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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일 일요일

2022 통영국제음악제 막전막후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앤드루 노먼 PCR 검사 결과가 ’미결정’이라서 24시간 이내에 재검사받아야 한답니다.”
“8시에 통영으로 출발하는 차량을 10시 출발 보건소행으로 바꾸고 서울 숙박도 1박 연장합시다.”
“오늘 오후 4시에 하기로 했던 강연은 내일로 연기하겠습니다.”
“관할 보건소에 확인해 보니, 최초 확진 후 45일 이내에 검사를 받은 경우 재검사 필요 없대요!”
“서울 숙박 연장하지 마세요. 바로 통영으로 출발합니다.”
“오늘 4시 강연 예정대로 하겠습니다!”

앤드루 노먼은 올해 통영국제음악제 레지던스 작곡가였지요. 그런데 음악제 개막 직전 입국을 앞두고 미국에서 코로나-19 검사를 했더니 양성 판정이 나왔다고 합니다. 일주일이 지나 증상이 사라진 뒤에도 PCR 검사 결과는 양성으로 나오는 바람에 계속 입국이 지연되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드디어 음성 판정을 받아서 입국했더니, 입국 직후에 다시 검사한 결과가 ’미결정’이었던 것이지요.

이번 통영국제음악제 기간 동안 앤드루 노먼 작품 7곡이 아시아초연 또는 한국초연됐습니다. 앤드루 노먼은 6번째 곡이었던 ‘소용돌이’ 공연에 참석해 연주 직후 무대 인사를 할 수 있었고, 마지막 곡인 ’풀려나다’는 리허설부터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곡 전공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과 작곡 레슨 등 레지던스 작곡가로 뒤늦게나마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입국이 지연되는 동안 일부 작곡 레슨은 진은숙 예술감독님이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올해 통영국제음악제에는 예년보다 별별 일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피아니스트 데죄 란키는 코로나-19 확진자가 한국 내에서 급증하는 상황을 우려해 출연을 취소했고, 소프라노 율리야 레즈네바는 폐막공연에서 데죄 란키 대신 협연을 맡기로 했다가 건강 문제가 생겨서 폐막 공연에 출연할 수 없게 되어 소프라노 박혜상이 ‘대타의 대타’로 출연하게 되었지요. 또 킹스 싱어즈 단원 가운데 1명이 입국 직후 실시한 PCR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아서 공연은 6명 중 5명만으로 하게 되었고 프로그램도 일부 변경됐습니다. 쾰른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해외 입국 단체에 대한 격리 면제가 허용되지 않아서 K’ARTS 신포니에타로 교체되었고, ’해리 파치: 플렉트럼과 타악기 춤’ 공연 또한 코로나-19의 여파로 취소되었습니다.

취소된 공연의 대체 공연으로 소프라노 율리야 레즈네바 리사이틀이 결정되면서 프로그램 확정부터 티켓 오픈까지 여러 사람이 바쁘게 움직였던 일, 그리고 ‘대타의 대타’ 프로그램을 위한 오케스트라 악보를 급히 구하느라 여러 사람이 고생했던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로시니 아리아 악보가 F장조 말고 E장조가 필요하대요!”
“이미 리허설 직전인데… 이렇게 되면 오페라 전곡 악보에서 해당 부분을 일일이 찾아야 하는데요…”

이미 저작권이 만료된 악보를 인터넷으로 구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2시간 30분짜리 오페라 전곡 악보에서 짧은 아리아 하나만 추리는 일이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아는 오페라 지휘자들에게 연락을 시도했다가 의외로 가장 먼저 연락이 닿은 사람은 아마추어 첼로 연주자이자 오페라 애호가였습니다. 오케스트라 총보에서 해당 부분이 몇 페이지에 나오는지를 금방 찾아내더라고요. 그때 제가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바그너 오페라였으면 직접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오케스트라 악보를 악기별로 분리한 이른바 ’파트보’에서 해당 부분을 일일이 추리는 일은 또 다른 일이었지만, 총보를 추리고 나니까 파트보 추리는 일은 제가 직접 할 수 있겠더라고요. 악기별로 하나씩 인쇄해서 연주자들에게 전해준 것은 리허설을 시작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지휘자 마르쿠스 슈텐츠가 그랬다네요. “기적이에요!”

2021년 12월 19일 일요일

작곡가 윤한결의 '그랑히팝'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힙합은 리듬을 위주로 한 언어 음악 예술이며 래퍼라는 연주자/연기자는 복잡한 리듬을 위주로 스토리텔링 및 대개 비판적인 자기주장을 하기도 한다. […]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과거의 오스티나토와 레치타티보와 유사하며, 큰 차이점이라면 문장들과 단어들을 라임 중심으로 빠르게 욱여넣는다는 점이 있다. 또한 정형화되지 않고, 매우 외향적이며 외설적이기까지 한 특징은 힙합을 – 음악적 요소가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 놀랍도록 강렬하며 다양한 음악적인 경험을 하게 해준다.”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윤한결 선생이 ‘그랑히팝’(Grande Hipab)이라는 작품에 관해 이렇게 썼습니다. 현대음악 작곡가가 대중음악 장르인 힙합에 관해 얘기하다니 신기합니다. “힙합 장르의 특징을 패러디와 재해석을 통해 현대적으로 표현”했다는 작품 ’그랑히팝’은 지난 10월 8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요하네스 칼리츠케가 지휘한 TIMF앙상블이 세계초연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현대음악 전문 연주단체인 앙상블 모데른의 단원들이 객원 연주자로 참여했지요.

통영국제음악당에서는 10월 7일과 8일에 걸쳐 신작 다섯 곡이 세계초연되었고, 두 곡이 아시아초연되었습니다. 작곡 부문으로 열린 2021 TIMF아카데미를 위한 작품 공모를 거쳐 위촉작곡가로 선정된 작곡가들의 작품이었고, 그 가운데 첫날 공연을 제가 지난 글에서 소개했었지요. 이틀간 열린 ’TIMF아카데미 콘서트’에서 연주된 여러 작품 가운데 가장 제 마음에 들었던 곡이 바로 ’그랑히팝’이었습니다.

’그랑히팝’은 그러나 힙합 음악의 장르적 느낌이 나는 곡은 아니었습니다. 힙합과 닮은 점을 굳이 찾으려면 찾을 수는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현대음악의 정체성 안에 대중음악적 요소가 숨어 있는 정도였지요. 음악이 “띠용~” 하는 소리로 시작하는 점, 또 어찌 들으면 사람을 놀리는 듯하고 ’톰과 제리’의 한 장면이 떠오를 것 같은 음형이 변형·반복되는 점이 재미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다양한 악기와 연주법을 조합해 만들어 내는 음향적 스펙터클과 통통 튀는 리듬 등이 흥미진진했습니다. 작곡가인 동시에 지휘자이기 때문일까요? 윤한결 선생은 현대음악 맥락에서 ’멋진 소리’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음향적 ’팔레트’를 매우 다채롭게 가진 작곡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날 세계초연된 곡 중 이승환의 ‘<제사> - 고 윤이상 선생의 묘에서’(Rituel… au tombeau d’Isang Yun)는 일단 제목부터 솔깃한 작품이지요. 이승환 선생은 가톨릭교회의 위령 기도가 한국에서 토착화한 연도(煉禱)를 그간 연구해 왔다며 ’제사’라는 작품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즈음, 고 윤이상 선생께서 통영의 바닷가 언덕에 안장되신다는 소식을 접했고, 작품 <제사>가 음악 바깥으로는 떠난 이를 추모하는 성격으로서 선생의 삶을 기리고, 안으로는 우리 상장례음악의 영향과 선생의 작곡기법 등을 응용한 오마주 작품이 될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승환의 ’제사’는 긴 호흡으로 제의적 느낌을 주는 음향적 풍경 사이사이에 드라마틱한 ’장면’이 에피소드처럼 삽입되는 듯한 짜임새였고, 그에 따른 ’드라마투르기’가 꽤 흥미진진했습니다. 마치 고인의 삶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돌아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수빈의 ’옥텟’은 아쉽게도 제가 공연 현장에서 감상하지 못한 작품인데, 그 대신 리허설과 공연 실황 영상을 감상한 소감을 짧게 써보겠습니다.

이 작품은 중세 다성음악에서 정선율(Cantus firmus)을 활용하는 방식을 흉내 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곡에 나온다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귀로 들어서 알아챌 수 없었고, 딱히 이 곡에서 중세음악 느낌이 나지도 않았습니다. 중세 또는 르네상스 시대 작품에 나오는 정선율이 주로 ‘테노르’(tenor) 성부에 숨어 있어서 귀로 듣고 알아채기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일까요.

작곡가는 이 곡이 “만약 현시대에 중세시대 작곡가가 환생한다면 우선 첫 작품은 이렇게 시작하지 않을까 하는 작곡자의 상상에서 시작한 작품”이라 했습니다. 이 작품의 길게 이어지는 음들에서 저는 차라리 한국 전통음악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 곡은 들어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대음악은 어려워요.

2021년 4월 16일 금요일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 인어공주 사건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김시훈=통영국제음악재단

새벽 1시쯤 되었을 때 잠결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긴급 상황이 발생했으니 요즘 하는 말로 ’단톡방’을 확인하라더군요. 전화하신 직장 동료와 저, 그리고 한 외국인 연주자와 그 연주자의 매니저가 있는 대화방이었습니다.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 이륙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코로나-19 검사 결과지를 잃어버려서 출국 수속을 못 하고 있다더군요. 다행히 연주자는 검사 결과의 사본을 받아 무사히 출국할 수 있었지만 출국 게이트가 닫히기 직전이라 마음을 졸여야 했습니다.

그 연주자는 첼리스트 카미유 토마였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파질 사이 첼로 협주곡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를 아시아 초연했고, 피아니스트 박종해 협연으로 리사이틀에도 출연했었지요. 코로나-19로 유럽에 봉쇄령이 떨어졌을 때 집 지붕 위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유튜브 영상으로 화제가 되었던 스타 연주자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통영국제음악제에 출연하게 된 소식이 프랑스의 TV 프로그램에 나왔다고 하네요. 시청자가 5백만 명쯤 된다는 모양입니다.

카미유 토마는 입국 직후 격리 생활부터 시작해 별별 고생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압권은 값비싼 첼로의 통관 서류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던 일입니다. 그 첼로는 최근 일본음악재단에서 후원한 악기였고 일본 세관에서 통관 서류를 발급했는데, 알고 보니 그 서류는 일본과 프랑스 사이를 오가는 것만 허락된 것이었다나 봅니다. 그래서 원칙대로라면 통영에서 일본으로 가서 필요한 서류를 재발급받고, 그 과정에서 일본 입국에 따른 2주 격리를 거쳐야 했습니다. 문제는 통영 공연 직후에 프랑스에서 다른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영국제음악재단과 일본음악재단, 독일에 있는 기획사, 그리고 프랑스에 있는 연주자 가족까지 4개국의 여러 사람이 수많은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상황을 공유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한국에서 출국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가 가장 먼저 해결됐고, 일본 세관을 잘 설득한 끝에 긴급 우편으로 추가 통관 서류를 서울의 호텔에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카미유 토마는 항공 일정을 여러 차례 변경했고, 코로나-19 검사를 며칠 만에 두 차례 받아야 했습니다. 코로나-19 검사 결과는 출국 기준 72시간 이내에 발급된 것이어야 하거든요.

이번 통영국제음악제 때에도 많은 일이 있었고, 무엇보다 요즘 같은 시절에 이런 행사를 안전하게 운영하기 위해 큰 노력과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미 언론에 보도되었으니 이 글에서는 그 와중에 웃겼던 에피소드를 두 개만 더 소개할까 합니다.

카미유 토마는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지정된 격리장소로 이동하는 일부터 시작해 택시를 몇 차례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택시를 예약하신 분이 카미유 토마(Camille Thomas) 이름이 익숙지 않아서 ‘카유미 토마’로 여러 차례 헷갈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택시 회사에서 ’카유미’ 씨가 일본 사람인 줄 알고 이렇게 자랑하더라네요. “우리 기사님 중에 일본어 잘하시는 분 있어요!”

개막공연 때 있었던 일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크리스티안 바스케스가 지휘하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 위해 분장실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통영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닮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요. 드레스 자락이 그물처럼 되어 있어서 마치 인어의 비늘이 푸른 파도와 더불어 반짝이는 듯했는데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그물’에 하이힐 뒷굽이 끼어서 제대로 걷지를 못하더라고요!

다행히 김봄소리는 무대에 입장할 때 발을 앞으로 차듯이 걷는 법을 익혀서 멀쩡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무대 뒤에서는 달랐습니다. 분장실 입구에서 처음 몇 걸음을 걷는 동안에 마치 시트콤처럼 웃기고 당황스러운 상황이 벌어졌지요. 근처에 있던 여성 동료 한 분이 재빨리 달려가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렸습니다. 그 와중에 드레스 자락이 위로 올라간 모습이 마치 인어 꼬리가 파닥이는 듯했습니다.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게 아니었던지, 드레스 자락을 움켜잡으신 분이 아주 찰진 농담을 시전했습니다.

“이대로 인어공주처럼 걸으세요!”

2019년 4월 26일 금요일

기돈 크레머의 잃어버린 시간을 위한 전주곡

미에치스와프 바인베르크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훌륭한 동료이자 벗이었으며,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바인베르크가 첼로 곡으로 썼던 24개의 전주곡을 바이올린곡으로 편곡하는 일을 해오면서, 나는 이 전주곡들에 사진을 결합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2017년 6월, 나는 리투아니아의 탁월한 사진가 안타나스 수트쿠스의 작품에 마음을 빼앗겼다. 우리는 빌뉴스에서 만났고, 기쁘게도 쓰는 말이 같았다. 우리는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바인베르크와 수트쿠스라는 두 인물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둘을 엮을 때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위대한 예술작품은 물론 시간을 초월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인베르크의 음악(여기서는 첼로를 위한 24개의 전주곡)과 수트쿠스의 강력한 이미지들은 같은 시기, 즉 1960년대에 창작되었다.

두 예술가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지만, 이 프로젝트는 두 가지 예술이 한 가지 인생 경험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들의 소리와 영상은 소비에트 연방 시대를 살았던 모두에게 어떤 '유토피아' 관념이 있던 세계를 반영한다.

나는 미에치스와프 바인베르크 음악을 나이 들어서야 알게 되어 곧바로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의 전주곡들은 정서적 감동이 있는 '소리 그림'처럼 느껴지고, 안타나스 수트쿠스의 표현력 넘치는 사진들은 이 프로젝트에 독특한 역동성을 불러온다.

이것은 다층적 이야기의 영역이다. 나의 바이올린 소리를 더한 의도는 시청자들이 '잃어버린 세계'에 진입하게끔 하고, 그래서 살아있는 인류의 관점을 늘리는 것이다.

기돈 크레머 글 · 김원철 옮김.

원문 출처:
https://www.bozar.be/en/magazine/135364-preludes-to-a-lost-time

2019년 4월 16일 화요일

2019 통영국제음악제 막전막후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바그너 날씨네!"(It's Wagner weather!)

플로리안 리임 통영국제음악재단 대표님 말씀입니다. 통영국제음악제 폐막공연이 열리기 한 시간쯤 전부터 천둥 번개가 쳤지요. 콘서트 형식으로 연주된 바그너 오페라 '발퀴레' 1막에 걸맞은 날씨였고, 꽤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가 무시무시했습니다. 2019 통영국제음악제 주제였던 '운명'과 어울리기도 했지요. 공연을 끝내고 돌아가시는 테너 김석철 선생은 안개 자욱한 통영의 해돋이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바그너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분위기 통영 아침이네요. 어제는 완벽한 발퀴레 날씨였는데 ㅎㅎ"

언제나 그렇듯이, 올해 통영국제음악제도 많은 사연을 남기고 끝났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일은 '로스 로메로스' 기타 콰르텟 가운데 셀린 로메로가 갑자기 쓰러졌던 일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르디티 콰르텟의 리허설을 챙기느라 현장의 급박함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스마트폰 메시지로 전해지는 내용이 심상치 않더군요. 플로리안 리임 대표님이 관객들에게 알린 것처럼, 환자는 병원에서 뇌졸중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병명에 비하면 실제 증상은 그나마 가벼운 편이었던 모양이라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환자는 장시간 비행이 가능할 만큼 치료를 잘 받고 공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로스 로메로스' 공연에서는 결국 셀린 로메로가 빠진 채 3명만 출연하게 되었지요. 가장 유명한 기타리스트 페페 로메로가 전설적인 명인의 솜씨를 똑똑히 보여준 공연이었습니다.

제가 담당한 공연 중에서는 '바흐와 룸바'와 관련해 황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베이시스트 에딕손 루이스가 공연 마지막 곡이었던 'J.S.를 위한 룸바흐'의 음원을 전해 주며 악보에 없는 휘파람이 있으니 타악기 연주자가 듣고 '연주'할 수 있게 해달라더군요.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베이시스트 에딕손 루이스에게 받아서 타악기 연주자 채형봉 선생에게 전달한 악보는 5악장까지였는데, 음원은 6악장까지 있었습니다. 공연 이틀 전이었지요. 부랴부랴 6악장 악보를 받아서 전달했더니, 6악장에 악기 표기가 명확하지 않은 곳이 있다더군요. 저도 악보를 확인해 봤더니, 6악장 제목이 '콩가'인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콩가는 그냥 악장 제목이고 실제로 콩가라는 악기가 나오는 건 아니에요."
"다른 악기가 또 새로 나오지 않는 게 맞나요?"
"음… 아마도?"
"작곡가한테 확인해 주세요. 통영은 서울이 아니에요. 갑자기 없는 악기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요."

다행히 추가 악기가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휘파람은 작곡을 전공한 분께 부탁해서 악보로 옮겼는데, 그에 앞서 음원의 몇 분 몇 초쯤에 휘파람이 나오는지 정확히 확인하려고 악보를 보면서 음악을 들어 봤더니, 귀로 듣기로는 마냥 신나는 악곡의 리듬이 실제로는 얼마나 기상천외하게 꼬여 있는지 머리가 어질어질하더군요.

타악기 연주자 채형봉 선생도 어렵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고, 막판에 6악장을 새로 익히기도 벅차서 휘파람까지는 안 되겠다고 하시더군요. 결국 휘파람은 에딕손 루이스가 불었습니다. 사실은 작곡가가 에딕손 루이스한테 휘파람을 불게 했었다가 베이스 연주와 동시에 전혀 다른 리듬으로 휘파람을 불기가 어려워서, 세계초연 때에는 작곡가이자 타악기 연주자인 곤살로 그라우가 직접 휘파람을 불었었다고 하더군요.

이날 에딕손 루이스가 세계초연한 호소카와 도시오 신작 '작은 에세이'도 기억에 남습니다. 작곡가와 연주자가 같은 공간에 있다 보니 작곡가가 영감을 받아서 곡을 써주기로 한 모양인데, 처음에는 호소카와 선생이 예술감독으로 있는 다케후 국제음악제에서 초연하기로 했다가 통영 공연 직전에 곡이 완성되어서 그냥 통영에서 세계초연하기로 했다네요. 곡을 들어 보니 윤이상 선생을 오마주한 의도가 뚜렷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통영이라는 공간이 작품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겠지요!

바쁘게 일하는 중에 강원도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하마터면 큰 재난이 될 뻔했던 모양이더군요. 빠른 진압에 성공했다니 천만다행입니다.

2019년 3월 21일 목요일

바그너 오페라 '발퀴레'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오페라 '발퀴레'는 '니벨룽의 반지' 4부작 가운데 2번째 작품입니다. '발퀴레' 하나만으로도 4시간 또는 때로 5시간 이상 걸리기도 하는 대작이고, 4부작을 모두 공연하려면 중간에 쉬어 가는 날까지 반드시 포함해 일주일 정도가 필요합니다. 통영에서 이걸 다 공연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쉽지 않네요.

그래도 2019 통영국제음악제 폐막공연으로 '발퀴레' 1막을 하게 됐습니다. 통영국제음악제를 아껴주시는 여러분께 익숙하실 지휘자 알렉산더 리브라이히가 5년 만에 통영에 돌아와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예정이지요. 그리고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등 국제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한국인 가수들이 출연합니다.

'지크문트' 역을 맡은 테너 김석철은 한국인으로는 보기 드문 강력한 목소리를 가진 테너입니다. 제가 이분을 처음 봤을 때부터 바그너를 해야 할 목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지난 2016년에 바그너 가수들에게 꿈의 무대라 할 수 있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출연하는 등 바그너 가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강병운, 연광철, 사무엘 윤, 전승현 등 음역이 낮은 분들이 그동안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여러 차례 출연했지만, 테너로는 국내 최초예요.

'지클린데' 역을 맡은 소프라노 서선영 또한 한국인답지 않게 묵직한 고음을 낼 수 있는 가수라서 역시 바그너를 해야 할 목소리라고 생각해 왔던 분입니다. 지난 2016년 국립오페라단이 '로엔그린'을 공연했을 때 로엔그린 역 김석철의 상대역인 '엘자'로 출연하는 등 바그너 오페라에 도전하고 있지요. 제 생각에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이졸데에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발퀴레 중 지클린데 역에도 잘 어울릴 것으로 기대됩니다.

'훈딩' 역을 맡은 베이스 전승현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등에서 바그너 오페라를 여러 차례 하셨던 분입니다. 특히 '신들의 황혼'의 빌런(악당)인 '하겐' 역으로 유명하신 분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독일-오스트리아 가수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영예인 '캄머젱어'(Kammersänger) 칭호를 지난 2011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받았던 분이기도 합니다. 이 칭호는 노래 실력뿐 아니라 독일 시(詩)를 올바로 이해하고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아야 받을 수 있다고 하지요. 말하자면 독일인이 판소리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격입니다.

바그너 오페라에서는 가수들의 노래가 아닌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이끌어가곤 합니다. 노래 가사가 사건의 외면을 알려주는 동안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진실을 관현악이 알려주는 식이고, 그런 점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합창이 하는 역할을 바그너 오페라에서는 오케스트라가 하는 셈입니다. 이 말을 달리하면 노래 선율만 따라가서는 바그너 음악의 진수를 맛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발퀴레'의 깊은 내용을 이해하려면 가사와 음악의 상호작용을 실시간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독일어 가사를 따라가면서, 필요하다면 독한대역을 보면서 가사의 의미를 이해하고, 귀로는 관현악에 집중하는 식으로 주의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해야 하지요. 가사에 숨겨진 진실을 오케스트라가 알려주는 순간 전율을 느끼고 나면, 그 뒤로는 자연스럽게 바그너 음악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높은 진입장벽이 국내에 바그너 애호가가 많지 않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실 '발퀴레'는 바그너 작품치고는 '노래'의 비중이 높은 편입니다. 그래서 그냥 가사만 따라가더라도 제법 재미있을 거예요. 다만, '훈딩'이 말할 때마다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오케스트라, '지클린데'와 '지크문트' 사이에 말로는 전하지 못할 눈빛이 오갈 때마다 애절한 마음을 전하는 오케스트라, 두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났을 때 마치 빛이 무대를 압도하는 듯 눈부시게 빛나는 오케스트라 등을 놓치지 않는다면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발퀴레 1막 전주곡에서, 이를테면 선동적인 리듬을 타고 흐르는 저음 현의 '다크 포스'에 집중해 보세요. 그 위에서 폭풍처럼 몰아치는 현의 움직임, 포르테(세게)와 피아노(여리게)를 순식간에 오가는 급박한 셈여림 변화, 무시무시하게 암울한 음색, 악마적인 화음 등에도 주의를 기울이면 좋습니다.

2018년 8월 29일 수요일

피아니스트 김선욱 인터뷰

통영국제음악재단에서 발간하는 『Grand Wing』에 실린 글입니다.


Q. 통영에서 베토벤 협주곡 5번을 협연할 예정이다. 2013년에 서울시향과 협연한 녹음이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나왔었는데, 당시 곡 해석의 틀이 지금까지도 유효한가? 바뀌었다면 어떤 부분이 바뀌었는가?

A. 곡에 대한 해석은 항상 유기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특히나 마지막으로 연주한 지 4-5년이 흘렀을 때 바라보는 곡에 대한 색다른 매력에 큰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템포 변화와 뉘앙스 차이는 다를 수 있어도 큰 골격과 골조는 비슷한 편이다. 결국 스스로의 음악적 취향과 스타일이 구축되었다는 것인데, 그때부터는 세밀한 표현을 섬세하게 가꾸는 것이 스스로 진화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여태껏 찾지 못한 순간들을 발견하려 노력하고 있다.

Q. 이를테면 2악장에서 왼손 음형을 음반에서보다 좀 더 볼륨 있게 쳐주는 편이 더 베토벤답게 들리지 않을까?

A. ‘베토벤답다’라는 정의는 참 위험한 말이다. 베토벤다운 것은 없다. 베토벤의 악보 기호와 주문을 얼마나 자신의 것으로 완성시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Q. 최수열 지휘자와 전에 협연해 본 일이 있나? 최수열은 어떤 지휘자라고 생각하나?

A. 한국예술종합학교 선배님이다. 같이 연습해 본 적은 있으나 공식적인 무대에 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휘 실력, 즉 테크닉이야 이루 말할 것 없이 훌륭하고 고전, 낭만 음악뿐만 아니라 현대음악에 대한 관심과 애정, 다양한 포맷의 시도 등 앞으로 우리나라 음악계를 잘 견인하실 것이라 믿고 있다.

Q. 2014년에는 정명훈-서울시향과 함께 진은숙 협주곡을 녹음했었다. 이 곡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작곡가로부터 어떤 조언을 받았으며, 자신만의 의견은 무엇인가?

A. 진은숙 작곡가는 이 곡을 통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모두 최대한 비르투오식하게 연주하길 바랐다. 곡이 어렵다고 대충 훑는 것이 아니라 최대치의 노력을 다해 연주되길 바랐고 그 열정과 긴장감으로 곡에 숨을 불어넣길 원했다. 결과적으로 처음 연주할 때 굉장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만 그만큼 연습량을 늘리며 이 곡이 내 것이 되도록 노력했다. 진은숙이라는 작곡가의 시그니처, 즉 찬란한 색채의 화음과 치밀하게 짜여진 구성과 디테일은 왜 진은숙이 세계 최정상의 작곡가인지 증명한다. 단언컨대, 이 협주곡은 2100년에도 꾸준히 연주될 것이다.

Q. 같은 해 같은 곡으로 함부르크에서 NDR 심포니 오케스트라, 2015년 파리에서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했었다. 그때 얘기가 궁금하다.

A. 이 곡으로 여러 지휘자와 협연했다. 정명훈, 일란 볼코프, 크와메 라이언, 티토 체체리니, 안토니 헤르무스랑 같이 연주했고 이 다양한 지휘자들이 생각하는 이 곡에 대한 아이디어를 습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협주곡에 대한 경험이 많이 쌓였다. 같이 연주했던 오케스트라들은 모두 다 훌륭했고 열심히 연주했기에 매 순간 기억에 많이 남는다.

Q.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지휘를 전공했고 본머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로 '데뷔'를 앞두고 있기도 하다. 영국 왕립음악원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A. 내가 배운 콜린 메터스선생님은 영국 왕립음악원에 30여 년 전 처음으로 지휘과가 신설되었을 때부터 지휘과 교수님이었다. 매일 학교에서 지휘과 학생들과 시간을 보냈고 오케스트라 파트를 피아노로 많이 치면서 다른 친구들의 지휘를 도와주기도 했다.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배울 수 있었고 피아노와 병행하느라 힘들었지만 좋은 추억이었던 것 같다. 거의 매일 5시에 수업이 끝나면 오후 6시부터 9시까지는 피아노를 연습했다. 2020년에 영국 본머스에서 열리는 연주회는 지휘 ‘데뷔’라고 하면 너무 쑥스럽고 그냥 하나의 이벤트로 생각하고 있다.

Q. 음악인으로서 느끼는 런던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A. 일단 내가 현악인이고 오케스트라에서 일하고 있다면 런던에서는 엄청난 레퍼토리를 빠른 시간 안에 습득할 수 있다. 2-3년이면 모든 시대의 곡을 다 연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짧은 리허설 시간 안에서 완성도를 높여야 하기 때문에 기민함이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급여는 다른 나라에 비해 형편없기 때문에 비싼 물가의 런던에서 여유 있는 생활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오페라, 클래식 연주회,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장르를 트렌디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이 런던의 문화적으로 가장 큰 장점인 것 같다. 지금은 베를린으로 이사해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고 있다.

Q. 윤이상 작품을 연주해본 일이 있는가?

A.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1958)’을 2012년 통영국제음악제에 상주음악가로 있었을 때 연주했었다. 가치 있었던 순간이었다.

Q. 어느 분야이든 존경하거나 흥미를 느끼는 예술가가 있다면?

A. 작품에 시간과 정성을 들이고, 디테일에 집착하며,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 예술가들은 모두 다 존경한다. 훌륭한 예술가는 개개인의 독특한 자아가 존재하는데 극한으로 자신을 밀어붙일수록 그 예술가만이 고유한 특징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다. 미술가로는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클림트, 안젤름 키퍼, 라킵 쇼를 좋아하고 노먼 포스터, 프랭크 게리의 건축물도 좋아한다.

Q. 국내 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계획이 있나?

A. 18-19 시즌에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총 5번을 공연한다. 독주회, 듀오 연주 두 번, 그리고 브람스의 실내악 프로젝트 두 번 – 그리고 위그모어에서 내년 1월 독주회를 여는데 한국 작곡가인 신동훈 씨의 신작을 초연할 계획이다.

Q. 마지막으로 통영 관객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A. 오랜만에 통영을 찾아 관객 여러분께 연주를 들려드릴 수 있어 영광으로 생각한다. 6년 만의 방문이고, 또 새로운 홀에서 처음으로 연주한다. 음향, 피아노 등 최상의 조건이라고 많은 동료들이 얘기해주었기 때문에 기대가 무척 크다. 좋은 연주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2018년 5월 17일 목요일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 인터뷰

통영국제음악재단에서 발간하는 매거진 『Grand Wing』에 실린 글입니다.


Q.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으로 얻은 특전이나 달라진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마음에 드나요?

연주 기회를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소중했습니다. 콩쿠르를 하고 나서 계속해서 다른 곳을 다니며 저를 알릴 기회를 갖게 되고 또 그곳에서 만난 많은 분과의 인연도 값진 자산이 되었습니다. 또 항상 어느 곳에서 연주하든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준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쓰게 된 것도 절대 빼놓을 수 없죠.

Q.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으로 '1708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허긴스' 바이올린을 쓸 수 있게 되었고,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에서는 1774년산 과다니니 바이올린을 후원했습니다. 지금 두 가지 바이올린을 다 쓰시는 건가요, 아니면 둘 중 하나만 사용하고 있나요? 연주자로서 느끼기에 두 가지 바이올린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에서 빌려주셨던 과다니니는 2014년에 오디션을 통해 쓰게 된 악기였습니다. 과다니니를 쓰면서 여러 좋은 일들을 함께했고 특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때에도 이 악기로 연주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5년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부상으로 지금 쓰고 있는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쓸 수 있게 되며 과다니니는 바로 반납을 하고 현재 스트라디바리우스로만 연주하고 있습니다.

과다니니는 모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소리가 나는 반면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볼륨의 레인지가 크고 깊고 화려한 소리가 납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악기를 써도 연주자 본연의 소리가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과다니니나 스트라디바리우스 어느 것을 써도 제소리가 나기에 둘 중 무엇이 더 어울린다고 정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Q.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때 겪어본 지휘자 마린 알솝이 궁금합니다. 어떤 장단점이 있는 지휘자인가요?

여러 지휘자분과 연주하면서 여러 가지 성향의 분들을 만나 뵈면서 크게 두 가지로 분리할 수 있었는데, 솔리스트가 프레이즈 처리 등 상상할 수도 없는 곳에서 루바토를 하건 어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일일이 맞춰주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오케스트레이션의 범위 내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으시는 분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장단점이 있지만 마린 알솝 같은 경우에는 그 전에는 쉽게 접해볼 수 없었던 에너지를 지니신 분이었습니다. 솔리스트의 음악에 끌려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본인의 음악만 고집하지도 않으셔서 적당히 연주자와 지휘자 오케스트라 사이에서 긴장감이 감돌면서 집중력 있는 음악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Q. 콩쿠르 우승 직후 중앙일보 김호정 기자는 근성, 성실함, 무게감, 안정감, 집중력 등의 단어로 임지영 씨를 표현했습니다. 김남윤 선생님도 임지영 씨를 노력파로 설명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다른 장점이 또 있을까요?

글쎄요… 특별히 장점인지 모르겠지만 크게 생각한다는 것? 가끔 현실이 촉박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음악은 정말 끝이 없고 예민하고 무한한 작업이기는 하지만 세상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있고 긴 일생을 살아가야 하는데 너무 순간에 집착하다 보면 자기 자신을 가두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럴 때 크게 생각하려고 하는데 그게 저 자신한테도 많은 것을 받아들일 여지를 갖게 되고 좋더라고요. 특히나 앞으로 길고 행복하게 음악 하려고 하면요.

Q. 소위 '김남윤 사단' 또는 '김남윤 악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한국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요?

김남윤 선생님께서는 수많은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를 배출하셨고 항상 선생님의 그런 모습에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어릴 때 자주 선생님 제자들과 마스터클래스나 캠프를 가면 선생님 제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온 학생들도 있는데 그곳에서 다 같이 연주 같은 것을 하면 눈감고도 누가 김남윤 선생님 제자인지 구분할 수 있어요. 그 정도로 선생님 음악은 누가 해도 납득이 가는 음악입니다. 많은 분이 국제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이유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Q. 독일 크론베르크 아카데미에서 무엇을 배웠나요?

훌륭한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과 함께 다이얼로그 세션을 하거나 많은 실내악 등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주로 레슨을 받는 형식이었다면 이곳에서는 얘기하고 서로의 연주를 듣고 의견을 나누는 형식이라서 ‘나’ 스스로 하는 음악보다는 같이 생각하고 토론할 수 있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Q. 한 곡을 연주하기 전에 어떻게 준비하시나요?

특별한 루틴이 있지는 않습니다. 전에 연주한 경험이 없는 곡이라면 악보를 공부하고 핑거링이나 보잉 여러 가지를 시도한 후에 제 것으로 소화하려고 합니다. 연주를 자주 했던 곡들은 더 다지는 연습을 하는데 저는 오히려 이 작업이 더 신경을 많이 쓰는데 조금이라도 타성에 젖은 연주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Q.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생각하는 비발디 ‹사계›는 어떤 곡인가요?

바이올리니스트 이전에 특히 한국 사람이라면 거의 가장 쉽게 접하는 음악 중 하나라고 꼽을 정도로 친숙한 음악이죠. 그 정도로 많은 분이 사랑하는 레퍼토리이기 때문에 연주하는 입장에서는 반갑기도 하면서 더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네요. 개인적으로 비발디의 ‹사계› 는 지극히 인간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봄이 와서 새가 노래하고 여름에 폭풍우가 오고 가을에는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겨울바람 이런 요소들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토픽이기 때문에 하나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Q. 이른바 '역사주의 연주'(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가 내놓은 성과 가운데 받아들일 만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10명이 연주한다고 가정했을 때 모두 각기 다른 주법으로 연주를 하는데 그 중 비브라토와 활의 쓰임이 가장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어떤 연주자는 거의 비브라토를 사용하지 않고 바로크 활로 연주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어떤 연주자는 프레이즈 연결을 비브라토와 활을 더 레가토로 써서 연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 또한 바흐나 비발디 같은 바로크 음악에서는 더욱 어떠한 스타일로 연주할 것인가에 관해서 고민을 했었는데 ‘어떠한 것을 더 받아들이느냐’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더 모든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연주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바이올린 협주곡 가운데 어떤 곡을 가장 좋아하나요? 독주곡 중에서는요?

저는 매번 달라지는 스타일입니다. 보통은 제가 연주하고 있는 곡을 가장 좋아하는데 저는 제가 그 곡에 빠져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Q. 윤이상 곡을 전에 연주해 본 일이 있나요?

아직 경험은 없지만 기회가 있다면 앞으로 연주해보고 싶은 목표는 있습니다. 특히 얼마 전 윤이상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새로 발견하게 돼서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Q. 한가한 때에는 뭘 하시나요?

집에서 일상적인 것들을 하거나 언어를 배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독일로 이사한 지 1년이 지났는데 1년 동안 너무 바빠서 독어를 배울 시간이 없었거든요. 올해는 시간이 나면 독어를 배우는 것이 목표입니다.

Q. 현재 단기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요?

새로운 레퍼토리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실내악곡 또한 연주할 기회가 있다면 가능한 참여해서 공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통영 관객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일단 처음으로 통영에서 연주하게 되어 매우 설레고 저의 멘토이신 김남윤 선생님 그리고 많은 훌륭한 음악가분들과 함께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특히나 많은 분이 사랑하는 ‹사계›로 처음 통영 관객분들께 선보이게 되어서 더욱 기대가 됩니다.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연주 들려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2018년 4월 20일 금요일

2018 통영국제음악제 막전막후

해마다 통영국제음악제 기간이면 무대 뒤에서 많은 사연이 생겨나지요. 올해 겪은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개막공연에 출연해야 할 보훔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 두 명이 공연 당일 아파서 제가 병원에 데려갔던 일입니다. 한 명은 밤늦게 김밥을 먹고 배탈이 난 첼리스트였는데, 다른 한 명이 문제였습니다. 허리가 아파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상태였거든요. 현악기 연주자였더라면 그 한 사람쯤 빠져도 공연에 큰 지장이 없었겠지만, 하필 그 사람은 타악기 연주자였습니다.

요통 환자가 들것에 실려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되는 동안, 저는 복통 환자와 오케스트라 매니저를 제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따라갔습니다. 요통 환자는 응급실에서 증상을 확인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스테로이드와 진통제 등을 처방받았습니다. 환자는 만성 요통으로 독일에서 치료를 받아온 이력이 있었고, 그날 하필 침대에서 굴러떨어져서 증세가 악화한 상태였습니다. 엑스레이 영상을 판독한 의사는 디스크 탈장을 의심하면서도 엑스레이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으니 독일에서 엠알아이(MRI) 검사를 해보라고 권유하더군요.

요통 환자가 치료를 받는 동안 저와 오케스트라 매니저, 그리고 사무실에 있는 동료들은 두 가지를 걱정했습니다. 환자가 이 상태로 오늘 밤 공연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공연이 끝난 뒤에 독일까지 장시간 비행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대타 연주자는 무엇보다 윤이상 ‹광주여 영원히›를 당장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마침 지난해 광주시립교향악단이 이 작품을 연주한 일이 있어서, 사무실에서는 그곳 타악기 연주자에게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병원에서는 치료가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전 내내 누워 있던 환자가 힘겹게 일어나 물리치료를 받았고, 그 뒤에 밥을 먹더니, 퇴원해서 그날 저녁에 무대에 올랐습니다! 다음 날 공연 때에는 상태가 훨씬 좋아 보였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에는 독일까지 무사히 돌아갔고요. 현대 의료기술이 참 대단하지요! 병원 의료진들이 모두 친절하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으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환자가 치료를 받을 때 제가 통역을 했고, 의학 용어가 라틴어 또는 영어로 되어 있는 만큼 때로는 의료진이 직접 환자와 소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몰랐던 의학용어를 익히기도 했는데요, 급성(acute), 만성(cronic), 설사(diarrhea) 등이었지요. 디스크 탈장(Slipped Disc)은 영국의 유명 음악평론가가 말장난처럼 쓰고 있는 웹사이트 이름 때문에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만약을 대비해 주요 병명을 익혀두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위염(gastritis), 장염(enteritis), 편도선염(tonsillitis), 맹장염(appendicitis), 골절(fracture). 또 뭐가 있을까요? 아, 공연장에서 지휘자에게 심근경색(heart attack)이 일어나 심폐소생술(CPR)을 했다는 얘기가 화제가 된 일이 있지요!

그밖에 음악극 ‹귀향›에 소품으로 사용할 활을 구하느라 동료가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일, 그 와중에 알게 된 활 판매 업체 '활○당' 이름 때문에 다 같이 웃었던 일, 구하기 힘든 악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골머리를 앓았던 일, 독일인 지휘자에게 굿거리장단을 설명하면서 '태평가'를 불러줬던 일, 올해도 어김없이 새벽에 공항으로 출발하는 연주자를 배웅했던 일, 피곤한 몸으로 연주회장 구석 자리에 앉아 음악을 들으려 노력하며 정신없이 졸았던 일 등이 생각납니다. 지면이 짧으니 더 자세한 사연은 생략할게요.

마지막으로 이번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세계초연된 음악극 ‹귀향›으로 화제가 되었던, 여창가곡 우조 이수대엽 '동짓달'의 절절한 노랫말과 그것을 기막히게 노래한 박민희 선생이 특별히 기억에 남습니다. ‹귀향›의 진정한 주인공은 율리시스도 페넬로페도 아닌 박민희 선생이 아니었나 싶어요!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둘에(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시를 쓴 사람이 황진이라네요.

2018년 3월 15일 목요일

Isang Yun: Poems of the Nakdong River

Isang Yun wrote a song ‹Nakdong River› while in Korea, and it is quite well-known through Isang Yun Children’s Song Festival. However, there is another ‹Nakdong River› by Yun himself that elderly persons in Gyeongnam Province still remember. Euy-Jang Jin, the former mayor of Tongyeong City, mentioned that the latter was also called “The song of Gyeognam citizens.” Seung-gi Lee, a film expert who served as the head of the Masan Culture Bureau, remarked that it was sung at every morning gathering in Gyeongnam area schools. He also added that it was inserted into the movie ‹Nakdong River›, released in 1952 but lost, probably during the Korean War.

There seems to be an indirect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songs of ‹Nakdong River› along with the movie of the same title, and Yun’s symphonic poem titled ‹Poems of the Nakdong River›. In a letter dated November 30, 1956, to his wife Sooja Lee, Yun stated that he had begun composing that symphonic poem in Korea, then concluded the first two movements in Paris, where he also completed the final third movement in the evening of November 29. In April that same year, Yun received the Seoul City Culture Award with his first string quartet. In June, he left Korea to study abroad, and learned composition at the Paris Conservatory, where he also encountered European modern music.

In other letters to his wife during his days in Paris, Yun occasionally reveals anxiety over the progress of his learning. In regards to ‹Poems of the Nakdong River›, he did not seem to feel confident, saying “I cannot expect much because I have put in too many conventional elements.” In this regard (and in some other as well), and in view of the fact that the work was based on traditional functional harmonies, we can guess why ‹Poems of the Nakdong River› has not come into light until now. However, when we treat this piece from the perspective of modern Korean people, we can understand that Yun had already been shining as a composer since the time it was written.

Yun originally appears to have designed it as a six-movement scheme before modifying it to three movements in the process. In the manuscript, the first movement was to be a prologue, followed by five movements, respectively titled Twilight, Hangawi (Korean Thanksgiving), Field of Reeds, Song of Bumper Years, and Epilogue. However, the completed composition consists of three movements: Prologue, An Evening of the Nakdong River, and Dances.

In the early 1950s, the Korean Peninsula was swallowed up in a civil war, which, at least partially, was a proxy war in behalf of the United States, China, and Russia. The Nakdong River was the battlefield where South Korea turned the tide and defeated North Korea. During this period, Yun was a music teacher in Busan, one of the major cities in the Nakdong River Basin. After the war, he went to Seoul with his family, where he spent about three years as a composer and a part-time lecturer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and Duksung Women's University. As can be seen from the historical background, and unlike what the initial conception based on 6 movements might suggest, the first two movements of this work are full of dark sentiment.

It is the “dramaturgy” that leads this piece; the second movement is in an arch form, but the outer movements do not follow the traditional formal structure. The first movement commences with a grand fanfare, and the ascending figure in the interval of fourths becomes the seed of the entire movement. That sustains the formal coherence and consistency of the entire composition. The sudden texture contrast between this fanfare and the subsequent melody reminds us of a movie scene transition from the signal (that indicates an opening of a movie) to the actual movie. That's why we need to reconsider its relation to the film ‹Nakdong River›.

In the first movement, sorrow flows like a river, and sobs turn into wailing. When that wailing has trailed away, an anxious beat appears, which sounds like the last beating of the heart. The movement ends with two sharp squeaks. The second movement is mainly led by the oboe melody, which sounds like a melancholic barcarolle, or in some sense, Korean pallbearers' dirge. In the third movement, an exciting rhythm appears like a manifesto, driving out the tragedy.

In the middle of the third movement, a melody, distinctly in the Korean folk song style, makes appearance. Its interval structure is identical to that of a melodic fragment in the Korean folk song ‹Miryang Arirang›. In contrast to ‹Miryang Arirang›, which consists of Semachi Rhythms, or Semachi Jangdan in Korean traditional terminology, the melody here resembles the Gutgeori Jandan of ‹Taepyunga›. As a result of combining ‹Miryang Arirang› and Gutgeori Jangdan, the melody sounds similar to the ‹Korean Barcarolle›.

WonCheol Kim
translated by Moohyun Cho

World Premiere:

Scheduled on April 5, 2018
Tongyeong Concert Hall
Kammerorchester Hannover
Hans-Christian Euler, conductor

2018년 2월 28일 수요일

윤이상: 낙동강의 시(詩)

2022년 10월 8일 붙임:
이 글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한 글 참고:

☞ 「영화 <낙동강>과 윤이상의 영화음악」


윤이상이 한국에서 쓴 ‹낙동강›이라는 노래는 윤이상동요제 등으로 비교적 잘 알려졌다. 그런데 경남 지역 장년층이 기억하는 윤이상의 또 다른 ‹낙동강›도 있다. 진의장 전 통영시장은 이 노래가 '경남도민의 노래'처럼 불렸다고 증언하며, 마산문화원장을 역임한 영화전문가 이승기 선생은 경남 지역 학교에서 조례 때마다 이 노래를 불렀고 또한 1952년에 개봉한 영화 ‹낙동강›에 삽입됐다고 증언한다.

두 곡의 ‹낙동강› 및 영화 ‹낙동강›과 교향시 ‹낙동강의 시(詩)› 사이에는 간접적인 관련성 정도가 의심된다. 윤이상이 1956년 11월 30일 아내 이수자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윤이상은 한국에서 ‹낙동강의 시›를 작곡하다가 1악장과 2악장을 파리에서 완성했고 그곳에서 3악장을 써서 11월 29일 저녁에 전곡을 완성했다. 윤이상은 같은 해 4월 현악사중주 1번으로 서울시문화상을 받고 6월에 유학길에 올랐으며,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작곡을 배우면서 유럽 현대음악을 경험하게 되었다.

파리 시절 이수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윤이상은 때때로 배움에 대한 조급함을 드러내고 있다. ‹낙동강의 시›에 관해서는 "너무 통속성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할 수 없는 것"이라며 자신 없는 태도를 보였다. 이런저런 맥락과 함께 이 곡이 전통적인 기능화성에 바탕을 둔 작품임을 헤아리면 ‹낙동강의 시›가 이제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까닭 또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한국인의 시각으로 작품을 대하면 알게 될 것이다. 윤이상은 이미 이때부터 빛났다.

작곡가는 처음에 이 작품을 6악장으로 구상했다가 작곡 도중 3악장 구성으로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자필악보의 목차를 보면, ‹낙동강의 시›는 1악장 프롤로그, 2악장 黃昏(황혼)이 물들 때, 3악장 嘉俳節(가배절; 한가위), 4악장 갈대밭, 5악장 豐年歌(풍년가), 6악장 에필로그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완성된 작품은 3악장 짜임새로 1악장 프롤로그, 2악장 洛東江(낙동강)의 저녁, 3악장 舞曲(춤곡)으로 되어 있다.

남북이 상잔을 일으키고 미중러 등의 열강이 한반도에서 대리전을 벌일 때, 낙동강은 남한이 전세를 뒤집어 북한을 패퇴시킨 격전지였다. 이 무렵 윤이상은 낙동강 유역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부산에서 음악 교사로 지냈고, 전쟁이 끝난 뒤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가서 약 3년간 생활하며 서울대학교와 덕성여자대학교 등에 출강하는 한편 작곡가로서 활동했다. 시대적 배경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리고 6악장으로 된 최초 구상이 시사하는 바와 달리, 이 작품의 2악장까지는 어두운 정서로 가득하다.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것은 '드라마투르기'이며, 아치(arch) 형식으로 된 2악장을 빼면 나머지 악장은 전통적 형식구조를 따르고 있지 않다. 1악장은 웅장한 팡파르로 시작하고, 핵심이 되는 4도 상행 음형이 악곡 전체의 씨앗이 됨으로써 작품을 지탱하는 형식적 일관성을 확보한다. 이 팡파르와 그에 이어지는 선율 사이의 급격한 텍스처 대비는 마치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에서 실제 영화로 이어지는 장면전환을 연상시킨다. 이 작품이 과연 영화 ‹낙동강›과 무관한지 의심해볼 만한 대목이다.

1악장에서는 슬픔이 강물처럼 흐르고,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한다. 통곡이 잦아들면 마치 심장의 마지막 박동처럼 들리는 불안한 음형이 나타나고, 날카로운 두 차례 비명과 함께 1악장이 끝난다. 2악장은 오보에 선율이 이끌어 가는데, 이 선율은 음울한 뱃노래처럼 들리기도 하고 또 어찌 들으면 상엿소리 같기도 하다. 3악장에서는 흥겨운 리듬이 마치 선언처럼 나타나 비극을 몰아낸다.

3악장 중간에는 뚜렷한 민요풍 선율이 나온다. 이것은 ‹밀양아리랑›의 "동지섣달" 가사에 해당하는 선율과 음정관계가 일치하는데, 세마치장단으로 된 밀양아리랑과 달리 이 음형은 굿거리장단으로 된 ‹태평가›와 리듬이 비슷하다. 그리고 밀양아리랑과 굿거리장단이 결합한 결과는 ‹뱃노래›와 비슷하다.

2019년 11월 23일 붙임: 3악장 민요풍 선율은 1987년에 작곡한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에 사용되었음. 해당 부분의 가사는 "북을 쳐라, 새벽이 온다." 등.

2018년 1월 31일 수요일

소프라노 황수미 인터뷰

통영국제음악재단에서 발간하는 『Grand Wing』에 실린 글입니다. 출간본과는 사소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8년 1월 7일, 독일 현지 시각 오전 11시경 전화 인터뷰.

Q. 통영 공연은 이번이 두 번째다. 2016년 샹젤리제 오케스트라와 협연했을 때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A. 통영의 아름다움이 우선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고, 통영국제음악당의 음향이 훌륭해서 노래하기 편했었다. 그때가 통영국제음악당 데뷔 무대여서 긴장되기도 했지만, 직원들이 친절하게 챙겨주셨고, 숙소도 마음에 들었고, 아침에 자전거를 빌려서 해안 도로를 다녔던 것도 멋진 추억으로 남아 있다. 심지어 날씨까지 좋아서 모든 것이 완벽했던 것 같다.

Q. 올림픽 개막 공연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A. 영광으로 생각한다. 사실은 연락을 지난달에 받아서 일정을 조정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다. 아테네에서 열렸던 제1회 올림픽 때부터 공식 찬가로 지정된 곡을 원어인 그리스어로 불러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악보를 받은 지는 일주일밖에 안 됐다. 이걸 잘 해내려면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준비해야 할 것 같다.

Q. 연주자로서 자신의 장단점을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장점 위주로 자신을 평가한다면?

A. 무대 위에서 드러나는 것보다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은 지루할 수도 있고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려운 과제를 하나씩 해결하면서 받는 쾌감을 즐기는 편이다.

Q.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때 소프라노 임선혜 선생이 평하기를, 포커스가 확실하고 파워 있는 '고음'에 놀랐다고 했다.

A. 그때 마침 브뤼셀에 공연차 왔다가 콩쿠르를 보셨던 것 같다. 칭찬에 감사한다.

Q. 내 생각에 쇤베르크 ‹구레의 노래› 중 숲비둘기(Waldtaube) 역할을 하면 좋을 것 같다. 오케스트라 편성이 워낙 큰 작품이라 성량이 풍부해야 하지만, '비둘기'에 어울려야 하므로 드라마틱 소프라노여서는 안 되고, 고음이 맑고 단단하고 '포커스가 확실해야' 하는 까닭에 이 역할을 잘할 수 있는 소프라노가 흔치 않은데, 이 역할이 누구보다도 잘 맞을 것 같다.

A.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도전해 보겠다. 통영에서 기회를 만들어 주셔도 좋을 것 같다. (웃음)

Q. 진은숙 ‹퍼즐 & 게임›은 다른 방향으로 난이도가 대단하다. 이번에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이 곡을 전에 들어본 일이 있는가?

A.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뮌헨 공연 실황을 봤었다. 오페라를 모음곡으로 재구성한 ‹퍼즐 & 게임›은 아직 악보를 받아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

Q. 작곡가 진은숙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A. 여성 작곡가로서, 또 아시아 작곡가로서 베를린필 같은 특급 악단이 공연하는 작품을 여럿 쓰신 점이 대단하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왜소한 체격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나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모습 등이 멋있다고 생각한다.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에 출연하면서 알게 된 유명한 오페라 연출가 클라우스 구트 선생이 진은숙 차기작 오페라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연출할 예정이라고 말해줬을 때는 같은 한국인으로서 괜히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Q. 크리스티안 요스트 ‹시인의 사랑›은 어떤가?

A. 매니저가 조만간 악보를 챙겨 줄 예정이라 아직 잘 모르겠다. 슈만 원곡은 참 좋아한다.

Q. 여자가 부르는 ‹시인의 사랑›은 흔치 않다.

A. 가사 내용이 남자 가수에게 맞는 곡이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브리기테 파스벤더, 바바라 보니, 크리스티아네 셰퍼 등이 ‹시인의 사랑›으로 호평받았다. 시를 전달하는 일에 남녀를 엄격히 가릴 필요는 없지 않나 싶고, 크리스티안 요스트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시인의 사랑›이라면 더욱 남녀 구분 없이 도전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Q. 통영국제음악제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네 개의 마지막 노래›를 보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예정인데, 마지막 곡 '저녁놀 안에서'(Im Abendrot)를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때 불렀었다.

A. 학생 때부터 언젠가는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꿈의 레퍼토리'였고, 특히 리사 델라 카사의 음반을 좋아했다. 그래서 콩쿠르 결선 때 이 곡을 마지막 곡으로 불렀다. 음악이 주는 평안함이 좋았고, 잘해야지 하는 생각보다는 마지막 가는 길이 이렇게 평안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Q. 안나 네트렙코의 초기 목소리를 참고했다고 다른 인터뷰에서 밝힌 일이 있다. 자신만의 발성법을 찾기 전에 흉내 내려 했던 가수가 또 있다면?

A. 미렐라 프레니. 입 모양을 보면 소리가 어떻게 나는지 훤히 다 보일 것 같은 사람이다.

Q. 뮌헨 음대를 졸업했다.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A. 도시 자체가 참 좋았고,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실제 오페라 극장 오디션과 연계해 실습할 수 있는 시스템이 좋았다. 또 오페라뿐 아니라 리트 및 오라토리오를 복수전공하면서 시야를 넓히기도 했다.

Q. 본 오페라 극장 주역 가수이다. 극장 자랑을 해달라.

A. 플라시도 도밍고, 문서라트 커벌예(몽셰라 카바예), 에디타 그루베로바 등이 공연했었던 전통 있는 극장이고, '베토벤 오케스트라 본'이라는 훌륭한 악단이 극장 오케스트라로 있다. 개인적으로는 파미나, 돈나 안나, 미미, 수산나, 미카엘라 등 배역을 맡으면서 오페라 가수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4년차인 이번 시즌을 끝으로 독립할 예정이며, 앞으로는 여러 공연장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자유롭게 출연하게 된다.

Q. 국내 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계획이 있다면?

A. 피아니스트 헬무트 도이치 선생님과 함께 음반 녹음 건으로 음반사와 의견 조율 중인데, 자세한 내용은 아직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또 헨델 오페라 ‹리날도›로 앙상블 마테우스와 함께 파리, 빈, 모스크바 등을 순회공연할 예정이다.

Q. 마지막으로 통영 관객에게 한 말씀 해달라.

A. 아름다운 도시에서 다시 노래하게 되어 기쁘고, 좋아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싱그러운 봄에 좋은 음악으로 찾아뵙기를 기대한다.

2018년 1월 29일 월요일

낙동강의 시(詩)

한산신문 및 『Grand Wing』에 실린 칼럼입니다. 한산신문 판본에서 일부 내용이 수정됐습니다.


지난해 봄에 있었던 일입니다. 윤이상 선생이 영화 ‹낙동강›의 음악을 맡았던 모양이니 조사하라는 지시를, 아마도 저희 대표님한테 받았습니다. ‹낙동강›은 1952년 작품으로 영화 자체는 현재 유실되어 스틸 사진 등 일부 자료만 남아있는 모양이더군요. 공교롭게도 현 통영시장님과 이름이 같은 김동진이라는 분이 전반적인 음악 작업을 한 듯했고, 윤이상 선생은 테마 음악을 작곡한 듯한 정황을 알아냈지요.

다시 한 달쯤 지나, 대표님께서 이번에는 빛바랜 악보 하나를 주시며 인쇄용 악보로 옮기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표지에는 ‹Orchestral Suite "Poems of the Nak-tong River"›(관현악 모음곡 "낙동강의 시"), 그 아래에 'Composed by Yoon Ie Sang'(윤이상 작곡)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제목부터 모든 것이 손글씨더군요. 윤이상 선생의 자필 악보가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이었지요. 가슴이 떨려 왔습니다.

순간 저는 이 악보를 이렇게 다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충렬초등학교에서 발견된 윤이상 작곡 교가 악보 원본을 지난 2014년에 기증받았을 때, 그 악보를 전문가에게 맡겨 조심스럽게 사본을 만드느라 예산이 얼마나 들었고 또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었지요.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이때, 자필 악보 보존에 최선을 다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을 당장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손을 깨끗이 씻고, 손에 남은 물기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다음, 악보를 펼쳐 과감하게 복사기에 넣고 한 장씩 복사했습니다. 모든 음표와 작은 지시어 하나까지 잘려나간 곳이나 흐리게 복사된 곳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했습니다. 연필로 썼다 지운 흔적과 새로 쓴 자국이 겹친 곳, 세월이 흘러 흐릿해진 곳 등은 음악적인 맥락을 따져 판단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복사한 악보를 디지털 스캔해서 따로 보관하고, 종이로 된 사본은 컴퓨터 사보 작업을 맡길 전문가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2018년 4월 5일, 수십 년간 잊혔던 이 작품이 통영국제음악제 공식 공연에서 연주됩니다. 한스-크리스티안 오일러(Hans-Christian Euler)가 지휘하는 하노버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습니다. 이날 윤이상 선생의 1989년 작품인 실내교향곡 2번 '자유에의 헌정'(Den Opfern der Freiheit)이 베토벤 삼중협주곡과 함께 연주될 예정이기도 하지요.

‹낙동강의 시(詩)› 자필 악보 목차를 보면 6개 악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1악장 프롤로그, 2악장 黃昏(황혼)이 물들 때, 3악장 嘉俳節(가배절; 한가위), 4악장 갈대밭, 5악장 豐年歌(풍년가), 6악장 에필로그. 영남의 옛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께 각별하게 느껴질 듯한 소제목이지요. 그런데 윤이상은 작곡 도중에 간추린 구성으로 바꾼 듯합니다. 1악장 프롤로그, 洛東江(낙동강)의 저녁, 3악장 舞曲(춤곡), 이렇게 3악장으로 되어 있어요. 어쩌면 곡 길이가 너무 길어진다고 생각한 탓일까요?

이 작품의 작곡 시기로 추정되는 1952년경은 전쟁이 한창일 때였지요. 이 무렵에 윤이상 선생은 부산고등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지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가서 약 3년간 생활하게 됩니다. 서울대학교와 덕성여자대학교 등에 출강하는 한편 작곡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1956년 서울시문화상 수상에 힘입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리고 다시는 고향 통영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윤이상 공식 작품목록 중 첫 번째 작품은 1958년 베를린에서 작곡해 네덜란드 빌토번에서 초연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입니다. 그 이전 작품들은 작곡가 스스로 목록에서 삭제했지요. 그런 만큼 윤이상 선생이 한국에서 쓴 작품들은 유학 이후에 작곡한 본격 현대음악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낙동강의 시(詩)›가 듣기에 그리 어렵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낙동강에는 '녹조라떼'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이 따라다닙니다. 환경정책의 대실패를 입증하는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잊힌 지 수십 년만에 사실상 세계초연되는 ‹낙동강의 시(詩)›가 어쩌면 사람들에게 그 옛날 맑은 낙동강을 추억하게 하지는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2017년 11월 17일 금요일

소프라노 임선혜 인터뷰

통영국제음악재단에서 발간하는 『Grand Wing』에 실렸던 인터뷰입니다.


Q. 통영국제음악당 개관 전에 공연하셨던 것을 빼면, 지난 2015년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와 함께 '오르페오'를 주제로 공연한 이후로 이번이 두 번째 통영 공연입니다. 2015년 당시 통영국제음악당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벌써 2년 전의 일이지만 저와 당시 함께 했던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 동료들에게도 아직 선명하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뛰어난 음향을 가진 아름다운 공연장과, 바다가 보이는 대기실은 정말 잊지 못한다며 지난주 함께 베를린 무직페스트에서 연주한 그 동료들이 다시 떠올리더군요. 아마 함부르크 엘프필하모니와 더불어 세상에서 제일 그림같이 멋진 대기실이라고요. 역시 저에게도 그렇답니다. 더불어 엄청나게 맛있게 먹은 음악당 내 이탈리안 레스토랑도 기억에 남네요.

Q. 거장 지휘자들과 함께 여러 음반을 녹음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시히스발트 카위컨 지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도 있는데요, 한 성부에 한 명으로 합창과 독창을 겸하게 한 편성이 독특합니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이 녹음을 하기 몇 년 전 바흐의 ‹요한 수난곡›을 카위컨과 연주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적어도 한 성부에 두 명씩이었어요. 프로젝트 플랜에 합창단 언급이 없어서 이번에도 그런 방식일까 했는데, 첫 연습에 도착하니 정말 소프라노라고 나와있는 부분은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야 한다는 말에 속된 말로 ‘멘붕’이 강림했죠. 다행히 그간 연주하며 들은 풍월 덕에 하루 만에 익혀서 차질은 없게 했지만 워낙 양이 많다 보니 노래를 해도 해도 끝이 안 나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아리아와 듀엣 몇 곡 부르던 때와 달리 정말 '예수 탄생 이야기’에 더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동료들과 가사를 맞추고, 또 바흐 특유의 수학문제 풀이 같은 각 성부 진행을 함께 노래하며 엄청난 희열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한겨울 벨기에의 한 교회에서 녹음을 했는데, 공사 중이던 옆 건물의 소음 때문에 저녁에 시작해서 자정 넘어까지 손을 호호 불어가며 목도리를 온몸에 칭칭 감고 노래했던 기억도 이제 추억으로 남았네요.

Q. 바흐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처음 공연했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그건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첫 공연은 아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즈음이었을까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존 노이마이어의 연출, 안무로 함부르크 발레단과 한 공연이 기억에 아주 많이 남았어요. 베를린 도이체오퍼에서 오페라로 연출된 ‹마태오 수난곡› 프로덕션에 잠깐 참여했을 때와 비슷한 충격이 있었죠. 소설을 읽으며 내 머리로만 상상하던 것이 영화로 구체화되어 나왔을 때와 비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원래 연출되도록 만들어진 곡들이 아니고, 게다가 교회음악이기에 그 접근이 터부처럼 느껴졌던 것이 일반적 정서라, 뭔가 금지되었던 것의 안을 들여다보는 아찔함이 있었죠. 노이마이어의 발레에서 발레리노 예수가 나중에 십자가 지고 가는 장면들이 자유로의 춤으로 연출될 때 연주되는 바흐의 음악 역시 그를 따라 극장 전체를 일렁이며 춤추고 있었어요. 오페라를 넘은 종합예술의 어떤 완성점을 처음 맛보았다고 할까요? 십여 년 전에 비해 지금은 이런 시도들이 훨씬 많아졌어요. 미국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작년에 ‹요한 수난곡›을 스테이지 프로젝트로 만들기도 했고, 지난봄에는 하이든의 ‹천지창조›를 무대연출해서 엘프필하모니에 올린 작품에 참여하기도 했지요. 한계와 무한한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새로운 시도에 많은 연출가들이 호기심을 쏟고 있답니다.

Q. 소프라노 성부를 맡은 솔리스트의 역할과 관련해 바흐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가 독특한 점이 있을까요? 바흐 칸타타와 비교했을 때, 바흐 수난곡과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이 다를지 가수로서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가장 큰 차이는 주제에 따른 마음의 접근이겠지요? 한 곡은 수난을 노래하니 그 의미와 구원의 역사를, 다른 한 곡은 그 계획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니까요. 사실 바흐 오라토리오에서 솔리스트는 잘 차려진 음식 위에 올려지는 고명과 같은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극의 줄거리 설명은 복음사가(Evagelist)가 하고 극은 합창이 이끌어갑니다. 그 줄거리 설명과 드라마 사이사이에 솔리스트들은 격양된 희로애락의 감정을 읊지요. 이 부분들이 잘 읊어지고 진정성을 낳으면 관객들은 다음의 줄거리와 극들을 더 기대하며 공연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게 됩니다. 모든 바흐의 오라토리오들이 그런 역할을 솔리스트들에게 요구하고 제안하고 있지요. 다만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는 하루에 모든 곡이 연주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약간은 다른 성격이 있어요. 원래는 "크리스마스 기간” 각각 다른 날들에 연주하도록 작곡된 것이라 큰 줄거리는 우리가 아는 그 내용이지만, 6칸타타들을 하나로 만드는 큰 유기적인 결합은 덜합니다. 따라서 수난곡에서는 각 성부 아리아들의 위치와 배정을 어느 정도 계획했다면,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는 그런 큰 그림이 꼭 보이지는 않지요. 1번부터 6번까지를 하루 저녁에 연주하기도 하지만 어떤 공연들은 1, 4, 5, 6만 한다던가, 첫날은 1-3번, 두 번째날은 3-6번 이렇게 정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에 따라 공연에서 부르는 아리아가 거의 없을 때도 있지요. 그날의 무대 위에서 정자세로 더 많이 앉아있는 '감상의 날’이죠.

이 곡에서 또 주목할만 것은, 바흐가 자신이 세속칸타타에서 썼던 아리아들을 다시 사용했다는 것인데, 마침 그 세속 칸타타들을 연주해본 경험이 있어서 제게도 흥미로웠던 부분입니다. 바흐가 자신이 이미 썼던 곡에 가사를 바꾸고 악기에 변화를 주어서 180도 전혀 다른 분위기가 나는 곡으로 둔갑시키는데 아주 큰 능력이 있는 작곡가임을 후대에 음악가들이 감탄해 마지않고 있습니다. 어린 헤라클레스에게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즐기라고 유혹하는 ‘쾌락’(Wohllust)의 소프라노 아리아 (BWV213)가 이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에서는 아기 예수에게 잘 자라는, 한없이 순수한 자장가로 등장하는데 이때는 알토의 아리아로 바뀝니다. 성부가 가사를 조금 바꿈으로써 '아주 관능적인 아리아'에서 '아주 순결한 아리아'로 바뀌는 마술이 일어난 거죠! 바흐는 알면 알수록 수수께끼 같은 매력이 드러나는 작곡가입니다. 바흐 사후 바흐를 세상에 다시 소개해 그의 작품들이 만개하게 한 멘델스존이 문득문득 참 고맙답니다.

Q. 뤼벡 합창 아카데미(Chorakademie Lübeck)는 2014년에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카르미나 부라나' 공연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던 합창단입니다. 뤼벡 합창 아카데미와 전에 협연하신 일이 있나요?

소식은 많이 들었지만 함께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다만 지휘자 롤프 베크 선생님은 십여 년 전, 독일의 대표적 여름 페스티벌인 슐레스비히-홀스타인 페스티벌 디렉터로 계실 때 그 페스티벌 합창단과 함께 바흐의 ‹B단조 미사›를 함께 한 적이 있습니다. 워낙 독일에서 합창 음악에 대가로 알려지셨기에 그분이 가는 곳이면 합창이 늘 특별하고 좋았지요. 오랜만에 뵙게 될 텐데 다시 바흐 음악으로 함께하게 되어 기대됩니다.

Q. 지난 2014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때, 페이스북으로 소프라노 황수미 · 박혜상 · 바리톤 유한승 씨를 극찬하면서 응원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 눈여겨보고 있는 신인 가수가 있나요?

둘러볼 기회가 없어서 다 응원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실력 좋은 한국인 신인 가수들이 많습니다. 도밍코 콩쿠르에서 우승한 테너 김건욱도 그 중 하나인데, 지난해에는 부산에서 ‹사랑의 묘약›을 같이 공연할 기회가 있었지요. 아름답고 진정성 가득한 음성과 음악을 대하는 겸손함 그리고 무대에서의 적극성이 앞으로 더 좋은 무대들을 열어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친분이 있는, 피츠버그 심포니 음악감독인 마에스트로 만프레드 호넥씨가 찾고 있는 테너 음성인 것 같아서 적극 추천을 했는데 잘 성사되어 서로 기뻐하는 모습에 저도 괜히 뿌듯했답니다.

Q. 가수로서 느끼는 유럽 고음악계 및 오페라 극장의 최신 경향이나 판도를 국내 애호가 및 음악 전공 학생들에게 소개하자면?

근 20년 전 저의 데뷔 초기에 유럽에서 솔리스트로 활동하는 가수들이 열 분도 채 안 되었다고 하면, 이제는 한국 출신 성악가들을 유럽의 어느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한국 출신 음악가들이 많은 국제 콩쿠르 입상으로 극장 무대에 진출한 덕이기도 하고 더 넓게는 유럽이 자신들의 음악시장을 점차 개방해서 모든 민족들과 나라의 사람들이 함께 경쟁하고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어느 나라 가수는, 음악가는 대략 이렇더라 하는 편견도 많이 사라지고 있고요. 그것은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새로운 세대의 젊은 음악가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테크닉뿐만 아니라 감성의 공감대를 이끌어낼 만큼 열려있고 문화 공부도 많이 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피부 색깔 등 많은 편견들과 선입견이 사라진 이상 아티스트, 연주자 개개인의 남다른 개성, 그리고 그 개성의 뚜렷함이 호감을 얻게 되면 많은 주목을 얻게 되는 것이죠. 동양인이 수석으로 앉아있어도 이상하지 않고 동양인이 음악사 최초 서양 오페라에서 주인공이어도 거부감이 없는, 오히려 어떤 다른 색깔을 내어줄까 하는 기대를 사게 만들 수도 있는 시대. 더 이상 동양인이라 절대 안 된다는 말은 듣지 않아도 되는 '열린 세상'에서 자신의 음악을 맘껏 펼쳐볼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 같습니다. 최첨단 테크놀로지로 지구의 많은 나라들이 서로 가깝게 느껴지는 덕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오랫동안 열정과 인내로 국제무대를 지켜내시고 좋은 이미지들을 남겨주신 여러 음악가 선배님들의 노고를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Q. 자신만의 발성법을 찾기 전에 흉내 내려 했던 가수가 있었나요? 자신의 목소리를 찾게 된 과정이나 계기가 궁금합니다. 더 나은 발성법을 고민 중인 성악도들에게 조언 한 마디 부탁합니다.

미렐라 프레니를 좋아하던 시절, 성악에 입문하고 대학 입시를 치를 때까지는 아주 고음은 잘 안 나지만 제법 굵고 큰 소리가 나는 소프라노였습니다. 상상이 어려우실 수도 있겠지만요.(웃음) 제게 지금의 목소리를 갖도록 길을 닦아주신 분이 서울대 박노경 교수님이셨어요. 자기 몸에 어울리는 소리를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국제 무대에 서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가볍고 날씬해서 고음이 잘 나는 음성이 실제 이 아이의 몸에 맞지 않을까 하고 많이 연구하셨다고 해요. 저는 그 깊은 뜻은 감히 헤아리지 못했고 그저 선생님의 음악성에 늘 감탄하던지라 선생님을 무척 따랐지요. 그래서 2-3학년 때는 하이 C 가 겨우 나던 것이 4학년 때는 콩쿠르에서 Eb 이 나는 ‹청교도› 의 아리아나, 루치아의 ‹광란의 아리아› 들로 1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 데뷔 후 주로 고음악이 주 레퍼토리가 된 통에 벨칸토 레퍼토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줄었지만, 바흐,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가수로, 또 각 장르에 유연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때 선생님께서 제 몸에 무리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소리를 찾아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소리와 노래를 가장 오랫동안 들으셔서 가장 잘 아시는 분이기에 지금도 한국에 가면 레슨을 받고 조언을 구합니다.

또 성악가들은 노래하면서 자신의 소리를 듣기가 힘들기에 연습이든 공연이든 되도록 녹음을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요. 자기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때로 민망하고 쥐구멍으로 숨고 싶게 할 때도 있지만, 내 목소리를 객관적으로 들으며 지향점과 지양점을 스스로 깨닫고 생각하는 꼭 지나야 하는 깜깜한 터널 같은 작업이지요. 덕분에 많은 음악적 아이디어가 생기기도 하고요. 때로는 다른 성악가들의 노래를 들으며 참고할 때도 있는데, 때마다 다르지요. 지금 당장 어떤 부분이 부족하거나 넘친다는 생각이 들면 레퍼런스가 될 수 있는 소프라노들을 듣기도 합니다. 캐슬린 배틀이 될 때도 있고, 엘리 아멜링이나 알린 오거(Arleen Auger) 가 될 때도. 최근에는 마리아 바요의 이태리 레치타티보 리듬에 반해서 많이 참고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성악도들이 유학을 가면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어린 나이에 무겁게 노래하지 말라는 이야기일 겁니다. 오래 건강하게 그리고 듣기 좋게 노래하기 위한 기본이 되기 때문일 테지요. 내가 잘 되길 진심으로 바라는 선생님의 좋은 귀가 한 성악가의 커리어를 함께 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에 대해 많은 노력과 투자를 해봐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Q. 국내 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계획이 있나요?

몇몇 새 음반이 곧 출반됩니다. 파비오 비온디가 이끄는 “에우로파 갈란테”와 비엔나 공연 실황 녹음을 한 헨델의 오페라 ‹실라›, 그리고 B-Five라는 리코더(Blockfloete) 그룹과 지난해 녹음한 윌리엄 버드(William Byrd)의 Songs. 요절한 유태인 작곡가 에르빈 슐호프(Erwin Schulhoff) 의 가곡 전집을 남독일방송국과 함께 녹음 중인데, 가곡 작곡가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작곡가의 다양한 면모를 세계초연 레코딩으로 소개할 수 있어 기쁩니다.

올해 모차르트 오페라 ‹여자는 다 그래›로 내한해서 세미 스테이지 버전 모차르트 오페라의 진수를 보였던 르네 야콥스와 ‘프라이부르크 바로크오케스트라’가 다시 내년에는 ‘피가로의 결혼’으로 내한합니다. 영악하고 요염한 하녀에서 사랑스럽고 재치 있는 새신부, 수잔나로 함께 공연하게 되어 벌써부터 기쁩니다!

2017년 10월 9일 월요일

윤이상: 첼로를 위한 ‹활주› (1970)

이 작품의 원어 제목인 'Glissées'(글리세)는 '미끄러지다' 또는 음악 용어 '글리산도'를 뜻하는 프랑스어로 동사 원형은 'glisser'이다. 그러나 윤이상의 '글리세'는 서양음악의 단순한 글리산도가 아닌 동아시아 음악의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대표하는 말이다. 이 작품에서 첼로 소리는 때로 거문고, 가야금, 또는 해금처럼 들린다.

동아시아 음악에서 개별음은 생명력을 품고 자유롭게 움직이며, 윤이상은 그것을 서양 기보법으로 옮기면서 장식음, 글리산도, 그 밖에 여러 특수한 연주법 따위를 사용했다. 이것은 동아시아 음악을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다. 음악학자 볼프강 슈파러가 한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윤이상의 기보법과 음향적 상상력에 따라 고유한 변화와 개성, 특징적 억양을 갖게 된다."

첼로를 위한 ‹활주›는 윤이상이 ‹예악› 등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뒤에 쓴 작품이다. ‹예악›에서 음을 덩어리로 쌓아 음향복합체를 만들되 그것을 이루는 개별음에 생명력을 부여함으로써 동아시아 음악의 음향을 서양악기로 표현했다면, ‹활주›에서는 첼로라는 악기 하나에 집중하면서 개별음이 생동하며 만들어내는 소우주를 탐구한다.

한편, 한국 전통음악, 그중에서도 특히 정악(正樂)은 비트(beat)가 아닌 호흡으로 음악이 분절된다는 점에서 서양음악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윤이상의 ‹활주› 또한 마찬가지로, 이 곡의 악보에는 심지어 마디줄이나 박자표도 없다. 그래서 연주자에게나 감상자에게나 중요한 것은 음 하나가 생장하며 쉬는 '숨'을 따라 쉬는 일이다.

2017년 10월 8일 일요일

코다이: 첼로 독주를 위한 소나타 Op. 8

"다른 어떤 작곡가도 이 작품과 비슷한 곡을 쓴 일이 없다. […] 목소리를 닮은 놀라운 효과로 독창적이고 독특한 양식을 창조[…] 그런 효과가 아니더라도 이 작품의 가치는 눈부실 만큼 명백하다." (벨러 버르토크)

오페라의 레치타티보를 기악에 응용한 사례는 드물지 않다. 파를란도(parlando), 즉 말하듯이 연주하라는 나타냄말 또한 기악 음악에 때때로 나온다. 그러나 코다이의 첼로 독주를 위한 소나타에서는 '말소리'가 음악에 극적 효과를 더하는 '양념'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말소리'가 그 자체로 음악을 지배한다. 3악장을 빼고 나면 이 곡에서 리듬의 규칙성은 없다시피 하고, 첼로는 마치 배우가 독백하듯 말한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첼로라는 배우가 출연하는 일인극이다.

첼로가 하는 말을 사람이 알아들을 수는 없다. 이때 관객에게 필요한 것은 '목소리'에 실린 감정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1악장에서 때때로 음산한 음형이 마치 효과음향처럼 반복되는 가운데 첼로는 분노하고 절규하며 통곡한다. 2악장에서는 탄식하고 흐느낀다. 3악장에서는 뜬금없이 헝가리 민속 음악을 닮은 음형이 나온다. 반복되는 신나는 리듬과 함께 관객은 처음으로 '말소리'가 아닌 '음악'을 듣게 된다. 그러나 처음 나온 음형이 변형되면서 음악에 다시금 말소리가 끼어든다. 웃음을 잃지 않는 저항을 말하는 것일까?

쿠르타그: ‹기호 II›, ‹필린스키 야노시: 제라르 드 네르발›, ‹믿음›, ‹그림자›

1989년부터 1997년 사이에 쿠르타그는 예전에 쓴 소품들을 모으고 고쳐서 ‹기호, 유희 그리고 메시지›(Jelek, játékok és üzenetek)라는 작품집을 발표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베이스, 그리고 네 악기를 다양하게 조합한 소품으로 된 이 작품집 가운데 오늘 연주될 다섯 곡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작곡되었다.

쿠르타그는 버르토크와 베베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기호›는 특히 고도로 압축된 표현이 베베른과 닮은꼴이며, 리듬과 세세한 표현은 버르토크를 닮았다.
‹필린스키 야노시: 제라르 드 네르발›은 20세기 헝가리 시인 필린스키 야노시의 ‹제라르 드 네르발›을 바탕으로 한 곡이다(헝가리에서는 동아시아처럼 성을 이름 앞에 쓴다). 제라르 드 네르발은 19세기 프랑스 시인으로 불행한 삶을 자살로 마감했다.

강변이 아닌 강변.
해돋이가 되지 못한 기억,
해자(垓字)의 어떤 것
머릿속 뾰족한 바늘.

‹믿음›은 소프라노와 피아노를 위한 ‹보르네미서 페테르의 말씀›을 첼로 독주곡으로 편곡하여 읆조리듯 노래하는 첼로 소리로 가사를 대신한 작품이다. 보르네미서 페테르는 16세기 헝가리 루터파 주교였고, 쿠르타그의 원곡은 보르네미서의 설교 중 믿음에 관한 내용을 가사로 한다.

‹그림자›는 하행하는 음형을 중심으로 하는 흐릿한 텍스처가 특징적인 작품으로, 첼리스트 스티븐 이설리스는 이 곡에서 셰익스피어 «햄릿»에서 유령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대목을 떠올리기도 했다. "여기다!—여기다!—사라졌어!"(’Tis here!—’Tis here!—’Tis gone!)

2017년 10월 6일 금요일

해피 버스데이 윤이상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통영 시민 여러분,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저는 김순남이라는 사람입니다. 옆에서 딴청 부리고 있는 윤이상을 대신해 저승에서 인사 올립니다. 요즘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에서 윤이상의 음악 세계를 재조명하고 있지요. 저 또한 이상과 같은 해에 태어난 작곡가이지만, 제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섭섭하기도 하고, 또 그가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제 얘기보다 윤이상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올해 들어 윤이상은 예년보다 훨씬 자주 이승을 내려다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짓곤 합니다. 특히 그의 고향 통영에 몇 년 전 개관한 통영국제음악당을 보면서 음악에 빠져들곤 하지요. 볼프강 슈파러, 로스비타 슈테게, 잉고 고리츠키, 볼프강 피베크 등 생전에 알고 지내던 독일 친구들이 통영국제음악제에 초청 받아 통영에 온 일을 반가워하던 기억도 납니다.

지난 9월 17일은 윤이상의 100번째 생일이었지요. 이날 세계 곳곳에서 윤이상 음악이 연주되었습니다.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열린 '해피 버스데이 윤이상' 공연에서는, 마지막 순서로 윤이상의 초기 가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통영국제음악재단의 플로리안 리임 대표가 서툰 한국어로 했던 연설이 감동적이었지요. 그가 윤이상의 아내 이수자 씨에게 꽃다발을 건넸을 때, 제 옆에 있던 이상 또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내 걱정은 말고 이승에서 천수를 누리다 오시구려.'

통영국제음악당에서는 이날부터 일주일간 '윤이상 기념 주간'으로 날마다 공연이 열렸습니다. 그 가운데 후배 작곡가들의 신작이 4곡이나 세계초연된 일이 참 반갑더군요. 주한독일문화원과 통영국제음악재단이 공동 위촉한 작품 둘, 그리고 진은숙 작곡가가 한국의 신예 작곡가들에게 위촉한 작품 가운데 두 곡이 이번에 통영에서 초연되었지요. 후배 작곡가들의 참신한 음악을 들으면서 저도 윤이상도 무척 기뻤습니다.

독일 작곡가 요하네스 모츠만은 윤이상 작품 중 ‹가락›, ‹율›, ‹활주›, ‹추억›, ‹사선(死線)에서› 등을 연구하면서 얻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클라리넷,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한계점 아래›(Below Threshold)를 썼다고 하지요. 윤이상의 작곡 기법을 흉내 내면서도 서양인의 사고체계와 미의식을 드러내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조은화의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사람, 바다를 품다›는 요하네스 모츠만 작품과 마치 거울쌍처럼 비슷하면서도 반대였습니다. 악기마다, 성부마다 이질적인 음형이 한데 모여 승화적으로 어우러지도록 하는 점은 윤이상 음악의 특징 중 하나이지요. 모츠만이 서양인의 시각으로 이것을 재해석하며 동양을 바라보는 지향성을 내비쳤다면, 조은화는 비슷한 기법을 얼핏 재즈 느낌이 나도록 하며 한편으로는 부조리극처럼 아이러니한 텍스처를 담아낸 점이 참신했습니다.

김도윤의 ‹양말 짜는 기계›(Stocking Frame)는 피아노 현 곳곳에 자석을 올려서 음색과 음정을 비틀어버린 것이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마치 피아노와 하프시코드, 글로켄슈필 등이 함께 소리내는 듯했고, 가믈란(gamelan) 음악 느낌도 났습니다. 서로 다른 빛깔로 반짝이는 음들이 모여 부딪치며 새로운 빛깔을 만들어내는 양상은 진은숙 작곡가 느낌이 살짝 났고, 때로는 피에르 불레즈 느낌이 나기도 하더군요. 다양한 음소재를 유쾌하게 엮어내는 작곡가의 재치가 감탄스럽기도 했습니다.

송향숙의 ‹SOLOS›는 마치 여러 가지 화면을 빠르고 어지럽게 교차시키는 영상 기법처럼 여러 음형이 다층적으로 얽히며 변화하는 모습이 신기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작품 자체보다는 그 복잡한 음형들을 연주해 내는 피아니스트에게 감탄하게 되더군요. 피아니스트 단 한 사람이 어찌나 많은 음을 폭포처럼 쏟아내는지, 또 그런 가운데 수많은 변화를 어찌나 정교하게 담아내는지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지요. 피아니스트 이름은 지유경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가 10일에 걸쳐 유럽 6개 도시를 돌며 윤이상 음악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또 10월에는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가 열리지요. 부러움과 함께 50년쯤 뒤에는 윤이상 음악 못지않게 제 음악에도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네요. 저승에서 김순남이 다시 한번 인사 올립니다.

2017년 7월 25일 화요일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통영국제음악당 공연 프로그램북에 실릴 글입니다.


"이 교향곡은 너무나 화려하고, 거창하고, 가식적이고, 장황하며, 전체적으로 매몰찹니다. 저는 참말로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실력을 잃었을까요? 그렇다면 끔찍한 일입니다."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후견인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교향곡 5번을 발표한 뒤에 전문가들의 반응이 좋지 않아 자학하는 말이다. 교향곡의 종주국인 독일-오스트리아에서는 작은 음악적 씨앗으로 논리를 구축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 왔지만, 차이콥스키는 그러한 전통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도 논리와 구조에 매달리는 일이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아 괴로워했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에는 딱히 표제나 음악 외적인 내용 설명이 없다. 1악장과 4악장은 소나타 형식, 2악장과 3악장은 세도막 형식으로 19세기 작품치고는 깔끔하게 분석된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에 불과하며, 음악을 듣고 있으면 어떤 이야기의 흐름이 느껴진다.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의 말을 빌리자면, 차이콥스키 교향곡에서 중요한 것은 '구조'가 아니라 '드라마투르기'이고, 작곡 방식이 교향곡보다는 오페라를 닮았다.

1악장은 고통을 이야기한다. 2악장에서는 억눌린 슬픔이 달콤한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3악장에서는 고독이 우아한 왈츠 속에서 질식한다. 4악장에서는 승리의 팡파르가 요란하게 울리지만, 그 승리는 작곡가 자신의 말처럼 너무나 화려하고, 거창하고, 가식적이고, 장황하다. 그래서 팡파르가 찬란할수록 작곡가의 자존감이 바닥을 기고 있음이 느껴진다. '승리'는 거짓이다. 정신적 마스터베이션이다.

이 곡을 감상하려면 작곡가의 불안정한 정신세계에 휩쓸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작곡가와 함께 고통에 몸부림쳐야 한다. 그러나 음악이 끝나고 나면 달콤한 절망에 너무 취해 있지도 말고 거짓 승리에 속지도 말자. 이 곡은 위험하다.

영문 번역 추가: 2024. 4. 23.

P. I. Tchaikovsky: Symphony No. 5 in E minor, Op. 64

“This symphony is too brilliant, grandiose, pretentious, verbose, and overall suffocating. Have I really lost my talent as they say? That would be terrible.”

This is what Tchaikovsky wrote in a letter to his benefactress, Nadezhda von Meck, following the premiere of Symphony No. 5, which received unfavorable reactions from experts. In the homeland of symphonies, Germany-Austria, it has been deemed virtuous to construct and develop logic from a small musical seed. However, Tchaikovsky, while partially embracing such tradition, agonized over adhering to logic and structure, which did not align with his ‘nature’.

There is no title or extra-musical explanation for Tchaikovsky’s Symphony No. 5. The first and fourth movements follow a sonata form, while the second and third movements adhere to a ternary form, which is neatly analyzed for a 19th-century work. However, this is merely surface-level, and upon listening to the music, one can discern the flow of a narrative. To borrow the words of musicologist Richard Taruskin, the significance of Tchaikovsky’s symphony lies not in its ‘structure’ but in its ‘dramaturgy’, with the compositional style resembling opera more than a symphony.

The first movement depicts pain. In the second movement, suppressed sorrow sways within sweet despair, and in the third movement, loneliness suffocates amidst an elegant waltz. In the fourth movement, the fanfare of victory rings loudly, yet the victory is overly brilliant, grandiose, pretentious, and verbose, as the composer himself stated. Thus, the more the fanfare shines, the more it reveals a palpable erosion of the composer’s self-esteem. The ‘victory’ is a falsehood. It is mental indulgence.

To appreciate this piece, one must be prepared to be swept away by the composer’s unstable psyche. One must endure the pain alongside the composer. However, after the music concludes, do not become too intoxicated by the sweet despair, nor be deceived by the false victory. This piece is perilous.

2017년 7월 24일 월요일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1번

통영국제음악당 공연 프로그램북에 실릴 글입니다.


프로코피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재학생 시절에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썼고, 루빈스타인 피아노 콩쿠르에 이 곡을 결선 곡으로 들고 나가서 세계초연했다. 프로코피예프는 우여곡절 끝에 이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 작품은 세 부분으로 된 단악장 곡이다. 짜임새가 특이하고 복잡해서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작곡가 자신이 설명한 짜임새를 바탕으로 해설한다.

이 곡은 긴 오케스트라 도입부로 시작하고, 피아노 독주는 오케스트라 도입부와 별다른 주제적 연관성이 없다. 부점 리듬이 두드러지는 제1 주제가 마침내 피아노 독주로 제시되고, 경과구를 지나 그로테스크한 제2 주제가 제시 및 변형된다. 경과구를 지나면 마치 종결구처럼 느껴지는 E장조 주제에 이어 '도입부 주제'가 재현된다.

그리고 발전부가 나와야 할 자리에 뜬금없이 새로운 주제가 마치 2악장처럼 느리게 나타나 변주된다.

템포가 다시 빨라지면서 스케르초 악장처럼 느껴지는 발전부가 시작된다. 앞서 종결구 주제처럼 나왔던 E장조 주제가 전개되고, 이어서 제1 주제가 전개되고, 카덴차로 이어진다.

재현부는 발전부의 연장인 양 슬그머니 나타난다. 오케스트라가 제2 주제를 전개하고, 이때 피아노는 제1 주제와 '리듬만 비슷하게' 나타난다. 경과구를 지나 종결구 느낌 E장조 주제가 재현되고, 도입부 주제가 마치 진정한 재현부의 시작처럼 재현되면서 곡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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