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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9일 화요일

바그너: 탄호이저 서곡

 탄호이저(Tannhäuser)는 13세기 독일의 기사이자 음유시인(민네징어)이었다. 실존 인물인 그의 행적은 허무맹랑한 설화와 뒤섞여 있는데, 오페라 ‹탄호이저›는 이 설화를 바탕으로 한다. 작품의 줄거리 중 서곡에 해당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독일 튀링겐에 있는 회르젤베르크 산에는 중세 유럽의 시각에서 '이교도'의 신인 베누스(비너스)가 살고 있다. 베누스의 곁에는 그가 거느리는 미(美)의 여신들과 요정들, 큐피드들, 그리고 베누스의 총애를 받았던 탄호이저가 있다. 근처에는 젊은이들이 술을 마시고 있으며 요정들이 그들을 희롱한다. 바쿠스 신의 여사제들이 나타나 그들을 광란의 쾌락에 빠트린다. 사티로스와 판이 나타나 광란에 가세한다. 보다 못한 미의 여신들이 잠자고 있던 큐피드들을 깨운다. 큐피드들이 전투 대형으로 날아올라 '정신 차려' 화살을 날리며 사태를 진압한다.

탄호이저 서곡은 3막에서 순례자들이 부르는 찬가풍 합창 선율, 탄호이저가 베누스를 찬양하는 행진곡풍 선율, 바쿠스의 사제들이 일으키는 광란('바카날') 선율 등을 음 소재로 한다. 바카날 대목은 바그너가 파리 초연을 앞두고 발레를 추가하면서 사실상 새로 작곡한 것으로, 1845년 드레스덴에서 초연된 ‹탄호이저›가 바그너의 초기 오페라 양식에서 중기 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작품이라면, 1861년 '파리 판본'의 ‹탄호이저›는 바그너 후기 양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서곡 이후로도 화성 진행과 관현악법 등에 많은 수정이 이루어졌다.

2021년 8월 13일 금요일

피에타리 인키넨의 '바이로이트 사운드'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글입니다.


피에타리 인키넨은 도이치 방송교향악단 음악감독입니다. 2009년에 서울시향을 객원지휘한 일이 있고, 내년 1월부터 KBS교향악단 음악감독을 겸직할 예정입니다. 지난해에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바그너 4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지휘할 예정이었다가 코로나-19 때문에 페스티벌이 전체 취소되어버려서, 그 대신 지난 7월 개막한 2021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반지’ 4부작 중 ’발퀴레’만을 일단 먼저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실황 중계방송 녹음을 들어보니 인키넨의 ‘발퀴레’는 꽤 훌륭했습니다. 멀티채널 녹음이라 현장감이 특히 좋더군요. 그런데 이날 연주는 호불호가 좀 갈렸던 모양입니다. 한두 명이지만, 관객에게 인사하는 인키넨에게 야유를 퍼붓는 사람이 있었다던데요. 제 지인 중 한 분은 인키넨의 ’지크프리트’ 3막 발췌 음반과 견주며, 아직 인키넨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하우스에 적응하지 못한 듯하다고도 하더군요.

바이로이트에서 처음 지휘하는 사람은 독특한 음향 때문에 헤매기 쉽다고들 하지요. 실제로 공연 중 삐걱거리던 순간이 제법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호불호의 진짜 원인은 오케스트라 편성 때문이었을 거예요.

‘발퀴레’ 실황 음원과 ‘지크프리트’ 음반은 연주 단체와 녹음 장소와 녹음 장비가 다르고, 각각 5채널 오디오와 2채널 오디오로 녹음의 정보량도 달라서 나란히 비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냥 귀로 들리는 소리만으로 판단하자면 ’발퀴레’가 ’지크프리트’보다 오케스트라 규모가 좀 더 작은 듯하더군요. 사실은 ’지크프리트’도 작은 편성인 듯했고, 그래서인지 인키넨 음반을 게오르그 숄티가 지휘한 1960년대 명반과 견주며 소리의 에너지 밀도가 낮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20세기에는 악보에 지시한 것보다 실제 오케스트라 편성을 부풀리는 관습이 있었지요. 게오르그 숄티의 바그너 녹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에는 악보 지시와 작곡 당시의 관습 그대로 연주하는 것이 유행이고, 인키넨의 바그너 해석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작은 편성으로 연주하면 여러 장점이 있고, 이를테면 개별 성부의 매력을 더 잘 살릴 수 있지요. 인키넨은 때로 목관악기 소리가 두드러지는 ’식물성 사운드’를 바그너 음악에서 살려내기도 하더군요. 물론 금관악기가 울부짖을 때는 필요한 만큼 ’근육질’로 변하기도 했습니다.

바이로이트 극장은 바그너 음악에 최적화되어 ’바이로이트 사운드’라고 칭송하는 말이 있는 멋진 곳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곳에 여러 차례 가본 경험으로 말하자면, 다른 오페라 극장과 견주어 음량이 좀 작은 것이 바이로이트 극장의 단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뒷자리에 앉아도 들릴 소리는 다 들리지만, 오케스트라 피트에 ’천장’이 있어서 소리가 무대 벽에 한 번 반사된 다음에야 객석으로 전달되는 구조 때문에 직접음이 거의 들리지 않고 소리가 좀 멀게 느껴지는 점이 장점이자 단점인 듯해요.

문제는 인키넨의 바그너가 실제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어떻게 들렸을까 하는 겁니다. 오케스트라 편성을 부풀리는 것은 음량을 키우기 위해서인데, 소리에 ‘기름기’를 빼기 위해 편성을 줄였다면 음량 또한 줄었겠지요. 인키넨에게 야유를 퍼부은 몇몇 사람은 사실 ’음량’에 실망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인키넨은 내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때 타협을 하게 될까요? 인키넨의 ’바이로이트 사운드는’ 어떤 변화를 맞게 될지 궁금합니다.

피에타리 인키넨이 음악감독으로 있는 도이치 방송교향악단은 옛 이름이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이었던 단체로 정명훈 지휘자가 음악감독으로 있었던 바로 그곳입니다. 그 시절 정명훈 지휘로 윤이상 교향곡 3번을 세계초연한 악단이기도 하지요. 마침 내한공연이 연말에 예정되어 있어서 그때쯤에는 제발 전염병이 잠잠해지기를 희망해 봅니다. 통영 공연은 12월 19일이고, 프로그램은 브람스 교향곡 1번, 손열음이 협연하는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 그리고 바그너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중 서곡입니다. (쉿! 앙코르로 바그너 곡을 더 연주할지도 몰라요!)

2019년 10월 8일 화요일

바그너의 '결혼행진곡'

결혼행진곡, 휴일만 되면 결혼식장에서 울려 퍼지는 '바로 그 곡'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 곡의 작곡가가 리하르트 바그너라는 사실까지는 얼핏 들어본 사람도 제법 있을 텐데요, 원래는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 3막 전주곡에 이어서 나오는 합창곡이라는 사실까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합니다. ‹로엔그린› 3막의 결혼식은 성당에서 열리기 때문에 피아노 반주가 아닌 파이프오르간 반주가 나오는 점, 그리고 선율 구성이 살짝 단순화된 '결혼식장 판본'과 원곡이 조금 다르다는 점도 원곡을 들어보시면 알게 될 거예요.

무엇보다 독일어로 된 원곡의 가사 내용을 여러분께 알려드리고 싶어서 제가 직접 번역한 것을 소개합니다:

믿음에 이끌려 다가가세요,
사랑의 축복이 깃드는 곳으로!
승리의 용기와 사랑의 보답이
하나 된 두 분을 축복합니다.

승리한 젊은이, 앞으로 나오세요!
꽃다운 젊은이, 앞으로 나오세요!

찬란한 축제의 속삭임이 흘러나와
마음의 행복을 그대 받아요!
사랑으로 꾸며진 향기로운 방으로
들어가요 이제 찬란한 곳에 빠지세요.

믿음에 이끌려 이제 가세요,
사랑의 축복이 깃드는 곳으로!
승리의 용기와 순수한 사랑이
하나 된 두 분을 축복합니다.

하느님이 그대에게 복을 내리니
우리도 기쁘게 그대를 축복해요.
사랑의 행복이 그대를 돌보니
오래도록 이날 이때를 기억해요.

믿음으로 보호받아 머무르세요,
사랑의 축복이 깃드는 곳에서!
승리의 용기, 사랑과 행복이
하나 된 두 분을 축복합니다.

승리한 젊은이, 여기에 머물러요!
꽃다운 젊은이, 여기에 머물러요!

찬란한 축제의 속삭임이 흘러나와
마음의 행복을 그대 받아요!
사랑으로 꾸며진 향기로운 방으로
들어가요 이제 찬란한 곳에 빠지세요.

믿음으로 보호받아 머무르세요,
사랑의 축복이 깃드는 곳에서!
승리의 용기, 사랑과 행복이
하나 된 두 분을 축복합니다.

신부 엘자 폰 브라반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신이었던 텔라문트 백작, 정확히는 백작부인의 흉계에 빠져 남동생 살해 누명을 썼던 여인입니다. 중세가 배경이라서 결투를 통해 판결이 나게 되는데, 텔라문트 백작의 강력한 무위에 맞서 대전사(代戰事)로 나설 사람이 없어 곧바로 유죄 판결이 나기 직전, 새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 '로엔그린'이 백조가 끄는 뗏목을 타고 나타나 결투에서 이기고 엘자와 결혼한다는 이야기가 오페라 ‹로엔그린›이지요. 위 가사에 나오는 '승리의 용기'라는 표현이 그 얘기입니다. '승리한 젊은이'는 운율을 맞추느라 의역한 것으로 원래 가사는 '선량함의 대전사'(Streiter der Tugend)입니다.

후배 결혼식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식장은 서울 방배동 성당이었고, '결혼행진곡'이 합창 없는 파이프오르간 연주로 나왔습니다.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대단했지요. 그 순간 저는 생각했습니다. '우와, 내가 성당에 다녀야겠다!' 결혼식은 가톨릭 결혼식 미사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신부였던 후배의 아버지가 음악계에서 명망 있는 음대 교수님이어서였는지 총신대학교 성가대가 특별히 섭외됐습니다. 그리고 성가대 테너의 아름다운 레치타티보(가사를 말하듯이 노래하는 것)가 들려왔을 때 한번 더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는 그냥 대중음악 양식으로 된 찬송가를 파이프오르간으로 연주하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가톨릭 미사에서 계속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게 귀찮았습니다. '아, 그냥 다니지 말아야겠다!'

아시는 분은 아시는 조금 불편한 이야기. 오페라 ‹로엔그린›에서 엘자는 결혼 첫날밤에 부부싸움을 '대판' 하게 됩니다. 로엔그린은 본디 성배를 지키는 기사인데, 기사단 규칙에 따라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 없었고, 그것을 묻지 않는 조건으로 엘자와 결혼했지만, 백작부인의 흉계에 다시 한번 빠진 엘자가 남편의 정체를 의심하는 마음을 이겨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되는지는 오페라 ‹로엔그린›을 보세요!

10월이 되면서 결혼하는 커플이 많다나 봅니다. 친구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갑자기 생각나서 써봤습니다.

2019년 9월 29일 일요일

바그너 파르지팔 모음곡, 베토벤 교향곡 3번 (2019. 9. 28. 사무엘 윤, 마르쿠스 슈텐츠, 서울시향) - 대충 생각나는 대로 쓴 메모

  • ‹파르지팔›을 발췌 연주하면 보통 관현악곡이거나 구르네만츠 역 베이스 정도가 나오는 게 보통인데, 이번 연주회는 구르네만츠가 아닌 암포르타스가 나온 점이 특이하고 신박했음. 사무엘 윤 선생이 협연자인 걸 보고 속으로 '저분이 구르네만츠 테크 트리가 아닌데 이게 뭐지?' 했다가 암포르타스인 걸 보고 이거구나 싶었음.

  • 막판에 사무엘 윤 선생이 퇴장했다가 합창석으로 재등장하더니 잠시 파르지팔에 빙의. 베이스바리톤이 파르지팔 대사를 치는 진풍경은 나름 참신했음.

  • 암포르타스가 돋보였다는 점에서 작년에 뮌헨에서 봤던 공연 생각도 났음. 크리스티안 게르하허의 암포르타스가 '인간의 고통'을 절절하게 보여줬다면, 사무엘 윤의 암포르타스는 '영웅의 고통'에 가까웠음. 둘 다 좋았지만, 영웅의 카리스마가 '고통'을 살짝 가리는 느낌이 있었던 것은 단점.

  • 오페라를 발췌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이 이어지도록 편곡을 잘했음. 그 과정에서 시간 순서가 좀 왔다리갔다리 했지만 위화감이 느껴지기보다 그냥 신박하다는 느낌. 나님 예전에 경기필에 있었을 때 바그너 공연 준비하면서, 지휘자 선생님이 ‹로엔그린› 마지막이 '끝나는 느낌'이 약하다고 고민하시는 걸 보고 차라리 1막 피날레로 점프하자고 제안했던 생각도 났음. '그렇게 하면 바그네리안들이 욕하지 않을까요?'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 '종소리'는 '공'을 포함한 몇 가지 악기를 조합해 만들어내는 듯했는데 객석에서 제대로 안 보였음. 종소리 이슈는 ‹파르지팔› 초연 때부터 문제가 됐던 것으로, 핵심은 작곡가가 교회 종소리를 의도했으나 진짜 교회종을 쓰면 오케스트라와 안 어울린다는 것. 가장 흔한 해결책은 베이스튜뷸라벨인데, 서울시향이 갖고 있는 베이스튜뷸라벨은 3음짜리로 이걸로는 안 됨. ‹파르지팔›이 되는 4음짜리 베이스튜뷸라벨은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갖고 있는데 이걸 빌려다 썼으면 좋았을 듯. 이번 공연에서는 음색이 탁하게 들렸던 것이 단점.

  • 파르지팔과 베토벤 교향곡 3번을 엮은 프로그램 마음에 들었음. 인간이 자신의 격을 뛰어넘어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음악이라는 공통점. 서울시향의 베토벤 연주는 기법적으로 역사주의를 일부 수용한 듯했지만, 그런 것치고는 현악기가 너무 대편성이었음. 관악기는 호른 한 대 더블링한 것 빼고는 원래 편성 그대로. 현이 비대하니 4악장 후반부의 고양감을 살리는 건 좋았으나, 이를테면 1악장 발전부 클라이맥스에 나오는 충격적인 플루트 불협화음이 현 음량에 맞춘 트럼펫 소리에 묻혀서 어정쩡하게 들린다거나, 푸가토의 텍스처가 흐리멍덩하게 들린다거나 하는 문제가 있었음. 현악기 배치는 1바-2바를 좌우로 갈라놓은 걸 넘어서 첼로와 더블베이스까지 좌우대칭으로 쪼개 놓고 비올라를 정중앙으로. 이걸로 뭘 의도했는지 알쏭달쏭한데 결과적으로 특히 첼로 쪽에서 만득이 소리가…-_-;

2016년 11월 23일 수요일

국립오페라단 《로엔그린》 날림 후기

모 게시판에서 국립오페라단 《로엔그린》을 까는 글을 보고, 삘 받아서 한 마디.

그 글 쓰신 분과 달리, 저는 엘자 역을 맡은 서선영 씨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물론 정통 바그너 가수와는 다른 이탈리아 오페라스러운 발성이었고, 딕션 등 문제 삼을 곳도 많았지만, 그걸 감안해도 훌륭했다고 생각해요. 엘자 역이 바그너 작품치고는 이탈리아 오페라스러운 데가 있다는 다른 분의 반론에 더해서, 저는 사실 예전부터 서선영 씨 목소리가 바그너를 해야 할 목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그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했고, 서선영이 부르는 '이졸데'를 듣고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졸데라는 '캐릭터'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 여성인데, 그런 캐릭터를 표현하는데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바그너를 할 만큼 묵직한 목소리이면서 부드럽고 여린 목소리를 기막히게 낼 수도 있는 가수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사실은 제가 예전에 말러 교향곡 4번을 협연할 가수를 찾다가 원하는 가수가 모조리 일정이 안 맞아서, 서선영 씨를 후보로 고려한 적도 있습니다. 그 당시 대표님께 보낸 이메일을 보니 '이졸데에 어울리는 목소리'라는 평가를 그때도 했었네요. 그래도 말러 4번을 하려면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 이번 공연에서 그 가능성까지 확인했습니다. 정통적인 해석과는 거리가 있을지라도 말이 안 되는 선택은 아니겠다고요.

그리고 김석철 씨. 역시 옛날부터 바그너를 해야 할 목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김석철 씨를 처음 알게 된 게 2009년 TIMF앙상블의 말러 《대지의 노래》 공연 때였는데, 쇤베르크와 라이너 린이 소편성으로 편곡한 판본을 협연했죠. 그때 블로그에 뭐라고 썼지 싶은데 찾을 수가 없네요. 기억에 의존해서 당시 느낌을 되살리자면, 탁월한 바그너 가수가 될 가능성이 있지만 '컨트롤'에 문제가 있더라,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공연에서 그 단점을 제대로 극복한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이 정도면 십수 년 안에 바이로이트에서 한국인 지크프리트를 볼 날을 기대해도 좋겠다 싶을 정도. 십수 년을 내다본 것은 바이로이트 시스템과 한국인 페널티를 고려해서입니다. 사무엘 윤 선생이 바이로이트에 진출했을 때도 십수 년을 내다보고 '예언질'을 했었는데, 행운이 따라서 그보다 일찍 거물이 되셨죠.

쓰는 김에 생각난 것 하나. 3막 간주곡(사열식 장면)에 나오는 브라스 대폭발을 오프스테이지 밴드로 처리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극적 사실감을 높이려면 그게 옳을 수도 있겠지만, 음악적으로는 그게 아니라고요. 결혼식 합창 때도 그렇고, 백스테에지에서 지휘자 예비박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되었는지(비디오 카메라가 있었을 텐데 이상합니다) 자꾸만 박자가 어긋난 문제도 있었지만, 그보다 간주곡 때는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듣자 하니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악장과 금관 연주자 등을 데려왔다는 모양이던데예산의 힘 덜덜덜, 그 막강 화력을 무대 뒤에서 희미하게 들리게 하다니, 이런 낭비가 어딨나요? 차라리 무대 쪽 발코니에 연주자들을 올려서 돌비 서라운드 효과를 제대로 살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생각난 김에, 나님 경기필에 있으면서 이거 공연에 올릴 때 금관 (객원) 화력이 절망적인 수준이었던 것을 구자범 샘이 마지막 순간까지 연주자들을 집.요.하.게. 괴롭혀서 그나마 들어줄 만한 수준으로 만들어 놓은 현장:


여기까지만 씁니다. 연출 얘기는 안 할게요. 좋았다는 얘기 다른 분들이 많이들 했으니까요. 아참, 저는 마지막 날 공연 봤습니다.

2013년 11월 4일 월요일

바그너 《파르지팔》 한국 초연 뒷북 단상

그동안 바빠서 (귀찮아서) 못 쓰고 있던 글을 월간 『객석』 기사를 읽고 덧붙이는 식으로 짧게 써볼까 합니다.

☞ 「‘파르지팔’ 한국 초연을 논하다」 (월간 『객석』)

① 오케스트라 연주를 평가할 때, 공정한 판단을 하려면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의 오케스트라 피트가 좁다는 사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국내 공연장 어디라도 마찬가지인데, 외국 유명 오페라 극장에서는 오케스트라 피트에 사람들 우겨 넣으면 그럭저럭 '풀 편성' 오케스트라가 들어가는 것과 견주어 국내 공연장에서는 사실 바그너 같은 대편성 곡은 제대로 연주할 수 없을 만큼 좁지요. (KBS에서 둘째 날 공연을 녹화 방송했던데요, 들어보면 얼마 안 되는 현악기 연주자들이 '깨작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리더군요. 실제 공연장에서는 이렇게까지 심하게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고, 동아일보와 전화 인터뷰할 때에도 저는 그 얘기를 했었지만, 동아일보나 『객석』이나 공연장에 대한 기사를 특집으로 자세히 다루지 않는 이상 이런 얘기를 쓰기 쉽지 않으리라 짐작됩니다.

② 이런 사정을 헤아리고 나면 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는, 귀에 들린 소리 자체도 훌륭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공연장에서 만난 바그네리안들도 '코심이 이렇게까지 잘할 줄 몰랐다'라며 놀라워하더군요. 이건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에서 금관 연주자 네 명 데려온 것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코심 단원들이 그만큼 노력했으니 이런 연주가 가능했을 테지요. 로타 차그로제크가 그만큼 대단한 지휘자이기도 하겠고요. 앙상블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휘자가 재빨리 수습하는 솜씨가 대단했습니다.

③ 로타 차그로제크의 템포 설정은 몹시 빨랐습니다. 크나퍼츠부슈가 지휘한 바이로이트 녹음에 익숙하신 분께는 완전히 다른 작품처럼 느껴졌을 듯해요. 최근 바이로이트 등에서 공연한 실황 음원을 들어보면 이렇게 마구 달리는 해석이 유행인 듯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오케스트라 연주자가 몇 안 된다는 문제 때문에 템포를 느리게 하고싶어도 못 했을 겁니다. 템포가 느릴수록 소편성의 약점이 쉽게 드러나곤 하거든요. 이와 관련해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2005.10.20. 지휘자 이윤국을 주목하라! (서울바로크 합주단 /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

윗글 마지막 단락을 다시 읽으니 새삼 감개무량하네요. "못해도 좋으니까 〈파르지팔〉 같은 작품을 무대에 올려만 달란 말이야." 하던 때로부터 8년만에 드디어 초연이 됐습니다.

④ 가수들은 그냥 최고였습니다. 『객석』 기사에서 이용숙 선생이 "바이로이트 · 뮌헨에서 공연을 보았을 때도 가수진이 이 정도로 만족스러웠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파르지팔(크리스토퍼 벤트리스)과 쿤드리(이본 네프)가 몸 사리지 않고 열심히 노래해 줘서 참 좋았습니다. 외국 가수들이 한국에 와서 몸 사리느라 노래를 대충 하거나, 한국에만 오면 갑자기 아프거나 ― 주요 병명은 물론 꾀병 ― 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그래서 두 사람이 더욱 돋보였습니다. 그 가운데 이본 네프는 '쿤드리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발트라우트 마이어가 전성기에 저랬을까 싶을 정도였지요.

⑤ 구르네만츠가 파르지팔을 데리고 몬살바트 성으로 가면, 날이 갑자기 확 밝아지면서(Nach völliger Dunkelheit schnell zunehmender Tag) 종소리가 들리지요. 그런데 교회종을 그대로 쓰기에는 음악적, 음향적, 공간적으로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보통 '베이스 튜뷸라 벨'(Bass Tubular Bell)을 사용합니다. 악보에는 'Theater Glocken'(오페라극장용 종)이라고 되어 있네요.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바이로이트 초기에는 '파르지팔 종'(Parsifal Klavier Instrument)이라는 걸 만들어 썼고, 초연 때에는 여기에 탐탐과 공(Gong) 따위를 섞었다고도 합니다.

'튜뷸라 벨'은 관현악곡에 곧잘 쓰이는 악기이지요. 그런데 파르지팔에 필요한 '베이스 튜뷸라 벨'은 그보다 훨씬 길어서 연주자가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연주해야 합니다. 서울시향이 말러 교향곡 8번 연주할 때 에드워드 최 타악기 수석이 이렇게 연주하는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서울시향이 가진 건 말러 8번에 필요한 세 음짜리이고, 《파르지팔》을 연주할 수 있는 건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갖고 있습니다.

▲ 경기필 2012년 공연 영상: 《파르지팔》 1막 전주곡/간주곡, 3막 피날레.
17분 30초 전후로 해서 베이스 튜뷸라 벨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악기 전체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네요.

국립오페라단(또는 코심)이 이 악기를 경기필에서 빌려다 썼으면 좋았겠지만, 문제가 있어요. 악기가 너무 큽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구조를 생각하면 악기를 무대 뒤로 보내야 하는데, 이러면 소리가 작아지지요.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작은 소리를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차그로제크는 (아마도 연출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했겠지만) 그 반대 해석을 보였습니다. 공(Gong)을 대신 사용한 것은 그래서였을 겁니다.

종소리가 아닌 '공' 소리를 들었을 때, 처음에 들었던 생각은 '와, 이건 좀 깬다!'였습니다. 그런데 3막에서는 이 소리가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필리프 아를로의 연출 때문에 더욱 그랬어요. 아를로는 3막 성배의식 장면에서 암포르타스를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처럼 연출했고, 성배 기사들이 어서 의식을 진행하라며 암포르타스한테 사납게 손가락질했지요. 구세주에게 구원을 바라는 일이 한편으로는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연출이라 생각합니다. 이때 종소리를 대신한 '공'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큰 음량으로 사납게 울려대며 연출에 힘을 더했습니다. 저는 1막에서 제가 '공' 소리를 낯설게 느꼈던 것도 편견 때문이지 않았나 의심해 봤습니다. 3회 공연을 모두 감상하고 나서 내린 결론은, 그래도 1막에서는 좀… 의도는 이해하겠는데…-_-

⑥ 꽃처녀들 의상에 관해서는 유형종 · 이용숙 두 분 말씀에 공감하는데요, 그래도 노래는 훌륭했습니다. 꽃처녀 대목은 템포가 느릴 때에는 '마법의 정원'의 신비로운 느낌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그런 맛은 좀 모자랐습니다. 그러나 빠른 템포 때문에 오히려 잘 살아난 것이 있었습니다. 마치 식물들이 사람 말을 한다면 저런 느낌일까 싶은, 마치 풀꽃들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소리가 언어로 승화한 듯한, 꽃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속삭이는 소리가 헤테로포니(heterophony)처럼 어지럽게 흩날리는 독특한 음향 효과 말이지요.

⑦ 이곳에서 시간은 공간으로 화한다. Zum Raum wird hier die Zeit.

구르네만츠가 파르지팔을 데리고 몬살바트 성으로 갈 때, 얼마 안 걸었는데도 매우 멀리 왔다고 파르지팔이 놀라워하자 구르네만츠가 한 말입니다. 『객석』 기사에서 이용숙 선생이 한 말로는, 이 노랫말을 "연출부가 실제 장면과 맞춰보며 일부를 수정"했다는데, 그 결과가…

“시공간을 초월하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네”

바그너가 《파르지팔》에서 나타내고자 했던 신비주의적 종교관의 일면을 드러내는 원문이, 저 번역 때문에 그냥 중2병 쩔어주는 말로 전락했습니다. 아니, 바그너가 원래 중2병 쩔어주는 인간이었기는 한데, 그래도 이거랑 저거랑은 수준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아… OTL

저는 "실제 장면"을 들먹이는 말이 그저 변명일 뿐이라 생각하며, 대중은 무식해서 쉬운 것만을 좋아하리라 단정 짓는 오만한 생각을 저 이상한 번역에서 읽습니다.

"Zum Raum wird hier die Zeit."이라는 제목으로 독일어 학위논문을 쓰신 타이포그래피 전문가 유지원 님께서 "변화의 이행과정을 지시하는 'werden(become)' 동사"에 주목하며 시공간에 관한 독특한 고찰을 펼치는 글 참고:

☞ 「여성의 menstruation이라는 단어 속, 수량(quantum)적 어근」 (유지원)

"Zum Raum wird hier die Zeit."이라는 말은 동양인에게 익숙한 개념인 '축지법'을 연상시키지요. 저는 이것을 현대 물리학 이론에 비추어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인류가 우주선을 만들어 태양계를 벗어나려면, 현재 기술로 낼 수 있는 속도로는 7만 년쯤 걸린다고 합니다. (제 기억에 의존한 수치라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일찍이 밝힌 것처럼,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광속을 넘어서는 속도는 애초에 불가능하지요.

그런데 편법이 있습니다. 시공간을 비틀어 버리면 되거든요.

공간이 수축하고 팽창하는 속도는 광속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은 많이들 아시죠? 그런데 우주가 팽창할 때 가속 팽창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더 빠른 속도로 지구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니까 아주 먼 곳에서는 광속을 넘어서는 빠르기로 지구에서 멀어지는 곳도 있을 것이며, 그 너머를 지구에 사는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이 경계를 '우주 지평선'이라고 한다네요.

이 원리를 이용하면 과학소설 등에 나오는 '워프'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합니다. 우주선 주위를 '워프 버블'이라는 것으로 감싸고 앞쪽 공간을 수축, 뒤쪽 공간을 팽창시킴으로써 실제로 이동한 것보다 더 빨리 이동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걸 가능하게 하려면 시공간을 비트는데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해서 실용성은 없다, 라는 것이 그동안 통설이었는데, 최근 어떤 공학자가 획기적으로 적은 에너지로 이걸 가능하게 하는 아이디어를 내놨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나사(NASA)에서 연구하고 있다네요!

▲ 나사(NASA)의 '워프 드라이브' 프로젝트 소개 영상

그러니까 결론은, 몬살바트로 가는 길에는 성배의 신비로운 에너지를 이용한 워프 버블이 설치되어 있어서… 큼. 여기까지.

⑧ 노랫말 번역과 관련해 아쉬웠던 대목 또 하나는, 마지막에 나오는 "Erlösung dem Erlöser!"입니다.

▲ "Erlösung dem Erlöser!" 카라얀-베를린필 1980년 음반에서 발췌. ©DG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면 "구세주께 구원을!"입니다. 그런데 맥락을 생각하면 참 이상한 말이에요. 파르지팔이 성창으로 암포르타스를 고통에서 구원하고, 쿤드리를 세례로써 끝없이 되풀이되는 죄업에서 구원하고, 성배 기사들의 새로운 수장이 됨으로써 모두를 구원하는 이때에 '구세주께 구원을!'이라니? 이것이야말로 '이곳에서 시간은 공간으로 화한다'보다 훨씬 더 수수께끼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여러모로 고찰한, 저 유명한 '몬살바트' 사이트의 데릭 에버레트가 쓴 글(영어) 참고:

http://www.monsalvat.no/erlosung.htm

미학자 이진 선생께서 이 말을 화두로 《파르지팔》의 철학적 의미를 고찰한 글:

☞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그런데 이 말을, 이번 공연 자막에서는 전혀 수수께끼 같지 않은 엉뚱한 말로 바꿔치기했더군요. 뭐라고 했더라…

⑨ "바그너가 철저한 반유대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런 점들이 당연히 이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 (이용숙)

바그너는 "철저한"까지는 아니더라도 '명백한' 반유대주의자였고, 따라서 바그너의 작품에 반유대주의가 반영되어 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작품 속에 나타나는 어떤 것을 반유대주의와 엮어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추측'과 '해석'을 명백한 사실처럼 말하면 곤란합니다. 그것이 독일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해석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출가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를 성토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고 그저 바그너가 작품 속에서 말했던 구원과 깨달음에 집중했다는 이유로 연출가를 비난하는 말에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링크로 대신합니다:

☞ 바그너 색깔론 글타래

⑩ 연출가 필리프 아를로

저는 오페라를 감상할 때 음악에 집중하느라 연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요. 연출 논리로 음악을 희생시키는 연출가를 때때로 성토하기는 합니다만. 그런데 필리프 아를로는 그런 '만행'을 전혀 저지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음악을 연출에 훌륭하게 이용하기까지 했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종소리'가 좋은 예가 되겠지요. 음악과 대사와 연출이 유기적으로 얽혀 돌아가면서 그야말로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의 모범이 되었고, 공연을 감상하면서 저는 연출가의 음악적 식견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훌륭한 연출가라면 좀 자주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쓰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여기까지만 쓸게요. ^^

2012년 9월 22일 토요일

안토니 비트, 서울시향, 바그너 《로엔그린》 1막 전주곡

연주회 있는 날에는 웬만하면 휴가를 냅니다. 그런데 어제는 직장 일정이 메롱이라 휴가를 못 냈어요. 늦지 않게 퇴근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데다가, 온종일 일 때문에 시달리느라 너무 피곤해서, 그냥 포기하고 집에서 쉬어야겠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예술의전당까지 부랴부랴 달려간 까닭은 안토니 비트가 이끌어내는 음악을 현장에서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주회 시작할 때쯤에 갑자기 생각했습니다. 오늘 프로그램이 뭐였더라?

첫 화음이 들려올 때 '아!' 했습니다. 바그너 《로엔그린》 1막 전주곡.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와 달리 현악기만 16성부쯤 될 만큼 몹시 복잡한 곡입니다. (정확히 몇 성부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악보 확인하기는 귀찮아요. ^^) 그래서 저는 이 곡을 실연으로 제대로 연주하는 꼴을 본 일이 없어요. 웅성웅성하다가 갑자기 우르릉 쾅! 하고는 다시 웅성웅성하다 말고 흐지부지 끝나기 일쑤죠. 연주회 첫 곡으로 '대충 때우는 곡'쯤으로 취급받으니 연습을 많이 하지도 않겠죠.

그런데 이날 연주를 들으면서 전율이 일었습니다. 성부 하나하나가 마치 햇빛을 받아 일렁이는 물결처럼 반짝반짝합니다. 클라이맥스를 지나서도 곧바로 김이 빠져버리지 않고, 어찌 들으면 처연한 화음을 집요하게 살려냅니다. 흠잡을 곳을 찾자면 제법 있었지만, 실연으로 이만큼 연주했으면 다 용서됩니다. 그런데 뒤이어서 3막 전주곡이 나오니 오히려 좋은 분위기가 깨지더군요. 3막 전주곡도 잘하기는 했지만, 1막 전주곡에서 여운을 남기며 끝나 줘야 할 것 같았습니다.

《베젠동크 가곡》을 협연한 예카테리나 구바노바는 지난번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브랑게네 역을 맡았던 사람이죠. 대단한 실력을 그때 충분히 확인했으니 어제는 딱 기대한 만큼 듣고 왔습니다. 러시아 사람인데 독일어 딕션이 참 좋아요. 그래서 제 엉터리 독일어 실력으로도 원어 가사를 제법 곱씹게 되었는데, 《트리스탄과 이졸데》에도 나오는 중요한 단어들이 음악과 함께 머릿속에서 조각 맞추기가 되면서, 특히 제2곡 〈Stehe still!〉(멈추어라)가 제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야한 곡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er)trinken, versinken, erkennt, 뭐 이런 단어들이 맥락을 알고 보면 참 야한 말들이죠.

안토니 비트, 우리나라에도 제법 널리 알려졌지만, 그래도 명성이 실력에 한참 못 미치는 지휘자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분이 동유럽 출신이라서 차별받는 게 아닌지 의심합니다. 실력만 보면 베를린필 음악감독으로 가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날 연주는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베젠동크 가곡》에서나 《영웅의 생애》에서나 서울시향의 기본 실력 이상을 끌어내지는 못하는 느낌. 서울시향이 연습을 많이 못 했다고 하던데 그 때문인지, 아니면 안토니 비트 실력이 결국 그만큼이었는지는 좀 두고 봐야겠습니다.

2012년 8월 25일 토요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실연으로 듣고 이런저런 생각

요새는 연주회 리뷰 같은 거 귀찮아서 잘 안 쓰는데, 무려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실연으로 듣고 온 만큼 짧게나마 써봅니다.

바그너 작품은 영화에 비유하자면 'B급 영화'와 닮은 데가 있습니다. 저와 이름 비슷하신 박원철 님도 생전에 비슷한 말씀을 하셨죠. 정명훈 샘은 'B급' 정서를 표현하는 일에 약점이 있는 듯합니다. 옛날에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들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트리스탄과 이졸데》 들으면서 새삼 느꼈습니다. 1막 해석이 마음에 안 들어서 적당한 표현을 생각하다가 이 생각이 들더군요. 2막과 3막은 정명훈 샘의 장점으로 단점을 충분히 가릴 수 있었고, 무엇보다 3막은 끝내주게 훌륭했습니다. 3막이 좋으면 다 좋은 거다, 하는 생각이 들 만큼이요.

서울시향은 요즘 실력이면 이쯤은 할 수 있겠다고 예상은 했지만, 무려 바그너를 제대로 연주하는 걸 실제로 들으니까 이건 뭐… ㅠ.ㅠ

잉글리시 호른 연주하셨던 분, 어디서 데려온 누군지 모르겠지만, 엄청나시더군요. 이분 어떻게 서울시향에 주저앉혀 주시면…^^;

그리고 알렉상드르 바티 본좌. 말이 필요 없습니다. 바그네리안이 아니면 잘 모를 대목만 하나 설명하자면, 3막에서 배가 보이고 뿔피리 소리 바뀌는 대목은 본디 잉글리시 호른이 연주해야 합니다. 극 중에서 목동이 연주하는 그 악기거든요. 바그너는 이 대목을 '트럼펫처럼' 연주하라고 했는데, 아예 트럼펫으로 연주하기도 합니다. 저도 그게 낫다고 생각하고요. 어제는 바티 본좌가 발코니에서 이 대목을 연주했죠. 어제 연주한 악기는 일반적인 트럼펫이 아니고, 서울시향 페이스북 보니까 무슨 목제 트럼펫(?)인 모양이던데, 그래서 트럼펫 주제에 '식물성' 음색이 나더군요. 이 대목에 아주 딱이었습니다.

가수들은 브랑게네 말고는 다들 조금씩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중간 휴식이 너무 짧았던 탓이 컸지 싶네요. 1막에서는 '페이스 조절'하느라 힘을 아끼는 티가 났고, 1시간 가까이 쉴 새 없이 소리를 질러대는 무지막지한(!) 2막을 지나 3막으로 가니까 트리스탄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이더군요. 4시쯤에 시작해서 바이로이트식으로 중간 휴식 1시간쯤 넣으면 얼마나 좋아요. 예술의 전당 님하들아, 대관 어떻게 좀!

그런데 그것까지 고려해도 트리스탄은 좀 별로였습니다. 다 죽어가는 트리스탄 목소리가 너무 멀쩡해요. 정작 질러 줄때는 힘들어하면서 말이죠. 이졸데도 딕션이 별로. 무엇보다 2막에서 "Frau Minne will"(사랑의 여신의 의지다)를 대충 얼버무린 대목은 용서가 안 됩니다. 쿠르베날은 실력이 대단한 건 알겠는데, 그 좋은 실력을 제대로 못(안) 뽑아낸 듯. 트위터 보니 몸 상태가 최상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한국에만 오면 갑자기 아픈 가수가 한둘이 아니라 뭐…-_-; 마르케 왕은 잘하기는 했지만, 연광철 샘을 비롯해서 훨씬 잘하는 한국인 가수가 여럿이라… 1막 1장에 나오는 선원은 가사의 표면만 읽고 리트처럼 부르더군요. 맥락 다 무시하고 가사의 표면만 보면 잘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전체 드라마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이 대목이 이렇게 되고 맙니다.

뭐, 무려 《트리스탄과 이졸데》였다는 점을 헤아리고 나면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내년에는 니나 스템메, 린다 왓슨, 로버트 딘 스미스, 스티븐 굴드, 뭐 이런 분들 좀… 그래도 서울시향이 국내 오케스트라 중에 돈 제일 많잖아요? ^^;


나중에 붙임:

존 맥 매스터(트리스탄), 이름가르트 빌스마이어(이졸데), 예카테리나 구바노바 (브랑게네), 크리스토퍼 몰트먼(쿠르베날), 미하일 페트렌코(마르케 왕), 외

Soloists : John Mac Master(Tristan), Irmgard Vilsmaier(Isolde), Ekaterina Gubanova(Brangane), Christopher Maltman(Kurwenal), Mikhail Petrenko(Marke)

2012년 6월 18일 월요일

해설: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 보로딘 《이고르 공》 중 ‘폴로베츠인의 춤’ 등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http://g-phil.kr/?p=978


보로딘 《이고르 공》 중 ‘폴로베츠인의 춤’은 지난해 3월 24일 의왕시 서울소년원에서 있었던 구자범 지휘자 취임 후 첫 음악회에서 연주했던 곡입니다. 오페라 《이고르 공》은 외국에 잡혀 온 임금님 이야기입니다. 이고르 공이 이끄는 러시아 군대가 튀르크계 민족인 폴로베츠인과 전쟁을 하는데, 이고르 공이 크게 지고 포로로 사로잡히고 말아요. 그런데 폴로베츠의 '칸'은 이고르 공이 적장인데도 손님 대접을 하고 잔치를 열어서 위로해 주지요. ‘폴로베츠인의 춤’은 이때 나오는 음악입니다. 화려한 춤이 멋진 장면이고, 음악도 그만큼 화려합니다.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는 지난해 6월 24~25일 수원과 고양에서 있었던 정기공연 때 연주한 곡입니다. 이날 경기필은 《로마의 축제》, 《로마의 분수》와 더불어 '로마 3부작'을 국내 최초로 한자리에서 연주했지요. 《로마의 소나무》는 로마 시대 모습을 담은 곡으로, 소나무의 '눈'으로 바라본 로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4개 악장으로 되어 있는데요, 레스피기는 각 악장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① 보르게제 저택의 소나무 (I pini di Villa Borghese) : 보르게제 저택에 있는 소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뛰논다. 둥글게 돌면서 춤추고, 병정놀이하며 행진하고, 싸우고, 저녁 제비처럼 흥분해 소리치고, 떼 지어 돌아다닌다.

② 카타콤 부근의 소나무 (Pini presso una catacomba) : 소나무 그림자가 카타콤 입구에 드리운다. 깊은 곳에서 시편을 노래하는 구슬픈 소리가 솟아올라 장엄한 찬가처럼 공기 중에 떠다니다가 조금씩 신비롭게 사그라진다.

③ 쟈니콜로의 소나무 (I pini del Gianicolo) : 공기가 떨린다. 쟈니콜로에 소나무가 보름달 밝은 빛을 받고 서 있다. 나이팅게일이 노래한다.

④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I pini della Via Appia) : 어스름한 동틀 무렵 아피아 가도. 소나무 한 그루가 마법의 풍경을 지켜본다. 어렴풋하고 끊임없는 발소리. 시인인 소나무는 지나간 영광의 환상을 본다. 트럼펫 소리가 들리고, 새로 뜬 태양의 눈부심 속에서 집정관의 군대가 나타나 '신성한 길'(Via Sacra)을 따라 신전으로 개선행진을 한다.

바그너 《파르지팔》 1막 간주곡과 《로엔그린》 3막 전주곡은 올해 5월 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있었던 정기공연 때 연주한 곡입니다. 《파르지팔》과 《로엔그린》은 성배 수호 기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파르지팔》은 주인공 파르지팔이 성창(롱기누스의 창)을 찾아 나서면서 깨달음을 얻는 내용입니다. "자비심으로 깨달으리라, 순수한 바보여"라는 계시와 더불어 깨달음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이 담긴 작품이지요. 이번에 경기필이 연주할 1막 간주곡은 파르지팔과 성배 기사 구르네만츠가 성배 의식에 참석하고자 몬살바트 성으로 이동하는 장면에 나오는 음악이며, '장면전환 음악'이라고도 합니다. "이곳에서 시간은 공간으로 변한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대사에 이어지는 신비로운 음악이지요.

《로엔그린》은 《파르지팔》 이후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로엔그린은 파르지팔의 뒤를 이어 성배 수호 기사들을 이끌게 되는데,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은 로엔그린이 몬살바트 성을 떠나 활동하는 이야기입니다. 로엔그린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엘자'를 대신에 결투에 나섰다가 엘자와 결혼하지요. 3막 전주곡은 결혼식 장면을 이끄는 화려한 음악입니다.

말러 교향곡 3번은 올해 3월 17일 수원에서 있었던 정기공연 때 연주한 곡입니다. 말러는 교향곡 3번에 세계를 담고자 했고, 바위(1악장), 꽃(2악장), 동물(3악장), 사람(4악장), 천사(5악장), 사랑(6악장)의 관점에서 보는 세계를 에피소드처럼 들려주는 짜임새로 작품을 썼습니다. 이번에 경기필이 연주할 6악장에는 '사랑이 내게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데, 고통으로 가득한 세계를 사랑의 관점에서 보는 음악입니다. 6악장이 말러가 보고 싶어한 세계이고, 사랑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2012년 5월 5일 토요일

나는 바그네리안(Wagnerian)이다

※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http://g-phil.kr/?p=911

▶ 바그네리안과 크리스티안

옥스퍼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에서는 '바그네리안(Wagnerian)'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습니다.

① (형용사) 독일 오페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와 관련 있거나 그가 쓴 음악, 음악 이론 또는 극음악 작곡 이론과 관련 있는
② (명사) 바그너 숭배자 또는 지지자

'바그너―바그네리안'은 '크리스트―크리스티안'과 짜임새가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저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의 종교적으로 숭배한다는 뜻이지요. 바그너가 살았을 때부터 바그너―브람스 대립 구도가 있어서 이런 분위기가 손쉽게 생겨났고요. 더군다나 바그너가 민족주의를 불러내 가며 저주를 퍼부어댔던 프랑스에서도 바그네리안이 제법 많았다고 합니다.

저는 바그네리안입니다. 제가 블로그 등에서 쓰는 공식(?) 프로필에는 이런 말이 들어가지요:

(김원철은) 바그너가 《파르지팔》을 작곡하던 무렵으로부터 100년, 바그너가 서거한 지 95년 만에 태어났다. 김원철이 태어나던 날 몬살바트 성에서 성배 기사 세 명이 찾아와 축복했으며, 어려서부터 잔[杯] 종류, 특히 팥빙수 그릇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확인되지 않은 설이 있다. 스물두 살 되던 해에 성배의 계시를 받고 바그너 사도가 되었다. 현재 바그너 성지 순례를 위해 경전을 연구하고 있다.

이쯤 되면 저를 놀리는 말이 나올 법합니다. 이렇게요: "여러분께서는 지금 말기 증세를 보고 계십니다!"

▶ 바그너 색깔론

제가 바그네리안이라고 하면 제 정치성향이 극우적일 것이라고 오해하시는 분도 있어요. 억울합니다. 이참에 밝혀 둘게요. 저는 지난 총선 때 진보신당에 투표했습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좌파'는 아니고 '자유주의자(liberalist)'입니다. 유럽 해적당(Pirate Party) 강령을 이어받은 정당이 생긴다면 지지할 생각이고요.

바그너는 반유대주의자였습니다. 「음악 속 유대주의」(Das Judenthum in der Musik)라는 글을 처음에는 필명으로, 나중에는 실명으로 발표해서 악명을 떨쳤지요. 이 글에 나오는 '유대인'의 정체는 알고 보면 두 사람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젊은 바그너에게 수많은 도움을 주었던 작곡가 마이어베어, 그리고 바그너가 평생 열등감에 시달렸던 천재 멘델스존이지요. 이 두 사람은 바그너보다 먼저 성공한 유대인 음악가로 바그너 출세길에 걸림돌이 되었고, 바그너는 당시 독일에 창궐하던 반유대 정서를 이용해서 두 사람 때리기에 성공했습니다. 심보가 고약해요. 게다가 글에 나타난 인종주의는 두 사람을 공격하는 도구일 뿐이라 하기 어렵고, 바그너의 유대인 친구들을 읊어대는 정도로는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를 파시즘으로 곧바로 이어 말하는 일은 잘못입니다. 인종주의와 파시즘이 무관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둘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또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는 바그너 후손의 명백한 나치 부역 행위와도 곧바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20세기 유럽 사회가 저지른 잘못을 두고 19세기 사람인 바그너를 불러내 탓하는 일이 바르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또 알고 보면 바그너의 정치성향은 평면적이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바그너는 무정부주의자, 위험한 혁명가 등으로 불렸습니다. 푸르동, 바쿠닌 등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어울리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바그너는 본디 '좌파'였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좌파 지식인들과 독일민주공화국 바그너 학자들은 바그너를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예언가'로 선언하기도 했지요. '바그너=히틀러'라는 편견이 널리 퍼진 요즘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술가나 예술 작품 자체가 아니라 예술가 및 작품을 둘러싼 담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화평론가 이택광 선생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와 관련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바그너에게 책임을 묻는 그 행위를 확대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거론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야한다. 말하자면 나치에게 책임을 묻는 행위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행하는 만행에 대한 책임을 묻는 행위와 함께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책임을 묻는다'는 윤리적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당성이다.

유대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이택광 선생이 지적한 바로 그 문제를 두고 때때로 이스라엘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곤 합니다. 또한 바렌보임은 서동시집 오케스트라(West-Eastern Divan Orchestra)를 만들어 이끄는 등 음악으로 중동 평화에 이바지하고 노벨 평화상 후보에까지 올랐으며, 역사상 가장 자주 바그너 음악을 지휘했고, 텔아비브에서 처음으로 바그너 음악을 지휘하기도 했지요. 아직도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 오페라 전막이 공연된 일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그너 음악 일부가 공연된 일은 종종 있었고, 지난해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후손이 지휘하는 이스라엘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지크프리트 목가》를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2010년 11월에는 이스라엘에 바그너 협회가 생기고 법무부 허가까지 받았다네요.

▶ 음유시인 기사와 성배수호 기사

이번에 경기필이 공연하는 작품은 모두 기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이번 연주회에서 음유시인 기사가 나오는 두 작품을 1부에 연주하고, 성배 수호 기사가 나오는 두 작품을 2부에 연주합니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와 《탄호이저》는 둘 다 노래자랑 이야기입니다. 노래하는 기사가 나오고, 우승자는 신부를 얻게 된다는 설정도 비슷해요. 《파르지팔》과 《로엔그린》은 주인공이 성배 수호 기사라는 대목이 닮았습니다. 로엔그린이 파르지팔 후계자이기도 하지요.

▶ 기사 이야기, 음유시인, 그리고 게르만 전설

옛날부터 유럽에는 기사들의 모험을 그린 전설이 많았고, 기사들이 직접 음유시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지요. 12~14세기 독일-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던 기사 출신 음유시인을 민네징어(Minnesinger)라고 합니다.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에 나오는 탄호이저, 볼프람 폰 에셴바흐,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 등은 실존했던 민네징어입니다. '민네'(Minne)는 사랑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 사랑이란 주로 정신적인 사랑을 뜻했습니다. 『게르만 신화 · 바그너 · 히틀러』를 쓴 안인희 선생은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원래 기사는 봉건 군주의 신하였지만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면서 기독교 기사, 혹은 신의 기사로 불렸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 기독교도로서의 미덕은 헌신과 체념, 그리고 많은 경우 금욕적인 순결이었다. 십자군 전쟁 동안 기사들은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국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한동안 전쟁이 거의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이럴 경우 정상적이고 평화로운 결혼 생활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떤 기사들은 결혼을 포기하고 수도사처럼 생활하기도 했다. 그들은 신분이 고귀한 부인, 대개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군주의 부인을 사모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은 실질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징적이고 정신적인 사랑이었다. […] 기사에게 어울리는 사랑은 바로 이런 높은 사랑이고, 그것은 성모 숭배와 여러 가지로 닮은 점이 있다. 이런 높은 사랑의 전통으로부터 여성에게 깍듯한 기사도 전통이 생겨난 것이다.

오페라 《탄호이저》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실존 인물이 나오기도 하지만, 실제 있었던 일보다는 초현실적인 전설이 작품에 더 많이 들어가 있지요. 탄호이저는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교황 앞에서 뉘우친 일이 있는 사람인데,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에서는 교황이 '내 지팡이에 새싹이 돋지 않으면 그대는 용서받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탄호이저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지팡이에 참말로 새싹이 돋아버립니다. 더 자세한 줄거리를 이 글에서 소개하지는 않을게요.

민네징어가 12~14세기에 활동했다면, 14~16세기에는 마이스터징어(Meistersinger)라 불리는 음유시인이 활동했습니다. 마이스터징어는 대개 귀족이 아니라 장인 길드(guild)에서 활동한 평민 계층이었지요. 바그너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에 나오는 한스 작스(Hans Sachs)는 실존했던 마이스터징어입니다. 구두장이이기도 했고요.

경기필 공연에서는 '마이스터징어'라는 낯선 말을 '명가수'로 옮겼습니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기사인 '발터 폰 슈톨칭'이 마이스터징어에 도전하는 이야기인데, 바그너는 이 이야기에 빗대어 자신의 예술관을 드러내고 독일 예술을 찬양했습니다.

여기에는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토벤이 고전주의 음악 양식을 완성하고 낭만주의 시대를 열어젖힌 뒤로, 베토벤이 남긴 음악 유산을 정당하게 계승한 작곡가가 누구냐를 놓고 담론 투쟁이 일어납니다. 바그너를 중심으로 하는 파벌과 브람스 · 한슬리크를 중심으로 하는 파벌이 격렬한 투쟁을 벌였고, 그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이를테면 '수준 높은 애호가는 실내악을 듣는다'라는 속설은 본디 바그너 진영이 진보적이라는 주장에 대항해 브람스-한슬리크 진영에서 내놓은 논리였지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 옛 규칙을 고집스럽게 떠받드는 인물인 '직스투스 베크메서'는 바그너가 브람스-한슬리크 진영, 더 정확히는 한슬리크(Eduard Hanslick)를 비꼬려고 꾸며낸 인물입니다. 바그너는 대본을 쓸 때 '한스 리히'(Hans Lich)라는 이름을 썼다가 너무 노골적이라서 '베크메서'로 바꿨다네요. 한슬리크는 당시 이름을 떨치던 음악학자이자 평론가로 바그너와는 사이가 매우 나빴지요. 베크메서와 대비되는 두 사람, 즉 새로운 시도를 망설이지 않는 발터 폰 슈톨칭과 '온고지신' 원칙을 가장 훌륭하게 실천하는 진정한 명인 한스 작스는 바그너 자신을 나타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성배와 현자의 돌

바그네리안이 생겨나는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설정이 주는 매력을 중요하게 꼽을 수 있을 듯합니다. 이번 경기필 연주회 포스터를 보고 사람들이 '게임 포스터 같다'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바그너 작품이나 요즘 유행하는 롤플레잉 게임(Role-playing game)이나 모두 신화와 마법의 세계를 그리거든요. 바그너 작품에 나오는 고유명사를 인터넷 검색해 보면 게임 관련 글이 더 많이 뜨기도 합니다.

《파르지팔》은 아서(Arthur) 왕을 따르던 '원탁의 기사'들이 성배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합니다. 명검 '엑스칼리버'와 마법사 '멀린'이 나오는 바로 그 전설이지요. 가웨인(Gawain), 랜슬롯(Lancelot), 퍼시벌(Percival), 트리스트람(Tristram), 갤러해드(Galahad) 등이 원탁의 기사로 유명하고요. 이 가운데 성배를 찾는 데 성공했던 기사는 퍼시벌, 달리 쓰면 파르지팔입니다.

퍼시벌(파르지팔)이 성배를 찾았다는 이야기는 그냥 전설이고, 실제로는 십자군 전쟁 때 템플기사단(Templar)이 찾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템플기사단이 십자군 전쟁에 참전할 때 단원 수는 명분과 어울리지 않게 9명뿐이었고, 사실은 단원들이 솔로몬 성전 터에 천막을 치고 10년 넘게 발굴·탐사 작업을 벌였다고 합니다. 거기서 뭘 찾아내거나 배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돌아와서 갑자기 큰돈을 벌고 어마어마한 권력을 거머쥐었습니다. 화폐를 발명한 사람들이 바로 템플기사단이기도 하지요.

그랬다가 갑자기 망했습니다. 템플기사단에 큰 빚을 진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템플 기사단을 이단으로 몰아 숙청해 버렸지요. 이 사건은 상식에 한참이나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미국 대통령이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해체하고 주요 인물을 국가반역죄로 처벌하는 일과 비슷하거든요. (FRB는 민간단체이면서도 달러 화폐를 독점 발행할 수 있는 엄청난 권리를 가지고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대통령이라도 함부로 할 수 있는 단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템플기사단 숙청 사건과 관련해 수많은 음모론이 생겨났습니다.

중세 기사이자 음유시인이었던 볼프람 폰 에셴바흐(Wolfram von Eschenbach)는 『파르치팔』(Parzival)이라는 서사시를 썼습니다. 바그너는 이 작품을 중요하게 참고해서 《파르지팔》(Parsifal)을 썼습니다. 볼프람을 《탄호이저》에 등장인물로 쓰기도 했고요. (에셴바흐는 성이 아니라 출신지입니다. 중세시대 사람이라 성이 없어요.)

『신의 지문』 등을 쓴 작가 그레이엄 핸콕은 볼프람이 템플기사단원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학술적으로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는 주장인데,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볼프람이 『파르치팔』을 쓰기 시작한 때는 십자군이 살라딘 군대에 패하여 예루살렘 왕국이 함락된 직후이며, 『파르치팔』에 묘사된 배경은 아서 왕 시대가 아닌 십자군 원정 당시와 맞아떨어진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 그레이엄 핸콕은 『파르치팔』에 묘사된 지리는 성궤가 숨겨진 위치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본격적인 음모론입니다. 볼프람은 성배가 돌(石)이라 했습니다. 음모론자들은 성배가 돌과 관련 있는 지식이며, 그 지식은 영생 또는 영혼 전이와 같은 초과학적 능력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중세시대에 유행했던 연금술은 불로불사를 가능하게 한다는 '현자의 돌'(elixir)을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고 합니다.

이집트에 피라미드가 세워진 때는 신석기시대였지요. 돌도끼 휘두르던 그때에 현대과학으로도 비밀을 밝히지 못하는 피라미드가 세워질 수 있었던 까닭을 학술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사시대'라고 부르는 옛날, 또는 그보다도 앞선 먼 옛날에 고등문명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배란 그 초고대문명에서 나온 파편이라고요.

음모론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단체 프리메이슨(Freemason)은 본디 '자유석공조합'이라는 뜻이지요. 숙청에서 살아남은 템플기사단원들이 만든 단체가 바로 프리메이슨이라고도 합니다. (프리메이슨은 서울 이태원, 경기도 파주, 그리고 부산에도 지부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노파심에서 덧붙이지만, 음모론에 너무 빠지지는 마시고 재미로만 봐 주세요. 단일세력이 세계를 암중 지배한다는 식의 거대음모론은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기밀문서만 봐도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지요. 중요한 것은 바그너가 《파르지팔》에서 나타낸 상상의 세계와 철학적 메시지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바그너는 1872년 베를린에서 프리메이슨 가입 신청을 했다가 "은근한 압력"을 받고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 뒤에 《파르지팔》을 썼지요. 바그너는 《파르지팔》에 나오는 성배기사단이 템플기사단과 복장이 비슷하다고도 했습니다. 바그너의 장인이었던 리스트는 1841년 프리메이슨 프랑크푸르트 지부에 가입했고, 1870년 부다페스트 지부에서 프리메이슨 3도 회원(Master)이 되었습니다. 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이름난 음악가 가운데 상당수가 적어도 한때나마 프리메이슨 또는 관련 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바그너는 성배가 '왕의 피'를 뜻하는 "상 레알"(Sang Réal)에서 온 말이라 했습니다. 영화 《다빈치 코드》 또는 원작 소설을 보면 비슷한 얘기가 나오지요? 다만, 바그너는 '왕의 피'를 혈통 개념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파르지팔》을 보면 암포르타스 왕이 성창(롱기누스의 창)에 찔려서 피를 흘리는 얘기가 나오는 정도이고, 수정으로 된 잔(Kristallschale)이 성배로 나옵니다. 앗, 그러고 보니 수정은 광물, 그러니까 돌이지요!

《로엔그린》은 《파르지팔》 이후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로엔그린은 파르지팔의 뒤를 이어 성배수호기사를 이끌게 되는데,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은 로엔그린이 몬살바트 성을 떠나 활동하는 이야기입니다. 로엔그린은 볼프람 폰 에셴바흐가 쓴 서사시 『파르치팔』(Parzival)에 처음 나오는 이름이며, 원작에서는 '로에란그린'(Loherangrin)이었다가 13세기 후반에 전해진 판본에서 로엔그린(Lohengrin)으로 바뀌었습니다.

▶ 파르지팔의 고통과 깨달음에 대하여

《파르지팔》에는 이런 계시가 나옵니다. "자비심으로 깨달으리라, 순수한 바보여"(durch Mitleid wissend, der reine Tor).

이 말은 《파르지팔》에서 바그너가 나타내고자 한 철학적 메시지를 대표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철학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래서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하시는 이진 선생이 쓴 글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를 빌려 올까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der doch alles weiss)' 구르네만츠도, 윤회로 영원히 반복되는 세월동안 무수한 일들을 보아온 쿤드리도(denn nie lügt Kundry, doch sah sie viel), 성스러운 자 성배왕 티투렐도, 직접 계시를 들은 암포르타스도, 성스러움의 이면에서 사악한 마법을 알아낸 클링조어도 그 앎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니 "너 정말 그냥 바보일 뿐이로구나!"라는 말을 할 때, 구르네만츠는 사실 자신도 모르는 맥락에서 진실을 말한 것이 된다.

"순수한 바보"만이 깨달음을 얻어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까닭은 지식이 깨달음을 방해하기 때문이라네요. 지식이 아니라 자비심(Mitleid)으로 깨달아야 하지요. 자비심을 뜻하는 독일어 "Mitleid"는 함께(Mit) 고통받는다(leiden)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남의 고통을 그저 아는 일과 그것을 함께 느끼는 일은 다릅니다.

그 좋은 예가 될 '책상 살인자(Schreibtischmörder)'라는 말이 있다. 나치의 경험이 만들어 낸 이 단어는 매사에 얌전하고 규정과 관습에 따라 모범적으로 살는 듯 '정상적으로' 보이는 인간이 거리낌없이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아이러니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 '남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평범한 삶을 위한 안전핀이 된다.

반면, 남의 고통을 느끼는 것 즉 자비심은 그 자체가 일상을 벗어나는 경험이자 실천이다. 자비심은 함께 고통을 겪는 삶으로,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보살행'으로 연결된다. 필자의 부족한 이해력의 한계 안에서나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참된 자비심(Mit-leid)는 곧 보살행(mit-leiden)이다.

이진 선생은 바그너가 영향받았던 쇼펜하우어 철학과 불교 사상을 아우르며, '함께 고통받는' 일에서 그치지 말고 '함께 기뻐하는'(Mit-Freude)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바그너가 음악으로 나타내고자 한 진정한 철학적 메시지라고 말합니다.

보살은 일체중생을 구제하려고 열반에 들지 않지만, 역설적이게도 실제로 보살에 의해 구제되는 중생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각자는 (자신 안에서 불성을 깨닫는 것을 통해) 각자를 구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행은 이러한 의미에서 보살의 '자기' 수행과 동일할 것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요, 살며 살게하라(Live and let live)는 지혜이다.

그리고 이럴 때, 고통받는 자에게 내미는 손길은 더이상 '함께 슬퍼하는 것도 함께 고통을 겪는 것도 Mit-Leid(en)'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차라리 "함께 기뻐한다 Mit-Freude"는 말로 비로소 제대로 전달된다.

[…] 어리석음과 폭력이 반복되는 잔인한 현실을 함께 바라보면서도 "만인은 만인에 대한 신(神)(homo homini deus)"이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으니 바로 스피노자다. 고통받는 이들을 더 이상 동정하지 말라고, 동정이 아닌 사랑을 외친 자가 있으니 니체다. 어쩌면 고통받는(leidend) 신(神) 디오니소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삶의 필연적인 수동성, 그에 따르는 고난, 절망과 슬픔의 정서을 바탕에 깔고 시작한다. 그렇지만 유한한 존재로 태어난 인간은 수동적인 체험 속에서도 자신 안의 신적 본성을 발견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어 이로써 점차 자유로워지며(스피노자), 오히려 가장 쓰디쓴 운명까지 모든 수동적인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운명에 대한 사랑, amor fati)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며(니체), 갈기갈기 찢겨졌던 신은 죽음을 딛고 부활한다(디오니소스).

[…]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심취해있던 1858년 10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에 보낸 한 편지를 보면 자신의 본성 그리고 예술적 성취의 근원이 연민(Mitleid)임을 고백하면서도 사랑 속에서 너무도 어렵게 얻어지는 기쁨(Mit-Freude)은 그에 대한 단순한 보완 이상이라고 적고 있음이 흥미롭다.

'함께 기뻐함'은 사랑으로 얻을 수 있는 기쁨이로군요. 이 대목에서 경기필이 지난 3월에 공연했던 말러 교향곡 3번을 떠올려도 좋지 않을까요?


― 티켓 예매 ―

예술의 전당 SACTicket
http://www.sacticket.co.kr/home/play/play_view.jsp?seq=12176

인터파크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S0001888

예스24
http://ticket.yes24.com/Home/Perf/PerfDetailInfo.aspx?IdPerf=11960

옥션티켓
http://ticket.auction.co.kr/Home/Perf/PerfDetailInfo.aspx?IdPerf=15320

2012년 4월 19일 목요일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합창과 함께하는
바그너 갈라 콘서트》 (지휘: 구자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합창과 함께하는 바그너 갈라 콘서트》

  • 2012년 5월 8일 화요일 / 오후 8시
  •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 초등학생 이상 입장가 (고등학생 이상 관람 권장)
  • 입장권: A석 3만원 / B석 2만원

프로그램

  •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 1막 전주곡
    • 1막 1장: 성당 미사 장면
    • 3막 피날레: 발터가 노래경연에서 우승하고 작스가 독일 예술을 찬양함
  • 《로엔그린》 (Lohengrin)
    • 3막 전주곡과 결혼식 합창
    • 3막 간주곡: 사열식 나팔
    • 1막 3장: 결투에서 승리한 로엔그린
  • 《파르지팔》 (Parsifal)
    • 1막 전주곡
    • 1막 간주곡: 성배기사들이 몬살바트로 가서 의식을 진행함
    • 3막 피날레: 파르지팔이 일으킨 기적을 사람들이 찬양함
  • 《탄호이저》 (Tannhäuser)
    • 2막 입당행진곡: 기사들과 귀부인들이 노래의 전당에 입장함
    • 3막 전주곡: 순례자 행렬을 기다리는 엘리자베트
    • 3막 순례자의 합창과 피날레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예술감독: 구자범)는 《합창과 함께하는 바그너 갈라 콘서트》를 5월 8일 화요일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개최한다.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이번에 연주할 곡들은 《탄호이저》(Tannhäuser), 《로엔그린》(Lohengrin), 《뉘른베르크의 명가수》(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파르지팔》(Parsifal)에서 발췌한 합창과 관현악곡이다. 약 200명에 이르는 대규모 합창단이 이번 공연에 동원되며, 경기필은 단순히 인원수를 늘려 규모만 키운 합창단이 아닌 프로 합창단만을 섭외하여 예술적 완성도를 높일 예정이다. 합창은 보통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로 이루어지는 4성부가 표준이지만, 바그너 합창 음악에서는 많게는 20성부 안팎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대규모 합창단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고, 그에 따라 매우 커지는 음량에 맞는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필요하기도 하다. 바그너는 금관악기 여러 대를 효과적으로 쓰는 능력이 뛰어난 작곡가이며, 그에 따른 고양감은 어지간한 교향곡을 압도한다. 바그너 작품 가운데 가장 멋진 대목을 모은 이번 공연은 바그너 음악의 진수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구자범 지휘자가 취임한 뒤로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그동안 국내에서 자주 연주되지 못했던 명곡들을 소개하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 바그너 또한 서양음악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나 외국에서 공연되는 빈도에 견주어 국내에서는 그다지 자주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작곡가이다. 《탄호이저》 서곡 등 귀에 쏙 들어오는 관현악 발췌곡에 이끌려 바그너 음악에 관심을 두는 애호가는 제법 많지만, 이런 이들도 가사가 나오는 대목을 들어보고는 언어 장벽과 낯선 음악 양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흥미를 잃곤 한다.

그런데 바그너 오페라에 나오는 합창이 바그너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 듣기에도 매우 좋다는 사실은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바그너 발췌 음반은 대부분 관현악 위주이며, 전막 연주가 아닌 발췌 연주를 하면서 대규모 합창단을 섭외하기 쉽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회는 공연장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바그너 합창 음악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으로 제의(祭儀; 제사 의식)적 성격을 꼽을 수 있다. 바그너 작품은 그 자체가 제의적이기도 하지만, 작품 속의 제의 장면은 감상자에게 특별한 영적 고양감을 일으키곤 한다.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를 쓴 안인희는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제의를 향한 원형적(原型的) 갈망을 감추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결혼식, 장례식, 졸업식 등의 의식(儀式)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 장엄한 무대 연출을 통해 등장하는 제의적인 몸짓은 마치 원시 시대 종교 의식과 같이 예리하게 우리의 의식(意識)을 사로잡는다"라고도 했다.

바그너 합창 음악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은 결혼식장에서 자주 연주되는 이른바 '결혼 행진곡'이다. 너무나 유명하면서도 작곡가가 바그너라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이 곡은 본디 《로엔그린》 3막 전주곡에 이어지는 오르간 반주가 있는 합창이다. 이 곡은 원곡 그대로 연주했을 때 훨씬 큰 감동을 느낄 수 있으며,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다른 곡과 더불어 관객에게 큰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지휘 : 구자범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 후 동 대학원 철학과 재학 중 도독
독일 만하임 음대 대학원 지휘과 졸업
독일 하겐 시립 오페라 극장, 다름슈타트 국립 오페라 극장 지휘자
하노버 국립 오페라 극장 수석 지휘자
광주 시립교향악단 지휘자
현,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합창단 : 수원시립합창단, 안양시립합창단, 의정부시립합창단, 인천오페라합창단, 그란데오페라합창단

― 티켓 예매 ―

예술의 전당 SACTicket
http://www.sacticket.co.kr/home/play/play_view.jsp?seq=12176

인터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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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
http://ticket.yes24.com/Home/Perf/PerfDetailInfo.aspx?IdPerf=11960

옥션티켓
http://ticket.auction.co.kr/Home/Perf/PerfDetailInfo.aspx?IdPerf=15320

2011년 12월 23일 금요일

바그너 문답: 바그너 작품에는 왜 작품번호가 없나요?

고클래식에 올라온 질문에 답하는 글입니다.
원문: http://to.goclassic.co.kr/qanda/319871


사실은 바그너 작품에도 작품번호는 있습니다. 바흐와 비슷한 WWV 번호를 쓰지요.
이를테면, 《니벨룽의 반지》는 WWV. 86입니다. 《라인의 황금》은 WWV. 86a이고요.

WWV는 Wagner Werk-Verzeichnis를 줄인 말입니다.
음악학자 J. Deathridge, M. Geck 그리고 E. Voss가 편집한 작품 목록인

Verzeichnis der musikalischen Werke Richard Wagners und ihrer Quellen (Mainz, 1986)

에서 따왔습니다.

참고로 쾨헬(모차르트), 도이치(슈베르트), 호보켄(하이든) 번호 등도
작곡가가 직접 붙인 작품번호가 아니란 거 많이들 아시죠? ^^;

WWV 번호를 대중이 널리 쓰지 않는 까닭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작품번호라는 것이 헷갈리지 말라고 생겨난 것인데,
바그너 작품은 헷갈리지 않잖아요? ^^;

물론, 바그너 작품 가운데 전문가도 잘 모르는 이른바 '듣보잡' 작품도 있습니다.
그런 작품을 말할 때에는 헷갈리지 말라고 WWV 번호를 쓸 필요도 있겠지요.
음악학자가 셋이나 달려들어서 작품목록을 만든 까닭 또한 거기에 있고요.

2010년 1월 1일 금요일

'바그네리안'(Wagnerian)이란?

▶ 바그'네'리안 vs. 바그'너'리안

영어에서 '―ian'이라는 말은 바로 앞에 강세를 둡니다. 독일어도 비슷하지 싶네요. 그러니까 '바그너―바그리안', '말러―말리안', '브루크너―브루크리안'이 맞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바그네리안'이라는 말은 널리 쓰이나 '말레리안'이라는 말은 거의 쓰이지 않고 '말러리안'이라고들 하는데, 굳이 따지자면 틀린 말입니다.

▶ 바그네리안 vs. 크리스티안

☞ 옥스퍼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에서는 'Wagnerian'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습니다.

① (형용사) 독일 오페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와 관련 있거나 그가 쓴 음악, 음악 이론 또는 극음악 작곡 이론과 관련 있는
② (명사) 바그너 숭배자 또는 지지자

'Wagner―Wagnerian'은 'Christ―Christian'과 짜임새가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저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의 종교적으로 숭배한다는 뜻이지요. 바그너가 살았을 때부터 '바그너 지온' vs '브람스 연방' ― ☞『은하영웅전설』 참고 ― 패싸움 구도가 있어서 이런 분위기가 손쉽게 생겨났고요. 더군다나 바그너가 민족주의를 불러내 가며 저주를 퍼부어댔던 프랑스에서도 바그네리안이 많았다고 합니다. (참고: ☞그로브 음악 사전)

'브루크네리안'이나 '말레리안' 등은 '바그네리안'에서 온 말이라고 합니다. ☞ 옥스퍼드 영어 사전을 보면 작곡가를 숭배한다는 뜻으로 '-ian'을 쓴 문헌은 바그너가 가장 오래된 듯합니다. 'Mozartian'이라는 말이 'Wagnerian'보다 먼저 있었으나 '숭배자'라는 뜻으로 쓰인 때는 'Wagnerian'보다 뒤지고요. 독일 쪽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ㅡ,.ㅡa

▶ 간증 사례

김원철은 농담 삼아 스스로 '바그너교' 신자라고 말합니다.

☞ 신앙을 당당히 드러낸 김원철 블로그 프로필

☞ 김원철이 성지 순례를 갔다 와서 쓴 글: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어느 바그네리안이 쓴 새천년 인사:

제 목:전세계 바그네리언들께 드리는 새천년 인사 관련자료:없음 [4614]
보낸이:이하일 (laudamus) 2000-01-01 19:07 조회:91
새천년이 밝았습니다.

젠타의 희생과
엘리사벳의 기도,
이졸데의 사랑을 기억하사,
지크프리트의 힘,
파르지팔의 극기와 구원이,
로엔그린의 기적과 늘 함께하는,
축복의 새천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위대한 성배의 이름으로

        2000년1월1일  이하일 拜上

― 하이텔 〈바그네리안〉 게시판에서 인용.

2009년 11월 1일 일요일

안인희 ―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 (서울: 민음사, 2003).

안인희 ―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 (서울: 민음사, 2003).

※ 2003년 민음사 〈올해의 논픽션상〉 수상작 역사와 문화 부문



▶ 글쓴이

안인희.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독문학을 공부했고, 1986~1987년에 독일 밤베르크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90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 표지의 저자 소개 중에서.

▶ 목차

I. 게르만 신화와 영웅전설
   1. 보물 이야기
   2. 기사 이야기
   3. 사랑 이야기
   4. 가수들
   5. 북유럽의 신화
   6. 니벨룽겐의 노래
II. 신화를 다루기 위하여
   1. 신화와 원형
   2. 이야기의 구조
III. 바그너의 세계: 신화를 문학과 음악으로
   1. 낭만주의 문학
   2. 바그너의 생애
   3. 음악연극 작품으로 본 바그너 사유의 길
   4. 니체의 바그너 비판
IV. 히틀러: 신화와 예술을 직접 현실로
   1. 시대적 배경
   2. 히틀러의 세계관
   3. 예술과 정치

▶ 서평

이른바 ☞'바그네리안(Wagnerian)'이라는 말은 바그너가 마니아를 끌어들이는 예술가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마니악한 취미일수록 진입 장벽이 높은 법. 바그너 진입 장벽으로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독일어, 반음계적 화성, 그리고 히틀러. '히틀러의 음악가' 바그너를 올바로 알려면 '히틀러의 나라' 독일을 알아야 한다. 글쓴이는 이런 말로 책을 연다.

독일 사람들은 예전에 자신들의 나라를 "시인과 철학자들의 나라"라고 부르곤 했다. (…) 그러나 이런 모든 자부심은 단 한마디 앞에서 어이없이 스러지고 만다. "히틀러."

'바그너=히틀러'라는 편견은 어쩌면 가장 고약한 바그너 진입 장벽일지 모른다. 그 장벽이 고약한 까닭은 작품 바깥에서만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그너의 작품에는 제3제국의 국가 행사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사실은 히틀러가 바그너에게서 차용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히틀러 시대에 대해 철저히 비판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오늘날의 세대들이 제3제국 시대의 제의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을 소화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여전히 열렬한 "바그너 숭배자(Wagnerianer)"들이 존재하지만, 상당히 많은 독일인들이 처음부터 바그너의 작품에 거부감을 보인다. 우리는 오히려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공연에서 정통적인 바그너 공연을 더 쉽게 볼 수 있다. (341쪽)

더군다나 그 편견은 날조된 괴담을 등에 업고 ― 이를테면 아우슈비츠에서 바그너 음악을 연주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 ― 바그너를 듣는 이를 겨냥해 '파시스트'라는 인종주의적 혐의를 덮어씌우기도 한다. 이러한 편견과 괴담 맞은편에는 '홀로코스트 부인주의'가 있겠으나, 객관성을 좇는 전통적인 바그너 연구가의 입장은 "히틀러가 혼자 미쳐서 바그너 가지고 소란을 떤 것이지, 바그너 자신은 히틀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는 정도다(☞박원철 서평에서 인용). 그러나 안인희는 새로운 프레임으로 '편견'과 '편들기'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이 책은 게르만 신화 → 도이치 낭만주의 → 바그너 → 히틀러로 이어지는 문화사적 흐름을 짚으며 바그너―히틀러 관계를 둘러싼 객관적인 지식을 쌓도록 도와준다. 이 흐름을 꿰뚫는 모티프는 "붕괴와 몰락"이며, 북유럽 신화와 엮어 말하자면 '라그나로크(Ragnarök)'이다. 이 모티프는 책 내용뿐 아니라 디자인으로도 나타나는데, 디자이너 ☞유지원은 한때 ☞바그네리안 동호회 회원이었으며 알 만한 사람은 아는 그 유지원이다.

박원철이 서평에서 지적했듯이, 바그너―히틀러 관계를 둘러싼 안인희의 논리에는 빈틈이 많다. 그러나 대안적 주장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논리적 완결성은 남은 과제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더군다나 그 빈틈은 책 한 권으로 메울 수 있다고 믿기 어렵다.

그래도 한 가지 아쉬운 곳을 말하자면, 이야기를 '히틀러'에서 끝내며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에는 어떤가 하는 것"은 읽는이 몫으로 떠넘긴 대목이다.

도이치 민족은 오랜 세월을 두고 유럽 역사의 피해자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어느 날 가해자의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한 민족의 오래 묵은 억울함이 어떤 과정을 거쳐 끔찍한 역사를 만들어냈는지 이 책에서 관찰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남은 질문은,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에는 어떤가 하는 것으로 넘어간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독자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343쪽)

글쓴이가 읽는이 몫으로 남겼으니 책을 읽은 내가 찾은 '모범답안'을 알려주겠다.

그리고 바그너에게 책임을 묻는 그 행위를 확대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거론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야한다. 말하자면 나치에게 책임을 묻는 행위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행하는 만행에 대한 책임을 묻는 행위와 함께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책임을 묻는다'는 윤리적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당성이다.

☞ 이택광, 〈이스라엘과 바그너〉

이것은 독일에서 독일 문학을 공부하면서 독일 사람에게 정서적 동질감을 키웠을 글쓴이가 감히 하지 못했던 말이라 헤아릴 수 있겠는데, 그 속내는 박노자가 쓴 글에 비추어 엿볼 수 있다.

대부분 ‘근대성’이란 것을 말할 때, 그 특징으로 “의문을 갖고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합리적 사고”를 든다. 이 측면에서 ‘근대의 요람’임을 자랑하는 서구나 미국의 대중적 역사 기억은 과연 근대적일까. ‘합리성’을 내세워 다른 지역의 문화를 평가절하하는 구미에서조차 비판적 분석이나 다른 역사적 사건과 비교할 수 없는 공공(公共)의 역사적 기억의 ‘성역’(聖域)이 있다. 다름이 아닌 홀로코스트(Holocaust), 즉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의 약 600만명의 유대인이 파쇼에 의해 대학살된 사건이다.

이는 세계사에서 전대미문의, 미증유의 사건이라는 전제, 인류가 저지른 어떤 가혹행위와도 견줄 수 없다는 테제, 히틀러가 자행한 범죄 가운데서 가장 흉악하다는 주장 등을 업고 아무런 비판 없이 ‘기존 사실’로 받아들인다. 어릴 때부터 교과서와 영화 등의 매체로부터 주입된 홀로코스트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외경(畏敬)도 한몫하지만, 홀로코스트에 대해 그 뜻을 약간이라도 상대화시키는 듯한 기미를 공석에서 보이면 곧장 ‘홀로코스트 부인주의자’(Holocaust-denier)의 딱지를 지닐 수도 있다. 딱지가 붙으면 더 이상 학술·대중 매체에서 발언권을 갖기가 힘들다. 마치 중세 유럽의 지식인들이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예리한 발언으로 독신죄(瀆神罪; 기독교의 신을 모욕하는 죄목)에 걸려 사회로부터 ‘출척’(黜陟)당한 전근대적인 현실을 방불케 한다.

☞ 박노자, 〈비극의 상업화, 홀로코스트〉. 한겨레21, 2002.11.28.

이 책은 독일·오스트리아 문화사를 바탕으로 한 바그너 입문서라 할 수 있다. 입문서로 이 책에 매길 수 있는 가장 큰 값어치는 번역서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 박원철 서평에서 잘 드러난다.

처음 책을 들었을때, 한참동안 저자가 누군인지 찾고 있었습니다.
안인희라는 이름을 보았지만, 번역자인줄 알았지 설마 우리나라 사람이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라는 주제를 감히 건들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거지요.

바그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그 뒤에 박준용의 ☞ 『바그너 오딧세이』 (서울: 씨디가이드, 2002)를 읽으면 더욱 좋겠고, 포이어바흐·니체·쇼펜하우어를 아우르는 철학적인 내용을 알려면 브라이언 매기가 쓰고 김병화가 옮긴 ☞ 『트리스탄 코드』 (서울: 심산, 2005)를 읽어도 좋겠다. 미학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김문환이 쓴 본격 학술서인 ☞ 『총체예술의 원류』 (서울: 느티나무, 1989)―나중에 바뀐 제목은 『바그너의 생애와 예술』―를 추천할 만하다.

2009년 10월 18일 일요일

바그너 3문 3답

방명록과 메일로 누가 질문을 해서 이참에 새 글로 올립니다. 참고로 저한테 연락하려면 트위터가 가장 빠르고 그다음이 블로그입니다. 메일은 하루에 한 번씩은 확인하지만 더 빠르다고 하기는 어려워요. ^^

▶ 바그너 음악은 '아름다운가'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은 그 대상보다는 '아름답다'라는 말 속에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지요. 베토벤 《교향곡 5번 C 단조》는 아름답습니까? 친구들은 아름답다고 합니까? 부모님은? 13세기 유럽 사람은 어떨까요?

▶ 가사와 음악의 관계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네요.

두운. 당시에는 각운이 '대세'였으나 바그너는 두운을 썼습니다. 《니벨룽의 반지》에서는 시작부터 두운이 나오지요. "바이아 바가 보게 두 벨레~"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을 참고하세요: 안인희,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 (서울: 민음사 2003)

가사 그리기(word painting). 가사와 음악이 어우러지게 하는 기법은 중세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입니다. 이를테면 '지옥'이라는 가사에서 하행 도약 음정이 나오거나 불협화음이 나오는 식이지요.

라이트모티프. 가사 그리기와 나란히 생각할 수 있겠는데, 자세한 내용은 요기를 참고하세요: http://wagnerian.textcube.com/entry/Leitmotiv

▶ 신계 멸망의 의미

작품을 내놓고 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 했으니 해석하는 사람 마음이겠지요. '살아남은 놈이 강한 놈이다.'라는 명제에 비추면 신보다 인간이 강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

발할 성에 대한 가장 흔한 해석은 몰락해 가는 거대 권력입니다. 이를테면 나치 시대 베를린이 함락될 때 '발할 성이 무너졌다!'라고들 했지요. 그날 독일 라디오 방송이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하루 내내 《신들의 황혼》을 틀었다는 말도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바로 아래 글을 참고하세요. 또 9·11 사건 때에도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신들의 황혼》 오리지널 대본에는 음악에는 쓰이지 않은 브륀힐데의 독백이 더 있습니다. 바그너 자신의 '해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자세한 내용은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를 참고하세요.

그밖에 《니벨룽의 반지》 영상물이 여럿 있으니 연출을 어찌했는지를 살펴보면 연출가가 이 대목을 어찌 해석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 슈투트가르트 극장 프로덕션(Zagrosek 지휘) 같은 엽기 연출도 꼭 참고하세요. ^^

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바그너 색깔론 ― 이택광 떡밥

이택광 블로그에서 ☞'이택광 빠' 선언을 하고 나니 이택광 블로그에 바그너 관련 글이 올라왔다. 이거 나 보라고 쓴 듯하다. ㅡ,.ㅡa

☞ 이택광, 〈이스라엘과 바그너〉

이 글은 김원철이 이제껏 읽어본 ☞바그너 색깔론 떡밥 가운데 가장 편견 없고 논지가 명쾌하며 무리한 주장도 없다. 그러나 글이 짧은 만큼 자세한 사실 관계를 담아내지 못했고, 따라서 바그너를 헐뜯는 사람과 감싸는 사람이 모두 오해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투덜댈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나는 자칭타칭 바그네리안으로서 이 글에 보충 설명과 지엽적인 반론, 그리고 내가 바그너를 듣는 행위 변명을 겸하는 '댓글'을 쓰려고 한다.

먼저 알아둘 사실이 하나 있다. 바그너는 애초에 사상적·정치적 일관성이 없는 인간이라서 이를테면 바그너를 파시즘의 조상이라 규정하고 나면 이내 바그너가 사실은 좌파였다는 반론과 함께 수많은 증거를 만나게 된다. (바그너가 좌파였다는 얘기를 처음 듣는 사람은 ☞ 〈바그너 색깔론 떡밥: "Richard Wagner in the year 2000" 부분 번역〉을 참고하시라.) 바그너에게서 굳이 일관성을 찾자면 두 가지를 들 수 있겠다. 하나는 기회주의, 다른 하나는 19세기 천재 담론에 바탕을 둔 자뻑 망상, '나 바그너를 숭배하라!'

바그너의 반유대주의 혐의는 "K. Freigedank"("자유로운 생각")이라는 필명으로 내놓은 ☞〈음악 속 유대주의〉(Das Judenthum in der Musik)라는 글에서 비롯한다. 이때 바그너를 감싸는 근거로 바그너의 수많은 유대인 친구들과 ☞《파르지팔》을 초연한 유대인 지휘자 등이 불려 나오는데, 이 또한 기회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

〈음악 속 유대주의〉에 나오는 '유대인'의 정체는 알고 보면 두 사람으로 줄일 수 있다. 젊은 바그너에게 수많은 도움을 주었던 마이어베어(Giacomo Meyerbeer, 1791―1864), 그리고 바그너가 평생 열등감에 시달렸던 '엄친아' 멘델스존.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바그너보다 먼저 성공한 유대인 음악가로 바그너 출세길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데 있다. 바그너는 당시 독일에 창궐하던 반유대 정서를 이용하여 이 두 사람을 타격했고,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바그너는 은인을 배신한 고약한 마음씨와 '듣보잡이 진중권 물어뜯는 듯한' 찌질함을 함께 드러내고 말았다. 무엇보다 이 글에 나타난 인종주의는 유대인 친구들을 읊어대는 정도로는 변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를 파시즘으로 곧바로 이어 말하는 일은 잘못이다. 인종주의와 파시즘이 무관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둘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또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는 바그너 후손의 명백한 나치 부역 행위와도 곧바로 이어지지 않는다. 적지 않은 사람이 이런 잘못을 저지르곤 하는데, 그와 달리 이택광이 반유대주의까지만 거론한 대목은 참으로 적절하다.

사상이 불순한(?) 예술가가 내놓은 작품이 훌륭할 리 없다는 순진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을 설득하기는 이택광 말마따나 "멸치를 고래라고 설득시키는 일보다 더 어려울" 터이니(☞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속 편할지도 모르겠다.

진짜 황당한 부류는 바그너를 들으면 파시스트가 될 거라고 공포를 조장해대는 사람인데, 나는 이와 관련해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을 빌어와 비꼬기도 했다. 그런 주장이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 원인을 마릴린 맨슨에게 뒤집어씌우는 짓거리와 마찬가지로 참된 원인을 은폐할 뿐이라는 얘기다. (자세한 내용은 ☞ 〈볼링 포 히틀러 (Bowling for Hitler)〉 참고. 괜히 흥분해서 무슨 소린지도 모르고 지껄여댄 대목도 더러 있으니 적당히 걸러서 읽으시라. ㅡ,.ㅡa)

이택광은 모든 예술행위는 정치적이며, 순수예술 또한 마찬가지라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작품을 내놓고 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움베르토 에코)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그 정치성이 평면적이지 않다는 사실 또한 지적할 필요가 있다. 바그너와 관련지어 말하자면 "바이마르 공화국 좌파 지식인들과 독일민주주의공화국 바그너 학자들이 바그너를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예언가로 선언"(☞참고)했던 사실에서도 이것이 잘 드러난다. 내 주변을 돌아보아도 바그네리안으로 소문난 사람들 가운데 계급 이익에 충실한 몇몇 사람을 빼고 나면 대체로 진보 세력에 호의적이다. (김원철은 진보신당을 지지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술가나 예술 작품 자체가 아니라 예술가 및 작품을 둘러싼 담론이라 하겠는데, 이런 맥락에서 텔아비브에서 처음으로 바그너 음악을 지휘한 사람이 유대인이면서 그 누구보다도 자주 바그너 작품을 지휘한 다니엘 바렌보임이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참고: ☞〈‘행동하는 음악가’ 다니엘 바렌보임〉. 바렌보임과 에드워드 W. 사이드가 나눈 대화를 담은 『평행과 역설』이라는 책도 있는데, 한글 번역이 엉망진창이라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ㅠ.ㅠ)

그리고 이택광은 바그너와 관련해 매우 훌륭한 정치적 담론을 내놓았다.

그리고 바그너에게 책임을 묻는 그 행위를 확대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거론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야한다. 말하자면 나치에게 책임을 묻는 행위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행하는 만행에 대한 책임을 묻는 행위와 함께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책임을 묻는다'는 윤리적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당성이다.

이택광이 인상적인 대목이라며 인용한 동영상은 ☞《라인의 황금》 피날레, 불레즈 지휘에 셰로(Patrice Chéreau) 연출 ☞바이로이트 실황이다(☞ DVD 정보 참고). 내가 보기에 이 영상물에서 가장 멋진 대목은 ☞《신들의 황혼》 피날레다. 처연한 음악(이른바 '희생' 모티프), 흰색과 붉은색의 강렬한 대비, 객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담담한 눈빛을 보시라.

제 목:이 모든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 줄 ... 관련자료:없음 [6905] 보낸이:이정환 (andie ) 2002-01-14 17:10 조회:48

[이 모든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 줄 아십니까?]

불레즈의 신들의 황혼 맨 끝장면을 보면 라인의 처녀들이 브륀힐데가 돌려준 반지를 들고 환호하며 다시 라인강으로 사라지고 발할성은 불타오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대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객석에는 등을 보인채... 그들은 발할이 타오르면서 라인강의 모티브가 서정적으로 흐르면 모두들 하나 둘 씩 천천히 일어나면서 몸을 돌려 관객석을 바라다 본다.

담담하고 처연한 표정으로 ... 그들은 이렇게 관객들에게 묻는 듯 하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끝 맺음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라고....

*내가 예전에 말했듯이 반지의 주제는 사랑이다. 누구보다 바그너에 열광했던 히틀러는 기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바로 링의 전체를 가로지르는 일관된 주제. 즉, 진실되고 희생적인 사랑없이는 이 세상은 결코 평화로울수도 정의로울수도 없다라는 것을 ... 히틀러의 방법론은 어디에도 사랑이나 배려 정의가 없었다. 이 것이 그를 엄청난 전화로 몰고 갔고 결국은 비참하게 종말을 맞게 한다!

베를린이 함락되고 히틀러가 자살하던 날,

독일방송은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한채, 하루종일 '신들의 황혼'을 틀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것은 매우 상징적이고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독일은 결국 그 허위로 세워진 발할의 붕괴를 겪었고, 그 폐허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며 결국 민족의 재통일마저 이뤄냈다. 아직도 여러 문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독일의 유럽공동체내에서의 위치는 일본의 아시아에서의 리더십 부재와의 현실 (솔직히 일본이 그 가진 돈과 힘만큼 아시아의 맹주행세를 할수 있는가? 어림 없는 얘기다. 일본은 불분명한 전후처리로 인해 아시아에서 아직도 왕따 신세다) 과는 대조될만큼 독일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고, 그러한 변화를 다른 유럽 국가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다.

바그너를 들으면서 특히 링을 들으면서(아니 이제부턴 보고 들으면서 ^^; 홈씨어터 5.1채널 쥑입니다요) 아직까지도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바그너 텍스트의 위대함에 경탄을 금치 못하겠군요!

정말 반지 시리즈는 음악과 극 그리고 모든 그 이후 예술의 방향을 다시 점검하게 한 위대한 걸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그네리안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반지는 오늘도 나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 줄 아십니까' 라고....

바그네리안 앤디.

― 하이텔 '바그네리안' 게시판에서 퍼옴.


이 글과 관련해 김원철이 추천하는 글:

☞ 박노자, 비극의 상업화, 홀로코스트. 한겨레21, 2002.11.28.

☞ 이진, 이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 시트콤 속의 바그너

2009년 9월 23일 수요일

바그너 주요 작품과 추천 음반

※ 추천 음반은 순전히 저의 당파적 주관에 따라 선정하였습니다. 작품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해 음질이 나쁜 것들은 되도록 뺐습니다.


- 초기 -

《요정》 (Die Feen)
《연애금지》 (Das Liebesverbot)
《리엔치》 (Rienzi)

- 중기 -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
☞ 추천 음반: Karl Böhm (conductor) Bayreuther Festspiele 1971 DG
《탄호이저》 (Tannhäuser (und der Sängerkrieg auf Wartburg))
☞ 추천 음반: Wolfgang Sawallisch (conductor) Bayreuther Festspiele 1962 DECCA
《로엔그린》 (Lohengrin)
☞ 추천 음반: Georg Solti (conductor) Wiener Philharmonker 1986 DECCA


- 후기 -

《니벨룽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
《라인의 황금》 (Das Rheingold)
《발퀴레》 (Die Walküre)
《지크프리트》 (Siegfried)
《신들의 황혼》 (Götterdämmerung)
☞ 추천 음반: Daniel Barenboim (conductor) Bayreuther Festspiele 1991-92 Teldec
☞ DVD: 《라인의 황금》 / 《발퀴레》 / 《지크프리트》 / 《신들의 황혼》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 추천 음반: Karl Böhm (conductor) Bayreuther Festspiele 1966 DG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 추천 음반: Silvio Varviso (conductor) Bayreuther Festspiele 1974 Philips
《파르지팔》 (Parsifal)
☞ 추천 음반: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Berliner Philharmoniker 1980 DG

최종 수정: 2008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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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4.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9월 8일 화요일

이졸데는 왜 죽었을까?

1. 바그너스러운(?) 논리

   "바그너 작품에서 여자가 죽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
    - 어느 바그너 환자의 우스갯소리.

 

2. 산업재해(?) 논리

   "노래가 너무 힘들어서 부른 뒤 죽었다."
    - 고클래식 guity00님 의견. (2009년 9월 9일)



3. 쇼펜하우어스러운 논리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쇼펜하우어의 사상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궁극적 의지 부정의 상태'가 바그너 식으로 변용(?)되어 나타나며, '사랑을 통해 의지의 완전한 진정에 이르는 구원의 길'은 곧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 하라: ☞엄선애, "사랑의 죽음"을 통한 구원 - 리하르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小考, 뷔히너와 현대문학 제 21호.)

다음은 이졸데의 마지막 대사이다.

In dem wogenden Schwall,
in dem tönenden Schall,
in des Welt-Atems
wehendem All ---
ertrinken,
versinken ---
unbewußt ---
höchste Lust!


(Isolde sinkt, wie verklärt, in Brangänes Armen sanft auf Tristans Leiche. Rührung und Entrücktheit unter den Umstehenden. Marke segnet die Leichen. Der Vorhang fällt langsam.)


파도치는 물결 속에,
소리치는 울림 속에,
세상 숨결 불어오는
우주 속에
빠져들어,
가라앉아
나를 잊으리라
더없는 기쁨이여!


(이졸데는 변용된 듯 브랑게네 품에서 트리스탄 몸 위로 부드럽게 쓰러진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넋을 잃고 바라본다. 마르케는 주검에 축복을 내린다. 막이 천천히 내린다.)


(김원철 옮김.)

여기서 변용(verklärt; transfiguration)은 곧 '궁극적 의지 부정'을 통한 열반의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4. 실증주의적(?) 논리

김원철의 망상 속에서 탄생한 가설이다. 형이상학적 사유, 또는 불교적 해탈에 대한 강변으로부터 벗어나 구체적인 이졸데의 사망 원인을 찾자면 무엇인가 석연치 않다. 그런데 텍스트를 잘 살펴보면 한 가지 확실한 자살 수단을 연상해 낼 수 있다. 그것은 1막에 등장했던 독약이다. 이졸데가 가지고 있던 독약은 브랑게네의 개김(?) 덕분에 아직 사용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고, 3막에서 이졸데가 트리스탄을 찾아 오기 앞서 '수 틀리면 죽자!'라는 심정으로 그것을 품 속에 챙겨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음악적인 맥락에서 보면 '궁극적 의지 부정의 상태'가 마침내 시작되는 지점, 노골적으로 말해 성애의 육체적 쾌락이 정점에 이르는 지점은 "Welt-Atems" 부터이다. 이어지는 가사를 보라.

ertrinken,
versinken ---
unbewußt ---
höchste Lust!

빠져들어,
가라앉아
나를 잊으리라
더없는 기쁨이여!


독일어 실력이 뛰어나거나 또는 독일어 실력이 형편없더라도 독일어 텍스트를 열심히 따라가며 작품을 감상했던 사람이라면 여기서 낱말 두 개를 떠올리는 데에 어려움이 없을 줄로 믿는다. 바로 'trinken'(마시다)과 'Trank'(음료, 약)이다. 독약을 마시고? 옳거니. 그리고? 'unbewußt'는 몰아(沒我)로 풀이할 수 있겠으나 더 따지자면 의식을 잃는다는 뜻이다. 죽었군.

(최종 수정: 2009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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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7일 월요일

《니벨룽의 반지》와 《니벨룽겐의 노래》: 표기 문제

《니벨룽의 반지》, 《니벨룽겐의 반지》, 《니벨룽엔의 반지》 가운데 어느 것이 바른 표기인가에 대한 논란은 심심할 만하면 나오는 주제입니다. 최근에는 《니벨룽의 반지》로 표기가 통일되어 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고, 개인적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니벨룽겐의 노래》마저 《니벨룽의 노래》가 되어 버리는 부작용을 보고 이 부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Das Nibelungenlied》는 아시다시피 중세 문학입니다. 여기서 'Nibelungen'은 현대 독일어 문법과는 달리 단수 없는 복수형이며, 따라서 게르만 설화에서 이 단어는 언제나 니벨룽겐 종족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니벨룽겐의 반지》 또는 《니벨룽엔의 반지》가 옳다는 주장의 근거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바그너의 의도가 이것과는 어떤 차이점을 가지는가에 대해서는 시시콜콜 얘기하지 않겠습니다만, 어쨌든 《니벨룽의 반지》는 바른 표기가 될 수 있어도 《니벨룽의 노래》는 좋지 않은 표기라는 것입니다. 《니벨룽겐의 노래》 또는 《니벨룽엔의 노래》라고 해야 합니다. '겐'이냐 '엔'이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고, 실제 독일어 발음에 더 가까운 것은 '엔'일 것입니다만, 여기서는 표준 맞춤법에 따라 '니벨룽겐'이라고 썼습니다.

결론은? 《니벨룽의 반지》가 바람직한 표기이지만 《니벨룽겐의 반지》 또는 《니벨룽엔의 반지》도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니벨룽의 노래》는 좋지 않은 표기입니다. 《니벨룽겐의 노래》 또는 《니벨룽엔의 노래》라고 해야 옳습니다.

일천한 독일어 실력으로 떠들어 봤습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05년 9월 25일 씀. (원 출처는 김원철 옛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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