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1월 1일 일요일

비발디: 사계

비발디: ‹사계› 제1번 ‘봄’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미메시스(모방)는 고전 예술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며,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는 음악적 미메시스를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은 이전 시대 성악의 ‘가사 그리기’(word painting) 전통과 관련지어 ‹사계›를 분석하며 이 작품을 ‘마드리갈 협주곡’(Concerti Madrigaleschi)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타루스킨이 기악곡 ‹사계›를 성악 장르인 마드리갈과 관련지은 까닭은 성악 기법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발디는 ‹사계› 개별 악장에 상응하는 소네트(정형시)를 덧붙여 음악과 텍스트를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했다. 또한 소네트 특정 행과 악보 해당 부분을 정교하게 대응시켜 표제의 입체감을 극대화했다. 이 가운데 ‘봄’에 해당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악장: 봄이 왔다 / 새들이 즐거운 노래로 아침을 맞이하고, / 시냇물이 부드럽게 재잘거리며 /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 창공을 검은 망토로 뒤덮으며 / 번개와 천둥이 다가와 봄을 알리는 전령으로 선택된다. / 이들이 잠잠해지면 / 새들이 돌아와 다시 황홀한 노래를 부른다.

제2악장: 그리하여 꽃이 만발한 아름답고 평온한 초원에서 / 잎새와 나무가 정겹게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 염소 치는 목동은 충직한 개 옆에서 낮잠에 든다.

제3악장: 목동이 부는 흥겨운 백파이프(잠포냐) 소리에 맞추어 / 요정(님프)들과 목동들이 정겨운 보금자리에서 춤추네 / 봄이 찬란한 모습을 드러낸 계절에.

타루스킨은 미메시스가 자연을 직접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현상의 속성이나 그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정서와 심리까지 재현하는 개념이라 설명한다. 이를테면 저음 현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천둥에 대한 의성(Onomatopoeia)이며, 바이올린의 빠른 음형은 번개의 속성을 드러내는 환유(Metonymy)다. 제1악장 도입부의 민요풍 주제와 폭풍이 지나간 뒤 단조로 변하는 리토르넬로 선율은 정서적 미메시스다. 이때 솔로 바이올린이 조심스럽게 연주하는 반음계적 선율 조각은 마치 폭풍이 끝났는지를 새들이 살피는 듯한 심리 묘사다.

비발디: ‹사계› 제2번 ‘여름’

‘여름’은 피로와 탄식, 불안과 짜증, 재앙으로 이어지는 서사를 보여주며, 음악이 그러한 연속성을 뒷받침한다. 비발디가 남긴 소네트는 다음과 같다.

제1악장: 태양으로 불타는 혹독한 계절 아래 / 사람도 지치고 양떼도 지치며 소나무는 달아오른다. / 뻐꾸기가 목청을 풀고 그 소리가 울린다 / 산비둘기와 홍방울새가 노래한다. / 부드러운 서풍(제피로스)이 불어오지만, / 그에 맞서는 북풍(보레아스)이 갑자기 불어닥친다. / 그리고 목동은 탄식한다, / 곧이어 닥쳐올 사나운 폭풍이, 또한 자신의 운명이 두렵기에.

제2악장: 지친 몸이 휴식을 빼앗겼네 / 사나운 번개와 천둥이 두려워서 / 그리고 파리 떼와 날벌레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어서!

제3악장: 아, 두려움은 현실이 되었구나 / 하늘이 천둥과 번개를 내려치고 우박을 퍼붓네 / 곡식의 영글은 머리를 잘라버리네.

‘여름’의 서사적 연속성과 조응하는 것은 전곡을 관통하는 g단조 조성이다. 비발디 연구의 권위자 마이클 탈봇은 이것을 동일조성(Homotonality)이라 부르며 비발디 작품에 흔히 나타나는 특징으로 꼽는다. 그 당시 협주곡은 느린 악장에서 관계조로 이동하여 조성적 ‘휴식’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비발디는 ‘여름’을 구성하는 모든 악장에 같은 조성을 사용했고, 이로써 세 악장을 별개 장면이 아니라 필연적인 재앙으로 이어지는 단일한 드라마로 연출했다.

물론, 리토르넬로 사이사이에 배치된 솔로 에피소드가 조바꿈을 유도하고, 뒤를 잇는 리토르넬로가 바뀐 조를 확정하는 식으로 일시적인 조바꿈은 빈번히 일어난다. 이러한 조바꿈은 폭풍 전의 불안한 대기 상태를 표현하는 등 표제적 역할을 겸하며, 조바꿈이 쓸모를 다하면 g단조의 무겁고 비극적인 색채로 돌아온다.

리처드 타루스킨은 ‹사계›의 정서적 미메시스를 분석하며, 당시 오페라에서 흔히 쓰이던 ‘시밀레 아리아’(simile aria) 기법을 비발디가 ‹사계› 연작에 활용했다고 지적한다. 시밀레 아리아는 오페라 주인공의 감정 상태나 처한 상황을 자연 현상이나 특정 사물에 빗대어 시적 이미지로 묘사하는 것으로, 이 또한 미메시스를 심리적 차원으로 확장한 사례다. ‘여름’에서는 오케스트라가 비유 대상을 음향적 배경으로 설정하고 독주 악기가 감정을 표현하며, 그로써 폭풍 전 두려움과 폭풍 후 안도감, 대자연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무력감 등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비발디: ‹사계› 제3번 ‘가을’

‘가을’은 제1악장의 흥겨운 잔치 분위기에서 제2악장의 나른한 공기를 거쳐 제3악장의 역동적인 서사로 나아간다. 비발디의 소네트는 다음과 같다.

제1악장: 농부들이 춤과 노래로 즐긴다 / 풍성한 수확이 주는 큰 기쁨을 / 바쿠스의 술에 취한 많은 이들은 / 잠에 빠져 즐거운 시간을 마무리한다.

제2악장: 모두의 춤과 노래를 멈추게 하는 것은 / 기분 좋게 온화한 공기 /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이끌어 / 더없이 달콤한 잠을 즐기게 하는 계절.

제3악장: 사냥꾼이 새벽에 사냥을 나간다 / 뿔피리와 사냥총을 가지고, 개들을 데리고 나간다 / 짐승은 달아나고, 그들은 자취를 쫓는다. / 이미 굉음에 놀라고 지친 짐승은 / 총과 개들에게 상처 입고 위협당해 / 지친 몸으로 달아나지만, 기력을 다해 죽는다.

리처드 타루스킨의 미메시스 분석을 ‘가을’에 적용한다면, 제2악장은 심리적 미메시스를 대표하는 사례라 할 만하다. 이 악장의 핵심은 외부 사건이 아니라 의식이 느슨해지는 상태이며, 비발디는 이를 마치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연출했다. 마이클 탈봇은 이를 구현하는 기법으로 하프시코드 분산화음에 주목한다. 그는 비발디 작품에서 하프시코드에 반주를 넘어서는 역할을 부여한 것이 매우 드문 일이라 지적하며, 잠자는 사람들의 평온하고 몽환적인 상태를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장치가 바로 하프시코드 분산화음이라 보았다.

비발디: ‹사계› 제4번 ‘겨울’

‘겨울’에서는 제1·3악장의 맹추위와 칼바람이 제2악장의 안온함과 대비를 이룬다. 비발디의 소네트는 다음과 같다.

제1악장: 차가운 눈밭에서 몸이 얼어붙고 / 가혹한 바람이 매섭게 불어오니 / 끊임없이 발을 동동거리고 / 극심한 추위에 이를 딱딱거린다.

제2악장: 난롯가에서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네 / 밖에서는 비가 만인을 적시는 동안

제3악장: 얼음 위를 걷는다, 느린 걸음으로 / 넘어질까 두려워 온 신경을 곤두세워 나아간다. / 빠르게 달리다 미끄러져 땅바닥에 넘어졌네 / 다시 빙판에 올라 빠르게 달리네 / 얼음이 깨지고 갈라질 때까지. / 강철 문 너머로 소리를 듣노라 / 남풍(시로코)과 북풍(보레아스), 그리고 모든 바람이 서로 싸우니 / 이것이 겨울이다, 그러나 이처럼 기쁨을 주는 겨울이다.

마이클 탈봇은 ‹사계› 연작 중 ‘겨울’이 비발디 작곡 기법과 표제음악적 의도가 가장 정교하게 결합한 수작이라 평가한다. 특히 제2악장의 다층적 구성방식에 주목하며, 악보에 나타난 개별 성부가 단순히 화성의 일부로 기능하는 것을 넘어 각기 다른 묘사적 역할을 수행하고, 이들의 결합이 음악적 건축물을 이루어 복합적인 장면(tableau)을 창조한다고 보았다.

‘복합적인 장면’은 청각적으로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독주 바이올린의 서정적인 선율이 난롯가의 평온함을 전달하는 동안,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성부는 피치카토 기법으로 창밖에서 내리는 빗방울 소리를 형상화한다. 또한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는 밖에서 몰아치는 뇌우나 폭풍의 대기 상태를 희미한 음향적 배경으로 암시한다.

탈봇은 이러한 다층적 구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겨울’ 제2악장을 꼽으면서도, 이와 유사한 기법이 ‹사계› 전곡에 걸쳐 음악적 건축법 원리로 기능한다고 분석한다. 즉 ‹사계›는 묘사적 성격이 탁월한 작품이지만, 그러한 묘사는 자유롭게 삽입되는 것이 아니라 탄탄한 형식 구조 안에 배치된다.

탈봇은 또한 ‹사계›의 바깥 악장들이 어떻게 전통적인 리토르넬로 형식과 서사적인 표제를 조화시키는지 규명한다. 그는 리토르넬로와 반주부 반복음형이 안정적인 풍경으로 기능하는 가운데, ‘솔로 라인’은 새소리나 폭풍우 같은 구체적인 묘사와 서사적 전개를 맡으며 형식적 틀 안에서 유연하게 움직인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사계›는 기악의 전통적 형식 안에서 미메시스를 탁월하게 구현했다는 점에 그 독창성이 있다. 비발디의 독창성은 형식 자체에서도 드러나는데, 이를테면 음악학자 에리히 라이머는 비발디가 리토르넬로 형식 규범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고 평가한다. 타루스킨은 음악 작품이 일회성으로 공연된 뒤에 잊히는 대신 ‘스탠더드 레퍼토리’로 장기적인 생명력을 갖기 시작한 사실상 최초의 작품으로 ‹사계›를 꼽는다.

  • 용어 설명 - 리토르넬로 형식(Ritornello form): 바로크 시대 협주곡을 특징짓는 형식으로, 합주부가 연주하는 리토르넬로와 독주부가 연주하는 에피소드가 교차하는 구조이다. 리토르넬로는 반복될 때마다 정형화된 규칙에 따라 다른 조로 나타나다가 마지막에는 본래 조로 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리토르넬로는 귀환 또는 반복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ritorno’의 지소형(작은꼴)이다. 14세기 이탈리아 소네트나 마드리갈의 후렴구를 뜻하던 ‘리토르넬루스(ritornellus)’에서 유래해 17세기 기악에 도입되었다. 짧은 기악 간주를 뜻하던 초기 형태가 정형화된 리토르넬로 형식으로 발전한 시기는 18세기이다. 18세기 후반에는 리토르넬로 형식이 소나타 형식에 흡수되면서 점차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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