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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7일 화요일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트리오 2번 e단조, Op. 67

쇼스타코비치 음악을 설명하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다면성이다. 그의 음악에는 브람스적인 논리 구조와 바그너적인 마법의 순간이 공존하고, 음악에 담긴 정서에는 기쁨과 슬픔, 쾌락과 고통이 공존한다.

피아노 트리오 2번 e단조는 작곡가의 절친이었던 이반 이바노비치 솔레르틴스키를 추모하는 곡이다. 그는 쇼스타코비치의 벗이자 멘토였고, 쇼스타코비치가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에 큰 영향을 받게끔 했던 인물이었으며, 작곡가가 1악장을 쓰던 중에 41세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심근경색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독일의 러시아 침공, 유대인 학살, 스탈린 시대 러시아의 억압적인 분위기 등 암울한 사회상이 있다. 이 작품은 스탈린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들여져 1848년부터 스탈린 사망 직후인 1953년까지 러시아에서 금지곡이 되었다.

이 작품의 드라마투르기는 벗의 안식을 기원하는 음악으로 보기 어려운 짜임새로 되어 있다. 1악장은 마치 유령이 허공을 떠도는 듯한 푸가토로 시작해 슬픔과 울분을 축적해 나간다. 2악장은 솔레르틴스키의 누이에 따르면 솔레르틴스키의 인간적 특징을 음악으로 풍자하고 있다. 그러나 음악에 담긴 냉소적인 태도는 그 이면에 냉소와 울분의 원인이 되는 다른 것들이 있음을 짐작게 한다.

3악장은 파사칼리아 풍의 침울한 장송행진곡이며,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장례식에서 이 음악이 연주되기도 했다. 휴지부 없이 곧바로 이어지는 4악장은 작곡가의 표현으로 “죽음과 절망의 춤”으로, 후반부에 앞선 악장들을 인용하는 대목은 벗을 그리워하는 작곡가의 술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4악장에는 유대인 전통 음악 양식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래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비판 의식이 음악에 담겨있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쇼스타코비치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자신의 음악에 나타나는 다면성이 유대인 음악의 영향이라고 밝힌 바 있다.

2013년 7월 8일 월요일

작품 설명: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서곡,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 책자에 실릴 글입니다.

▶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서곡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는 성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왕과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히브리 백성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나부코'라는 이름은 '느부갓네살'을 이탈리아식으로 축약한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지요. 이번에 경기필이 연주할 서곡에도 그 선율이 담겨 있습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히브리가 전쟁에서 바빌로니아에 패합니다. 예루살렘 왕의 조카인 이스마엘레는 예루살렘에 인질로 잡혀 온 바빌로니아의 페네나 공주와 사랑하는 사이로, 페네나를 탈출시키고 싶어합니다. 페네나의 언니인 아비가일레는 히브리 포로를 모두 풀어줄 테니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말하지만, 이스마엘레는 거절합니다. 자카리아는 솔로몬 성전을 파괴하려는 나부코 군대에 맞서 페네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인질극을 벌이고, 이스마엘레가 페네나를 구합니다.

아비가일레는 자신이 노예의 몸에서 태어났으며, 나부코 왕이 페네나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포로로 잡혀 온 자카리아는 페네나에게 유대교 율법을 가르치고, 페네나를 구한 이스마엘레를 히브리 사람들 앞에서 변호합니다. 한편, 나부코는 자신이 신이라고 선언했다가 벼락을 맞고 쓰러집니다. 아비가일레가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페네나가 포함된 히브리 포로를 처형하고자 제정신이 아닌 나부코에게 승인 서명을 받아냅니다. 뒤늦게 사실을 깨달은 나부코가 아비가일레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겠다고 협박하지만, 아비가일레는 증거를 없애고 나부코를 감금합니다. 노예가 된 히브리 포로들이 조국을 그리워하며 노래합니다.

페네나가 형장으로 끌려갈 때, 나부코가 제정신을 차리고 히브리 신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충신 압달로가 부하를 거느리고 나타납니다. 나부코가 앞장서며 페네나와 히브리 사람들을 구하고, 바빌로니아 신상이 저절로 부서집니다. 나부코는 히브리 사람들을 풀어 주고, 바빌로니아 백성으로 하여금 히브리 신을 찬양하게 합니다. 아비가일레는 독약을 마시고, 페네나와 이스마엘레에게 용서를 구하며, 히브리 신에게 자비를 구한 뒤 죽습니다.

▶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작곡가가 최초 구상 후 개정하는 과정에서 교향곡이 될 뻔했던 작품으로, 일반적인 협주곡과 달리 교향곡처럼 몰아치는 관현악에 피아노가 홀로 맞서야 하는 까닭에 협연자에게 엄청난 도전이 되는 작품입니다. 특히 1악장은 짜임새도 매우 길고 복잡해요.

1악장은 확장된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시부―발전부―재현부'를 기본 형태로 하는 소나타 형식에 관해 대충 아시는 분이라면, 강렬한 오케스트라 총주에 이어 여리게 흐르는 대목을 제시부 제2 주제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소나타 형식의 짜임새를 분석하려면 음 소재, 텍스처, 조성 구조 등을 복합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여러 주제로 된 '제1 주제군(thematic group)'이 한참 더 이어지고, 피아노가 처음 나올 때에도 제1 주제군을 이어가지요. 마침내 피아노 독주로 나오는 제2 주제는 느리고 달콤합니다.

▲ 1악장 제2주제

2악장은 그냥 편하게 들으면 됩니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애틋한 추억 한 자락,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보세요. "잘있나요? 저는 잘있어요!"

브람스는 자필 악보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Benedictus qui venit in nomine Dominus)"라고도 썼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말씀으로 레퀴엠 가사로도 곧잘 쓰이는 구절이지요. 이 곡을 쓰는 동안 브람스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슈만이 죽음을 맞기도 했습니다.

3악장은 들뜬 분위기로 마구 달리는 즐거운 악장입니다. 론도 형식으로 A―B―A'―B'―푸가―A"―B"―카덴차―종결구 꼴 짜임새이고, 론도 주제(A)와 에피소드 주제(B)는 잘 들어보면 음악적 뿌리가 같지요. 사실은 1악장 제2 주제와도 뿌리가 같습니다. 푸가에서는 론도 주제와 에피소드 주제가 뒤섞이면서 마치 소나타 형식의 발전부와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가만 보면, 3악장 짜임새가 론도 형식이면서도 소나타 형식과 닮은꼴이기도 하지요! 종결구에서는 에피소드 주제(B)와 론도 주제(A)가 느리게 나온 다음, 곧바로 결승점으로 마구 달려갑니다. 마지막에 짧은 카덴차가 또 나옵니다.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곡을 통틀어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곡이지요. 구소련에서는 스탈린상을 받은 이 작품을 공산당을 찬양하는 걸작으로 선전해 왔지만, 오히려 이 곡은 스탈린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읽을 수 있는 양면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과 관련해 기막힌 사연이 있어요. 쇼스타코비치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부인》을 발표했다가 스탈린 정권에 단단히 밉보입니다. 스탈린이 그 공연을 관람하고는,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서 쇼스타코비치를 직접 비판했거든요. 작품 속에 부패한 소련 경찰이 등장하는 등 스탈린의 심기를 거스르는 내용이 있기도 합니다. 서슬 퍼렇던 스탈린 정권 때 그런 일이 있었으니, 작곡가가 얼마나 큰 위협을 느꼈을지 짐작할 수 있겠죠?

그래서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4번 발표를 미루고 5번 교향곡을 작곡해 먼저 발표합니다. 베토벤 교향곡 5번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어둠에서 광명으로’ 짜임새를 사용하고, 어마어마한 승리의 팡파르로 곡을 끝맺었지요. 스탈린 정권은 이것을 '공산당의 위대한 승리'로 받아들였나 봅니다. 그러나 훗날 밝혀진 여러 증거는 예술가를 탄압하는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이 작품에 담겼음을 시사합니다.

1악장은 현악기의 돌림노래로 시작합니다. 목놓아 울부짖는 듯한 이 대목은 소나타 형식의 도입부, 그리고 바로 이어 나오는 바이올린의 느린 선율이 제1 주제라 할 수 있겠는데, 이곳에 나온 음형이 곡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제2 주제에 해당하는 음형은 도입부 음형과 뿌리가 같아요. 그러니까 첫 열두 마디쯤이 조각조각 나뉘어 1악장이 끝날 때까지 변형, 발전하는 짜임새입니다. 사실은 곡이 끝날 때까지 이 음형이 계속 변형되어 나오지요.

골치 아픈 얘기를 더 늘어놓지는 않을게요. 스탈린 시대 러시아를 상상하면서 들어 보세요.

▲ 1악장 바이올린 악보 1~14마디. 연필로 써놓은 흔적은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의 해석이며, 출처는 뉴욕필 디지털 도서관(http://archives.nyphil.org).

2악장에서는 무시무시한 냉소가 음악을 지배합니다. 작곡가가 일부러 듣기 싫게 잔뜩 꼬아놓은 음표로 가득해요.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대목이 없다시피 하므로, 집중해서 '시퍼렇게 날을 세워' 연주해야 제맛이 나는 악장입니다. 세상이 어딘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생각에 공감하고 분노해야만 이 악장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3악장은 현을 중심으로 서럽게 울어대는 악장입니다. 금관악기는 아예 나오지 않고, 가끔 목관악기와 하프가 거드는 정도이지요. 울다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게 아니라, 그냥 목놓아 울고 나서 허무하고 쓸쓸하게 끝납니다.

4악장은 '혁명이다!' 이 한 마디로 설명이 됩니다. 문제는 이 혁명이 어떻게 끝나느냐인데요, 앞서 이 작품이 스탈린 정권을 찬양하거나 비판하거나, 어느 쪽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양면적인 작품이라 했지요. '혁명'의 끝 또한 어느 쪽인지 애매합니다. 빛나는 승리일 수도 있겠지만, 또 어찌 들으면 그저 뜬금없고 과장되기만 한 정신승리 같기도 하거든요.

4악장 종결구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끝없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D 장조 으뜸화음입니다. 으뜸화음이 무려 74마디 가까이 음악을 지배하지요. 물론 중간에 화음이 조금씩 바뀌기는 하지만, 금관악기가 연주하는 주선율이 다른 화음을 불러올 때에도 현악기와 목관악기가 거의 같은 음을 고집스럽게 연주하면서 으뜸화음의 '중력권'을 벗어나지 않게끔 합니다. 말러 교향곡 1번이 비슷하게 끝나는데, 아마도 쇼스타코비치가 말러를 흉내 냈을 거예요.

2012년 11월 5일 월요일

윤이상 8중주, 뵈니슈 클라리넷 사중주, 지브코비치 하나를 위한 삼중주, 쇼스타코비치 현악사중주 8번, 헨델-할보르센 파사칼리아, 빌라로부스 쇼루스 7번

어제 연주회 팸플릿에 실은 작품 해설입니다. 기록 차원에서 제 블로그에도 올려 둡니다. 표기법과 내용을 일부 고쳤습니다.


윤이상, 클라리넷과 파곳, 호른, 현악오중주를 위한 8중주

Yun Isang, Octet for Clarinet/BassClarinet, Basoon, Horn, String Quintet

라디오 프랑스의 위촉으로 1978년 4월 10일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윤이상의 후기 양식이 잘 나타나는 이 작품은 동動-정靜-동動 세 부분으로 된 단악장 짜임새이며 정중동(靜中動)이라는 동아시아적 개념이 윤이상의 작곡 기법인 이른바 '중심음(Hauptton)/중심음향(Hauptklang)' 기법 속에서 잘 나타난다.

중심음 기법이란 동아시아 전통음악에서 음 하나하나가 정지되어 있지 않고 유연하게 흐르듯 변화하는 특징을 서양음악에 옮겨온 기법을 말하는데, 윤이상은 이와 관련해 동아시아 음악과 서양음악의 차이를 붓글씨와 펜글씨의 차이에 비유한 바 있고, 실제로 이 곡에서는 국악을 연상시키는 음형과 연주법 등이 나온다.

중심음이 모여 음향 덩어리를 이룬 것이 중심음향이며, 이것이 동아시아 음악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음색을 서양음악으로 재현하는 핵심 장치가 된다. 그리고 중심음향이 변화하는 핵심 원리가 바로 ‘정중동’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뵈니슈, 클라리넷 사중주

Josef Bönisch, Quartet for Clarinet

요제프 뵈니슈(1935―)는 독일 작곡가이자 플루트 연주자이다. 바이마르 콘서바토리와 라이프치히 음악대학을 졸업했고, 여러 오케스트라 및 앙상블 단원으로 활동했다. 독일 할레에 있는 헨델 콘서바토리 교수로 있으면서 실내악과 관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다수 작곡했다. 뵈니슈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작곡가는 아니지만, 뵈니슈가 작곡한 많은 곡이 콩쿠르 지정곡으로 쓰이거나 작곡상을 받는 등 전문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뵈니슈는 어려운 현대음악이 아니라 듣기 쉬운 작품을 쓴 작곡가이다. 뵈니슈의 클라리넷 사중주는 처음 듣는 사람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곡으로, 클라리넷 여러 대가 화음을 연주할 때 들을 수 있는 음색이 특징적이다. '식물성 사운드'라고 이름 붙일 만한 담백하면서도 탱글탱글한 소리를 내는 클라리넷, 그리고 비슷한 음색으로 낮은 소리를 내는 베이스클라리넷이 어우러지는 독특한 음향은 마치 마법의 세계를 보는 듯한 신비로움을 느끼게끔 한다.

지브코비치, 하나를 위한 삼중주

Nebojša Jovan Živković, »Trio per Uno«

네보이샤 요반 지브코비치(1962―)는 세르비아 출신 작곡가이자 타악기 연주자이다. 20세기 이후로 클래식 음악계에서 보기 드물어진 '연주자 겸 작곡가'로 활동하는 지브코비치는 현존하는 가장 독특하고 표현력 있는 음악가이자 최고의 마림바/타악기 독주자로 평가받는다. 독일 만하임 음악대학과 슈투트가르트 음악대학에서 작곡, 음악 이론 및 타악기를 전공했다.

지브코비치는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미국, 일본, 대만, 한국, 남미,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지역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타악기 연주자로서 슈투트가르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뮌헨 심포니 오케스트라, 하노버 방송교향악단, 보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오스트리아 체임버 심포니 오케스트라, 빌레펠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핀란드 투르쿠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오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코스타리카 국립 오케스트라, 리투아니아 국립 교향악단 등과 협연했다.

《하나를 위한 삼중주》는 타악기 삼중주곡이며 연주자 3명이 타악기 10여 가지를 연주한다. 3악장 짜임새로, 1악장과 3악장은 마치 원시적인 종교의식처럼 사납고 박진감 있으며, 2악장은 차분하고 명상적이다. '하나를 위한 삼중주'라는 제목은 3명이 연주하는 여러 타악기 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져 마치 한 가지 '타악기 세트'에서 나는 소리처럼 들리게끔 작곡가가 의도했음을 뜻한다.

쇼스타코비치, 현악사중주 8번 c단조

Dmitri Shostakovich, String Quartet No. 8 in c Op. 110

쇼스타코비치 《현악사중주 8번 c단조》는 1960년 작품으로 쇼스타코비치는 악보에 "파시즘과 전쟁 희상자에게 바친다"라고 썼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작품을 쓰기에 앞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드레스덴 시와 유대인 학살 현장을 러시아 정부의 요청으로 둘러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작곡가 개인의 삶을 담은 작품으로도 볼 수 있으며, 정부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어야 했던 작곡가의 삶을 돌이켜볼 때 이 주장은 강한 설득력을 얻는다. 쇼스타코비치는 훗날 이 작품과 파시즘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고, 쇼스타코비치의 친구였던 레베딘스키(Lev Lebedinsky)는 이 작품이 작곡가의 묘비명 같은 곡으로 이 당시 쇼스타코비치가 자살을 준비했다고 주장했다.

느리고 어두운 애가(哀歌) 풍이 두드러지는 이 작품은 작곡가 자신의 이름에서 따온 'DSCH' 음형으로 시작하여 이 음형이 작품 전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DSCH' 음형이란 D(레)-E♭(미플렛)-C(도)-B(시) 음으로 된 음형을 가리키며, D, S, C, H를 독일어 식으로 읽으면 독일식 음이름과 각각 일치한다.) 5악장으로 되어 있으며 5개 악장이 한 악장처럼 이어서 연주된다.

헨델-할보르센, 파사칼리아 g단조

Händel-Halvorsen, Passacaglia in g

헨델의 하프시코드 모음곡 제7번 g단조 6악장 '파사칼리아'를 노르웨이 출신 작곡가이자 지휘자 요한 할보르센(1864~1935)이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이중주곡으로 고친 작품으로, 원곡보다 할보르센의 편곡이 더욱 유명하다. 헨델의 원곡은 애절하고 격정적인 선율과 화성이 하프시코드의 날카로운 음색으로 나타나는 작품이며, 할보르센은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날카로운 음색으로 원곡 느낌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악기의 매력을 잘 살리도록 편곡했다.

현악기 한 대로 두 음 이상을 동시에 연주하는 이른바 '더블 스톱'(double stop) 주법이 반복적으로 사용되었고, 이에 따라 바이올린 한 대와 비올라 한 대만으로 현악사중주와 같은 풍부한 소리를 내도록 쓰였다. 이러한 까닭에 이 작품을 연주하려면 난이도가 매우 높은 테크닉이 필요하다.

파사칼리아란 변주곡의 한 종류를 일컫는 말로 때때로 ‘샤콘느’와 혼용되기도 한다. 17세기 스페인 춤곡에서 유래했고, 주로 저음에서 반복되는 음형과 3박자 또는 부점 리듬이 특징적이다. 헨델-할보르센의 파사칼리아 이외에 널리 알려진 파사칼리아 작품으로는 바흐의 오르간을 위한 파사칼리아 c단조 BMV 582, 브람스 교향곡 4번 4악장, 베베른의 파사칼리아 등이 있다.

빌라로부스, 쇼루스 제7번

Heitor Villa-Lobos, Chôros No. 7 for winds, violin and cello

에이토르 빌라로부스(Heitor Villa-Lobos, 1887~1959)는 브라질 작곡가로, 《브라질 풍의 바흐》 연작과 《쇼루스》 연작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쇼루스'(Chôros)는 포르투갈어 '쇼루'(chôro)에서 온 말이며, '쇼루'는 '울다' 또는 '탄식하다'를 뜻하는 동시에 브라질 대중음악 양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19세기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 길거리 음악에서 유래한 쇼루는 낱말의 본디 뜻과는 다르게 빠르고 경쾌한 음악을 포함하는 기악 음악이다.

빌라로부스의 《쇼루스》 연작은 악기 편성을 달리하는 16개 작품으로 되어 있는데, 드뷔시 · 라벨 · 스트라빈스키 등의 영향과 브라질의 토속적 분위기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쇼루스 제7번》은 바이올린, 첼로와 목관악기 등을 위한 곡으로 흥겨운 분위기 속에 은근한 우울함이 숨어 있어 독특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2011년 6월 28일 화요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9번 /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 슈트라우스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 휴 울프 / 서울시향

2011-06-03 오후 08:0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 휘 : 휴 울프
바이올린 :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프로그램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9번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슈트라우스,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을 15곡 남겼다. 그러나 9번 교향곡을 들어보면 쇼스타코비치가 '9번의 저주'를 의식했음을 역설적으로 알 수 있다. 베토벤 이래 교향곡 9번이라 하면 작곡가가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운 진지한 작품, 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작품 등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런데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9번은 숫자가 주는 상징성과는 달리 유머로 가득하다. 웃음으로 저주를 물리치고자 했다는 뜻이다. 번스타인은 '9번'이라는 숫자 자체가 이 작품에서는 유머라고도 했다.

분위기가 가벼워서인지, 이 작품은 지휘자가 개성을 드러낼 만한 대목이 좀처럼 없다. 음반을 들어 봐도 비슷비슷한데, 지휘자 휴 울프는 그래도 나름대로 자기 색깔을 넣고자 노력하는 듯했다. 2악장 템포를 악보에서 지시한 ♩= 208보다 두 배나 느리게 잡은 대목은 그다지 특이하지 않다. 그런데 마디를 잘게 나눠 박자를 저어준 대목은 참 인상 깊었다. 템포가 이처럼 느리면 리듬이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이른바 '만득이 현상'이 일어나기 쉽다. 이 문제를 가장 손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휴 울프처럼 해주는 것이지만, 모양새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더 좋은 앙상블을 이끌어 내고자 지휘자가 그만큼 노력했다는 뜻이니 칭찬해 마땅하다.

휴 울프는 단원들에게 맡겨도 될 만한 독주 악구까지 지휘봉으로 모두 통제하는 듯했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4악장에서 5악장으로 넘어갈 때 템포 변화였다. 악보에서 지시한 템포는 4악장 ♪ = 84, 5악장 도입부 ♩= 100이다. 4악장에서 5악장으로 곧바로 넘어가면서 바순 독주가 갑자기 템포를 바꾸고 리듬도 빨라진다. 점잖은 유머다. 그러나 휴 울프는 이 대목을 좀 더 매끄럽게 다스리고 싶었나 보다. 4악장에서 5악장으로 넘어가면서 템포 변화를 거의 주지 않았고, 주제 선율이 두 번째로 되풀이될 때에 아첼레란도를 주었다. 현악기가 주제 선율을 받을 때에는 악보에서 지시한 ♩= 100보다 좀 더 빠른 ♩= 120쯤으로 달렸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9번만큼 멋진 바순 독주가 있는 관현악곡은 드물다. 바순은 다른 악기와 섞이면 존재감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바순은 독주 악기라기보다는 다른 악기와 섞어서 음색에 변화를 주는 악기이며, 이런 바순에 독주를 맡기려면 다른 악기를 조심해서 써야 한다. 오케스트라 바순 주자에게는 억울한 일이다. 그런데 이날 오랜만에 곽정선 수석이 멋진 솜씨를 뽐냈다. 곽정선은 얼마 전까지 직책이 수석대행이었지만, 이번에 시향 홈페이지에 가 보니 수석으로 바뀌었다. 연주가 끝나고 지휘자가 곽정선을 홀로 일으켜 세운 일만 세 차례나 되었다.

또 지금은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수석이 된 전임 트럼펫 수석 알렉상드르 바티가 오랜만에 객원으로 솜씨를 뽐냈다. 트롬본 수석 노릇을 한 객원 연주자도 훌륭했는데, 누군가 싶어서 알아보니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 앙투안 가네(Antoine Ganaye)라고 한다. 2악장에서 클라리넷 수석 채재일과 함께 멋진 연주를 들려준 못 보던 클라리넷 연주자가 있어서 시향 홈페이지에 가 보니 이름이 정은원이다. 3악장에서 피콜로를 연주한 장선아도 훌륭했다.

슈트라우스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에서는 E♭ 클라리넷을 연주한 임상우 부수석이 돋보였다. 본디 악보에는 D조 클라리넷으로 연주하라고 나오지만, 이 악기는 요즘 거의 사라진 탓에 E♭ 클라리넷으로 이조해 연주하는 일이 보통이다. 지난해 3월 스테판 애즈버리 지휘로 같은 곡을 연주했을 때에도 임상우가 E♭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이날도 그때처럼 곧고 날카롭고 빈틈없는 소리가 멋졌다.

지난해 연주와 견주자면 이날 앙상블이 좀 더 깔끔했지 싶다. 그날 몇몇 연주자들이 실수했던 대목이 이번에는 모두 말끔하기도 했다. 다만, 매끄럽고 균형 잡힌 소리 때문인지 음향 효과를 과감하게 살리는 맛은 조금 모자랐다. 템포 변화도 애즈버리와 견주면 평면적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가 녹음한 협주곡 음반을 들어 보면, 바이올린 소리가 작아서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지 못해 답답하다는 느낌이 든다. 아티큘레이션에서도 절제가 묻어난다. 그런데 이날 브람스 협주곡을 들어보니 음반과는 달리 남들보다 소리가 아주 조금 작을 뿐이었다. 이날 연주는 모든 면에서 이성과 감성이 브람스답게 조화를 이룬 명연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악기를 온몸으로 연주하는데 소리가 저렇게밖에 안 난다고? 현대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더니 그 때문일까?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과연, 소리가 작은 악기인데 테츨라프라서 티가 덜 나는 것이란다. 현 네 줄에서 뽑아내는 음색이 테츨라프만큼 고른 연주자도 없는 듯한데, 이 또한 악기 때문일까, 아니면 연주법에 무슨 비밀이 있을까? 테츨라프가 쓰는 그라이너 바이올린이 모델로 삼았다는 과르네리 바이올린을 테츨라프가 연주하면 어떨지 궁금하다. 또는, 옛날에 썼다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으로 브람스 협주곡을 연주하면 어떨지도 궁금하다.

2010년 3월 28일 일요일

R. 슈트라우스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 하이든 첼로 협주곡 D 장조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 주연선 / 스테판 애즈버리 / 서울시향

2010년 2월 25일(목)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 : Stefan Asbury
협연 : 주연선

R. Strauss, Till Eulenspiegels lustige Streiche
Haydn, Cello Concerto No. 2 in D
Shostakovich, Symphony No. 7 "Leningrad"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글쓴이는 스테판 애즈버리 팬이다. 현대음악 전문 지휘자라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고 있을 뿐, 글쓴이는 그를 얀손스같은 스타 지휘자와 동급이라 여긴다면 믿으시겠는가? 이번 연주회에서 애즈버리가 얼마나 훌륭했는지는 첫 곡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에서부터 드러났다. 이 곡은 어지간한 유럽 지방 악단도 실황 음원을 들어보면 때때로 앙상블이 흐트러지기 일쑤일 만큼 연주하기 까다로운데, 이날 서울시향은 같은 기준으로도 썩 잘했다. 서울시향 솜씨가 그만큼 늘었기도 하겠으나, 이제껏 서울시향을 지휘한 사람 가운데 첫 곡에서 이토록 놀라운 소리를 뽑아낸 지휘자가 또 누가 있던가? 정명훈뿐이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길고 까다로운 곡이니만큼 앙상블이 살짝 흔들리는 일이 없지 않았으나, 애즈버리현대음악 전문 지휘자답게 음악 흐름에 가장 알맞은 음향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다스리는 남다른 솜씨를 보여주었다. 템포는 느린 편이었으며 3악장과 4악장 느린 대목에서는 템포를 몹시 느리게 잡아서 애달픈 느낌을 더했다. 그러나 빠른 곳에서는 악보에 있는 메트로놈 지시보다 오히려 빨라지기도 해서 굼뜬 느낌은 없었다.

가장 멋졌던 곳은 1악장 행진곡 리듬이 나오는 이른바 '침공(invasion)' 주제였다. 이 대목은 선율이 몹시 단순하고 유치해서 버르토크《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에서 패러디하며 잔뜩 비꼬기도 했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수룩한 선율이 아니라 작은북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차가운 음색이다. 이때 작은북은 마치 바이올린과 목관악기 따위가 행진곡 리듬을 연주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끔 그 소리를 감싸 안아야 하는데, 애즈버리는 오케스트라 한가운데 바이올린과 비올라 사이에 작은북 한 대를 두어 자연스러운 음향을 이끌어 내었다. 타악기 수석 에드워드 최가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으며, 긴 호흡으로 만들어가는 크레셴도에 마치 나치 시대 독일군이 멀리서부터 쳐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보일 듯해 소름이 돋았다. 마디 365에서 심벌즈가 처음 나올 때 무대 뒤 작은북 두 대가 리듬을 이어받았으며, 에드워드 최는 이때 재빨리 무대 뒤로 가 셋이 함께 격렬한 총주와 어우러졌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았던 곳을 말하자면, 이를테면 3악장 처음은 오르간 느낌이 나는 곳이나 이날 목관악기 소리가 조금 작아서 음향이 살아나지 못했다. 4악장에서 마지막 폭발을 앞두고 긴장감을 쌓아가다가 마디 566에 이르면 호른 독주가 나오는데, 이때 호른에 붙은 셈여림표는 포르테(f)이나 모든 현과 목관악기가 ff로 마치 울부짖는 듯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야 한다. 그러나 이날 목관 악기 소리가 작아서 안타까웠다. 2악장에서 베이스 클라리넷이 선율을 이끌어가는 대목(마디 251)에서는 한 호흡에 부드럽게 이어 연주하지 않고 조각조각 끊어 연주했고 소리도 작았다. 이 대목은 악보를 보면 도대체 숨을 쉴 만한 곳이 없는데다가 이른바 '순환호흡'을 하더라도 음 하나하나가 길어서 매끄럽게 연주하기 어려워 보이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나, 잘 연주하면 매우 멋진 곳이라 아쉬움을 남겼다.

그런데 아쉬웠던 곳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체력이 모자란 탓이 아닐까 싶다. 금관악기는 그다지 큰 문제를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 곡이 트럼펫과 트롬본이 6대씩, 그리고 호른은 8대 또는 더블링(doubling)까지 생각하면 9대 이상 쓰이는 거대편성인 덕분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목관은 3관 편성이라 연주자들이 많이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올해 서울시향말러 교향곡을 연주하겠다니 이참에 체력을 쌓아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대편성 곡을 연주하기에는 단원 수가 모자라 객원 연주자로 채워야 할 터이니 문제다.

시향 단원 가운데 이날 남달리 눈에 띈 연주자도 있었으니 E♭ 클라리넷을 연주한 임상우 부수석이다. 보통 '클라리넷' 하면 B♭ 또는 A조 클라리넷을 말하는데, 이날 클라리넷치고는 매우 높은 소리를 내던 악기가 바로 E♭ 클라리넷이며, 《틸 오일렌슈피겔》 악보에는 D조 클라리넷으로 나와있으나 요즘은 거의 사라진 악기라 보통 E♭ 클라리넷으로 연주한다. 이 곡에서는 B♭ 클라리넷보다 E♭ 클라리넷이 더 돋보이므로 채재일 수석이 아닌 임상우 부수석이 E♭ 클라리넷을 연주한 일이 이상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곡에 쓰인 무시무시한 고음은 플루트나 피콜로처럼 반짝여서도 안 되고, 오보에처럼 아련한 느낌이 들어서도 안 되며, 단단하면서도 날 선 송곳처럼 날카롭고 거침없어야 한다. 부드럽고 여린 소리를 누구보다 잘 내는 채재일이 이런 소리를 내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우며, 곧고 빈틈없는 소리를 내는 임상우야말로 이 악기에 알맞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에서도 임상우가 E♭ 클라리넷을 멋지게 연주했다.

하이든 작품은 딱히 독창적인 해석이 필요하지 않아서 연주자 기량이 민얼굴처럼 드러나므로 연주자에게는 오히려 가장 어렵다. 하이든 D 장조 첼로 협주곡을 협연한 주연선 또한 몇 군데 작은 실수를 해서 누리꾼 사이에서 혹평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 곡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을 터이므로 시향 수석 단원 솜씨를 뽐내려는 기획이라면 그다지 실속 없는 선곡이라 본다. 주연선이 연주하는 첼로는 비단결처럼 은은한 빛을 머금은 소리가 참으로 멋진데, 이것을 뽐내려면 19세기 곡 또는 애즈버리가 옌스 페터 마인츠와 협연해 음반을 남긴 윤이상 첼로 협주곡을 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2009년 8월 28일 금요일

2008.01.09. 쿠르타그 '스틸리' / 슈만 피아노 협주곡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 세르히오 티엠포 / 성시연 / 서울시향

2008년 1월 9일(수) 오후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휘자 : 성시연
협연자 : 세르히오 티엠포 Sergio Tiempo, 피아노

Kurtag, Stele
Schumann, Piano Concerto in a, Op. 54
Shostakovich, Symphony No. 5 in d, Op. 47



쿠르타그(Kurtág György; 1926-)의 <스틸리 Stele>는 버르토크와 베베른과 리게티를 합쳐놓은 듯한 텍스처와 낯설고 신비롭고 꿈처럼 몽롱한 음향이 인상깊은 작품이다. 서울시향의 연주를 들으면서 나는 마치 크게 앓다가 혼이 잠시 몸을 벗어나 흐느적거리며 떠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높은 곳에 떠서 제 몸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끈적끈적하고 찝찝한 느낌에 몸서리치다 집 밖으로 나오면 떠들썩하게 돌아가는 세상과 그로부터 동떨어진 자신이 이상의 소설 <날개>의 한 장면처럼 어지럽다.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마침내 뒤죽박죽 세상으로부터 눈과 귀를 닫아버리면 물속 깊은 곳을 천천히 흘러다니는 듯한 느낌에 편안해진다. 서울시향의 연주에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곡 끝머리에서 되풀이되는 다섯잇단음의 물결 치는 듯한 느낌이 좀 자연스럽지 못했다는 것인데, 사실 그런 섬세한 음향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음향 환경에서는 기대하기 어렵기도 하다.

세르히오 티엠포가 협연한 슈만 피아노 협주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파격 또 파격이었다. 첫 타건부터 톡톡 튀는 것이 심상치 않더니, 이어지는 독주에서는 셈여림 표시가 p인데 아예 ppp로 터무니 없이 여리게 연주하는 것을 듣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뒤로도 오케스트라가 나서지 않을 때마다 마치 연인이 속삭이듯 여리게 여리게 연주하는 솜씨가 남달랐다. 그냥 여린 소리와 여리면서도 멀리 퍼져 나가는 소리는 하늘과 땅 차이인데, 여리고 멀리 퍼지는 소리를 내려면 손가락을 오히려 크게 움직여야 한다더니 과연…. 그런데 티엠포는 큰 소리를 낼 때에도 비슷한 손놀림을 한다. 피아노 소리가 빠르고 가볍게 통통통 튀어오른다! 화음을 쿵쿵 두드려댈 때에는 갑자기 아찔한 빠르기로 달린다. 세상에, 이건 슈만이 아냐! 장난꾸러기처럼 종잡을 수 없는 다이내믹과 '제비 본색'으로 어르고 달래는 루바토는 차라리 감정 과잉 슈만을 놀리는 듯하다. 오케스트라는 피아노에 정신없이 끌려다니기만 한다. 제멋대로도 이런 제멋대로가 없으니 화를 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학생이 이렇게 연주했다면 틀림없이 선생님께 크게 꾸지람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 슈만 망령을 날려버리고 나니 티엠포의 연주에 설득당하고 만다. 그래, 슈만은 없었다. 오직 티엠포, 티엠포! 나 그대에게 불타는 팬심(fan心)을 바칠 테야요!

지휘자 성시연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해석은 특별히 모난 데 없이 무난했다. 템포는 대부분 악보의 메트로놈 지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악기 간 밸런스에도 무리가 없었다. 므라빈스키의 과장된 해석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지만, 듣자 하니 이날 연주된 작품 모두 처음 지휘해본 것이라 악보에 충실한 것이 당연하다. 나는 앞서 티엠포의 장난질에 열광하고 말았지만 편법으로 정공법을 이기기는 어렵다.

다만, 4악장 시작 부분의 템포는 ♩= 115 정도로 악보에서 지시한 ♩= 88에 비해 너무 빨랐고, 아첼레란도를 거쳐 마디 11에 이르렀을 때에는 악보에서 지시한 ♩= 104가 아니라 거의 ♩= 140 가까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한 분위기에 비해 악보에서 지시한 템포가 너무 느리다고 느낄 수 있으므로 성시연의 해석이 틀렸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그러나 템포가 빨라진 만큼 앙상블이 흐트러졌으며, 특히 트럼펫이 힘들어했다는 점은 생각해볼 문제다. 3악장 마디 129와 마디 130 사이의 짧은 게네랄파우제(Generalpause)를 무시하고 넘어간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서울시향의 앙상블은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특히 1악장 앞부분에서 템포와 리듬이 흔들리면서 음악이 지루해지곤 했는데, 템포가 느리다고 풀어질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집중해서 얼음장 같은 긴장감을 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그러나 피아노의 묵직한 스타카토 음형을 업고 호른이 전면에 나서면서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었다. 앙상블이 흐트러지는 것은 여전했지만 연주자들 사이에 묘한 열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디 188에서는 심벌즈의 제대로 된 '한 방'과 함께 팀파니와 작은북이 신나게 두드려댔고, 트럼펫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2악장에서는 단조로운 템포에 힘입어 앙상블도 꽤 좋았으며, 3악장에서 목놓아 울부짖는 듯한 현도 훌륭했다. 4악장에서는 앙상블은 가장 나빴지만 그것을 덮을 만한 열기로 연주회장을 압도했다. 곡을 끝맺는 큰북의 무시무시한 타격 일곱 번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북받쳐 오르는 흥분을 이끌어내었다.

나는 서울시향이 이토록 미쳐 날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정명훈이 지휘할 때에는 집중력은 높아도 오히려 단원들이 너무 긴장한 듯한 느낌을 받곤 했지만, 성시연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은 군데군데 삐걱거리기는 했어도 단원들이 뿜어내는 열기만큼은 정명훈 때보다 더했다. 물론 작품 특성 탓도 있을 것이다. 특히 마지막 코랄 팡파르는 '브라보'를 이끌어내는 보증수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휘자의 역할이 작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성시연은 여자이고 나이도 어리다. 그가 주로 활동해온 유럽에서는 유색인종이다. 얕잡아 보이기 딱 좋은 처지에서 악단을 이끌어야 하는 어려움이 오죽할까. 그러나 그는 한 발 잘못 디디면 엉망진창이 되어버릴 위험을 살살 헤치고 단원들 스스로 음악에 몰입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뼈대를 탄탄하게 살리는 솜씨도 돋보였다. 화려한 콩쿠르 입상 경력이 어떤 바탕에서 나왔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웃지 못할 일화 하나. 성시연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구스타프 말러 지휘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에 입상하면서부터다. 그런데 이미 그보다 한 해 앞서 그가 게오르그 솔티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마침 김선욱이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음악계가 온통 김선욱 소식으로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김선욱은 뜻하지 않은 피해자 성시연에게 협주곡 협연으로 보상해야 한다.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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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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