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 책자에 실릴 글입니다.
▶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서곡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는 성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왕과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히브리 백성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나부코'라는 이름은 '느부갓네살'을 이탈리아식으로 축약한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지요. 이번에 경기필이 연주할 서곡에도 그 선율이 담겨 있습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히브리가 전쟁에서 바빌로니아에 패합니다. 예루살렘 왕의 조카인 이스마엘레는 예루살렘에 인질로 잡혀 온 바빌로니아의 페네나 공주와 사랑하는 사이로, 페네나를 탈출시키고 싶어합니다. 페네나의 언니인 아비가일레는 히브리 포로를 모두 풀어줄 테니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말하지만, 이스마엘레는 거절합니다. 자카리아는 솔로몬 성전을 파괴하려는 나부코 군대에 맞서 페네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인질극을 벌이고, 이스마엘레가 페네나를 구합니다.
아비가일레는 자신이 노예의 몸에서 태어났으며, 나부코 왕이 페네나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포로로 잡혀 온 자카리아는 페네나에게 유대교 율법을 가르치고, 페네나를 구한 이스마엘레를 히브리 사람들 앞에서 변호합니다. 한편, 나부코는 자신이 신이라고 선언했다가 벼락을 맞고 쓰러집니다. 아비가일레가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페네나가 포함된 히브리 포로를 처형하고자 제정신이 아닌 나부코에게 승인 서명을 받아냅니다. 뒤늦게 사실을 깨달은 나부코가 아비가일레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겠다고 협박하지만, 아비가일레는 증거를 없애고 나부코를 감금합니다. 노예가 된 히브리 포로들이 조국을 그리워하며 노래합니다.
페네나가 형장으로 끌려갈 때, 나부코가 제정신을 차리고 히브리 신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충신 압달로가 부하를 거느리고 나타납니다. 나부코가 앞장서며 페네나와 히브리 사람들을 구하고, 바빌로니아 신상이 저절로 부서집니다. 나부코는 히브리 사람들을 풀어 주고, 바빌로니아 백성으로 하여금 히브리 신을 찬양하게 합니다. 아비가일레는 독약을 마시고, 페네나와 이스마엘레에게 용서를 구하며, 히브리 신에게 자비를 구한 뒤 죽습니다.
▶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작곡가가 최초 구상 후 개정하는 과정에서 교향곡이 될 뻔했던 작품으로, 일반적인 협주곡과 달리 교향곡처럼 몰아치는 관현악에 피아노가 홀로 맞서야 하는 까닭에 협연자에게 엄청난 도전이 되는 작품입니다. 특히 1악장은 짜임새도 매우 길고 복잡해요.
1악장은 확장된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시부―발전부―재현부'를 기본 형태로 하는 소나타 형식에 관해 대충 아시는 분이라면, 강렬한 오케스트라 총주에 이어 여리게 흐르는 대목을 제시부 제2 주제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소나타 형식의 짜임새를 분석하려면 음 소재, 텍스처, 조성 구조 등을 복합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여러 주제로 된 '제1 주제군(thematic group)'이 한참 더 이어지고, 피아노가 처음 나올 때에도 제1 주제군을 이어가지요. 마침내 피아노 독주로 나오는 제2 주제는 느리고 달콤합니다.
▲ 1악장 제2주제
2악장은 그냥 편하게 들으면 됩니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애틋한 추억 한 자락,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보세요. "잘있나요? 저는 잘있어요!"
브람스는 자필 악보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Benedictus qui venit in nomine Dominus)"라고도 썼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말씀으로 레퀴엠 가사로도 곧잘 쓰이는 구절이지요. 이 곡을 쓰는 동안 브람스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슈만이 죽음을 맞기도 했습니다.
3악장은 들뜬 분위기로 마구 달리는 즐거운 악장입니다. 론도 형식으로 A―B―A'―B'―푸가―A"―B"―카덴차―종결구 꼴 짜임새이고, 론도 주제(A)와 에피소드 주제(B)는 잘 들어보면 음악적 뿌리가 같지요. 사실은 1악장 제2 주제와도 뿌리가 같습니다. 푸가에서는 론도 주제와 에피소드 주제가 뒤섞이면서 마치 소나타 형식의 발전부와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가만 보면, 3악장 짜임새가 론도 형식이면서도 소나타 형식과 닮은꼴이기도 하지요! 종결구에서는 에피소드 주제(B)와 론도 주제(A)가 느리게 나온 다음, 곧바로 결승점으로 마구 달려갑니다. 마지막에 짧은 카덴차가 또 나옵니다.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곡을 통틀어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곡이지요. 구소련에서는 스탈린상을 받은 이 작품을 공산당을 찬양하는 걸작으로 선전해 왔지만, 오히려 이 곡은 스탈린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읽을 수 있는 양면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과 관련해 기막힌 사연이 있어요. 쇼스타코비치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부인》을 발표했다가 스탈린 정권에 단단히 밉보입니다. 스탈린이 그 공연을 관람하고는,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서 쇼스타코비치를 직접 비판했거든요. 작품 속에 부패한 소련 경찰이 등장하는 등 스탈린의 심기를 거스르는 내용이 있기도 합니다. 서슬 퍼렇던 스탈린 정권 때 그런 일이 있었으니, 작곡가가 얼마나 큰 위협을 느꼈을지 짐작할 수 있겠죠?
그래서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4번 발표를 미루고 5번 교향곡을 작곡해 먼저 발표합니다. 베토벤 교향곡 5번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어둠에서 광명으로’ 짜임새를 사용하고, 어마어마한 승리의 팡파르로 곡을 끝맺었지요. 스탈린 정권은 이것을 '공산당의 위대한 승리'로 받아들였나 봅니다. 그러나 훗날 밝혀진 여러 증거는 예술가를 탄압하는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이 작품에 담겼음을 시사합니다.
1악장은 현악기의 돌림노래로 시작합니다. 목놓아 울부짖는 듯한 이 대목은 소나타 형식의 도입부, 그리고 바로 이어 나오는 바이올린의 느린 선율이 제1 주제라 할 수 있겠는데, 이곳에 나온 음형이 곡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제2 주제에 해당하는 음형은 도입부 음형과 뿌리가 같아요. 그러니까 첫 열두 마디쯤이 조각조각 나뉘어 1악장이 끝날 때까지 변형, 발전하는 짜임새입니다. 사실은 곡이 끝날 때까지 이 음형이 계속 변형되어 나오지요.
골치 아픈 얘기를 더 늘어놓지는 않을게요. 스탈린 시대 러시아를 상상하면서 들어 보세요.
▲ 1악장 바이올린 악보 1~14마디. 연필로 써놓은 흔적은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의 해석이며, 출처는 뉴욕필 디지털 도서관(http://archives.nyphil.org).
2악장에서는 무시무시한 냉소가 음악을 지배합니다. 작곡가가 일부러 듣기 싫게 잔뜩 꼬아놓은 음표로 가득해요.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대목이 없다시피 하므로, 집중해서 '시퍼렇게 날을 세워' 연주해야 제맛이 나는 악장입니다. 세상이 어딘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생각에 공감하고 분노해야만 이 악장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3악장은 현을 중심으로 서럽게 울어대는 악장입니다. 금관악기는 아예 나오지 않고, 가끔 목관악기와 하프가 거드는 정도이지요. 울다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게 아니라, 그냥 목놓아 울고 나서 허무하고 쓸쓸하게 끝납니다.
4악장은 '혁명이다!' 이 한 마디로 설명이 됩니다. 문제는 이 혁명이 어떻게 끝나느냐인데요, 앞서 이 작품이 스탈린 정권을 찬양하거나 비판하거나, 어느 쪽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양면적인 작품이라 했지요. '혁명'의 끝 또한 어느 쪽인지 애매합니다. 빛나는 승리일 수도 있겠지만, 또 어찌 들으면 그저 뜬금없고 과장되기만 한 정신승리 같기도 하거든요.
4악장 종결구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끝없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D 장조 으뜸화음입니다. 으뜸화음이 무려 74마디 가까이 음악을 지배하지요. 물론 중간에 화음이 조금씩 바뀌기는 하지만, 금관악기가 연주하는 주선율이 다른 화음을 불러올 때에도 현악기와 목관악기가 거의 같은 음을 고집스럽게 연주하면서 으뜸화음의 '중력권'을 벗어나지 않게끔 합니다. 말러 교향곡 1번이 비슷하게 끝나는데, 아마도 쇼스타코비치가 말러를 흉내 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