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포니아 콘체르탄테’란 하이든과 모차르트 등 고전주의 시대 작곡가들이 즐겨 쓰던 용어로, 대개 독주 악기가 둘 이상이며 통상적인 협주곡보다 독주 악기의 역할이 작아서 교향곡과 협주곡의 중간적 형태라 할 수 있는 악곡을 말한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E♭장조는 모차르트가 1779년에 쓴 작품으로, 독주악기 2대가 마치 오페라 이중창처럼 대화를 나누는 듯한 짜임새가 두드러진다. 특히 2악장은 쓸쓸한 선율과 더불어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서로를 다독이는 듯한 분위기로 당당한 1악장 및 쾌활한 3악장과 대비를 이룬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 ‘카프리치오’ 중 육중주
’카프리치오’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오페라이다. 백작의 여동생 마들렌을 사모하는 작곡가 플라망과 시인 올리비에가 시와 음악의 우열을 놓고 마들렌을 설득하려 하는 것이 주된 내용으로, 극 중 플라망이 작곡 중인 현악육중주로 오페라가 시작되며 이 현악육중주는 오페라와 별개로 연주되기도 한다. 음악 용어이기도 한 ’카프리치오’는 본디 ’변덕’을 뜻하며 음악(플라망)과 시(올리비에)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마들렌의 마음을 상징한다.
쇤베르크: 정화된 밤, Op. 4
‘정화된 밤’은 쇤베르크의 후기 낭만주의 시기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반음계적 화성에서 오는 탐미적인 정서와 정교한 형식미가 공존하는 것이 특징이다. 쇤베르크는 리하르트 데멜(Richard Dehmel)의 시 ’두 사람’(Zwei Menschen)에서 영감을 받아 실내악 편성의 교향시로 이 곡을 구성했으며, 초연 당시에는 줄거리를 설명하지 않고 순음악으로 평가받고자 했다. 시 전문은 다음과 같다.
두 사람이 황량하고 스산한 숲을 거닐고 있다.
달이 그들을 따라가고, 그들은 달을 쳐다본다.
달은 떡갈나무 위로 높이 나아가고
하늘에는 빛을 가릴 구름 한 점 없이
검고 뾰족한 나뭇가지가 달을 찌른다.
여자의 목소리 들린다:
“나는 아이를 가졌어요. 그대 아이가 아니랍니다.
나는 죄를 짓고 그대 곁을 걸어요.
나는 나에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어요.
나는 행복을 바랄 수 없어요.
그래도 나는 갈망했어요
삶의 풍요로움과, 어머니의 기쁨과,
어머니의 의무를요. 그래서 죄를 지었어요,
그래서 떨리는 내 몸을
낯선 사내의 품에 맡기고
복 받았다고 여기기도 했어요.
이제 인생이 복수를 하네요,
내가 그대를, 그대를, 만났네요.”
그녀는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그녀는 고개를 든다. 달이 따라온다.
그녀의 어두운 시선이 빛에 잠긴다.
남자의 목소리 들린다:
“그대가 잉태한 아이를
영혼의 짐으로 삼지 말아요.
보세요, 우주가 얼마나 밝게 빛나는지!
광채가 모든 곳에 쏟아지고,
그대와 내가 차가운 바다를 항해해도,
우리 안에서 따사로운 빛이 타올라요
그대에게서 나에게로,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그 열기가 낯선 이의 아이를 정화하고
그대가 잉태한 내 아이가 되리니
그대가 나에게 광채를 비추고,
그대가 내게서 아이를 만들었네요.”
남자는 여자의 굴곡진 허리를 감싸 안는다.
그들의 숨결이 공기 속에서 입 맞춘다.
두 사람이 높고 밝은 밤 속을 걸어간다.
로망스는 낭만적·애상적 감성으로 가득한 악곡을 뜻한다. 본디 성악곡을 일컫는 말로 발라드와 동의어에 가까웠으나 18세기 이후 기악 로망스가 정착되었다. 세도막 형식 또는 론도 형식이 일반적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로망스는 작곡가가 19세 때 쓴 곡으로 본디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이다. 슈트라우스는 F장조 첼로 소나타와 로망스를 나란히 작곡했으나 로망스만 잊혀졌다가 100여 년이 지난 1987년에 뒤늦게 출판되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첼로 소나타 F장조 Op. 6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초기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살로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영웅의 생애› 등 중·후기의 대표작과 달리 고전적 성격이 뚜렷하다. 다만, 때때로 반음계적 화성 진행이 나타나거나 경과구에서 조바꿈이 여러 차례 일어나는 등 이 작품에서도 낭만주의적 특징을 찾을 수는 있다. 무엇보다 독특한 것은 1악장의 박절 구조이다.
1악장 제1주제는 전통적인 박절 규칙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가 조금씩 4마디 단위로 박절 구조가 재편되고, 제2주제에서 규칙성이 완전히 뿌리를 내린다. 발전부에서는 박절 구조가 특이한 제1주제를 대신해 소종결구 주제가 제2주제와 함께 전면에 나서고, 제1주제의 부점 리듬 패턴이 두 주제에 스며들어 음악을 이끌어 나간다. 발전부 마지막에 푸가토가 등장하는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2악장은 세도막 형식으로, 애상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낭만적 선율이 두드러진다. 소나타 형식으로 된 3악장에서는 1악장과 비슷한 부점 리듬이 이번에는 탱글탱글한 음형으로 나타난다. 제1주제와 같은 F장조로 새로운 선율이 나타나 '가짜 제2주제' 노릇을 하다가 C장조로 된 '진짜 제2주제'가 나오는 짜임새가 특이하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렌트슈 나메의 불만의 책 중 3개의 가곡 Op. 67
괴테는 14세기경 페르시아 시인 하피즈(하페스)의 ‹디반›(ديوان ; Divan; 시집)을 읽고 영감을 받아 ‹서동 시집›(West-östlicher Divan)을 썼다. '불만의 책'(Rendsch Nameh)은 총 12서(書)로 구성된 ‹서동 시집› 중 제5서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이 가운데 시 여섯 수를 골라 곡을 붙이고 ‹렌트슈 나메의 불만의 책›(Aus den Büchern des Unmuts des Rendsch Nameh)이라 했다. '렌트슈 나메'는 다름 아닌 '불만의 책'이라는 뜻으로 괴테가 '렌트슈 나메'(불만의 책)와 같이 표기했던 것과 달리 슈트라우스의 제목은 동어반복이다.
제4곡 '누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바라겠는가'(Wer wird von der Welt verlangen)는 노력에 제때 보답하지 않는 세상의 허망함을 노래하는 곡이다. 제5곡 '내 일찍이 그대들에게 충고한 적 있던가'(Hab ich euch denn je geraten)는 자신의 작품에 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을 비웃는 내용이다. 제6곡 '방랑자의 편한 마음'(Wanderers Gemütsruhe)은 비열한 자들이 큰 이득을 취하더라도 방랑자의 편한 마음으로 한 걸음 물러나 그들을 내버려 두라는 내용이다.
선율과 리듬과 화성은 전통적으로 서양음악을 이루는 3요소로 꼽혀 왔지요.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음색'이 그 못지않게 중요해 졌습니다. 음색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작곡 기법은 관현악법(orchestration)이고, 음악학자 달하우스는 현대적인 관현악법의 가능성을 제시한 말러 교향곡 1번과 R. 슈트라우스 《돈 쥬앙》을 가리켜 음악적 모더니즘의 뿌리라고도 했습니다. 오늘 감상하실 드뷔시 《바다》와 R.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은 '음색'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 바다의 빛깔에 관하여 ― 드뷔시 교향시 《바다》
드뷔시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미술 사조에서 빌어온 이 말로 드뷔시를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지만, 적어도 교향시 《바다》에 관해 얘기하려면 '인상주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1악장 : 바다의 새벽부터 정오까지 (De l'aube à midi sur la mer)
2악장 : 파도의 희롱 (Jeux de vagues)
3악장 : 바람과 바다의 대화 (Dialogue du vent et de la mer)
1악장은 새벽에 해가 떠서 수평선을 붉게 물들이고, 마침내 해가 높이 떠올라 눈부신 한낮의 햇살을 쏟아내는 모습이 환상적으로 느껴집니다. 음악이 너무나 멋있어서 자세한 설명은 차라리 군더더기가 될 듯해요. 그런데 2악장과 3악장을 들으면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습니다. 이 음악을 들으면서 어딘가 안정감이 없어서 불편한 느낌이 든다면, '발전하는' 음악에 너무 익숙한 탓일지도 모릅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서양음악은, 마치 극(drama)이 기승전결 구조를 따르는 것처럼 어떤 '방향성'을 따라 '발전'하는 짜임새를 갖습니다. 그 바탕이 되는 화성 진행 원리를 작곡가이자 이론가 장필리프 라모는 뉴턴의 중력이론에 빗대기도 했지요. 여기에 계몽주의 사상이 결합하면, 베토벤 교향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둠에서 광명으로' 짜임새가 됩니다.
드뷔시 음악은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배보다 배꼽이 커질 수 있으니 '인상주의' 얘기만 할게요. 음악이 '발전'하지 않고 '방향성' 없이 그저 흘러가니까, 마치 그림을 보는 듯 음악이 정지해 있는 느낌이 들지요.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이 했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시간예술과 공간예술의 차이점을 메우는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드뷔시 음악을 듣고 갸우뚱하게 하는 또 다른 원인은 모네, 르누아르 등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입니다. 드뷔시 음악이 모네 등의 그림과 그렇게까지 닮은꼴은 아니잖아요? 이것은 음악과 미술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드뷔시가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들에게서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상파 화가 중에서도 빛을 묘사하는 획기적인 표현 기법을 개발한 영국 화가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어른어른한 색채로 그림에 담았던 미국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등이 드뷔시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입니다.
▲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 北斎),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뒤(冨嶽三十六景 神奈川沖浪裏)
우키요에(浮世絵)라는 일본 에도시대 풍속화는 인상주의 미술 사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지요. 드뷔시는 그 가운데 호쿠사이의 판화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뒤》를 보고 《바다》를 작곡했고, 이 판화가 초판 악보 표지로도 쓰였습니다. 음악을 들어보면 어딘가 동아시아 느낌이 나지요?
▶ 산의 빛깔에 관하여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음색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작곡기법이 관현악법이라고 앞서 말씀드렸지요. 관현악법과 관련해 중요한 작곡가로 드뷔시, 라벨, 말러,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을 꼽을 수 있지만, 20세기 관현악법 문헌들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작곡가를 한 사람만 꼽으라면 바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일 겁니다.
《알프스 교향곡》에서는 밤-일출-저녁노을-일몰-밤으로 이어지는 '빛' 음형이 다양한 빛깔로 변주됩니다. 그리고 시냇물과 폭포, 풀잎, 꽃잎 등과 더불어 반짝이는 빛도 참 멋지지요. 이 작품에는 표제가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이야기 한 편을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도 있어요. 알프스 산 빛깔은 바다 빛깔과는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까요?
1. 밤 (Nacht) : 파곳과 몇몇 악기가 '밤' 음형을 연주할 동안 다른 악기들이 촘촘한 간격으로 음을 쌓아서 화음이라기보다는 '덩어리'(cluster)를 이루며 무겁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트롬본과 튜바가 마치 여명처럼 흐릿하게 빛나는 음형을 연주합니다. 조금씩 날이 밝아옵니다.
2. 일출 (Sonnenaufgang) : '밤' 음형이 눈 부신 햇살로 바뀌어 마구 쏟아집니다. 이토록 찬란한 소리가 '밤'과 음악적 뿌리가 같다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잘 들어 보세요. 찬란한 햇빛 속에 낯은 음으로 자꾸만 내려가는 '밤' 음형이 들어 있습니다!
3. 등산 (Der Anstieg) : 힘찬 리듬으로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면 '밤'에 나왔던 음형들과 음악적 뿌리가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어째서 이 작품 제목에 '교향곡'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지 알 듯합니다. 말하자면 '밤'과 '일출'이 교향곡의 '도입부'라면, 이 대목이 바로 '제1 주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4. 숲의 입구 (Eintritt in den Wald) : 교향곡의 '제2 주제'라 할 만한 대목이지만, 여기서부터는 '산'에 집중하기로 하지요. 형식 분석에 매달리기에는 '경치'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야생의 위험을 무릅쓰고 숲으로 들어서면 눈앞에 신기한 나무가 가득합니다. 산새가 울고, 꽃이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5. 개울가에서 거닐다 (Wanderung neben dem Bache) : 그리고 시냇물이 보입니다. 물이 차갑습니다. 물고기가 헤엄쳐 다닙니다. 물길을 따라 걸어가면…
6. 폭포에서 (Am Wasserfall) : 폭포가 나옵니다. 커다란 물소리, 물방울이 이리저리 튀기는 모양, 그리고 그 물방울이 햇빛을 만나면…
7. 환영 (Erscheinung) : 폭포에 걸린 무지개, 그리고 물방울마다 반짝이며 너울거리는 빛 알갱이가 꿈결처럼 아름답습니다!
8. 꽃으로 덮인 풀밭에서 (Auf blumigen Wiesen) : 폭포를 지나 더 올라갑니다. 길가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 옵니다.
9. 알프스 목장에서 (Auf der Alm) : 뿔피리 소리, 방울 소리, 소와 양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들판을 뛰노는 모습이 눈에 보일 듯합니다.
10. 길을 잃고 수풀과 덤불 속에서 헤매다(Durch Dickicht und Gestrüpp auf Irrwegen) : 소와 양이 풀을 뜯던 평화로운 산이 길을 잃는 순간 목숨을 위협합니다. 수풀과 덤불이 팔다리를 물어뜯으려고 달려듭니다.
11. 얼음산에서 (Auf dem Gletscher) : 겨우 빠져나오니 눈앞에 얼음산이 보입니다. 만년설이 세월의 무게로 얼어붙은, 알프스 산맥이나 히말라야 산맥 등에서 볼 수 있는 산악 빙하입니다.
12. 위험한 순간들 (Gefahrvolle Augenblicke) : 산꼭대기로 가려면 위험한 곳을 올라야 합니다. 한 발 잘못 디디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돌 굴러떨어지는 소리 들리나요? 자, 겁내지 말고, 숨을 크게 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13. 정상에서 (Auf dem Gipfel) : 드디어 정상입니다! 너무 힘들게 올라왔습니다. 주저앉아서 조금만 쉬자고요. 산꼭대기를 휘돌며 불어오는 바람은 싱그럽기도 하지요!
14. 전망 (Vision) : 이곳이 바로 알프스 산입니다. 아찔한 높이와 거대한 크기에 몸이 떨려 옵니다. 이 산과 견주면 인간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입니까?
16. 해가 서서히 지다 (Die Sonne verdüstert sich allmählich) : '밤'이었다가 '일출'이었던 그 음형이 이제는 '저녁노을'로 바뀌었네요.
17. 애가 (Elegie) : 날은 차츰 어두워지고 안개는 올라오는데, 문득 쓸쓸한 기분이 듭니다.
18. 폭풍전의 고요 (Stille vor dem Sturm) : 해 지는 알프스 정상은 참 고요합니다. 그러나 폭풍이 몰려올 듯하니 더 늦기 전에 내려가야 합니다. 바람 소리를 내는 특수악기(wind machine)가 이 대목에 사용되었습니다.
19. 번개와 폭풍, 하산 (Gewitter und Sturm, Abstieg) : 경기필이 제작한 천둥소리를 내는 악기(thunder machine), 바람 소리를 내는 악기(wind machine), 그리고 오르간과 더불어 오케스트라 전체가 폭풍우처럼 쏟아집니다.
20. 일몰 (Sonnenuntergang) : '밤'과 '일출'과 '저녁노을'이었던 그 음형입니다. 폭풍을 뚫고 산에서 내려오는 사이에 해가 집니다.
21. 여운 (Ausklang) : 오르간 소리가 들립니다. 사실은 폭풍이 몰아칠 때부터 들리던 오르간 소리이지만, 이곳에서는 오르간이 음악을 지배하면서 경건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현이 주선율을 이어받아 찬가처럼 부풀렸다가 조금씩 '밤'으로 옮겨갑니다.
22. 밤 (Nacht) : 다시 밤입니다. 처음에 그랬듯이, 어둡고 고요한 밤…
▶ 산과 바다 ― 대자연의 음악에 관하여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입니다. 요산요수(樂山樂水)라고도 하지요. 이번 경기필 연주회 제목 "音樂山音樂水 ― 산과 바다"는 이 말에서 따왔습니다.
그런데 《바다》와 《알프스 교향곡》처럼 자연을 그린 작품도 멋지지만, 자연이 들려주는 '음악'도 참 멋지지요. 물소리, 새 소리, 바람 소리…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전혀 다르게 들리는 이런 소리를 찾아 떠나 보면 어떨까요? 봄나들이 가기 좋은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연주회 있는 날에는 웬만하면 휴가를 냅니다. 그런데 어제는 직장 일정이 메롱이라 휴가를 못 냈어요. 늦지 않게 퇴근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데다가, 온종일 일 때문에 시달리느라 너무 피곤해서, 그냥 포기하고 집에서 쉬어야겠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예술의전당까지 부랴부랴 달려간 까닭은 안토니 비트가 이끌어내는 음악을 현장에서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주회 시작할 때쯤에 갑자기 생각했습니다. 오늘 프로그램이 뭐였더라?
첫 화음이 들려올 때 '아!' 했습니다. 바그너 《로엔그린》 1막 전주곡.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와 달리 현악기만 16성부쯤 될 만큼 몹시 복잡한 곡입니다. (정확히 몇 성부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악보 확인하기는 귀찮아요. ^^) 그래서 저는 이 곡을 실연으로 제대로 연주하는 꼴을 본 일이 없어요. 웅성웅성하다가 갑자기 우르릉 쾅! 하고는 다시 웅성웅성하다 말고 흐지부지 끝나기 일쑤죠. 연주회 첫 곡으로 '대충 때우는 곡'쯤으로 취급받으니 연습을 많이 하지도 않겠죠.
그런데 이날 연주를 들으면서 전율이 일었습니다. 성부 하나하나가 마치 햇빛을 받아 일렁이는 물결처럼 반짝반짝합니다. 클라이맥스를 지나서도 곧바로 김이 빠져버리지 않고, 어찌 들으면 처연한 화음을 집요하게 살려냅니다. 흠잡을 곳을 찾자면 제법 있었지만, 실연으로 이만큼 연주했으면 다 용서됩니다. 그런데 뒤이어서 3막 전주곡이 나오니 오히려 좋은 분위기가 깨지더군요. 3막 전주곡도 잘하기는 했지만, 1막 전주곡에서 여운을 남기며 끝나 줘야 할 것 같았습니다.
《베젠동크 가곡》을 협연한 예카테리나 구바노바는 지난번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브랑게네 역을 맡았던 사람이죠. 대단한 실력을 그때 충분히 확인했으니 어제는 딱 기대한 만큼 듣고 왔습니다. 러시아 사람인데 독일어 딕션이 참 좋아요. 그래서 제 엉터리 독일어 실력으로도 원어 가사를 제법 곱씹게 되었는데, 《트리스탄과 이졸데》에도 나오는 중요한 단어들이 음악과 함께 머릿속에서 조각 맞추기가 되면서, 특히 제2곡 〈Stehe still!〉(멈추어라)가 제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야한 곡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er)trinken, versinken, erkennt, 뭐 이런 단어들이 맥락을 알고 보면 참 야한 말들이죠.
안토니 비트, 우리나라에도 제법 널리 알려졌지만, 그래도 명성이 실력에 한참 못 미치는 지휘자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분이 동유럽 출신이라서 차별받는 게 아닌지 의심합니다. 실력만 보면 베를린필 음악감독으로 가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날 연주는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베젠동크 가곡》에서나 《영웅의 생애》에서나 서울시향의 기본 실력 이상을 끌어내지는 못하는 느낌. 서울시향이 연습을 많이 못 했다고 하던데 그 때문인지, 아니면 안토니 비트 실력이 결국 그만큼이었는지는 좀 두고 봐야겠습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도입부에 나오는 음악을 기억하는가. 현생인류가 아직 없던 먼 옛날, 밤새 잠을 설치고 두려워하던 원숭이들이 날이 밝자 맹수한테 쫓긴다. 마침 옆에 있던 모놀리스(monolith)가 '뷔뷔뷔뷔~' 하니 원숭이 한 마리가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커다란 뼈다귀 하나를 주워서 휘두르며 다른 원숭이와 힘을 합쳐 맹수를 물리친다. '깨달음'을 얻은 원숭이는 흉성을 터트려 뼈다귀를 마구 내려친다. 이때 화면이 느려지고 긴 저음에 이어 트럼펫 상행 선율이 들려온다. 음악이 흘러 으뜸화음이 햇살처럼 눈부시게 쏟아지고 심벌즈 따위가 찬란한 소리를 낸다. 이때 원숭이는 뼈다귀를 하늘 높이 던진다. 화면이 그 뼈다귀를 따라가면서 음악이 끝나고 화면이 어두워진다. 갑자기 우주 공간이 펼쳐지고 우주선이 날아온다. 우주선은 원숭이가 던진 바로 그 뼈다귀를 닮았다. 21세기 인류가 그 우주선에 타고 있다.
▶ 서주: '자연 모티프'와 완전 음정
이 음악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입부이다. 그리고 처음에 나오는 '도―솔―도' 트럼펫 상행 음형을 '자연'(nature) 모티프라고 부른다. 이 모티프 이름은 니체가 쓴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따온 것이지만, 음악적인 속뜻을 알려면 '음정'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음정은 두 음 사이 간격을 말하며, 영어로는 'interval'이라고 부른다. 높이가 같은 두 음 사이는 1도, 한 옥타브 차이는 8도가 된다.
시골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남자끼리, 또는 여자끼리는 같은 선율을 함께 부르면 자연스럽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보다 더 높은 소리를 내므로 대략 한 옥타브 위로 나란히 부르면 대충 맞다. 다시 말하면, 1도 음정이 가장 자연스럽고 8도 음정이 그다음으로 자연스럽다. 두 음의 주파수를 따져도 수학적으로 깔끔하게 맞아떨어지며, 이 사실을 일찍이 수학자 피타고라스가 발견한 바 있다.
8도 다음으로 자연스러운 음정은 5도이다. '도'와 '솔' 사이 간격이다. '솔'에서 옥타브 위 '도'로 올라가면 4도이다. 4도 음정도 5도 못지않게 자연스럽다. 이처럼 수학적으로 자연스러운 1도, 8도, 5도, 4도 음정을 '완전 음정'이라 부른다. 완전5도(perfect 5th) 음정, 이를테면 도―솔 사이를 반음 낮추어 도―솔♭으로 만들면 감5도(diminished 5th)가 된다. 3도 등 완전음정이 아닌 음정은 장3도(major 3rd), 단3도(minor 3rd) 등으로 부른다.
'자연' 모티프는 '도―솔―도'로 되어 있다. 완전5도 음정에서 완전4도 음정으로 이어진다. 관악기 배음구조를 따져도 매우 자연스럽게 낼 수 있는 음형이다. 여기에 장3도―단3도로 이어지는 '미―미♭' 음이 날카롭게 치고 나온다. '도―솔―도' 모티프는 작품 전체에 걸쳐 곧잘 나오며, 장3도―단3도 모티프는 작품 이곳저곳에 숨어서 나타난다.
이때 '미' 음이 16분음표임을 눈여겨보시라. '도―미―솔'이 2분음표 등으로 길게 이어지다가 갑자기 16분음표가 나오니 너무나 날카롭다. 이것을 악보 그대로 연주하면 실제로 선율 흐름이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다. 그래서 음반을 들어보면 이 16분음을 8분음으로 늘여서 연주한 녹음도 많다. 그러나 16분음 그대로 날카롭게 연주한 것도 있다. 이를테면 카라얀―베를린필 음반이 그렇다. 16분음과 8분음 사이에서 타협한 녹음도 있다. 이번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지휘자 구자범은 이 대목을 어찌 다스릴지 기대하시라.
▶ 저편의 세계를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
앞서 눈부시게 빛나던 C장조 으뜸화음과 대비되는 음침한 저음이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로 나타난다. 관악기가 음침한 선율과 리듬을 두 차례 주고받다가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로 현을 뜯어 연주하는 이른바 '피치카토' 음형이 나온다. b단조 으뜸화음을 펼쳐놓은 형태이며, '자연 모티프'를 변형시킨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인간 모티프'라 부른다.
바로 이어서 엄숙한 선율이 호른으로 나타난다. 악보에는 "나는 유일신을 믿노라"(credo in unum deum)라는 그레고리오 성가 가사가 붙어 있다. 현악기와 오르간으로 "저편의 세계"를 그린 듯한 선율이 뒤따르며, 악보에는 "신앙심을 가지고"(mit Andacht)라는 나타냄말이 붙어 있다. 그러나 도취적으로 부풀어 오르기는 하되 어딘가 불완전한 느낌이다. 조성이 마구 바뀌며, 주요 화음에 속하지 않는 '비화성음' 가운데서도 이른바 전타음(appoggiatura)과 계류음(suspension) 등 불협화음 성격이 강한 음이 강박에 오기도 한다.
"저편의 또 다른 세계를 꾸며낸 것은 고통과 무능력, […] 이 피로감이 온갖 신을 꾸며내고 저편의 또 다른 세계를 꾸며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위대한 동경에 대하여
앞서 나왔던 모티프들이 복조성(polytonality) 및 장·단조 대비와 함께 나타난다. 오르간으로 그레고리오 성가 음형이 나타나며, 악보에는 "마니피카트"(Magnificat)라는 가사가 쓰여 있다. 마니피카트는 "찬미하다"라는 뜻이며, 교회 성가 형식을 뜻하기도 한다.
뒤이어 반음계적 상행 음형이 사나운 조바꿈과 함께 되풀이되며 음악적 긴장감이 치솟는다.
"온 바다가 조용해져 네 동경에 귀 기울이기까지, 격렬한 노래를 불러야 하리라. 동경으로 가득 찬 조용한 바다 위에 황금빛 기적으로 조각배가 뜨고 그 황금의 둘레에 온갖 좋고 나쁜 놀라운 사물들이 춤추듯 뛸 때까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희열과 열정에 대하여
이 대목은 니체 원작을 모르면 '희열과 열정'이라는 말 때문에 어안이 벙벙하기 딱 좋다. 음악이 이렇게 사나운데 무슨?
박순영 교수가 보내온 글 초고에 있다가 빠진 대목을 조금 인용해 보겠다.
저편의 세계만 정당화되는 곳에서 사는 방법은 그 안에서 기쁨과 고통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선이고, 그것이 덕이다. 여기서 니체가 사용한 열정이라는 독일어는 라이덴샤프트(Leidenschaft)이다. 이 말은 고통(Leiden)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열정은 고통이다. 그러므로 ‘희열과 열정’이라는 주제는 ‘기쁨과 고통’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저편의 억압에 시달리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일종의 덕이다.
"너는 이 열정의 심장부에 너의 최고 목표를 세웠다. 그러자 열정은 너의 덕이 되고 희열이 되었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대목에서는 트롬본이 매우 멋진 곳이 있다. 감5도 하행했다가 반음계적으로 빠르게 치솟는 마디 158이 그곳이며, '혐오 모티프'라고도 한다. 감5도는 강력한 불협화 음정으로 옛날부터 "악마의 음정"이라 불리곤 했다. 감5도(=증4도)는 온음 세 개를 쌓아놓은 것과 같은 음정이고, 맥락에 따라 조성이라는 틀에서 사납게 일탈하면서 강력한 음악적 쾌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글쓴이가 아는 어떤 이는 이것을 두고 "악마의 쾌(快)"라 부른 바 있으며, 이러한 까닭에 이 음정은 록 음악에서 곧잘 쓰인다.
감5도 하행에 뒤이은 반음계적 상행 음형은 그 빠르기만으로도 쾌(快)를 더한다. 이 음형은 8마디 앞서 나오는 음형을 짧게 줄인 것인데, 역시 빠르게 치고 나올 때가 제맛이다. 튜바가 같은 음형을 나란히 연주하고 뒤이어 튜바가 따로 선율을 되풀이하기도 하지만, 트롬본이 전면에 나서기 때문에 '악마의 쾌'를 이끄는 것은 아무래도 트롬본이다.
그런데 트롬본으로 반음계적 상행 음형을 이토록 재빨리 연주하기가 쉽지 않다. 트롬본은 대개 밸브(valve)가 없고 관(피스톤) 길이를 손으로 줄여 가며 연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트롬본 연주자가 이 대목을 실수 없이 빠르고 사납게 연주하기를 기대한다. 연주자의 고통(Leiden)과 열정(Leidenschaft)이 이곳에 있나니!
앞서 나왔던 모티프들이 변주되며, 불협화음 및 반음계적 조바꿈 등과 더불어 불안정하게 흐른다.
"그때 너희는 추악한 유령들을 거느리고 나타나 나를 덮쳤다. 아, 행복했던 그 시간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과학에 대하여 (앎과 깨달음에 대하여)
'자연 모티프'와 '인간 모티프'에서 따온 음형이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로 나타나고, 이것이 푸가토(fugato)로 발전한다. 푸가토란 푸가(fugue) 형식을 흉내 내되 엄격한 규칙을 모두 지키지는 않은 것을 말한다. 푸가는 대위법과 주제 발전 규칙이 결합한 악곡 형식으로, 14세기 이래 곧잘 쓰이던 말이지만 바흐에 이르러 절정을 맞았다.
복잡한 용어 설명은 이렇게만 해두자. 중요한 것은 음악을 배우는 이로 하여금 머리를 쥐어뜯게 하는 '푸가'를 슈트라우스가 '과학'을 상징하는 음악 기법으로 썼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슈트라우스는 푸가 주제에서 한 옥타브를 이루는 12음을 모두 사용하여 쇤베르크의 이른바 '12음 기법'을 떠올리게끔 했다. (쇤베르크가 12음 기법을 고안한 일은 좀 더 나중 일이며, 슈트라우스가 쓴 '푸가토'는 쇤베르크 음악과 달리 C장조에서 b단조로 흐르는 조성이 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12음 기법이라 할 수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니체가 과학을 "마술사의 간계"라 했으며, 슈트라우스는 이것을 음침한 저음으로 나타냈다는 사실이다.
아니, 과학이 왜?
독일어 비센샤프트(Wissenschaft)는 보통 '과학' 또는 '학문'으로 번역되며, 참뜻은 19세기 시대정신이 반영된 '통합지식체계'에 가깝다. 그런데 니체가 말한 '비센샤프트'는 무엇이며 왜 그것을 '마술사의 간계'라 했을까? 박순영 교수님께 물었더니 니체가 비판한 '비센샤프트'는 실증과학이라 답했다. 옳거니. '위버멘쉬'란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에 가까우므로 실증주의와는 도무지 화해할 길이 없겠다.
"공기를! 신선한 공기를 들게 하라! 차라투스트라를 부르라! 그대, 고약한 늙은 마술사여, 그대는 이 동굴을 후덥지근하게 만들고 독으로 채우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푸가토 대목은 갑자기 사라지고 플루트와 바이올린이 이끄는 상쾌한 음형이 마치 신선한 공기처럼 들이닥친다. 목관악기가 선율을 이끄는 대목에 이르면 '교활한 마술사가 동굴에 채운 독'은 더 남아 있지 않다.
'자연 모티프'와 더불어 앞서 '악마의 쾌'라는 말로 설명한 '혐오 모티프'가 목관악기를 중심으로 대비되다가 갑자기 사나워진다.
▶ 건강을 되찾는 자
'푸가토' 주제로 사납게 몰아치다가 크게 폭발한다. 모두쉼표(Generalpause)에 이어 '인간 모티프'와 '혐오 모티프'가 대비되다가 반음계적 상행 음형과 플루트가 이끄는 트레몰로 음형을 지나 춤곡 리듬으로 바뀌어 간다. 이때 조성은 'b단조―a단조―D장조―B장조―C장조'로 바뀐다. 음악이 밝아진다.
"동굴 밖으로 걸어나가 보아라. 세계가 마치 화원인양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바람은 그대를 부르며 짙은 향기로 희롱한다. 시냇물은 모두 그대를 뒤쫓아 달리고 싶어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춤의 노래
'자연 모티프'가 트럼펫 → 바이올린 → 오보에로 이어지고 바이올린 독주가 춤추는 소녀처럼 사랑스럽게 흘러나온다. 이따금 '혐오 모티프'가 불청객처럼 끼어들지만, 전체 분위기는 밝다. 그리고 희망차게 부풀어 오른다.
"아, 이제 너는 다시 눈을 뜬다. 오, 사랑스러운 생명이여! 그리고 나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그 속으로 다시 가라앉고 있구나."
▶ 몽유병자의 노래
〈춤의 노래〉가 크게 부풀어 올라 절정에 이르면서 〈몽유병자의 노래〉 대목으로 옮겨간다. 종소리가 들려오고 치솟던 선율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그것이 바로 삶이었던가." 나는 죽음에다 대고 말하련다. "좋다! 그렇다면 한 번 더!"
흥분이 가라앉고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음악이 흐른다.
"[…] 조용히! 조용히! 낮 동안에는 들을 수 없던 많은 것들이 들려온다. […] 이제야 그것은 말하며, 이제야 그것은 들리며, 이제야 그것은 깨어 있는 밤의 영혼 속으로 기어든다. […] 그대는 듣고 있지 않느냐. 저 늙고 매우 심오한 밤이 그토록 은밀하고, 그토록 다정하게 그대에게 말하는 것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에 조성은 B장조에서 곡이 시작할 때 조성이었던 C장조로 바뀐다. 그러나 완전한 C장조가 되지 않고 B장조 으뜸화음이 함께 나타난다. 이것을 니체 원작에 나오는 말을 빌려 '세계의 수수께끼' 모티프라고도 하는데, 글쓴이가 보기에는 그 앞서 나오는 D♯―C♯ 음형과 함께 생각해야 옳다.
이 D♯―C♯ 음형을 C장조로 옮기고 계명창으로 바꾸면 '미―레'가 된다. '미―레'가 나왔으면 '도'가 이어져야 할 듯하다. '도'까지 나오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26번 '고별' 첫머리에 나오는 모티프가 된다. 그런데 '도'가 나올 듯 나올 듯하면서 뜸을 들인다. 이것은 말러가 《대지의 노래》와 교향곡 9번 등에서 쓴 바 있는 이른바 '영원'(Ewig) 모티프를 떠올리게끔 한다. 《대지의 노래》가 더 나중에 나온 작품이니 말러가 《차라투스트라》를 참고하지 않았을까.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4개의 마지막 노래》 Vier letzte Lieder (협연: 소프라노 전지영)
《장미의 기사 조곡》 Suite aus der Oper »Der Rosenkavalier«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바탕으로 쓴 교향시이다. 이 곡의 도입부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 도입부에 삽입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지휘자 구자범은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만하임 음대 대학원 지휘과를 졸업한 철학자 출신 지휘자이다. 구자범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해석하는 방식에서도 이러한 정체성이 반영되며, 연주회에 앞서 구자범 지휘자가 작품 해석을 직접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4개의 마지막 노래》 (협연: 소프라노 전지영)
관현악 반주가 있는 리트(가곡)이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죽기 직전에 썼다. 처음 3곡 〈봄〉, 〈9월〉, 〈잠자리에 들 때〉는 헤르만 헤세의 시를, 제4곡 <저녁놀>은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의 시를 바탕으로 한다.
《장미의 기사 조곡》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서 발췌한 조곡(모음곡)이다. 3막 왈츠만 따로 연주되기도 하지만, 이번에 연주되는 곡은 1·2막에서도 골고루 발췌한 ‘조곡’ 판본이다.
오페라 《장미의 기사》는 《살로메》, 《엘렉트라》 등에서 작곡가가 보였던 파격적인 음악 어법에서 한 발 물러나 조금 더 대중적인 양식으로 쓴 코믹 오페라이다. 후고 폰 호프만스탈이 대본을 썼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Richard Strauss, 1864~1949)
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며 오페라와 교향시 등을 다수 남겼다. 관현악법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고 현대 관현악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바그너 음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음악가였던 아버지로부터 보수적 음악관 물려받은 탓에 바그너를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바그너 타계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애도를 표할 때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만이 자리에 꿋꿋하게 앉아 있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 협연자 : 소프라노 전지영
베를린 도이체오퍼, 베를린 슈타츠오퍼, 하노버 국립 오페라, 만하임 국립 오페라, 드레스덴 젬퍼오퍼, 본, 뒤셀도르프, 비스바덴, 뮌헨, 부라운슈바익, 스위스 베른, 빈 여름 페스티발, 스위스 빈터투어, 북독일 오스트제 여름 페스티벌, 킬, 바이마르, 할레, 뤼벡 등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연주하였고, 뮌헨에서 세계적인 거장 제임스 레바인이 이끄는 뮌헨 필하모닉과 함께 공연하였다.
부산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와 연세대학교 음대 성악과와 뮌헨 음대 최고 연주자과정을 졸업하였다.
□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구자범 지휘자가 취임한 뒤로 평소에 쉽게 들을 수 없는 곡 위주로 주제를 정해 음악회를 열어 왔다. 지난 5월 첫 정기연주회에서는 말러 교향곡 1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살로메》 가운데 '일곱 베일의 춤',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을 연주했고, 지난 6월 정기연주회에서는 레스피기 《로마의 분수》, 《로마의 소나무》, 《로마의 축제》로 이어지는 '로마 3부작'을 연주했다. 다음 정기연주회에서는 프랑스 음악을 주제로 할 예정이다.
프로그램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9번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슈트라우스,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을 15곡 남겼다. 그러나 9번 교향곡을 들어보면 쇼스타코비치가 '9번의 저주'를 의식했음을 역설적으로 알 수 있다. 베토벤 이래 교향곡 9번이라 하면 작곡가가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운 진지한 작품, 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작품 등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런데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9번은 숫자가 주는 상징성과는 달리 유머로 가득하다. 웃음으로 저주를 물리치고자 했다는 뜻이다. 번스타인은 '9번'이라는 숫자 자체가 이 작품에서는 유머라고도 했다.
분위기가 가벼워서인지, 이 작품은 지휘자가 개성을 드러낼 만한 대목이 좀처럼 없다. 음반을 들어 봐도 비슷비슷한데, 지휘자 휴 울프는 그래도 나름대로 자기 색깔을 넣고자 노력하는 듯했다. 2악장 템포를 악보에서 지시한 ♩= 208보다 두 배나 느리게 잡은 대목은 그다지 특이하지 않다. 그런데 마디를 잘게 나눠 박자를 저어준 대목은 참 인상 깊었다. 템포가 이처럼 느리면 리듬이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이른바 '만득이 현상'이 일어나기 쉽다. 이 문제를 가장 손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휴 울프처럼 해주는 것이지만, 모양새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더 좋은 앙상블을 이끌어 내고자 지휘자가 그만큼 노력했다는 뜻이니 칭찬해 마땅하다.
휴 울프는 단원들에게 맡겨도 될 만한 독주 악구까지 지휘봉으로 모두 통제하는 듯했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4악장에서 5악장으로 넘어갈 때 템포 변화였다. 악보에서 지시한 템포는 4악장 ♪ = 84, 5악장 도입부 ♩= 100이다. 4악장에서 5악장으로 곧바로 넘어가면서 바순 독주가 갑자기 템포를 바꾸고 리듬도 빨라진다. 점잖은 유머다. 그러나 휴 울프는 이 대목을 좀 더 매끄럽게 다스리고 싶었나 보다. 4악장에서 5악장으로 넘어가면서 템포 변화를 거의 주지 않았고, 주제 선율이 두 번째로 되풀이될 때에 아첼레란도를 주었다. 현악기가 주제 선율을 받을 때에는 악보에서 지시한 ♩= 100보다 좀 더 빠른 ♩= 120쯤으로 달렸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9번만큼 멋진 바순 독주가 있는 관현악곡은 드물다. 바순은 다른 악기와 섞이면 존재감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바순은 독주 악기라기보다는 다른 악기와 섞어서 음색에 변화를 주는 악기이며, 이런 바순에 독주를 맡기려면 다른 악기를 조심해서 써야 한다. 오케스트라 바순 주자에게는 억울한 일이다. 그런데 이날 오랜만에 곽정선 수석이 멋진 솜씨를 뽐냈다. 곽정선은 얼마 전까지 직책이 수석대행이었지만, 이번에 시향 홈페이지에 가 보니 수석으로 바뀌었다. 연주가 끝나고 지휘자가 곽정선을 홀로 일으켜 세운 일만 세 차례나 되었다.
또 지금은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수석이 된 전임 트럼펫 수석 알렉상드르 바티가 오랜만에 객원으로 솜씨를 뽐냈다. 트롬본 수석 노릇을 한 객원 연주자도 훌륭했는데, 누군가 싶어서 알아보니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 앙투안 가네(Antoine Ganaye)라고 한다. 2악장에서 클라리넷 수석 채재일과 함께 멋진 연주를 들려준 못 보던 클라리넷 연주자가 있어서 시향 홈페이지에 가 보니 이름이 정은원이다. 3악장에서 피콜로를 연주한 장선아도 훌륭했다.
슈트라우스《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에서는 E♭ 클라리넷을 연주한 임상우 부수석이 돋보였다. 본디 악보에는 D조 클라리넷으로 연주하라고 나오지만, 이 악기는 요즘 거의 사라진 탓에 E♭ 클라리넷으로 이조해 연주하는 일이 보통이다. 지난해 3월 스테판 애즈버리 지휘로 같은 곡을 연주했을 때에도 임상우가 E♭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이날도 그때처럼 곧고 날카롭고 빈틈없는 소리가 멋졌다.
지난해 연주와 견주자면 이날 앙상블이 좀 더 깔끔했지 싶다. 그날 몇몇 연주자들이 실수했던 대목이 이번에는 모두 말끔하기도 했다. 다만, 매끄럽고 균형 잡힌 소리 때문인지 음향 효과를 과감하게 살리는 맛은 조금 모자랐다. 템포 변화도 애즈버리와 견주면 평면적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가 녹음한 협주곡 음반을 들어 보면, 바이올린 소리가 작아서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지 못해 답답하다는 느낌이 든다. 아티큘레이션에서도 절제가 묻어난다. 그런데 이날 브람스 협주곡을 들어보니 음반과는 달리 남들보다 소리가 아주 조금 작을 뿐이었다. 이날 연주는 모든 면에서 이성과 감성이 브람스답게 조화를 이룬 명연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악기를 온몸으로 연주하는데 소리가 저렇게밖에 안 난다고? 현대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더니 그 때문일까?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과연, 소리가 작은 악기인데 테츨라프라서 티가 덜 나는 것이란다. 현 네 줄에서 뽑아내는 음색이 테츨라프만큼 고른 연주자도 없는 듯한데, 이 또한 악기 때문일까, 아니면 연주법에 무슨 비밀이 있을까? 테츨라프가 쓰는 그라이너 바이올린이 모델로 삼았다는 과르네리 바이올린을 테츨라프가 연주하면 어떨지 궁금하다. 또는, 옛날에 썼다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으로 브람스 협주곡을 연주하면 어떨지도 궁금하다.
R. Strauss, Till Eulenspiegels lustige Streiche
Haydn, Cello Concerto No. 2 in D
Shostakovich, Symphony No. 7 "Leningrad"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글쓴이는 스테판 애즈버리 팬이다. 현대음악 전문 지휘자라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고 있을 뿐, 글쓴이는 그를 얀손스같은 스타 지휘자와 동급이라 여긴다면 믿으시겠는가? 이번 연주회에서 애즈버리가 얼마나 훌륭했는지는 첫 곡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에서부터 드러났다. 이 곡은 어지간한 유럽 지방 악단도 실황 음원을 들어보면 때때로 앙상블이 흐트러지기 일쑤일 만큼 연주하기 까다로운데, 이날 서울시향은 같은 기준으로도 썩 잘했다. 서울시향 솜씨가 그만큼 늘었기도 하겠으나, 이제껏 서울시향을 지휘한 사람 가운데 첫 곡에서 이토록 놀라운 소리를 뽑아낸 지휘자가 또 누가 있던가? 정명훈뿐이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길고 까다로운 곡이니만큼 앙상블이 살짝 흔들리는 일이 없지 않았으나, 애즈버리는 현대음악 전문 지휘자답게 음악 흐름에 가장 알맞은 음향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다스리는 남다른 솜씨를 보여주었다. 템포는 느린 편이었으며 3악장과 4악장 느린 대목에서는 템포를 몹시 느리게 잡아서 애달픈 느낌을 더했다. 그러나 빠른 곳에서는 악보에 있는 메트로놈 지시보다 오히려 빨라지기도 해서 굼뜬 느낌은 없었다.
가장 멋졌던 곳은 1악장 행진곡 리듬이 나오는 이른바 '침공(invasion)' 주제였다. 이 대목은 선율이 몹시 단순하고 유치해서 버르토크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에서 패러디하며 잔뜩 비꼬기도 했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수룩한 선율이 아니라 작은북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차가운 음색이다. 이때 작은북은 마치 바이올린과 목관악기 따위가 행진곡 리듬을 연주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끔 그 소리를 감싸 안아야 하는데, 애즈버리는 오케스트라 한가운데 바이올린과 비올라 사이에 작은북 한 대를 두어 자연스러운 음향을 이끌어 내었다. 타악기 수석 에드워드 최가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으며, 긴 호흡으로 만들어가는 크레셴도에 마치 나치 시대 독일군이 멀리서부터 쳐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보일 듯해 소름이 돋았다. 마디 365에서 심벌즈가 처음 나올 때 무대 뒤 작은북 두 대가 리듬을 이어받았으며, 에드워드 최는 이때 재빨리 무대 뒤로 가 셋이 함께 격렬한 총주와 어우러졌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았던 곳을 말하자면, 이를테면 3악장 처음은 오르간 느낌이 나는 곳이나 이날 목관악기 소리가 조금 작아서 음향이 살아나지 못했다. 4악장에서 마지막 폭발을 앞두고 긴장감을 쌓아가다가 마디 566에 이르면 호른 독주가 나오는데, 이때 호른에 붙은 셈여림표는 포르테(f)이나 모든 현과 목관악기가 ff로 마치 울부짖는 듯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야 한다. 그러나 이날 목관 악기 소리가 작아서 안타까웠다. 2악장에서 베이스 클라리넷이 선율을 이끌어가는 대목(마디 251)에서는 한 호흡에 부드럽게 이어 연주하지 않고 조각조각 끊어 연주했고 소리도 작았다. 이 대목은 악보를 보면 도대체 숨을 쉴 만한 곳이 없는데다가 이른바 '순환호흡'을 하더라도 음 하나하나가 길어서 매끄럽게 연주하기 어려워 보이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나, 잘 연주하면 매우 멋진 곳이라 아쉬움을 남겼다.
그런데 아쉬웠던 곳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체력이 모자란 탓이 아닐까 싶다. 금관악기는 그다지 큰 문제를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 곡이 트럼펫과 트롬본이 6대씩, 그리고 호른은 8대 또는 더블링(doubling)까지 생각하면 9대 이상 쓰이는 거대편성인 덕분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목관은 3관 편성이라 연주자들이 많이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올해 서울시향이 말러 교향곡을 연주하겠다니 이참에 체력을 쌓아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대편성 곡을 연주하기에는 단원 수가 모자라 객원 연주자로 채워야 할 터이니 문제다.
시향 단원 가운데 이날 남달리 눈에 띈 연주자도 있었으니 E♭ 클라리넷을 연주한 임상우 부수석이다. 보통 '클라리넷' 하면 B♭ 또는 A조 클라리넷을 말하는데, 이날 클라리넷치고는 매우 높은 소리를 내던 악기가 바로 E♭ 클라리넷이며, 《틸 오일렌슈피겔》 악보에는 D조 클라리넷으로 나와있으나 요즘은 거의 사라진 악기라 보통 E♭ 클라리넷으로 연주한다. 이 곡에서는 B♭ 클라리넷보다 E♭ 클라리넷이 더 돋보이므로 채재일 수석이 아닌 임상우 부수석이 E♭ 클라리넷을 연주한 일이 이상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곡에 쓰인 무시무시한 고음은 플루트나 피콜로처럼 반짝여서도 안 되고, 오보에처럼 아련한 느낌이 들어서도 안 되며, 단단하면서도 날 선 송곳처럼 날카롭고 거침없어야 한다. 부드럽고 여린 소리를 누구보다 잘 내는 채재일이 이런 소리를 내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우며, 곧고 빈틈없는 소리를 내는 임상우야말로 이 악기에 알맞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에서도 임상우가 E♭ 클라리넷을 멋지게 연주했다.
하이든 작품은 딱히 독창적인 해석이 필요하지 않아서 연주자 기량이 민얼굴처럼 드러나므로 연주자에게는 오히려 가장 어렵다. 하이든 D 장조 첼로 협주곡을 협연한 주연선 또한 몇 군데 작은 실수를 해서 누리꾼 사이에서 혹평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 곡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을 터이므로 시향 수석 단원 솜씨를 뽐내려는 기획이라면 그다지 실속 없는 선곡이라 본다. 주연선이 연주하는 첼로는 비단결처럼 은은한 빛을 머금은 소리가 참으로 멋진데, 이것을 뽐내려면 19세기 곡 또는 애즈버리가 옌스 페터 마인츠와 협연해 음반을 남긴 윤이상첼로 협주곡을 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김도윤 Doyun Kim, 《디베르티멘토》 Divertimento for 13 strings
펜데레츠키 K. Penderecki, 《샤콘느》 Chaconne
김정길 Chung-Gil Kim, 현악합주를 위한 《올래, 오름, 그리고 백록담》, TIMF앙상블 위촉
- 휴식 -
리게티 G. Ligeti, 《라미피카시옹》 Ramification (version for 12 solo strings)
R. 슈트라우스 R. Strauss, 《메타모르포젠》 Metamorphosen for 23 strings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연예술창작기금지원사업으로 기획한 국민평가단 평가 자료를 겸하는 글이며, 평가서 항목에 맞추어 썼음을 밝힙니다.
▶ 공연작품의 예술적 수월성
TIMF 앙상블은 다른 악단과 견주어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했으며 연주회 프로그램도 매우 훌륭했다. 창작곡 또한 다른 공연에서 연주된 작품보다 예술적으로 훨씬 뛰어났다.
▶ 공연계획 실행의 충실성
호암아트홀이 현대음악과 어울리는 연주회장인지는 의심스러우나, 이날 프로그램은 호암아트홀 실내음향과 썩 잘 어울리는 작품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김도윤 작품은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처럼 잔향이 좀 더 짧은 곳에서 연주되었다면 느낌이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창작곡은 전체 공연과 조화를 이루는 본격 현대음악이었다.
공연 시작에 앞서 TIMF 앙상블 예술감독 최우정이 연주회 해설 강연을 열었는데, 내용은 훌륭했으나 사전 공지가 없었고 연주회장 밖에서 어수선한 분위기로 진행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 공연성과 및 해당분야 발전에의 기여도
TIMF 앙상블은 본격 현대음악 전문 연주 단체로, 그것만으로도 예술위원회가 공연창작기금을 지원할 가치가 높다. 연주 실력 또한 매우 뛰어나고 창작곡 또한 훌륭하므로 지원 가치는 더욱 높다.
▶ 총평
※ 공연 관계자와 김원철의 친분 관계 요약
작곡가 김정길은 서울대학교 작곡과 교수였다가 퇴임했고, TIMF 앙상블 예술감독 최우정은 현재 같은 과 교수이며, 작곡가 김도윤은 같은 과 학생이다. 김원철은 같은 과 이론 전공 석사이나 이들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으며, 이론 전공은 작곡 전공과는 사실상 학과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김도윤은 이날 처음 알았고, 최우정은 서로 얼굴 알아보고 인사할 만한 친분은 있으며 서울시향이 최우정에게 위촉한 첼로 협주곡 초연 리뷰를 김원철이 서울시향 월간지 『SPO』에 기고한 일도 있다. 김정길은 작곡과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컸으므로 그 사실만으로 김원철이 완벽하게 객관적인 평을 하지 못하리라 의심하더라도 반박하기 어렵다.
김도윤 《디베르티멘토》는 팸플릿에 있는 작품 설명이 어렵다. 그러나 음 소재를 조각내고 비틀어 음악을 이끌어 간다는 아이디어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멀리는 브람스나 베토벤까지도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요즘 작곡가 가운데에는 크리스 폴 하르만(Chris Paul Harman) 같은 사람도 김도윤과 닮은꼴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짜임새로 나타나는가이며, 무엇보다 이론적인 장난질에 그치지 않고 감상자에게 듣는 재미를 주느냐이다.
김도윤 《디베르티멘토》는 '듣기 좋은' 작품이었다. 현대음악인 만큼 아름다운 선율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는 뜻은 아니다. 현대음악치고 그다지 어렵지 않고 뭔가 엉뚱한 연주법을 쓰지도 않으면서도 어딘가 귀를 즐겁게 하는 곳이 있었는데, 좁은 공간에서 진동하는 듯한 화음 또는 음 덩어리(Cluster)가 조성감을 얼핏 드러내면서도 현대적인 긴장감을 이룬 대목이나 콘트라베이스가 피치카토 음형으로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흥미로운 (악보를 보면 생각보다 머리를 쥐어뜯게끔 하는) 리듬을 이끌어가며 만들어 내는 박진감 따위가 멋졌다. 무엇보다 작곡가가 '변주곡의 원리'를 말한 만큼 음 소재를 짜임새 있게 이끌어 가는 솜씨가 훌륭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작곡가가 1984년생이란다. 이 '어린놈'이 이토록 멋진 곡을 썼다니, 나는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 외쳐주었다. "브라보!"
고백하건대 나는 김정길 작품을 이날 처음 들었다. 현대음악에 거부감은 없으나 국내 작곡가 작품을 일부러 찾아 들을 정도는 아니다 보니 이름은 익히 들어온 작곡가라도 작품은 모르는 일이 더러 있다. 이날 연주된 《올래, 오름, 그리고 백록담》을 들어보니 김정길이 윤이상 제자였다는 사실이 곧바로 떠올랐다. 윤이상 수제자로 보통 호소카와 도시오(細川俊夫)를 꼽는데, 이제 보니 음악 양식만 따지자면 김정길이야말로 윤이상에게서 가장 많은 것을 물려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슈파러(Walter-Wolfgang Sparrer)를 비롯한 음악학자들은 윤이상 음악을 가리켜 "동양의 사상과 음악 기법을 서양음악 어법과 결합시켜 완벽하게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이며 "동아시아적인 것을 서구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을 자국적 전통과 융합시키면서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한국적"이라 했다. 그러나 윤신향은 윤이상 음악이 동서양 음악의 융화가 아니라 "이주민 고유의 전통적 특색들이 서구 사회에 동화해가는 과정 속에서 변화하고 상실되는 원리가 윤이상에게도 적용"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두 세계 사이의 진정한 융화는 작곡자의 삶이 음악어휘를 결정할 때마다 그늘처럼 은폐되는 한국적 정신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그곳에서만 가능하다." (윤신향, 『윤이상, 경계선상의 음악』 파주: 한길사, 2005.)
윤이상 음악이 동서양 '융화'가 아니라 '동화'인 까닭은 음악을 이루는 두 세계가 대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정길 《올래, 오름, 그리고 백록담》은 화음과 장식음 따위가 윤이상과 닮은꼴이면서도 음계와 리듬 등에 한국적인 요소가 조금 늘어서 '두 세계' 사이가 좀 더 균형 잡힌 음악이었다. 20세기 서양음악사와 온몸으로 부대껴야 했던 윤이상과는 여러모로 처지가 달랐으리라.
리게티는 《라미피카시옹》(Ramification)에서 악단을 둘로 나누어 첫째 그룹이 표준 조율법보다 4분음 높게 연주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또한 둘이 섞여 있어서 안개처럼 흐릿한 소리가 되게끔 했는데, 리게티는 두 그룹이 따로 연습한 다음 마지막 연습 때에는 무대에서 따로 앉아 연주하고, 실제 공연에서는 섞여 앉도록 제안했다. 그런데 이날 TIMF 앙상블은 지휘자를 중심으로 두 그룹이 나뉘어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 섞여 앉았다면 연주자끼리 서로 영향을 주면서 오히려 소리가 엉망이 될까 걱정한 탓이 아닐까 싶은데, 어쨌거나 '안개' 음향은 제법 그럴싸하게 살아나서 다행이었다.
전체적으로 연주는 매우 훌륭했으며, 딱 한 군데 아쉬웠던 곳을 말하자면 마디 101에서 콘트라베이스가 악보에서 지시한 만큼 '위협적이고 잔인하게'(minaccioso brutale) 연주하지 못한 대목이었다. 이곳에서 콘트라베이스는 활을 지판 쪽에서 매우 여리고 부드럽게 연주하다가 갑자기 매우 세게 ― ffff에서 ffffff로 크레셴도 ― 폭발하듯 박박 긁어대야 한다. 곧이어 활이 줄받침(bridge)과 지판을 오가며 꾸준히 음색을 바꾸면서 길게 연주해야 하는데, 마디 106에서 바이올린 하모닉스 음형이 더해질 때까지 다른 모든 악기는 침묵하면서 이 대목이 자연스럽게 곡 전체의 클라이맥스가 된다. 그러나 이날은 콘트라베이스 한 대로 이 대목을 연주하느라 음량이 크게 모자랐고, 그 한 사람이 온 힘을 다해 긁어대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