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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13일 금요일

펌: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비윤리적으로 행동해 왔나?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가 ☞소개한 논문입니다. 내용이 너무 길어서 번역은 엄두를 못 내겠고, 제가 요즘 너무 바빠서 틈틈이 읽는 데에만 며칠이 걸렸습니다.

이 글은 박 전 서울시향 대표 스캔들 이후 사태를 정밀 분석하면서 한국 언론의 한심한 작태를 적나라하게 고발한 글이며, 향후 약 200년간 대한민국 음악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중요하게 참고해야 할 문헌이라고 판단됩니다.

Arnold C. Nielsen라는 이름은 필명으로 추측됩니다. 아마도 클래식 음악 업계 전문가, 영어권 출신 고학력자, 그리고 한국 사회에 관한 이해도가 매우 높은 사람인 듯합니다. 누군지 짐작은 갑니다만… 크흠.

PDF 파일을 웹 문서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문단 모양 같은 게 좀 깨졌습니다. 편하게 읽으시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해서 원문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원저자의 블로그로 링크 대체: 2015년 2월 18일)

http://internationalmusicbusiness.blogspot.co.uk/2015/02/readers-are-being-encouraged-to_8.html

2015년 2월 17일 고침:

이영록 님께서 전문을 번역하셨습니다. 따라서 번역본 링크로 글 내용을 대체합니다.

http://fischer.egloos.com/5758873

2014년 12월 24일 수요일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봉에 관하여

정명훈 지휘자가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받는 돈이 얼마라고, 내부인이 확인해 줬다고 누가 주장한 일이 있었죠. 그 글 쓴 사람한테 예전에 낚여 본 많은 분이 코웃음 쳤겠지만, 그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 소리인지 모르시는 분께 제가 한 가지 알려드릴게요.

저는 예전에 모 오케스트라 기획실에서 일하면서 알 만한 분은 아는 지휘자를 모신 일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지휘자 연봉이 얼마였는지 저는 아직도 모릅니다. 언젠가 제가 작성한 품의서에서 그 지휘자 위촉 계약서를 관련 근거로 할 일이 있었는데요, 그 계약서 좀 보려고 수소문해서(…) 찾아갔더니, 담당자가 대외비라면서 안 보여주고 필요한 조항만 알려주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구경 한 번 해본 일이 없는 계약서의 '몇 조 몇 항'에 의거한 이상한 품의서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어느 지휘자 연봉이 얼마라더라 하는 기사는 뭐냐고요? 그거, 세금 등 주변 정보를 바탕으로 언론사에서 '추정'한 겁니다.2015년 2월 25일 고침:

"미국의 경우 적어도 이른바 전국 수준의 주요 오케스트라의 경우 음악감독/상임지휘자와 악장의 보수는 (몇 년 있다가 공개되긴 합니다만) 추정치가 아니라 정확한 수치입니다. 비영리기구가 국세청에 제출하는 서류가 공개(지금은 아마 2011/12 시즌까지 돼 있을 겁니다)되고 그 중 일정액 이상의 보수를 받는 피고용인의 보수(주요 오케스트라 음악감독과 악장이 보통 그 기준을 넘죠)에 관한 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론에서 쓰는 건 그걸 그냥 베껴 쓰는 겁니다. 자체적으로 추정하는 게 아닙니다. 이 점은 보수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 유럽과 다르죠. 그리고 단원 기본급은 노조 연합체에서 집계를 하고, 노사 협상 타결이 되면 주요 오케스트라들은 대개 액수를 적시해서 발표를 합니다." ― 연합뉴스 임화섭 기자님 댓글 인용.

유럽은 또 다릅니다. 실제 액수는 계약에 관여한 사람 또는 관련 정보를 요구할 법적 권한이 있는 극소수가 아니면 몰라요. 지휘자뿐 아니라 제가 일했던 오케스트라 일반 단원 연봉을 누가 얼마 받았는지도 저는 모릅니다. 그걸 누설하는 행위는 해촉 사유가 된다고 경고를 받은 기억도 나는군요. 이게 원칙이겠죠? 그리고 프랑스에서 그런 원칙을 안 지켰다가는 아마도 패가망신하는 수가 있겠고요.

자,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정명훈 지휘자가 서울시향에서 받는 연봉이 얼마라더라 하는 정보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아마도 그 정보를 요구할 법적 권한이 있는 사람한테서 나왔을 텐데요… 하기야, 국회의원이 군사 1급 기밀을 언론에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이상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니 일개 오케스트라 지휘자 연봉 정보야 뭐…

이 글 읽고 생각 나서 끄적여 봤습니다:

☞ [펌] ○○○씨, (글: 어쩌다보니)

2014년 12월 16일 화요일

2014.12.13. 서울시향-정명훈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

제가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일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대전에 초청을 받아서 그쪽에서 요구했던 프로그램인 말러 교향곡 1번과 쳄린스키 《인어공주》를 연주했는데, 리허설 때까지는 그럭저럭 잘했다가 본 공연 때 체력 고갈로 급격하게 망가지더군요. 아마 구자범 시대 경기필 최악의 연주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수원에서 대전까지 차로 이동해서 당일 공연하는 일이 그만큼 체력적으로 힘들었던 겁니다.

그런데 서울시향이 무려 통영까지 와서 당일 공연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잘하더군요. 평소 연주력이야 경기필보다 당연히 낫겠지만, 체력까지 그렇게 큰 차이가 난다고는 믿기 어렵습니다. 이날 프로그램이 훨씬 가벼운 탓도 있었겠지만, 거리가 훨씬 먼 것을 생각하면 역시 신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날 공연장에 있었던 분은 그 이유를 대충 짐작할 겁니다. 지휘자가 관객 앞에서 직접 말한 것처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연주하니 소리가 너무 좋아서 연주에 몰입이 훨씬 잘됐을 거예요.

(나중에 붙임: 단순한 몰입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연주회장 음향 환경에 따라 체력 소모도 차이가 매우 클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부는 악기' 연주자들은 확실히 힘들어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특히 목관 악기는 제법 망가졌죠. 괴물 같은 외국인 금관 연주자들은 그렇다 치고요. (트럼펫 수석 알렉상드르 바티 덜덜덜…) 페이스북에는 이날 공연 이후 감기몸살을 호소하는 목관악기 연주자도 있더군요. 통영 공연이 아니더라도 일정이 아주 빡빡했나 보더라고요. 우리나 그쪽이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지만, 하루 먼저 와서 다음 날 공연했으면 훨씬 좋은 연주를 들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현악기는 서울 공연과 비교해도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을 만큼 훌륭했습니다. 어쩌면 실제로는 망가졌는데 연주회장이 워낙 좋아서 전체적으로 좋게 들렸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저는 이날 관객에게 피해 주지 않고 기록용 사진을 찍으려고 5층 꼭대기까지 올라갔는데요, 전부터 통영국제음악당 5층 소리가 좋은 걸 알고는 있었지만,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2층 맨 앞자리와 비교해 오히려 나은 점이 있다는 생각에 새삼 놀랐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과장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서울시향 더블베이스 연주자들이 이렇게나 잘하나 싶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예술의 전당에서 안 들리던 초저역대가 또렷하게 들렸고, 전체적인 음량도 더 크게 느껴졌고, 그것을 넘어 연주력 자체가 차원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서울시향 개편 이후 첫 공연부터 최근까지 서울시향의 발전 과정을 꾸준히 지켜본 사람입니다만, 10년이 다 되도록 서울시향 더블베이스 연주자들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연주회장 실내음향이 이렇게나 중요한 거였습니다.

음향 차이를 지휘자의 해석 차이로 착각할 만한 곳도 있었습니다. 특히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3악장은 서울에서 들었을 때 무시무시하게 폭력적으로 들렸지만, 통영에서는 훨씬 얌전하게 들리더라고요. 심지어 템포도 옛날보다 훨씬 빠르다고 느꼈습니다. 그동안 해석이 달라졌나 싶어서 서울 공연 방송 녹음을 확인해 봤더니 웬걸, 큰 차이가 없더라고요. 아마도 통영국제음악당 5층 꼭대기에서 아무리 미세한 소리까지 잘 들렸어도 절대적인 음량 차이는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1층에서 들었던 분들은 서울 공연 이상의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싶어요.

4악장은 반대로 5층 꼭대기에서도 통영 공연이 훨씬 좋게 들렸습니다. 2008년 서울 공연 때, 서울시향 월간지 『SPO』에 기고한 리뷰에서 저는 "절망 속에서 처절하게 허우적거리는 대신 차분히 관조하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썼는데, 근거로 들었던 주요 해석 포인트는 이번 공연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미세한 소리까지 잘 들려서 그런지 느낌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어쩌면 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연주자들부터 감정이입이 되었을까요?

앞서 목관악기가 망가졌다고 썼지만, 차이콥스키 1악장에서 클라리넷 부수석 임상우 씨 솔로 연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서울시향이 2008년에 아마도 처음으로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을 연주했을 때, 클라리넷 수석으로 채재일 씨가 새로 들어와서 충격적인 명연주를 들려주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이날 임상우 씨 연주는 채재일 씨가 넘사벽만은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어딘가 결정적인 '한 방'이 모자라기는 했는데, 이유가 뭔지 주제 넘게 분석하려 들지는 않겠습니다. 아마 본인이 가장 잘 알 테고, 전보다 나아진 모습을 보았으니 알아서 잘하겠죠.

그리고 팀파니 객원. 이름이 롤란드 뭐시기라던데, 참 잘하더군요. 서울시향 팀파니 수석이자 라디오 프랑스 필 수석이기도 한 아드리앙 페뤼송이 라디오 프랑스 필 지휘자 대타로 지휘 대뷔를 하게 되면서 임시로 데려온 모양입니다. 온 김에 눌러 앉히려고 꼬드기는 모양이던데요. 아마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수석이라죠?

또, 트럼펫. 2008년에는 알렉상드르 바티가 없었지만, 이날에는 바티가 있었습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알렉상드르 바티는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수석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붙임: 여기 그만둔 지 좀 됐다네요. ㅡ,.ㅡa) 한 마디로 세계 정상급 연주자라는 말이죠. 그 전에 가레스 플라워스라는 사람이 잠시 수석으로 있다가 나가 버렸는데, 그때 사람들 많이 아쉬워했었죠. 그런데 얼마 안 가 알렉상드르 바티가 온 겁니다. 검색해 보니 2009년 일이로군요. 그 대단한 연주자가 통영에도 왔습니다. 이날 연주도 아주 뭐, 끝장이었습니다. ^^

…쓰다 보니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할 말은 많지만 여기서 줄이고, 저는 이만 잠자러 갑니다. ^^

2012년 8월 25일 토요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실연으로 듣고 이런저런 생각

요새는 연주회 리뷰 같은 거 귀찮아서 잘 안 쓰는데, 무려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실연으로 듣고 온 만큼 짧게나마 써봅니다.

바그너 작품은 영화에 비유하자면 'B급 영화'와 닮은 데가 있습니다. 저와 이름 비슷하신 박원철 님도 생전에 비슷한 말씀을 하셨죠. 정명훈 샘은 'B급' 정서를 표현하는 일에 약점이 있는 듯합니다. 옛날에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들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트리스탄과 이졸데》 들으면서 새삼 느꼈습니다. 1막 해석이 마음에 안 들어서 적당한 표현을 생각하다가 이 생각이 들더군요. 2막과 3막은 정명훈 샘의 장점으로 단점을 충분히 가릴 수 있었고, 무엇보다 3막은 끝내주게 훌륭했습니다. 3막이 좋으면 다 좋은 거다, 하는 생각이 들 만큼이요.

서울시향은 요즘 실력이면 이쯤은 할 수 있겠다고 예상은 했지만, 무려 바그너를 제대로 연주하는 걸 실제로 들으니까 이건 뭐… ㅠ.ㅠ

잉글리시 호른 연주하셨던 분, 어디서 데려온 누군지 모르겠지만, 엄청나시더군요. 이분 어떻게 서울시향에 주저앉혀 주시면…^^;

그리고 알렉상드르 바티 본좌. 말이 필요 없습니다. 바그네리안이 아니면 잘 모를 대목만 하나 설명하자면, 3막에서 배가 보이고 뿔피리 소리 바뀌는 대목은 본디 잉글리시 호른이 연주해야 합니다. 극 중에서 목동이 연주하는 그 악기거든요. 바그너는 이 대목을 '트럼펫처럼' 연주하라고 했는데, 아예 트럼펫으로 연주하기도 합니다. 저도 그게 낫다고 생각하고요. 어제는 바티 본좌가 발코니에서 이 대목을 연주했죠. 어제 연주한 악기는 일반적인 트럼펫이 아니고, 서울시향 페이스북 보니까 무슨 목제 트럼펫(?)인 모양이던데, 그래서 트럼펫 주제에 '식물성' 음색이 나더군요. 이 대목에 아주 딱이었습니다.

가수들은 브랑게네 말고는 다들 조금씩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중간 휴식이 너무 짧았던 탓이 컸지 싶네요. 1막에서는 '페이스 조절'하느라 힘을 아끼는 티가 났고, 1시간 가까이 쉴 새 없이 소리를 질러대는 무지막지한(!) 2막을 지나 3막으로 가니까 트리스탄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이더군요. 4시쯤에 시작해서 바이로이트식으로 중간 휴식 1시간쯤 넣으면 얼마나 좋아요. 예술의 전당 님하들아, 대관 어떻게 좀!

그런데 그것까지 고려해도 트리스탄은 좀 별로였습니다. 다 죽어가는 트리스탄 목소리가 너무 멀쩡해요. 정작 질러 줄때는 힘들어하면서 말이죠. 이졸데도 딕션이 별로. 무엇보다 2막에서 "Frau Minne will"(사랑의 여신의 의지다)를 대충 얼버무린 대목은 용서가 안 됩니다. 쿠르베날은 실력이 대단한 건 알겠는데, 그 좋은 실력을 제대로 못(안) 뽑아낸 듯. 트위터 보니 몸 상태가 최상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한국에만 오면 갑자기 아픈 가수가 한둘이 아니라 뭐…-_-; 마르케 왕은 잘하기는 했지만, 연광철 샘을 비롯해서 훨씬 잘하는 한국인 가수가 여럿이라… 1막 1장에 나오는 선원은 가사의 표면만 읽고 리트처럼 부르더군요. 맥락 다 무시하고 가사의 표면만 보면 잘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전체 드라마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이 대목이 이렇게 되고 맙니다.

뭐, 무려 《트리스탄과 이졸데》였다는 점을 헤아리고 나면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내년에는 니나 스템메, 린다 왓슨, 로버트 딘 스미스, 스티븐 굴드, 뭐 이런 분들 좀… 그래도 서울시향이 국내 오케스트라 중에 돈 제일 많잖아요? ^^;


나중에 붙임:

존 맥 매스터(트리스탄), 이름가르트 빌스마이어(이졸데), 예카테리나 구바노바 (브랑게네), 크리스토퍼 몰트먼(쿠르베날), 미하일 페트렌코(마르케 왕), 외

Soloists : John Mac Master(Tristan), Irmgard Vilsmaier(Isolde), Ekaterina Gubanova(Brangane), Christopher Maltman(Kurwenal), Mikhail Petrenko(Marke)

2011년 3월 16일 수요일

일본 클래식 음악계 잇따른 악재

※ 지난 11일 대지진이 일본을 강타한 당일 소식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 「일본 지진, 음악회는 그래도 열리더라」

11일부터 연주회를 취소했던 BBC 필하모닉은 일본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 『가디언』 기사 보기)

도쿄 신 국립극장(New National Theatre Tokyo)은 오페라 《마농 레스코》 등 예정된 공연을 취소했습니다. (☞ 극장 공식 홈페이지 공지문 보기(영어) ☞일본어 공지)

최근 식도암 수술과 허리 수술을 받은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는 오는 8월 무대에 복귀할 예정이었으나 내년 1월로 일정을 연기했습니다. (☞ AFP 기사 보기)

11일 베르디 《운명의 힘》을 공연했던 피렌체 마지오 무지칼레(Maggio Musicale Fiorentino)는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가수 두 명이 계약을 취소하고 도망가 버린 상태에서도 오페라단 측은 공연을 강행하려 노력했으나, 끝내 피렌체 시장이 복귀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 참고)

체코 필하모닉은 13일까지 직접적인 지진 피해가 없는 곳에서 공연했으나 도쿄 공연 등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복귀했습니다. 체코 정부가 직접 복귀 명령을 내렸고, 이 과정에서 군용기까지 동원된 소개작전이 펼쳐졌다고 합니다. 지휘자는 정명훈이었는데 한국에 돌아왔다는 소식은 아직 없는 듯합니다. (☞ 『연합뉴스』 기사 ☞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 블로그)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13일 도쿄 공연을 끝내고 이튿날 하마마쓰 아카데미에 참석했습니다. 귀국 예정일은 22일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앤 아키코 마이어스(Anne Akiko Meyers)도 일정을 취소했습니다. 마이어스는 3월 24~25일에 KBS 교향악단과 협연할 예정입니다.

11일 신 일본 필하모닉을 지휘해 말러 교향곡 5번 등을 공연한 대니얼 하딩은 그 뒤로 리허설이 잇따라 취소되어 끝내 일본을 떠나야 했습니다.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공연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은 공연 기간 중 인터뷰 등 일본에 도움이 될 만한 정치적 행보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대해 음악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지휘자가 하는 일은 이끄는 일이다. 그가 대재앙 속에서 이끄는 일을 할 수 없다면 지휘자 노릇도 하지 말아야 한다. 부끄러운 줄 알라."라며 모질게 비판했습니다. (☞ 원문 보기)

베를린필은 일본 일정을 강행한다고 현지 시각으로 지난 14일 밝혔습니다. (☞ 『베를리너 차이퉁』 기사 보기)

뒤셀도르프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3월 26일 톤할레(Tonhalle Düsseldorf)에서 연대(solidarity) 공연을 연다고 밝혔습니다. 사도 유타카 지휘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할 예정입니다. 뒤셀도르프는 독일에서 일본인이 가장 많은 도시라고 합니다. (☞ 원문 보기)

나중에 붙임: 뒤셀도르프 공연에 한국인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윤태현)이 솔로를 맡는다고 합니다. 바그너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들 아시는 분이죠? ^^

▲ 베를린필과 사이먼 래틀이 일본에 보내는 메시지

2010년 12월 31일 금요일

2010년 클래식 음악계 주요 사건 ③ 국내 소식

트위터로 떠들기만 했더니 정리하기 쉽지 않네요. 놓친 내용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 서울시향, 유럽에서 상품성 인정받아

저는 이것을 올해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고: http://goo.gl/jJsJo

2. 지휘자 구자범, 광주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고도 광주시와 갈등 끝에 경기필로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54592

'구자범 신드롬'은 말러 교향곡 2번 광주 MBC 다큐멘터리를 봐도 조금 알 수 있지만, 직접 광주에 가서 《라 보엠》 공연을 보니 제대로 알 수 있겠더군요. 광주시와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는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3. 인천시향 음악감독 정명훈 → 금난새

인천시장 송영길이 정명훈을 자르고 금난새를 그 자리에… http://goo.gl/PQtT

금난새는 경기필 음악감독 겸임하려다 재계약 불가 통보받고는, 도의회 간담회에서 "충격과 서운함을 감출 수 없었다" http://goo.gl/j17xU

4. 지휘자 정치용, 원주시향에서 잘리다

원주시가 정치용을 일방적으로 해고, 음악감독 체제를 상임지휘자 체제로 바꾸면서 새로 지휘자를 뽑았습니다. http://goo.gl/LL4ck

지휘자 정치용이 당한 굴욕을 정명훈이 바스티유에서 쫓겨난 일에 빗댄 강원일보 사설 http://goo.gl/opqO7

5. 바이올리니스트 김민진, 샌드위치 사 먹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도둑맞다

도둑맞은 스트라디바리우스 연합뉴스 기사 http://goo.gl/R4ZFA

샌드위치 가게 점원은 김민진 씨가 당시 아이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증언 http://goo.gl/oasAC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라는 네티즌 여론.;;

절도범 3명이 잡혔는데 두 명은 미성년자. 그러나 바이올린은 못 찾았다네요. http://goo.gl/NUQW4

6. 서울시향 트럼펫 수석, RCO 수석 되다

알렉상드르 바티(Alexander Baty)는 본디 라디오 프랑스 수석입니다. 그런데 서울시향 객원으로 활동하다 서울시향 수석도 겸하게 됐습니다. 이번에 콘세르트허바우 수석이 되면서 둘 다 그만둔 모양인데요, 그러나 객원으로 서울시향에 더 자주 올 수 있다고 합니다. 어제 말러 교향곡 3번 연주회 때에도 엄청난 연주를 들려줬죠.

알렉상드르 바티가 비중 있게 활약한 연주회 리뷰 참고:
http://wagnerianwk.blogspot.com/search/label/Alexander%20Baty

7. 〈엘 시스테마〉가 국내에서도 주목받다

《엘 시스테마》 영화도 개봉되고, 여러 단체에서 일단 무늬는 비슷한 시도를 했고, 교육부에서도 나섰습니다.

처음에는 문제 학교 100개 지정 및 악기 구입비와 방음교실 설치비 지원 계획 발표. 김원철은 돈을 주고 나서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는 없어서 답답하다고 논평. http://goo.gl/E9R9

무작정 도입하기만 할 게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세우라는 한국경제 사설 http://goo.gl/GieM

뒤이어 내년 1~2월 사이에 교육부에서 베네수엘라에 시찰단을 파견한다는 반가운 소식. 일정은 곽승 지휘자 베네수엘라 연주회에 맞췄는데, 곽승은 18년째 〈엘 시스테마〉를 후원해 왔다네요! "우리나라에서는 학교 위주의 활동이면 성공 가능성이 충분할 것" http://goo.gl/DZSDC

8. 작곡가 진은숙, 〈진은숙의 아르스노바〉 시리즈 영국판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현대음악 프로그램 〈오늘의 음악〉(Music of Today) 예술감독 된다는 소식. 〈진은숙의 아르스노바〉 연주회가 국제적으로 주목받은 결과라네요. http://goo.gl/sbxJ

진은숙이 '모나코 피에르 대공 작곡상'을 받았다는 소식도. 수상작은 《구갈론-거리극의 장면들》. 10월 16일 서울시향이 〈진은숙의 아르스노바〉 연주회에서 한국 초연. http://bit.ly/dcopU9

9. 모 음대 '쓰리썸' 교수 사건

좋지 않은 소식이므로 링크만: http://goo.gl/wBcIj

이런 일은 음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카더라' http://goo.gl/xl84Y

10. 노들섬 오페라하우스, 2016년으로 준공 연기

이런저런 이유로 연기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므로…-_-; http://goo.gl/xJ5Uy

처음부터 딱 필요한 것만 (연주회장이라든가, 연주회장이라든가, 연주회장이라든가) 짓든가 참나.

한국일보 사설 http://bit.ly/9bI1M1

박범신 작가 한겨레 사설 "예술은 우리 모두가 함께 향유하는 것이니, 복지와 같다. […] 시의원들이 할 일은 그런 것이다." http://goo.gl/U7Jri

안태호 예술과도시사회연구소 연구원 반박 사설: http://goo.gl/ulMxE

2010년 6월 6일 일요일

메시앙 《잊혀진 제물》 진은숙 《바이올린 협주곡》 라벨 《어미 거위》 《라 발스》 ― 비비아네 하그너 / 정명훈 / 서울시향

2010-05-20 오후 08:0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정명훈
협연: Viviane Hagner

메시앙, 잊혀진 제물 Messiaen, Les Offrandes oubliées
진은숙, 바이올린 협주곡 Chin, Violin Concerto
라벨, 어미 거위 Ravel, Ma Mère l’Oye
라벨, 라 발스 Ravel, La Valse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5년을 준비해왔습니다. 이제는 유럽 무대에서도 꿀리지 않을 기량을 보여줄 자신이 있습니다.”

서울시향이 유럽 무대에서 연주한다. 억지로 만들어낸 연주회가 아니라 정식으로 초청받아 갔다고 한다. 김주호 대표 말처럼, 이제는 서울시향이 유럽에서 상품성을 인정받게 됐다는 뜻이다. 정명훈이라는 거장이 지닌 이름값만으로 악단이 덩달아 인정받기는 어렵다. 서울시향이 그만한 실력을 길렀기에 가능한 일이다.

"준비가 덜 됐을 때는 안 하는 게 나아요. 괜히 창피만 당한다고. 하지만 이젠 준비가 됐어요. 적어도, 유럽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선 겁니다.”

정명훈은 이렇게 말했단다. 지난 5년 동안 서울시향을 지켜본 글쓴이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수석급 단원들은 웬만한 유럽 지방악단에서도 한 자리 차지할 만한 실력을 지녔고, 그 가운데 한둘은 유럽에서도 수석 자리를 노릴 만하다. 몇몇 외국인 단원은 유럽 악단 수석을 겸하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재정적·행정적 지원이 있으면 그리 오래지 않아 이를 수도 있다. 문제는 현이다. 역사와 전통 없이 현이 제대로 된 소리를 내기는 어렵다. 서울시향이 유럽에 간다는 말은 현이 그만한 수준에 올랐다는 말이다. 글쓴이가 판단하기에 현악 연주자들이 보여주는 응집력이 때때로 유럽 수준을 살짝 넘보게 된 때가 지난해 즈음이다. 실수 없이 악보를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뉘앙스를 자연스럽게 살려내는 일이 지난해부터 차츰 늘고 있다. 악기군끼리 어우러짐 또한 크게 늘었다.

이날 연주회는 유럽에서 연주할 곡들을 미리 선보이는 자리였다. 그 가운데 진은숙 바이올린 협주곡이 가장 반가웠다. 서울시향이 이 곡을 연주한 일이 두어 차례 있지만, 글쓴이는 그때마다 다른 일 때문에 기회를 놓쳐서 실연은 이날 처음 들었다. 아직 악보를 개인에게 팔지 않고 오케스트라에 빌려주기만 하는지라 글쓴이는 이 곡을 음반으로만 알 수밖에 없었는데, 이날 연주를 들어보니 켄트 나가노가 지휘한 몬트리올 심포니 녹음은 너무 얌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명훈이 지휘한 서울시향은 마림바와 여러 타악기 따위를 음반보다 앞세워 가믈란(gamelan; 인도네시아 전통 음악 또는 악기) 느낌을 조금 더 살렸고, 독주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대등하게 어우러져 교향곡 느낌마저 들었다. 스튜디오 작업을 거친 음반이 실연과 다른 탓도 있겠으나, 그것을 헤아려도 이날 타악기가 독주 바이올린 소리를 자신 있게 치고 나올 때가 잦았다.

1악장에서 큰북이 내는 묵직한 소리가 독주 바이올린과 어우러지는 대목을 글쓴이는 참 좋아하는데, 이날 시향 타악기 연주자 김문홍이 무대 오른쪽에서 큰북을 맡아 마치 바이올린과 2중주를 하는 듯했다. 타악기 수석 에드워드 최는 무대 왼쪽 벽 가운데쯤에 바짝 붙어서 글록켄슈필과 갖가지 타악기를 연주했고, 김미연은 무대 왼쪽 뒷벽에서 마림바 따위를 연주하는 등 타악기만으로도 입체감을 주었다.

여기에 다른 악기 소리가 마치 살아있는 빛알갱이처럼 뭉치고 흩어지곤 했으며, 독주 바이올린은 빛 가루를 뿌리며 무리를 이끌고 날아다니는 듯했다. 빛 요정들이 떠들썩하게 장난을 치는 모습이 이럴까. 협연을 맡은 비비아네 하그너는 어렵기로 소문난 이 곡을 마치 가볍게 몸 풀듯 아무렇지도 않게 연주하곤 했으나 개방현으로 연주하는 대목에서는 몇 차례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라벨 관현악곡은 화려한 색채감을 빼면 짜임새가 단순해서 연주자의 해석이 끼어들 곳이 적으며, 음색을 얼마나 맛깔스럽게 살리느냐가 연주자에게 중요할 때가 잦다. 이날 연주된 《어미 거위》 모음곡과 《라 발스》 또한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지휘자 역할이 매우 중요하면서도 지휘자 못지않게 악단이 많은 주목을 받게 할 수 있으니 서울시향을 유럽에 알리기에 매우 훌륭한 곡이라 하겠다.

이날 연주는 시시콜콜 따질 일 없이 그저 좋았다고만 말해도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 이미 여러 차례 연주한 일이 있어서 서울시향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곡이라고도 할 만한 《라 발스》는 말할 것도 없고, 《어미 거위》 모음곡 또한 심각한 표정 지을 일 없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곡에 나무랄 데 없는 연주였다.

메시앙 《잊혀진 제물》도 훌륭했지만, 사납게 몰아치는 가운데 부분에서 현이 조금 더 단단히 뭉친 소리를 내주었으면 싶었다. 서울시향이 앞으로 더 나아질 곳이 얼마든지 있음이 이런 곳에서 드러난다 하겠는데, 정명훈 말마따나 이번 유럽 연주 여행이 “서울시향의 단원들에게 큰 공부와 자극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유럽 오케스트라를 보면서 자신들을 되돌아볼 기회도 생길 테고, 음향이 훌륭한 연주회장을 두루 경험해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눈이 잔뜩 높아질 서울시향 단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전용 연주회장이다. 계획에 차질 없이 하루빨리, 그러나 음향에는 배려에 모자람 없이 지어지기를 바란다.

2010년 2월 24일 수요일

연주분석에 바탕을 둔 학술적 연주비평 가능성 모색: 정명훈이 지휘한 2006~2009 서울시향 정기연주회를 중심으로

제 석사 학위논문입니다.

Abstract

Performance Criticism based on Performance Analysis

- Focused on the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2006~2009 Season Concerts conducted by Myung-Whun Chung -

KIM, Won-Cheol
Department of Music, College of Music
The Graduate School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ic criticism needs to be analytical, and performance criticism needs to be based on performance analysis. From this point of view, some examples of critical analysis and analytical criticism over music performances are reviewed. Subsequently, possibilities that performance criticism could be accepted as musicology are considered. Finally, the conductor Myung-Whun Chung was analytically criticized as an example of performance criticism based on performance analysis.

Theorists such as Nicholas Cook and John Rink showed recently that analytical procedures can be applied to music performances. Now that musical performances can be analyzed scientifically, they could also be criticized analytically. Therefore, possibilities are opened up that the concept of performance criticism as musicology could be accepted.

For the growth of performance criticism based on performance analysis, communications between journalistic criticism and performance analysis should be improved. Additionally, job security for critics must be provided in advance.

2010년 1월 27일 수요일

2009.12.30. 베토벤 교향곡 9번 ― 정명훈 / 서울시향

2009년 12월 30일(수)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 : 정명훈
독창 : 이명주(소프라노) 김선정(메조소프라노) 김석철(테너) 임채준(베이스)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d단조, 작품 125
Beethoven, Symphony No. 9 in d minor, Op.125 "Choral"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정명훈이 서울시향을 이끈 뒤로 베토벤 교향곡 9번 연주는 정기연주회로는 이번이 세 번째다. 연말에 이 곡을 연주하는 일이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곡을 해마다 연주하면서 그때마다 눈에 띄게 나아진 모습을 볼 수 있으니 반가운 마음이 훨씬 크다. 지난해와 견주어 수석급 연주자는 거의 바뀌지 않았으나 합주력이 두루 늘었으며, 지난해까지만 해도 지휘자가 뜻한 바를 악단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이날에는 지휘자의 해석이 아닌 그럴싸한 음악이 귀를 사로잡았다.

정명훈이 보여준 해석은 거의 그대로였다. 1악장 코다에 들어서며 고집저음(ostinato)이 나타나는 대목(마디 513)에서 긴 호흡으로 아첼레란도를 썼고, 4악장 처음과 2악장 둘째 주제(마디 97)에서 악보에 없는 트럼펫/호른 선율을 덧붙이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악보 그대로 연주한 일도 마찬가지였다. 3악장 마디 133에서 제2 바이올린이 악보에서 지시한 pp보다 세게 연주한 것도 비슷했는데, 다만 옛날에는 ff로 들렸으나 이날에는 mf쯤으로 들렸다. (객석 위치가 달라진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악기 배치는 제법 달라졌다. 합창단을 합창석이 아닌 무대 위에 두고 팀파니를 오른쪽, 나머지 타악기를 무대 왼쪽 끝으로 몰았으며 트럼펫은 트롬본 오른쪽으로 두었다. 이 모든 일은 바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사이에 있는 독창자를 배려하려는 뜻으로 풀이된다.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과 어우러지는 소리를 내려면 독창자를 그 사이에 두어야 옳다. 그러나 타악기와 트럼펫 등이 무대 뒷벽 쪽 음향 고약하기로 소문난 예술의 전당과 만나 독창자를 헷갈리게 하니 문제다. 바로 지난해 그런 일이 일어났으며, 독창자는 뒤에 투명 반사판을 쓰고도 모자라 손을 귀에 대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나 끝내 4중창에서 화음이 자꾸만 어긋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악기 배치를 이처럼 바꾸니 마법이 일어났다. Deine Zauber binden wieder! 글쓴이는 실연을 들을 때면 처음부터 기대를 접곤 하는 4중창에서 뜻하지 않게 균형잡힌 소리를 듣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때 오케스트라는 음량을 크게 줄이기까지 했으며, 그런 가운데 4중창과 나란히 울리는 플루트 소리가 멋졌다. 다만, 이어지는 마디 305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좀 더 소리를 키웠으면 싶기도 했다.

테너 김석철은 지난 4월 말러 《대지의 노래》를 TIMF 앙상블 협연으로 멋지게 불러 글쓴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다. 김석철은 목소리가 크고 시원시원하며, 무엇보다 리듬이 굼뜨지 않고 단단해서 앞날이 크게 기대되는 가수다. 이번 연주회도 매우 훌륭했으며, 빠른 리듬이나 화려한 멜리스마(한 음절에 많은 장식음)도 야무지게 다스렸다. 우리나라에는 훌륭한 베이스나 바리톤은 많아도 훌륭한 테너는 드물어서 새삼 보물이 나타난 듯한 생각이 든다. 여린 소리를 잘 못 내고 음정이 살짝 흔들리곤 하는 단점을 이겨낸다면 세계를 뒤흔드는 가수가 될지도 모르니 기대하시라.

베이스 임채준 또한 단단한 리듬이 돋보였다. 이 곡에서 베이스(바리톤) 독창은 음역도 넓은데다가 긴 호흡으로 멜리스마를 풀어내야 해서 몹시 어려운 곡으로 꼽힌다. 그런데 임채준은 놀랍도록 깔끔한 리듬을 들려주었으며, 굳이 더 욕심을 내자면 목소리가 좀 더 묵직했으면 싶기도 했다. 또 딕션(diction)이 제법 훌륭했으나 이탈리아어 발음이 섞여 있었는데, 이를테면 'Freude'(환희)를 단모음으로 쪼개서 소리 내곤 했다.

소프라노 이명주는 맑게 빛나는 목소리로 4중창 선율을 잘 이끌었으며, 더욱이 여린 소리에서 남다른 솜씨를 뽐냈다. 목소리가 이토록 고우니 말러 교향곡 8번 제2 소프라노(그레첸)를 맡으면 어떨까 싶기도 했는데, 까다로운 멜리스마에서 리듬이 살짝 늘어지는 단점을 이겨내고 고음에서도 여린 소리를 지켜낼 수 있다면 아주 멋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조소프라노(알토) 김선정은 다른 사람보다 작은 역할이나마 균형잡힌 화음을 깔끔하게 잘 만들었다.

지난 22일 연주회 때 인상 깊었던 트럼펫 수석이 이번에도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고, 악기 특성 탓에 실수가 잦게 마련인 호른도 이날따라 현 소리와 맛깔스럽게 어우러지곤 했다. 더욱이 1악장 마디 139 또는 같은 음형이 나오는 마디 408에서 호른이 딱 알맞은 음량으로 리듬을 살린 대목이 매우 멋졌다.

이날 가장 멋졌던 곳 한 군데만 꼽자면 4악장 마디 92부터 마디 164까지였다. 첼로·콘트라베이스 레치타티보가 막 끝나고 합창 선율을 연주하면서 차근차근 소리를 키워가다가 마침내 금관이 선율을 받는 그 대목까지다. 이곳에서 이토록 긴 호흡으로 자연스러운 크레셴도를 이끌어낸 정명훈도 대단하고, 그 소리를 만들어낸 서울시향도 새삼 대단하다.

2009년 12월 31일 목요일

2009.11.29. 리아도프 《마법의 호수》 《바바야가》 《키키모라》 / 라벨 《셰에라자드》 /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7번 ― 미샤 브뤼거고스먼 / 루도비크 모를로 / 서울시향

2009년 11월 29일(일)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루도비크 모를로
협연자 : 미샤 브뤼거고스먼(소프라노)

리아도프, 마법의 호수, 바바야가, 키키모라
A. Liadov, The Enchanted Lake / Baba-Yaga, Kikimora
라벨, 셰에라자드
M. Ravel, Scheherazade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제7번 c#단조, 작품131
S. Prokofiev, Symphony No. 7 in c#minor, Op.131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7번은 주선율이 은근히 까다롭게 조각나 이 악기 저 악기에 흩어져 있어서, 어찌 들으면 베베른이 썼던 기법인 이른바 '음색선율'(Klangfarbenmelodie)을 프로코피예프식으로 바꿔놓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지휘자는 그 선율 조각들을 잘 모아서 하나로 꿰는데 적지 않게 마음을 쏟아야 한다. 음반을 들어보면 일류 지휘자와 일류 악단 녹음에서도 '꿰맨 자국'이 곧잘 드러나기도 하며, 작품 해석 차이는 다른 작품과 견주면 덜 나는 편이다.

다시 말하면 이 곡은 서울시향한테 '위험한'(?) 작품이어서 유럽 악단 수준을 꾸준히 좇아가는 서울시향이 가장 모자란 곳을 숨김없이 드러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휘자 루도비크 모를로는 '꿰맨 자국'을 없애고 소리를 예쁘게 다듬는 솜씨가 남달랐다. 객원 지휘자가 악단을 데리고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그런데도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7번을 짧은 시간에 이렇게까지 말끔하게 다듬었다면, 서울시향이 날이 갈수록 연주 솜씨가 좋아진다고는 해도 지휘자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소리를 다듬는데 너무 마음을 쏟다 보면 과감한 해석을 하지 못해서 자칫 연주가 맨송맨송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날 연주에서는 작품에 담긴 화끈한 소리와 아기자기한 소리 따위가 제법 그럴싸하게 살아났으며, 이때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타악기 연주자들이었다. 그리고 타악기 가운데 하나만 꼽으라면 '큰북'이 이날 가장 멋졌다.

오케스트라용 36인치 큰북이 내는 소리는 웬만큼 세게 두드려대지 않으면 평범한 가정용 오디오로는 잘 들리지 않는다. 글쓴이 방에 있는 중급 오디오로는 큰북 소리가 잘 들리기는 하는데 음색이 연주회장에서 듣던 것과는 좀 다르다. 최고급 오디오 가운데서도 설치가 잘된 놈들만 그럴싸한 소리를 내는데, 글쓴이는 오디오로 제대로 된 36인치 큰북 소리를 딱 한 번 들어보았다. 그런데 이날 연주회에서 큰북이 들려주는 '오디오스러운'(?) 음향적 쾌감이 매우 컸다.

이를테면 2악장에서 가파른 아첼레란도에 이은 마디 18과 마디 239, 또는 크레셴도를 업은 총주에 이어지는 마디 134에서 그랬으며, 이때 큰북이 '쿵쿵' 두드려대는 단단하면서도 묵직한 소리가 그야말로 '악마의 쾌(快)'라 할 만했다. 2악장이 끝날 무렵인 마디 476부터는 2악장 가운데 가장 멋진 곳이어서 조금 앞선 마디 431부터 나중에 앙코르로 연주하기도 했는데, 여기서도 이를테면 마디 484에서 큰북이 '쿵쿵쿵' 하는 소리가 참으로 멋졌다.

3악장에서는 마디 17에서 하프, 피아노, 플루트, 현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마치 겨울철 난롯가처럼 따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 들릴락말락 큰북 소리가 얹어지니 첫눈이 내리는 듯한 설렘도 느껴졌다. 또 '난롯가' 음형이 총주로 나오는 마디 39에서는 마디 43부터 나오는 큰북 소리에 맞추어 심장이 덩달아 두근거리는 듯했다. 지휘자는 악보에서 지시한 '느리고 풍부한 표정으로'(Andante expressive)와 견주어 3악장 템포를 제법 빨리 잡았으며, 덕분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미리 느껴지기까지 했다.

큰북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1악장에서도 마디 84 같은 곳에서 큰북이 멋진 소리를 들려주었고, 작은북과 글록켄슈필 따위가 더욱 두드러지는 4악장에서도 마디 274 또는 마디 387에서 큰북 소리가 음향적인 쾌감을 주었다. 4악장 마지막은 글록켄슈필 등이 앙증맞은 소리를 내면서 끝낼 수도 있고 또는 오케스트라 총주로 법석대며 끝낼 수도 있다. 이날 서울시향은 어찌할까 귀담아들었더니 글록켄슈필 등으로 얌전하게 끝내더라. 겨울에는 이게 낫다.

이날 큰북을 연주한 사람은 Raul Vergara였던 듯하다. 그런데 이날 첫 곡으로 연주한 리아도프 《마법의 호수》, 《바바야가》, 《키키모라》에서는 김미연이 큰북을 연주했다. 이때에도 큰북이 제법 멋져서 《마법의 호수》에서는 저 깊은 곳에서 북받쳐 오르는 땅 울림 같은 소리를 들려주었고, 《바바야가》에서는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7번 2악장 못지않은 '악마의 쾌(快)'를 들려주었다.

라벨 《셰에라자드》를 협연한 소프라노 미샤 브뤼거고스먼은 노랫말에 담긴 퇴폐적인 느낌을 흑인이 아니면 따라 하기도 어려울 듯한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매우 잘 살렸다. 또 블루스 음악 등에서 금관 악기를 흉내 내거나 할 때 성대를 떨면서 내는 콧소리와 비슷한 발성법을 이따금 쓰기도 했다. 다른 가수가 녹음한 음반을 들어보면 소녀 같거나 너무 정직한(?) 목소리가 노랫말이나 음악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미샤 브뤼거고스먼은 그야말로 노래에 딱 맞았다. 목소리에 힘과 '독기'가 좀 더 있었더라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살로메》에서 '살로메' 역을 하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2009년 12월 28일 월요일

정명훈 '말러 때문에 지휘자 됐다.' 발언 진위 논쟁

― 교향곡을 연주해 보고 싶어서 지휘자가 됐다면서 말러 등을 예로 들었는데 언론이 왜곡했다.
― 아니다, 프랑스에서 인터뷰로 그런 말 했다.
― 베토벤 할 때에는 베토벤 때문에 지휘자 됐다고 했다.

원문 링크:
http://gall.dcinside.com/list.php?id=classic&no=56820

프랑스 인터뷰 링크:
http://www.resmusica.com/article_1055_musique_symphonique_myung-whun_chung_paris_gustav_mahler_l_elan_vers_l_infini.html
(문제 발언: "je suis devenu chef d'orchestre pour diriger Mahler")


2009년 9월 3일 목요일

2009.01.22. 브루크너 교향곡 7번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7번 - 알렉산다르 마자르 / 정명훈 / 서울시향

2009년 1월 22일(목)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Aleksandar Madzar (Pf)

Mozart, Piano Concerto No.27 in B flat, K.595
Bruckner, Symphony No. 7 in E (Ed. Nowak)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연주한 서울시향은 유럽 악단 수준에 조금씩 다가가는 요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으며 무엇보다 금관악기가 깔끔한 연주를 해주어 반가웠다. 편성은 현악기를 크게 늘여 여섯 짝씩이었고 콘트라베이스도 열두 대를 썼다. 관악기는 호른과 트럼펫을 하나씩 더블링한 것을 빼면 악보 지시를 따랐다.

트럼펫이 가장 인상깊었으며 트럼펫 수석 가레스 플라워스가 이날도 돋보였다. 음량이 튀지 않고 다른 악기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도 선율선과 부점리듬을 깔끔하게 살려주었다. 3악장 처음에 나오는 독주는 음반을 들으면서도 마음에 안 들 때가 잦아 이날 연주를 귀담아들었는데, 플라워스는 악센트를 또렷이 살리면서도 그 때문에 소리가 뚝뚝 끊어지는 일 없이 딱 알맞은 논레가토를 들려주었다.

바그너튜바는 우리나라에 전문 연주자가 없어서 제대로 된 연주를 듣기가 여간 어렵지 않으며, 이 때문에 음색을 희생해 바그너튜바 대신 호른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이날은 웬일인가 싶을 만큼 큰 실수 없이 깔끔하게 잘해서 놀랐다. 옥에 티를 하나 말하자면 2악장 클라이맥스를 지나 마디 184에서 테너 바그너튜바 둘 가운데 하나가 티 나게 비브라토를 썼다. 이곳은 바그너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애달픈 마음을 나타낸 곳이라 비브라토는 '장송곡' 분위기와 맞지 않았으며 '오르간 소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탄탄하게 중심을 잡아준 호른 또한 매우 훌륭했다. 1악장 마디 114부터 트롬본 및 튜바와 함께 부점 리듬을 주고받는 대목에서도 아귀가 딱딱 맞았고, 국내 악단이라면 반드시 실수를 하는 마디 163 호른 합주에서도 어택이 완벽하게 들어맞지는 않았으나 제법 깔끔하게 잘했다. 2악장 마디 190부터 f에서 fff로 가파르게 커졌다가 마지막 울부짖음이 pp로 재빨리 사그라진 대목에서는 브루크너가 목놓아 우는 모습이 눈에 보일 듯했으며, 호른 네 대를 쓰면서도 한 악기처럼 잘 맞았다.

트롬본 또한 큰 소리를 내는 곳에서도 사납게 으르렁거리지 않고 화음을 살려 깊은 울림을 내주었으며, 국내 악단이 마치 관행처럼 얼렁뚱땅 넘어가곤 하는 부점리듬도 잘 살렸다. 4악장에서 트롬본, 호른, 바그너튜바, 콘트라베이스튜바가 유니슨으로 나오는 마디 267에서는 세 겹 부점 리듬이 몹시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대충 2분음표로 연주해도 그다지 티 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날 어떻게 하는지 조금은 짓궂은 마음으로 귀담아들었더니 트롬본은 나무랄 데 없었고, 호른과 바그너튜바는 아리송하고, 콘트라베이스튜바는 트롬본에 슬쩍 묻어가더라. 그래도 주선율은 트롬본에 있었으므로 전체적으로는 썩 좋았다.

이날 주인공은 금관악기였으나 목관악기도 훌륭했다. 무엇보다 2악장 클라이맥스와 장송곡에 이어 나오는 플루트 독주가 마치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듯 너무나 애달팠으며, 말러 교향곡 10번 5악장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작지만 안타까운 실수도 있었는데, 1악장 제2주제 전위형이 나오는 마디 185에서 저음 현이 갑자기 치고 나오도록 지휘자가 첼로 쪽으로 예비박을 세게 주었더니 플루트 연주자가 잘못 알아듣고 마지막에 얼버무리는 바람에 느닷없이 울음이 터지는 듯한 효과가 멋질 뻔하다 말았다.

정명훈은 3, 4악장 템포를 조금 빠르게 잡아 전체적으로 밝고 희망찬 브루크너를 연출했으며 4악장에서 템포를 자연스럽게 조였다 풀었다 하는 대목이 돋보였다. 1악장 마디 391부터 팀파니를 앞세운 크레셴도도 멋졌고 이어지는 코다에서 크레셴도와 아첼레란도를 같이 쓴 대목도 제법 그럴싸했다. 4악장 코다에서는 '처음 빠르기로'와 호른에 붙은 '경건하게'라는 나타냄말이 서로 어울리지 못할까 봐 귀담아들었더니 정명훈은 템포를 살짝 늦추었다가 조금씩 조이며 고양감을 높이는 솜씨를 보여주었다.

1악장 스트레토(마디 233)에서는 금관이 너무 나서지 않고 균형을 잘 맞춘 대목은 참 좋았으나 그 때문에 '마르텔라토'가 죽어버려 안타까웠다. 현이 테누토 지시를 너무 곧이곧대로 지킨 탓이다. 이 테누토는 마르텔라토를 살리느라 소리가 너무 딱딱 끊어지면 안 된다는 뜻일 뿐 금관 텍스처와 따로 놀라는 뜻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울시향은 현이 레가토에 가깝게 연주하면서 금관과 나란히 음악을 이끌어버려 앙상블이 훌륭했는데도 어정쩡한 스트레토가 되고 말았다.

2악장 처음에는 저음 현이 바그너튜바 소리를 묻어버려 아쉬웠고 처음부터 음량이 너무 커서 조금 부담스러웠다. 마디 4에서는 메조포르테가 아니라 포르티시모에 가까웠다. 바이올린 여섯잇단음 오스티나토가 나오는 마디 157부터 긴장감을 쌓아가는 대목이 훌륭했으며 클라이맥스에서도 총주를 뚫고 나오는 바이올린 소리가 매우 멋있었다. 다만, 마디 169와 마디 171 넷째 박 포르타토는 너무 레가토에 가까워서 조금 어색했다.

3악장 마디 52에서는 c단조로 넘어가기에 앞서 스타카티시모 음형이 치고 나오는 대목이 멋지다. 그러나 독일6화음을 살려야 제맛이 나므로 트롬본 등이 너무 큰 소리를 내면 좋지 않은데, 서울시향 금관은 이곳에서 딱 알맞은 소리를 내었으나 현이 좀 더 튀어나오지 않아 살짝 아쉬웠다.

알렉산다르 마자르가 협연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7번은 맑고 부드럽고 달콤한 모차르트였으며 들을수록 마냥 행복해지는 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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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9.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01.16. 드뷔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모음곡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 림스키-코르사코프 셰에라자드 - 라르스 포크트 / 정명훈 / 서울시향

2009년 1월 16일(금) 오후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Lars Vogt (Pf)

Debussy, "Pelleas et Melisande" Concert Suite (arranged by Erich Leinsdorf)
Mozart, Piano Concerto No. 21 in C major, K. 467
Rimsky-Korsakov, Symphonic Suite "Scheherazade" Op. 35



드뷔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프랑스 말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음악처럼 들리곤 한다.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커서 마니아라면 누구나 한 번쯤 도전해 보지만 이내 음반을 중고 장터에 내놓고, 그 음반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신세가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기 일쑤다. 그래서 이날 연주된 것과 같은 관현악 발췌곡도 나왔으나 드뷔시다운 어른어른하고 어슴푸레한 소리는 그대로이다. 그런데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음향이 묘하게 그와 어울리는 데가 있었다. 반쯤 잠에 빠진 듯 흐리멍덩한 느낌이 그럴싸했으며, 어찌 보면 지휘자가 원성 자자한 연주회장에서 장점을 이끌어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저음 현 긁는 소리가 좀 더 살아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어렵지 싶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무려 라르스 포크트가 협연을 맡아도 세종 대극장 음향 한계는 어쩔 수 없는 듯했으나 맑고도 그윽한 소리를 이끌어내는 해석이 그럴싸하기도 했다. 더욱이 2악장에서 페달을 많이 쓰면서도 소리가 뭉치지 않게 잘 다듬은 대목이 매우 훌륭했다.

드뷔시와 모차르트에서 연주회장에 순응하는 연주를 들었다면 림스키-코르사코프 <셰에라자드>에서는 때때로 연주회장의 한계를 넘어서는 소리가 들려와 놀라웠다. 세종 대극장에서는 여간해서는 소리가 피부로 와 닿지 않아서 프레이징 따위를 머리로만 듣게 될 때가 잦은데 이날 참으로 오랜만에 화끈한 느낌을 받았다. 정명훈의 해석은 음반으로도 나와 있는 바스티유 오페라 연주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정명훈보다는 수석 연주자들이 독주 때 보여준 개인기에 더욱 눈길이 갔다.

악장 데니스 김이 들려준 독주는 '셰에라자드'라는 인물이 살아 숨 쉬는 듯해서 매우 인상 깊었다. 셰에라자드는 어떤 사람일까? 무서운 임금님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여장부? 임금님을 유혹하는 요녀? 마음 깊은 곳 상처를 달래는 어머니? 데니스 김이 그려낸 셰에라자드는 곳곳에서 두려움을 내비치지만 때로는 허세를 부릴 줄도 아는 순진하고도 용감한 소녀 같았다.

첫 독주는 요염함과 두려움과 허세가 넉넉한 루바토와 에스프레시보로 알맞게 버무려진 연주였고, 마디 94에서는 첫 음과 이어지는 셋잇단음 사이를 포르타토치고는 매우 뚜렷이 나누어 연주해서 마치 선생님 앞에서 두 손 모아 열심히 노래하는 듯했다. 3악장 마디 145에 나오는 스타카토 분산화음은 이야기 속 왕자와 공주를 셰에라자드 부부에 빗대어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이때 데니스 김은 A 음을 늘이고 나머지는 장식음처럼 휘리릭 재빨리 다루어 마치 마음속에 감춘 두려움이 드러나는 듯했으며, 그래서 이어지는 칸타빌레 선율은 더욱 애달팠다. 4악장 마디 29에서는 힘주어 연주하라는 지시를 매우 잘 살려 어느 때보다 활을 거칠게 썼다. 이때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는 매우 여리게 연주하게 되어 있으나 정명훈은 음반에서 했던 것처럼 매우 세게 연주해서 '짠!' 효과를 내도록 했다. 그런가 하면 마디 641에서는 마치 자장가처럼 매우 여리게 속삭이듯 했다.

목관악기 연주자들도 독주 때마다 눈부신 연주를 뽐냈으며, 그 가운데 오보에 수석 이미성이 가장 돋보였다. 글쓴이가 보기에 이미성은 악보에 있는 지시를 아주 작은 곳까지 꼼꼼하게 지키는 남다른 솜씨를 가졌으나 '모범생 연주'를 넘어서는 '끼'를 보여주지는 못하는 단점 또한 안고 있다. 그런데 이날 드디어 벽을 넘은 듯한 모습을 보여주어 몹시 반가웠으며, 그 때문에 옛날부터 글쓴이 마음을 사로잡은 클라리넷 수석 채재일보다도 더 인상 깊었다. 정명훈은 연주가 끝나고 악장에 이어 두 번째로 이미성을 일으켜 세웠다.

글쓴이가 가장 추겨 세우고 싶은 연주자는 트럼펫 수석 가레스 플라워스(Gareth Flowers)이다. 이 곡에서 트럼펫은 목관악기처럼 눈에 확 띄는 솔로 악구는 없으나 티 안 나게 하는 고생이 만만치 않으며, 그러면서도 작은 실수로도 곧잘 연주를 망쳐버릴 수 있어서 호른 못지않게 까다롭다. 이날 때때로 살짝 불안한 대목이 없지는 않았고 연주가 끝나고 지휘자가 일으켜 세웠을 때 금방 도로 앉아버린 일에 미루어 보면 연주자 자신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듣기에는 매우 야무진 연주였으며, 더욱이 4악장에서 빠른 음형이 계속 나오는 곳에서는 깜짝 놀랄 만큼 훌륭했다. 나는 정명훈이 아찔한 템포로 마구 달릴 때에도 트럼펫이 조금도 뒤처지지 않고 바짝 따라오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이럴 수가! 이런 연주자가 있으면 베토벤 교향곡 7번을 해줘야 한다. 마침 올 10월 정기연주회 때 베토벤 교향곡 7번을 연주할 모양이니 기대가 된다.

호른과 트롬본 또한 다부진 연주를 들려주었으며 1악장 시작을 비롯해 여러 차례 나오는 부점 리듬을 날카롭게 다스린 대목이 매우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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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2일 수요일

2008.12.30.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교향곡 9번 - 스베틀린 루세브 / 정명훈 / 서울시향

※ 나중에 고침: 니키친 → 니키틴(Никитин)

원래 ☞《파르지팔》 2막이었다가 프로그램이 바뀌어버린 연주회. 실바스티, 네메스, 니키틴이 각각 파르지팔, 쿤드리, 클링조르였는데 뒤늦게 인드라 토마스가 끼어들어 앙상블을 망쳐놓은, 그러나 그것만 빼면 참 좋았던 연주회.


2008년 12월 30일(화)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Svetlin Roussev/vn, Indra Thomas/sop, Judit Nemeth/mez, Jorma Silvasti/ten, Evgeny Nikitin/bar, 서울시합창단, 국립합창단, 서울모테트합창단

Beethoven,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61
Beethoven, Symphony No. 9 in d minor, Op. 125 "Choral"


정명훈 지휘자는 서울시향을 맡고서 그 이듬해부터 악단 기본기를 닦겠다며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2년 만에 다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하게 되었으니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같고 또 무엇이 다를까. 먼저 단원들이 저마다 더 나은 솜씨를 길렀고 악장 스베틀린 루세브와 클라리넷 수석 채재일 등 훌륭한 연주자를 새로 뽑기도 했다. 악단이 함께 만들어내는 소리도 더욱 좋아졌다. 또 지지난해와는 달리 연주회장이 세종문화회관이 아니라 예술의 전당이라 더욱 듣기 좋은 소리가 되었다.

정명훈의 해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편성 악단을 쓰고 템포를 대체로 느리게 잡으면서도 금관을 뒤로 물려서 소리에 기름기를 빼는 등 역사주의 연주 경향을 중용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옛날 녹음에만 익숙한 사람에게는 맥빠진 연주라고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특히 4악장 도입부에서는 트럼펫이 주선율을 연주하는 옛 관습을 버리고 악보 그대로 연주하는 유행을 따랐으며, 그 때문에 목관악기가 주선율을 연주하고 트럼펫은 목관악기를 살짝 거들기만 하면서 투명한 소리를 내었다. 지지난해에는 연주회장이 저 거대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이라 이 대목에서 마치 앙상블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진 것처럼 들렸으나 올해에는 제법 그럴싸한 소리가 났다. 2악장 둘째 주제(마디 93)에서도 마찬가지로 호른이 주선율을 이끄는 대신 뒤로 물러나 악보대로 연주했다.

1악장 종결구 저음 오스티나토(ostinato)가 시작되는 마디 513에서 템포를 크게 늦춘 다음 1악장이 끝날 때까지 속도를 높인 것도 여전했다. 3악장 마디 133에서는 제2 바이올린이 피아니시모로 연주해야 하지만 서울시향은 일부러 포르티시모에 마르카토로 꾹꾹 눌러 마치 비올라처럼 들리게 했다. 시향이 연주한 3악장은 밝고 포근했으나 이 대목만큼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느낌을 올해에도 받았다. 그래, 따듯한 위로를 받았으니 한 번쯤 목놓아 울기도 해야겠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하면서 독창자들이 연주를 망치지 않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없다. 가수들이 오페라 아리아를 부를 때에는 잘해도 교향곡에서 다른 악기에 녹아드는 데에는 익숙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외국에서 제법 잘 나가는 가수들을 모셔와서 기대했는데 소프라노만 아니었으면 참 좋았을 뻔했다. 소프라노 인드라 토마스가 노래할 때마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화음이 망가지곤 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고음 처리가 까다로운 마디 841에서는 억지로 소리를 쥐어짜느라 리듬엔블루스처럼 되어버렸다. 연주가 끝나고 누리꾼들 사이에서 소프라노를 탓하는 소리가 컸다. '오 벗이여, 이 소리가 아니야!'

가수들이 무대 앞으로 나오지 않고 금관악기와 나란히 서서 노래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목소리가 다른 악기와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하려면 이렇게 하는 게 좋으며 지지난해에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금관악기와 타악기 소리 때문에 가수들이 제 목소리를 듣기 어려워지는 게 문제다. 게다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은 무대 위 음향이 매우 나쁘다고 한다. 가수 바로 뒤에 투명한 반사판을 두었으나 그것만으로는 한참 모자랐던 모양이라 베이스바리톤 예프게니 니키틴은 노래할 때마다 오른손을 귀에 갖다대기도 했다. 나는 그래도 가수를 뒤에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대에 적응할 시간을 좀 더 주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예프게니 니키틴은 지난 2005년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국내 초연 때 보탄(방랑자)을 맡았던 가수다. 그때는 목소리가 꽤 단단했는데 3년 만에 다시 보니 조금 부드러워진 대신 깊은 소리로 바뀌었다. 그러나 작품 성격이 다른 만큼 고약한 독일어 발음이 더 자주 발목을 잡았고 이것이 좋지 않은 루바토로 이어져 선율이 느슨해지곤 했다. 특히 /r/ 발음에 굳이 모음 하나 음표 하나를 더 넣어 부르는 게 마음에 안 들었으며, "Wo dein sanfter Flügel weilt" 할 때 엉뚱하게도 "Wo" 바로 뒤에 숨을 쉬어버려 가사 전달과 선율 흐름을 모두 망치기도 했다. 다만, 중창 때에는 다른 가수와 어울려 훌륭한 앙상블을 이루었다.

테너 요르마 실바스티는 경력을 보면 상대적으로 다른 가수들에 밀리는 듯싶지만 이날 노래를 들어보니 오히려 가장 뛰어났다. 맑고 탱글탱글하면서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악단과 하나가 되었고 딕션 또한 나무랄 데 없었다. 메조소프라노 유디트 네메스는 비중이 작아서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으나 테너와 함께 화음에 탄탄한 기둥을 만들어 내는 솜씨가 매우 훌륭했으며 딕션도 좋았다.

합창단은 이날 진짜 주인공이었다 할 만큼 멋졌다. 우리나라 합창단 어려운 사정은 안 봐도 뻔한데 이렇게 좋은 연주를 해내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한 시향 악장 스베틀린 루세브는 부드럽고 우아한 '프랑스풍' 연주를 들려주었다. 베토벤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싫어할 사람도 있을 듯싶지만, 편견을 버리고 들으면 매우 훌륭한 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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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1일 화요일

2008.11.06. 모차르트 구도자의 엄숙한 저녁기도 / 말러 교향곡 4번 - 정명훈 / 서울시향

2008년 11월 6일(목)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Kate Royal(소프라노), 서은진(메조소프라노), 김종호(테너), 정록기(바리톤)
서울모테트합창단 (합창지도 : 박치용)

Mozart, Vesperae solennes de Confessore, K. 339
Mahler, Symphony No. 4 in G



요즘은 역사주의 바람이 현대 악기 연주에도 영향을 끼쳐서 베토벤 이전 작품을 연주할 때 악기 수를 줄이고 연주법에도 기름기를 빼는 게 대세다. 정명훈의 모차르트 <구도자의 엄숙한 저녁기도> 해석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울시향은 투명하고 산뜻한 소리를 들려주었으며 템포는 빨랐다. 독창자들이 만들어낸 앙상블에서도 기름기를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안정된 화음이 나무랄 데 없었다. 소프라노 케이트 로열이 들려준 '라우다테 도미눔'은 이날 연주회장에 소문난 고음악 마니아들이 말러 마니아 못지않게 눈에 띈 까닭을 알 수 있게 했으며, 마디 63에서 F 음으로 시작하는 멜리스마(melisma)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합창도 훌륭했으며 연주가 끝나고 정명훈이 합창지휘자 박치용을 무대로 이끌고 나와 인사하게 하는 모습이 보기 흐뭇했다.

말러 교향곡 4번은 실내악을 닮은 짜임새가 돋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 안에 우주 삼라만상을 담고 있다. 악기 하나하나가 독주 악기처럼 제 목소리를 내면서도 그것이 모여 대립하고 상생하며 함께(sym) 울리는(phony) 것이 말러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교향곡 4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것을 소리로 풀어내는 일이 지휘자에게나 오케스트라에나 쉽지 않은 일인데 이번 연주회에서는 정명훈의 중용적인 해석과 서울시향의 뛰어난 앙상블이 만나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1악장에서 목관 악기가 아기자기한 음형을 주고받는 마디 58에서 앙상블이 특히 좋았고 호른도 큰 실수 없이 잘했다. 마디 224에 나오는 이른바 '작은 나팔소리'를 연주한 트럼펫이 매우 멋있었는데 누군가 했더니 시향 트럼펫 수석 Gareth Flowers더라. 코다로 넘어가기 바로 앞선 마디 330 이후 현악기가 내는 여리고 투명한 소리가 매우 아름다웠으며 폭이 매우 큰 아첼레란도를 거쳐 마지막 총주로 이어질 때도 훌륭했다. '천상의 삶' 주제가 나타나는 마디 125에서는 악보대로 플루트 네 대가 같은 선율을 연주하는지 조금은 짓궂은 마음으로 따져 봤는데 악보대로 했을 뿐 아니라 마치 악기가 하나인 것처럼 잘 맞았다. 클라리넷 또한 나팔을 위로 들어 올리라는 지시를 꼼꼼히 지켰다. 재현부에서 '천상의 삶' 주제가 나오는 마디 251에서 심벌즈 소리가 너무 커서 트라이앵글 소리가 묻혀버린 일은 조금 아쉬웠다.

2악장에서는 솔로 바이올린을 온음 높게 조율하여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게 재미있으며 이때 마디 7 등에서 F# 음을 개방현으로 연주하기도 한다. 이날 악장을 맡은 데니스 김은 F# 음을 개방현으로 연주하지 않고 오히려 메사디보체(messa di voce)로 부드럽게 연주했는데, 말러가 일부러 듣기 싫으라고 비틀어놓은 음표를 억지로 듣기 좋게 만든 꼴이라 갸우뚱했다. 마디 78에 나오는 오보에 선율은 4악장에 나오는 '아이들은 천국의 음악가라네! (Cäcilia mit ihren) Verwandten sind treffliche Hofmusikanten!' 선율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서 성악과 오보에 느낌 모두를 살리려면 레가토와 스타카토 사이에서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하는데 이날 연주는 나무랄 데 없었다. 마디 102와 마디 246 등에서는 콘트라베이스가 리듬을 좀 더 뚜렷하게 살렸으면 싶었다. 특히 마디 274에는 '또렷하게 deutlich!'라는 지시어까지 붙어 있지만 이날 연주는 굼뜨게 들렸다.

3악장은 셈여림 기호가 pppp까지 여려지는 마디 338에서 투명한 현 소리가 매우 아름다웠으며 몹시 느린 템포가 어우러져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마디 73-75에서는 ppp에서 ff로 가파르게 치솟는 크레셴도가 제법 훌륭했으나 마디 75로 넘어갈 때 글리산도를 좀 더 또렷하게 살렸으면 싶었고 마지막 E 음에서 활을 살짝 끊어 연주한 점은 옥에 티였다. 이른바 '천국의 문'이 열리기 바로 앞선 마디 303부터 매우 여린 소리로 마치 문을 두드리듯 또는 종을 치듯 하는 부분도 제법 멋졌다. 현악기와 관악기가 두터운 화음으로 균형잡힌 소리를 내면 때때로 합창 소리를 닮은 신비로운 음향이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바로 이 부분이 그렇다. 이날 연주에서는 '합창 소리'가 들릴락말락 해서 조금은 아쉬웠고 비올라와 첼로 소리가 아주 조금만 더 컸으면 싶었다.

4악장에서 소프라노 케이트 로열은 음색이 살짝 어둡고 '흐' 하는 헛바람 소리가 섞여 나와서 첫인상이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목소리에 나타나는 표정이 매우 풍부한 점은 마음에 쏙 들었다. 4절에서 여리고 부드럽게 부르는 이른바 소토보체(sotto voce)가 썩 훌륭했으나 그 가운데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만물이 깨어 기쁨으로 가득하네. Dass Alles für Freuden erwacht."(마디 169)에서는 소리가 살짝 커져서 아쉬웠다. 말러는 pp 표시를 해놓고는 괄호를 씌워놓았는데, 낮은 음역까지 소화하는 가수가 매우 여리게 부르기에는 너무 높은 음이라 쉽지 않은 모양이다.

연주가 조용히 끝나고 여운을 살리는 '침묵 악장' 또한 훌륭했다. 잔향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도 지휘자는 20초 가까이 지휘봉을 내리지 않았고 관객 또한 그 '지시'를 매우 잘 지켰다.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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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31일 월요일

2008.08.12.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 프랑크 페터 침머만 / 정명훈 / 서울시향

2008년 8월 12일(화) 오후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프랑크 페터 침머만 (바이올린)

Beethoven, Violin Concerto in D, Op. 61
Dvorak, Symphony No. 9 in e, Op. 95 "From the New World"



음식 재료를 여러 가지 많이 쓴다고 아무나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나 여러 재료를 두루 잘 쓰는 요리사는 재료가 다양할수록 더 맛있는 음식을 잘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셈여림, 빠르고 느림, 거친 소리와 매끈한 소리 등 표현할 수 있는 재료가 많을수록 좋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한 프랑크 페터 치머만은 가지가지 재료를 적절히 쓰는 재주가 남달랐다. 이를테면 빠른 음형에서 윗활로 긁으면서 매끄러운 소리를 내다가도 다른 부분에서는 아랫활로 날카로운 소리를 내기도 했고, 때때로 발까지 굴러가며 힘차게 활을 그어댔으며 여린 소리는 또 매우 여리게 내서 뒤쪽에 앉은 사람은 잘 안 들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연주회장이 세종문화화관이 아니라면 좋았으련만.

치머만의 연주가 딱딱했다는 의견이 더러 있던데,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음향 탓에 소리가 좀 메마르게 들리기도 했고 연주자가 독일 사람이라 그런지 잔꾀를 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연주해서 무뚝뚝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딱딱하다는 말은 너무 한쪽만 보고 한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가만 보니 <SPO> 연주자 소개말에 이런 말이 있다.

"그는 매우 냉철하면서 객관적으로 음악을 대하는 연주자다. 감정보다는 이성을, 흥분하여 말하기보다는 논리적으로 표현하려 하고 디테일 또한 절대 대충 처리하는 법이 없다."

이 말은 치머만이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만 연주하는 메마른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라고 믿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 말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저 말에서 '그'를 '브람스'로, '연주자'를 '작곡가'로 바꿔보면 어떨까? 작곡 기법을 따지자면 참말로 옳다. 브람스만큼 논리적으로 작곡한 사람도 드물다. 그러나 브람스 음악이 '머리로 듣는' 음악인가?

치머만은 브람스 같은 연주자다. 가지가지 재료를 적절히 쓰는 방법에는 치밀한 계산이 뒷받침하는 듯했지만, 그 소리에는 깊은 감성이 우러나왔다. 그에게 이성과 감성 가운데 어느 하나가 먼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중용'이라는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연주자가 또 있을까.

치머만이 들려준 연주는 다 좋았지만 딱 한 군데 내가 싫어하는 해석을 보여준 곳이 있었다. 3악장 마디 331에 나오는 F# 음을 너무 짧게 끊어버린 것이다. 이곳은 작품 전체의 절정에 해당하는 곳으로 D 장조 으뜸화음을 길게 늘인 'I-VI-I-ii-V-I'꼴 화성 진행을 되풀이하면서 마치 '승리의 팡파르'같은 분위기를 내되 그 고양감을 독주 바이올린 선율에 집중시켜 놓았다. 여기서 F# 음에 따라붙는 화음은 버금가온화음(VI)이고 앞 마디의 선율 D-C#-D-E-F#에 이어져 화성과 선율 모두 F# 음에 고양감을 실어주고 있다. 그러나 치머만은 이 중요한 음을 악보에서 지시한 것보다도 훨씬 짧게 지나가듯 연주했다. 소리를 좀 더 늘여서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는 금빛 반짝이는 소리를 들려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앙코르로 연주한 파가니니의 <신이여 왕을 지켜 주소서> 변주곡은 치머만의 왼손 테크닉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소름 끼치도록 잘 보여주었다. 하긴, 테크닉이 이쯤 되고 보면 감성적인 연주자라는 소리를 듣기 어렵기도 하겠다.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은 '응원 교향곡'이라고도 불릴 만큼 4악장 제1 주제가 응원가로 자주 쓰이기도 하고 또 386세대에게는 '전대협 팡파르'로 기억되기도 한다. 이런 지나친 명성은 자칫 음악이 선정적으로 흐르게 할 위험이 있으며, 더군다나 이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민요풍 선율과 리듬을 잘못 살리면 자칫 촌스러워지기 쉽다. 정명훈은 템포를 제법 느리게 잡고 저음 현을 두드러지게 한 '거장풍' 해석으로 위험을 비켜갔다.

특히 1악장 도입부에서는 악보에 있는 메트로놈 지시보다 두 배 이상 느린 템포로 시작해 음형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빨라지도록 했으며, 코다에 유난히 힘을 실어주고 템포도 바짝 조여서 마치 1악장 전체에 크레셴도와 아첼레란도를 준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4악장 도입부에서도 느린 템포로 시작해 아첼레란도를 썼다.

1악장은 소나타 형식을 따르지만 제2 주제가 나오기 앞선 마디 91에서 플루트와 오보에가 연주하는 '사이비' 제2 주제가 나오는 점이 특이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브루크너가 그렇게 한 것처럼 주제 셋을 거느린 별난 소나타 형식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통적인 형식에 맞추어 보면 이 주제는 제2 주제가 될 수 없다. 이 작품이 e 단조를 따르므로 제2 주제는 e 단조의 관계장조인 G 장조라야 하지만 이 주제는 g 단조이기 때문이다. 정명훈은 진짜 제2 주제가 나오는 마디 149에서 템포를 크게 늦추어 제1 주제 및 '사이비' 제2 주제와 뚜렷이 구분하고 전통적인 형식미를 살렸다.

2악장에서는 잉글리시 호른 독주도 멋있었지만, 마디 54부터 나오는 콘트라베이스 피치카토와 마디 78부터 나오는 첼로 트레몰로를 주선율처럼 앞세운 것이 이날 연주 가운데 가장 멋있었다. 다만, 마디 107부터 109까지 세 번 나오는 모두쉼표(Generalpause)를 느린 템포에 비해 가볍게 다룬 것이 조금은 뜻밖이었다. 3악장이 끝나기 바로 앞서 나오는 모두쉼표 또한 과장없이 가볍게 처리했다. 3악장 템포는 악보 지시보다 빠른 편이었고 금관과 팀파니의 활약이 돋보였다.

4악장에서는 저 유명한 제1 주제도 좋았지만 제2 주제(마디 66) 클라리넷 선율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객원인지 단원인지 헷갈리는 이 연주자는(나중에 붙임: 서울시향 클라리넷 수석 ☞채재일) 얼마 전부터 시향 정기연주회에서 좋은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데, 나는 이제 완전히 팬이 되어버렸다. 마디 320에서 곡을 끝맺기 전에 잠시 힘을 빼며 호른과 팀파니가 폭풍전야처럼 긴장감을 쌓아가는 것도 나무랄 데 없었다.

이 작품은 '신세계로부터'라는 표제가 말해주듯이 미국을 노골적으로 찬양한 작품이다. 그러나 정명훈은 앙코르로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 4악장 '환희'를 연주하기에 앞서 올림픽 출전 선수를 응원하는 말을 해서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또한 '응원 교향곡'으로 만들었다. 어쨌거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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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5.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 니콜라스 안겔리치 / 정명훈 / 서울시향

서울시향 클라리넷 수석 채재일이 무대를 휘어잡아 《비창 교향곡》 바순 독주를 빛바래게 해버린 연주회. 어마어마한 '포스'를 뿜어내는 진줏빛 소토 보체(sotto voce)에 깜짝 놀랐으나 정명훈이 뿜어내는 존재감이 이날따라 워낙 대단해서 채재일한테 논점을 모아주기 어려웠다. 이 일이 못내 아쉬워서 다음 연주회 때 맘먹고 칭찬한다는 게 고작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4악장 2주제... -_-; 이날 숨은 주인공은 채재일이었다. 완소 채재일 씨 짱 드셈. >_<


2008년 7월 5일(토)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니콜라스 안겔리치(피아노)

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in E-flat, Op. 73 "Emperor"
Tchaikovksy, Symphony No. 6 in b, Op. 74 "Pathetique"


정명훈이 서울시향을 지휘할 때면 앙상블이 갑자기 크게 좋아지곤 한다. 정명훈이 지휘를 잘하기도 하고 대가의 존재감 때문에 단원들이 열심히 연주하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이름난 외국 악단에서 객원 연주자를 데려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객원 덕에 앙상블이 좋아졌으니 진짜 서울시향 실력이 아니라고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객원 연주자의 수준 높은 연주를 시향 단원들이 듣고 배울 테니 말이다. 서울시향은 그 뒤로도 '찾아가는 연주회' 등으로 같은 곡을 '복습'하면서 배운 것을 바로 써먹을 수 있다. 또 객원으로 왔다가 단원으로 눌러앉는 사람도 더러 있다. 악장 스베틀린 루세브나 팀파니 수석 아드리앙 페루숑이 그렇다. 옛날에는 시향 단원이 객원 연주자를 따라가지 못해서 객원들만 두드러질 때가 잦았지만, 요즘은 크게 나아져서 오케스트라 전체가 함께 성장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날 연주는 그 가운데서도 손꼽을 만큼 훌륭했다.

니콜라스 안겔리치가 협연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은 무척 낯설게 들렸다. 서울시향은 대편성으로 묵직하게 밀어붙였지만 안겔리치는 오케스트라에 팽팽하게 맞서지 않고 살짝 흘리면서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연주했다. 또 마치 쇼팽을 연주하듯 루바토를 과장해서 쓰고 곳곳에서 소토 보체(sotto voce)로 연주하는가 하면 페달을 너무한다 싶을 만큼 잔뜩 써댔다. 무대로 걸어나올 때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던 생각이 겹치면서 협연자가 몸이 아프지는 않은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엉터리 연주라고 화를 내야 할까. 생각 끝에 나는 참신한 해석이라고 좋게 여기기로 했다.

우리는 어쩌면 '황제'라는 표제 때문에 생각이 틀에 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표제는 악보 출판업자가 장삿속으로 붙였을 뿐 작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작품은 그저 피아노 협주곡일 뿐이며 '황제'와 관련한 상상을 보태어 그에 걸맞은 웅장함을 바라는 것은 잘못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봐, 그래도 안겔리치는 너무하지 않아? 저게 쇼팽이지 어딜 봐서 베토벤이라는 거야?" 그 말대로 안겔리치가 한 연주는 베토벤답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꼭 베토벤다워야 할 까닭이 있는가? 움베르토 에코는 '작품을 내놓고 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라고 했다. 작가가 의도한 것만을 고이 받들어 모실 게 아니라 누구나 자유롭게 열린 해석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제까지 알고 있던 '황제 협주곡'은 잠시 잊어버리고 연주자가 내놓은 색다른 해석을 기꺼이 받아들여 보면 어떨까?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연주는 오늘따라 더욱 뛰어난 서울시향의 앙상블과 '다크 포스' 넘치는 정명훈의 해석이 맞물린 명연주였다. 1악장에서 음악에 긴장감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거대한 크레셴도를 만드는 솜씨가 훌륭했고 바순과 클라리넷 독주 또한 표정이 잘 살아있는 뛰어난 연주였다. 마디 161에서 터져 나온 총주는 어찌나 사나운지 바로 앞에서 울다 지쳐 잠드는 듯하던 클라리넷 소리를 갈가리 찢어발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부 러시아 지휘자가 남긴 녹음과는 달리 트럼펫을 앞세워 귀 따갑게 으르렁거리지 않고 악기 사이에 균형을 잘 맞췄다.

3악장에서는 빠른 템포로 달리면서도 앙상블이 흐트러지지 않은 점이 매우 훌륭했다. 긴장감을 조금씩 쌓아올리다 마디 229에서 크게 터트릴 때에는 특히 현이 몹시 날카롭게 끊어 긁어대며 섬뜩한 소노리티를 만들어내었다. 차갑게 비웃는 듯한 행진곡 리듬이 내가 이제껏 들어본 그 어떤 연주보다도 폭력적이고 무시무시했다. 마치 나치 시대 독일군 사열식을 보는 것처럼, 또는 스탈린 시대 러시아 군대처럼, 또는….

4악장은 슬프고도 슬펐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현이 울부짖지 않고 왠지 차갑게 가라앉은 것 같았고, 절망 속에서 처절하게 허우적거리는 대신 차분히 관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디 81에서는 게네랄파우제(Generalpause)를 생각보다 가볍게 다루어 바로 뒤이어 목놓아 울어대는 바이올린과 첼로에 무게를 실어주지 않았다. 곡이 끝날 때 콘트라베이스가 연주하는 셋잇단음 리듬은 심장이 조금씩 느려지다가 멈추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이날 연주는 여기에서도 생각보다 담담했다. 정명훈이 표현하는 절망이 이만큼밖에 깊지 않다고 믿기는 어렵다. 정명훈은 왜 그랬을까?

답은 앙코르에서 드러났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 4악장을 앙코르로 연주한 것이다! (4악장을 통째로 연주하지는 않고 마디 60부터 148까지를 건너뛰었다.) 정명훈은 차이콥스키가 교향곡 5번 4악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짜 승리'라도 억지로 '5악장'으로 덧붙여 절망과 체념 속에 주저앉지 않으려고 했나 보다. 심벌즈를 세 대나 그러모아 요란하게 쳐댄 것은 더더욱 교향곡 5번 4악장 같은 역설을 만들어내었다. 그러고 보니 '앞선 악장'에서 정명훈이 절망과 체념 대신 담으려고 했던 것은 커다란 분노가 아니었을까. 정명훈이 옛날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요즘 들어 무슨 일을 겪었는지 궁금하다.

이날 연주가 끝나고 누리꾼 사이에 박수 예절을 놓고 논란이 되었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3악장이야 워낙 '뿜빰빰'하고 법석을 피우며 끝나니 박수가 터져 나오는 일은 이제 당연한 일(?)이기도 하며 더군다나 알면서 일부러 박수를 보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4악장은 죽어가듯이 천천히 여리게 끝나기 때문에 여운을 주는 '침묵 악장'이 매우 중요하다. 이날은 잔향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박수가 터져 나오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었으나 잔향이 없어지고 채 5초가 지나지 않아 끝내 성급한 박수가 나왔다. 그때까지 지휘봉을 높이 들고 있던 정명훈은 김 샜다는 듯이 팔을 내리고 말았다. 잔향이 없어지기에 앞서 치는 손뼉을 '안다 박수'라고 하여 비꼬아 말하기도 하는데, 이날 박수는 '안다 박수'는 아니고 '깬다 박수'라고 하더라. 성급한 박수는 여운을 즐기려는 다른 관객에게 피해를 주니 곡이 조용히 끝날수록 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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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9일 토요일

2008.02.29. 메시앙 투랑갈릴라 교향곡 - 폴 김 / 하라다 다카시 / 정명훈 / 서울시향

2008년 2월 29일(금)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폴 김 (피아노), 하라다 다카시 (옹드 마르트노)

Messiaen, Turangalila-symphonie



내가 그동안 정명훈에게 갖고 있던 불만 하나는 그가 지휘하는 서울시향 연주회 프로그램에 현대음악을 거의 넣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괜한 투정이기는 하다. 그동안 베토벤과 브람스를 거치며 단원들 기본기 쌓기 바빴고, 아직도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현대음악은 객원 지휘자들이 드물지 않게 연주하고 있고 <진은숙의 아르스노바> 시리즈도 있다. 그런데도 정명훈 지휘로 현대음악을 들어보고픈 욕심을 버리지 못하던 가운데, 마침내 때를 만났다. 올해가 메시앙 탄생 100주년, 정명훈이야말로 작곡가 본인에게 극찬을 받은 메시앙 전문가가 아니던가! 정명훈 못지않게 메시앙 전문가로 이름 높은 피아니스트 폴 김과 옹드마르트노(Ondes Martenot) 전문 연주자 하라다 다카시도 데려왔다. '정명훈 효과'에 힘입어 <투랑갈릴라 교향곡> 한 곡만 연주한다는데도 연주회장은 꽉꽉 찼다.

그리고 무대를 가득 메운 타악기들. <투랑갈릴라 교향곡>은 독주 악기가 둘이나 있는 작품이지만, 이날 진짜 주인공은 타악기 연주자들이었다. 시향 타악기 주자들은 실력이 정말 뛰어나다. 타악기 수석 에드워드 최는 내가 전에도 몇 번 지면을 빌어 칭찬한 적이 있거니와 다른 사람들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팀파니 말고는 고전 레퍼토리에 타악기가 잘 쓰이지 않아서 실력 발휘할 기회가 자주 없었다가 드디어 이날 솜씨를 맘껏 뽐냈다. <투랑갈릴라 교향곡>은 현대음악 중에서도 타악기가 많이 쓰인 작품이다. 어지간한 마니아들도 낯설어할 만한 악기도 더러 쓰였으니 이참에 악기 이름부터 익혀보자.

객석에서 봤을 때 피아노 왼쪽에 있던 풍금(Harmonium) 닮았으면서 소리는 카랑카랑한 악기는 첼레스타(Celesta)다. 그 왼쪽에 있던 실로폰 닮은 악기 둘은 글로켄슈필(Glockenspiel)인데, 실로폰이나 마림바(Marimba)와는 달리 나무막대가 아닌 쇠막대로 되어 있다. (우리가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쓰던 장난감 실로폰은 사실은 글로켄슈필이다.) 무대 맨 왼쪽에 있던 실로폰 닮았으면서 '웅웅웅' 하는 소리를 내던 악기는 비브라폰(Vibraphone)이다. 비브라폰 바로 뒤에 있던 길쭉한 쇠막대는 차임(Chime; Tubular bell)이다.

오케스트라 맨 뒤에 있던 까만 볼링 공에 막대기를 꽂은 듯한 모양에 막대를 잡고 흔들어 '쌕쌕'하는 소리를 내던 악기는 마라카스(Maracas)다. 그 옆에 나무토막을 채로 때려서 소리 내던 악기는 말 그대로 우드블록(Woodblock)이고, 6악장에서 우드블록 대신 더 깊고 작은 소리를 내던 악기는 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목탁(Temple block)이다.

그밖에 심벌즈, 트라이앵글, 탬버린, 작은북(Snare drum), 큰북이 있었고, 9악장에 나오던 통이 긴 북은 탕부랭(Tambourin provençal)이다. 심벌즈를 눕혀놓은 악기들은 크기가 작은 순으로 터키 심벌즈(Turkish cymbals), 서스펜디드 심벌즈(suspended cymbals), 중국 심벌즈(China cymbals)다. 줄에 매달아 놓고 채로 때리면 '구아앙!'하는 매우 큰 소리를 내는 징 닮은 악기는 탐탐(Tam-tam)이다. 북 종류인 톰톰(Tom-tom)과 전혀 다른 악기이니 주의할 것.

사람들 눈길을 가장 많이 끌었을 옹드마르트노(Ondes Martenot)는 전자악기답지 않게 '클래식하게' 생겨서 더욱 신기했다. 하라다 다카시의 연주는 음반으로 듣던 다른 연주자들보다 '아날로그하게' 들리기도 했다. 왼손이 떨릴 때마다 음색이 어찌 그리 다채롭게 바뀌는지!

그런가 하면 폴 김의 피아노는 어찌 들으면 전자악기같은 음색이었다. 작곡가가 기계적이고 타악기적인 음형을 잔뜩 써놓았기 때문이겠는데, 또 어찌 들으면 마림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특히 6악장에서 피아노가 '또랑또랑'하고 글로켄슈필과 첼레스타가 '까랑까랑'하고 비브라폰이 '웅웅웅'하면서 세 가지 음색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하늘나라 꽃밭이 눈에 그려질 듯했다.

타악기 주자 못지않게 빛났던 조연은 금관 연주자들이었다. 금관이 무르고 실수가 잦은 게 우리나라 오케스트라이기에 나는 더더욱 이날 훌륭한 연주에 진심으로 감동했다. 특히 트럼펫 수석이 금가루 똑똑 떨어질 듯 빛나는 소리로 힘찬 연주를 들려준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다만, 욕심을 부리자면 트럼펫이 섬세한 맛을 조금만 더 살렸으면 싶었다. 이를테면 1악장 마디 59에서 트럼펫 세 대가 빠른 반복 음형을 이어가는 부분은 포르티시모(ff)에서 피아노(p)로 재빨리 바뀌면서 마치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잠자리가 갑자기 날개를 파르르 떨며 멀리 날아가는 듯한 느낌이 재미있는데, 이날 연주자들은 악기 사이에 음을 이어받는 것은 부드러웠으나 제1 트럼펫이 포르티시모가 아닌 메조포르테(mf) 정도로 시작한 탓에 '깜짝 효과'와 원근감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았다. 피아노가 어택(attack)을 제대로 못 맞춰주는 바람에 마치 트럼펫이 반 박자 빨리 들어간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다른 연주자들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했다. 작품이 작품이니만큼 실수가 쌓이면서 조마조마한 순간이 더러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웬걸, 작품에 어지간히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실수를 찾아낼 수 없을 만큼 완벽에 가까운 연주였다.

정명훈의 해석은 바스티유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한 음반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5악장과 10악장 마지막 음의 늘임표(fermata)를 몹시 과장하고 심지어 어마어마한 크레셴도를 준 것이 재미있었다. 연주회장이 떠나가도록 불고 긁고 두드려대는 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이런 과장은 자칫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어 위험하지만, 이날은 연주회장의 생생한 분위기를 업고 큰 효과를 거두었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연주자가 이런 '오버 액션'을 할 때에는 '클래식' 음악 연주회랍시고 점잖게만 있을 게 아니라 대중음악 연주회처럼 음악이 덜 끝났어도 박수와 환호를 보내면 어떨까. 너무 발칙한 생각인가?

연주가 끝나고 정명훈이 인사하면서 앞자리에 앉아있던 어린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아이가 고전음악을 어려워하거나 고리타분하게 생각한다면 현대음악을 먼저 들려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편견이 없어서 현대음악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단, 가정용 오디오로는 현대음악의 참맛을 알기 어려우므로 연주회장에 직접 데려가는 게 좋다. 서울시향의 현대음악 특집인 <진은숙의 아르스노바> 연주회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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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8일 금요일

2007.12.27.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 교향곡 4번 - 넬손 프레이리 / 정명훈 / 서울시향

2007년 12월 27일(목)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넬손 프레이리 (Nelson Freire, 피아노)

Brahms : Piano Concerto No. 2 in Bb Major, Op.83 (44')
Brahms : Symphony No. 4 in e minor, Op.98 (39')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협주곡 1번과 마찬가지로 협주곡이라기보다는 교향곡에 가깝다. 이 때문에 협연자는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음량에 맞서 일단 살아남아야 하며, 연주 테크닉 또한 매우 뛰어나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브람스 음악이 가진 치밀하고 논리적인 구성을 풍부한 감성으로 풀어내는 일도 만만치 않다. 이처럼 연주자가 삼중고를 떠안아야 하는 까닭에 매우 유명한 작품인데도 국내에서 연주되는 일이 거의 없다.

넬손 프레이리의 피아노 연주는 여러모로 지난 5월 18일에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개리 그래프만을 떠올리게 했다. 커다란 밑그림이나 악상의 자연스러운 흐름, 다양하고 적절한 음색 등은 훌륭했으며, 이 점에서는 지난 2005년 11월에 리카르도 샤이가 지휘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여 음반으로도 나온 명연과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실수가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리듬이 곧잘 망가지곤 하는 것이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다 싶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손가락 골절 때문에 제 실력을 내지 못했단다.

아픈 손가락으로 이렇게까지 연주해낸 것을 보면 역시 일류 연주자라 하겠지만, 아무래도 정명훈과 서울시향은 뒷감당하느라 고생이었다. 오케스트라 소리를 되도록 작게 내려고 벌서는 듯 연주하기 일쑤였고, 어택(attack)을 죽이고 여린 음에 크레셴도를 주는 식으로 협연자를 배려하기도 했다. 피아노 리듬이 망가질 때마다 정명훈이 재빨리 수습하려고는 했으나 서울시향은 아직 그런 돌발사태에 재빨리 대처하는 능력은 충분히 기르지 못한 모양이라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서로 발목을 잡기도 했다. 3악장 첼로 독주가 매우 뛰어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밤베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 출신 객원이었다고 한다.

앙코르로 연주한 글룩의 "멜로디"(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가운데 '정령들의 춤'을 스감바티(Giovanni Sgambati)가 피아노곡으로 편곡)는 여린 음만으로 그윽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어 손가락 골절을 손쉽게 감추어주는 영리한 선곡이었다.

브람스 교향곡 4번은 특히 1악장에서 여러 성부가 조각조각 정교하게 맞물리는 독특한 텍스처 때문에 앙상블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멍덩한 소리가 되어버릴 위험이 있는데, 이날 연주가 이따금 그랬다.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기운이 빠져버렸던 것일까. 결코 졸연은 아니었지만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치고는 뭔가 좀 모자란 듯했다. 물론 이것은 연주회장 탓도 크다. 소리가 무뎌지곤 했던 것은 단원들이 큰 실수를 해서가 아니라 미세하게 리듬이 서로 어긋나거나 순간적으로 밸런스가 안 맞거나 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연주회장의 음향이 개선되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렵다고 본다.

팀파니 소리가 이날따라 이상했으며, 악기에 이상이 생긴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을 만큼 평소 실력에 못 미치는 연주였다. 오케스트라 총주를 휘감아 올라 결정적인 '한 방'으로 터트리지 못하고 자신감 없이 뒤로 빠질 때도 더러 있었다(이를테면, 마디 129). 저음 현 또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왠지 끌려다니는 듯했다. 작품에 담긴 '다크 포스'를 4악장에 몰아서 '거대한 크레셴도'를 만들어내려고 지휘자가 의도한 것은 아닐까도 잠깐 생각해보았으나, 또 달리 생각하면 마에스트로가 1악장을 그렇게 간단히 희생시키려고 했을 리는 없다.

2악장은 템포가 대략 ♪= 60 정도로 꽤 느렸는데, 3악장의 빠른 템포와 대비시키는 것은 크게 보면 타당한 해석이라 하겠으나 느린 만큼 집중력 있는 앙상블이 뒷받침되지 못해서 설득력을 충분히 얻지는 못했다. 마디 84에서는 힘없는 클라이맥스가 되었고, 마디 88에서는 바이올린이 흐느끼는 듯한 소리는 좋았으나 두터운 화음을 이루지는 못했다. 다만, 현악기군의 피치카토 음형은 깔끔했으며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3악장부터는 명쾌한 리듬을 업고 썩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반복되는 16분음 스타카토 음형을 나무랄 데 없이 깔끔하게 일치시켜 놀라운 소노리티(sonority)를 만들어내었고, 서울시향의 앙상블이 사실은 뛰어난데 작품이 작품이라 이제껏 고전했음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돌이켜보건대 이토록 훌륭한 앙상블을 이룰 수 있는 악단인데도 음형이 복잡하게 얽힐 때에는 영 제 실력을 내지 못했다면 연주회장의 음향이 요술을 부린 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려우며, 이것만 보아도 시향 전용 연주회장이 절실히 필요함을 알 수 있다.

템포는 ♩= 135 정도로 꽤 빠른 편이었고, 군데군데 리타르단도를 써서(이를테면, 마디 5) 뚜렷한 템포 대비를 준 것이 인상깊었다. 앙코르로 3악장을 다시 한 번 연주했는데, 이때는 가운데 부분(마디 35-223)을 생략하고 템포 변화도 거의 없이 신나게 달려서 그야말로 앙코르다웠다.

4악장은 3악장에서 되찾은 기운을 살리고 파사칼리아(passacaglia) 특유의 반복과 점층 구조에 힘입어 마치 예고된 파국처럼 한 발 또 한 발 무게를 더해가는 거대한 크레셴도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마디 33에서 바이올린의 비장한 선율도 훌륭했고, 마디 193의 셋잇단음은 절망에 빠져 목놓아 부르짖는 듯했다. 다만, 마디 97의 플루트 독주는 기술적으로는 흠 잡을 데 없이 깔끔했으나 너무 무덤덤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름대로 루바토를 쓰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일부러 무표정한 연주를 의도한 것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구슬프게 흐느끼는 연극적인 표현이 낯 간지러웠던 게 아닐까 싶다.

정명훈이 서울시향을 이끈 지도 벌써 두 해가 지났다. 그동안 서울시향은 눈부신 성장을 보였지만, 세계적인 악단을 목표로 했던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기대에 못 미친다. 정명훈이나 시향 단원들이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처음부터 목표가 너무 컸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시향 전용 연주회장도 없이 '남의 집 살이'를 하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정명훈과 계약하면서 시향 전용 연주회장을 마련하기로 약속했음을 잊지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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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7일 목요일

2007.11.28. 브람스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 / 독일 레퀴엠 - 정명훈 / 서울시향

2007년 11월 28일(수) 오후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김영미(소프라노), 사무엘 윤(바리톤), 서울시합창단, 서울모테트합창단

Brahms, Variations on a Theme of Joseph Haydn, op. 56a (17')
Brahms, Ein deutsches Requiem (68')



브람스가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한 것은 교향곡 1번을 완성하기 3년 전인 1873년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작곡가 브람스가 완숙기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분수령이라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청년 시절부터 써오던 변주곡 시리즈를 끝맺는 '마지막 습작' 같은 곡이기도 하다.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해석 방향이 갈릴 수 있겠는데, 정명훈은 드물게 '습작'에 적지 않은 무게를 둔 것 같다. 그러한 의도는 첫 번째 변주부터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다. 템포를 ♩= 105 정도로 잡아 관습적인 템포(대략 ♩= 88)에 비해 빨라도 너무 빨랐던 것이다. 이에 따라 두텁고 어두운 화음을 강조하기보다는 비교적 가볍고 생기있는 '젊은 브람스'를 내세워 브람스에 대한 굳은 생각을 깨트리도록 관객을 도발하는 듯했다.

두 번째 변주부터는 점점 낯설지 않은 템포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오히려 점점 느려져서 거대한 리타르단도(점점 느리게) 효과가 나타났다. 마지막 아홉 번째 변주에서는 다시 살짝 아첼레란도(점점 빠르게)를 사용하여 대칭을 이루도록 했는데, 이것은 마지막 변주가 저음 반복(ostinato)을 바탕으로 또 다른 변주곡 형태인 파사칼리아(passacaglia)를 이룬다는 점에서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다만, 이러한 특징이 관객에게 얼마나 잘 전해졌는지는 의문이다.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연주회장 탓에 소리가 뭉개지기 일쑤였는 데다가 변화무쌍한 템포에 단원들이 미처 충분히 자신감을 느끼지 못한 듯 리듬과 다이내믹이 그다지 또렷하지 못한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휴식 시간 없이 이어진 <독일 레퀴엠>. 이 작품은 예배용 음악이 아니다. 원어 제목인 "Ein deutsches Requiem"에서도 드러나듯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를 가사로 했을 뿐 아니라 경외서(The Apocryphia)에 나오는 글귀도 일부 가사로 썼으며, 무엇보다 내용 구성이 미사 전례를 따르지도 않고 예수의 속죄나 심판의 날을 준비하는 종말 신앙을 앞세워 드러내지도 않는다. 또 가사를 성서에서 따왔을 뿐 사실은 특정 종교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부분도 없다. 요컨대 이 작품은 삶과 죽음에 대한 보편적인 고뇌를 담고 있으며,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을 달래는 곡이다. 이날 연주는 대규모 합창단을 앞세워 고통과 환희와 위안을 생생히 그려낸 한 편의 드라마였다. 2악장에서 팀파니가 이끌어내는 땅울림과 저 깊은 곳에서 북받쳐 오르는 합창의 흥분을 지나 6악장의 '죽음(Tod)'과 '지옥(Hölle)' 가사에 맺힌 절규와 사이 사이를 잇는 푸가토가 특히 좋았다. 마지막 7악장을 들으면서는 문득 김종철의 시구(詩句)를 떠올렸다. 느릿한 템포로 이완된 분위기가 '설레이는 神의 겨울, 그 길고 긴 먼 복도를 지내나와' '어머니 나라에 누운 듯' 편안했다.

합창단과 독창진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했으며, 그 가운데 바리톤 사무엘 윤이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바그너 전문 가수답게 풍부한 성량, 깊고 안정된 음색, 나무랄 데 없는 딕션과 독일인보다 더 독일인다운 '그르릉' 소리, 독일어 무성음을 타악기처럼 활용하는 솜씨, 유럽 오페라 극장에서 잔뼈가 굵은 경험에 힘입은 배우 본능, 연주회장을 압도하는 제왕의 카리스마! 무엇보다 그는 관현악을 멋대로 끌고 가는 대신 음악의 흐름에 맞게 어우러질 줄 알았다. 이것은 오페라 아리아 한 가락 멋지게 부르는 데에만 익숙한 한국 가수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값진 능력이다. 이런 가수가 더 많이 나와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한다면 그 얼마나 멋지겠는가! 재작년 성남 아트센터에서 있었던 구노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로 나와 신들린 연기와 노래를 들려준 가수를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가 이날 또 한 번 관객을 사로잡은 그 가수다. 사무엘 윤. 장담하건대 열 몇 해 안에 거물이 될 사람이니 그 이름을 꼭 기억해두기 바란다.

소프라노 김영미는 사무엘 윤에게 가려 빛이 바래버렸지만 사실은 나름대로 꽤 훌륭했다. 5악장 독창부는 고음으로 갈수록 음정과 리듬이 잘 맞지 않으면 듣기 싫은 소리가 되기 쉽지만, 김영미는 위험한 부분을 대부분 잘 처리했다. 사무엘 윤과 마찬가지로 '독창'이 아닌 '협연'을 할 줄 아는 가수였다는 점도 반가웠다. 다만, 초반에 고음에서 음정이 살짝 흔들린 것이나 5옥타브 B♭이 나오는 마디 56에서 잠시 템포를 떨어트린 것 등은 옥에 티였다. 목소리가 소녀처럼 맑고 가녀려서 마치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노래하는 듯했으나 성량이 좀 작은 듯해서 아쉽기도 했다. 말러의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Des Knaben Wunderhorn> 중 "천상의 삶 Das himmlische Leben"(교향곡 4번 4악장이기도 함)에 무척 잘 어울릴 듯싶다.

합창단에게는 솔직히 말해 별로 기대하지 않았으나 웬걸, 생각보다 너무 잘해서 깜짝 놀랐다. 1악장 여린 음부터 감탄을 자아냈는데, 흔히 대규모 합창단이 메조포르테보다 여린 소리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이날 연주에서는 피아노까지는 꽤 안정적이었고 피아니시모도 나쁘지 않게 소화했다. 푸가에서도 성부 균형이 잘 맞았고, 지휘자의 지시에 반응하는 것도 재빨랐다. 물론 흠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 합창단 사정이 어려운 것은 안 봐도 뻔한데 이렇게까지 해내다니 그저 기운을 북돋워주는 말만 해주고 싶다. 그리고 바라건대 합창단도 서울시향처럼 재단의 든든한 지원을 업고 선진화된 시스템으로 관리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상식 하나. 레퀴엠을 연주할 때에는 박수를 치지 않는 게 관례다. 장례식장에서 웃고 떠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독일 레퀴엠>은 정식 미사 레퀴엠도 아닌데다 연주회장에서 연주가 끝났을 때 박수를 치지 않고 멀뚱멀뚱 있는 것도 이상하지만, 적어도 연주가 끝나자마자 요란한 박수가 터져 나오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 이날 정명훈은 마지막 잔향이 완전히 사라지고도 10초 이상 지휘봉을 내리지 않고 침묵을 '연주'했다. 이른바 '안다 박수'가 막판에 분위기를 깨는 일이 잦은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연주자에게도 관객에게도 축복을, Selig s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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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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