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6일 월요일

음악의 눈 (樂眼)

수업 게시판에 썼던 글을 퍼왔습니다. 쉔커 분석 이론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쓴 글입니다.


수업 시간에 거론했던 '구조'니 'unity'니 하는 말들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반박할 말이 마땅치 않았는데, 지난 시간에 제가 잠깐 언급했던 시인 오탁번에 대한 기억에서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오탁번 선생님은 '이승은 한 줌 재로 변하여 이름 모를 풀꽃들의 뿌리로 돌아가고'로 시작하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나오는 시 <하관(下棺)>을 쓰신 원로급 시인이면서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님이시기도 합니다. 제가 그 분의 문학 수업을 들을 때 선생님께서는 계간지를 창간하실 계획을 세우시고는 어떤 이름이 좋을지 학생들의 의견을 구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때 선생님께서 가장 마음에 들어하시던 이름이 시안(詩眼)이었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아직까지도 발간되는 모양입니다. '오탁번시화' 메뉴에 좋은 수필들이 있으니 참고하세요. http://www.sian.or.kr)

시안은 서안(書眼), 화안(畫眼), 또는 화룡점정(畫龍點睛) 같은 말과도 통하는, 시의 가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단어 하나 또는 글자 하나를 뜻합니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 했습니다. '구조'의 논리로 바라보자면 눈이란 전체를 이루는 한 부분일 뿐이지만, 서양적 유기체론이 아닌 동양적 미학으로는 좀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동양인이 바라보는 서양음악에 있어서, 작품을 잉태하는 씨앗으로서의 구조보다는 '악안(樂眼)'을 살찌우는 자양분으로서 구조를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악안(樂眼)'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저는 그것을 느낄 수는 있어도 그 정체를 명확하게 인지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미학자들의 영원한 숙제가 아닐까요? 오탁번 선생님께서는 시를 있는 그대로 대할 것을 주장하셨습니다. 음악학도의 입장에서는 만족할 수 없는 주장이지만 현재로서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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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치볼드 맥클리쉬(Archiblad Macleish)가 <詩學>(Ars Poetica)이라는 시에서 시로써 시의 본질을 정의하려고 했던 시도는 이 책을 만드는 나의 무모한 행위와 엇비슷한 데가 있다. 시는 정의를 분명하게 내리면 내릴수록 오히려 시의 진실과는 그만큼 더 멀어진다고 할 수 있으니까, 그냥 시 한 편 한 편, 또는 그것들이 쌓여서 집적이나 집합의 연속으로 되어 있는 시 자체는 그것 그대로 '있게'하는 일이 그 진실을 가장 정당하게 옹호하는 일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시 교실에 참가하는 학생들이나 또 그 시간을 운영하는 나같이 어줍잖은 사람이 가진 공통된 기질은 언제나 시를 가위질해서 토막토막을 낸 다음, 그것을 다시 어떤 '하나의 구조'로 재생시키고 싶은 유혹을 아주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책의 첫장을 넘겨서 내용을 읽기 시작한 이들이나, 지금 이 교실에 들어와 앉은 이들은, 이 글을 쓰는 나와는 어차피 서로 그러한 유혹을 견디지 못한 동반자 의식을 지니게 될 것이다. 평소에 문학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읽어서 시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출중하다거나 이미 한 편의 시를 시 대신에 '하나의 구조'로서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둥근 과일과 떠오르는 달'이니 '꽃수풀과 마른 국화'니 하는 의미가 자칫하면 이해보다는 오해나 곡해로서 작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나 곡해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시를 그냥 있는 그대로 '있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라는 말은 참으로 책임감 없는 핑계 같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시 자체를 위하여서는 가장 바람직한 본질론의 핵심을 드러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한 편의 시가 태어나는 과정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듯이, 시는 진정으로 시에 대한 이론적 해명이나 구조를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 사회적 권리와 의무수행을 위하여 태어나는 것이 아니듯, 시도 그렇게 갓난아기처럼 그냥 태어나는 것이고 우주 속에 홀로 던져져서 있는 것이다.
   어떤 작품을 놓고 그것의 빼어난 점을 정연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시의 본질을 그만큼 완전하게 파악하는 것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시일수록 그것이 왜 좋은지를 말로 표현하기가 그만큼 더 어렵다고 해야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해, 하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랑'은 모두 거짓이다. 정말 사랑할 때는 그것은 이미 언어로는 나타낼 수 없는 그 무엇과 같다.

- 오탁번., "둥근 과일과 떠오르는 달", [현대시의 이해]. 서울: 나남신서 (1998). 9-10쪽.


2004년 10월 22일

김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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