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구자범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구자범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3년 4월 7일 일요일

새로운 작품이 있는 공연을 위하여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은 글입니다.

원문 링크 : http://g-phil.kr/?p=1479

"국내 어느 교향악단도 한국 작곡가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작곡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길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나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거나 동인들의 주머니를 털어 관현악단을 사는(!) 방법, 젊은 작곡가라면 콩쿠르에 응모하는 방법 등이 있을 뿐이다. 지원을 받기도, 관현악단을 사기도, 콩쿠르에 응모하기도 어려운 입장에 있는 작곡가들은 당연히 그나마 연주가 용이한 실내악에 치중할 수밖에 없고 이는 곧 양적인 감소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에 뒤따르는 질적 저하를 초래하게 된다."

작곡가 전상직 선생께서 10년 전에 쓰신 글입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당시 명칭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발간하는 『문예연감』 서양음악 분야에서 한 해를 정리하는 의미로 쓰신 글이었지요. 이 글에서 지적하신 우리나라 작곡계 형편은 10년이 지난 2013년 현재 조금은 나아졌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인 듯합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그곳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곳에는 작곡가가 활동하기 훨씬 좋은 든든한 인프라가 있어요. 오케스트라 또는 오페라 극장 등에서 작곡가에게 새 작품을 위촉하고, 그 작품이 초연되면 애호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어 다른 악단이 그 작품을 또 연주하는 선순환이 일어나곤 합니다.

요즘은 방송 인터넷 중계가 흔해서, 조금만 찾아 보면 외국 유명 악단의 공연 실황을 들을 수 있지요. 공연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발표된지 몇 해 지나지 않은 작품들이 한 곡쯤 들어 있곤 합니다. 아예 현대 작품만 연주하는 공연도 제법 있고요.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현대음악 공연은 '그들만의 잔치'가 되기 일쑤이지요.

조금 자극적인 통계 수치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2012년판 『문예연감』에 나타난 2011년 전체 공연 건수는 8,274건입니다. 그 가운데 작곡발표회로 분류된 공연은 1.1%이고, 경기 지역만 따지면 단 한 건입니다. 한 건도 공연되지 못한 해도 있고요. 다른 범주로 분류된 공연에서 신작이 초연된 사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평소 공연장에서 창작곡을 얼마나 들을 수 있는지를 경험적으로 생각해 보면, 사실은 이 수치도 생각보다 많다고 느껴집니다.

"한해의 작곡계를 돌아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가장 큰 아쉬움은 자발적 청중의 부재와 그로 인한 창작곡의 고립현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여전히 작곡가 단체(동인)들의 발표회 및 몇몇 현대음악제라는 인적(人的), 공간적으로 폐쇄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답답함을 더해온다." (전상직)

음악 애호가라면 윤이상이나 진은숙 같은 세계적인 작곡가의 이름을 떠올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어요. '피겨 여왕'이라 불리는 김연아 선수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나라에 피겨 스케이트 선수를 기르는 인프라가 훌륭해서 김연아 선수가 성공했다고 하기는 어렵잖아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 예술 창작을 지원하는 공공기관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술단체가 신작을 초연하면, 작곡가와 예술단체가 각각 지원금을 신청할 수 있지요. 그러나 국민이 낸 세금으로 어느 예술가와 예술단체를 지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어느 작품이 얼마만큼 훌륭한지 어떻게 평가할까요?

"그외 공연장이나 연주단체들의 기획프로그램과 연주자 개개인의 연주회에서 창작품을 연주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며 그 또한 행사용이거나 문예진흥기금 수령을 위한 방편으로 짜맞춤형 연주회에 창작품이 이용되는 경우가 많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작곡가 이만방 선생이 2006년 『문예연감』에 쓰신 글입니다. 공공기관답게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객관적인 기준으로 작품을 평가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이 생기곤 하지요. 정부가 나서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그 지원금이 넉넉한 것도 아니어서, 이를테면 문화예술위원회 지원을 확정 받아놓고도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신작 오페라 공연이 취소된 사례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초연이 종연(終演)이 되곤 한다는 것입니다. 작곡가가 자비를 들이거나 지원금을 받아 신작을 발표하면, 대개 초연을 끝으로 그 작품이 다시 연주되기 어렵다는 뜻이지요. 다시 연주되더라도 '그들만의 잔치'라 할 만한 공연이 되기 일쑤이고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번 공연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그간 한국의 악단들이 동시대 한국 작곡가의 곡을 프로그램에 삽입해 소개하는 공연은 종종 있었지만, 이번 공연처럼 대규모 공립 오케스트라가 동시대 현역 작곡가 한 사람의 곡들로만 정기연주회 전체 프로그램을 구성해 연주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번 공연에서 연주되는 곡들은 어쩌면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예술작품은 어떤 면에서 공공재(公共財)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작품을 청중에게 소개하는 일에 경기필이 나서고자 합니다.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류재준의 밤》 공연을 준비하면서 티켓 판매 부진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공공 예술단체로서 수익률보다는 국내 최초로 한국 작곡가를 집중 조명한다는 취지에 뜻을 두고 이번 공연에 예산을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경기필이 작곡가에게 저작권료를 지급함은 물론 협연자와 합창단 등 모든 비용을 지원하는 이번 공연이, 현 시대의 작곡가들에게 진정한 예술 창작 의욕을 고양하고 음악애호가들에겐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넓히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작품 설명: 류재준 《장미의 이름》 서곡, 바이올린 협주곡 1번, 교향곡 1번 '레퀴엠' (Sinfonia da Requiem)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은 글입니다.

원문 링크 : http://g-phil.kr/?p=1475

▶ 장미의 이름 서곡

움베르토 에코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장미의 이름》은 해외에서 위촉받아 작곡 중인 미완성 오페라로, 그 중 서곡이 먼저 발표되어 지난 2012년에 초연되었다.

소설 『장미의 이름』은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추리소설인 동시에 중세 도그마와 근대정신이 대립하는 신학 논쟁, 중세인의 생활상과 세계관 묘사, 고전 문헌에 대한 패러디 등이 내용의 중심이 되는 작품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327년 겨울, 프란체스코회 수도회의 수도사 윌리엄과 멜크 수도원의 젊은 수련사 아드소는 황제와 교황의 회담 준비차 회담이 열릴 어느 수도원에 도착한다. 수도원장은 장서관에서 일하던 수도사가 시체로 발견된 사건을 윌리엄 수도사에게 알리며 교황 측 조사관이 오기 전에 사건을 조사해 달라고 부탁한다.

사건 수사 중 수도사와 장서관 사서, 보조사서 등이 잇달아 시체로 발견된다. 윌리엄은 추론 끝에 사건의 경위를 알아내고 장서관에서 밀실을 찾아낸다. 그곳에는 금지된 책을 수도사들이 읽지 못하도록 막아온 늙은 수도사 호르헤가 있었다. 윌리엄과 호르헤는 한 치 물러섬 없는 신학 논쟁을 펼친다.

사건의 발단이 된 금지된 책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제2권의 유일한 필사본이었다. 작품 속에서 설정으로만 존재하는 이 책은 희극과 웃음의 가치를 논하는 내용을 담았으며, 실존하는 책이자 비극에 관해 논한 『시학』(제1권)과 대비된다.

호르헤 수도사는 신념을 지키고자 장서관에 불을 지르고 그곳에서 죽는다. 중세 최대 장서관이었던 그곳은 사흘 동안 타오르며 결국 폐허가 된다.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폴란드 라보라토리움 현대음악제 위촉으로 작곡되었으며, 2006년 피오트르 보르코프스키가 지휘하는 포들라시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초연한 뒤로 유럽에서 10회 이상 공연되었고, 미국에서는 막심 벤게로프 협연으로 마이클 틸슨 토머스가 지휘하는 디트로이트 심포니 등이 공연한 명곡이다.

바르샤바 쇼팽 음악원의 마리안 보르코프스키 교수는 이 작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작곡가가 현대적인 표현 기법을 사용했음에도 사실은 낭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류재준은 저명한 스승과 조언자들의 음악에서 영감을 얻은 듯하며, 아울러 유럽 음악 전통, 특히 19세기 초반 유산에서 가장 훌륭한 특징을 가져다 창의적인 방식으로 다루었다.

이 작품은 류재준의 비범한 재능, 관현악의 색채감과 질감에 대한 감수성, 극적인 진행에 관한 관심과 건축적 능수능란함을 증명한다. 말러(Mahler)처럼 절묘한 클라이맥스, 느리고 명상적인 도입부와 심오한 표현, 아름답고 서정적인 바이올린 독주를 주목할 만하며 […] 또한 독주자와 오케스트라가 기발하게 상호작용하면서 독주자가 기교를 (전형적인 '불꽃 테크닉'은 없을지라도) 뽐내는 가운데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음향적 장관을 펼칠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적이다.

▶ 교향곡 1번 - 레퀴엠

작곡가 류재준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준 이 작품은 2008년 5월 폴란드 루드비히 판 베토벤 음악제에서 우카시 보로비치(Łukasz Borowicz)가 지휘하는 폴란드 방송교향악단이 초연하였고, 당시 폴란드 관객 전원이 10여 분간 기립박수를 보냈을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곡이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추모식에 쓰이면서 ‘정주영 레퀴엠’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류재준 작곡가는 이것이 작품의 순수성과 배치된다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작품 진혼교향곡 'Sinfonia da Requiem'은 순수음악으로써 어떠한 기타 표제적인 성격이나 내용을 담지 아니한다.

이 작품은 지금의 한국을 만든 모든 이들에게 드리는 헌정일 뿐 일개인에게 헌정된 작품이 아니다.

이 작품을 ‘정주영 레퀴엠’이라고 하는 것은 고 정주영 회장의 아들인 정몽일 씨가 이 작품을 쓰게 될 단초를 제공하였고 작품이 만들어진 후 고 정주영 회장의 추모식에 쓰면서 일방적으로 붙인 작품명일 뿐이며 이는 이 작품의 순수성과는 배치된다.

이 작품은 작곡가 류재준의 1번 교향곡으로 명명될 것이며 정식 이름은 진혼교향곡‘Sinfonia da Requiem'이고 헌정은 한국의 현재를 만든 우리의 전세대(前世代)에게 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논란의 여지가 없음을 분명히 한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그리고 소프라노가 삶과 죽음, 슬픔과 희망을 노래하는 이 작품의 가사는 라틴어 미사통상문에서 따왔으며,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1악장 : 영원한 안식을 (Requiem aeternam)

주님, 영원한 안식을 그들에게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시온에서 찬미함이 마땅하오니
예루살렘에서 내 서원 바쳐 지리이다.
나의 기도 들어주소서
모든 사람들이 당신께 오리이다
주님, 영원한 안식을 그들에게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2악장 : 진노의 날 (Dies irae)

진노의 날 (Dies irae)

진노와 심판의 날이 임하면
다윗과 시빌의 예언 따라
하늘과 땅이 모두 재가 되리라.
모든 선과 악을 기리시려
천상에서 심판관이 내려오실 때
인간들의 가슴은 공포로 찢어지리!

나팔소리 (Tuba mirum)

놀라운 나팔소리가
세상의 모든 무덤 위에 올리며
모든 이를 보좌 앞에 모으리라
심판관 주께 답변하러
모든 피조물이 깨어날 때
죽음이 엄습하고 만물은 진동하리

기록된 책 (Liber scriptus)

보라! 모든 행위 기록들이
엄밀하게 책에 적혔으니
그 장부 따라 심판하시리
심판관 주께서 좌정하실 때
모든 숨겨진 행위가 드러나리니
죄지은 자 벌받지 않는 일없으리라

가엾은 나 (Quid sum miser)

가엾은 나는 무엇을 탄원하며
누가 나를 위해 중재할까?
자비가 필요한 그때는 언제일까?

위엄과 공포의 왕 (Rex tremendae majestatis)

위엄과 공포의 왕,
값없이 우리를 구하시니 긍휼의 근원이시여,
그때에 우리를 도우소서

눈물의 날 (Lacrimosa)

눈물의 날, 그날이 오면!
땅의 먼지로부터 일어난
심판 받을 자들이 주 앞에 나아오리
천주여 자비로써 그들을 사하소서
긍휼의 주 예수여 축복하사
그들에게 당신의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아멘.

3악장 : 봉헌송 (Offertorio)

봉헌 (Offertorio)

영광의 왕, 주 예수, 그리스도.
죽은 모든 신자들의 영혼을
지옥의 형벌과 깊은 구렁에서 구하소서
사자의 입으로부터 그들을 구하소서
지옥이 그들을 삼키지 않게 하시고
그들이 어둠 속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성 미카엘의 인도에 따라
일찍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하신
거룩한 빛의 세계로 그들을 이끄소서

산 제물을 (Hostias)

주여, 찬양과 기도의 산 제물을 드리니
오늘 우리가 추도하는 영혼들을 위해 받아주소서
주여, 일찍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그들을 사망을 지나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지옥의 형벌로부터 신자들의 영혼을 구하시어
그들을 사망을 지나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4악장 : 거룩하시도다 (Sanctus)

너, 시온의 비탄에서 일어나라

거룩하시도다 (Sanctus)

거룩, 거룩, 거룩
만군의 주
하늘과 땅이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하도다

찬미 받으소서 (Benedictus)

높은 곳에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영원한 안식을 (Requiem aeternam)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주님, 영원한 안식을 그들에게 주소서

2013년 3월 12일 화요일

요산요수(樂山樂水) ― 산과 바다의 음악적 빛깔에 관하여 : 드뷔시 《바다》, R.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은 글입니다.
원문 링크: http://g-phil.kr/?p=1446

▶ 소리의 빛깔에 관하여

선율과 리듬과 화성은 전통적으로 서양음악을 이루는 3요소로 꼽혀 왔지요.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음색'이 그 못지않게 중요해 졌습니다. 음색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작곡 기법은 관현악법(orchestration)이고, 음악학자 달하우스는 현대적인 관현악법의 가능성을 제시한 말러 교향곡 1번과 R. 슈트라우스 《돈 쥬앙》을 가리켜 음악적 모더니즘의 뿌리라고도 했습니다. 오늘 감상하실 드뷔시 《바다》와 R.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은 '음색'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 바다의 빛깔에 관하여 ― 드뷔시 교향시 《바다》

드뷔시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미술 사조에서 빌어온 이 말로 드뷔시를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지만, 적어도 교향시 《바다》에 관해 얘기하려면 '인상주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1악장 : 바다의 새벽부터 정오까지 (De l'aube à midi sur la mer)
2악장 : 파도의 희롱 (Jeux de vagues)
3악장 : 바람과 바다의 대화 (Dialogue du vent et de la mer)

1악장은 새벽에 해가 떠서 수평선을 붉게 물들이고, 마침내 해가 높이 떠올라 눈부신 한낮의 햇살을 쏟아내는 모습이 환상적으로 느껴집니다. 음악이 너무나 멋있어서 자세한 설명은 차라리 군더더기가 될 듯해요. 그런데 2악장과 3악장을 들으면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습니다. 이 음악을 들으면서 어딘가 안정감이 없어서 불편한 느낌이 든다면, '발전하는' 음악에 너무 익숙한 탓일지도 모릅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서양음악은, 마치 극(drama)이 기승전결 구조를 따르는 것처럼 어떤 '방향성'을 따라 '발전'하는 짜임새를 갖습니다. 그 바탕이 되는 화성 진행 원리를 작곡가이자 이론가 장필리프 라모는 뉴턴의 중력이론에 빗대기도 했지요. 여기에 계몽주의 사상이 결합하면, 베토벤 교향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둠에서 광명으로' 짜임새가 됩니다.

드뷔시 음악은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배보다 배꼽이 커질 수 있으니 '인상주의' 얘기만 할게요. 음악이 '발전'하지 않고 '방향성' 없이 그저 흘러가니까, 마치 그림을 보는 듯 음악이 정지해 있는 느낌이 들지요.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이 했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시간예술과 공간예술의 차이점을 메우는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드뷔시 음악을 듣고 갸우뚱하게 하는 또 다른 원인은 모네, 르누아르 등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입니다. 드뷔시 음악이 모네 등의 그림과 그렇게까지 닮은꼴은 아니잖아요? 이것은 음악과 미술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드뷔시가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들에게서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상파 화가 중에서도 빛을 묘사하는 획기적인 표현 기법을 개발한 영국 화가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어른어른한 색채로 그림에 담았던 미국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등이 드뷔시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입니다.

▲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 北斎),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뒤(冨嶽三十六景 神奈川沖浪裏)

우키요에(浮世絵)라는 일본 에도시대 풍속화는 인상주의 미술 사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지요. 드뷔시는 그 가운데 호쿠사이의 판화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뒤》를 보고 《바다》를 작곡했고, 이 판화가 초판 악보 표지로도 쓰였습니다. 음악을 들어보면 어딘가 동아시아 느낌이 나지요?

▶ 산의 빛깔에 관하여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음색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작곡기법이 관현악법이라고 앞서 말씀드렸지요. 관현악법과 관련해 중요한 작곡가로 드뷔시, 라벨, 말러,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을 꼽을 수 있지만, 20세기 관현악법 문헌들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작곡가를 한 사람만 꼽으라면 바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일 겁니다.

《알프스 교향곡》에서는 밤-일출-저녁노을-일몰-밤으로 이어지는 '빛' 음형이 다양한 빛깔로 변주됩니다. 그리고 시냇물과 폭포, 풀잎, 꽃잎 등과 더불어 반짝이는 빛도 참 멋지지요. 이 작품에는 표제가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이야기 한 편을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도 있어요. 알프스 산 빛깔은 바다 빛깔과는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까요?

1. 밤 (Nacht) : 파곳과 몇몇 악기가 '밤' 음형을 연주할 동안 다른 악기들이 촘촘한 간격으로 음을 쌓아서 화음이라기보다는 '덩어리'(cluster)를 이루며 무겁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트롬본과 튜바가 마치 여명처럼 흐릿하게 빛나는 음형을 연주합니다. 조금씩 날이 밝아옵니다.

2. 일출 (Sonnenaufgang) : '밤' 음형이 눈 부신 햇살로 바뀌어 마구 쏟아집니다. 이토록 찬란한 소리가 '밤'과 음악적 뿌리가 같다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잘 들어 보세요. 찬란한 햇빛 속에 낯은 음으로 자꾸만 내려가는 '밤' 음형이 들어 있습니다!

3. 등산 (Der Anstieg) : 힘찬 리듬으로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면 '밤'에 나왔던 음형들과 음악적 뿌리가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어째서 이 작품 제목에 '교향곡'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지 알 듯합니다. 말하자면 '밤'과 '일출'이 교향곡의 '도입부'라면, 이 대목이 바로 '제1 주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4. 숲의 입구 (Eintritt in den Wald) : 교향곡의 '제2 주제'라 할 만한 대목이지만, 여기서부터는 '산'에 집중하기로 하지요. 형식 분석에 매달리기에는 '경치'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야생의 위험을 무릅쓰고 숲으로 들어서면 눈앞에 신기한 나무가 가득합니다. 산새가 울고, 꽃이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5. 개울가에서 거닐다 (Wanderung neben dem Bache) : 그리고 시냇물이 보입니다. 물이 차갑습니다. 물고기가 헤엄쳐 다닙니다. 물길을 따라 걸어가면…

6. 폭포에서 (Am Wasserfall) : 폭포가 나옵니다. 커다란 물소리, 물방울이 이리저리 튀기는 모양, 그리고 그 물방울이 햇빛을 만나면…

7. 환영 (Erscheinung) : 폭포에 걸린 무지개, 그리고 물방울마다 반짝이며 너울거리는 빛 알갱이가 꿈결처럼 아름답습니다!

8. 꽃으로 덮인 풀밭에서 (Auf blumigen Wiesen) : 폭포를 지나 더 올라갑니다. 길가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 옵니다.

9. 알프스 목장에서 (Auf der Alm) : 뿔피리 소리, 방울 소리, 소와 양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들판을 뛰노는 모습이 눈에 보일 듯합니다.

10. 길을 잃고 수풀과 덤불 속에서 헤매다(Durch Dickicht und Gestrüpp auf Irrwegen) : 소와 양이 풀을 뜯던 평화로운 산이 길을 잃는 순간 목숨을 위협합니다. 수풀과 덤불이 팔다리를 물어뜯으려고 달려듭니다.

11. 얼음산에서 (Auf dem Gletscher) : 겨우 빠져나오니 눈앞에 얼음산이 보입니다. 만년설이 세월의 무게로 얼어붙은, 알프스 산맥이나 히말라야 산맥 등에서 볼 수 있는 산악 빙하입니다.

12. 위험한 순간들 (Gefahrvolle Augenblicke) : 산꼭대기로 가려면 위험한 곳을 올라야 합니다. 한 발 잘못 디디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돌 굴러떨어지는 소리 들리나요? 자, 겁내지 말고, 숨을 크게 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13. 정상에서 (Auf dem Gipfel) : 드디어 정상입니다! 너무 힘들게 올라왔습니다. 주저앉아서 조금만 쉬자고요. 산꼭대기를 휘돌며 불어오는 바람은 싱그럽기도 하지요!

14. 전망 (Vision) : 이곳이 바로 알프스 산입니다. 아찔한 높이와 거대한 크기에 몸이 떨려 옵니다. 이 산과 견주면 인간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입니까?

15. 안개가 올라오다 (Nebel steigen auf) : 표제 그대로입니다. 덧붙일 말이 없군요.

16. 해가 서서히 지다 (Die Sonne verdüstert sich allmählich) : '밤'이었다가 '일출'이었던 그 음형이 이제는 '저녁노을'로 바뀌었네요.

17. 애가 (Elegie) : 날은 차츰 어두워지고 안개는 올라오는데, 문득 쓸쓸한 기분이 듭니다.

18. 폭풍전의 고요 (Stille vor dem Sturm) : 해 지는 알프스 정상은 참 고요합니다. 그러나 폭풍이 몰려올 듯하니 더 늦기 전에 내려가야 합니다. 바람 소리를 내는 특수악기(wind machine)가 이 대목에 사용되었습니다.

19. 번개와 폭풍, 하산 (Gewitter und Sturm, Abstieg) : 경기필이 제작한 천둥소리를 내는 악기(thunder machine), 바람 소리를 내는 악기(wind machine), 그리고 오르간과 더불어 오케스트라 전체가 폭풍우처럼 쏟아집니다.

20. 일몰 (Sonnenuntergang) : '밤'과 '일출'과 '저녁노을'이었던 그 음형입니다. 폭풍을 뚫고 산에서 내려오는 사이에 해가 집니다.

21. 여운 (Ausklang) : 오르간 소리가 들립니다. 사실은 폭풍이 몰아칠 때부터 들리던 오르간 소리이지만, 이곳에서는 오르간이 음악을 지배하면서 경건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현이 주선율을 이어받아 찬가처럼 부풀렸다가 조금씩 '밤'으로 옮겨갑니다.

22. 밤 (Nacht) : 다시 밤입니다. 처음에 그랬듯이, 어둡고 고요한 밤…

▶ 산과 바다 ― 대자연의 음악에 관하여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입니다. 요산요수(樂山樂水)라고도 하지요. 이번 경기필 연주회 제목 "音樂山音樂水 ― 산과 바다"는 이 말에서 따왔습니다.

그런데 《바다》와 《알프스 교향곡》처럼 자연을 그린 작품도 멋지지만, 자연이 들려주는 '음악'도 참 멋지지요. 물소리, 새 소리, 바람 소리…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전혀 다르게 들리는 이런 소리를 찾아 떠나 보면 어떨까요? 봄나들이 가기 좋은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 티켓 예매

https://www.sacticket.co.kr/home/play/play_view.jsp?seq=14328

2013년 2월 18일 월요일

쳄린스키 《인어공주》와 말러 교향곡 1번 《거인》, 실연을 이겨내는 젊은이의 초상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진에 실은 글입니다.
원문: http://g-phil.kr/?p=1429

▶ 사랑의 아픔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쳄린스키

인어공주는 왜 사람이 되려고 했을까요? 사랑 때문이라면 마녀를 찾아갔을 때 다른 것을 부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안데르센이 쓴 원작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인어공주가 참말로 원했던 것은 영혼이기 때문이랍니다.

구자범 지휘자 선생님은 쳄린스키가 교향시 《인어공주》를 쓰면서 '영혼' 얘기를 음악에 담았다고 생각해요. 쳄린스키는 알마 쉰들러를 짝사랑했지만, 알마는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했죠. 그런데 '알마'(Alma)는 스페인어 또는 옛 이탈리아어로 '영혼'이라는 뜻이래요. 라틴어 '아니마'(anima)에서 온 말이고요.

그러니까 영혼을 갈구하는 인어공주는 알마('영혼')를 사랑했던 쳄린스키 자신과 닮알습니다. 끝내 영혼을 얻게 되는 인어공주처럼, 쳄린스키도 끝내 알마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작품을 썼던 것이지요.

원작에 나오는 영혼 이야기가 잘 기억나지 않으세요? 이참에 진짜 줄거리를 제대로 알아 볼까요?

바닷속 왕국에서 살던 인어공주는 언니들에게 말로만 듣던 물밖 세상을 동경해요. 그리고 15살 생일을 맞아 드디어 물밖으로 나옵니다. 물위에 배가 떠있고 사람들이 춤추고 불꽃놀이도 해요. 사람들 가운데 왕자님이 가장 멋져요. 그런데 밤이 되면서 폭풍이 몰아치고, 왕자님은 물에 빠져 죽어가고, 인어공주가 왕자님을 구해서 바닷가로 데려가요. 그리고 가까운 신전에서 온 아가씨가 나타날 때까지 왕자님을 지켜 봐요. 정신을 잃은 왕자님은 그때까지 인어공주를 보지 못해요.

인어공주는 할머니를 찾아가, 사람들은 물에 빠지지만 않으면 영원히 살 수 있느냐고 여쭈어요. 할머니는 이렇게 말해요. 300년을 사는 인어와 달리 사람은 훨씬 일찍 죽어요. 그런데 인어는 죽으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지만, 사람은 죽으면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살아요.

인어는 왕자를 그리워하고 사람의 영혼을 부러워한 나머지 마녀를 찾아가요. 그리고 인어 꼬리를 사람 다리로 만들어 주는 약을 얻는 대신 혀를 잘라 주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잃어요. 마녀는 이렇게 경고해요. 사람이 되면 다시는 바다로 돌아올 수 없어요. 약을 마시면 다리가 생겨서 누구보다도 멋진 춤을 출 수 있지만, 걸을 때마다 칼에 꿰뚫리는 듯한 고통이 뒤따라요. 영혼을 얻으려면 진실한 사랑을 찾아 입맞춤을 하고, 사랑을 얻고, 그 사람과 결혼해야 해요. 그러면 그 사람의 영혼 일부가 인어공주에게 흘러들어가요. 만약 그 사람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다음날 아침 해뜰 무렵 인어공주는 죽어서 물거품이 돼요.

인어공주는 약을 마시고 다리를 얻어 왕자를 만나요. 왕자는 인어공주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인어공주는 고통을 참고 왕자와 춤춰요. 그러나 왕자의 아버지는 왕자한테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하라고 말해요. 왕자는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지만, 물에 빠졌다가 깨어났을 때 만났던 여자가 그 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바꿔요.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요. 인어공주는 절망에 빠져 동트기를 기다려요. 그때 인어공주의 다섯 언니가 찾아와 이렇게 말해요. 다섯 언니는 마녀를 찾아가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 주고 마법이 깃든 칼을 얻었어요. 인어공주가 그 칼로 왕자를 찔러 죽이고 피를 다리에 적시면 다시 인어가 되어 바다로 돌아갈 수 있어요.

인어공주는 끝내 왕자를 죽이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물거품이 돼요. 그런데 인어공주는 여전히 밝은 햇살을 볼 수 있었어요. 햇살 사이를 투명한 모양으로 떠다니는 공기의 딸들(Luftens Døttre; daughters of air)이 어리둥절해 하는 인어공주에게 이렇게 말해줘요. 인어공주는 영혼을 얻고자 온 마음을 다 바쳐 노력했기 때문에 공기의 딸이 되었어요. 앞으로 300년 동안 착한 일을 하면 영혼을 얻어 하늘나라에 갈 수 있지요. 그리고 착한 아이를 찾을 때마다 영혼을 얻기까지 걸리는 기간이 한 해씩 줄어들고, 나쁜 아이를 만날 때마다 흘려야 하는 눈물 한 방울에 하루씩 기간이 늘어난답니다.

▶ 청년 말러가 좌절을 딛고 일어선 이야기

쳄린스키가 그토록 원했던 '알마'라는 여인은 다름 아닌 말러와 결혼했습니다. 말러는 마흔이 넘어서 꽃다운 알마와 결혼한 행운아였지만, 그런 말러도 쳄린스키 나이 때에는 실연으로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교향곡 1번에는 그런 경험이 녹아 있지요.

구자범 지휘자 선생님께서 어떤 모임에서 말러 교향곡 1번에 관해 강연을 해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쉽게 간추려서 제가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게요. 교향곡 1번은 말러가 직접 가사를 쓴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라는 연가곡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말러는 교향곡 1번 악장마다 표제를 붙였다가 없애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습니다.

제1악장 : 동틀 무렵,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풍경처럼 몸 속 깊은 곳까지 시원해지는 오스트리아의 산과 들이 보입니다. (악보에는 "자연의 소리처럼"이라는 나타냄말이 있습니다.)

뻐꾸기 소리가 들리고, 꽃들이 노래하고, 멀리서 기상나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때 트럼펫이 무대 밖에서 연주합니다. 그리고 좀 있다가 조용히 무대에 입장하지요. 연주에 지각한 사람이 아니니 오해하지는 마세요.)

청년 말러가 나타납니다. 이때 말러의 연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가운데 "아침 들판을 걸었네"에 쓰였던 선율이 나옵니다. 풀잎에 이슬이 반짝이고 새들과 초롱꽃이 "안녕하세요! 아름다운 세상이에요!"하고 인사하는 그곳에서 청년 말러는 사랑을 잃고 홀로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이제 나의 행복이 다시 올까? 아니! 아니! 다시는 내게 행복이 꽃피지 않으리!"

그러나 찬란한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것을 본 말러는 새로운 희망을 얻습니다. 이제 그 여인을 잊을 수 있을 듯합니다. 가슴을 활짝 펴고, 산을 내려가자! 뛰자! 뛰자!

2악장 : 랜틀러(ländler)라는 형식의 춤곡입니다. '땅'을 뜻하는 영어 'land'와 말뿌리가 같지요. 시골 사람들이 춤추며 즐기는 장면입니다. 오늘은 결혼식이 있는 날. 산에서 마을로 내려온 청년 말러는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사내와 혼례를 올리는 모습을 보며 또다시 가슴 아파합니다.

호른 소리와 함께 청년 말러의 추억이 현실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미뉴엣과 짝을 이루는 '트리오'(Trio)입니다. 여기서는 '랜틀러'와 짝이지요. 너무나 아름다운 선율, 사랑에 빠져 행복했던 추억이 절로 떠오르는 음악입니다. 이윽고 호른 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현실이 되돌아옵니다.

3악장 : 청년 말러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더블베이스가 약음기를 끼고 괴상망측한 음색으로 흐느낍니다. 그런데 선율이 어째 익숙하지요? "자크 수사님"(Frère Jacques)이라는 동요입니다. 독일어권에서는 "마르틴 수사님"(Bruder Martin)이고, 영어권에서는 "요한 수사님"(Brother John)이지요. "아 유 슬리핑, 아 유 슬리핑" 하는 영어 가사를 기억하시는 분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말러는 이 유명한 동요를 교향곡에 쓰면서 선율과 리듬과 음색을 고약하게 비틀어 놨습니다. 즐겁게 놀 때 부르는 노래를 장송행진곡처럼 만들다니, 지독한 반어법이지요. 이 선율을 오케스트라가 부풀립니다. 이때 악보에는 "뻔뻔하게"(Keck) 같은 괴상한 나타냄말이 나옵니다.

이렇게 일그러진 동요 선율이 흘러 서글픈 음악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싸구려 길거리 음악, 서커스 광고, '뽕짝'(?) 음악이 끼어듭니다. 청년 말러의 의식세계가 현실과 뒤섞이고, 뒤틀리고, 일그러지는 대목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절망에 빠져서 방황하는데 마침 길거리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요.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 "자~ 애들은 가라!" "기임~밥!" 청년 말러는 세상에서 홀로 버려진 듯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삶의 희망을 잃었던 청년 말러는 보리수 그늘에서 문득 깨달음을 얻습니다. 마치 싯다르타처럼요! 이때 연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가운데 "내 연인의 푸른 눈동자"에 쓰였던 선율이 나옵니다. "길가에 보리수 한 그루 있어, 그곳에서 처음으로 단잠을 잤노라! 나에게 꽃 뿌리는 보리수 아래서 삶을 잊었노라. 모든 것이 다시금 좋아지리라! 사랑도, 고통도, 세상도, 꿈도!"

그러나 비틀린 동요 선율이 다시 나타납니다. 청년 말러는 아직 참된 평안을 얻지 못했습니다.

4악장 : 폭풍우가 몰아칩니다. 금관이 마치 아가리를 벌린 지옥 입구처럼 으르렁거리는 이 대목은 사실 바그너가 《파르지팔》에서 썼던 '성배' 음형, 또는 리스트가 여러 작품에서 썼던 '십자가' 음형을 비틀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 말러는 지옥을 벗어나 다시 깨달음을 얻고, '지옥' 음형이 살짝 바뀌어 '천국'의 성스러운 찬가가 됩니다. 곡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고양감이 음악을 뒤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장된 고양감'만큼이나 거짓된 승리, 불완전한 깨달음입니다.

1악장에 나왔던 "자연의 소리"가 다시 나옵니다. 그러나 이내 잔뜩 뒤틀린 '현실'이 반격해 옵니다. 몇 차례에 걸친 작은 깨달음이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빛이 바래는 모습은 마치 불교의 가르침 같습니다. 깨달음에는 수많은 단계가 있으니 참된 깨달음을 얻으려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고요.

청년 말러의 참된 깨달음은 '천국' 음형과 함께 나타나되, 앞선 거짓 승리와 달리 과장되지 않습니다. 악보에는 "승전가"라고 나옵니다. 호른 연주자들과 일부 트럼펫·트롬본 연주자가 말러의 지시대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승리의 팡파르를 연주합니다.

▶ 거인(Titan)과 초인(Übermensch)

말러 교향곡 1번에는 '거인'(Titan)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인족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구자범 지휘자 선생님은 그보다는 정신적인 의미,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뜻한다고 생각하시더군요.

이렇게 생각하면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한 초인(Übermensch)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음악에 나타나는 '깨달음'의 성격이 좀 다른 듯하기는 하지만요. (박순영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의 설명을 빌자면, "니체가 말하는 독일어의 위버멘쉬(Über-mensch)는 다른 차원으로 이행하는, 저편으로 넘어가는(Über- gehen), 자신을 극복하려는 사람"이며, “어린아이처럼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목표를 향해 몰입하는 단계”가 참된 깨달음의 단계입니다.)

2013년 1월 21일 월요일

드뷔시 《야상곡》과 홀스트 《행성》, 밤과 우주의 음악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진에 실은 글입니다.
☞ 원문 링크 : http://g-phil.kr/?p=1358

▶ 드뷔시, 홀스트, 그리고 어떤 모더니즘

"말하자면 두 가지 아방가르드가 나란히 형성되고 있었다. 파리 사람들은 밝은 일상의 세계로 옮겨갔다. 빈 사람들은 반대 방향으로 가면서, 성스러운 횃불로 무시무시한 심연을 밝혀 나갔다."

음악평론가 알렉스 로스(Alex Ross)는 1900년대 유럽 음악계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빈 사람들"은 쇤베르크, 베베른, 베르크 등을 가리키고, "파리 사람들"은 드뷔시, 사티 등을 가리키지요. 쇤베르크가 무조음악으로 나아갈 때, 드뷔시는 전통적인 기능화성과 장·단조 체계를 살짝 비켜가면서 재즈나 각국의 민속 음악 등 이국적인 요소를 자신의 음악에 녹여 내는 식으로 새로움을 추구했습니다.

드뷔시 음악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모더니티'(modernity)는 현대적인 관현악법에서 오는 현대적인 음색입니다. 음악학자 달하우스(Carl Dahlhaus)는 말러 교향곡 1번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돈 후안》이 초연된 1890년을 음악적 모더니즘의 시초로 보았지요. 바로 두 작품에서 나타나는 현대적인 관현악법 때문입니다. 그리고 드뷔시가 빚어낸 음색은 때때로 '인상주의'라 불리는 음악 어법과 결합해 프랑스 모더니즘 음악 전통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영국 작곡가 구스타프 홀스트(Gustav Holst)도 어찌 보면 드뷔시와 비슷한 길을 갔습니다. 영국 민요 선율을 음악에 녹여내고자 했고, 인도 음악에 영향을 받았으며, 복조성(polytonality)이나 교회선법 등으로 전통적인 조성음악 어법을 살짝 비켜가는 동시에 현대적인 관현악법으로 나름의 현대성을 좇았습니다.

▶ 드뷔시 《야상곡》

야상곡(Nocturne)이라 하면 쇼팽이나 존 필드 등이 작곡한 서정적인 피아노곡을 곧잘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드뷔시 《야상곡》은 미국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의 《야상곡》 연작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작곡한 3악장 관현악곡으로, 작곡가가 한 말을 빌자면 "야상곡의 흔한 형식이 아니라 낱말이 암시하는 여러 가지 인상과 빛이 만드는 특별한 효과"를 낸 작품입니다.

작곡가는 '구름'(Nuages) 악장을 이렇게 설명했지요. "하늘의 변함없는 정경과 구름의 느리고 장엄한 움직임이 잿빛에 살짝 흰 빛깔을 더하여 사라지는 모습을 나타낸다."

'구름' 악장에서는 목관악기와 바이올린이 음악을 끌고 가면서 중간 음역이 비어 있을 때가 잦습니다. 그래서 음악이 붕 떠있는 느낌을 주지요. 화성 진행도 전통적인 방식과 달리 음악 속을 둥둥 떠다닙니다. 음악학자 타루스킨(Richard Taruskin)은 음색과 음역 등의 요인이 악곡을 지배하면서 전통적인 조성·화성 체계를 회피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축제'(Fêtes) 악장은 파리에 있는 볼로뉴 숲(Bois de Boulogne)에서 열리는 축제를 묘사한 음악입니다. 드뷔시는 이렇게 설명했지요. "공기가 떨리고 춤추는 리듬과 갑자기 터져 나오는 빛을 떠올리게끔 한다. 여기에 행진 에피소드(현란하고 비현실적인 환상)가 나타나 축제 장면을 지나며 합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배경은 꿋꿋하게 변함없이 이어지는데, 음악과 반짝이는 가루가 우주적인 리듬 속에서 뒤섞이는 축제 분위기이다."

'인어'(Sirènes) 악장에는 여성 합창단이 가사 없이 부르는 '인어의 노래'가 나오지요. 드뷔시는 이와 관련해 "바다의 모습과 끊임없는 리듬을 그렸으며, 달빛을 받은 은빛 물결 속에서 인어가 웃으며 지나갈 때 부르는 신비로운 노래가 들린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인어'와 '세이렌'은 조금 다르지만, 때때로 두 낱말이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하므로 이 글에서는 그냥 '인어'라고 쓰겠습니다.)

드뷔시 《야상곡》은 1900년 12월 9일 파리에서 1·2악장이 초연되었고, 1901년 10월 27일 전곡이 초연되었습니다.

▶ 홀스트 《행성》

홀스트 《행성》은 7악장으로 된 관현악곡으로 1918년 9월 29일 영국에서 초연되었습니다. 홀스트는 본디 점성술에 영감을 받아 이 곡을 썼다고 해요. 생각해 보면 그때 기술로는 태양계 행성을 자세히 관찰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과학적 사실보다 점성술에서 더 큰 영감을 받는 게 자연스러웠겠지요.

그런데 음악을 들어 보면, 마치 천체망원경으로 촬영한 고해상도 사진을 보는 듯합니다. 아니, 아예 우주선을 타고 가까이에서 행성들을 구경하는 느낌마저 들어요. 참 신기하지요. 현대적인 관현악법에서 오는 현대적인 음색이 가장 큰 비결이라 할 수 있을 거예요.

화성, 전쟁을 가져오는 자 : 화성을 뜻하는 ‘마르스’(Mars)는 로마 신화에서 전쟁의 신 이름이지요. 이 곡은 워낙 강렬해서, 그냥 블록버스터 SF 영화 한 편 보듯이 감상하면 됩니다. 이 곡을 듣고 영화 《스타워즈》를 떠올리는 분도 있을 텐데요, 사실은 작곡가 존 윌리엄스가 《스타워즈》 주제곡에서 이 음악을 흉내 냈습니다. 특히 관현악법이 비슷해요.

금성, 평화를 가져오는 자 : 금성을 뜻하는 ‘비너스’(Venus)는 사랑의 여신이자 평화와 화합을 부르는 여신이기도 하지요. 음악이 참 우아하지만, 악보를 들여다보면 화성과 리듬, 템포 등이 잔뜩 꼬여 있습니다. 드뷔시 음악에 영향받은 홀스트의 '영국식 모더니즘'이 이렇게도 나타나는군요. 어찌 생각하면 이 곡에서 금관은 호른만 나오고 저음역 악기가 거의 안 나오는 점 등이 드뷔시 《야상곡》의 '구름' 악장과 닮은꼴입니다.

수성, 날개 달린 전령 : 수성을 뜻하는 ‘머큐리’(Mercury)는 로마 신화에서 상업과 교역의 신인 메르쿠리우스(Mercurius)의 영어 이름이지요.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날개 달린 신발을 신은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음악을 들어 보면 재빠르게 날아다니는 듯한 음형이 나타납니다.

목성, 쾌락을 가져오는 자 : 목성을 뜻하는 ‘주피터’(Jupiter)는 로마 신화의 최고신이며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동일시되는 ‘유피테르’(Iuppiter)의 영어 이름이지요. 16분음표로 소나기처럼 후두두 시원하게 쏟아지는 현악기 소리가 마치 휘산제나 박하사탕을 입에 넣은 듯이 상쾌합니다. 곧이어 호른이 호쾌한 선율을 노래합니다. 이 대목은 1980년대 MBC 뉴스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되어 국내에 널리 알려졌지요. 중간에 찬가처럼 나오는 영국 민요풍 선율도 유명합니다.

토성, 황혼을 가져오는 자 : 토성을 뜻하는 ‘새턴’(Saturn)은 시간과 농업의 신이자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와 동일시되는 '사투르누스(Saturnus)'의 영어 이름이지요. 음악에서 느껴지는 몸서리 쳐지는 황량함은 마치 우주 전쟁으로 폐허가 된 별을 보는 듯합니다.

천왕성, 마법사 : 천왕성을 뜻하는 ‘우라누스’(Uranus)는 가이아의 아들이자 남편이며, 주피터(제우스)와 대립하는 하늘의 신 이름이지요. 바순이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듯한 음형이 어찌 들으면 뒤카(Paul Dukas)의 명곡 《마법사의 제자》와 닮았습니다. 장난꾸러기 마법사가 우주적인 규모로 분탕질을 치는 모습이 떠오른달까요. 그런데 처음 나오는 '솔-미♭-라-시' 음형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이것을 독일어식 음계로 바꾸면 'G-Es-A-H'가 되지요. 'Es'는 'S'를 영어식으로 읽은 발음과 같고, 여기에 알파벳 몇 개만 채워 넣으면 GuStAv-Holst, 그러니까 작곡가의 이름이 됩니다. 장난꾸러기 마법사의 정체는 작곡가 자신이로군요!

해왕성, 신비로운 자 : 해왕성을 뜻하는 '넵튠'(Neptune)은 로마 신화에서 바다의 신이자 그리스 신화의 '포세이돈'과 동일시되는 넵투누스(Neptūnus)의 영어 이름이지요. 인어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여성 합창이 음악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드뷔시 《야상곡》의 '인어' 악장과 닮은꼴입니다. 여성 합창뿐 아니라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는 음악 어법이 드뷔시와 비슷하기도 합니다.

▶ 망망대해와 망망우주(茫茫宇宙)

일상의 풍경을 그린 드뷔시 《야상곡》과 우주를 신화적 상상력으로 그린 홀스트 《행성》이 '바다'라는 공통분모로 만나는 대목이 흥미롭습니다. 홀스트가 드뷔시 음악에서 영향받기도 했지만, 바다와 우주가 닮았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망망대해'라는 말을 우주에 관해서도 쓸 수 있으니까요. 인공위성도 레이더도, 무선통신 기술도 없이 지도와 나침반만으로 바다를 헤매야 했던 시절에는 더하지 않았을까요.

그러고 보면 우주선(宇宙船 · Starship)이라는 말은 우주를 항해하는 '배'라는 뜻이죠. 《스타트렉》이라는 유명한 SF 드라마를 보면, 우주를 탐사하는 군대 이름이 '우주해군'(Starfleet)이고 계급 체계가 미국 해군 계급과 일치합니다. 'USS 엔터프라이즈'라는 우주 전함은 미국 해군에서 현재 운용하고 있는 항공모함 이름이기도 하고요. 전함에 탑재된 무기 이름은 '광자 어뢰'(photon torpedo)입니다.

끝없이 넓게 펼쳐진 바다,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우주를 헤쳐나가는 인간이 느낄 외로움에는, 그래서 '인어의 노래'라는 판타지가 필요합니다. 드뷔시의 '인어'와 홀스트의 '인어'가 이렇게 만났습니다.

천지현황 우주홍황(天地玄黃 宇宙洪荒).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거칠다. 천자문이 이렇게 시작하지요. 우리 조상은 어려서 글을 익힐 때부터 우주에 대해 배웠다고 생각하니 새삼 신기합니다. 경기필이 연주하는 밤과 우주를 듣고 돌아가는 길에 밤하늘을 한 번 찬찬히 눈에 담아 보면 어떨까요?

※ 티켓 예매 :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12020805

2013년 1월 24일 일부 표기법 수정

2012년 6월 18일 월요일

해설: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 보로딘 《이고르 공》 중 ‘폴로베츠인의 춤’ 등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http://g-phil.kr/?p=978


보로딘 《이고르 공》 중 ‘폴로베츠인의 춤’은 지난해 3월 24일 의왕시 서울소년원에서 있었던 구자범 지휘자 취임 후 첫 음악회에서 연주했던 곡입니다. 오페라 《이고르 공》은 외국에 잡혀 온 임금님 이야기입니다. 이고르 공이 이끄는 러시아 군대가 튀르크계 민족인 폴로베츠인과 전쟁을 하는데, 이고르 공이 크게 지고 포로로 사로잡히고 말아요. 그런데 폴로베츠의 '칸'은 이고르 공이 적장인데도 손님 대접을 하고 잔치를 열어서 위로해 주지요. ‘폴로베츠인의 춤’은 이때 나오는 음악입니다. 화려한 춤이 멋진 장면이고, 음악도 그만큼 화려합니다.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는 지난해 6월 24~25일 수원과 고양에서 있었던 정기공연 때 연주한 곡입니다. 이날 경기필은 《로마의 축제》, 《로마의 분수》와 더불어 '로마 3부작'을 국내 최초로 한자리에서 연주했지요. 《로마의 소나무》는 로마 시대 모습을 담은 곡으로, 소나무의 '눈'으로 바라본 로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4개 악장으로 되어 있는데요, 레스피기는 각 악장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① 보르게제 저택의 소나무 (I pini di Villa Borghese) : 보르게제 저택에 있는 소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뛰논다. 둥글게 돌면서 춤추고, 병정놀이하며 행진하고, 싸우고, 저녁 제비처럼 흥분해 소리치고, 떼 지어 돌아다닌다.

② 카타콤 부근의 소나무 (Pini presso una catacomba) : 소나무 그림자가 카타콤 입구에 드리운다. 깊은 곳에서 시편을 노래하는 구슬픈 소리가 솟아올라 장엄한 찬가처럼 공기 중에 떠다니다가 조금씩 신비롭게 사그라진다.

③ 쟈니콜로의 소나무 (I pini del Gianicolo) : 공기가 떨린다. 쟈니콜로에 소나무가 보름달 밝은 빛을 받고 서 있다. 나이팅게일이 노래한다.

④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I pini della Via Appia) : 어스름한 동틀 무렵 아피아 가도. 소나무 한 그루가 마법의 풍경을 지켜본다. 어렴풋하고 끊임없는 발소리. 시인인 소나무는 지나간 영광의 환상을 본다. 트럼펫 소리가 들리고, 새로 뜬 태양의 눈부심 속에서 집정관의 군대가 나타나 '신성한 길'(Via Sacra)을 따라 신전으로 개선행진을 한다.

바그너 《파르지팔》 1막 간주곡과 《로엔그린》 3막 전주곡은 올해 5월 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있었던 정기공연 때 연주한 곡입니다. 《파르지팔》과 《로엔그린》은 성배 수호 기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파르지팔》은 주인공 파르지팔이 성창(롱기누스의 창)을 찾아 나서면서 깨달음을 얻는 내용입니다. "자비심으로 깨달으리라, 순수한 바보여"라는 계시와 더불어 깨달음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이 담긴 작품이지요. 이번에 경기필이 연주할 1막 간주곡은 파르지팔과 성배 기사 구르네만츠가 성배 의식에 참석하고자 몬살바트 성으로 이동하는 장면에 나오는 음악이며, '장면전환 음악'이라고도 합니다. "이곳에서 시간은 공간으로 변한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대사에 이어지는 신비로운 음악이지요.

《로엔그린》은 《파르지팔》 이후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로엔그린은 파르지팔의 뒤를 이어 성배 수호 기사들을 이끌게 되는데,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은 로엔그린이 몬살바트 성을 떠나 활동하는 이야기입니다. 로엔그린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엘자'를 대신에 결투에 나섰다가 엘자와 결혼하지요. 3막 전주곡은 결혼식 장면을 이끄는 화려한 음악입니다.

말러 교향곡 3번은 올해 3월 17일 수원에서 있었던 정기공연 때 연주한 곡입니다. 말러는 교향곡 3번에 세계를 담고자 했고, 바위(1악장), 꽃(2악장), 동물(3악장), 사람(4악장), 천사(5악장), 사랑(6악장)의 관점에서 보는 세계를 에피소드처럼 들려주는 짜임새로 작품을 썼습니다. 이번에 경기필이 연주할 6악장에는 '사랑이 내게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데, 고통으로 가득한 세계를 사랑의 관점에서 보는 음악입니다. 6악장이 말러가 보고 싶어한 세계이고, 사랑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2012년 5월 5일 토요일

나는 바그네리안(Wagnerian)이다

※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http://g-phil.kr/?p=911

▶ 바그네리안과 크리스티안

옥스퍼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에서는 '바그네리안(Wagnerian)'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습니다.

① (형용사) 독일 오페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와 관련 있거나 그가 쓴 음악, 음악 이론 또는 극음악 작곡 이론과 관련 있는
② (명사) 바그너 숭배자 또는 지지자

'바그너―바그네리안'은 '크리스트―크리스티안'과 짜임새가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저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의 종교적으로 숭배한다는 뜻이지요. 바그너가 살았을 때부터 바그너―브람스 대립 구도가 있어서 이런 분위기가 손쉽게 생겨났고요. 더군다나 바그너가 민족주의를 불러내 가며 저주를 퍼부어댔던 프랑스에서도 바그네리안이 제법 많았다고 합니다.

저는 바그네리안입니다. 제가 블로그 등에서 쓰는 공식(?) 프로필에는 이런 말이 들어가지요:

(김원철은) 바그너가 《파르지팔》을 작곡하던 무렵으로부터 100년, 바그너가 서거한 지 95년 만에 태어났다. 김원철이 태어나던 날 몬살바트 성에서 성배 기사 세 명이 찾아와 축복했으며, 어려서부터 잔[杯] 종류, 특히 팥빙수 그릇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확인되지 않은 설이 있다. 스물두 살 되던 해에 성배의 계시를 받고 바그너 사도가 되었다. 현재 바그너 성지 순례를 위해 경전을 연구하고 있다.

이쯤 되면 저를 놀리는 말이 나올 법합니다. 이렇게요: "여러분께서는 지금 말기 증세를 보고 계십니다!"

▶ 바그너 색깔론

제가 바그네리안이라고 하면 제 정치성향이 극우적일 것이라고 오해하시는 분도 있어요. 억울합니다. 이참에 밝혀 둘게요. 저는 지난 총선 때 진보신당에 투표했습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좌파'는 아니고 '자유주의자(liberalist)'입니다. 유럽 해적당(Pirate Party) 강령을 이어받은 정당이 생긴다면 지지할 생각이고요.

바그너는 반유대주의자였습니다. 「음악 속 유대주의」(Das Judenthum in der Musik)라는 글을 처음에는 필명으로, 나중에는 실명으로 발표해서 악명을 떨쳤지요. 이 글에 나오는 '유대인'의 정체는 알고 보면 두 사람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젊은 바그너에게 수많은 도움을 주었던 작곡가 마이어베어, 그리고 바그너가 평생 열등감에 시달렸던 천재 멘델스존이지요. 이 두 사람은 바그너보다 먼저 성공한 유대인 음악가로 바그너 출세길에 걸림돌이 되었고, 바그너는 당시 독일에 창궐하던 반유대 정서를 이용해서 두 사람 때리기에 성공했습니다. 심보가 고약해요. 게다가 글에 나타난 인종주의는 두 사람을 공격하는 도구일 뿐이라 하기 어렵고, 바그너의 유대인 친구들을 읊어대는 정도로는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를 파시즘으로 곧바로 이어 말하는 일은 잘못입니다. 인종주의와 파시즘이 무관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둘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또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는 바그너 후손의 명백한 나치 부역 행위와도 곧바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20세기 유럽 사회가 저지른 잘못을 두고 19세기 사람인 바그너를 불러내 탓하는 일이 바르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또 알고 보면 바그너의 정치성향은 평면적이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바그너는 무정부주의자, 위험한 혁명가 등으로 불렸습니다. 푸르동, 바쿠닌 등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어울리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바그너는 본디 '좌파'였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좌파 지식인들과 독일민주공화국 바그너 학자들은 바그너를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예언가'로 선언하기도 했지요. '바그너=히틀러'라는 편견이 널리 퍼진 요즘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술가나 예술 작품 자체가 아니라 예술가 및 작품을 둘러싼 담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화평론가 이택광 선생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와 관련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바그너에게 책임을 묻는 그 행위를 확대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거론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야한다. 말하자면 나치에게 책임을 묻는 행위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행하는 만행에 대한 책임을 묻는 행위와 함께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책임을 묻는다'는 윤리적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당성이다.

유대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이택광 선생이 지적한 바로 그 문제를 두고 때때로 이스라엘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곤 합니다. 또한 바렌보임은 서동시집 오케스트라(West-Eastern Divan Orchestra)를 만들어 이끄는 등 음악으로 중동 평화에 이바지하고 노벨 평화상 후보에까지 올랐으며, 역사상 가장 자주 바그너 음악을 지휘했고, 텔아비브에서 처음으로 바그너 음악을 지휘하기도 했지요. 아직도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 오페라 전막이 공연된 일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그너 음악 일부가 공연된 일은 종종 있었고, 지난해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후손이 지휘하는 이스라엘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지크프리트 목가》를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2010년 11월에는 이스라엘에 바그너 협회가 생기고 법무부 허가까지 받았다네요.

▶ 음유시인 기사와 성배수호 기사

이번에 경기필이 공연하는 작품은 모두 기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이번 연주회에서 음유시인 기사가 나오는 두 작품을 1부에 연주하고, 성배 수호 기사가 나오는 두 작품을 2부에 연주합니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와 《탄호이저》는 둘 다 노래자랑 이야기입니다. 노래하는 기사가 나오고, 우승자는 신부를 얻게 된다는 설정도 비슷해요. 《파르지팔》과 《로엔그린》은 주인공이 성배 수호 기사라는 대목이 닮았습니다. 로엔그린이 파르지팔 후계자이기도 하지요.

▶ 기사 이야기, 음유시인, 그리고 게르만 전설

옛날부터 유럽에는 기사들의 모험을 그린 전설이 많았고, 기사들이 직접 음유시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지요. 12~14세기 독일-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던 기사 출신 음유시인을 민네징어(Minnesinger)라고 합니다.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에 나오는 탄호이저, 볼프람 폰 에셴바흐,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 등은 실존했던 민네징어입니다. '민네'(Minne)는 사랑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 사랑이란 주로 정신적인 사랑을 뜻했습니다. 『게르만 신화 · 바그너 · 히틀러』를 쓴 안인희 선생은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원래 기사는 봉건 군주의 신하였지만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면서 기독교 기사, 혹은 신의 기사로 불렸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 기독교도로서의 미덕은 헌신과 체념, 그리고 많은 경우 금욕적인 순결이었다. 십자군 전쟁 동안 기사들은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국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한동안 전쟁이 거의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이럴 경우 정상적이고 평화로운 결혼 생활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떤 기사들은 결혼을 포기하고 수도사처럼 생활하기도 했다. 그들은 신분이 고귀한 부인, 대개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군주의 부인을 사모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은 실질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징적이고 정신적인 사랑이었다. […] 기사에게 어울리는 사랑은 바로 이런 높은 사랑이고, 그것은 성모 숭배와 여러 가지로 닮은 점이 있다. 이런 높은 사랑의 전통으로부터 여성에게 깍듯한 기사도 전통이 생겨난 것이다.

오페라 《탄호이저》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실존 인물이 나오기도 하지만, 실제 있었던 일보다는 초현실적인 전설이 작품에 더 많이 들어가 있지요. 탄호이저는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교황 앞에서 뉘우친 일이 있는 사람인데,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에서는 교황이 '내 지팡이에 새싹이 돋지 않으면 그대는 용서받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탄호이저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지팡이에 참말로 새싹이 돋아버립니다. 더 자세한 줄거리를 이 글에서 소개하지는 않을게요.

민네징어가 12~14세기에 활동했다면, 14~16세기에는 마이스터징어(Meistersinger)라 불리는 음유시인이 활동했습니다. 마이스터징어는 대개 귀족이 아니라 장인 길드(guild)에서 활동한 평민 계층이었지요. 바그너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에 나오는 한스 작스(Hans Sachs)는 실존했던 마이스터징어입니다. 구두장이이기도 했고요.

경기필 공연에서는 '마이스터징어'라는 낯선 말을 '명가수'로 옮겼습니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기사인 '발터 폰 슈톨칭'이 마이스터징어에 도전하는 이야기인데, 바그너는 이 이야기에 빗대어 자신의 예술관을 드러내고 독일 예술을 찬양했습니다.

여기에는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토벤이 고전주의 음악 양식을 완성하고 낭만주의 시대를 열어젖힌 뒤로, 베토벤이 남긴 음악 유산을 정당하게 계승한 작곡가가 누구냐를 놓고 담론 투쟁이 일어납니다. 바그너를 중심으로 하는 파벌과 브람스 · 한슬리크를 중심으로 하는 파벌이 격렬한 투쟁을 벌였고, 그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이를테면 '수준 높은 애호가는 실내악을 듣는다'라는 속설은 본디 바그너 진영이 진보적이라는 주장에 대항해 브람스-한슬리크 진영에서 내놓은 논리였지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 옛 규칙을 고집스럽게 떠받드는 인물인 '직스투스 베크메서'는 바그너가 브람스-한슬리크 진영, 더 정확히는 한슬리크(Eduard Hanslick)를 비꼬려고 꾸며낸 인물입니다. 바그너는 대본을 쓸 때 '한스 리히'(Hans Lich)라는 이름을 썼다가 너무 노골적이라서 '베크메서'로 바꿨다네요. 한슬리크는 당시 이름을 떨치던 음악학자이자 평론가로 바그너와는 사이가 매우 나빴지요. 베크메서와 대비되는 두 사람, 즉 새로운 시도를 망설이지 않는 발터 폰 슈톨칭과 '온고지신' 원칙을 가장 훌륭하게 실천하는 진정한 명인 한스 작스는 바그너 자신을 나타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성배와 현자의 돌

바그네리안이 생겨나는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설정이 주는 매력을 중요하게 꼽을 수 있을 듯합니다. 이번 경기필 연주회 포스터를 보고 사람들이 '게임 포스터 같다'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바그너 작품이나 요즘 유행하는 롤플레잉 게임(Role-playing game)이나 모두 신화와 마법의 세계를 그리거든요. 바그너 작품에 나오는 고유명사를 인터넷 검색해 보면 게임 관련 글이 더 많이 뜨기도 합니다.

《파르지팔》은 아서(Arthur) 왕을 따르던 '원탁의 기사'들이 성배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합니다. 명검 '엑스칼리버'와 마법사 '멀린'이 나오는 바로 그 전설이지요. 가웨인(Gawain), 랜슬롯(Lancelot), 퍼시벌(Percival), 트리스트람(Tristram), 갤러해드(Galahad) 등이 원탁의 기사로 유명하고요. 이 가운데 성배를 찾는 데 성공했던 기사는 퍼시벌, 달리 쓰면 파르지팔입니다.

퍼시벌(파르지팔)이 성배를 찾았다는 이야기는 그냥 전설이고, 실제로는 십자군 전쟁 때 템플기사단(Templar)이 찾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템플기사단이 십자군 전쟁에 참전할 때 단원 수는 명분과 어울리지 않게 9명뿐이었고, 사실은 단원들이 솔로몬 성전 터에 천막을 치고 10년 넘게 발굴·탐사 작업을 벌였다고 합니다. 거기서 뭘 찾아내거나 배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돌아와서 갑자기 큰돈을 벌고 어마어마한 권력을 거머쥐었습니다. 화폐를 발명한 사람들이 바로 템플기사단이기도 하지요.

그랬다가 갑자기 망했습니다. 템플기사단에 큰 빚을 진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템플 기사단을 이단으로 몰아 숙청해 버렸지요. 이 사건은 상식에 한참이나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미국 대통령이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해체하고 주요 인물을 국가반역죄로 처벌하는 일과 비슷하거든요. (FRB는 민간단체이면서도 달러 화폐를 독점 발행할 수 있는 엄청난 권리를 가지고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대통령이라도 함부로 할 수 있는 단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템플기사단 숙청 사건과 관련해 수많은 음모론이 생겨났습니다.

중세 기사이자 음유시인이었던 볼프람 폰 에셴바흐(Wolfram von Eschenbach)는 『파르치팔』(Parzival)이라는 서사시를 썼습니다. 바그너는 이 작품을 중요하게 참고해서 《파르지팔》(Parsifal)을 썼습니다. 볼프람을 《탄호이저》에 등장인물로 쓰기도 했고요. (에셴바흐는 성이 아니라 출신지입니다. 중세시대 사람이라 성이 없어요.)

『신의 지문』 등을 쓴 작가 그레이엄 핸콕은 볼프람이 템플기사단원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학술적으로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는 주장인데,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볼프람이 『파르치팔』을 쓰기 시작한 때는 십자군이 살라딘 군대에 패하여 예루살렘 왕국이 함락된 직후이며, 『파르치팔』에 묘사된 배경은 아서 왕 시대가 아닌 십자군 원정 당시와 맞아떨어진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 그레이엄 핸콕은 『파르치팔』에 묘사된 지리는 성궤가 숨겨진 위치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본격적인 음모론입니다. 볼프람은 성배가 돌(石)이라 했습니다. 음모론자들은 성배가 돌과 관련 있는 지식이며, 그 지식은 영생 또는 영혼 전이와 같은 초과학적 능력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중세시대에 유행했던 연금술은 불로불사를 가능하게 한다는 '현자의 돌'(elixir)을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고 합니다.

이집트에 피라미드가 세워진 때는 신석기시대였지요. 돌도끼 휘두르던 그때에 현대과학으로도 비밀을 밝히지 못하는 피라미드가 세워질 수 있었던 까닭을 학술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사시대'라고 부르는 옛날, 또는 그보다도 앞선 먼 옛날에 고등문명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배란 그 초고대문명에서 나온 파편이라고요.

음모론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단체 프리메이슨(Freemason)은 본디 '자유석공조합'이라는 뜻이지요. 숙청에서 살아남은 템플기사단원들이 만든 단체가 바로 프리메이슨이라고도 합니다. (프리메이슨은 서울 이태원, 경기도 파주, 그리고 부산에도 지부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노파심에서 덧붙이지만, 음모론에 너무 빠지지는 마시고 재미로만 봐 주세요. 단일세력이 세계를 암중 지배한다는 식의 거대음모론은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기밀문서만 봐도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지요. 중요한 것은 바그너가 《파르지팔》에서 나타낸 상상의 세계와 철학적 메시지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바그너는 1872년 베를린에서 프리메이슨 가입 신청을 했다가 "은근한 압력"을 받고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 뒤에 《파르지팔》을 썼지요. 바그너는 《파르지팔》에 나오는 성배기사단이 템플기사단과 복장이 비슷하다고도 했습니다. 바그너의 장인이었던 리스트는 1841년 프리메이슨 프랑크푸르트 지부에 가입했고, 1870년 부다페스트 지부에서 프리메이슨 3도 회원(Master)이 되었습니다. 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이름난 음악가 가운데 상당수가 적어도 한때나마 프리메이슨 또는 관련 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바그너는 성배가 '왕의 피'를 뜻하는 "상 레알"(Sang Réal)에서 온 말이라 했습니다. 영화 《다빈치 코드》 또는 원작 소설을 보면 비슷한 얘기가 나오지요? 다만, 바그너는 '왕의 피'를 혈통 개념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파르지팔》을 보면 암포르타스 왕이 성창(롱기누스의 창)에 찔려서 피를 흘리는 얘기가 나오는 정도이고, 수정으로 된 잔(Kristallschale)이 성배로 나옵니다. 앗, 그러고 보니 수정은 광물, 그러니까 돌이지요!

《로엔그린》은 《파르지팔》 이후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로엔그린은 파르지팔의 뒤를 이어 성배수호기사를 이끌게 되는데,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은 로엔그린이 몬살바트 성을 떠나 활동하는 이야기입니다. 로엔그린은 볼프람 폰 에셴바흐가 쓴 서사시 『파르치팔』(Parzival)에 처음 나오는 이름이며, 원작에서는 '로에란그린'(Loherangrin)이었다가 13세기 후반에 전해진 판본에서 로엔그린(Lohengrin)으로 바뀌었습니다.

▶ 파르지팔의 고통과 깨달음에 대하여

《파르지팔》에는 이런 계시가 나옵니다. "자비심으로 깨달으리라, 순수한 바보여"(durch Mitleid wissend, der reine Tor).

이 말은 《파르지팔》에서 바그너가 나타내고자 한 철학적 메시지를 대표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철학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래서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하시는 이진 선생이 쓴 글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를 빌려 올까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der doch alles weiss)' 구르네만츠도, 윤회로 영원히 반복되는 세월동안 무수한 일들을 보아온 쿤드리도(denn nie lügt Kundry, doch sah sie viel), 성스러운 자 성배왕 티투렐도, 직접 계시를 들은 암포르타스도, 성스러움의 이면에서 사악한 마법을 알아낸 클링조어도 그 앎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니 "너 정말 그냥 바보일 뿐이로구나!"라는 말을 할 때, 구르네만츠는 사실 자신도 모르는 맥락에서 진실을 말한 것이 된다.

"순수한 바보"만이 깨달음을 얻어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까닭은 지식이 깨달음을 방해하기 때문이라네요. 지식이 아니라 자비심(Mitleid)으로 깨달아야 하지요. 자비심을 뜻하는 독일어 "Mitleid"는 함께(Mit) 고통받는다(leiden)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남의 고통을 그저 아는 일과 그것을 함께 느끼는 일은 다릅니다.

그 좋은 예가 될 '책상 살인자(Schreibtischmörder)'라는 말이 있다. 나치의 경험이 만들어 낸 이 단어는 매사에 얌전하고 규정과 관습에 따라 모범적으로 살는 듯 '정상적으로' 보이는 인간이 거리낌없이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아이러니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 '남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평범한 삶을 위한 안전핀이 된다.

반면, 남의 고통을 느끼는 것 즉 자비심은 그 자체가 일상을 벗어나는 경험이자 실천이다. 자비심은 함께 고통을 겪는 삶으로,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보살행'으로 연결된다. 필자의 부족한 이해력의 한계 안에서나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참된 자비심(Mit-leid)는 곧 보살행(mit-leiden)이다.

이진 선생은 바그너가 영향받았던 쇼펜하우어 철학과 불교 사상을 아우르며, '함께 고통받는' 일에서 그치지 말고 '함께 기뻐하는'(Mit-Freude)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바그너가 음악으로 나타내고자 한 진정한 철학적 메시지라고 말합니다.

보살은 일체중생을 구제하려고 열반에 들지 않지만, 역설적이게도 실제로 보살에 의해 구제되는 중생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각자는 (자신 안에서 불성을 깨닫는 것을 통해) 각자를 구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행은 이러한 의미에서 보살의 '자기' 수행과 동일할 것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요, 살며 살게하라(Live and let live)는 지혜이다.

그리고 이럴 때, 고통받는 자에게 내미는 손길은 더이상 '함께 슬퍼하는 것도 함께 고통을 겪는 것도 Mit-Leid(en)'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차라리 "함께 기뻐한다 Mit-Freude"는 말로 비로소 제대로 전달된다.

[…] 어리석음과 폭력이 반복되는 잔인한 현실을 함께 바라보면서도 "만인은 만인에 대한 신(神)(homo homini deus)"이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으니 바로 스피노자다. 고통받는 이들을 더 이상 동정하지 말라고, 동정이 아닌 사랑을 외친 자가 있으니 니체다. 어쩌면 고통받는(leidend) 신(神) 디오니소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삶의 필연적인 수동성, 그에 따르는 고난, 절망과 슬픔의 정서을 바탕에 깔고 시작한다. 그렇지만 유한한 존재로 태어난 인간은 수동적인 체험 속에서도 자신 안의 신적 본성을 발견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어 이로써 점차 자유로워지며(스피노자), 오히려 가장 쓰디쓴 운명까지 모든 수동적인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운명에 대한 사랑, amor fati)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며(니체), 갈기갈기 찢겨졌던 신은 죽음을 딛고 부활한다(디오니소스).

[…]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심취해있던 1858년 10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에 보낸 한 편지를 보면 자신의 본성 그리고 예술적 성취의 근원이 연민(Mitleid)임을 고백하면서도 사랑 속에서 너무도 어렵게 얻어지는 기쁨(Mit-Freude)은 그에 대한 단순한 보완 이상이라고 적고 있음이 흥미롭다.

'함께 기뻐함'은 사랑으로 얻을 수 있는 기쁨이로군요. 이 대목에서 경기필이 지난 3월에 공연했던 말러 교향곡 3번을 떠올려도 좋지 않을까요?


― 티켓 예매 ―

예술의 전당 SACTicket
http://www.sacticket.co.kr/home/play/play_view.jsp?seq=12176

인터파크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S0001888

예스24
http://ticket.yes24.com/Home/Perf/PerfDetailInfo.aspx?IdPerf=11960

옥션티켓
http://ticket.auction.co.kr/Home/Perf/PerfDetailInfo.aspx?IdPerf=15320

2012년 4월 19일 목요일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합창과 함께하는
바그너 갈라 콘서트》 (지휘: 구자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합창과 함께하는 바그너 갈라 콘서트》

  • 2012년 5월 8일 화요일 / 오후 8시
  •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 초등학생 이상 입장가 (고등학생 이상 관람 권장)
  • 입장권: A석 3만원 / B석 2만원

프로그램

  •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 1막 전주곡
    • 1막 1장: 성당 미사 장면
    • 3막 피날레: 발터가 노래경연에서 우승하고 작스가 독일 예술을 찬양함
  • 《로엔그린》 (Lohengrin)
    • 3막 전주곡과 결혼식 합창
    • 3막 간주곡: 사열식 나팔
    • 1막 3장: 결투에서 승리한 로엔그린
  • 《파르지팔》 (Parsifal)
    • 1막 전주곡
    • 1막 간주곡: 성배기사들이 몬살바트로 가서 의식을 진행함
    • 3막 피날레: 파르지팔이 일으킨 기적을 사람들이 찬양함
  • 《탄호이저》 (Tannhäuser)
    • 2막 입당행진곡: 기사들과 귀부인들이 노래의 전당에 입장함
    • 3막 전주곡: 순례자 행렬을 기다리는 엘리자베트
    • 3막 순례자의 합창과 피날레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예술감독: 구자범)는 《합창과 함께하는 바그너 갈라 콘서트》를 5월 8일 화요일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개최한다.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이번에 연주할 곡들은 《탄호이저》(Tannhäuser), 《로엔그린》(Lohengrin), 《뉘른베르크의 명가수》(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파르지팔》(Parsifal)에서 발췌한 합창과 관현악곡이다. 약 200명에 이르는 대규모 합창단이 이번 공연에 동원되며, 경기필은 단순히 인원수를 늘려 규모만 키운 합창단이 아닌 프로 합창단만을 섭외하여 예술적 완성도를 높일 예정이다. 합창은 보통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로 이루어지는 4성부가 표준이지만, 바그너 합창 음악에서는 많게는 20성부 안팎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대규모 합창단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고, 그에 따라 매우 커지는 음량에 맞는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필요하기도 하다. 바그너는 금관악기 여러 대를 효과적으로 쓰는 능력이 뛰어난 작곡가이며, 그에 따른 고양감은 어지간한 교향곡을 압도한다. 바그너 작품 가운데 가장 멋진 대목을 모은 이번 공연은 바그너 음악의 진수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구자범 지휘자가 취임한 뒤로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그동안 국내에서 자주 연주되지 못했던 명곡들을 소개하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 바그너 또한 서양음악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나 외국에서 공연되는 빈도에 견주어 국내에서는 그다지 자주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작곡가이다. 《탄호이저》 서곡 등 귀에 쏙 들어오는 관현악 발췌곡에 이끌려 바그너 음악에 관심을 두는 애호가는 제법 많지만, 이런 이들도 가사가 나오는 대목을 들어보고는 언어 장벽과 낯선 음악 양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흥미를 잃곤 한다.

그런데 바그너 오페라에 나오는 합창이 바그너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 듣기에도 매우 좋다는 사실은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바그너 발췌 음반은 대부분 관현악 위주이며, 전막 연주가 아닌 발췌 연주를 하면서 대규모 합창단을 섭외하기 쉽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회는 공연장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바그너 합창 음악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으로 제의(祭儀; 제사 의식)적 성격을 꼽을 수 있다. 바그너 작품은 그 자체가 제의적이기도 하지만, 작품 속의 제의 장면은 감상자에게 특별한 영적 고양감을 일으키곤 한다.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를 쓴 안인희는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제의를 향한 원형적(原型的) 갈망을 감추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결혼식, 장례식, 졸업식 등의 의식(儀式)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 장엄한 무대 연출을 통해 등장하는 제의적인 몸짓은 마치 원시 시대 종교 의식과 같이 예리하게 우리의 의식(意識)을 사로잡는다"라고도 했다.

바그너 합창 음악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은 결혼식장에서 자주 연주되는 이른바 '결혼 행진곡'이다. 너무나 유명하면서도 작곡가가 바그너라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이 곡은 본디 《로엔그린》 3막 전주곡에 이어지는 오르간 반주가 있는 합창이다. 이 곡은 원곡 그대로 연주했을 때 훨씬 큰 감동을 느낄 수 있으며,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다른 곡과 더불어 관객에게 큰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지휘 : 구자범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 후 동 대학원 철학과 재학 중 도독
독일 만하임 음대 대학원 지휘과 졸업
독일 하겐 시립 오페라 극장, 다름슈타트 국립 오페라 극장 지휘자
하노버 국립 오페라 극장 수석 지휘자
광주 시립교향악단 지휘자
현,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합창단 : 수원시립합창단, 안양시립합창단, 의정부시립합창단, 인천오페라합창단, 그란데오페라합창단

― 티켓 예매 ―

예술의 전당 SACTicket
http://www.sacticket.co.kr/home/play/play_view.jsp?seq=12176

인터파크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S0001888

예스24
http://ticket.yes24.com/Home/Perf/PerfDetailInfo.aspx?IdPerf=11960

옥션티켓
http://ticket.auction.co.kr/Home/Perf/PerfDetailInfo.aspx?IdPerf=15320

2012년 3월 16일 금요일

말러 교향곡 3번, 세계를 바라보는 여러 에피소드

※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과 프로그램북에 실린 글입니다.


1896년 7월 17일, 교향곡 3번을 쓰던 말러에게 지휘자 브루노 발터가 찾아왔습니다. 슈타인바흐에 있던 집 주위에는 산과 호수가 있었는데, 경치를 구경하던 발터에게 말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그건 볼 필요 없어. 내 음악 속에 모두 담았거든."

이 말을 그저 허세 섞인 농담이라고만 여길 수는 없습니다. 말러는 실제로 교향곡 3번에 세계를 담고자 했고, '교향곡(Symphony)'이 가리키는 전통적인 의미를 해체하여 '함께'(Sym―) '울린다'(―phonos)라는 말뿌리만을 받아들였지요. 말러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이 곡은 전통에 전혀 맞지 않기에 교향곡이라 부르는 일은 알맞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교향곡이란 모든 기술적인 수단을 써서 세계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

1악장을 분석해 보면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에 도무지 맞지 않는 짜임새 때문에 당황하게 됩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제시부이고, 어디까지가 발전부일까요? 학자마다 제각각인 분석 내용을 이 글에서 굳이 인용하지는 않겠습니다. 감상자는 그저 음악에 담긴 세계를 듣고 느끼면 됩니다. 문제는 음악이 몹시 복잡하다는 것인데요. 세상이 본디 복잡하기는 하지만, 그 세상을 담은 음악은 상상력을 조금 보태면 더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1악장에는 "목신 판(Pan)이 깨어나고, 여름이 행진해온다"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말러는 자필악보 곳곳에 "선전포고!" "전령!" "폭도!" "전투 개시!" 등 전투와 관련된 말을 썼다가 출판하면서 지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목신 판(Pan)이 군대를 이끌고 겨울을 물리친다는 이야기가 1악장에 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호른이 연주하는 도입 주제나 한참 지나서 나오는 행진곡 대목 등이 이런 설명과 어울립니다.

말러는 처음에 "바위산이 내게 말하는 것"이라는 표제를 붙였다가 없애기도 했는데, 이렇게 보면 이어지는 악장과 더불어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 순서와 맞아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말러 스스로 1악장을 "생명과 영혼이 없는 무시무시한 단계"라고도 했습니다. 구자범 지휘자 선생님은 천지창조와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다만 세계를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음악이지요. "바위산이 내게 말하는 것"이라는 말은 바위산이 바라보는 세계라 할 수 있겠고요. 바위산이 보기에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은 듯해요. 이를테면, 호른 도입부에 이어 나오는 음악은 장송행진곡입니다.

여기까지가 1부입니다. 2부에서는 꽃(2악장), 동물(3악장), 사람(4악장), 천사(5악장), 사랑(6악장)이 바라보는 세계를 에피소드처럼 들려줍니다. 들판의 꽃들이 바라보는 세계도 그리 평화롭지 않아요. 중간에 폭풍이 몰아치기도 하거든요. 숲 속 동물들은 (말러가 한 말처럼)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이 보는 세계에는 아주 심각한 노랫말이 있고요.

4악장 '인류가 내게 이야기하는 것'은 니체가 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가사를 따왔습니다. 그런데 여자 가수가 노래를 불러요. 이 가수는 5악장 '천사들이 내게 이야기하는 것'에서 '베드로'로 나오기도 하지요. 왜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노래할까요? 음악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남자냐 여자냐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은 듯합니다. 구자범 지휘자 선생님은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가 바로 이 여자 가수, 즉 차라투스트라와 베드로라고 하세요.

세계는 고통으로 가득하고, 쾌락은 큰 고통보다 깊은 곳에 있습니다(Lust—tiefer noch als Herzeleid). 구자범 선생님은 쾌락을 얻으려면 먼저 고통을 이겨야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하세요. 고통을 이기고 행복을 얻으려면 '사랑'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6악장 '사랑이 내게 이야기하는 것'이 이어집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에로스'가 아니라 '아가페'입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나온 에피소드가 아니라 '사랑이 바라보는 세계'가 진짜라 할 수 있지요.

말러는 본디 '어린이가 내게 이야기하는 것'을 7악장으로 삼으려고도 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교향곡 4번 4악장 '천상의 삶'이 되었고요. 이걸 왜 빼버렸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긴 곡이 너무 길어져서? 철학도 출신인 구자범 지휘자 선생님은 이렇게 생각하세요. 말러는 '어린이'가 '에로스'의 결과로 탄생한 것처럼 보일까 걱정했을 수도 있겠고, 이 작품이 니체 사상을 담은 것으로 오해받을까 걱정했을 수도 있어요. 어린이와 니체가 무슨 관계냐고요?

지난해 경기필이 연주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기억나세요? 이 곡은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한 정신 발전의 3단계를 음악으로 훌륭하게 나타낸 작품이지요. 그 3단계란 이렇습니다.

① 낙타의 단계: "권위와 주인에 의존하는" 단계
② 사자의 단계: "모든 의존적인 요소로부터 해방되는 단계" "자유를 얻기 위해서 싸우는 소극적 자유의 단계"
③ 어린아이의 단계: "어린아이처럼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목표를 향해 몰입하는 단계" "적극적 자유의 단계"

그러니까 구자범 선생님은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던 깨달음의 단계인 '어린아이의 단계'를 말러가 이때 생각했을 거라고 하세요. 이와 관련해 더 자세한 내용은 경기필 웹매거진(g-phil.kr)을 참고하세요.

철학 얘기가 나오니까 좀 어렵나요? 니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할게요. 말러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사랑'입니다. 이게 가장 중요해요. 그리고 6악장 '사랑이 내게 이야기하는 것'은 말로 떠들기보다 그냥 가슴으로 느끼면 되는 음악입니다. 듣고 있으면 그야말로 사랑이 느껴지지요. 그런데 이렇게만 써놓으면 섭섭하니, 마음이 따듯해지는 시 한 수 인용할까 합니다.

이 시는 사실 말러 교향곡 3번과는 계절 감각도 안 맞고, 구자범 선생님 해석과도 안 맞아요. 그래도 저는 이 시가 6악장 '사랑이 내게 이야기하는 것'과 분위기가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한 가지만 생각하고 읽으면 내용도 제법 어울릴지 몰라요. 여기서 '사랑'이란 '신의 사랑'도 아니고, '어머니의 사랑'도 아닙니다. 그냥 숭고한 사랑, 아가페입니다. 이 시를 그렇게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시사철 눈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에는
집집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마을의 하늘과 아이들이 쉬고 있다.
마른가지의 난동(暖冬)의 빨간 열매가 수(繡)실로 뜨이는
눈 나린 이 겨울날
나무들은 신의 아내들이 짠 은빛의 털옷을 입고
저마다 깊은 내부의 겨울바다로 한없이 잦아들고
아내가 뜨는 바늘귀의 고요의 가봉(假縫)
털실을 잣는 아내의 손은
천사에게 주문 받은 아이들의 전생애의 옷을 짜고 있다.
설레이는 신의 겨울,
그 길고 먼 복도를 지내나와
사시사철 눈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
아내가 소요하는 회잉(懷孕)의 고요 안에
아직 풀지 않은 올의 하늘을 안고
눈부신 장미의 알몸의 아이들이 노래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눈뜨지 않고 지내며
어머니의 나라에서 누워 듣던 우뢰(雨雷)가
지금 새로 우리를 설레게 하고 있다.
눈이 와서 나무들마저 의식의 옷을 입고
축복받는 날.
아이들이 지껄이는 미래의 낱말들이
살아서 부활하는 직조(織造)의 방에 누워
내 동상(凍傷)의 귀는 영원한 꿈의 재단(裁斷),
이 겨울날 조요로운 아내의 재봉일을 엿듣고 있다.

― 김종철, 「재봉」

― 티켓 예매 ―

인터파크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12001311

2012년 2월 20일 월요일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바그너의 후예들이 들려주는 어른을 위한 동화》 리뷰

※ 경기도문화의전당이 발간하는 월간지 『예술과 만남』에 보낸 원고입니다.
※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 http://g-phil.kr/?p=797

'이야기'가 있는 연주회… 극적 효과와 심리적 표현 돋보여

구자범 지휘자는 '바그너의 후예들이 들려주는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연주회 제목에 걸맞은 '이야기'를 준비했다. 바로 음악과 어우러지는 자막이다. 그 가운데 《인어공주》는 이 곡을 처음 듣는 사람도 쉽게 음악을 즐길 수 있게끔 자막을 더욱 자세하게 만들었다. 쳄린스키는 이 작품에 표제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날 연주회 때 상영된 자막은 구자범 지휘자가 작품을 꼼꼼하게 분석해서 자신의 해석을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자막은 악보 이곳저곳에서 찾을 수 있는 단서를 바탕으로 만들었으므로 작위적으로 말을 갖다 붙였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악보에는 "구조 요청하듯이"(wie hilferufend)라는 지시어가 나온다(1악장 마디 303). 왕자가 '사람 살려'라고 외치는 대목이라는 뜻이다. 물론, 배가 통째로 가라앉은 마당에 왕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구조 요청할 수도 있지 않으냐고 반론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악보를 좀 더 살펴보면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사람 살려' 음형이 나오고 바로 이어서 인어공주가 헤엄쳐 가는 듯한 음형이 이어진다. 둘째, '사람 살려' 음형은 두 번 나오며, 두 번째 나올 때는 소리가 좀 더 가까워진다. 인어공주가 다가갔다는 뜻이다. 셋째, '사람 살려' 음형이 두 번 나온 뒤에는 조금씩 음악이 조용해지다가 얼마 안 가서 '사랑 노래'가 이어진다.

이때 '사람 살려' 음형에는 이른바 '음색 원근법'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비슷한 음량으로 음색만을 바꾸어 거리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곡 기법으로, 말러가 교향곡 5번 1악장 마지막에 사용한 바 있다. 쳄린스키는 '사람 살려' 음형을 처음에는 오보에로, 나중에는 클라리넷으로 써서 점점 가까워지는 듯한 효과를 주었다. 그리고 구자범 지휘자는 여기에 극적 효과를 하나 더했다. 두 번째 '사람 살려'를 좀 더 느리고 여리게 다스려 왕자가 지쳐서 정신을 잃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것이다.

서스펜스 영화 같은 심리 표현 담아낸 구자범 지휘자의 탁월한 해석

구자범과 경기필이 들려준 '이야기'가 가장 멋졌던 곳은 아무래도 '폭풍' 등 긴장감이 높아지는 대목이겠지만, 구자범이 보여준 해석이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3악장에서 자막이 '슬픔'이라고 나갔던 대목, 마디 51이었다. 이곳에 나오는 선율(모티프)은 앞서 여러 차례 나왔던 것이고, 기악 음악을 이루는 일반적인 원리를 생각하면 이곳에서도 앞서와 비슷한 템포로 구조적 통일성을 주어야 할 듯하다. 실제로 내가 여태껏 들어본 연주에서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 제임스 저드, 안드레이 보레이코 등이 모두 그렇게 했다.

그러나 구자범은 달랐다. 템포를 갑자기 뚝 떨어트리고 부드럽고 가녀리게 다스려 순음악적인 '구조'와 '통일성'보다는 심리적 표현을 강조했다. 나는 구자범이 옳다고 생각한다. 악보를 보면 이 대목에 "매우 부드럽게, 회한을 담아"(sehr zart, wehmütig)라는 지시어가 있고, 3악장 첫머리에는 연주에 고통을 가득 담으라는 지시어(Sehr gedehnt, mit schmerzvollem Ausdruck)가 있어 '슬픔' 대목과는 성격이 달라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뜻을 구자범-경기필만큼 잘 살린 연주를 나는 들어본 일이 없다.

심리적 표현을 말하자면 자막이 '칼을 들고 주저하는 인어공주'라고 나갔던 대목(3악장 마디 138)을 빼놓을 수 없다. 반음계적 선율과 불안하게 흐르는 화음으로 긴장감을 쌓아 가는 동안 앞서 나왔던 선율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고, 마침내 긴장감이 폭발하는 듯하다가 멈추고 다시 이어지는 극적 연출은 히치콕 감독이 만든 서스펜스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날 경기필이 들려준 연주는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끔 했다.

첫 곡으로 연주된 훔퍼딩크 《헨젤과 그레텔》 모음곡 또한 말이 필요 없을 만큼 훌륭했다. 구자범은 본디 오페라 지휘자이며, 오페라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서 그 솜씨가 매우 잘 드러났다. 곳곳에서 단원들 얼굴에 웃음이 번졌고, 지휘자는 행복해하는 듯했다. 그 분위기가 객석으로 퍼졌음은 말할 나위 없다.

마녀의 오븐이 폭발하는 대목에 쓰인 악기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 듯하여 설명을 덧붙인다. 이것은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특별 제작한 악기이다. 악보에는 선더머신(Donnermaschine; 독일어)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것은 악기 이름이라기보다 천둥소리를 내는 기계장치를 통칭하는 말이다. 경기필이 만든 이 악기와 가장 비슷한 것은 선더시트(thunder sheet)라는 악기로, 경기필은 천둥소리가 아닌 폭발음을 내고자 재질과 구조를 조금 달리 했다. 물론, 폭발하는 대목에는 큰북 등 다른 타악기가 힘을 합쳐 크게 '한 방'을 터트린다.

2012년 1월 11일 수요일

안데르센 동화 『인어공주』에 대하여

※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http://g-phil.kr/?p=731

인어공주는 왜 사람이 되려고 했을까요? 사랑 때문이라면 마녀를 찾아갔을 때 다른 것을 부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안데르센이 쓴 원작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인어공주가 참말로 원했던 것은 영혼이기 때문이랍니다.

구자범 지휘자 선생님은 쳄린스키가 교향시 《인어공주》를 쓰면서 '영혼' 얘기를 음악에 담았다고 생각해요. 쳄린스키는 알마 쉰들러를 짝사랑했지만, 알마는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했죠. 그런데 '알마'(Alma)는 이탈리아어 또는 스페인어로 '영혼'이라는 뜻이래요. 라틴어 '아니마'(anima)에서 온 말이고요.

원작에 나오는 영혼 이야기가 잘 기억나지 않으세요? 이참에 진짜 줄거리를 제대로 알아 볼까요?


인어공주는 바닷속 왕국에서 임금님이신 아버지, 할머니, 다섯 언니와 함께 살았어요. 언니들은 해마다 물밖에 나가서 바깥 세상을 보고 왔지만, 인어공주는 아직 어려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언니들한테 얘기만 들어야 했어요.

마침내 인어공주는 15살이 되어 물 밖으로 나가요. 물위에 배가 떠있고 사람들이 춤추고 불꽃놀이도 해요. 사람들 가운데 왕자님이 가장 멋져요. 그런데 밤이 되면서 폭풍이 몰아치고, 왕자님은 물에 빠져 죽어가고, 인어공주가 왕자님을 구해서 바닷가로 데려가요. 그리고 가까운 신전에서 온 아가씨가 나타날 때까지 왕자님을 지켜 봐요. 정신을 잃은 왕자님은 그때까지 인어공주를 보지 못해요.

인어공주는 할머니를 찾아가, 사람들은 물에 빠지지만 않으면 영원히 살 수 있느냐고 여쭈어요. 할머니는 이렇게 말해요. 300년을 사는 인어와 달리 사람은 훨씬 일찍 죽어요. 그런데 인어는 죽으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지만, 사람은 죽으면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살아요.

인어는 왕자를 그리워하고 사람의 영혼을 부러워한 나머지 마녀를 찾아가요. 그리고 인어 꼬리를 사람 다리로 만들어 주는 약을 얻는 대신 혀를 잘라 주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잃어요. 마녀는 이렇게 경고해요. 사람이 되면 다시는 바다로 돌아올 수 없어요. 약을 마시면 다리가 생겨서 누구보다도 멋진 춤을 출 수 있지만, 걸을 때마다 칼에 꿰뚫리는 듯한 고통이 뒤따라요. 영혼을 얻으려면 진실한 사랑을 찾아 입맞춤을 하고, 사랑을 얻고, 그 사람과 결혼해야 해요. 그러면 그 사람의 영혼 일부가 인어공주에게 흘러들어가요. 만약 그 사람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다음날 아침 해뜰 무렵 인어공주는 죽어서 물거품이 돼요.

인어공주는 약을 마시고 다리를 얻어 왕자를 만나요. 왕자는 인어공주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인어공주는 고통을 참고 왕자와 춤춰요. 그러나 왕자의 아버지는 왕자한테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하라고 말해요. 왕자는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지만, 물에 빠졌다가 깨어났을 때 만났던 여자가 그 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바꿔요.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요. 인어공주는 절망에 빠져 동트기를 기다려요. 그때 인어공주의 다섯 언니가 찾아와 이렇게 말해요. 다섯 언니는 마녀를 찾아가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 주고 마법이 깃든 칼을 얻었어요. 인어공주가 그 칼로 왕자를 찔러 죽이고 피를 다리에 적시면 다시 인어가 되어 바다로 돌아갈 수 있어요.

인어공주는 끝내 왕자를 죽이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물거품이 돼요. 그런데 인어공주는 여전히 밝은 햇살을 볼 수 있었어요. 햇살 사이를 투명한 모양으로 떠다니는 공기의 딸들(Luftens Døttre; daughters of air)이 어리둥절해 하는 인어공주에게 이렇게 말해줘요. 인어공주는 영혼을 얻고자 온 마음을 다 바쳐 노력했기 때문에 공기의 딸이 되었어요. 앞으로 300년 동안 착한 일을 하면 영혼을 얻어 하늘나라에 갈 수 있지요. 그리고 착한 아이를 찾을 때마다 영혼을 얻기까지 걸리는 기간이 한 해씩 줄어들고, 나쁜 아이를 만날 때마다 흘려야 하는 눈물 한 방울에 하루씩 기간이 늘어난답니다.


※ 『인어공주』와 세 가지 결말

안데르센은 처음에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냈어요. 그리고 나중에 '공기의 딸들' 대목을 덧붙였는데, 안데르센은 이것이 본디 의도했던 이야기라고도 했어요.

그런데 '착한 아이, 나쁜 아이' 대목은 안데르센이 나중에 또 한 번 이야기를 고치면서 덧붙인 것이에요. 이 대목은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이를테면 『메리 포핀스』를 쓴 P. L. 트라버스는 이렇게 말했어요. "착한 아이가 되라고 겁주는 빅토리아 시대 교훈적 이야기에서 유래한 […] 이것은 협박 편지입니다. 아이들은 알아요. 그런데 말은 안 하죠."

― 티켓 예매 ―

인터파크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11018554

그림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 대하여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http://g-phil.kr/?p=727

훔퍼딩크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은 그림(Grimm) 형제가 쓴 원작 『헨젤과 그레텔』에서 끔찍한 대목을 대부분 없앤 이야기입니다. 어느 대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아보기에 앞서 원작 줄거리를 되새겨 볼까요?


헨젤과 그레텔은 가난한 나무꾼네 아들딸이에요. 그런데 큰 흉년이 들어 헨젤과 그레텔 가족은 굶주림에 시달려요. 견디다 못한 의붓어머니는 굶어 죽지 않으려면 아이들을 숲에다 버려야 한다고 나무꾼에게 말해요(초판에서는 친어머니였다가 나중에 바뀜). 나무꾼은 처음에 반대하다가 끝내 그 말에 따르기로 해요. 옆방에서 그 얘기를 모두 들어버린 헨젤은 밤에 몰래 나가서 하얀 조약돌을 챙겨 둬요.

다음날 나무꾼 가족은 숲 속 깊숙이 들어가요. 그곳에 버려진 헨젤과 그레텔은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가 달빛에 빛나는 조약돌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지요. 놀란 의붓어머니는 숲 속 더 깊은 곳으로 아이들을 데려가기로 해요. 헨젤은 이번에는 방이 잠겨 조약돌을 챙기지 못해요.

다음날 헨젤은 숲 속으로 가면서 조약돌 대신 빵 조각을 떨어트려요. 그러나 새들이 빵 조각을 다 먹어 버리고, 헨젤과 그레텔은 마침내 길을 잃고 말아요. 하루 동안 숲을 헤매던 헨젤과 그레텔은 희고 예쁜 새를 따라가다가 생강빵, 케이크, 사탕 등으로 만들어진 집을 발견해요. 헨젤과 그레텔은 집을 뜯어 먹었는데, 마침 집에서 할머니가 나타나 아이들을 꼬드겨 집으로 데려가요.

할머니는 사악한 마녀였어요. 마녀는 헨젤을 우리에 가두고 그레텔을 노예로 부려요. 마녀는 헨젤을 살찌워 잡아먹으려고 하지만, 마녀가 눈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헨젤은 마녀가 손을 내밀어 보라고 할 때마다 우리에서 발견한 뼈를 내밀어 마녀를 속여요.

몇 주가 지나 참을 수 없게 된 마녀는 헨젤을 잡아먹기로 하고, 오븐을 준비하면서는 그레텔까지 한꺼번에 잡아먹으려고 마음먹어요. 마녀는 오븐에 불이 활활 타는지 보라고 그레텔에게 말하지만, 마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그레텔은 말뜻을 못 알아듣겠다고 거짓말을 해요. 마녀는 화가 나서 시범을 보이고, 그레텔은 그때를 노려 마녀 등을 떠밀어 오븐에 밀어 넣고 문을 닫아 잠가요. 마녀는 오븐 속에서 타죽어요.

그레텔은 헨젤을 우리에서 구해 내요. 두 사람은 마녀의 집에서 보석 등 값진 것들을 찾아내 주머니에 넣고는 마녀의 집에 불을 질러요. 백조 한 마리가 헨젤과 그레텔을 태우고 물을 건너 집까지 데려다 줘요. 집에 와 보니 아버지 혼자 있어요. 의붓어머니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었다고 하며, 아버지는 아이들을 버린 일을 후회해요. 세 사람은 마녀의 집에서 가져온 보물로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


훔퍼딩크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

1막 전주곡이 끝나고 나오는 헨젤과 그레텔 가족은 가난하지만 굶어 죽을 만큼은 아닌 듯해요.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산딸기를 따오라며 산으로 보냈는데, 아버지가 돌아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그 산에는 아이들을 잡아먹는 마녀가 산다고 말해요. 두 사람은 아이들을 찾으러 가요. 그러니까 훔퍼딩크 오페라에서 헨젤과 그레텔은 부모에게 버림받지 않았어요. 부모는 두 사람 모두 친부모예요.

아이들이 조약돌로 길을 찾는 이야기, 그리고 빵조각을 떨어트렸더니 새가 먹어치워서 길을 잃는다는 얘기도 마찬가지로 나오지 않아요. (이것은 본디 발트 지방 설화로 샤를 페로가 쓴 동화 등에서 다양하게 전해 내려와요.)

2막 전주곡에는 "마녀의 비행"(Hexenritt)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요. 마녀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모습을 일컫는 듯한데, 그림 동화 원작에는 이런 대목이 없어요.

숲에서 밤을 맞은 헨젤과 그레텔이 두려움에 떨 때 모래 요정이 나타나 아이들을 다독이고 잠가루를 뿌려요. 헨젤과 그레텔은 저녁 기도를 올리고 잠에 빠져들어요. 천사들이 나타나 잠자는 헨젤과 그레텔을 지켜 주며 선물을 놓고 가요. 아침이 되면 이슬 요정이 나타나 아이들을 깨워요.

아침에 깨어나 보니 생강빵으로 만든 집이 눈앞에 있어요. 집 울타리는 생강빵으로 만든 어린이들이에요. 그 집에 살던 마녀는 마법 작대기로 주문을 외워 헨젤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그레텔을 하녀로 부려요. 그레텔은 나중에 이 작대기를 훔치고 마녀 몰래 주문을 외워 헨젤을 풀어 줘요. 마녀를 오븐에 밀어 넣는 일에는 원작과 달리 헨젤과 그레텔이 힘을 합쳐요.

오븐은 큰 소리로 터져요. 이어서 생강빵이 되었던 아이들이 하나씩 사람으로 돌아와요. 헨젤과 그레텔이 아이들을 깨우고 마녀가 쓰던 지팡이로 주문을 외워 움직일 수 있게 해줘요. 멀리서 헨젤과 그레텔을 찾아온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타나 다 함께 기뻐해요.

이처럼 훔퍼딩크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은 원작 동화와 다른 대목이 제법 있어서, 어린이가 감상하기에도 큰 무리는 없어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어린이용 공연을 따로 열 예정이니 기대하세요!

― 티켓 예매 ―

인터파크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11018554

2012년 1월 7일 토요일

굽시니스트 본격 음악만화 《바그너의 후예들이 들려주는 어른을 위한 동화》

※ 2016년 11월 16일. 이미지 링크가 깨진 것을 보고, 이참에 당시 항의를 받았던 표현을 수정하기 전의 원본으로 복원했습니다. 이 만화에는 읽는 사람이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만화적인 표현을 그 자체로 즐기되 그에 대한 비판에도 열린 태도를 가질 것을 권장합니다.



― 티켓 예매 ―

인터파크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11018554

2012년 1월 6일 금요일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바그너의 후예들이 들려주는 어른을 위한 동화》 (지휘: 구자범)

《바그너의 후예들이 들려주는 어른을 위한 동화》

  • 2012년 1월 14일 토요일 저녁 8시
  • 경기도문화의전당 행복한대극장
  • 중학생 이상 입장가 (만18세 이상 관람 권장)
  • 입장권: A석 3만원 / B석 2만원

프로그램

  • 훔퍼딩크 ―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 모음곡
  • 쳄린스키 ― 교향시 《인어공주》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예술감독: 구자범)는 《바그너의 후예들이 들려주는 어른을 위한 동화》 연주회를 1월 14일 토요일 8시 경기도문화의전당 행복한대극장에서 개최한다.

동화를 소재로 한 음악 작품이라면 자칫 작은 편성에 아기자기한 음악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이번에 연주하는 훔퍼딩크 《헨젤과 그레텔》 모음곡과 쳄린스키 교향시 《인어공주》는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거대한 스케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대편성 오케스트라, 현대적인 음색, 거대한 스케일로 만나는 어른을 위한 판타지!

쳄린스키와 훔퍼딩크는 바그너의 후예라 할 수 있고, 따라서 바그너에게 영향받은 후기낭만주의 음악 양식이 두 작품에 두드러진다. 그 가운데 중요한 특징으로는 먼저 거대한 규모를 꼽을 수 있다. 특히 쳄린스키 《인어공주》는 말러 교향곡과 맞먹는 대편성 작품으로 이 곡을 연주하려면 트롬본 4대, 호른은 최소 6대 등 100명이 넘는 연주자가 필요하다.

대편성 오케스트라는 거대한 다이내믹 레인지(dynamic range)와 극적 효과를 낳았고, 여기에 현대적인 관현악법이 더해져 현대적인 음색을 낳았다. 이로써 음악이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확장되었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작품들은 그만큼 연주하기 쉽지 않다. 특히 쳄린스키 《인어공주》는 그동안 국내에서 연주된 공식 기록이 단 두 차례밖에 없을 만큼 국내에서는 잘 연주되지 않는 작품이다.

후기낭만주의에 해당하는 두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반음계적 화성을 꼽을 수 있다. 극(drama)에 갈등과 해결 및 기승전결 구조가 있는 것처럼, 조성음악은 ‘긴장과 이완’을 근본 원리로 삼는다. 불협화음은 긴장을 낳고, 협화음은 이완을 낳으며, 불협화음을 쓰려면 그에 앞서 ‘예비’를 해야 하고, 불협화음을 쓰고 난 뒤에는 안정된 협화음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서양음악은 '더 많은 긴장'을 음악에 담아내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모차르트보다 베토벤이, 베토벤보다 바그너 음악이 더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추세는 바그너에 이르러 역사적 전환점을 맞게 된다. 긴장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음악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조성이 사실상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쇤베르크는 훗날 무조음악을 내놓았고, 쳄린스키와 훔퍼딩크는 바그너 음악 양식을 발전시켜 작품에 담았다.

구자범 지휘자가 취임한 뒤로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그동안 국내에서 많이 연주되지 못했던 명곡들을 선보이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 《바그너의 후예들이 들려주는 어른을 위한 동화》 역시 이러한 의도로 기획되었다. 동화적인 판타지, 후기낭만주의 음악 양식, 현대적인 관현악법에 힘입은 화려한 음색, 그리고 구자범 지휘자의 탁월한 해석이 만나는 이번 공연은 관객에게 커다란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훔퍼딩크,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 모음곡

Engelbert Humperdinck, Suit aus der Oper »Hänsel und Gretel«

훔퍼딩크(Engelbert Humperdinck, 1854~1921)는 바그너에게 큰 영향을 받은 작곡가로 바이로이트에서 《파르지팔》 공연을 돕고 바그너 아들 지크프리트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다.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은 그림 형제가 수집하여 출판한 『그림 동화』를 바탕으로 하는 훔퍼딩크의 대표작으로, 훔퍼딩크의 누이인 아델하이트 베테(Adelheid Wette)가 대본을 썼다. 라이트모티프 기법과 반음계적 화성 등 바그너에게 영향 받은 작곡 기법이 나타나며, 바그너의 음악적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작곡가이지 지휘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초연을 지휘했다. 이번에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곡은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을 바탕으로 하는 모음곡이다.

쳄린스키, 교향시 《인어공주》

Alexander Zemlinsky, »Die Seejungfrau«

쳄린스키(Alexander Zemlinsky, 1871-1942)는 말러, 쇤베르크 등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이른바 '벨 에포크'(belle époque · 황금시대)를 살았던 마지막 낭만주의자라 할 수 있다. 쇤베르크와 상당한 친분이 있었지만 끝까지 조성음악을 포기하지 않은 쳄린스키는 반음계적 화성과 화려한 관현악법 등 바그너 영향이 짙은 후기 낭만주의 음악 어법을 작품에 담았다. 《인어공주》(Die Seejungfrau)는 안데르센 동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나타나는 명랑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고 원작 느낌에 좀 더 가깝다. 안데르센 동화는 알고 보면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세계만이 아닌 각박한 현실 또한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 이것은 안데르센의 불행한 삶과 시대의 어두운 면이 투영된 결과이며, 또 어쩌면 쳄린스키가 사랑했던 여인 알마 쉰들러를 구스타프 말러에게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고통이 투영된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지휘 : 구자범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 후 동 대학원 철학과 재학 중 도독
독일 만하임 음대 대학원 지휘과 졸업
독일 하겐 시립 오페라 극장, 다름슈타트 국립 오페라 극장 지휘자
하노버 국립 오페라 극장 수석 지휘자
광주 시립교향악단 지휘자
현,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 티켓 예매 ―

인터파크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11018554

2011년 10월 14일 금요일

본 윌리엄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해설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과 연주회 소책자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 http://g-phil.kr/?p=409

레이프 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 1872-1958)는 이름 표기를 주의해야 할 음악가이다. 영어 이름 "Ralph"는 '랄프' 또는 '레이프'라고 읽는데, 본 윌리엄스의 둘째 아내 우르술라가 쓴 전기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레이프'[Rayf]로 읽어야 한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은 16세기 영국 작곡가 토머스 탈리스(Thomas Tallis)가 쓴 찬송가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16세기는 근대적인 조성과 화성 체계가 없을 때였고, 당시 작곡가들은 조성의 원형에 해당하는 교회선법(mode)과 16세기식 대위법 등을 바탕으로 작품을 썼다.

16세기 음악 양식은 조성음악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낯설고 새롭게 들린다. 이것은 조성 체계가 붕괴하던 20세기 초 작곡가들에게 돌파구가 되었으며,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또한 그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 윌리엄스가 이 곡을 쓴 1910년은 쇤베르크가 현악사중주 2번으로 무조음악 시대를 열어젖힌 뒤로 두 해째를 맞은 때였다. 무조음악에 찬성하지 않았던 본 윌리엄스는 차라리 16세기 음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 탈리스 주제. ©Boosey & Hawkes

본 윌리엄스는 '탈리스 주제'를 곡 중간에 거의 그대로 쓰기도 했지만, 곳곳에서 선율을 조각내고 변형시키며 16세기 음악을 현대적인 음악 어법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 냈다. 화성과 조성 구조는 후기 낭만주의의 반음계적 어법과 통하며, 불균등하고 불규칙한 리듬과 악구(phrase) 구조는 영국 음악 전통에서 유래했으면서도 20세기 초 음악사적 흐름과도 맞닿는다. 그에 따라 영화 《반지의 제왕》에 배경음악으로 써도 어울릴 듯한 영국 분위기가 예스럽고도 현대적으로 살아난다.

이를테면 곡 첫머리에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흉내 낸 듯한 화음이 나오고, 뒤이어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가 현을 손으로 뜯어 연주하는 이른바 '피치카토' 주법으로 '탈리스 주제' 첫머리 음형이 나온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활로 그어서 연주하는 이른바 '아르코' 주법으로 8분음표 음형이 뒤따른다.

'피치카토' 음형과 '아르코' 음형은 선율, 리듬, 화성, 음색 모두 차이가 뚜렷하다. '피치카토' 음형은 탈리스 주제에서 따왔고, '아르코' 음형은 본 윌리엄스가 덧붙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묻고 답하는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이때 '아르코' 음형은 이른바 '안티폰'(antiphon)을 흉내 낸 것이라 하겠는데, 우리말로 '응답송'이라고도 하는 이것은 엄밀하게 설명하자면 길어질 테니 대충 비슷한 예를 들어 보겠다.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에서는 16세기와 20세기가 이처럼 대화를 나눈다.

©Boosey & Hawkes

그런가 하면 작곡가가 교회 오르간 연주자였던 만큼 16~17세기 영국 오르간 소리를 흉내 낸 대목이 작품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 작품은 현악 사중주단과 현악 오케스트라, 그리고 현악 연주자 2-2-2-2-1명으로 이루어진 제2 오케스트라로 편성되어 있고, 음악학자 에드윈 에반스(Edwin Evans)를 좇자면 이것은 영국 오르간을 이루는 서로 다른 건반들(Solo, Great, Choir)에 각각 해당한다. 본 윌리엄스는 제2 오케스트라를 제1 오케스트라와 되도록 떨어트려 놓으라고 지시했는데, 이것이 오르간 음향 효과를 얼마만큼 재현할지는 연주회장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곡 중간에 나오는 비올라 독주와 바이올린-비올라 이중주에서 '탈리스 주제'가 어찌 변형되어 나타나는지 살펴보는 일도 재미있다. 그냥 들어도 너무나 아름다운 대목이니 악보에 익숙지 않은 사람도 기대하시라.


©Boosey & Hawkes

poster

― 티켓 예매 ―

인터파크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MN=Y&GoodsCode=11012294

2011년 10월 5일 수요일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브람스 교향곡 1번》 연주회 (지휘: 구자범 · 협연: 장성)

poster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브람스 교향곡 1번》 연주회

  • 2011년 10월 14일 금요일
  • 경기도문화의전당 행복한대극장
  • 중학생 이상 입장가
  • 입장권: A석 3만원 / B석 2만원

프로그램

  • 본 윌리엄스 ―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 라벨 ― 피아노 협주곡 G장조 (협연: 장성)
  • 브람스 ― 교향곡 1번 c단조

본 윌리엄스 ―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레이프 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 1872-1958)는 이름 표기를 주의해야 할 음악가이다. 영어 이름 "Ralph"는 '랄프' 또는 '레이프'라고 읽는데, 본 윌리엄스의 둘째 아내 우르술라가 쓴 전기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레이프'[Rayf]로 읽어야 한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은 16세기 영국 작곡가 토머스 탈리스(Thomas Tallis)가 쓴 찬송가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교회선법을 따르는 정선율(cantus firmus)과 16세기식 대위법, 아멘 종지(plagal cadence) 등으로 나타나는 고음악 양식에 영화 《반지의 제왕》에 배경음악으로 써도 어울릴 듯한 영국풍 선율이 더해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이 모든 것이 현대적인 음악 어법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본 윌리엄스 음악 양식을 이룬다. 화성과 조성 구조는 후기 낭만주의의 반음계적 어법과 통하며, 불균등하고 불규칙한 악구(phrase) 구조는 영국 음악 전통에서 유래했으면서도 20세기 초 음악사적 흐름과도 맞닿는다.

그런가 하면 작곡가가 교회 오르간 연주자였던 만큼 16~17세기 영국 오르간 소리를 흉내 낸 대목이 작품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 작품은 현악 사중주단과 현악 오케스트라, 그리고 현악 연주자 2-2-2-2-1명으로 이루어진 제2 오케스트라로 편성되어 있고, 음악학자 에드윈 에반스(Edwin Evans)를 좇자면 이것은 영국 오르간을 이루는 서로 다른 건반들(Solo, Great, Choir)에 각각 해당한다. 본 윌리엄스는 제2 오케스트라를 제1 오케스트라와 되도록 떨어트려 놓으라고 지시했는데, 이것이 오르간 음향 효과를 얼마만큼 재현할지는 연주회장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라벨 ― 피아노 협주곡 G장조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는 라벨이 1929~31년 사이에 쓴 곡으로 작곡가의 후기 음악 양식이 잘 드러나 있으며, 밝고 즐거운 선율과 재즈 리듬, 화려한 음색, 바스크 지방의 민속음악적 요소 등이 특징적이다. 바스크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걸쳐 있는 지방이며, 라벨은 바스크계 어머니에게서 음악적인 영감을 받은 듯하다. 음악학자 이내선은 이 작품을 두고 "그 음악적인 성격으로 보아서 바스크 광시곡[rhapsody]이라 해도 무방하다"라고 논평했다.

라벨은 관현악법의 대가로 화려한 색채를 음악에 담아내는 능력이 탁월한 작곡가였다. 이 곡에서는 프랑스 음악 양식과 스페인 음악 양식이 어우러진 음 소재가 화려한 관현악법을 만나 더욱 빛나며, 채찍과 우드블록(Wood Block), 탐탐, 트라이앵글 등 다양한 타악기가 쓰이기도 했다. 이 곡은 또한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만큼 악기 하나하나에 까다로운 기교를 요구한다.

라벨이 이 작품에 재즈 리듬을 사용한 일은 재즈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으며, 이것을 두고 라벨은 “재즈는 현대 작곡가에게 매우 풍부하고 생생한 영감의 원천이며 재즈에 영향 받은 미국 작곡가들이 너무도 적다는 사실이 놀랍다”라고도 했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한국에서 영재 교육을 착실히 밟고 현재 독일에서 활동 중인 젊은 피아니스트 장성 씨가 협연을 맡는다. 지휘자 구자범이 이끄는 젊은 오케스트라 경기필이 어떤 해석으로 보여주게 될지 기대 된다.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는 음악 만화·드라마로 국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던 『노다메 칸타빌레』 (니노미야 토모코 원작, TV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등으로도 알려짐) 전체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곡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브람스 ― 교향곡 1번 c단조 작품 68

브람스 교향곡 1번은 양식적·미학적으로 베토벤 교향곡을 계승한 작품이다. 당시에 이름난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우는 이 작품을 두고 '베토벤 교향곡 10번'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말은 베토벤의 아류라는 뜻이 아니라 베토벤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극찬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피날레 주요 주제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피날레 주요 주제와 닮은꼴이며, 도입부는 베토벤 교향곡 5번 제1 주제와 닮은꼴이다.

베토벤은 고전주의를 완성하고 낭만주의 시대를 열어젖힌 작곡가이며, 그 뒤로 베토벤은 후대 작곡가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었다. 따라서 베토벤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베토벤의 '후계자'라는 호칭을 얻는 일이 당시 작곡가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브람스―한슬리크 진영과 바그너 진영이 파벌 싸움을 벌인 일은 널리 알려졌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와 관련한 논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베토벤은 고전주의를 넘어서 낭만주의 시대를 열었지만, 한편으로는 낭만주의적 선율과는 맞지 않는 모티프 변형 기법을 유산으로 남겼다. '베토벤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작곡가마다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닮은 도입부 선율을 발전부에서 앞세워 펼쳐 나가며 베토벤을 흉내 냈다. 멘델스존은 달콤한 가락을 대위법으로 겹쳐 베토벤을 이으려 했다. 리스트와 프랑크는 모티프 원형을 중심에 놓고 주변 요소를 네트워크로 묶어 바꿔나가는 기법을 개발했고, 바그너는 리스트를 흉내 냈다. 슈만은 짧게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아이디어로 '사투'를 벌였다.

브람스는 '편법'에 매달리지 않고 정공법을 썼다. 베토벤의 모티프 변형 기법을 극한으로 발전시킨 것이 그것이며, 쇤베르크는 이것을 '발전적 변주'(developing variation)라 이름 붙였다. '모범답안'을 내놓은 브람스는 작곡 기법만 따진다면 누구나 인정할 만한 베토벤의 후계자가 되었다.

협연자 : 피아니스트 장성

1986년생, 현재 하노버 국립음대 실내악 석사, 피아노 최고 연주자 과정 중
독일 하노버 국립음대 피아노 전문 연주자 과정 졸업 (블라디미르 크라이네프 사사)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사 졸업 (임종필 사사)
한국예술종합학교 16세 영재 입학
예원학교 수석 입학

Chopin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2011(Germany) 1등, 청중상
Valsesia Musica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Italy) 1등
KIMF Competition (U.S.A) 1등
Schubert International Piano Duo Competition (Czech) 1등, 슈베르트 특별상
Nagoya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Japan)최연소 1등, 일본 엑스포협회상, 실내악상
중앙일보콩쿠르, 난파음악콩쿠르, KBS신인음악콩쿠르 1등

KBS교향악단,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전시향, KNUA 심포니오케스트라 등 협연

지휘자 : 구자범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 후 동 대학원 철학과 재학 중 도독
독일 만하임 음대 대학원 지휘과 졸업
독일 하겐 시립 오페라 극장, 다름슈타트 국립 오페라 극장 지휘자
하노버 국립 오페라 극장 수석 지휘자
광주 시립교향악단 지휘자
현,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 티켓 예매 ―

인터파크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MN=Y&GoodsCode=11012294

2011년 9월 23일 금요일

아르프, »Mémoire (추억)« für Flöte und Orchester

※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원본 출처: http://g-phil.kr/?p=342


글: 에마뉘엘 제라르 (김원철 옮김)

이 작품은 클라우스 아르프가 플루트 연주자 장클로드 제라르(Jean-Claude Jérard)를 위해 작곡한 네 번째 곡이다. 앞서 작곡한 곡으로는 플루트 독주와 녹음기 두 대를 위한 《토마토 샐러드》(Tomatensalat), 플루트, 하프, 타악기와 무용수를 위한 《사중주》(Quartett), 플루트 여섯 대를 위한 《현미경》(Mikroskopie)이 있다.

음악은 세 음짜리 세포가 플루트로 나타난 뒤에 악기를 옮겨 가며 진화한다. 이 모티프는 《토마토 샐러드》에서 되풀이되던 가락을 따온 것이며, 이것은 마치 기억이 떠오르고, 재빨리 잡아채이고, 넘겨져 회상되는 듯하다. 이러한 에코 현상, 다시 말해 자꾸만 서두르는 듯한 리듬은 조금씩 소리의 겉면을 이루어 악기군을 옮겨 다닌다.

두 번째 모티프인 짤막한 16분음 상행 음형이 현악기로 나타나고, 뒤이어 바순과 호른이 응답한다. 플루트가 앙상블 위로 솟아오르고, 모티프 사이를 옮겨 다니고, 압도하고, 앞을 예고한다. 절정에 이르면 새로운 모티프가 나타난다. 점8분음표―16분음표 하행 음형이 호른으로 나오고, 현악기 리듬은 그동안 조금씩 늘어나고 느려진다. 목관악기가 천천히 죽어가고, 플루트는 이러한 변형이 일어날 동안 조용하다. 플루트 가락이 되살아나자마자 리듬은 다시 느슨해진다.

플루트를 반주하는 현악기군과 클라리넷 두 대 소리가 시적인 긴 악구가 끝날 때까지 들린다. 이 소리마저 사그라지면 오보에 둘과 클라리넷 하나가 해결되지 못한 a단조 화음으로 남는다. 플루트 독주는 처음 두 마디를 뒤집은 음형과 함께 끝난다. 마치 기억이 작업하고, 유지되고, 저장되고, 진화하고, 쇠퇴했다가 때때로 다시 깨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곡은 갑자기 멈춘다. 죽음이 어루만지는 순간 생각의 끈이 끊어지는 것처럼.

작곡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작품 속 기억은 개인적인 회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추억을 일깨우도록 의도한 자극이며, 이 자극은 플루트가 일으키고 다른 악기로 옮겨가며 더욱 발전합니다." 클라우스 아르프는 함부르크 주립 오페라단에서 있었던 (장클로드 제라르와 아르프 자신의) 공통된 옛일을 암시하며 윙크와 함께 덧붙였다. "알려진 주제선율들이 가리키는 것이 있다면 모두 일부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잘 들어보고, 기억해 보자…

※ 옮긴이 주: 이 글은 음반 속지에 있는 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본디 문단 구분이 없는 글이었으나 옮긴이가 멋대로 문단을 나누었음을 밝힙니다.

☞ 미니멀리즘 음악에 대하여 (글: 서의석)

― 티켓 예매 ―

고양아람누리
http://www.artgy.or.kr/PF/PF0201V.aspx?showid=0000003323

인터파크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MN=Y&GoodsCode=11010067

2011년 9월 22일 목요일

로미오와 쥴리엣 ― 순수한 사랑 이야기

※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원본 출처: http://g-phil.kr/?p=240

▲ 온라인 게임 《마비노기》 ©넥슨

위 그림은 ㈜넥슨에서 만든 온라인 게임 《마비노기》에 나오는 장면이다. 셰익스피어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바탕으로 했으되, 대사는 셰익스피어 희곡과 다르다. 이를테면 "밤의 망토"는 로미오 대사에 나오는 말이고, 위 자막에 해당하는 줄리엣 대사는 "밤의 가면이 내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면 붉게 물든 내 뺨이 드러나고 말았겠죠"이다. 무엇보다 셰익스피어 희곡에서는 해골 괴물이 줄리엣을 공격한다거나 하지 않는다.

원작을 고치는 일이 잘못은 아니다. 사실은 셰익스피어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 또한 원작이 따로 있다. 아서 브룩(Arthur Brook)이 1562년에 발표한 서사시가 원작이며, 셰익스피어 작품과는 내용이 또 다르다. 셰익스피어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이 널리 알려지면서 오페라, 발레, 교향시, 영화 등으로 고친 작품이 곳곳에서 나왔고, 내용은 제각각이다. 이 가운데 오페라만 꼽아도 24개 작품 또는 그 이상이다.

왜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토록 다양한 판본을 낳은 고전이 되었을까? 비극적인 반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위대한 작가 셰익스피어의 아름다운 글 등을 생각할 수 있겠다. 구자범 지휘자는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말을 했다. "어른들은 싸우는데, 아이들은 사랑을 나눈다. 아이들이야말로 세속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가장 순수한 사랑을 한다."

이번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회에서 연주될 네 가지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살펴보자.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쥴리엣》 조곡 2번에서는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 해당하는 두 곡이 연주된다.

구노 오페라 《로미오와 쥴리엣》번스타인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는 이야기 중간에 해당하는 대목, 로미오와 쥴리엣이 만나서 사랑을 키워 가는 장면이 연주된다. 구노와 번스타인이 같은 장면을 어찌 달리 표현했는지 견주어 보자.

차이콥스키 환상 서곡 《로미오와 쥴리엣》은 이야기 전체를 관현악곡에 담은 작품이다.

이제, 로미오와 쥴리엣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사랑하며 살자. 이것저것 따지고 드는 어른들은 본받지 말고, 자유롭게 사랑하며 살자. 행복한 로미오와 쥴리엣이 되자.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번 음악회 제목은 〈로미오와 리엣〉이다. 그러나 국립국어원에서 정한 표준외래어표기법을 좇자면 〈로미오와 리엣〉이라 써야 옳다. 이번 음악회에서 경기필하모닉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일부러 틀리게 썼다. 리엣이라 쓰면 더 예쁘기 때문이다. 다만, 셰익스피어 희곡 제목을 쓸 때만큼은 외래어표기법에 맞게 썼다.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쥴리엣》 모음곡 제2번

※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원본과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원본 출처: http://g-phil.kr/?p=237

프로코피예프는 1935년에 작곡한 발레 음악 《로미오와 쥴리엣》을 간추려 조곡(모음곡)을 3곡 만들었다. 이번 청소년 커플을 위한 음악회에서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조곡 제2번 중에서 발췌해 연주한다.

▶ 제1곡 : 몬타규 가(家)와 카풀렛 가(家)

사이 나쁜 두 귀족 집안 기사들이 만난 날. 분위기가 사납다. 짧고 강렬한 도입부가 끝나면, 저음 현이 기사들 발걸음처럼 쿵쾅거린다. 서늘한 긴장감을 담은 바이올린 선율이 이어진다.

▲ "기사들의 춤" 주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 Non-PD US, Non-PD EU

마침내 두 집안 기사들이 만나 으르렁거린다. 사나운 호른 선율이 터져 나오고, 이것이 트롬본, 튜바, 트럼펫 등으로 옮겨가며 긴장감을 높인다.

무릇 싸움 구경은 불구경만큼이나 재미난 법. 이 강렬한 분위기 때문에 '딥 퍼플' 등 록 음악가들도 이 곡을 연주한 일이 있다. 또한 이 곡은 영국 축구팀 '선덜랜드'가 입장할 때 배경음악으로 쓰기도 했으며, NFL 미식축구가 영국에서 방영될 때 주제 음악으로 쓰이기도 했다. 영화 《칼리굴라》 등에서도 이 곡이 쓰였다.

▲ "적개심(antagonism)" 주제. "기사들의 춤" 주제와 겹친다.

그래도 무도회는 열리고, 쥴리엣과 패리스 백작이 춤을 춘다. 패리스 백작은 쥴리엣과 결혼하고 싶어하는데, 쥴리엣은 아직 로미오를 만난 일이 없다. 플루트, 하프, 첼레스타가 이끄는 음악은 아름다운 쥴리엣 모습을 돋보이게끔 한다. 사뿐사뿐한 춤이 끝나면 다시 기사들이 서로 으르렁거린다.

▲ "쥴리엣과 패리스" 주제, 플루트 선율.

▶ 제2곡 : 쥴리엣 아가씨

제목 그대로이며 말이 필요 없다. 쾌활한 쥴리엣, 새침한 쥴리엣, 청순한 쥴리엣이 눈에 보일 듯한 음악이다.

▶ 제5곡 : 이별을 앞둔 로미오와 쥴리엣

쥴리엣의 침실. 달콤한 플루트 선율이 한참 흐른다. 짧은 클라리넷 선율에 이어 첼로와 바이올린 등이 연주하는 이른바 '사랑의 주제'가 나타난다.

▲ 플루트 주제

▲ 사랑의 주제

이제 헤어질 시간.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꼭 껴안는다. 독주 비올라, 클라리넷, 색소폰, 바이올린 등으로 선율이 이어지며 음악이 조금씩 부풀어 오른다. 뒤이어 플루트 주제와 사랑의 주제가 금관으로 찬가처럼 터져 나오며 음악이 절정에 이른다.

▲ '마지막 껴안음' 주제

로미오는 떠나고, 쥴리엣은 프란체스코 수도회 로렌스 수사를 만나 가짜 독약을 얻는다. 쥴리엣의 각오를 나타내는 플루트 선율이 불길하게 흐른다. 뒤이어 튜바와 콘트라베이스로 "죽음의 주제"가 나타난다.

▲ 불길한 플루트 선율

▲ 죽음의 주제. 불길한 플루트 선율과 겹쳐 나온다.

▶ 제7곡: 로미오와 쥴리엣의 무덤

제5곡에 나왔던 죽음의 주제가 바이올린으로 서럽게 이어진다. 금관이 선율을 받아 크게 부풀어 오른다. 뒤이어 '마지막 껴안음' 주제가 애달프게 흐르고 나면, 죽음의 주제가 금관으로 목놓아 울부짖듯 터져 나온다. 쓸쓸한 선율이 이어지면서 음악이 끝난다.

글 찾기

글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