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넬손 프레이리 (Nelson Freire, 피아노)
Brahms : Piano Concerto No. 2 in Bb Major, Op.83 (44')
Brahms : Symphony No. 4 in e minor, Op.98 (39')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협주곡 1번과 마찬가지로 협주곡이라기보다는 교향곡에 가깝다. 이 때문에 협연자는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음량에 맞서 일단 살아남아야 하며, 연주 테크닉 또한 매우 뛰어나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브람스 음악이 가진 치밀하고 논리적인 구성을 풍부한 감성으로 풀어내는 일도 만만치 않다. 이처럼 연주자가 삼중고를 떠안아야 하는 까닭에 매우 유명한 작품인데도 국내에서 연주되는 일이 거의 없다.
넬손 프레이리의 피아노 연주는 여러모로 지난 5월 18일에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개리 그래프만을 떠올리게 했다. 커다란 밑그림이나 악상의 자연스러운 흐름, 다양하고 적절한 음색 등은 훌륭했으며, 이 점에서는 지난 2005년 11월에 리카르도 샤이가 지휘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여 음반으로도 나온 명연과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실수가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리듬이 곧잘 망가지곤 하는 것이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다 싶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손가락 골절 때문에 제 실력을 내지 못했단다.
아픈 손가락으로 이렇게까지 연주해낸 것을 보면 역시 일류 연주자라 하겠지만, 아무래도 정명훈과 서울시향은 뒷감당하느라 고생이었다. 오케스트라 소리를 되도록 작게 내려고 벌서는 듯 연주하기 일쑤였고, 어택(attack)을 죽이고 여린 음에 크레셴도를 주는 식으로 협연자를 배려하기도 했다. 피아노 리듬이 망가질 때마다 정명훈이 재빨리 수습하려고는 했으나 서울시향은 아직 그런 돌발사태에 재빨리 대처하는 능력은 충분히 기르지 못한 모양이라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서로 발목을 잡기도 했다. 3악장 첼로 독주가 매우 뛰어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밤베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 출신 객원이었다고 한다.
앙코르로 연주한 글룩의 "멜로디"(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가운데 '정령들의 춤'을 스감바티(Giovanni Sgambati)가 피아노곡으로 편곡)는 여린 음만으로 그윽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어 손가락 골절을 손쉽게 감추어주는 영리한 선곡이었다.
브람스 교향곡 4번은 특히 1악장에서 여러 성부가 조각조각 정교하게 맞물리는 독특한 텍스처 때문에 앙상블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멍덩한 소리가 되어버릴 위험이 있는데, 이날 연주가 이따금 그랬다.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기운이 빠져버렸던 것일까. 결코 졸연은 아니었지만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치고는 뭔가 좀 모자란 듯했다. 물론 이것은 연주회장 탓도 크다. 소리가 무뎌지곤 했던 것은 단원들이 큰 실수를 해서가 아니라 미세하게 리듬이 서로 어긋나거나 순간적으로 밸런스가 안 맞거나 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연주회장의 음향이 개선되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렵다고 본다.
팀파니 소리가 이날따라 이상했으며, 악기에 이상이 생긴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을 만큼 평소 실력에 못 미치는 연주였다. 오케스트라 총주를 휘감아 올라 결정적인 '한 방'으로 터트리지 못하고 자신감 없이 뒤로 빠질 때도 더러 있었다(이를테면, 마디 129). 저음 현 또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왠지 끌려다니는 듯했다. 작품에 담긴 '다크 포스'를 4악장에 몰아서 '거대한 크레셴도'를 만들어내려고 지휘자가 의도한 것은 아닐까도 잠깐 생각해보았으나, 또 달리 생각하면 마에스트로가 1악장을 그렇게 간단히 희생시키려고 했을 리는 없다.
2악장은 템포가 대략 ♪= 60 정도로 꽤 느렸는데, 3악장의 빠른 템포와 대비시키는 것은 크게 보면 타당한 해석이라 하겠으나 느린 만큼 집중력 있는 앙상블이 뒷받침되지 못해서 설득력을 충분히 얻지는 못했다. 마디 84에서는 힘없는 클라이맥스가 되었고, 마디 88에서는 바이올린이 흐느끼는 듯한 소리는 좋았으나 두터운 화음을 이루지는 못했다. 다만, 현악기군의 피치카토 음형은 깔끔했으며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3악장부터는 명쾌한 리듬을 업고 썩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반복되는 16분음 스타카토 음형을 나무랄 데 없이 깔끔하게 일치시켜 놀라운 소노리티(sonority)를 만들어내었고, 서울시향의 앙상블이 사실은 뛰어난데 작품이 작품이라 이제껏 고전했음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돌이켜보건대 이토록 훌륭한 앙상블을 이룰 수 있는 악단인데도 음형이 복잡하게 얽힐 때에는 영 제 실력을 내지 못했다면 연주회장의 음향이 요술을 부린 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려우며, 이것만 보아도 시향 전용 연주회장이 절실히 필요함을 알 수 있다.
템포는 ♩= 135 정도로 꽤 빠른 편이었고, 군데군데 리타르단도를 써서(이를테면, 마디 5) 뚜렷한 템포 대비를 준 것이 인상깊었다. 앙코르로 3악장을 다시 한 번 연주했는데, 이때는 가운데 부분(마디 35-223)을 생략하고 템포 변화도 거의 없이 신나게 달려서 그야말로 앙코르다웠다.
4악장은 3악장에서 되찾은 기운을 살리고 파사칼리아(passacaglia) 특유의 반복과 점층 구조에 힘입어 마치 예고된 파국처럼 한 발 또 한 발 무게를 더해가는 거대한 크레셴도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마디 33에서 바이올린의 비장한 선율도 훌륭했고, 마디 193의 셋잇단음은 절망에 빠져 목놓아 부르짖는 듯했다. 다만, 마디 97의 플루트 독주는 기술적으로는 흠 잡을 데 없이 깔끔했으나 너무 무덤덤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름대로 루바토를 쓰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일부러 무표정한 연주를 의도한 것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구슬프게 흐느끼는 연극적인 표현이 낯 간지러웠던 게 아닐까 싶다.
정명훈이 서울시향을 이끈 지도 벌써 두 해가 지났다. 그동안 서울시향은 눈부신 성장을 보였지만, 세계적인 악단을 목표로 했던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기대에 못 미친다. 정명훈이나 시향 단원들이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처음부터 목표가 너무 컸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시향 전용 연주회장도 없이 '남의 집 살이'를 하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정명훈과 계약하면서 시향 전용 연주회장을 마련하기로 약속했음을 잊지 않기 바란다.
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