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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0일 금요일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1번 '비의 노래'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글입니다.


이정경: 슈만이 죽고 클라라가 혼자 애들을 키웠잖아. 막내아들이 많이 아프다가 결국 죽었거든. 그 소식을 듣고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짧은 멜로디를 써서 편지를 보냈어. 그게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 2악장이야.

한현호: 그게 브람스식의 위로고 위안이었구나. 말보단 음악으로… 근데 직접 찾아서 위로해 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윤동윤: 브람스가 그런 행동파였으면 진작 클라라랑 이어졌게?

이정경: 브람스는 말보다 음악이 더 편했나 보지. 준영이처럼…

윤동윤: 근데 음악이 진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현호 말대로 진짜 슬프고 힘들 땐 말 한마디가 더 큰 힘이 되는 것 같은데…

채송아: 그래도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 음악이 위로가 될 수 있다고요. 왜냐면… 우리는 음악을 하기로 선택했으니까요.

얼마 전 종영한 SBS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은 이 드라마에 제법 중요한 소재로 나오는 작품이지요. 채송아(박은빈 분)가 박준영(김민재 분)의 반주로 이 작품을 연주하는 장면도 있지만, 음악이 스쳐 지나가는 소품 정도로 쓰였을 뿐 음악의 힘이 드라마를 이끌어 가게끔 연출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했습니다.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1번에는 ‘비의 노래’(Regenlied)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브람스가 가곡 ’비의 노래’에서 따온 선율을 3악장에 사용했기 때문인데, 브람스는 이 작품에 대해 “비 오는 저녁의 달콤씁쓸한 분위기”라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는 비 오는 장면이 때때로 극의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브람스 가곡 ‘비의 노래’ Op. 59 No. 3의 가사이자 클라우스 그로트(Klaus Groth, 1819~1899)가 쓴 원작 시는 이렇습니다.

쏟아져라, 비야, 쏟아져라, / 나 어릴 적 꾸었던 그 꿈에서 / 다시 한번 나를 깨워다오 / 빗물이 모래 속에서 거품 짓는 시간에!

(중략)

쏟아져라, 비야, 쏟아져라, / 우리가 문 앞에서 불렀던 / 옛 노래를 깨워다오 / 빗방울이 밖에서 소리치는 시간에!

나 다시금 듣고 싶어라 / 달콤하고 촉촉한 소리를 / 내 영혼 부드럽게 젖어들어라 / 어린이의 순수한 경외감에.

비 오는 저녁 느낌은 사실 1악장을 시작하는 선율에서부터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이사벨러 판 쾰런이 지난 2015년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이 곡을 연주했을 때, 저는 프로그램 노트에 이렇게 썼습니다. “브람스는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살살 녹는 첫 주제를 들으면 바로 알 수 있어요.”

브람스가 말한 ’달콤씁쓸한 분위기’는 1악장에서는 달콤함이 우세하고, 2악장에서는 씁쓸함이 우세합니다. 세도막 형식으로 된 2악장의 가운데 부분은 장송행진곡입니다. 3악장에서는 슬픈 선율로 시작해 조금씩 달콤함을 회복해 나가다가 슬픔을 새로운 희망으로 승화시키며 끝맺습니다.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첼리스트 한현호는 바이올린을 하는 사람은 다들 브람스 소나타 1번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또는 어쩌면 드라마를 본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이 곡을 더욱 좋아하게 되어서일까요? 11월 22일에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남훈, 12월 12일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이석중이 윤이상기념관에서 이 곡을 연주합니다. 아무쪼록 바이러스가 잘 통제되어서 두 공연이 무사히 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6년 10월 1일 토요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 베토벤 교향곡 3번

통영국제음악당 공연 프로그램북에 실릴 글입니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 77

브람스는 이 곡을 쓰면서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고 하지요. 작품에서 때로 느껴지는 즉흥적인 충동이 그 결과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풍부한 감성의 이면에 치밀한 논리가 있는 것이 브람스 음악의 특징인데, 이 작품에서는 논리와 충동의 긴장 관계가 나타난다고요.

브람스는 1악장 제시부에 4가지 주요 주제를 사용했습니다. 소나타 형식에 흔히 나오는 제1주제, 제2주제와 더불어 종결구 주제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오케스트라 제시부에 없던 제3주제를 독주 바이올린이 제시하지요. 그런데 제2주제는 제1주제와 조성 관계로 구분되면서도 얼핏 제1주제와 비슷하게 들리기 때문에 자칫 헷갈릴 수 있습니다. 오히려 격렬한 종결구 주제가 앞선 주제군과 대조됩니다.

독주 바이올린이 처음 나오는 대목은 살짝 카덴차 느낌으로 앞서 말씀드린 즉흥적 충동이 두드러집니다. 격렬한 음형과 극적인 전개가 마치 기악 레치타티보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이 음형은 제1주제를 변형시킨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좀 더 뒤로 가서야 독주 바이올린이 제1주제를 온전히 제시합니다. 제2주제와 제3주제로 이어지는 과정 또한 제법 복잡합니다.

2악장은 세도막 형식, 3악장은 론도형식으로 1악장과 견주면 나머지 악장은 단순한 편입니다. 2악장에서는 애수 가득한 선율이 매력적이고, 3악장에서는 독주자의 불꽃 튀는 테크닉과 신나게 달리는 오케스트라가 흥미진진한 한판 대결을 펼칩니다.

베토벤: 교향곡 3번 E♭장조 Op. 55 ‘에로이카’

‘에로이카’(영웅)라는 제목의 유래에 관해 오늘날 정설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베토벤의 제자였던 페르디난트 리스가 한 말입니다. 표지 제목에 ‘보나파르트’를 이탈리아식 철자로 쓰고 하단에 자신의 이름 또한 이탈리아식으로 ‘루이지 판 베토벤’이라 쓴 악보를 봤다고요. 그리고 널리 알려진 것처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베토벤은 격분해서 그 표지를 찢어 버렸다고 하지요.

아마도 베토벤의 자필 악보였을 그 악보는 유실되었습니다. 그 대신 베토벤이 감수한 필사본이 남아 있는데, 표지에는 ‘보나파르트’라고 썼다가 지운 흔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박박 지웠는지 종이에 구멍이 나 있다지요. 베토벤은 나중에 ‘보나파르트’ 이름을 필사본에 다시 썼고, 악보를 출판하면서는 제목이 ‘보나파르트’가 맞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제목에 흥미를 느낄 것이라고도 했고요. 그러나 베토벤은 결국 제목을 ‘에로이카’로 확정했습니다.

이 작품의 짜임새는 제목만큼이나 장대합니다. 1악장만으로도 당시에 연주되던 어지간한 교향곡 전체 길이와 맞먹을 정도이지요. 악상을 전개하는 방식 또한 파격적입니다. 베토벤은 이 작품에서 단순 명료함을 미덕으로 여기던 고전주의 음악 양식에서 벗어나, 화성적 · 조성적 안정성을 계속 뒤로 미루면서 그야말로 ‘영웅의 투쟁’처럼 파란만장한 짜임새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완전히 새로운 음악에 충격을 받았고, 새로운 작곡 기법은 19세기 서양음악사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되었습니다.

음악학자 베리 쿠퍼는 이 작품의 내러티브를 영웅의 삶(1악장) → 영웅의 죽음(2악장) → 영웅의 부활(3악장) → 신격을 얻는 영웅(4악장)으로 보았습니다. 2악장이 장송행진곡인 까닭을 설명하는 해석으로 참고할 만하지만, 제 생각에 3악장을 ‘부활’로 보는 건 좀 억지스러워요. 이를테면 3악장을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4악장에서는 발레 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피날레 주제를 따서 쓰고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진흙상을 사람으로 만들어 파르나소스 산으로 데려간다는 줄거리인데, 베리 쿠퍼는 ‘폭풍 → 진흙상 → 생명을 얻음 → 신격을 얻음’ 짜임새가 ‘에로이카’ 4악장에 비슷하게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는 ‘폭풍’에 이은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주제가 베이스 성부만으로 시작해 조금씩 온전한 형태를 갖춘 다음 변화하고 발전하지요.

베토벤은 공화정을 완성할 ‘현실의 프로메테우스’로 나폴레옹을 지목했고, 신화 속에서 프로메테우스의 도움으로 사람이 문명을 깨우친 것처럼 현실의 인류 또한 예술과 학문으로 신의 광휘에 끝없이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작품의 조성은 거룩한 음악에 곧잘 쓰이던 E♭ 장조이며, 특히 4악장에서 E♭ 장조 화음이 찬란함을 더해 가는 과정이 백미입니다.

이 작품을 연주할 때 베토벤 당시보다 오케스트라 크기를 늘리고, 당시 금관악기로는 낼 수 없던 음을 덧붙여 연주하는 등 웅장함을 부풀리는 관습이 특히 20세기에 유행했지요. 그러나 요즘에는 되도록 악보 그대로 연주하려는 경향이 우세합니다. 하노버 NDR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앤드루 맨지 또한 그런 추세를 이끌어 왔지요. 음악학자들이 새로 밝혀낸 것들이 반영될 이번 연주는 어떨지 기대 됩니다.

2015년 5월 31일 일요일

모차르트: 현악사중주 14번 K. 387 / 야나체크: 현악사중주 2번 '비밀편지' / 슈베르트: 현악사중주 14번 '죽음과 소녀'

통영국제음악당 '예루살렘 콰르텟' 공연 프로그램북에 실릴 글입니다.



모차르트: 현악사중주 14번 K. 387

“이 여섯 아들이 전혀 부족함 없기를 감히 소망합니다. 모쪼록 이를 너그러이 받아 주시고 이들의 아버지이자 후견인 그리고 친구가 되어주십시오. 지금부터 내 자식들에 관한 모든 권한을 당신께 양도합니다. 만약 아비의 모자란 눈을 피해간 잘못이 있다면 부디 너그럽게 보아주시고, 결함에도 불구하고 제 자식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다른 이에게도 당신의 자비로운 우정이 지속되기를 소망합니다. 당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충실한 친구로 남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모차르트가 하이든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지난 5월 20일 통영국제음악당 '모차르트 위크'를 열었던 '아벨 콰르텟' 공연 해설에서 음악평론가 김문경 씨가 소개한 바로 그것이지요. 이날 아벨 콰르텟이 연주한 현악사중주 19번 K. 465 '불협화음'이 모차르트의 이른바 '하이든 콰르텟' 가운데 여섯째 '아들'이라면, 오늘 예루살렘 콰르텟이 연주할 현악사중주 14번 K. 387은 첫째 '아들'입니다. '봄'이라는 표제가 붙어있기도 하지요.

1악장은 깔끔한 소나타 형식, 2악장은 미뉴에트와 트리오 형식, 3악장은 두도막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2악장과 3악장은 제1주제-제2주제 관계가 살짝 소나타 형식 느낌이 나는 것이 당시로써는 특징적이기도 하고요. 4악장은 푸가토(fugato), 그러니까 푸가(fugue)와 비슷한 짜임새로 된 소나타 형식입니다. 교향곡 41번 '주피터' 4악장과 닮은꼴이지요. 온음 4개로 된 주제로 시작하는 것도 닮았습니다. 이 주제로 된 '벽돌'이 어떻게 쌓이는지 머릿속으로 그려 보면서 감상하면 음악이 매우 흥미진진할 거예요. 벽돌 모양이 자꾸만 바뀌니까 긴장을 놓치면 안 됩니다!


야나체크: 현악사중주 2번 '비밀편지'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지요. 레오시 야나체크 현악사중주 2번 '비밀편지'를 들을 때면 저는 이 말을 떠올리곤 합니다. 야나체크의 '은교'는 처음 만났을 때 20대 후반이었던 유부녀 카밀라 스퇴슬로바(Kamila Stösslová)였는데, 야나체크는 그보다 38살 더 많았지요. 두 사람은 편지를 700통 넘게 주고받았지만, 사실은 야나체크가 짝사랑을 했을 뿐인 듯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키스 이상의 신체 접촉은 없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카밀라를 만단 뒤로 야나체크는 걸작을 줄줄이 쏟아냅니다. 대기만성형 작곡가였던 야나체크의 '뮤즈'가 카밀라였던 셈이지요. 그리고 현악사중주 2번 '비밀편지'를 발표할 때쯤에는 드디어 카밀라가 야나체크의 사랑을 받아주기 시작했는데, 카밀라와 함께 소풍을 갔던 야나체크는 그만 감기에 걸리고, 그것이 폐렴이 되어 죽고 맙니다. '비밀편지'의 공식 초연은 그 직후에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야나체크가 음악으로 쓴 연애편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어 표제인 "Listy důvěrné"에서 체코어 důvěrné(두볘르네)는 '비밀'이라는 뜻도 있지만, 영어 'intimate'에 해당하는 뜻도 있습니다. 성적인 의미를 포함해서 친밀하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우리말 표제로 '비밀 편지'가 널리 쓰이기는 하지만, '은밀한 편지'가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후기 낭만주의 음악 양식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몇십 년 뒤를 내다보게 하는 현대성이 공존하는 야나체크의 대표작입니다. 그래서 현대음악에서 곧잘 들을 수 있는 충격적인 음향이 작곡가의 불타는 사랑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장치가 되고 있지요. 특히 4악장이 끝날 때쯤 애틋한 선율과 폭력적인 소음이 교차하는 대목이 백미입니다. 그리고 바로 앞서 마치 시계 초침이 딸깍거리는 듯한 음형은 마치 작곡가가 제 죽음을 예견한 듯해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슈베르트: 현악사중주 14번 '죽음과 소녀'

'사(死)의 찬미'라는 노래가 있지요. 워낙 옛날 노래라 지금에 와서는 노래보다 제목이 훨씬 더 유명한데요, 죽음을 찬미하는 염세적인 생각은 옛날부터 은근히 인기가 있었나 봅니다. '죽음과 소녀'도 그런 작품입니다. 원작은 마티아스 클라우디스가 쓴 시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소녀에게 그저 편안히 잠들기만 하면 된다고 죽음이 유혹하는 내용입니다. 슈베르트는 이 시에 곡을 붙였고, 같은 제목으로 현악사중주를 작곡하면서 그 선율을 2악장에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리트 선율을 기악곡에 재활용한 것은 피아노 5중주 A장조 '송어'와 닮은꼴이지요. '리트 악장'이 변주곡 형식이라는 점도 닮은꼴입니다. 팔딱거리는 송어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곡조와 죽음을 찬미하는 곡조는 데칼코마니 같습니다.

1악장은 소나타 형식으로, 제2 주제에 이어지는 경과구가 마치 발전부처럼 쓰인 점이 특이하고, 그래서 제시부를 반복한 뒤 진짜 발전부에 이르는 짜임새가 참신하다고 느껴집니다. 3악장은 스케르초와 트리오 형식입니다. 1악장에 베토벤 교향곡 9번 2악장과 같은 절박함이 있다면, 3악장에는 말러 교향곡 9번 2악장과 같은 악마적인 쾌(快)가 있습니다.

4악장은 론도-소나타 형식인데, 그보다 4악장 전체를 지배하는 타란텔라(tarantella) 리듬이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림스키코르사코프 〈셰에라자드〉 4악장에도 나오는 그 리듬이지요. (지난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을 기억하시는 분 제법 되실 듯합니다.) 〈셰에라자드〉의 타란텔라가 '광란의 춤'이라면, '죽음과 소녀' 사중주에 나오는 타란텔라는 '죽음의 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015년 5월 17일 일요일

리스트 단테 소나타, 물 위를 걷는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 노르마 회상, 스페인 랩소디 등

통영국제음악당 공연 프로그램 해설입니다.

리스트: 《순례의 해》 중 첫 번째 해 제4곡 '샘가에서'

리스트 《순례의 해》는 다양한 피아노곡을 '여행'이라는 주제로 묶은 '음악 여행기'입니다. 프랑스어로 된 원제 Années de pèlerinage는 괴테의 장편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프랑스어 초판 제목을 가져다 쓴 것이고, 따라서 문자 그대로 번역한 '순례의 해'보다는 '편력시대'가 제목으로 더 적절할는지 모릅니다.

《순례의 해》 중 첫 번째 해 '스위스'는 리스트가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함께 스위스로 밀월여행을 떠났을 때를 추억하며 쓴 곡으로, 제4곡 '샘가에서'는 《나그네 앨범》이라는 피아노곡집에 실었던 곡을 재창작한 것입니다. 악보에는 실러가 쓴 시 「도망자」(Der Flüchtling) 중에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는 대목을 인용했습니다. "속삭이는 청량함 속에 / 젊은 자연이 / 놀이를 시작하니,"(In säuselnder Kühle / Beginnen die Spiele / Der jungen Natur,).

리스트: 《순례의 해》 중 세 번째 해 제4곡 '에스테 저택의 분수'

에스테 저택 또는 '빌라 데스테'(Villa d'Este)는 이탈리아 티볼리에 있는 저택으로, 르네상스 양식으로 된 건물과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하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리스트는 악보에 요한복음 중 한 구절을 인용해 놓았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리스트: 《2개의 전설》 중 '물 위를 걷는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

제1곡 '새들에게 설교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제2곡 '물 위를 걷는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로 되어 있는 《2개의 전설》은 자식을 잃는 등 괴로움을 겪으면서 종교에 경도된 리스트가 신부 서품을 받기 몇 해 전에 쓴 곡입니다. 뱃삯을 낼 수 없었던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가 겉옷을 벗어 물 위에 띄워 타고 물을 건넜다는 전설을 음악으로 담은 제2곡 '물 위를 걷는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는, 찬가풍 선율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발밑으로 물살이 지나가는 듯한 음형이 맞물리고 조금씩 종교적 고양감을 키우며 음악적 스펙터클을 만들어 가는 짜임새가 압권인 작품입니다.

리스트: 《순례의 해》 중 두 번째 해 제7곡 '단테를 읽고: 소나타 풍 환상곡'

'단테 소나타'라고도 부르는 이 곡은 단테의 『신곡』을 음악에 담은 작품으로 빅토르 위고의 시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합니다. '악마의 음정'이라 하여 전통적으로 금기시되었던 증4도(또는 감5도) 음정과 파격적인 불협화음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지옥을 그리고, '지옥' 음형을 평화로운 느낌으로 변형해 대비시키는 짜임새로 20분 가까이 이어가며 오늘 공연 1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걸작입니다.

베를리오즈: 《파우스트의 겁벌》 중 실프의 춤 (리스트 편곡)

베를리오즈 《파우스트의 겁벌》(La damnation de Faust)은 파우스트가 끝내 지옥으로 끌려간다는 점에서 괴테 『파우스트』와는 내용이 조금 다른 오페라입니다. '실프의 춤'은 메피스토펠레가 파우스트를 잠재운 뒤 꿈에 마르가리타, 그러니까 괴테 소설의 '그레트헨'을 보여주고, 그동안 공기의 요정인 실프가 파우스트 주위를 돌면서 우아하게 춤추는 대목입니다. 생상스는 《동물의 사육제》 중 '코끼리'에서 '실프' 음형을 더블베이스로 연주하게끔 패러디하기도 했지요.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사랑의 죽음 (리스트 편곡)

바그너는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영감을 받았는데, 이 책을 읽기 전과 후의 작품 세계가 결정적으로 달라질 만큼 그 영향이 컸지요.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그것이 표면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 바그너는 비극적인 사랑 얘기 속에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담아내고자 했는데, '사랑의 죽음'은 마지막 장면으로 바그너 자신은 이 장면을 "이졸데의 변용"(Isoldes Verklärung)이라 했습니다. 이졸데가 '열반'에 이르는 마지막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파도치는 물결 속에, / 소리치는 울림 속에, / 세상 숨결 불어오는 / 우주 속에 / 빠져들어, / 가라앉아 / 나를 잊으리라 / 더없는 기쁨이여! (이졸데는 변용된 듯 브랑게네 품에서 트리스탄 몸 위로 부드럽게 쓰러진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넋을 잃고 바라본다. 마르케는 주검에 축복을 내린다. 막이 천천히 내린다.)

벨리니: 《노르마》 회상 (리스트 편곡)

리스트는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비롯해 다양한 작품을 피아노 곡으로 편곡했지요. 그 중에는 오페라의 주요 대목을 따서 환상곡풍으로 재창작한 곡도 있는데, 리스트는 이런 작품에 회상(Réminiscences)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노르마》 회상이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으로, 무시무시한 난이도와 극적인 짜임새로 피아니스트에게 도전이 되는 작품입니다. 벨리니 원작 오페라 《노르마》 줄거리를 여기서 설명하지는 않을게요. 사랑과 배신, 갈등과 희생이 리스트의 편곡에 잘 드러나니 음악을 들으면서 상상해 보세요!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

이 곡은 17세기 또는 그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면서 수많은 작곡가가 인용했던 '라 폴리아'(La Folia) 주제를 따온 변주곡입니다. 변주 중간에 스페인 민요풍 음형이 에피소드처럼 나오는 것이 독특합니다. 그런데 지난해 화제가 되었던 TV 드라마 《밀회》에서 이 곡이 매우 비중 있게 나온다지요. 집에 TV가 없는 저는 소문을 들은 것이 전부라 자세한 맥락은 모릅니다. 기회가 되면 언제 한번 보고 싶기는 하네요.


▲ '라 폴리아' 주제

2015년 5월 1일 금요일

드보르자크 피아노 트리오 4번 Op. 90 '둠키',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Op. 97 '대공'

통영국제음악재단 공연 프로그램북에 실릴 작품 해설입니다.

드보르자크: 피아노 트리오 4번 Op. 90 '둠키'

둠키(Dumky)는 둠카(Dumka)의 복수형입니다. 둠카는 폴란드 · 우크라이나 · 체코 등 동유럽에서 나타난 노래로, 탄식하거나 우울하게 사색하는 내용이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박자는 2박자 계통이 흔하고, 많은 경우 유절 형식이지요. 19세기 이후에는 기악 둠카도 많이 나타났고, 쇼팽, 리스트, 야나체크, 그리고 차이콥스키와 무소륵스키 등 동유럽 및 일부 러시아 작곡가가 둠카 양식으로 된 곡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둠카 기악곡을 가장 많이 쓴 작곡가는 드보르자크라 할 수 있어요.

드보르자크의 둠카는 느리고 우울한 대목과 빠르고 활기찬 대목을 엇갈리게 하는 점이 독특합니다. '둠키 트리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악장이 겹세도막 형식 또는 겹두도막 형식으로 되어있고, 느림과 빠름이 엇갈리는 짜임새가 어떤 면에서는 론도 형식과도 통합니다. 이런 특징이 너무나 뚜렷해서 악장 사이 변화가 고만고만하게 느껴질 정도이지요. 그래서 느리고 슬픈 음악과 빠르고 강렬한 음악이 어떻게 엇갈려 이어지고 또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헤아리는 것이 이 곡의 감상 포인트입니다.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Op. 97 '대공'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된 작품입니다. 루돌프 대공은 베토벤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베토벤에게 음악을 배운 제자였고, 베토벤은 피아노 협주곡 5번, 함머클라비어 소나타, 장엄미사, 대푸가 등 여러 작품을 그에게 헌정했지요.

귀족적인 분위기가 특징적인 '대공 트리오'는 형식적으로 명쾌하면서도 베토벤다운 예술적 탁월함이 있는 걸작입니다. 1악장은 소나타 형식, 2악장은 스케르초와 트리오 꼴 세도막 형식, 3악장은 변주곡 형식, 4악장은 론도 형식으로, 그나마 형식적으로 독특한 곳이 있다면 스케르초를 3악장이 아닌 2악장에서 사용한 점, 1악장 제1 주제에서 제2 주제로 넘어갈 때 제법 긴 경과구를 거쳐 딸림조가 아닌 6도 관계조로 과감한 조바꿈을 사용했다는 것 정도이지요.

3악장에서는 가슴 뭉클한 선율과 화음이 뒤에 가서 제법 다양하게 변주되므로 조금 주의가 필요합니다. 주제 선율과 분위기를 이어가는 것은 첫 번째 변주까지이고, 두 번째 변주부터는 화음 등에서 원래 주제가 남아 있기는 해도 선율과 리듬은 느낌이 많이 달라지거든요. 살짝 변형된 원래 주제로 돌아와 여운을 남기면서 끝나는 3악장은, 갑자기 바뀐 템포와 함께 곧바로 4악장으로 이어집니다. 4악장은 A-B-A-C-A-B-A 꼴에 마지막에 빠르고 힘찬 종결구가 있는 짜임새입니다.

반말체로 고친 텍스트:

베토벤은 피아노 협주곡 5번, 함머클라비어 소나타, 장엄미사, 대푸가 등 여러 작품을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했으며 ‘대공 트리오’ 또한 마찬가지다. 루돌프 대공은 베토벤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베토벤에게 음악을 배운 제자이기도 했다.

귀족적인 분위기가 특징적인 '대공 트리오'는 형식적으로 명쾌하면서도 베토벤다운 예술적 탁월함이 있는 걸작이다. 1악장은 소나타 형식, 2악장은 스케르초와 트리오 꼴 세도막 형식, 3악장은 변주곡 형식, 4악장은 론도 형식으로 되어 있다. 스케르초를 3악장이 아닌 2악장에 배치한 점, 그리고 1악장 제1주제에서 제2주제로 넘어갈 때 제법 긴 경과구를 거쳐 딸림조가 아닌 버금가온조(6도 관계조)로 과감한 조바꿈을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형식적 파격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3악장에서는 가슴 뭉클한 선율과 화음이 변주된다. 주제 선율과 분위기를 이어가는 것은 첫 번째 변주까지이며, 두 번째 변주부터는 화음 등에서 원래 주제가 남아 있으나 선율과 리듬은 느낌이 많이 달라져서 음악에 다채로움을 더한다. 살짝 변형된 원래 주제로 돌아와 여운을 남기면서 끝나는 3악장은, 갑자기 바뀐 템포와 함께 곧바로 4악장으로 이어진다. 4악장은 A-B-A-C-A-B-A 꼴에 마지막에 빠르고 힘찬 종결구가 있는 짜임새다.

2012년 11월 5일 월요일

윤이상 8중주, 뵈니슈 클라리넷 사중주, 지브코비치 하나를 위한 삼중주, 쇼스타코비치 현악사중주 8번, 헨델-할보르센 파사칼리아, 빌라로부스 쇼루스 7번

어제 연주회 팸플릿에 실은 작품 해설입니다. 기록 차원에서 제 블로그에도 올려 둡니다. 표기법과 내용을 일부 고쳤습니다.


윤이상, 클라리넷과 파곳, 호른, 현악오중주를 위한 8중주

Yun Isang, Octet for Clarinet/BassClarinet, Basoon, Horn, String Quintet

라디오 프랑스의 위촉으로 1978년 4월 10일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윤이상의 후기 양식이 잘 나타나는 이 작품은 동動-정靜-동動 세 부분으로 된 단악장 짜임새이며 정중동(靜中動)이라는 동아시아적 개념이 윤이상의 작곡 기법인 이른바 '중심음(Hauptton)/중심음향(Hauptklang)' 기법 속에서 잘 나타난다.

중심음 기법이란 동아시아 전통음악에서 음 하나하나가 정지되어 있지 않고 유연하게 흐르듯 변화하는 특징을 서양음악에 옮겨온 기법을 말하는데, 윤이상은 이와 관련해 동아시아 음악과 서양음악의 차이를 붓글씨와 펜글씨의 차이에 비유한 바 있고, 실제로 이 곡에서는 국악을 연상시키는 음형과 연주법 등이 나온다.

중심음이 모여 음향 덩어리를 이룬 것이 중심음향이며, 이것이 동아시아 음악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음색을 서양음악으로 재현하는 핵심 장치가 된다. 그리고 중심음향이 변화하는 핵심 원리가 바로 ‘정중동’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뵈니슈, 클라리넷 사중주

Josef Bönisch, Quartet for Clarinet

요제프 뵈니슈(1935―)는 독일 작곡가이자 플루트 연주자이다. 바이마르 콘서바토리와 라이프치히 음악대학을 졸업했고, 여러 오케스트라 및 앙상블 단원으로 활동했다. 독일 할레에 있는 헨델 콘서바토리 교수로 있으면서 실내악과 관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다수 작곡했다. 뵈니슈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작곡가는 아니지만, 뵈니슈가 작곡한 많은 곡이 콩쿠르 지정곡으로 쓰이거나 작곡상을 받는 등 전문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뵈니슈는 어려운 현대음악이 아니라 듣기 쉬운 작품을 쓴 작곡가이다. 뵈니슈의 클라리넷 사중주는 처음 듣는 사람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곡으로, 클라리넷 여러 대가 화음을 연주할 때 들을 수 있는 음색이 특징적이다. '식물성 사운드'라고 이름 붙일 만한 담백하면서도 탱글탱글한 소리를 내는 클라리넷, 그리고 비슷한 음색으로 낮은 소리를 내는 베이스클라리넷이 어우러지는 독특한 음향은 마치 마법의 세계를 보는 듯한 신비로움을 느끼게끔 한다.

지브코비치, 하나를 위한 삼중주

Nebojša Jovan Živković, »Trio per Uno«

네보이샤 요반 지브코비치(1962―)는 세르비아 출신 작곡가이자 타악기 연주자이다. 20세기 이후로 클래식 음악계에서 보기 드물어진 '연주자 겸 작곡가'로 활동하는 지브코비치는 현존하는 가장 독특하고 표현력 있는 음악가이자 최고의 마림바/타악기 독주자로 평가받는다. 독일 만하임 음악대학과 슈투트가르트 음악대학에서 작곡, 음악 이론 및 타악기를 전공했다.

지브코비치는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미국, 일본, 대만, 한국, 남미,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지역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타악기 연주자로서 슈투트가르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뮌헨 심포니 오케스트라, 하노버 방송교향악단, 보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오스트리아 체임버 심포니 오케스트라, 빌레펠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핀란드 투르쿠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오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코스타리카 국립 오케스트라, 리투아니아 국립 교향악단 등과 협연했다.

《하나를 위한 삼중주》는 타악기 삼중주곡이며 연주자 3명이 타악기 10여 가지를 연주한다. 3악장 짜임새로, 1악장과 3악장은 마치 원시적인 종교의식처럼 사납고 박진감 있으며, 2악장은 차분하고 명상적이다. '하나를 위한 삼중주'라는 제목은 3명이 연주하는 여러 타악기 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져 마치 한 가지 '타악기 세트'에서 나는 소리처럼 들리게끔 작곡가가 의도했음을 뜻한다.

쇼스타코비치, 현악사중주 8번 c단조

Dmitri Shostakovich, String Quartet No. 8 in c Op. 110

쇼스타코비치 《현악사중주 8번 c단조》는 1960년 작품으로 쇼스타코비치는 악보에 "파시즘과 전쟁 희상자에게 바친다"라고 썼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작품을 쓰기에 앞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드레스덴 시와 유대인 학살 현장을 러시아 정부의 요청으로 둘러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작곡가 개인의 삶을 담은 작품으로도 볼 수 있으며, 정부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어야 했던 작곡가의 삶을 돌이켜볼 때 이 주장은 강한 설득력을 얻는다. 쇼스타코비치는 훗날 이 작품과 파시즘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고, 쇼스타코비치의 친구였던 레베딘스키(Lev Lebedinsky)는 이 작품이 작곡가의 묘비명 같은 곡으로 이 당시 쇼스타코비치가 자살을 준비했다고 주장했다.

느리고 어두운 애가(哀歌) 풍이 두드러지는 이 작품은 작곡가 자신의 이름에서 따온 'DSCH' 음형으로 시작하여 이 음형이 작품 전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DSCH' 음형이란 D(레)-E♭(미플렛)-C(도)-B(시) 음으로 된 음형을 가리키며, D, S, C, H를 독일어 식으로 읽으면 독일식 음이름과 각각 일치한다.) 5악장으로 되어 있으며 5개 악장이 한 악장처럼 이어서 연주된다.

헨델-할보르센, 파사칼리아 g단조

Händel-Halvorsen, Passacaglia in g

헨델의 하프시코드 모음곡 제7번 g단조 6악장 '파사칼리아'를 노르웨이 출신 작곡가이자 지휘자 요한 할보르센(1864~1935)이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이중주곡으로 고친 작품으로, 원곡보다 할보르센의 편곡이 더욱 유명하다. 헨델의 원곡은 애절하고 격정적인 선율과 화성이 하프시코드의 날카로운 음색으로 나타나는 작품이며, 할보르센은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날카로운 음색으로 원곡 느낌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악기의 매력을 잘 살리도록 편곡했다.

현악기 한 대로 두 음 이상을 동시에 연주하는 이른바 '더블 스톱'(double stop) 주법이 반복적으로 사용되었고, 이에 따라 바이올린 한 대와 비올라 한 대만으로 현악사중주와 같은 풍부한 소리를 내도록 쓰였다. 이러한 까닭에 이 작품을 연주하려면 난이도가 매우 높은 테크닉이 필요하다.

파사칼리아란 변주곡의 한 종류를 일컫는 말로 때때로 ‘샤콘느’와 혼용되기도 한다. 17세기 스페인 춤곡에서 유래했고, 주로 저음에서 반복되는 음형과 3박자 또는 부점 리듬이 특징적이다. 헨델-할보르센의 파사칼리아 이외에 널리 알려진 파사칼리아 작품으로는 바흐의 오르간을 위한 파사칼리아 c단조 BMV 582, 브람스 교향곡 4번 4악장, 베베른의 파사칼리아 등이 있다.

빌라로부스, 쇼루스 제7번

Heitor Villa-Lobos, Chôros No. 7 for winds, violin and cello

에이토르 빌라로부스(Heitor Villa-Lobos, 1887~1959)는 브라질 작곡가로, 《브라질 풍의 바흐》 연작과 《쇼루스》 연작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쇼루스'(Chôros)는 포르투갈어 '쇼루'(chôro)에서 온 말이며, '쇼루'는 '울다' 또는 '탄식하다'를 뜻하는 동시에 브라질 대중음악 양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19세기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 길거리 음악에서 유래한 쇼루는 낱말의 본디 뜻과는 다르게 빠르고 경쾌한 음악을 포함하는 기악 음악이다.

빌라로부스의 《쇼루스》 연작은 악기 편성을 달리하는 16개 작품으로 되어 있는데, 드뷔시 · 라벨 · 스트라빈스키 등의 영향과 브라질의 토속적 분위기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쇼루스 제7번》은 바이올린, 첼로와 목관악기 등을 위한 곡으로 흥겨운 분위기 속에 은근한 우울함이 숨어 있어 독특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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