음색이어서 실망하곤 하는데, 이날 연주에서는 천박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익살스러웠다. 이런 식의 유머는 이를테면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 제2막에서 꼬마가 "나팔이랑 말 사줘! Vo' la tromba, il cavallin!" 하면서 떼쓰는 장면과도 닮았다. 관악기의 리듬이 엇갈리는 부분(이를테면 마디 91 등)은 그 리듬을 기계적으로 살리면 우스꽝스럽게 들리기도 하는데, 다수의 녹음에서는 내림박에 확실한 주도권을 주지만 이날 연주에서는 이것을 그대로 살렸다. "기쁨의 노래 Gaudeamus igitur"가 인용된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로 금관의 숨겨진 리듬을 살렸는데(특히 마디 387-390), 대부분의 녹음에서는 "기쁨의 노래"의 고양감을 높이도록 주선율을 강하게 부각시키기 때문에 이날 연주를 낯설게 느끼거나 심지어 서울시향의 금관 앙상블이 엉터리였다고 생각한 관객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이 리듬을 특히 잘 살린 녹음으로는 아르농쿠르-베를린필의 것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대한 연주회장에서 낼 수 있는 음량의 한계를 절실히 드러내어 전용 연주회장의 마련이 시급함을 새삼 일깨우기도 했다. 특히 스타카토(한 음씩 끊음) 음형으로 큰 폭의 크레셴도(점점 세게)를 이루는 마디 41-45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물론 음반에서 들을 수 있는 과장된 다이내믹에 익숙한 탓도 있겠고, 서울시향 현악기 주자들 실력이 유럽 일류 악단에 비하면 손색이 있기도 하겠지만, 적어도 여기서 힘이 많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기쁨의 노래"에서 금관이 찬가처럼 부풀렸다가 현과 목관으로 선율을 넘겨주는 순간(마디 383) 전체 앙상블이 어이없이 힘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이날 연주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이날 악기 편성은 호른을 한 대 추가한 것을 제외하면(호른 수석의 보조 역할) 악보의 지시를 정확하게 지켰다.

... 대략 여기까지 썼을 때 편집장님의 전화를 받았다. 먼저 보낸 베토벤 연주회 리뷰가 너무 길다면서 이번에는 원고지 15장 이내로 해달란다. 그때까지 써놓은 것을 보니 벌써 20장...;; 게다가 연주회 다음날이 원고 마감일이라니... OTL

결국 날림으로 쓴 게 아래 글이다. 정말이지 이따위로 쓰고 싶지는 않았다. 홈페이지에나마 쓰고 싶은 말 다 쓰려고도 생각했다가... 귀찮다. -_-; 다음 연주회나 준비해야겠다. 어, 근데 프로그램이 바뀌었잖아? OTL

브람스는 베토벤의 음악적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맞는 새로움을 담아내야 하는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들의 과제에 대해 일체의 편법을 거부하고 베토벤이라는 근본적인 화두로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베토벤의 적통이라는 월계관을 거머쥐었다. 이것은 기본기부터 확실히 쌓겠다며 정통 레퍼토리에 도전하고 있는 서울시향의 태도와도 통하며, 서울시향이 베토벤에 이어 브람스 시리즈를 택한 것은 이러한 음악사적 맥락을 생각할 때 거의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대학축전 서곡은 브람스의 여느 작품과는 달리 유쾌한 분위기로 가득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브람스 시리즈를 여는 서곡의 역할로 제격이었다. 이날 연주에서는 브람스의 음악적 유머를 정명훈 특유의 세련된 감성으로 살려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대한 연주회장에서 낼 수 있는 음량의 한계를 절실히 드러내어 전용 연주회장의 마련이 시급함을 새삼 일깨우기도 했다. 특히 스타카토(한 음씩 끊음) 음형으로 큰 폭의 크레셴도(점점 세게)를 이루는 마디 41-45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카바코스(Leonidas Kavakos)는 매끄럽게 다듬어진 음색과 특별히 모나지 않으면서도 참신한 프레이징(phrasing)을 들려주었다. 비브라토의 속도와 폭은 자연스럽고 적절하여 아름다운 음색을 만들어냈으며 트릴의 속도는 때때로 느린 편이었다. 그러나 힘없이 매끄럽기만 한 것도 아니어서 마르카토(강한 악센트로 끊어 연주함)의 '긁는 맛'을 세련미를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충분히 살렸고, 관현악 도입부의 템포가 느린 편이었는데도 독주를 시작하면서 날카로움을 잃지 않았다. 카덴차는 가장 널리 쓰이는 요아힘의 것이었고, 앙코르는 타레가(Francisco Tárrega)의 <알함브라의 추억>이었다. 이 곡은 원래 기타 독주곡으로 카바코스는 활을 현 위에서 여러 번 튕기는 이른바 리코셰(Ricochet; flying spiccato) 주법을 사용하며 정교한 테크닉을 과시했다.

교향곡 1번은 장중한 템포 속에 브람스의 좌절과 분노와 우수와 환희 등을 모두 담아내면서도 정명훈의 특유의 세련된 열정을 잃지 않았다. 템포가 빠른 곳과 느린 곳의 대비를 뚜렷이 살리면서도 이음매를 자연스럽게 처리하는 한편, 프레이즈마다 은근한 템포 변화를 주어 악곡 전체를 조망하는 유려하면서도 정교한 흐름을 만들어내었다.

브람스 교향곡 1번 해석의 가장 큰 지표가 되는 것은 1악장 도입부(intro)와 종결부(coda)의 템포다. 1악장 도입부의 나타냄 말(expression mark)은 "Un poco sostenuto 음을 조금 늘여서"이고, 제1주제가 시작되는 마디 38에서는 "Allegro 빠르게"가 되었다가 종결부 마디 495에서는 "Meno Allegro 덜 빠르게"가 된다. 결국 느림-빠름-느림의 대칭 구조가 되는데, 브람스는 원래 마디 495의 나타냄 말도 도입부와 같은 "Un poco sostenuto"라 했다가 당시 연주 관습으로 도입부의 템포가 너무 느려지곤 했던 탓에 1악장 처음과 끝을 정확히 같은 템포로 설정한 것은 "멍청한 실수"라 하면서 "Meno Allegro"로 고쳤다.

이날 연주에서는 ‘♪ = 75’ 정도의 템포로 시작하여 제1주제(마디 38 이후)에서는 대략 ‘♩. = 90’으로 변하며 오히려 템포가 빠른 편이 되었지만 자연스러운 이음매로 처음의 장중한 이미지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반음계적 스타카토 하강 음형이 시작되는 마디 160에서는 ‘♩. = 100’ 정도로 더욱 빨라졌다. 1악장 종결부에서 현의 피치카토(현을 튕기는 연주법) 음형이 아르코(활로 긋는 연주법) 음형으로 변하는 마디 478에서 서서히 템포를 늦추어 "Meno Allegro"에서는 대략 ‘♪ = 110’이 되었다. 결국 ‘느림-빠름-느림’의 대칭 구조를 뚜렷이 살리면서도 "Meno Allegro"의 참뜻을 매우 잘 살렸다. 베토벤의 '운명' 리듬과 반음계적 음형이 점차 거대하게 확장되기 시작하는 마디 293에서 템포가 크게 느려졌다가 팀파니의 강력한 타격과 함께 폭발하는 마디 321까지 서서히 가속한 것도 참신했다.

2악장과 3악장의 템포 대비가 컸던 것도 신선했다. 2악장은 상당히 느렸는데, 그 탓에 오보에가 긴 호흡의 독주를 하는 마디 38에서 16분음 음형이 시작되기 전에 숨을 한 번 들이쉰 것은 옥에 티였다. 원래는 끊지 않고 연주해야 하지만, 레가토로 이어지는 부분만 네 마디가 넘고 이후로도 쉼표 없이 한 마디를 더 연주하면서 숨도 들이쉬지 않고 이어지는 소리를 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클라리넷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길게 늘어지는 F#(실제 음은 E♭) 음 중간에 아주 살짝 숨을 쉬고 다시 이었다가 16분음 음형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더 자연스럽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오보에는 악기의 음색과 음악적 맥락 때문에 이런 트릭을 쓸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오보에 수석은 이날 가장 빛나는 연주를 해준 단원 가운데 하나였다.

3악장 시작은 ‘♩ = 90’ 정도로 상당히 빠른 템포를 사용했으며, 클라리넷의 반음계적 하행에 이어 8분음 대신 16분음이 전체 텍스처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마디 45에서는 템포가 살짝 더 빨라지면서 속도감을 준 것이 참신했다.

4악장도 1악장과 마찬가지로 도입부, 특히 4악장 곳곳에 활용되는 이른바 ‘알프스 호른’ 모티프의 느린 템포와 주부(主部)의 비교적 빠른 템포를 뚜렷하게 대비시키면서도 이음매를 자연스럽게 처리하여 장중함 속에 폭발적 추진력을 담아냈다.

한편, 이번 연주회에서도 연주회장의 음향 문제가 심각함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베토벤 교향곡 8번과 9번 연주회 때보다는 소리가 많이 나아졌다고 느꼈다. 그것은 첫째로 베토벤보다는 브람스가 편성이 더 크고, 둘째로 베토벤 교향곡 9번과는 달리 순수 관현악곡이라 성악 파트와의 불균형 문제도 없었고, 셋째로 베토벤 교향곡 9번과는 달리 악보 가필(加筆) 여부에 따른 생소한 음향이 터무니없는 실수로 오해받는 일도 없었으며, 마지막으로 악장을 비롯한 몇몇 수석 단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불 수교 12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라디오 프랑스 등의 유수 악단의 단원이 일부 객원으로 이번 연주회에 참여한 모양인데, 그 가운데 팀파니 주자의 실력이 발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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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4월 20일 월요일

말러는 브람스와 바그너를 모두 계승한 진테제

옛날에 고클래식에 썼던 글 발췌 인용:

브람스와 대척점을 이루는 작곡가로 흔히 바그너를 꼽습니다. 브람스가 논리와 이성의 세계에 속한다면 바그너는 신화와 마법의 세계에 속합니다. 말러는 처음에는 바그너 중력권에 있었다가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브람스적 요소를 받아들인 케이스죠. 베토벤은 이들 작곡가 모두를 잉태한 아버지(어머니)에 해당하고요. 사견입니다만, 그래서 저는 "베토벤의 적자"를 가리기 위한 '투쟁 구도'를 이렇게 봅니다. 베토벤의 정신을 계승한 것은 바그너, 베토벤의 형식을 계승한 것은 브람스, 바그너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브람스를 수용하여 진정한 계승 구도를 완성한 것이 말러. 베토벤이 고전주의를 완성하고 낭만주의로 가는 문을 열어젖힌 사람이라면, 말러는 낭만주의에서 20세기 음악으로 가는 다리가 된 사람입니다. 다소 무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조만간에 의견을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

wagnerian: 제 주장을 오해하실 분 있으실까 봐 굳이 덧붙입니다. 브람스가 이성과 논리의 세계에 속한 작곡가라는 말은 브람스의 음악이 머리로 듣는 음악이며 감성과는 담을 쌓은 작곡가라는 말과는 전혀 다릅니다. 브람스의 음악도 훌륭한 감성을 담고 있지요. 단지 그 감성의 이면에는 치밀한 논리가 받쳐주고 있는 겁니다. 앞뒤 가리지 않는 마스터베이션보다 잘 정제된 감성이 훨씬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그너류의 음악도 얼핏 보기에는 중구난방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 치밀하게 다듬어진 것입니다.

- http://blog.goclassic.co.kr/wagnerian/1166074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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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12일 화요일

브람스와 말러: 논리력과 상상력

고클래식에 있는 어떤 글을 읽고 드는 생각이 있어 씁니다. 글에 나타난 세 개의 논점을 대변하는 문장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말꼬리 잡는 방식과 비슷해 보여서 썩 마음에 들지는 않군요. 원문을 읽지 않으신 분은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브루크너의 문제는'방법론'에 있어서의 다양성이 베토벤이나 브람스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 브루크너의 음악이 형식 논리로 보면 좀 엉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음악을 판단하려는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서울과 의정부시가 맞붙은 곳에
자리잡은 이 집은 가난한 집이다
그래도 뜰은 볼 만하다
감나무와
버드나무와
무궁화꽃이 피며
이름도 모를 잡나무가 있다

장모님과
여고 삼 년인 영진과
마누라 그리고 셋방 든 홍씨와
합해서 일곱 명이 살고 있는 이 집은
뜰로서 부끄럽지 않다.

언제나 푸르고 녹색인 뜰
맑고 곱고 아담한 뜰

나는 생각나면
이 뜰에서 쉰다
그 포근함이며
깨끗한 공기여


이 시 어떻습니까? 뭔가 좀 엉성하다고요? 맞습니다. 제 집 뜰이 "언제나 푸르고 녹색"이라는데, 언제부터 감나무, 버드나무, 무궁화 따위가 상록수였습니까? 그리고 버드나무까지 있는 뜰이 아담하기는 뭐가 아담합니까? 그리고 시에 나타난 인물은 주인공까지 합해 다섯 명인데 엉뚱하게도 일곱 명이라고 우깁니다. 시를 쓴 사람은 간단한 산수도 할 줄 모른답니까? 뭐 이따위 엉터리 시를 인용했느냐고요? 네, 이야기 형태의 시에서 앞뒤 매무새가 맞지 않다면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볼까요?


"(…) 시인은 실제 뜰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2연을 보면 그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감나무는 장모님과 대응되고(감나무의 이미지, 특히 노인의 피부와 감나무 껍질의 질감의 유사성을 생각해 보라), 버드나무와 여고 삼 년생인 영진이 대응되고(버드나무는 옛부터 나긋나긋한 젊은 여자에 대한 비유로 흔히 사용된다), 무궁화꽃과 마누라가 대응되고(시인에게 꽃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식구는 마누라뿐이다. 그리고 나이든 마누라는 무궁화처럼 오래 된 꽃이다), 이름도 모를 잡나무는 셋방 식구들과 대응된다(셋방 식구들의 이름은 잘 모른다).

이러한 대응을 잘 살펴볼 때, 시인이 정말로 자랑하고자 하는 것은 꽃나무로 이루어진 정원이 아니라 사랑스런 가족들로 이루어진 가정의 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셋방 식구들까지 잘 어울려 사는 훈훈한 가정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3연에서 언제나 푸르고 밝고 곱고 아담한 집안의 분위기가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시인은 삶에 지치면 가족의 포근한 품안에서 쉰다고 말한다. 마지막 구절 "그 포근함이여 / 깨끗한 공기여"에서는 실제 포근함과 깨끗함에 언어의 껍질을 깨고 독자의 마음에까지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다. 변두리의 가난한 집이지만 그 집안의 분위기는 천금으로도 바꿀 수 없는 포근함과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 (이남호)

- 오탁번., "둥근 과일과 떠오르는 달", [현대시의 이해]. 서울: 나남신서 (1998). 40-41쪽.

참고로 위 시는 천상병의 <우리집 뜰>입니다. <귀천>은 다들 아시죠?

음악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형식논리를 잣대로 삼을 수도 있지만 상상력도 훌륭한 잣대가 될 수 있습니다. 둘 가운데 어느 것을 중요시할 것인지는 각자의 가치판단에 따를 일입니다만, 한 가지만을 절대시하려는 태도는 곤란하겠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음악 전공자들이 기교는 뛰어나지만 음악적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곧잘 듣습니다.

*

"말러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구성력'입니다. 쉽게 말해 그의 곡은 '웅장하고 멋지게 쓰여진 여러 조각조각들의 모임'이죠."

--> 브루크너와는 달리 말러의 '구성력'과 관련해서는 위 주장에 쉽게 동의하기 힘듭니다. 말러의 음악을 악식론적으로 분석하려면 곤란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석의 기준이 베토벤과 브람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브루크너는 너무 단순해서 탈이고 말러는 너무 변화가 커서 탈이니 적당한 것이 좋겠다면, 그 '적당함'의 기준은?) 왜 그래야 할까요? 바흐를 기준으로 하면 안 될까요? 옳거니, 바흐를 기준으로 하면 베토벤도 브람스도 뛰어난 작곡가입니다만, 말러를 그보다 못한 작곡가라 말하기는 힘들어집니다. 말러는 특히 교향곡 9번 3악장을 작곡하면서 말러의 작곡기법을 깔보는 사람을 조롱하려는 의도를 담았다고 합니다. 대위법으로 말러 교향곡 9번 3악장과 견줄 작품은 과연?

베토벤을 절대 기준으로 놓고 보더라도 여전히 논란거리는 남습니다. 악식론적으로 따져서 곤란한 것은 말러 뿐 아니라 베토벤도 마찬가지거든요. 이를테면 "템페스트" 소나타 1악장에서 제시부의 경계는 어디일까요? 이에 대해 학자들이 일치된 의견을 내는 것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화 하나:

김원철: 마디 20까지가 인트로(intro)이면서 그 속에 제시부에 사용된 주제가 다 들어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선생님: 나름대로 그럴 듯하기는 한데, 참 파격적인 악식론이로구나. 그렇다면 이것을 소나타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김원철: 모르겠네요. ㅡ,.ㅡ (까짓 거 소나타 형식이 아니라고 해도 그만이죠, 뭐. ㅡㅡ;)

"템페스트" 소나타 악보 보기

*

"즉, 필요한 최소한의 소리를 쓰는게 아니라 그의 곡 특유의 '표현력'을 위한다는 목적 아래 가급적 많은 악기(쓸데없지 않은 이상인 부분이 더 많긴 하지만..)가 매 순간 사용되죠."

--> 역시 기준점의 문제입니다. 말러의 관현악법에 낭비가 있다면 그 기준은? (아아, 여기서 말러의 초기 교향곡을 예로 들지는 마세요. 젊은 작곡가는 누구나 허영심이 있기 마련입니다. 허영심을 따지자면 바그너의 <리엔치>야 말로.. ^^;)

*

마지막으로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제기. 서양음악의 형식론은 음악에 유기성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런데 꼭 그래야만 할까요? 길게 쓰기 귀찮으니 예전에 썼던 글 하나만 링크 걸고 도망갑니다. 음악의 눈 (樂眼)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5.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덧글 모음:

pheidias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고클의 그 글을 봤었는데, 교향곡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교향곡이 내포하는 것이 어떤것이던 결국 형식과 구조라는 것과 씨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고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교향곡을 기준으로 바라본다면 브루크너와 말러에 대해서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것도 어느정도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은 됩니다... 물론 그런 측면에서 그들의 작품의 우열을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교향곡이라는 음악을 담는 그릇에대해 가지고 있는 각 작곡가의 생각자체가 다르다고 할수 있으니..

특 히 그 글에서 말러의 관현악법의 낭비라는 것과 말러의 구성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동의할수 없군요...^^ 님의 말대로 말러의 초기작이야 그렇다해도 후기 교향곡의 스코어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수 있을지... 그리고 말러의 대위법적 자질을 접어두고라도 3번 교향곡 1악장 같은곡을, 정말 중구난방의 음악조각들을 소나타 형식(?)에 담아낸 능력은 어찌 보는지...

간만에 좋은 글을 읽어 쓸데없는 말 남긴것 같습니다...^^
2005/07/12 19:04


김원철 앗, 블로그질 사흘 만에 첫 덧글입니다! 고맙습니다~~ >_< 2005/07/12 20:25
schnittke: 글을 참 맛나게 쓰셨네요.
^ㅡ^
05/07/13 08:04
tpch3: 상당히 깊은 생각을 하고 계시는 군요^^ 제가 나름대로 짧게 간단한 반박을 다시 해보자면 일단 저는 브루크너와 말러의 '교향곡'을 재료로 해서 말을 한 것입니다. 이는 앞글의 내용을 보시면 잘 알것입니다. 최소한 '교향곡'이란 장르의 특성과 그것이 '절대음악'이란 것을 생각한다면 과연 상상력과 논리력 중 어느것이 선택되어야 할지는 금방 분명해 질 것입니다. 반대로 '판타지'를 쓰는데 논리력을 논할 사람은 거의 없겠지요. 가곡 등 기타 양식을 논할때 말러와 브람스의의 가곡 중 누가 더 뛰어나냐는 정말로 힘든 논쟁거리가 될 것입니다. 또하나, 형식의 명확성을 말하고 계시는데 저는 그 명확성을 논한것이 아닙니다^^ 작곡가라면 그 의도에 따라 각 부분부분의 구분을 명확히 할 수도,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도록 오버랩해서 다소 모호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부분부분관의 논리적인 관계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또는 앞과 뒤에 있어서 그 이유가 불분명하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관현악법 낭비에 대한 문제는 저도 사실 매우 조심스러운 것인데 실은 님처럼 후기보단 초기의 곡을 노린 것이 더 크다고 고백합니다. 그 분야의 최고자(?)는 역시 님의 말씀처럼 바그너가 되겠지요^^ 05/07/13 11:25
김원철 (wagnerian): 제가 원래 글에서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곽태평님께서 말씀하시는 '교향곡'이라는 개념 자체가 베토벤 등의 음악적 유산에 종속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전통적' 교향곡 개념을 고수한다면 말러의 교향곡은 더 이상 '교향곡'일 수 없습니다. 말러는 단지 'Symphonie'라는 말의 어원적 개념을 빌어 자신의 작품을 '교향곡(Symphonie)'이라고 했을 뿐이지요. 그리고 '절대음악'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습니다만(저는 바그네리안입니다. 한슬릭 즐~ ^^), '전통적' 교향곡의 개념을 버리고 나면 꼭 그것이 '절대음악'이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참고로 저는 순수한 의미의 '절대음악'은 하나의 지향점이 될 수는 있을지라도 실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05/07/13 15:09
김원철 (wagnerian): 또한, '판타지'의 세계에서도 내부적인 논리는 필요합니다. 제가 예로 든 천상병의 시를 보더라도 상상력을 보태고 난 뒤에는 앞뒤가 잘 맞아떨어집니다. 즉, 객관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나면(그 '객관성'의 기준 자체가 베토벤-브람스인 것이 불만이라는 것은 이미 얘기했지요?) 언뜻 모호해 보이는 부분 부분의 관계가 분명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론 감상자(또는 해석자)의 상상력입니다. (사실은 '판타지'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기존의 틀에서 자유로워지면 이론적 분석이 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지휘자는 자신의 판타지를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할 수 있거나 또는 각자의 판타지를 이끌어내어 하나로 융합해내기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이러한 점에서 천재적이라는 얘기를 모 연주자에게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05/07/13 15:09
tpch3: 유감스럽게도 저 개인적인 견해로는 '교향곡'이란 개념 자체를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베토벤의 것에 종속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음악사적으로봐도 분명히 드러나거니와 '하이든'이 틀을 형성하고 '베토벤'에 의하여 일단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 뒤에 나오는 '브루크너'나 '말러' 내지는 '브람스'는 이에 대한 변형 등으로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말 한정시켜 말을 한다면 말씀처럼 말러의 것은 '교향곡'이라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음악에 있어서 '형식' 내지는 '악식'에 관한 문제는 그렇게 쉽게 왈가왈부 할 만한것도, 쉽게 여러 본질중 몇 개를 제외하고 폭넓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못됩니다. '절대음악'의 개념을 싫어하시는 듯 한데 이는 님의 취향이지 일반적인 정의나 통용되는 생각은 아닌 듯 합니다. 저는 가급적 객관적으로 보기를 원하기 때문에 역시 한쪽이 명백히 맞다고 생각하기를 원치는 않으나 이 부분에 대해선 별 수 없다 생각할 정도로 저 주변과의 논의에서도 결정이 났고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판타지'의 예를 든 것은 그곳에 논리가 없다는 게 아니라 '교향곡'과의 비교를 위한 것입니다. '객관성'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하셨는데05/07/13 17:05
tpch3: 그렇다면 이 세상에 모든 음악이 표제 음악이 되어버리겠군요^^ 음악사상 가장 완벽한 형식이라 하는 '소나타'와 '푸가'를 생각해보십시요. 어느 범주에 들어가는지 판단은 쉽게 내리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05/07/13 17:41
김원철 (wagnerian): '교향곡'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으니 대충 상황정리가 된 것이지요? ^^05/07/13 18:05
김원철 (wagnerian): 저는 '절대음악'을 싫어한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말러의 음악을 최대한 절대음악의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논지는 절대음악-표제음악 이분법은 낡은 흑백논리라는 것입니다. 제가 '한슬릭 즐~'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했습니다만, 사실 한슬릭의 논리는 당시에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편의상 좌익-우익의 비유를 하자면, 당시에는 극우파가 판치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추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극좌파의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좌우의 이념 대립이 언제까지나 흑아니면 백 식의 일차원적인 대결 양상이 되면 곤란합니다. '객관성'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고 모든 음악이 표제음악이 된다는 생각은 마치 우파가 정권을 잃으니 한반도가 빨갱이 천지가 된다는 발상과도 같습니다. (어째 정치 얘기를 하자니 뉘앙스가 좀 이상해지는 것도 같습니다. 그냥 편의상 비유로만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결국 하고싶은 주장은 절대음악-표제음악 이분법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근본적인 문제제기: 세상에 절대적인 객관 또는 절대적인 주관이 있을 수 있습니까? 어떤 수학자는 수학 논리 체계 또한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합니다. (누구더라..--a)05/07/13 18:07
ashkenazy7: 제가 괜히 끼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어떤 잣대에서 보는가에 따라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아는 미국에서 음악학으로 박사를 하신 분 이야기 들어보면 우리가 요즘 그렇게 흥분하며 연주가 많이 되고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은 사실 서구의 음악학에서는 그리 비중을 차지 못하고 그냥 슬쩍 언급만하는 정도라네요. 그리고 작곡을 전공하시는 분도 형식을 중요시하는 서구, 특히 독일 음악 쪽에서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 높이 평가될 수 없으며, 러시아 음악의 특징인 서사적인 흐름 안에서 평가된다면 달라질 수 있지 않겠냐고 말씀하시더군요. 사실 러시아에서는 쇼스타코비치가 러시아의 베토벤 아닙니까?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현재 교향곡은 소멸되고 있는 장르라고 알고 있습니다. 20세기 초.중반에도 하르트만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향곡을 작곡하신 분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경향의 작곡가였고요.
그래서 해체되기 일보직전의 후기 낭만주의 교향곡을 브람스나 베토벤 교향곡의 잣대에서 평가하기보다는 그 시대의 관점에 맞추어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네요
05/07/13 20:20
tpch3: 두 분의 의견 잘 읽었습니다. 자꾸만 저의 의견이 넓게 확대 해석되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까운데 저는 최소한 같은 '장르'의 곡들에 비해서 시대를 초월하여 비교를 할 수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곡이쓰여질 때 단순히 그 곡뿐만 아니라 그 시대상황, 작곡가의 상태 등이 곡의 여러 중요 요소가 되겠지만 곡 자체의 완성도 등을 논할 때 분명 시대와 상관없는 '음악적 절대성'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저는 '곡 그 자체'만을 상대로 하였으며 그 밖의 시대관점이랄지 작곡가만의 특색은 가능한 배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절대음악에 관한 이야기는 원 글과 상관없이 확대되어 나온 이야기 같으므로 더이상 논하지 않겠습니다. 김원철님의 말씀도 제가 읽기에도 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뜻하지 않게 제 글이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을 매우 아쉽게 생각하며 이쯤에서 논의를 마치고자 합니다. 저도 더이상 제 생각을 끝까지 맞는 것이라 주장할 뜻도 없고(애초에 그걸 원한 것이 아니였으니까요) 같이 음악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서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어쨋든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봅니다. 저 뿐만 아니라 모든 고클인들이 자신의 생각을 재정리하며05/07/14 01:33
tpch3: 또한 다른 많은 의견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많은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이만 ㅡ05/07/14 01:33
scherzo: 역사성을 배제한 '음악적 절대성'이란 게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부터 생각해 보아야 것 같은데요?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평가하고 싶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고 그런 시도도 어느 정도는 확실히 가치 있는 것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객관성'이라는 개념조차 이미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개념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를 테면, '교향곡'이라는 장르의 의미가 이미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 개념인데, 그것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베토벤의 교향곡과 말러의 교향곡은 같은 장르이면서도 같은 장르가 아닌 것이죠. 그리고 '곡 그 자체' 안에도 이미 많은 역사성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배제하는 순간 그 음악은 절름발이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원히 통용되는 예술사도, '객관적' 음악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음악사는 새로운 것, 살아있는 감수성, 시대의 정신적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언젠가 객관적 음악사라는 것이 있게 된다면, 그때는 음악 자체가 죽었다고 추측해도 된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05/07/14 19:21
김원철 (wagnerian): 역사성을 배제한 '음악적 절대성'이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음악학자를 본 적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한 전제는 음악사적 발전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더군요. 즉 바흐-모차르트-베토벤-브람스로 이어지는 조성 시대가 서양음악의 황금기였고, 그 이전의 음악은 미개하며, 그 이후의 음악은 사양길이라는 식입니다. 미국의 꽤 유명한 학자인데, 내한 강연회에서 그 말을 듣고 황당해 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가 훗날 수업시간에 그에 대한 저의 의견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아, 저놈이 미친놈이구나!" (일동 쓰러짐)05/07/14 21:50
김원철 (wagnerian): 역사성을 배제한 '음악적 절대성'이 있는지 없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있다면 그것을 함부로 정의하려는 태도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를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라 했던가요?05/07/14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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