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시민 여러분,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저는 김순남이라는 사람입니다. 옆에서 딴청 부리고 있는 윤이상을 대신해 저승에서 인사 올립니다. 요즘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에서 윤이상의 음악 세계를 재조명하고 있지요. 저 또한 이상과 같은 해에 태어난 작곡가이지만, 제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섭섭하기도 하고, 또 그가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제 얘기보다 윤이상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올해 들어 윤이상은 예년보다 훨씬 자주 이승을 내려다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짓곤 합니다. 특히 그의 고향 통영에 몇 년 전 개관한 통영국제음악당을 보면서 음악에 빠져들곤 하지요. 볼프강 슈파러, 로스비타 슈테게, 잉고 고리츠키, 볼프강 피베크 등 생전에 알고 지내던 독일 친구들이 통영국제음악제에 초청 받아 통영에 온 일을 반가워하던 기억도 납니다.
지난 9월 17일은 윤이상의 100번째 생일이었지요. 이날 세계 곳곳에서 윤이상 음악이 연주되었습니다.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열린 '해피 버스데이 윤이상' 공연에서는, 마지막 순서로 윤이상의 초기 가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통영국제음악재단의 플로리안 리임 대표가 서툰 한국어로 했던 연설이 감동적이었지요. 그가 윤이상의 아내 이수자 씨에게 꽃다발을 건넸을 때, 제 옆에 있던 이상 또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내 걱정은 말고 이승에서 천수를 누리다 오시구려.'
통영국제음악당에서는 이날부터 일주일간 '윤이상 기념 주간'으로 날마다 공연이 열렸습니다. 그 가운데 후배 작곡가들의 신작이 4곡이나 세계초연된 일이 참 반갑더군요. 주한독일문화원과 통영국제음악재단이 공동 위촉한 작품 둘, 그리고 진은숙 작곡가가 한국의 신예 작곡가들에게 위촉한 작품 가운데 두 곡이 이번에 통영에서 초연되었지요. 후배 작곡가들의 참신한 음악을 들으면서 저도 윤이상도 무척 기뻤습니다.
독일 작곡가 요하네스 모츠만은 윤이상 작품 중 ‹가락›, ‹율›, ‹활주›, ‹추억›, ‹사선(死線)에서› 등을 연구하면서 얻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클라리넷,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한계점 아래›(Below Threshold)를 썼다고 하지요. 윤이상의 작곡 기법을 흉내 내면서도 서양인의 사고체계와 미의식을 드러내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조은화의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사람, 바다를 품다›는 요하네스 모츠만 작품과 마치 거울쌍처럼 비슷하면서도 반대였습니다. 악기마다, 성부마다 이질적인 음형이 한데 모여 승화적으로 어우러지도록 하는 점은 윤이상 음악의 특징 중 하나이지요. 모츠만이 서양인의 시각으로 이것을 재해석하며 동양을 바라보는 지향성을 내비쳤다면, 조은화는 비슷한 기법을 얼핏 재즈 느낌이 나도록 하며 한편으로는 부조리극처럼 아이러니한 텍스처를 담아낸 점이 참신했습니다.
김도윤의 ‹양말 짜는 기계›(Stocking Frame)는 피아노 현 곳곳에 자석을 올려서 음색과 음정을 비틀어버린 것이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마치 피아노와 하프시코드, 글로켄슈필 등이 함께 소리내는 듯했고, 가믈란(gamelan) 음악 느낌도 났습니다. 서로 다른 빛깔로 반짝이는 음들이 모여 부딪치며 새로운 빛깔을 만들어내는 양상은 진은숙 작곡가 느낌이 살짝 났고, 때로는 피에르 불레즈 느낌이 나기도 하더군요. 다양한 음소재를 유쾌하게 엮어내는 작곡가의 재치가 감탄스럽기도 했습니다.
송향숙의 ‹SOLOS›는 마치 여러 가지 화면을 빠르고 어지럽게 교차시키는 영상 기법처럼 여러 음형이 다층적으로 얽히며 변화하는 모습이 신기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작품 자체보다는 그 복잡한 음형들을 연주해 내는 피아니스트에게 감탄하게 되더군요. 피아니스트 단 한 사람이 어찌나 많은 음을 폭포처럼 쏟아내는지, 또 그런 가운데 수많은 변화를 어찌나 정교하게 담아내는지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지요. 피아니스트 이름은 지유경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가 10일에 걸쳐 유럽 6개 도시를 돌며 윤이상 음악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또 10월에는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가 열리지요. 부러움과 함께 50년쯤 뒤에는 윤이상 음악 못지않게 제 음악에도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네요. 저승에서 김순남이 다시 한번 인사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