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5일 화요일

2007.08.19.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 브람스 교향곡 3번 - 김선욱 / 정명훈 / 서울시향

2007년 8월 19일(일) 오후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김선욱, pf.

Brahms, Piano Concerto No. 1 in d minor, Op. 15
Brahms, Symphony No. 3 in F major, Op. 90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최초 구상이 교향곡이었다고 잘못 알려지곤 하는데, 원래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였다. 다만, 수차례의 전면적 개정 과정에서 교향곡이 될 뻔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 흔적이 작품 곳곳에 나타나 있다. 특히 1악장에 그러한 특징이 뚜렷한데, 일반적인 협주곡과는 달리 독주 악기에 대한 배려가 많이 부족해서 피아노 협연자에게는 연주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테크닉 문제를 떠나 우선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음량에 맞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부 표현은 그다음 일이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강력한 타건으로 협주곡으로는 흔치 않은 대 편성으로 위압하는 서울시향과 팽팽히 맞섰으며, 그러면서도 정교한 테크닉과 섬세한 감성을 놓치지 않아 과연 유명세가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1악장에서 다소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의견도 더러 있었으나, 내 생각에는 이 정도면 이제 약관에 이른 연주자라 믿기 어려울 만큼 훌륭했다. 작품이 워낙 까다로우니만큼 이보다 더 잘한다면 차라리 대가라 불러야 할 것이다.

김선욱의 피아노는 단단했으며 확신에 차 있었다. 때때로 살짝 쇼팽을 연상시키면서도 밝은 톤을 잃지 않는 루바토를 드러내기도 했는데, 그러면서도 나이 어린 연주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의식 과잉으로 유치해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오케스트라와 교묘하게 줄다리기를 해가며 음악에 긴장감을 더해가는 솜씨가 특히 놀라웠는데, 이것은 혼자 연습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역시! 김선욱은 평소에 실내악 연주를 너무 좋아해서 주위에서 말릴 정도란다. 남다른 '앙상블 내공'을 쌓게 해준 것이 다름 아닌 실내악 연주일 테니 말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권장할 일이 아닐까.

서울시향의 연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악장 마디 66부터 비올라를 유난히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의 열악한 음향 환경이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지는 못했다. 마디 190에 아첼레란도를 쓴 것은 차분한 상태에서 재빨리 긴장감을 끌어올리기에는 좋았으나, 그 폭이 너무 커서 약간은 어색한 감이 있었다. (나중에 라디오로 들었던 22일 연주회에서는 아첼레란도의 폭을 약간 좁혀서 딱 적당했다.) 2악장은 4분 음표의 연속에 따르는 두터운 화성이 피아노와 상승작용을 하는 것이 매력적이지만, 서울시향은 투명한 현의 칸타빌레로 두터운 화성을 희석시키며 피아노와 미묘한 음색 대비를 이룬 것이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3악장이 특히 훌륭했으며, 기대했던 푸가토(마디 238) 역시 좋았다. 다만, 약간 더 욕심을 부리자면 악센트를 좀 더 분명하게 살렸으면 싶었다.

교향곡 3번은 '자유롭게 그러나 즐겁게(Frei aber Froh)'라는 모토에서 머리글자를 따온 것으로 알려진 F-A♭-F 모티프로 유명하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사실관계는 학술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일단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전체 악곡의 조성 계획 또한 이 모티프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원 조성은 F 장조이며, 2악장과 3악장은 C 음을 으뜸음으로 하는 장·단조인데 여기서 C 음은 F 음의 딸림음(dominant)에 해당한다. 결국, 전체 악곡은 F-C-F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F-A♭-F라는 F 단조 화음에 생략된 5음인 C가 악곡의 전개에 중요한(dominant)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4악장에는 F-C-F라는 거시적인 구조가 다시 한 번 축약되어 있기도 해서 전체 악곡이 4악장을 향한 강한 추진력을 가진다.

정명훈의 해석은 이러한 목표지향적 구조를 매우 잘 드러내었으며, 그런 의도는 1악장에서부터 드러난다. 우선 템포가 꽤 빨랐고(시작 부분의 템포는 대략 ♩♩ = 85), 그런데도 1악장의 제시부 반복을 생략했다. 교향곡 1악장의 제시부 반복 생략은 19세기 작품을 연주할 때 흔히 있는 일이지만, 브람스 교향곡 3번과 같은 짤막한 곡에는 그런 경우가 흔치 않다.

2악장은 아기자기한 맛을 잘 살렸으며, 3악장은 감정의 낭비를 자제하여 4악장을 향한 방향성을 분명히 밝혔다. 유명한 3악장은 자칫 신파조가 될 위험이 있는데, 이것은 브람스답지 않을 뿐만 아니라 4악장의 무게감을 줄일 위험이 있어 좋지 않다. 서울시향은 첼로의 부점 리듬을 약간 무디게 연주했으며, 바이올린의 부선율을 적당히 살렸고, 목관 등의 투명한 음색을 놓치지 않아 신파조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지나치게 무표정하지는 않도록 중용의 묘를 보여주었다.

4악장의 재현부에 해당하는 마디 172 이후는 전체 조성 구조가 절정에 이르는 곳이라 할 수 있는데, F-C-F로 이어지는 조성 구조에서 F 장조로 마침내 해결되기 직전에 이제껏 쌓인 긴장이 선명한 f 단조에 의해 폭발하기 때문이다. 서울시향의 집중력 또한 이 부분에서 절정을 이루었으며, 객석에 전달된 긴장감은 연주회장의 열악한 음향으로 상당 부분 무뎌지고도 여전히 강력했다.

이날 연주에서는 모든 악기가 훌륭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강력한 집중력을 보여준 현의 역할이 컸다고 판단된다.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의 악장 출신인 스베틀린 루세브(Svetlin Roussev)가 서울시향의 악장을 맡은 것이 효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일까.

4악장이 진정한 F 장조를 회복하는 것은 코다에 이르러서인데, 이미 f 단조 부분에서 모든 긴장을 폭발시켰으므로 일반적인 교향곡과는 달리 조용하게 끝난다. 그런데 곡이 차분히 끝나는 만큼 연주가 완전히 멈춘 뒤의 마지막 몇 초의 여운이 중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열광적인 '브라보'에 익숙한 관객이 그 몇 초를 견디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이날 연주에서는 고작 3-4초 정도의 여운을 바리톤 음성의 '브라보'가 깨트렸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직 지휘자가 팔을 내리기 전이었다. 며칠 뒤에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연주회에서는 아예 연주가 끝나자마자 이른바 '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앙코르로 베르디의 <운명의 힘> 서곡을 연주하기 전에 정명훈이 했던 말이 걸작이었다. "한국에서는 음악이 조용히 끝나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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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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