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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8일 목요일

모든 시민이 악기 하나쯤 연주할 수 있는 통영을 꿈꾸며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에 나오는 ’환희의 송가’는, 일설에 따르면 본디 ’자유의 송가’였다고 하지요. 원작 시를 쓴 프리드리히 실러가 ’자유’(Freiheit)를 ‘환희’(Freude)로 바꾼 까닭은 당시 유럽 사회에서 ‘자유’가 지배계급에 도전하는 불온한 낱말이었기 때문이라고요. 그러고 보면 ’환희’ 대신 ’자유’로 바꾼 노랫말이 더 자연스러운 것 같기도 합니다. “자유여, 아름다운 신의 불꽃이여!”(Freiheit, schöner Götterfunken!)

오늘날 자유는 불온한 낱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수적 가치를 대표하는 낱말로 여겨지지요. 이를테면 보수 정당에 소속된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에는 ’자유’가 35번이나 나왔습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취임사에는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 운동권 선배와 동기들이 쓰던, 뉴스에서는 노동운동가나 좌파 지식인 및 정치인이 흔히 쓰던 낱말도 여섯 번이나 나왔습니다. 그것은 ’연대’입니다.

“어떤 사람의 자유가 유린되거나 자유 시민이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모든 자유 시민은 연대해서 도와야 합니다. […] 공권력과 군사력에 의한 불법 행위로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고 자유 시민으로서의 존엄한 삶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모든 세계 시민이 자유 시민으로서 연대하여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윤 대통령과 같은 정당에 소속된 천영기 통영시장이 취임한 뒤로 놀라운 문화사업이 등장했습니다. 시민 ’1인 1악기’를 정책목표로 통영국제음악재단이 추진하고 있는 ’TIMF 음악교실’입니다. 사실 이 사업은 내용상으로는 통영국제음악재단이 출범한 뒤로 8년째 하고 있는 여러 음악 교육사업과 별로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민 ’1인 1악기’라는, 아직은 구호에 가까운 정책목표야말로 정말로 값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형편이 어려운 국민을 선별해서 문화접근성을 높이자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보수 정치인에게 어울리는 정책목표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면 그것은 진보 정치인에게 어울리는 정책목표가 됩니다. 이것은 학교 급식을 전면 무료화할 것인가, 아니면 저소득층 학생에게 선별적으로 무료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일맥상통합니다.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를 처음 제안한 정치인은 노회찬 전 국회의원입니다.

통영국제음악재단이 그동안 추진해 온 교육사업은 굳이 따지자면 보수적인 정책 방향을 따르는 것들입니다. 제한된 예산으로 성과를 내려면 그것이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13만이 넘는다는 통영시민 모두가 정말로 악기 하나쯤 연주할 수 있게 되려면, 또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 연주할 수 있게 되려면, 정부가 예산을 얼마나 쏟아야 할지 저는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과연 그런 정책목표가 옳은지에 대해서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만, ’모든 시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통영’이 언젠가 먼 훗날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되는 일은 참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수 정치인이 진보적 가치에 호응하거나, 반대로 진보 정치인이 보수적 가치에 호응하는 일도 참 멋진 일인 것 같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말한 ’연대’처럼요.

윤이상과 안익태의 업적을 평가하는 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속한 ’진영’이나 정치 성향에 따라 자칫 ’친북’이나 ’친일’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윤이상과 안익태를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값진 일은 열린 마음으로 두 사람 모두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기리는 일이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한때 불온한 말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은 시구를 되뇌어 봅니다. “자유여, 아름다운 신의 불꽃이여!”

2022년 5월 1일 일요일

2022 통영국제음악제 막전막후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앤드루 노먼 PCR 검사 결과가 ’미결정’이라서 24시간 이내에 재검사받아야 한답니다.”
“8시에 통영으로 출발하는 차량을 10시 출발 보건소행으로 바꾸고 서울 숙박도 1박 연장합시다.”
“오늘 오후 4시에 하기로 했던 강연은 내일로 연기하겠습니다.”
“관할 보건소에 확인해 보니, 최초 확진 후 45일 이내에 검사를 받은 경우 재검사 필요 없대요!”
“서울 숙박 연장하지 마세요. 바로 통영으로 출발합니다.”
“오늘 4시 강연 예정대로 하겠습니다!”

앤드루 노먼은 올해 통영국제음악제 레지던스 작곡가였지요. 그런데 음악제 개막 직전 입국을 앞두고 미국에서 코로나-19 검사를 했더니 양성 판정이 나왔다고 합니다. 일주일이 지나 증상이 사라진 뒤에도 PCR 검사 결과는 양성으로 나오는 바람에 계속 입국이 지연되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드디어 음성 판정을 받아서 입국했더니, 입국 직후에 다시 검사한 결과가 ’미결정’이었던 것이지요.

이번 통영국제음악제 기간 동안 앤드루 노먼 작품 7곡이 아시아초연 또는 한국초연됐습니다. 앤드루 노먼은 6번째 곡이었던 ‘소용돌이’ 공연에 참석해 연주 직후 무대 인사를 할 수 있었고, 마지막 곡인 ’풀려나다’는 리허설부터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곡 전공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과 작곡 레슨 등 레지던스 작곡가로 뒤늦게나마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입국이 지연되는 동안 일부 작곡 레슨은 진은숙 예술감독님이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올해 통영국제음악제에는 예년보다 별별 일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피아니스트 데죄 란키는 코로나-19 확진자가 한국 내에서 급증하는 상황을 우려해 출연을 취소했고, 소프라노 율리야 레즈네바는 폐막공연에서 데죄 란키 대신 협연을 맡기로 했다가 건강 문제가 생겨서 폐막 공연에 출연할 수 없게 되어 소프라노 박혜상이 ‘대타의 대타’로 출연하게 되었지요. 또 킹스 싱어즈 단원 가운데 1명이 입국 직후 실시한 PCR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아서 공연은 6명 중 5명만으로 하게 되었고 프로그램도 일부 변경됐습니다. 쾰른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해외 입국 단체에 대한 격리 면제가 허용되지 않아서 K’ARTS 신포니에타로 교체되었고, ’해리 파치: 플렉트럼과 타악기 춤’ 공연 또한 코로나-19의 여파로 취소되었습니다.

취소된 공연의 대체 공연으로 소프라노 율리야 레즈네바 리사이틀이 결정되면서 프로그램 확정부터 티켓 오픈까지 여러 사람이 바쁘게 움직였던 일, 그리고 ‘대타의 대타’ 프로그램을 위한 오케스트라 악보를 급히 구하느라 여러 사람이 고생했던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로시니 아리아 악보가 F장조 말고 E장조가 필요하대요!”
“이미 리허설 직전인데… 이렇게 되면 오페라 전곡 악보에서 해당 부분을 일일이 찾아야 하는데요…”

이미 저작권이 만료된 악보를 인터넷으로 구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2시간 30분짜리 오페라 전곡 악보에서 짧은 아리아 하나만 추리는 일이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아는 오페라 지휘자들에게 연락을 시도했다가 의외로 가장 먼저 연락이 닿은 사람은 아마추어 첼로 연주자이자 오페라 애호가였습니다. 오케스트라 총보에서 해당 부분이 몇 페이지에 나오는지를 금방 찾아내더라고요. 그때 제가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바그너 오페라였으면 직접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오케스트라 악보를 악기별로 분리한 이른바 ’파트보’에서 해당 부분을 일일이 추리는 일은 또 다른 일이었지만, 총보를 추리고 나니까 파트보 추리는 일은 제가 직접 할 수 있겠더라고요. 악기별로 하나씩 인쇄해서 연주자들에게 전해준 것은 리허설을 시작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지휘자 마르쿠스 슈텐츠가 그랬다네요. “기적이에요!”

2021년 12월 19일 일요일

작곡가 윤한결의 '그랑히팝'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힙합은 리듬을 위주로 한 언어 음악 예술이며 래퍼라는 연주자/연기자는 복잡한 리듬을 위주로 스토리텔링 및 대개 비판적인 자기주장을 하기도 한다. […]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과거의 오스티나토와 레치타티보와 유사하며, 큰 차이점이라면 문장들과 단어들을 라임 중심으로 빠르게 욱여넣는다는 점이 있다. 또한 정형화되지 않고, 매우 외향적이며 외설적이기까지 한 특징은 힙합을 – 음악적 요소가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 놀랍도록 강렬하며 다양한 음악적인 경험을 하게 해준다.”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윤한결 선생이 ‘그랑히팝’(Grande Hipab)이라는 작품에 관해 이렇게 썼습니다. 현대음악 작곡가가 대중음악 장르인 힙합에 관해 얘기하다니 신기합니다. “힙합 장르의 특징을 패러디와 재해석을 통해 현대적으로 표현”했다는 작품 ’그랑히팝’은 지난 10월 8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요하네스 칼리츠케가 지휘한 TIMF앙상블이 세계초연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현대음악 전문 연주단체인 앙상블 모데른의 단원들이 객원 연주자로 참여했지요.

통영국제음악당에서는 10월 7일과 8일에 걸쳐 신작 다섯 곡이 세계초연되었고, 두 곡이 아시아초연되었습니다. 작곡 부문으로 열린 2021 TIMF아카데미를 위한 작품 공모를 거쳐 위촉작곡가로 선정된 작곡가들의 작품이었고, 그 가운데 첫날 공연을 제가 지난 글에서 소개했었지요. 이틀간 열린 ’TIMF아카데미 콘서트’에서 연주된 여러 작품 가운데 가장 제 마음에 들었던 곡이 바로 ’그랑히팝’이었습니다.

’그랑히팝’은 그러나 힙합 음악의 장르적 느낌이 나는 곡은 아니었습니다. 힙합과 닮은 점을 굳이 찾으려면 찾을 수는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현대음악의 정체성 안에 대중음악적 요소가 숨어 있는 정도였지요. 음악이 “띠용~” 하는 소리로 시작하는 점, 또 어찌 들으면 사람을 놀리는 듯하고 ’톰과 제리’의 한 장면이 떠오를 것 같은 음형이 변형·반복되는 점이 재미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다양한 악기와 연주법을 조합해 만들어 내는 음향적 스펙터클과 통통 튀는 리듬 등이 흥미진진했습니다. 작곡가인 동시에 지휘자이기 때문일까요? 윤한결 선생은 현대음악 맥락에서 ’멋진 소리’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음향적 ’팔레트’를 매우 다채롭게 가진 작곡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날 세계초연된 곡 중 이승환의 ‘<제사> - 고 윤이상 선생의 묘에서’(Rituel… au tombeau d’Isang Yun)는 일단 제목부터 솔깃한 작품이지요. 이승환 선생은 가톨릭교회의 위령 기도가 한국에서 토착화한 연도(煉禱)를 그간 연구해 왔다며 ’제사’라는 작품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즈음, 고 윤이상 선생께서 통영의 바닷가 언덕에 안장되신다는 소식을 접했고, 작품 <제사>가 음악 바깥으로는 떠난 이를 추모하는 성격으로서 선생의 삶을 기리고, 안으로는 우리 상장례음악의 영향과 선생의 작곡기법 등을 응용한 오마주 작품이 될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승환의 ’제사’는 긴 호흡으로 제의적 느낌을 주는 음향적 풍경 사이사이에 드라마틱한 ’장면’이 에피소드처럼 삽입되는 듯한 짜임새였고, 그에 따른 ’드라마투르기’가 꽤 흥미진진했습니다. 마치 고인의 삶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돌아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수빈의 ’옥텟’은 아쉽게도 제가 공연 현장에서 감상하지 못한 작품인데, 그 대신 리허설과 공연 실황 영상을 감상한 소감을 짧게 써보겠습니다.

이 작품은 중세 다성음악에서 정선율(Cantus firmus)을 활용하는 방식을 흉내 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곡에 나온다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귀로 들어서 알아챌 수 없었고, 딱히 이 곡에서 중세음악 느낌이 나지도 않았습니다. 중세 또는 르네상스 시대 작품에 나오는 정선율이 주로 ‘테노르’(tenor) 성부에 숨어 있어서 귀로 듣고 알아채기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일까요.

작곡가는 이 곡이 “만약 현시대에 중세시대 작곡가가 환생한다면 우선 첫 작품은 이렇게 시작하지 않을까 하는 작곡자의 상상에서 시작한 작품”이라 했습니다. 이 작품의 길게 이어지는 음들에서 저는 차라리 한국 전통음악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 곡은 들어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대음악은 어려워요.

2021년 11월 19일 금요일

양영광, 양승원, 박선영, 라재혁의 전통과 현대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연주가 어정쩡하게 멈춰버린 순간, 한 연주자가 동전을 던집니다. 무대 위에 떨어진 동전이 적막을 깨트립니다. 객석에 있던 한 남자가 무대로 올라와 동전을 확인한 다음 주머니에 넣습니다. 무대 위 조명이 그 남자를 비추고, 남자는 객석을 등진 채로 종이 가방에서 과자를 꺼내 봉지를 ‘부욱’ 뜯습니다. 과자를 ‘와구와구’ 먹습니다. 캔 음료를 ‘딸깍’ 따서 ‘후후룩’ 마시고 다시 과자를 먹습니다. 남자는 객석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는, 씩 웃으면서 과자를 ‘와사삭’ 씹습니다. 조명이 꺼집니다.

라재혁 작곡가의 ‘귀머거리의’(taub) 아시아초연이었습니다. 작품 제목에는 취소선이 그어져야 하는데, 그래서 누가 귀머거리라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 알쏭달쏭합니다. 깜깜한 무대 위에 얼굴만 흐릿하게 비추는 조명이 연주자들을 유령처럼 보이게끔 했던 점이 특이했고, 더블베이스 상행 음계로 시작했던 음악 또한 심령현상이라도 일어날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과자 퍼포먼스’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했습니다.

작곡가가 쓴 프로그램 노트는 단 두 문장입니다. “곡이 끝났을 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나요? 우리는 자극을 받고 그 자극은 다른 자극들로 덮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현대음악을 듣고 나면 곧잘 이렇지 않던까요? 어쩌면 라재혁 선생은 새로운 작품이 공연되고 나서 너무 쉽게 잊혀 버리는 것이 속상해서 음악으로 자학 개그를 했던 것일까요?

통영국제음악당에서는 10월 7일과 8일에 걸쳐 신작 다섯 곡이 세계초연, 두 곡이 아시아초연되었습니다. 작곡 부문으로 열린 2021 TIMF아카데미를 위한 작품 공모를 거쳐 위촉작곡가로 선정된 작곡가들의 작품이었지요. 그 일곱 작품이 너무 쉽게 잊힐까 아쉬운 마음에 제 소박한 감상이나마 글로 써봤습니다. 쓰다 보니 길어져서 일단 첫째 날 공연 얘기부터 할게요.

첫째 날인 10월 7일에는 국악기와 서양 악기를 혼용한 작품 위주로 공연되었습니다. 전통과 현대에 관한 작곡가들의 다양한 관점이 흥미롭더군요.

양영광의 소리(Sŏnus)는 객석에서 봤을 때 무대 왼쪽에 장구, 생황, 양금, 대금이 있고 오른쪽에 바이올린, 비올라, 플루트, 호른, 더블베이스가 있고, 무대 뒤에 타악기가 있는 배치가 특이했습니다. 또 한국 전통 악기가 서양 현대음악 어법을 사용했던 것, 귀로 듣기로는 동서양이 딱히 구분되지 않으며 총체적인 덩어리(클러스터)를 형성한 것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작곡가는 “이 모든 소리에 대한 현상이 나만의 공간 안에서 나의 눈과 귀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되는” 환각적 현상으로서 동서양의 융화를 시도했다고 하네요.

양승원의 ‘낙차’(落差)는 여창가객이 현대음악 앙상블과 협연하는 작품으로 여창가곡 우조 이수대엽 ’버들은’을 차용했다고 합니다. 여창가객 박민희 선생이 무대가 아닌 객석 쪽에서 노래하다가, 중간에 무대 위로 올라갔다가, 나중에는 다시 무대 구석으로 물러나 소외되는 과정이 마치 한국 전통문화가 서양 문화에 밀려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듯했으며, 그와 맞아떨어지는 음악의 짜임새가 인상 깊었습니다.

작곡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계절이 변해 봄이 와도 꽃을 피우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피륙을 짜내는 화자의 한탄 섞인 독백은 마치 현대에 시대적 격차를 이겨내지 못하고 […] 시간적인 대립의 격차 속에 여창가객은 정체성을 잃어가고, 주기적으로 변하는 맥락 안에 지속적으로 들려지는 원곡의 조각들은 공명되어 잔향으로 남아 끊임없이 메아리친다.”

박선영의 2018년 작품 ’절반의 고요’는 일종의 대금 협주곡이라 할 수 있는 작품으로 이번이 아시아초연이었습니다. 유홍 선생이 협연한 대금이 전통 연주법과 현대음악 어법을 아우르는 모습을 보여준 반면 나머지 서양 악기는 그냥 현대음악 어법을 사용했는데, 다만 곡 처음에 타악기를 사용한 방식에서 수제천이나 영산회상이 떠올랐습니다. 시조시인 유재영의 현대시조 ’절반의 고요’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네요.

구본우의 ‘보카 키우사와 멜리스마의 노래’(Canti di bocca chiusa e melisma)는 신작이 아닌 기성 작품이었고, 여창가객이 협연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양승원의 신작과 비슷하면서도 느낌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 작품에서 구본우 선생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동서양 음악은 원래 이질적이야. 다른 것은 다른 대로 둬도 괜찮아. 보라고! 그래도 상생은 가능해!”

2021년 7월 13일 화요일

오보이스트 잉고 고리츠키 인터뷰

통영국제음악재단 e-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플로리안 리임 인터뷰, 김원철 옮김


Q. 스위스에서 있었던 한 공연에서 윤이상을 처음 만났고 이후 30여 년을 교류했다고 들었다. 그때 이야기가 궁금하다. 또 윤이상의 음악적 동반자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에 관해 알려달라.

A. 1974년 10월 16일, ‘라디오 베른’ 방송국에서 윤이상 특집 공연이 열렸고 내가 윤이상의 ‘피리’를 연주하게 되었다. 그 전부터 나는 이 곡에 흥미를 느껴 여러 차례 공연했었고, 이날 공연에서 윤이상을 처음 만났다. 불과 3미터쯤 떨어진 곳에 그가 앉아 있어서 무척 떨렸다. 공연이 끝난 뒤 윤이상이 나에게 내 연주에 관해 덕담해 주었고, 이 작품에 관한 내 주된 관심사였던 셈여림에 관해서도 좋게 평가해 주었다. 그는 또한 이 곡의 마지막 부분인 ’느리고, 신비롭게’(langsam, misterioso)에 관해 중요한 말을 했다. 마지막 부분을 내가 연주했던 것보다 더 여린 ‘피아니시모’로 연주하면 좋겠다는 거였다. 작품 해석에 관해 정말로 중요한 말이었다. 윤이상은 이 작품을 초연한 연주자 게오르크 메르바인에게 마지막 부분의 모든 음에 핑거링을 바꿔서 선율과 음색에 변화를 줄 것을 제안했지만(옮긴이 주: 출판된 악보에는 이 대목에 윤이상의 ’오리지널’과 메르바인이 연주한 판본이 나란히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윤이상의 ’피아니시모’ 아이디어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날 이후로 나는 때때로 윤이상이 참석한 공연에서 ’피리’를 연주했고, 그와 함께 독일 국내외에서 투어 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Q. 올해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윤이상의 ‘피리’(1971)와 ‘영상’(1968)을 연주할 예정이다. 두 작품 모두 당신이 윤이상을 만나기 전에 작곡되었는데, 나중에 이들 작품에 관해 윤이상과 어떤 대화를 했나?

A. 사실 많은 말을 나누지는 않았다. 윤이상은 연주자에게 많은 자유를 주었고, 그의 작품에 관해서는 서로 다른 많은 해석이 존재하며, 특이 ’피리’가 그렇다. 지금에 와서는 내가 작품의 특정 프레이즈나 효과에 관해 더 많이 질문하지 않았던 일을 후회하지만, 윤이상 생전에 우리는 서로를 직관적으로 매우 잘 이해하는 사이였고 악보에 있는 지시는 매우 명확했다. ’피리’의 마지막 부분에 관해서는 앞서 이미 얘기했다. 다른 얘기를 더 하자면, 이 작품의 악보는 4쪽으로 되어 있고, 그래서 연주를 하려면 악보를 두 차례 넘겨야 한다. 윤이상은 그러지 말라고 했다. 악보를 넘기는 순간에 음악의 긴장감을 잃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페이지를 넘길 필요가 없게끔 악보를 손보았고, 이것을 내 제자들에게도 전수하고 있다.

’영상’에서 윤이상은 비브라토의 형태를 계속 바꿔가면서 연주하게끔 했으며 어떤 지점에서는 모든 성부에 그런 걸 요구한다. 이를테면 논비브라토(non vibrato), 조금 약한 비브라토(poco vibrato), 그냥 비브라토, 조금 센 비브라토(molto vibrato), 조금씩 세지는 비브라토(vibrato poco a poco crescente) 등으로 비브라토의 양상이 변하면서 음색이 매우 다채로워진다. 내가 알기로 윤이상은 이런 기법을 다른 작품에서도 일관되게 사용하지는 않았는데, 내 생각에 이것은 고분 벽화의 압도적인 색채감과 관련 있는 것 같다. 이 곡은 윤이상이 강서고분벽화를 보고 나서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한 작품이며, 나 또한 그 벽화를 직접 보았다. 이 작품의 마디 270부터 시작하는 마지막 부분을 리허설할 때 있었던 일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 이 대목을 작곡할 때 윤이상은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이 마지막 대목에서 리듬과 선율은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오보에의 질문하는 글리산도와 함께 작품이 끝난다.

Q. 작품을 어떻게 익혔는지 궁금하다. 당신은 ‘윤이상 솔로이스트 베를린’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그래서 이 작품을 여러 번 연주했을 것 같다. 작품에 대한 이해가 처음과 달라진 점이 있나?

A. ’영상’은 성부 넷이 지극히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매우 복잡한 작품이다. 이 괴물 같은 작품을 어떻게 연주해야 할까.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정해져 있다. 당연히 모든 연주자는 자신의 파트를 충분히 이해한 뒤에 합주에 들어가야 한다. 연주자 각자에게 기술적으로 도전이 되는 곡이지만, 그것은 아름다운 도전이기도 하다. 그리고 첫 번째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거다. 당신이 외국에 처음 갔다고 생각해 보라. 조금씩 당신은 그 나라와 거기 사는 사람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연주의 합을 맞춰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전에 고분 벽화에 그려진 네 마리 신수들의 움직임에 관해 알아야 한다. 그래야 붉은 선 넷이 얽히는 궤적을 발견하고 따라갈 수 있게 된다. 그제야 이 작품을 이해하고 연주할 수 있게 된다. 처음에는 복잡해 보이는 이 작품의 위대한 단순성을 알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Q. 한국 전통악기인 피리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나? 그 소리를 어떻게 느꼈는지 궁금하다. 또 윤이상의 ‘피리’ 악보 첫 페이지에는 ’더블 트릴’을 비롯한 실험적인 연주법에 관한 설명이 있다. 이 작품에서 오보에 연주자에게 요구하는 가장 실험적인 프에이즈나 테크닉에 관해, 그리고 그에 대한 생각을 알려 달라.

A. 물론 피리 소리를 들어 보았고, 악기를 하나 갖고 있기도 하다. 오보에로는 낼 수 없는 깊고 그윽한 소리를 특히 좋아한다. ’피리’는 어쩌면 윤이상의 진심이 가장 잘 담긴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진심은 무엇보다 동서양 음악이 상생하게끔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윤이상은 ’피리’로 그것을 완벽하게 성공했다.

이 곡은 아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양음악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형식을 이루는 벽돌들은 동양적인 성격을 보인다. 끝도 없이 길게 이어지는 듯한 음들이 주로 그러하며, 윤이상은 이것을 ‘주요음’이라 불렀다. 윤이상 음악에 관해 토론하는 학술대회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하자면, 윤이상 음악의 이런 길게 이어지는 음에는 리듬이 없다고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 사람은 리듬의 실제 의미를 전혀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리듬이라는 말의 뿌리를 따져 보면 고대 그리스어가 나온다. 그 당시 리듬은 움직임을 뜻했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했던 말 ’모든 것은 흐른다’(panta rhei)를 아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것이 리듬의 어원이다. 그래서 윤이상 음악의 길게 이어지는 음이 그 음을 따라 흐르는 공기의 움직임이라면, 그 음에도 리듬은 있고, 무엇보다 그 움직임 자체가 리듬이다. 내 생각에, 특히 ‘피리’ 시작 부분에서 끝없이 길게 이어지는 음들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매혹적이며, 작품 전체에서 가장 기본이 된다. 내가 이 얘기를 윤이상에게 했을 때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피리’에 나오는 음렬은 명백히 서양음악의 12음기법이며, 이것이 음형을 지배하는 법칙이 된다. 중간 부분의 장식음들은 그 뿌리가 뒤섞여 있다. 가볍게 유동하는 음과 짧은 글리산도는 동양적인 어법이고, 더블 트릴은 현대 서양의 오보에로만 가능한 기법이다. 이 곡의 첫 세 음이 마지막에 가서 음향적 무(無)로 가라앉는 것은 동서양 음악 세계의 통합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윤이상이 말로 설명한 의도와도 맞아떨어진다.

Q. 윤이상의 ‘이마주’(영상)와 드뷔시의 ’이마주’를 같은 공연에서 들어볼 수 있다는 점이 기대된다. 이 두 작품을 나란히 연주함으로써 어떤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나?

A. 두 가지 ’이마주’를 한 공연에서 듣는 일은 그 자체로 참신한 생각이며, 두 작품은 완전히 다른 특징을 보인다. 윤이상은 창작력이 절정에 올랐을 때 고분 벽화의 신수들을 묘사한 작품을 남겼고, 자신의 목숨을 그 대가로 치를 뻔했다. 드뷔시의 ’이마주’는 작곡가의 피아노 작품들이 발전한 과정을 보여준다. 윤이상의 초기 작품, 이를테면 초기 가곡들을 아는 사람은 윤이상이 자신의 음악 어법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드뷔시의 회화적 음악 어법을 최소한 건드리기는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Q. 윤이상은 서양 악기로 한국적 정서를 표현했다. 그렇다면 연주자는 한국적인 정서와 뉘앙스를 더 잘 표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이와 관련한 경험이 있다면 알려 달라.

A. 이것은 어렵지만 필요한 질문이므로 가상의 예를 들어서 답해 보겠다. 어떤 연주자가, 여기서는 오보이스트가 바흐의 소나타나 파르티타를 연주하고자 한다면, 그 연주자는 바흐가 다른 악기를 위해 쓴 곡들 또한 익혀야 한다. 그 연주자가 윤이상 작품, 아마도 오보에 독주를 위한 ’피리’를 연주하고자 한다면, 그 연주자는 대체로 비슷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윤이상이 다른 악기를 위해 쓴 곡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며, 윤이상 작품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는 한국 전통음악 또한 공부해야 한다. 연주자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피리’의 악보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현대 오보에로 그것을 기술적·정서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어떤 경우에도 한국의 전통 피리 소리를 그냥 베끼려는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 음악은 작곡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이미 다른 차원에 들어섰고, 연주자는 지성과 영성을 다해 노력해야만 그곳에 다다를 수 있다. 이전 단계를 답습해서는 그곳에 다다를 수 없다. 이미 있던 소재로 새로운 차원을 형성하는 일은 매우 신나는 일이며, ’피리’는 어떤 연주자가 어떤 노력을 기울이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2021년 4월 16일 금요일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 인어공주 사건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김시훈=통영국제음악재단

새벽 1시쯤 되었을 때 잠결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긴급 상황이 발생했으니 요즘 하는 말로 ’단톡방’을 확인하라더군요. 전화하신 직장 동료와 저, 그리고 한 외국인 연주자와 그 연주자의 매니저가 있는 대화방이었습니다.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 이륙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코로나-19 검사 결과지를 잃어버려서 출국 수속을 못 하고 있다더군요. 다행히 연주자는 검사 결과의 사본을 받아 무사히 출국할 수 있었지만 출국 게이트가 닫히기 직전이라 마음을 졸여야 했습니다.

그 연주자는 첼리스트 카미유 토마였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파질 사이 첼로 협주곡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를 아시아 초연했고, 피아니스트 박종해 협연으로 리사이틀에도 출연했었지요. 코로나-19로 유럽에 봉쇄령이 떨어졌을 때 집 지붕 위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유튜브 영상으로 화제가 되었던 스타 연주자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통영국제음악제에 출연하게 된 소식이 프랑스의 TV 프로그램에 나왔다고 하네요. 시청자가 5백만 명쯤 된다는 모양입니다.

카미유 토마는 입국 직후 격리 생활부터 시작해 별별 고생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압권은 값비싼 첼로의 통관 서류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던 일입니다. 그 첼로는 최근 일본음악재단에서 후원한 악기였고 일본 세관에서 통관 서류를 발급했는데, 알고 보니 그 서류는 일본과 프랑스 사이를 오가는 것만 허락된 것이었다나 봅니다. 그래서 원칙대로라면 통영에서 일본으로 가서 필요한 서류를 재발급받고, 그 과정에서 일본 입국에 따른 2주 격리를 거쳐야 했습니다. 문제는 통영 공연 직후에 프랑스에서 다른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영국제음악재단과 일본음악재단, 독일에 있는 기획사, 그리고 프랑스에 있는 연주자 가족까지 4개국의 여러 사람이 수많은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상황을 공유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한국에서 출국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가 가장 먼저 해결됐고, 일본 세관을 잘 설득한 끝에 긴급 우편으로 추가 통관 서류를 서울의 호텔에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카미유 토마는 항공 일정을 여러 차례 변경했고, 코로나-19 검사를 며칠 만에 두 차례 받아야 했습니다. 코로나-19 검사 결과는 출국 기준 72시간 이내에 발급된 것이어야 하거든요.

이번 통영국제음악제 때에도 많은 일이 있었고, 무엇보다 요즘 같은 시절에 이런 행사를 안전하게 운영하기 위해 큰 노력과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미 언론에 보도되었으니 이 글에서는 그 와중에 웃겼던 에피소드를 두 개만 더 소개할까 합니다.

카미유 토마는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지정된 격리장소로 이동하는 일부터 시작해 택시를 몇 차례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택시를 예약하신 분이 카미유 토마(Camille Thomas) 이름이 익숙지 않아서 ‘카유미 토마’로 여러 차례 헷갈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택시 회사에서 ’카유미’ 씨가 일본 사람인 줄 알고 이렇게 자랑하더라네요. “우리 기사님 중에 일본어 잘하시는 분 있어요!”

개막공연 때 있었던 일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크리스티안 바스케스가 지휘하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 위해 분장실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통영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닮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요. 드레스 자락이 그물처럼 되어 있어서 마치 인어의 비늘이 푸른 파도와 더불어 반짝이는 듯했는데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그물’에 하이힐 뒷굽이 끼어서 제대로 걷지를 못하더라고요!

다행히 김봄소리는 무대에 입장할 때 발을 앞으로 차듯이 걷는 법을 익혀서 멀쩡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무대 뒤에서는 달랐습니다. 분장실 입구에서 처음 몇 걸음을 걷는 동안에 마치 시트콤처럼 웃기고 당황스러운 상황이 벌어졌지요. 근처에 있던 여성 동료 한 분이 재빨리 달려가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렸습니다. 그 와중에 드레스 자락이 위로 올라간 모습이 마치 인어 꼬리가 파닥이는 듯했습니다.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게 아니었던지, 드레스 자락을 움켜잡으신 분이 아주 찰진 농담을 시전했습니다.

“이대로 인어공주처럼 걸으세요!”

2020년 1월 13일 월요일

2020 통영국제음악제, 나에게 맞는 공연은?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통영국제음악제 공식 공연 중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글을 올해에도 한 번 써봤습니다. 이런 시도를 하려면 관객과 작품을 ’분류’해야 하므로, 그 과정에서 편견이 섞일 수밖에 없음을 헤아려 주세요.

아래 문항을 읽고 자신에게 해당하는 곳에 표시하세요. 그리고 공연마다 해당 사항이 있는지 확인하시면 자신에게 맞는 공연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가.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본 일이 한 번도 없다.
나. 베토벤 교향곡 전집 음반을 2종류 이상 가지고 있다.
다. 가사 대역본을 보면서 외국어 노래 가사를 따라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라. 소나타 형식에 관해 알고 있다.
마.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 시대 악기 및 연주법이 현대와 어떻게 다른지 알고 있다.
바. 스트라빈스키 발레 음악이 듣기 좋다.
사. 현대음악에 관심이 있거나 윤이상 음악 감상에 도전해 볼 생각이 있다.

  1. 개막공연 -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 가나라바사
    누구나 아무 편견 없이 듣기를 권하는 공연.
  2. 오페라 ‘사티리콘’: 가나바사
    편하게 영화 한 편 본다고 생각하세요. 현대음악이라고 겁낼 필요 없어요.
  3. 프라하 필하모니아 & 루돌프 부흐빈더: 가나라마사
    거장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협주곡을 협연 및 지휘합니다.
  4.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 II: 가나바사
    초심자라도 겁내지 말고 도전해 보세요.
  5. 나이트 스튜디오 I - 라인홀트 프리드리히: 가나바
    트럼펫의 거장이 라벨, 거슈윈, 에네스쿠, 셰드린 등을 연주합니다.
  6. 나이트 스튜디오 II - 임선혜 & 김다솔: 가나다
    스타 소프라노 임선혜가 노래하는 20세기 한국 작곡가의 노래
  7. 마티네 콘서트 - 루돌프 부흐빈더 피아노 리사이틀: 가나라마
    거장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베토벤 소나타 ‘템페스트’와 ’발트슈타인’ 등.
  8. 페테르 외트뵈시의 카르트 블랑슈: 바사
    세계 정상급 현대음악 작곡가 겸 지휘자가 이끄는 프라하 필하모니아의 현대음악과 낭만음악
  9. 디 디 브릿지워터: 가
    재즈와 블루스의 거장 디디 브릿지워터의 통연 단독 공연.
  10. 크레메라타 발티카 체임버 오케스트라: 나라바사
    선우예권과 라인홀트 프리드리히가 협연하는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 등.
  11. 프라하 필하모니아: 가나라바사
    슈베르트와 윤이상의 갈망이 공명하는 음악. 스타 첼리스트 옌스 페터 마인츠 협연.
  12. 나이트 스튜디오 III - 모딜리아니 콰르텟: 나라바사
    세계 정상급 현악사중주단이 연주하는 베토벤, 라벨, 그리고 윤이상.
  13. 나이트 스튜디오 IV - 스레드: 바사
    베를린필 더블베이스 수석 매슈 맥도널드의 연주와 첨단 테크놀로지가 어우러지는 공연.
  14. 클랑포룸 빈: 사
    현대음악의 거장이 지휘하는 세계 정상급 현대음악 앙상블의 진은숙, 윤이상, 외트뵈시.
  15. 모딜리아니 콰르텟 II: 나라바사
    모딜리아니 콰르텟과 비올리스트 이화윤, 첼리스트 박진영이 협연하는 차이콥스키 현악육중주 ‘피렌체의 추억’
  16. 나이트 스튜디오 V - 낸시 저우 바이올린 리사이틀: 나라바사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1위 입상자 낸시 저우의 멘델스존, 라벨, 생상스, 윤이상.
  17. 나이트 스튜디오 VI - 김다솔 피아노 리사이틀: 나라
    스타 피아니스트 김다솔이 들려주는 슈베르트 최후의 걸작 피아노 소나타 D. 959와 D. 960
  18. 탄둔의 붓다 수난곡: 가나다바사
    중국을 대표하는 작곡가 탄둔의 대작. 현대곡이지만 겁낼 필요 없어요.
  19. 세종솔로이스츠: 나라바사
    멘델스존 팔중주, 쇤베르크 초기 조성음악의 걸작 ‘정화된 밤’, 그리고 윤이상의 영상(Images)
  20. 아시아 작곡가 쇼케이스: 사
    본격 현대음악을 들어보고 싶은 분이라면 누구나 환영!
  21. 야노스카 앙상블: 가
    집시 음악, 탱고, 재즈를 넘나드는 음악을 엄청난 명인기로 즐길 수 있는 공연. 흥이 있는 분들은 오세요!
  22. 와이너리 콘서트 - 모차르트 나이트: 가나라
    와인과 함께 편한 마음으로 즐기는 모차르트.
  23. 폐막공연 - 카르미나 부라나: 가나다바
    ’카르미나 부라나’를 모르시는 분은 ’오 포르투나’를 찾아서 들어보세요. 이미 아는 곡입니다!

2019년 12월 13일 금요일

2019 올해의 공연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2019년이 얼마 남지 않은 오늘, 한 해를 돌아보며 기억에 남은 공연을 되새겨 봅니다. 저는 자칭 타칭 바그네리안, 즉 바그너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올해 통영국제음악제 폐막공연이었던 ‘발퀴레’ 1막이 다른 어떤 공연보다도 제게 멋진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알렉산더 리브라이히가 지휘한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의 훌륭한 연주와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의 탁월한 음향이 만나 압도적인 ‘바그너 사운드’를 들려준 공연이었지요. ’지크문트’ 역 테너 김석철, ‘지클린데’ 역 소프라노 서선영, ‘훈딩’ 역 베이스 전승현 선생의 노래 또한 대단했습니다.

통영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있었던 공연으로, 지난 9월 마르쿠스 슈텐츠가 지휘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파르지팔’ 모음곡도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바그너 오페라 ‘파르지팔’을 발췌 연주하면 보통 관현악곡이 되거나 또는 ’구르네만츠’ 역 베이스 정도가 나오는 게 보통인데, 이날 공연에서는 ’암포르타스’의 고통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구성이 독특했습니다.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 선생의 카리스마가 돋보이기도 했지요.

통영국제음악제에서 미하엘 잔덜링이 지휘한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 그리고 5월 17일 부산에서 최수열이 지휘한 부산시립교향악단이 윤이상 ’화염 속의 천사’와 ’에필로그’를 연주했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통영 공연에서는 작은 소리까지 알알이 살아 움직이는 ’음향복합체’가 생생하게 전달되었다면, 부산 공연에서는 소리를 섬세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공연장 음향에 맞서 무시무시한 온도로 타오르던 음향적 ’화염’이 훌륭했습니다.

또 최수열-부산시향 공연에서는 ’에필로그’에서 서양음악 전문 소프라노 대신에 국악 전문 가수를 기용한 아이디어가 매우 훌륭했습니다. 음악학자 이경분 선생은 ’에필로그’를 두고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곡소리의 ‘윤이상적 버전’”이라 평한 바 있는데, 이날 공연에서 겉소리와 속소리를 오가는 박민희 선생의 창법이 ’곡소리’를 더욱 뚜렷이 살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박민희 선생은 2018 통영국제음악제 음악극 ’귀향’에서 여창가곡을 불렀던 바로 그분이지요.

지난 10월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티에리 피셔가 지휘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공연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날 불레즈 ‘노타시옹’을 실연으로 들어본 것이 가장 좋았고, 같은 곡을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장이브 티보데가 협연한 생상스 피아노 협주곡 5번도 훌륭했고, 생상스 교향곡 3번에서는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압권이었습니다. 제가 롯데콘서트홀에서 가장 부러운 것이 바로 파이프오르간이에요. 윤이상 곡 가운데 파이프오르간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1971년 작품 ’차원’(Dimensionen)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올해 통영에서 있었던 공연 가운데 가장 열광적인 관심을 받았던 것은 ‘조성진과 친구들’ 시리즈였을 겁니다. 저는 맡은 일 때문에 벨체아 콰르텟,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 협연 공연과 조성진 독주회는 들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조성진이 통영페스티벌오케스라 지휘와 협연을 한꺼번에 하는 공연으로 화제가 되었던 마지막 공연만큼은 운 좋게 제대로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본 공연뿐 아니라 리허설까지 챙겨볼 수 있었지요.

조성진이 오케스트라 소리를 다듬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도 대단한 행운이었습니다. 통영에서 있었던 첫 리허설 때에는 조성진의 지휘 테크닉이 생각 이상으로 훌륭해서 깜짝 놀랐다면, 다음날부터는 세부를 집요하게 다듬어 나가는 과정에 감탄했습니다. ‘지휘자 조성진’은 모차르트는 물론이고 쇼팽 협주곡에서도 생각 이상으로 ’폴리포닉한’ 소리를 이끌어 내더군요. 저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케스트라에서 이렇게 입체적인 소리를 뽑아냈으면 ‘연주자가 지휘도 하는’ 수준은 넘어섰다고 봐야 할 듯”하다고요.

그밖에 필리프 헤레베허가 지휘한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의 몬테베르디 ’성모 마리아의 저녁기도’와 야나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에서 보았던 파리 오케스트라의 말러 ’대지의 노래’도 생각납니다. 지면 관계상 여기서 줄일게요.

2019년 11월 15일 금요일

올해의 라이벌 연주자: 임윤찬 vs. 박경선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2019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1차 본선 경연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하던 한 참가자가, 곡이 구조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하는 대목 첫 마디에서 엉뚱한 선율을 연주하고는, 잠시 멈칫했다가 티 나지 않게 상황을 수습하고 부드럽게 연주를 이어갔습니다.

저는 이때 백스테이지에서 악보를 보면서 연주를 따라가며 곡의 시작과 끝을 확인하고, 실황 중계 자막이 제때 나오는지 확인하는 동시에 곡 진행 상황에 따라 직원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무전으로 알리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실수를 저지른 참가자가 악장 사이에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모습, 그리고 하이든 소나타를 끝내고 다른 곡을 연주하기 전에 다시 눈물을 닦는 모습까지 실황 중계 화면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그 참가자가 연주를 마치고 나올 때 격려의 한마디를 해주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울한 얼굴을 한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반전이 일어난 것은 심사 결과가 나왔을 때였습니다. 2차 본선 진출자 명단에 그 참가자가 있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그 참가자의 연주가 실수를 만회할 만큼 훌륭했다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결과 발표장에 나타나지도 않았던 그 사람에게 제 동료들이 재빨리 연락해서 2차 본선 준비를 할 수 있게끔 했습니다.

그 사람은 끝내 결선에 진출했고, 2위에 입상하는 대역전극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참가자의 이름은 박경선입니다.

1위를 차지한 임윤찬은 처음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결선 때에는 박경선과 접전 끝에 우승했을 뿐아니라 젊고 유망한 연주자에게 주는 박성용특별상과 관객 투표로 주는 유네스코 음악 창의도시 특별상까지 휩쓸었습니다. 그런데 임윤찬은 만 15세로 중학교에 해당하는 예원학교 3학년이라고 하네요. 역대 최연소 우승자이고,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규정상 나이 제한을 불과 몇 개월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고도 합니다.

임윤찬의 우승을 보면서 저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을 떠올렸습니다. 조성진이 하마마쓰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을 때 나이가 15살이었지요.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는 세계적인 스타 피아니스트가 되어 있습니다. 조성진은 파리 음악원에서 미셸 베로프를 사사했고, 그 미셸 베로프가 2019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심사위원장이었다는 대목도 흥미롭습니다.

저는 하마마쓰 콩쿠르에 우승한 15살 조성진이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협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올해에는 15살 임윤찬이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것을 보았지요. 두 사람의 연주 스타일은 달랐지만, 15살 나이를 믿기 어려운 대단한 실력을 보여준 점은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10년 전 15살 조성진의 연주를 평가한 제 글을 올해 임윤찬의 연주에 대해서도 그대로 쓸 수 있을 듯합니다:

“조성진이 천재인 까닭은 자연스러운 프레이징과 루바토, 세련된 셈여림 따위로 음악을 다스릴 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품 구조와 흐름을 이해하고 음 하나하나가 그 흐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판단할 줄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테크닉만 앞세우면 기계처럼 딱딱해지게 마련이고,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 루바토를 써 봐야 유치해질 뿐이다. 그러나 조성진은 음악에 끌려가지 않고 다스릴 줄 아는 경지에 벌써 올랐다.”

그래서 기대됩니다. 10여 년 뒤의 임윤찬은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요?

올해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는 결선 진출자 전원이 한국인이었다는 점이 예년과 달랐습니다. 국제 콩쿠르인데도 한국인이 상위권을 ’싹쓸이’해버리니 조금 난처한 것도 솔직한 마음인데요, 이와 관련해 미셸 베로프 심사위원장이 시상식에서 한 말이 멋져서 인용합니다.

“올해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는 154명이 지원했으며 국적은 다양했습니다. 심사위원 가운데 2명이 한국인이고, 7명이 외국인입니다. 뜻밖의 결과는 오히려 모든 심사위원이 공정하고 독립적으로 심사했음을, 그리고 그 결과 가장 뛰어난 참가자가 입상하게 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는 참가자 가운데 심사위원의 제자로 2년 이내에 3개월 이상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해당 심사위원은 해당 참가자를 채점할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올해 본선 진출자 가운데 해당자가 2명 있었는데, 둘 다 결선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2019년 6월 28일 금요일

조성진 인터뷰 (2019년)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발간하는 『Grand Wing』 2019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2019년 5월 6일, 독일 베를린 현지 시각 오전 10시.

Q. 예전에 통영국제음악당에서 협주곡도 했고 리사이틀도 했다. 편성에 따라서 느껴지는 홀 음향에 차이가 있었나?

A. 2014년에 협주곡을, 2017년에 리사이틀을 했다. 그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고, 그동안 홀을 보는 관점들이 달라졌기 때문에 자신 있게 답하기는 어렵지만, 딱히 차이를 느끼지는 못했고 두 번 다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향이 좋지 않은 공연장에서 협주곡을 하면 오케스트라 소리가 섬세하게 들리지 않아서 협연에 어려움이 있는데, 통영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했을 때에는 그런 문제가 전혀 없었고, 관객이 찼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리사이틀 때에는 음향뿐 아니라 조명 또한 매우 편안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Q. 통영 공연 프로그램 중에 알반 베르크 소나타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 이름에 지레 겁을 먹을 것 같다. 이 곡은 어떤 매력이 있는 곡인가?

A. 피아노 소나타 Op. 1은 베르크가 젊었을 때 쓴 곡으로, Op. 1(작품번호 1번)이 이렇게 걸작이라는 것이 신기하고, 내 생각에 모든 Op. 1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 같다. 리사이틀 오프닝 곡으로도 좋은 것 같고, 무게감 있는 여러 곡과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 이번에 연주할 리스트 소나타와도 어울리고, 조성도 b단조로 같다. 얼핏 무조음악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조성이 있고, 전통적이고 낭만주의적인 면과 현대적인 면이 조화를 이루는 곡이다. 악보를 보면서 들어보면 이 곡이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더 잘 이해되고, 음악을 들을수록 신비롭고 오묘한 느낌이 든다.

Q. 이 곡의 음반을 들어보면, 악보에 있는 도돌이표를 지키는 연주자가 있고 그냥 생략하는 연주자가 있다.

A. 당연히 지켜야 한다.

Q. 이 곡을 연주할 때 악보를 정확하게 소리로 재현한다는 느낌을 주는 연주자가 있는가 하면, 곳곳에서 악보에 없는 루바토를 사용해서 낭만주의적인 느낌을 좀 더 살리는 연주자가 있다.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나?

A. 베르크는 악보에 세세한 지시를 매우 많이 해놨다. 일단 그걸 모두 살리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막상 무대 위에 오르면 '내 느낌'을 살리는 일도 중요해지는 것 같다. 미츠코 우치다의 연주가 그런 점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Q. 이 곡의 클라이맥스라 할 만한 곳에서, 포르테가 네 겹으로 붙어 있고, 그걸 예비하는 과정에서 크레셴도뿐 아니라 제법 긴 호흡으로 아첼레란도가 붙어 있다. 크레셴도의 다이내믹스를 극대화하는 것과 아첼레란도의 속도감을 극대화하는 것,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A. 브람스 교향곡을 들어보면, 지휘자에 따라서 클라이맥스로 오를 때 템포를 늦춰서 거대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베르크 소나타에서는 반대로 템포를 몰아붙이도록 지시했고, 그래서 조금 신경질적인 느낌을 준다. 클라이맥스의 다이내믹스도 중요하지만, 이 곡에서는 클라이맥스 직전까지 템포를 조이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2년 전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유튜브 공연 영상을 봤는데, 악보에 있는 아주 작은 지시까지 완벽하게 지키면서 암보로 연주해서 깜짝 놀랐다. 어떻게 하면 악보의 아주 작은 지시까지 싹 다 외울 수 있나?

A. 딱히 비결이 있지는 않다. 다만, 같은 곡을 여러 번 연주하다 보면 루바토를 썼던 곳에서 다음번에는 더한 루바토를 쓰게 되거나 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악보를 본다. 무대에 나가기 전에 손가락을 푸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나는 연주할 곡이 처음 접하는 곡이라는 생각으로 악보를 다시 보는 편이다. 첼리비다케가 그렇게 한다는 인터뷰를 본 일이 있는데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공연이 끝나고 악보를 보면서 연주를 되짚기도 한다.

Q. 이제까지 쇼팽을 너무 많이 연주해서, 이제는 다른 곡을 더 많이 하려는 것 같다.

A. 쇼팽 콩쿠르 우승자 출신이다 보니 쇼팽을 연주해 달라는 요청이 계속 있었고 그 그대에 부응해야 했는데, 2019년부터는 그런 요청을 그다지 받지 않게 되었다. 의식적으로 공연 프로그램에 쇼팽을 빼려는 것은 아니지만, 리사이틀에 쇼팽이 들어가면 다른 곡들과 어울리게 프로그램을 짜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빼버리는 편이 프로그램 구성에 더 자유로워지는 장점이 있다. 또 크리스티안 지메르만도 쇼팽 콩쿠르에 입상했지만 딱히 쇼팽 스페셜리스트로 불리지는 않는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또 시마노프스키, 야나체크, 메트너처럼 음악가들 사이에서 유명하지만 대중에게 덜 알려진 곡을 관객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다.

Q. 모차르트 협주곡 20번 d단조 음반이 작년에 나왔다. 음반 녹음 과정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A. 체력적으로 힘든 녹음이었다. 오케스트라와 스케줄을 조정하다 보니 녹음할 시간이 하루 반나절밖에 안 나와서 종일 녹음을 해야 했다. 장소는 바덴바덴 페스티벌하우스였고, 피아노는 세 가지 선택지 중 오케스트라 음색과 가장 잘 맞는 것을 골랐다.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조금 '고전적인' 소리를 내는 악단이고, 다른 악단이 흔히 A=442Hz로 조율하는 것과 달리 441Hz로 하더라. (편집자주: 현대 오케스트라는 심한 경우 445Hz까지 높이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고른 것은 조금 옛날 피아노, 아주 옛날은 아니지만 15년~20년 정도 된 스타인웨이 피아노였던 것 같다. 그런데 낡은 피아노라 피아노의 터치감이 들쑥날쑥해서 원하는 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오케스트라는 매우 훌륭했고, 모차르트 협주곡을 수없이 연주해 봤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휘자 야니크 네제세갱은 1~2년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인데, 매사에 긍정적이고, 배려심 많고, 내가 원하는 것을 빠르고 정확하게 감지하는 지휘자다. 이번 음반이 내가 이제까지 녹음한 것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든다.

Q.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도 이 곡을 연주했다. 그때는 악보에 있는 음만 연주했는데, 이번 음반에서는 2악장에서 악보에 없는 장식음을 제법 많이 썼고, 2년 전에 통영에서 모차르트 소나타 연주했을 때도 장식음을 썼다. 모차르트 당시의 연주 관습을 고려했다는 얘긴데, 작곡 당시의 관습을 어디까지 살리느냐 하는 건 연주자마다 판단을 내려야 하는 문제인 것 같다. 음반 녹음 때 장식음을 즉흥적으로 연주했나, 아니면 음 하나까지 사전에 계획했나?

A. 미리 계획하지만 연주할 때마다 상황에 맞게 변화를 준다.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피아노의 상태이고, 그래서 필라델피아에서 공연했을 때는 음반 녹음 때와는 조금 다른 장식음을 썼다. 예를 들어 스타카토 소리가 예쁘게 나지 않으면 그 대신 스케일이나 트릴을 쓰는 식이다.

Q. 오케스트라 투티가 나올 때는 오블리가토 피아노를 생략하고 솔로만 연주했다. 그게 필요 없다고 생각한 이유가 뭔가? 사용한 악기가 모차르트 시대 피아노가 아니었던 것도 이유가 될까?

A. 그리고리 소콜로프 같은 사람은 오블리가토 피아노까지 다 하던데, 투티에서 오케스트라만 소리내는 게 내 귀에는 더 좋게 들린다. 모차르트 시대 피아노로 협주곡을 연주하는 시도는 아직 한 번도 안 해봤지만, 그건 좀 다를지도 모르겠다.

Q. 통영에서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오케스트라 지휘까지 할 예정이다.

A. 지휘라고 하기는 좀 민망하다. 이번에 처음 해보는 시도인데, 특히 쇼팽 협주곡에서 내가 원하는 오케스트라 소리를 직접 만들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돈 크레머가 창단한 악단인 '크레메라타 발티카'와 쇼팽 협주곡 1, 2번을 협연했을 때, 내가 지휘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휘자 없이 공연했었고, 그때 가능성을 처음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하셨으면 좋겠다.

Q. 본격적으로 지휘자가 될 생각이 있는 건 아닌 건가?

A. 그런 생각은 전혀 없다. 협주곡 할 때 조금 해보는 정도. 아니면 서곡이나 짧은 교향곡 정도는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지휘자로 악단을 맡거나 기획사에서 지휘자로 매니지먼트를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Q. 파리에 살다가 베를린으로 옮겼다. 파리와 견주면 베를린은 연주자로 살기에 어떤 장단점이 있나?

A. 파리가 문화 전반적으로 축복받은 곳이라면, 베를린은 음악에 더 집중된 곳인 듯하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외에도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베를린 도이체 심포니 오케스트라,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등 명문 악단이 베를린에는 여럿 있고, 연주 여행을 갔다 돌아와서 그날 열리는 공연을 찾아보면 항상 좋은 게 있다. 음악을 빼고 나면 베를린은, 최근에 사람이 늘었다고는 해도 아직 파리보다 더 한적한 곳이다. 공기도 파리보다 좋다. 날씨는 별로라서, 겨울에는 다른 곳으로 연주하러 다니는 게 낫다.

Q. 음반 녹음이나 그밖에 국내 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계획이 있다면?

A. 음반은 6월과 10월에 나눠서 알반 베르크 소나타와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 리스트 소나타를 녹음할 예정이고 내년 봄에 발매될 것 같다. 베르크 곡이 포함된 제안을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받아준 것이 놀랍고 기쁘다. 1월에 마티아스 괴르네와 함께 바그너 베젠동크 가곡집과 한스 피츠너 가곡 중 일부를 녹음했고, 7월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가곡과 한스 피츠너 추가 녹음, 슈베르트 '하프 연주자의 노래' 연작 녹음이 예정되어 있다.

Q. 통영 관객에게 한마디 해달라.

A. 공연 제안을 받아서 기뻤고, 통영에서 거의 일주일을 보낼 수 있어서 기대된다.

2019년 4월 26일 금요일

기돈 크레머의 잃어버린 시간을 위한 전주곡

미에치스와프 바인베르크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훌륭한 동료이자 벗이었으며,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바인베르크가 첼로 곡으로 썼던 24개의 전주곡을 바이올린곡으로 편곡하는 일을 해오면서, 나는 이 전주곡들에 사진을 결합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2017년 6월, 나는 리투아니아의 탁월한 사진가 안타나스 수트쿠스의 작품에 마음을 빼앗겼다. 우리는 빌뉴스에서 만났고, 기쁘게도 쓰는 말이 같았다. 우리는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바인베르크와 수트쿠스라는 두 인물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둘을 엮을 때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위대한 예술작품은 물론 시간을 초월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인베르크의 음악(여기서는 첼로를 위한 24개의 전주곡)과 수트쿠스의 강력한 이미지들은 같은 시기, 즉 1960년대에 창작되었다.

두 예술가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지만, 이 프로젝트는 두 가지 예술이 한 가지 인생 경험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들의 소리와 영상은 소비에트 연방 시대를 살았던 모두에게 어떤 '유토피아' 관념이 있던 세계를 반영한다.

나는 미에치스와프 바인베르크 음악을 나이 들어서야 알게 되어 곧바로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의 전주곡들은 정서적 감동이 있는 '소리 그림'처럼 느껴지고, 안타나스 수트쿠스의 표현력 넘치는 사진들은 이 프로젝트에 독특한 역동성을 불러온다.

이것은 다층적 이야기의 영역이다. 나의 바이올린 소리를 더한 의도는 시청자들이 '잃어버린 세계'에 진입하게끔 하고, 그래서 살아있는 인류의 관점을 늘리는 것이다.

기돈 크레머 글 · 김원철 옮김.

원문 출처:
https://www.bozar.be/en/magazine/135364-preludes-to-a-lost-time

2019년 4월 16일 화요일

2019 통영국제음악제 막전막후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바그너 날씨네!"(It's Wagner weather!)

플로리안 리임 통영국제음악재단 대표님 말씀입니다. 통영국제음악제 폐막공연이 열리기 한 시간쯤 전부터 천둥 번개가 쳤지요. 콘서트 형식으로 연주된 바그너 오페라 '발퀴레' 1막에 걸맞은 날씨였고, 꽤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가 무시무시했습니다. 2019 통영국제음악제 주제였던 '운명'과 어울리기도 했지요. 공연을 끝내고 돌아가시는 테너 김석철 선생은 안개 자욱한 통영의 해돋이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바그너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분위기 통영 아침이네요. 어제는 완벽한 발퀴레 날씨였는데 ㅎㅎ"

언제나 그렇듯이, 올해 통영국제음악제도 많은 사연을 남기고 끝났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일은 '로스 로메로스' 기타 콰르텟 가운데 셀린 로메로가 갑자기 쓰러졌던 일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르디티 콰르텟의 리허설을 챙기느라 현장의 급박함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스마트폰 메시지로 전해지는 내용이 심상치 않더군요. 플로리안 리임 대표님이 관객들에게 알린 것처럼, 환자는 병원에서 뇌졸중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병명에 비하면 실제 증상은 그나마 가벼운 편이었던 모양이라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환자는 장시간 비행이 가능할 만큼 치료를 잘 받고 공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로스 로메로스' 공연에서는 결국 셀린 로메로가 빠진 채 3명만 출연하게 되었지요. 가장 유명한 기타리스트 페페 로메로가 전설적인 명인의 솜씨를 똑똑히 보여준 공연이었습니다.

제가 담당한 공연 중에서는 '바흐와 룸바'와 관련해 황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베이시스트 에딕손 루이스가 공연 마지막 곡이었던 'J.S.를 위한 룸바흐'의 음원을 전해 주며 악보에 없는 휘파람이 있으니 타악기 연주자가 듣고 '연주'할 수 있게 해달라더군요.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베이시스트 에딕손 루이스에게 받아서 타악기 연주자 채형봉 선생에게 전달한 악보는 5악장까지였는데, 음원은 6악장까지 있었습니다. 공연 이틀 전이었지요. 부랴부랴 6악장 악보를 받아서 전달했더니, 6악장에 악기 표기가 명확하지 않은 곳이 있다더군요. 저도 악보를 확인해 봤더니, 6악장 제목이 '콩가'인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콩가는 그냥 악장 제목이고 실제로 콩가라는 악기가 나오는 건 아니에요."
"다른 악기가 또 새로 나오지 않는 게 맞나요?"
"음… 아마도?"
"작곡가한테 확인해 주세요. 통영은 서울이 아니에요. 갑자기 없는 악기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요."

다행히 추가 악기가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휘파람은 작곡을 전공한 분께 부탁해서 악보로 옮겼는데, 그에 앞서 음원의 몇 분 몇 초쯤에 휘파람이 나오는지 정확히 확인하려고 악보를 보면서 음악을 들어 봤더니, 귀로 듣기로는 마냥 신나는 악곡의 리듬이 실제로는 얼마나 기상천외하게 꼬여 있는지 머리가 어질어질하더군요.

타악기 연주자 채형봉 선생도 어렵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고, 막판에 6악장을 새로 익히기도 벅차서 휘파람까지는 안 되겠다고 하시더군요. 결국 휘파람은 에딕손 루이스가 불었습니다. 사실은 작곡가가 에딕손 루이스한테 휘파람을 불게 했었다가 베이스 연주와 동시에 전혀 다른 리듬으로 휘파람을 불기가 어려워서, 세계초연 때에는 작곡가이자 타악기 연주자인 곤살로 그라우가 직접 휘파람을 불었었다고 하더군요.

이날 에딕손 루이스가 세계초연한 호소카와 도시오 신작 '작은 에세이'도 기억에 남습니다. 작곡가와 연주자가 같은 공간에 있다 보니 작곡가가 영감을 받아서 곡을 써주기로 한 모양인데, 처음에는 호소카와 선생이 예술감독으로 있는 다케후 국제음악제에서 초연하기로 했다가 통영 공연 직전에 곡이 완성되어서 그냥 통영에서 세계초연하기로 했다네요. 곡을 들어 보니 윤이상 선생을 오마주한 의도가 뚜렷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통영이라는 공간이 작품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겠지요!

바쁘게 일하는 중에 강원도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하마터면 큰 재난이 될 뻔했던 모양이더군요. 빠른 진압에 성공했다니 천만다행입니다.

2019년 3월 21일 목요일

바그너 오페라 '발퀴레'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오페라 '발퀴레'는 '니벨룽의 반지' 4부작 가운데 2번째 작품입니다. '발퀴레' 하나만으로도 4시간 또는 때로 5시간 이상 걸리기도 하는 대작이고, 4부작을 모두 공연하려면 중간에 쉬어 가는 날까지 반드시 포함해 일주일 정도가 필요합니다. 통영에서 이걸 다 공연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쉽지 않네요.

그래도 2019 통영국제음악제 폐막공연으로 '발퀴레' 1막을 하게 됐습니다. 통영국제음악제를 아껴주시는 여러분께 익숙하실 지휘자 알렉산더 리브라이히가 5년 만에 통영에 돌아와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예정이지요. 그리고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등 국제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한국인 가수들이 출연합니다.

'지크문트' 역을 맡은 테너 김석철은 한국인으로는 보기 드문 강력한 목소리를 가진 테너입니다. 제가 이분을 처음 봤을 때부터 바그너를 해야 할 목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지난 2016년에 바그너 가수들에게 꿈의 무대라 할 수 있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출연하는 등 바그너 가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강병운, 연광철, 사무엘 윤, 전승현 등 음역이 낮은 분들이 그동안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여러 차례 출연했지만, 테너로는 국내 최초예요.

'지클린데' 역을 맡은 소프라노 서선영 또한 한국인답지 않게 묵직한 고음을 낼 수 있는 가수라서 역시 바그너를 해야 할 목소리라고 생각해 왔던 분입니다. 지난 2016년 국립오페라단이 '로엔그린'을 공연했을 때 로엔그린 역 김석철의 상대역인 '엘자'로 출연하는 등 바그너 오페라에 도전하고 있지요. 제 생각에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이졸데에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발퀴레 중 지클린데 역에도 잘 어울릴 것으로 기대됩니다.

'훈딩' 역을 맡은 베이스 전승현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등에서 바그너 오페라를 여러 차례 하셨던 분입니다. 특히 '신들의 황혼'의 빌런(악당)인 '하겐' 역으로 유명하신 분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독일-오스트리아 가수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영예인 '캄머젱어'(Kammersänger) 칭호를 지난 2011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받았던 분이기도 합니다. 이 칭호는 노래 실력뿐 아니라 독일 시(詩)를 올바로 이해하고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아야 받을 수 있다고 하지요. 말하자면 독일인이 판소리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격입니다.

바그너 오페라에서는 가수들의 노래가 아닌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이끌어가곤 합니다. 노래 가사가 사건의 외면을 알려주는 동안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진실을 관현악이 알려주는 식이고, 그런 점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합창이 하는 역할을 바그너 오페라에서는 오케스트라가 하는 셈입니다. 이 말을 달리하면 노래 선율만 따라가서는 바그너 음악의 진수를 맛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발퀴레'의 깊은 내용을 이해하려면 가사와 음악의 상호작용을 실시간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독일어 가사를 따라가면서, 필요하다면 독한대역을 보면서 가사의 의미를 이해하고, 귀로는 관현악에 집중하는 식으로 주의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해야 하지요. 가사에 숨겨진 진실을 오케스트라가 알려주는 순간 전율을 느끼고 나면, 그 뒤로는 자연스럽게 바그너 음악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높은 진입장벽이 국내에 바그너 애호가가 많지 않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실 '발퀴레'는 바그너 작품치고는 '노래'의 비중이 높은 편입니다. 그래서 그냥 가사만 따라가더라도 제법 재미있을 거예요. 다만, '훈딩'이 말할 때마다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오케스트라, '지클린데'와 '지크문트' 사이에 말로는 전하지 못할 눈빛이 오갈 때마다 애절한 마음을 전하는 오케스트라, 두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났을 때 마치 빛이 무대를 압도하는 듯 눈부시게 빛나는 오케스트라 등을 놓치지 않는다면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발퀴레 1막 전주곡에서, 이를테면 선동적인 리듬을 타고 흐르는 저음 현의 '다크 포스'에 집중해 보세요. 그 위에서 폭풍처럼 몰아치는 현의 움직임, 포르테(세게)와 피아노(여리게)를 순식간에 오가는 급박한 셈여림 변화, 무시무시하게 암울한 음색, 악마적인 화음 등에도 주의를 기울이면 좋습니다.

2018년 8월 29일 수요일

피아니스트 김선욱 인터뷰

통영국제음악재단에서 발간하는 『Grand Wing』에 실린 글입니다.


Q. 통영에서 베토벤 협주곡 5번을 협연할 예정이다. 2013년에 서울시향과 협연한 녹음이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나왔었는데, 당시 곡 해석의 틀이 지금까지도 유효한가? 바뀌었다면 어떤 부분이 바뀌었는가?

A. 곡에 대한 해석은 항상 유기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특히나 마지막으로 연주한 지 4-5년이 흘렀을 때 바라보는 곡에 대한 색다른 매력에 큰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템포 변화와 뉘앙스 차이는 다를 수 있어도 큰 골격과 골조는 비슷한 편이다. 결국 스스로의 음악적 취향과 스타일이 구축되었다는 것인데, 그때부터는 세밀한 표현을 섬세하게 가꾸는 것이 스스로 진화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여태껏 찾지 못한 순간들을 발견하려 노력하고 있다.

Q. 이를테면 2악장에서 왼손 음형을 음반에서보다 좀 더 볼륨 있게 쳐주는 편이 더 베토벤답게 들리지 않을까?

A. ‘베토벤답다’라는 정의는 참 위험한 말이다. 베토벤다운 것은 없다. 베토벤의 악보 기호와 주문을 얼마나 자신의 것으로 완성시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Q. 최수열 지휘자와 전에 협연해 본 일이 있나? 최수열은 어떤 지휘자라고 생각하나?

A. 한국예술종합학교 선배님이다. 같이 연습해 본 적은 있으나 공식적인 무대에 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휘 실력, 즉 테크닉이야 이루 말할 것 없이 훌륭하고 고전, 낭만 음악뿐만 아니라 현대음악에 대한 관심과 애정, 다양한 포맷의 시도 등 앞으로 우리나라 음악계를 잘 견인하실 것이라 믿고 있다.

Q. 2014년에는 정명훈-서울시향과 함께 진은숙 협주곡을 녹음했었다. 이 곡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작곡가로부터 어떤 조언을 받았으며, 자신만의 의견은 무엇인가?

A. 진은숙 작곡가는 이 곡을 통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모두 최대한 비르투오식하게 연주하길 바랐다. 곡이 어렵다고 대충 훑는 것이 아니라 최대치의 노력을 다해 연주되길 바랐고 그 열정과 긴장감으로 곡에 숨을 불어넣길 원했다. 결과적으로 처음 연주할 때 굉장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만 그만큼 연습량을 늘리며 이 곡이 내 것이 되도록 노력했다. 진은숙이라는 작곡가의 시그니처, 즉 찬란한 색채의 화음과 치밀하게 짜여진 구성과 디테일은 왜 진은숙이 세계 최정상의 작곡가인지 증명한다. 단언컨대, 이 협주곡은 2100년에도 꾸준히 연주될 것이다.

Q. 같은 해 같은 곡으로 함부르크에서 NDR 심포니 오케스트라, 2015년 파리에서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했었다. 그때 얘기가 궁금하다.

A. 이 곡으로 여러 지휘자와 협연했다. 정명훈, 일란 볼코프, 크와메 라이언, 티토 체체리니, 안토니 헤르무스랑 같이 연주했고 이 다양한 지휘자들이 생각하는 이 곡에 대한 아이디어를 습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협주곡에 대한 경험이 많이 쌓였다. 같이 연주했던 오케스트라들은 모두 다 훌륭했고 열심히 연주했기에 매 순간 기억에 많이 남는다.

Q.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지휘를 전공했고 본머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로 '데뷔'를 앞두고 있기도 하다. 영국 왕립음악원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A. 내가 배운 콜린 메터스선생님은 영국 왕립음악원에 30여 년 전 처음으로 지휘과가 신설되었을 때부터 지휘과 교수님이었다. 매일 학교에서 지휘과 학생들과 시간을 보냈고 오케스트라 파트를 피아노로 많이 치면서 다른 친구들의 지휘를 도와주기도 했다.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배울 수 있었고 피아노와 병행하느라 힘들었지만 좋은 추억이었던 것 같다. 거의 매일 5시에 수업이 끝나면 오후 6시부터 9시까지는 피아노를 연습했다. 2020년에 영국 본머스에서 열리는 연주회는 지휘 ‘데뷔’라고 하면 너무 쑥스럽고 그냥 하나의 이벤트로 생각하고 있다.

Q. 음악인으로서 느끼는 런던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A. 일단 내가 현악인이고 오케스트라에서 일하고 있다면 런던에서는 엄청난 레퍼토리를 빠른 시간 안에 습득할 수 있다. 2-3년이면 모든 시대의 곡을 다 연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짧은 리허설 시간 안에서 완성도를 높여야 하기 때문에 기민함이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급여는 다른 나라에 비해 형편없기 때문에 비싼 물가의 런던에서 여유 있는 생활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오페라, 클래식 연주회,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장르를 트렌디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이 런던의 문화적으로 가장 큰 장점인 것 같다. 지금은 베를린으로 이사해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고 있다.

Q. 윤이상 작품을 연주해본 일이 있는가?

A.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1958)’을 2012년 통영국제음악제에 상주음악가로 있었을 때 연주했었다. 가치 있었던 순간이었다.

Q. 어느 분야이든 존경하거나 흥미를 느끼는 예술가가 있다면?

A. 작품에 시간과 정성을 들이고, 디테일에 집착하며,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 예술가들은 모두 다 존경한다. 훌륭한 예술가는 개개인의 독특한 자아가 존재하는데 극한으로 자신을 밀어붙일수록 그 예술가만이 고유한 특징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다. 미술가로는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클림트, 안젤름 키퍼, 라킵 쇼를 좋아하고 노먼 포스터, 프랭크 게리의 건축물도 좋아한다.

Q. 국내 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계획이 있나?

A. 18-19 시즌에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총 5번을 공연한다. 독주회, 듀오 연주 두 번, 그리고 브람스의 실내악 프로젝트 두 번 – 그리고 위그모어에서 내년 1월 독주회를 여는데 한국 작곡가인 신동훈 씨의 신작을 초연할 계획이다.

Q. 마지막으로 통영 관객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A. 오랜만에 통영을 찾아 관객 여러분께 연주를 들려드릴 수 있어 영광으로 생각한다. 6년 만의 방문이고, 또 새로운 홀에서 처음으로 연주한다. 음향, 피아노 등 최상의 조건이라고 많은 동료들이 얘기해주었기 때문에 기대가 무척 크다. 좋은 연주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2018년 5월 17일 목요일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 인터뷰

통영국제음악재단에서 발간하는 매거진 『Grand Wing』에 실린 글입니다.


Q.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으로 얻은 특전이나 달라진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마음에 드나요?

연주 기회를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소중했습니다. 콩쿠르를 하고 나서 계속해서 다른 곳을 다니며 저를 알릴 기회를 갖게 되고 또 그곳에서 만난 많은 분과의 인연도 값진 자산이 되었습니다. 또 항상 어느 곳에서 연주하든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준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쓰게 된 것도 절대 빼놓을 수 없죠.

Q.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으로 '1708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허긴스' 바이올린을 쓸 수 있게 되었고,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에서는 1774년산 과다니니 바이올린을 후원했습니다. 지금 두 가지 바이올린을 다 쓰시는 건가요, 아니면 둘 중 하나만 사용하고 있나요? 연주자로서 느끼기에 두 가지 바이올린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에서 빌려주셨던 과다니니는 2014년에 오디션을 통해 쓰게 된 악기였습니다. 과다니니를 쓰면서 여러 좋은 일들을 함께했고 특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때에도 이 악기로 연주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5년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부상으로 지금 쓰고 있는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쓸 수 있게 되며 과다니니는 바로 반납을 하고 현재 스트라디바리우스로만 연주하고 있습니다.

과다니니는 모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소리가 나는 반면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볼륨의 레인지가 크고 깊고 화려한 소리가 납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악기를 써도 연주자 본연의 소리가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과다니니나 스트라디바리우스 어느 것을 써도 제소리가 나기에 둘 중 무엇이 더 어울린다고 정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Q.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때 겪어본 지휘자 마린 알솝이 궁금합니다. 어떤 장단점이 있는 지휘자인가요?

여러 지휘자분과 연주하면서 여러 가지 성향의 분들을 만나 뵈면서 크게 두 가지로 분리할 수 있었는데, 솔리스트가 프레이즈 처리 등 상상할 수도 없는 곳에서 루바토를 하건 어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일일이 맞춰주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오케스트레이션의 범위 내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으시는 분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장단점이 있지만 마린 알솝 같은 경우에는 그 전에는 쉽게 접해볼 수 없었던 에너지를 지니신 분이었습니다. 솔리스트의 음악에 끌려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본인의 음악만 고집하지도 않으셔서 적당히 연주자와 지휘자 오케스트라 사이에서 긴장감이 감돌면서 집중력 있는 음악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Q. 콩쿠르 우승 직후 중앙일보 김호정 기자는 근성, 성실함, 무게감, 안정감, 집중력 등의 단어로 임지영 씨를 표현했습니다. 김남윤 선생님도 임지영 씨를 노력파로 설명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다른 장점이 또 있을까요?

글쎄요… 특별히 장점인지 모르겠지만 크게 생각한다는 것? 가끔 현실이 촉박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음악은 정말 끝이 없고 예민하고 무한한 작업이기는 하지만 세상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있고 긴 일생을 살아가야 하는데 너무 순간에 집착하다 보면 자기 자신을 가두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럴 때 크게 생각하려고 하는데 그게 저 자신한테도 많은 것을 받아들일 여지를 갖게 되고 좋더라고요. 특히나 앞으로 길고 행복하게 음악 하려고 하면요.

Q. 소위 '김남윤 사단' 또는 '김남윤 악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한국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요?

김남윤 선생님께서는 수많은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를 배출하셨고 항상 선생님의 그런 모습에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어릴 때 자주 선생님 제자들과 마스터클래스나 캠프를 가면 선생님 제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온 학생들도 있는데 그곳에서 다 같이 연주 같은 것을 하면 눈감고도 누가 김남윤 선생님 제자인지 구분할 수 있어요. 그 정도로 선생님 음악은 누가 해도 납득이 가는 음악입니다. 많은 분이 국제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이유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Q. 독일 크론베르크 아카데미에서 무엇을 배웠나요?

훌륭한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과 함께 다이얼로그 세션을 하거나 많은 실내악 등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주로 레슨을 받는 형식이었다면 이곳에서는 얘기하고 서로의 연주를 듣고 의견을 나누는 형식이라서 ‘나’ 스스로 하는 음악보다는 같이 생각하고 토론할 수 있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Q. 한 곡을 연주하기 전에 어떻게 준비하시나요?

특별한 루틴이 있지는 않습니다. 전에 연주한 경험이 없는 곡이라면 악보를 공부하고 핑거링이나 보잉 여러 가지를 시도한 후에 제 것으로 소화하려고 합니다. 연주를 자주 했던 곡들은 더 다지는 연습을 하는데 저는 오히려 이 작업이 더 신경을 많이 쓰는데 조금이라도 타성에 젖은 연주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Q.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생각하는 비발디 ‹사계›는 어떤 곡인가요?

바이올리니스트 이전에 특히 한국 사람이라면 거의 가장 쉽게 접하는 음악 중 하나라고 꼽을 정도로 친숙한 음악이죠. 그 정도로 많은 분이 사랑하는 레퍼토리이기 때문에 연주하는 입장에서는 반갑기도 하면서 더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네요. 개인적으로 비발디의 ‹사계› 는 지극히 인간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봄이 와서 새가 노래하고 여름에 폭풍우가 오고 가을에는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겨울바람 이런 요소들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토픽이기 때문에 하나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Q. 이른바 '역사주의 연주'(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가 내놓은 성과 가운데 받아들일 만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10명이 연주한다고 가정했을 때 모두 각기 다른 주법으로 연주를 하는데 그 중 비브라토와 활의 쓰임이 가장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어떤 연주자는 거의 비브라토를 사용하지 않고 바로크 활로 연주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어떤 연주자는 프레이즈 연결을 비브라토와 활을 더 레가토로 써서 연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 또한 바흐나 비발디 같은 바로크 음악에서는 더욱 어떠한 스타일로 연주할 것인가에 관해서 고민을 했었는데 ‘어떠한 것을 더 받아들이느냐’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더 모든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연주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바이올린 협주곡 가운데 어떤 곡을 가장 좋아하나요? 독주곡 중에서는요?

저는 매번 달라지는 스타일입니다. 보통은 제가 연주하고 있는 곡을 가장 좋아하는데 저는 제가 그 곡에 빠져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Q. 윤이상 곡을 전에 연주해 본 일이 있나요?

아직 경험은 없지만 기회가 있다면 앞으로 연주해보고 싶은 목표는 있습니다. 특히 얼마 전 윤이상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새로 발견하게 돼서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Q. 한가한 때에는 뭘 하시나요?

집에서 일상적인 것들을 하거나 언어를 배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독일로 이사한 지 1년이 지났는데 1년 동안 너무 바빠서 독어를 배울 시간이 없었거든요. 올해는 시간이 나면 독어를 배우는 것이 목표입니다.

Q. 현재 단기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요?

새로운 레퍼토리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실내악곡 또한 연주할 기회가 있다면 가능한 참여해서 공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통영 관객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일단 처음으로 통영에서 연주하게 되어 매우 설레고 저의 멘토이신 김남윤 선생님 그리고 많은 훌륭한 음악가분들과 함께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특히나 많은 분이 사랑하는 ‹사계›로 처음 통영 관객분들께 선보이게 되어서 더욱 기대가 됩니다.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연주 들려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2018년 4월 20일 금요일

2018 통영국제음악제 막전막후

해마다 통영국제음악제 기간이면 무대 뒤에서 많은 사연이 생겨나지요. 올해 겪은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개막공연에 출연해야 할 보훔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 두 명이 공연 당일 아파서 제가 병원에 데려갔던 일입니다. 한 명은 밤늦게 김밥을 먹고 배탈이 난 첼리스트였는데, 다른 한 명이 문제였습니다. 허리가 아파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상태였거든요. 현악기 연주자였더라면 그 한 사람쯤 빠져도 공연에 큰 지장이 없었겠지만, 하필 그 사람은 타악기 연주자였습니다.

요통 환자가 들것에 실려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되는 동안, 저는 복통 환자와 오케스트라 매니저를 제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따라갔습니다. 요통 환자는 응급실에서 증상을 확인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스테로이드와 진통제 등을 처방받았습니다. 환자는 만성 요통으로 독일에서 치료를 받아온 이력이 있었고, 그날 하필 침대에서 굴러떨어져서 증세가 악화한 상태였습니다. 엑스레이 영상을 판독한 의사는 디스크 탈장을 의심하면서도 엑스레이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으니 독일에서 엠알아이(MRI) 검사를 해보라고 권유하더군요.

요통 환자가 치료를 받는 동안 저와 오케스트라 매니저, 그리고 사무실에 있는 동료들은 두 가지를 걱정했습니다. 환자가 이 상태로 오늘 밤 공연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공연이 끝난 뒤에 독일까지 장시간 비행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대타 연주자는 무엇보다 윤이상 ‹광주여 영원히›를 당장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마침 지난해 광주시립교향악단이 이 작품을 연주한 일이 있어서, 사무실에서는 그곳 타악기 연주자에게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병원에서는 치료가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전 내내 누워 있던 환자가 힘겹게 일어나 물리치료를 받았고, 그 뒤에 밥을 먹더니, 퇴원해서 그날 저녁에 무대에 올랐습니다! 다음 날 공연 때에는 상태가 훨씬 좋아 보였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에는 독일까지 무사히 돌아갔고요. 현대 의료기술이 참 대단하지요! 병원 의료진들이 모두 친절하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으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환자가 치료를 받을 때 제가 통역을 했고, 의학 용어가 라틴어 또는 영어로 되어 있는 만큼 때로는 의료진이 직접 환자와 소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몰랐던 의학용어를 익히기도 했는데요, 급성(acute), 만성(cronic), 설사(diarrhea) 등이었지요. 디스크 탈장(Slipped Disc)은 영국의 유명 음악평론가가 말장난처럼 쓰고 있는 웹사이트 이름 때문에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만약을 대비해 주요 병명을 익혀두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위염(gastritis), 장염(enteritis), 편도선염(tonsillitis), 맹장염(appendicitis), 골절(fracture). 또 뭐가 있을까요? 아, 공연장에서 지휘자에게 심근경색(heart attack)이 일어나 심폐소생술(CPR)을 했다는 얘기가 화제가 된 일이 있지요!

그밖에 음악극 ‹귀향›에 소품으로 사용할 활을 구하느라 동료가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일, 그 와중에 알게 된 활 판매 업체 '활○당' 이름 때문에 다 같이 웃었던 일, 구하기 힘든 악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골머리를 앓았던 일, 독일인 지휘자에게 굿거리장단을 설명하면서 '태평가'를 불러줬던 일, 올해도 어김없이 새벽에 공항으로 출발하는 연주자를 배웅했던 일, 피곤한 몸으로 연주회장 구석 자리에 앉아 음악을 들으려 노력하며 정신없이 졸았던 일 등이 생각납니다. 지면이 짧으니 더 자세한 사연은 생략할게요.

마지막으로 이번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세계초연된 음악극 ‹귀향›으로 화제가 되었던, 여창가곡 우조 이수대엽 '동짓달'의 절절한 노랫말과 그것을 기막히게 노래한 박민희 선생이 특별히 기억에 남습니다. ‹귀향›의 진정한 주인공은 율리시스도 페넬로페도 아닌 박민희 선생이 아니었나 싶어요!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둘에(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시를 쓴 사람이 황진이라네요.

2018년 3월 15일 목요일

Isang Yun: Poems of the Nakdong River

Isang Yun wrote a song ‹Nakdong River› while in Korea, and it is quite well-known through Isang Yun Children’s Song Festival. However, there is another ‹Nakdong River› by Yun himself that elderly persons in Gyeongnam Province still remember. Euy-Jang Jin, the former mayor of Tongyeong City, mentioned that the latter was also called “The song of Gyeognam citizens.” Seung-gi Lee, a film expert who served as the head of the Masan Culture Bureau, remarked that it was sung at every morning gathering in Gyeongnam area schools. He also added that it was inserted into the movie ‹Nakdong River›, released in 1952 but lost, probably during the Korean War.

There seems to be an indirect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songs of ‹Nakdong River› along with the movie of the same title, and Yun’s symphonic poem titled ‹Poems of the Nakdong River›. In a letter dated November 30, 1956, to his wife Sooja Lee, Yun stated that he had begun composing that symphonic poem in Korea, then concluded the first two movements in Paris, where he also completed the final third movement in the evening of November 29. In April that same year, Yun received the Seoul City Culture Award with his first string quartet. In June, he left Korea to study abroad, and learned composition at the Paris Conservatory, where he also encountered European modern music.

In other letters to his wife during his days in Paris, Yun occasionally reveals anxiety over the progress of his learning. In regards to ‹Poems of the Nakdong River›, he did not seem to feel confident, saying “I cannot expect much because I have put in too many conventional elements.” In this regard (and in some other as well), and in view of the fact that the work was based on traditional functional harmonies, we can guess why ‹Poems of the Nakdong River› has not come into light until now. However, when we treat this piece from the perspective of modern Korean people, we can understand that Yun had already been shining as a composer since the time it was written.

Yun originally appears to have designed it as a six-movement scheme before modifying it to three movements in the process. In the manuscript, the first movement was to be a prologue, followed by five movements, respectively titled Twilight, Hangawi (Korean Thanksgiving), Field of Reeds, Song of Bumper Years, and Epilogue. However, the completed composition consists of three movements: Prologue, An Evening of the Nakdong River, and Dances.

In the early 1950s, the Korean Peninsula was swallowed up in a civil war, which, at least partially, was a proxy war in behalf of the United States, China, and Russia. The Nakdong River was the battlefield where South Korea turned the tide and defeated North Korea. During this period, Yun was a music teacher in Busan, one of the major cities in the Nakdong River Basin. After the war, he went to Seoul with his family, where he spent about three years as a composer and a part-time lecturer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and Duksung Women's University. As can be seen from the historical background, and unlike what the initial conception based on 6 movements might suggest, the first two movements of this work are full of dark sentiment.

It is the “dramaturgy” that leads this piece; the second movement is in an arch form, but the outer movements do not follow the traditional formal structure. The first movement commences with a grand fanfare, and the ascending figure in the interval of fourths becomes the seed of the entire movement. That sustains the formal coherence and consistency of the entire composition. The sudden texture contrast between this fanfare and the subsequent melody reminds us of a movie scene transition from the signal (that indicates an opening of a movie) to the actual movie. That's why we need to reconsider its relation to the film ‹Nakdong River›.

In the first movement, sorrow flows like a river, and sobs turn into wailing. When that wailing has trailed away, an anxious beat appears, which sounds like the last beating of the heart. The movement ends with two sharp squeaks. The second movement is mainly led by the oboe melody, which sounds like a melancholic barcarolle, or in some sense, Korean pallbearers' dirge. In the third movement, an exciting rhythm appears like a manifesto, driving out the tragedy.

In the middle of the third movement, a melody, distinctly in the Korean folk song style, makes appearance. Its interval structure is identical to that of a melodic fragment in the Korean folk song ‹Miryang Arirang›. In contrast to ‹Miryang Arirang›, which consists of Semachi Rhythms, or Semachi Jangdan in Korean traditional terminology, the melody here resembles the Gutgeori Jandan of ‹Taepyunga›. As a result of combining ‹Miryang Arirang› and Gutgeori Jangdan, the melody sounds similar to the ‹Korean Barcarolle›.

WonCheol Kim
translated by Moohyun Cho

World Premiere:

Scheduled on April 5, 2018
Tongyeong Concert Hall
Kammerorchester Hannover
Hans-Christian Euler, conductor

2018년 1월 31일 수요일

소프라노 황수미 인터뷰

통영국제음악재단에서 발간하는 『Grand Wing』에 실린 글입니다. 출간본과는 사소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8년 1월 7일, 독일 현지 시각 오전 11시경 전화 인터뷰.

Q. 통영 공연은 이번이 두 번째다. 2016년 샹젤리제 오케스트라와 협연했을 때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A. 통영의 아름다움이 우선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고, 통영국제음악당의 음향이 훌륭해서 노래하기 편했었다. 그때가 통영국제음악당 데뷔 무대여서 긴장되기도 했지만, 직원들이 친절하게 챙겨주셨고, 숙소도 마음에 들었고, 아침에 자전거를 빌려서 해안 도로를 다녔던 것도 멋진 추억으로 남아 있다. 심지어 날씨까지 좋아서 모든 것이 완벽했던 것 같다.

Q. 올림픽 개막 공연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A. 영광으로 생각한다. 사실은 연락을 지난달에 받아서 일정을 조정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다. 아테네에서 열렸던 제1회 올림픽 때부터 공식 찬가로 지정된 곡을 원어인 그리스어로 불러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악보를 받은 지는 일주일밖에 안 됐다. 이걸 잘 해내려면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준비해야 할 것 같다.

Q. 연주자로서 자신의 장단점을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장점 위주로 자신을 평가한다면?

A. 무대 위에서 드러나는 것보다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은 지루할 수도 있고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려운 과제를 하나씩 해결하면서 받는 쾌감을 즐기는 편이다.

Q.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때 소프라노 임선혜 선생이 평하기를, 포커스가 확실하고 파워 있는 '고음'에 놀랐다고 했다.

A. 그때 마침 브뤼셀에 공연차 왔다가 콩쿠르를 보셨던 것 같다. 칭찬에 감사한다.

Q. 내 생각에 쇤베르크 ‹구레의 노래› 중 숲비둘기(Waldtaube) 역할을 하면 좋을 것 같다. 오케스트라 편성이 워낙 큰 작품이라 성량이 풍부해야 하지만, '비둘기'에 어울려야 하므로 드라마틱 소프라노여서는 안 되고, 고음이 맑고 단단하고 '포커스가 확실해야' 하는 까닭에 이 역할을 잘할 수 있는 소프라노가 흔치 않은데, 이 역할이 누구보다도 잘 맞을 것 같다.

A.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도전해 보겠다. 통영에서 기회를 만들어 주셔도 좋을 것 같다. (웃음)

Q. 진은숙 ‹퍼즐 & 게임›은 다른 방향으로 난이도가 대단하다. 이번에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이 곡을 전에 들어본 일이 있는가?

A.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뮌헨 공연 실황을 봤었다. 오페라를 모음곡으로 재구성한 ‹퍼즐 & 게임›은 아직 악보를 받아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

Q. 작곡가 진은숙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A. 여성 작곡가로서, 또 아시아 작곡가로서 베를린필 같은 특급 악단이 공연하는 작품을 여럿 쓰신 점이 대단하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왜소한 체격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나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모습 등이 멋있다고 생각한다.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에 출연하면서 알게 된 유명한 오페라 연출가 클라우스 구트 선생이 진은숙 차기작 오페라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연출할 예정이라고 말해줬을 때는 같은 한국인으로서 괜히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Q. 크리스티안 요스트 ‹시인의 사랑›은 어떤가?

A. 매니저가 조만간 악보를 챙겨 줄 예정이라 아직 잘 모르겠다. 슈만 원곡은 참 좋아한다.

Q. 여자가 부르는 ‹시인의 사랑›은 흔치 않다.

A. 가사 내용이 남자 가수에게 맞는 곡이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브리기테 파스벤더, 바바라 보니, 크리스티아네 셰퍼 등이 ‹시인의 사랑›으로 호평받았다. 시를 전달하는 일에 남녀를 엄격히 가릴 필요는 없지 않나 싶고, 크리스티안 요스트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시인의 사랑›이라면 더욱 남녀 구분 없이 도전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Q. 통영국제음악제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네 개의 마지막 노래›를 보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예정인데, 마지막 곡 '저녁놀 안에서'(Im Abendrot)를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때 불렀었다.

A. 학생 때부터 언젠가는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꿈의 레퍼토리'였고, 특히 리사 델라 카사의 음반을 좋아했다. 그래서 콩쿠르 결선 때 이 곡을 마지막 곡으로 불렀다. 음악이 주는 평안함이 좋았고, 잘해야지 하는 생각보다는 마지막 가는 길이 이렇게 평안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Q. 안나 네트렙코의 초기 목소리를 참고했다고 다른 인터뷰에서 밝힌 일이 있다. 자신만의 발성법을 찾기 전에 흉내 내려 했던 가수가 또 있다면?

A. 미렐라 프레니. 입 모양을 보면 소리가 어떻게 나는지 훤히 다 보일 것 같은 사람이다.

Q. 뮌헨 음대를 졸업했다.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A. 도시 자체가 참 좋았고,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실제 오페라 극장 오디션과 연계해 실습할 수 있는 시스템이 좋았다. 또 오페라뿐 아니라 리트 및 오라토리오를 복수전공하면서 시야를 넓히기도 했다.

Q. 본 오페라 극장 주역 가수이다. 극장 자랑을 해달라.

A. 플라시도 도밍고, 문서라트 커벌예(몽셰라 카바예), 에디타 그루베로바 등이 공연했었던 전통 있는 극장이고, '베토벤 오케스트라 본'이라는 훌륭한 악단이 극장 오케스트라로 있다. 개인적으로는 파미나, 돈나 안나, 미미, 수산나, 미카엘라 등 배역을 맡으면서 오페라 가수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4년차인 이번 시즌을 끝으로 독립할 예정이며, 앞으로는 여러 공연장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자유롭게 출연하게 된다.

Q. 국내 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계획이 있다면?

A. 피아니스트 헬무트 도이치 선생님과 함께 음반 녹음 건으로 음반사와 의견 조율 중인데, 자세한 내용은 아직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또 헨델 오페라 ‹리날도›로 앙상블 마테우스와 함께 파리, 빈, 모스크바 등을 순회공연할 예정이다.

Q. 마지막으로 통영 관객에게 한 말씀 해달라.

A. 아름다운 도시에서 다시 노래하게 되어 기쁘고, 좋아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싱그러운 봄에 좋은 음악으로 찾아뵙기를 기대한다.

2018년 1월 30일 화요일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나의 삶

통영국제음악재단에서 발간하는 매거진 『Grand Wing』에 실린 글입니다. 인터뷰 대신으로 이런 글을 받았는데, 더 긴 글을 요약한 듯한 느낌이네요.


"음악은 사람의 감정 표현이다. 그 감정은 사실 매우 단순한 기쁨과 슬픔과 격정이며, 그 안에 많은 스펙트럼이 있다. 그것이 모두를 포괄한다. 일본인도, 에스키모도, 미국인도, 러시아인도. 이것이 음악의 커다란 장점이다."

모든 공연은 나에게 삶의 하이라이트다. 모든 공연이.

내 음악은 아직도 내 안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유는 몰라도 나는 그 사실을 안다. 처음부터, 내가 의붓어머니 집에서 생전 처음으로 음악을 들었던 그때부터 음악은 나에게 탐험이었다. 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탐험이었다. 오늘날까지 변함없다. 음악은 나를 표현하려는 불타는 갈망이다.

왜 그렇게 많은 여행을 해가면서까지 지휘를 자주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여행이 참 성가신 일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공연을 해야 한다. 내 몸짓으로, 내 연주자들로 음악을 말해야 한다. 나는 그것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 없는 세상은 다른 세상이다. 아버지 없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고, 오랜 죄책감에 시달려온 내 인생의 영원한 의문이 되었다. 브레슬라우(브로츠와프) 음대 교수였던 아버지는 나치에 의해 시골로 강제이주했다가 전쟁터로 끌려가셨다. 그리고 수형자 부대에서 작전 중에 돌아가셨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1945년 1월 23일 공습을 피해 피난을 가야 했다. 할머니는 1년간의 피난 생활 끝에 돌아가셨다.

열두 달이 지난 1946년 1월 31일, 나의 변함없는 동반자인 질병과 죽음으로 얼룩진 나를 생후 5년간의 암울한 유년기로부터 구한 사람은 어머니의 사촌이었으며 훗날 내 양어머니가 되어주신 발리도레 에셴바흐였다. 내가 겪은 참혹한 일들로 나는 실어증에 빠졌고, 약 1년간의 치료 기간에 생전 처음으로 음악을 들었다. 피아니스트이자 가수, 음악 교사였던 발리도레 에셴바흐는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라흐마니노프, 바흐를 밤늦게까지 연주했다. 직접 연주해 보겠느냐는 말에 "예"라고 대답함으로써 나는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오케스트라 연주를 처음 들은 것은 11살 때로, 푸르크벵글러가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였다. 오늘날까지 나는 그들이 연주했던 거의 모든 음을 떠올릴 수 있고, 저 엄청난 마법사 푸르트벵글러의 멋들어진 모습을 눈앞에 떠올릴 수 있다. 푸르트벵글러는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를 불타오르게 해서 엑스터시 상태로 보내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치른 유일한 '오디션'은 1964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앞에서였다. 흔치 않게도 카라얀은 내 연주를 한 시간이나 들어 줬다. 이후 그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진행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 녹음에 나를 섭외했다. 그렇게 해서 대단한 친분이 생겼고, 나의 발전에 커다란 도움을 준 배움의 과정이 시작됐다.

나에게 도움을 준 또 다른 위대한 마에스트로는 조지 셸이다. 그는 악보 분석에 관한 획기적이며 또한 상호보완적인 통찰을 나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내 미국 데뷔를 주선하여 1969년 그가 지휘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도록 해줬고, 나는 그와 함께 매우 열심히 연습할 필요가 있었다. 피아노 리허설이 업무상 신뢰 관계로 발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가는 모든 도시, 모든 오케스트라 리허설, 리허설에 이은 모든 토론에 그가 나를 초대했다. 나는 그에게 딕션을 배웠고, 프레이징, 명료함, 투명함을 배웠다. 카라얀에게는 색채, 뉘앙스, 분위기 전환을 배웠다. 셸이 그렸다면 카라얀은 칠했다. 안타깝게도 셸은 너무나 이른 1970년에 타계했다.

나는 지휘에 관해 점점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1964년에 치른 시험 이후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생각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도전하려는 열망이 생겨났다. 그러나 내 몸동작이 지휘에 적절한가? 내가 오케스트라와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가? 내가 생각을 올바르게 전달할 수 있는가?

내 50번째 생일이 계시였다. 또 다른 내 위대한 멘토 레너드 번스타인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현자가 말하기를 모든 생애 주기는 숫자 7에 기초하며, 7년이 7번 지나면 안식 기간을 가지면서 삶을 돌아보고 열린 생각과 변화를 받아들일 자유를 찾아야 한다 했다. 그래서 나는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삶을 돌아보고, 그 의미를 찾고, 마지막 남은 공포와 집착과 걱정을 없애 나갔다. 내 인생의 지평선이 멀리서 손짓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나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페스티벌 국제 청소년 오케스트라 및 오케스트라 아카데미를 창립하는 일에 큰 역할을 했다. 더 최근에는 마이클 틸슨 토머스와 함께 삿포로 퍼시픽 뮤직 페스티벌 및 유스 오케스트라의 공동 예술감독이 되었다.

젊은 음악가를 모아 오케스트라를 만들거나 솔로 연주자로서 국제적인 경력을 쌓게끔 하는 일은 모두 한 가지로 귀결된다.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힘을 모아서 느리게 변하는 세상에 맞서게끔 돕는 일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일상의 지루함과 싸울 수 있게 돕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청춘의 심장에 있는 의기와 결의가 불가능을 이겨낼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엔진이 될 수 있다면, 바로 여기 내가 있다! 나는 내가 100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지휘를 하고 있기를 바란다. 내가 99살일 때에도 여전히 새로운 발견에 열려 있을 것이며,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욱 그러할 것이기에.

2018년 1월 29일 월요일

낙동강의 시(詩)

한산신문 및 『Grand Wing』에 실린 칼럼입니다. 한산신문 판본에서 일부 내용이 수정됐습니다.


지난해 봄에 있었던 일입니다. 윤이상 선생이 영화 ‹낙동강›의 음악을 맡았던 모양이니 조사하라는 지시를, 아마도 저희 대표님한테 받았습니다. ‹낙동강›은 1952년 작품으로 영화 자체는 현재 유실되어 스틸 사진 등 일부 자료만 남아있는 모양이더군요. 공교롭게도 현 통영시장님과 이름이 같은 김동진이라는 분이 전반적인 음악 작업을 한 듯했고, 윤이상 선생은 테마 음악을 작곡한 듯한 정황을 알아냈지요.

다시 한 달쯤 지나, 대표님께서 이번에는 빛바랜 악보 하나를 주시며 인쇄용 악보로 옮기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표지에는 ‹Orchestral Suite "Poems of the Nak-tong River"›(관현악 모음곡 "낙동강의 시"), 그 아래에 'Composed by Yoon Ie Sang'(윤이상 작곡)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제목부터 모든 것이 손글씨더군요. 윤이상 선생의 자필 악보가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이었지요. 가슴이 떨려 왔습니다.

순간 저는 이 악보를 이렇게 다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충렬초등학교에서 발견된 윤이상 작곡 교가 악보 원본을 지난 2014년에 기증받았을 때, 그 악보를 전문가에게 맡겨 조심스럽게 사본을 만드느라 예산이 얼마나 들었고 또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었지요.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이때, 자필 악보 보존에 최선을 다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을 당장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손을 깨끗이 씻고, 손에 남은 물기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다음, 악보를 펼쳐 과감하게 복사기에 넣고 한 장씩 복사했습니다. 모든 음표와 작은 지시어 하나까지 잘려나간 곳이나 흐리게 복사된 곳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했습니다. 연필로 썼다 지운 흔적과 새로 쓴 자국이 겹친 곳, 세월이 흘러 흐릿해진 곳 등은 음악적인 맥락을 따져 판단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복사한 악보를 디지털 스캔해서 따로 보관하고, 종이로 된 사본은 컴퓨터 사보 작업을 맡길 전문가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2018년 4월 5일, 수십 년간 잊혔던 이 작품이 통영국제음악제 공식 공연에서 연주됩니다. 한스-크리스티안 오일러(Hans-Christian Euler)가 지휘하는 하노버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습니다. 이날 윤이상 선생의 1989년 작품인 실내교향곡 2번 '자유에의 헌정'(Den Opfern der Freiheit)이 베토벤 삼중협주곡과 함께 연주될 예정이기도 하지요.

‹낙동강의 시(詩)› 자필 악보 목차를 보면 6개 악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1악장 프롤로그, 2악장 黃昏(황혼)이 물들 때, 3악장 嘉俳節(가배절; 한가위), 4악장 갈대밭, 5악장 豐年歌(풍년가), 6악장 에필로그. 영남의 옛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께 각별하게 느껴질 듯한 소제목이지요. 그런데 윤이상은 작곡 도중에 간추린 구성으로 바꾼 듯합니다. 1악장 프롤로그, 洛東江(낙동강)의 저녁, 3악장 舞曲(춤곡), 이렇게 3악장으로 되어 있어요. 어쩌면 곡 길이가 너무 길어진다고 생각한 탓일까요?

이 작품의 작곡 시기로 추정되는 1952년경은 전쟁이 한창일 때였지요. 이 무렵에 윤이상 선생은 부산고등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지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가서 약 3년간 생활하게 됩니다. 서울대학교와 덕성여자대학교 등에 출강하는 한편 작곡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1956년 서울시문화상 수상에 힘입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리고 다시는 고향 통영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윤이상 공식 작품목록 중 첫 번째 작품은 1958년 베를린에서 작곡해 네덜란드 빌토번에서 초연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입니다. 그 이전 작품들은 작곡가 스스로 목록에서 삭제했지요. 그런 만큼 윤이상 선생이 한국에서 쓴 작품들은 유학 이후에 작곡한 본격 현대음악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낙동강의 시(詩)›가 듣기에 그리 어렵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낙동강에는 '녹조라떼'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이 따라다닙니다. 환경정책의 대실패를 입증하는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잊힌 지 수십 년만에 사실상 세계초연되는 ‹낙동강의 시(詩)›가 어쩌면 사람들에게 그 옛날 맑은 낙동강을 추억하게 하지는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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