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오페라에는 어떤 불멸의 음악이, 무한함이 담겨 있다. 그대로 반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악보를 다 외울 정도로 수없이 반복해 들었고. 2013년에도 나는 바스티유에서 진행되는 ‹니벨룽의 반지› 사이클 기간에는 아무런 일정도 잡지 않았다. 바그너를 들으러 가기 며칠 전부터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한다. 긴 시간 동안 집중하면서 바그너의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청중도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해야 한다."
피아니스트 프랑수아-프레데리크 기(François-Frédéric Guy)가 한 말입니다. 음악평론가 김나희 선생의 인터뷰집 "예술이라는 은하에서"를 읽다가 이 대목이 특별히 눈에 들어오더군요. 프랑수아-프레데리크 기는 프랑스 사람이면서 독일 음악으로 세계 정상급 연주자의 반열에 오른 사람입니다. 프랑스 사람은 프랑스 음악을 잘할 것 같고, 러시아 사람은 러시아 음악을 잘할 것 같은 게 흔한 편견이지요. 그런 점에서 참 독특한 연주자예요.
프랑수아-프레데리크 기는 브람스, 리스트, 버르토크, 프로코피예프 등으로도 유명하지만, 가장 많이 연주하는 것은 베토벤입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음반이 한국 팬들에게 특히 유명하지요. 베토벤이야말로 정신적으로 가장 가까운 작곡가라 말하는 그는 베토벤 작품과 그의 관계를 시적인 언어로 이렇게 말합니다. "마치 심해를 탐험하다가 친숙하면서도 신비롭게 느껴지는 숨겨진 세계를 발견하듯 푹 빠져든다."
저는 이 사람의 연주를 십여 년 전 어느 공연장에서 처음 들었습니다. 오래전 일이라 무슨 곡을 연주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연주가 아주 멋져서 그 이름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았지요. 그리고 몇 해 전에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에서 현대음악 작곡가인 트리스탕 뮈라이유의 곡을 기막히게 연주하는 걸 보고 새삼 감탄했던 기억도 나요. 기는 브루노 만토바니, 위그 뒤포르, 마르크 모네 등 유명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작품을 세계초연하는 등 현대음악 연주자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멋진 피아니스트인 프랑수아-프레데리크 기가 6월 1일 토요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연주합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과 29번 '함머클라비어', 드뷔시 '물에 비치는 그림자', 트리스탕 뮈라이유 '물속의 조약돌', 그리고 에리크 몽탈베티 '칸딘스키에 의한 3개의 연습곡'을 연주할 예정이지요. 베토벤과 현대 프랑스 음악이 나란히 있는 프로그램이 흥미롭습니다.
트리스탕 뮈라이유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작곡가이지만, 에리크 몽탈베티는 저에게도 생소합니다. 1968년생으로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예술감독을 역임했고, 작곡은 혼자서 일기 쓰듯이 몰래 해왔다네요. '칸딘스키에 의한 3개의 연습곡'은 1990년 작품이지만 지난해에 암스테르담에서 세계초연되었다고 합니다. 다름 아닌 프랑수아-프레데리크 기가 이 작품을 세계초연했지요.
"현대음악은 머리가 아니라 귀와 가슴으로 들어야 하는 예술이다. 현대음악 전문 축제에 가보면 초로의 노인들이 공연장에 와서 대단한 집중력으로 현대음악을 듣는다. 현대음악을 듣는 대중은 남다른 지성이 아니라 그저 호기심과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프랑수아-프레데리크 기가 김나희 선생에게 인터뷰에서 했던 말입니다. 가슴 깊이 공감하는 말이고, 그가 연주할 베토벤 못지않게 드뷔시, 뮈라이유, 몽탈베티 또한 기대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칸딘스키 그림을 보면서 선과 색채의 강렬한 느낌을 즐기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처럼, 현대음악 또한 머리로 이해하기보다 "귀와 가슴으로" 느끼고 즐기면 된다고 생각해요.
지난 2017년,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위너스 & 마스터스 시리즈' 공연에서 진은숙 작곡가가 김도윤 작곡가에게 위촉한 피아노곡 '양말 짜는 기계'(Stocking Frame)가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세계초연됐습니다. 리허설 때 이 곡을 처음 듣고 홀딱 반했던 저는 마구 흥분해서 작곡가와 연주자에게 떠들었습니다. 그랬더니 피아니스트 앤드루 저우가 묻더군요. 이 곡을 이해하고 감탄한 거냐고요. "아니요! 그냥 '소리'에 반했을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