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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18일 월요일

쳄린스키 《인어공주》와 말러 교향곡 1번 《거인》, 실연을 이겨내는 젊은이의 초상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진에 실은 글입니다.
원문: http://g-phil.kr/?p=1429

▶ 사랑의 아픔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쳄린스키

인어공주는 왜 사람이 되려고 했을까요? 사랑 때문이라면 마녀를 찾아갔을 때 다른 것을 부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안데르센이 쓴 원작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인어공주가 참말로 원했던 것은 영혼이기 때문이랍니다.

구자범 지휘자 선생님은 쳄린스키가 교향시 《인어공주》를 쓰면서 '영혼' 얘기를 음악에 담았다고 생각해요. 쳄린스키는 알마 쉰들러를 짝사랑했지만, 알마는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했죠. 그런데 '알마'(Alma)는 스페인어 또는 옛 이탈리아어로 '영혼'이라는 뜻이래요. 라틴어 '아니마'(anima)에서 온 말이고요.

그러니까 영혼을 갈구하는 인어공주는 알마('영혼')를 사랑했던 쳄린스키 자신과 닮알습니다. 끝내 영혼을 얻게 되는 인어공주처럼, 쳄린스키도 끝내 알마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작품을 썼던 것이지요.

원작에 나오는 영혼 이야기가 잘 기억나지 않으세요? 이참에 진짜 줄거리를 제대로 알아 볼까요?

바닷속 왕국에서 살던 인어공주는 언니들에게 말로만 듣던 물밖 세상을 동경해요. 그리고 15살 생일을 맞아 드디어 물밖으로 나옵니다. 물위에 배가 떠있고 사람들이 춤추고 불꽃놀이도 해요. 사람들 가운데 왕자님이 가장 멋져요. 그런데 밤이 되면서 폭풍이 몰아치고, 왕자님은 물에 빠져 죽어가고, 인어공주가 왕자님을 구해서 바닷가로 데려가요. 그리고 가까운 신전에서 온 아가씨가 나타날 때까지 왕자님을 지켜 봐요. 정신을 잃은 왕자님은 그때까지 인어공주를 보지 못해요.

인어공주는 할머니를 찾아가, 사람들은 물에 빠지지만 않으면 영원히 살 수 있느냐고 여쭈어요. 할머니는 이렇게 말해요. 300년을 사는 인어와 달리 사람은 훨씬 일찍 죽어요. 그런데 인어는 죽으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지만, 사람은 죽으면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살아요.

인어는 왕자를 그리워하고 사람의 영혼을 부러워한 나머지 마녀를 찾아가요. 그리고 인어 꼬리를 사람 다리로 만들어 주는 약을 얻는 대신 혀를 잘라 주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잃어요. 마녀는 이렇게 경고해요. 사람이 되면 다시는 바다로 돌아올 수 없어요. 약을 마시면 다리가 생겨서 누구보다도 멋진 춤을 출 수 있지만, 걸을 때마다 칼에 꿰뚫리는 듯한 고통이 뒤따라요. 영혼을 얻으려면 진실한 사랑을 찾아 입맞춤을 하고, 사랑을 얻고, 그 사람과 결혼해야 해요. 그러면 그 사람의 영혼 일부가 인어공주에게 흘러들어가요. 만약 그 사람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다음날 아침 해뜰 무렵 인어공주는 죽어서 물거품이 돼요.

인어공주는 약을 마시고 다리를 얻어 왕자를 만나요. 왕자는 인어공주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인어공주는 고통을 참고 왕자와 춤춰요. 그러나 왕자의 아버지는 왕자한테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하라고 말해요. 왕자는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지만, 물에 빠졌다가 깨어났을 때 만났던 여자가 그 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바꿔요.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요. 인어공주는 절망에 빠져 동트기를 기다려요. 그때 인어공주의 다섯 언니가 찾아와 이렇게 말해요. 다섯 언니는 마녀를 찾아가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 주고 마법이 깃든 칼을 얻었어요. 인어공주가 그 칼로 왕자를 찔러 죽이고 피를 다리에 적시면 다시 인어가 되어 바다로 돌아갈 수 있어요.

인어공주는 끝내 왕자를 죽이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물거품이 돼요. 그런데 인어공주는 여전히 밝은 햇살을 볼 수 있었어요. 햇살 사이를 투명한 모양으로 떠다니는 공기의 딸들(Luftens Døttre; daughters of air)이 어리둥절해 하는 인어공주에게 이렇게 말해줘요. 인어공주는 영혼을 얻고자 온 마음을 다 바쳐 노력했기 때문에 공기의 딸이 되었어요. 앞으로 300년 동안 착한 일을 하면 영혼을 얻어 하늘나라에 갈 수 있지요. 그리고 착한 아이를 찾을 때마다 영혼을 얻기까지 걸리는 기간이 한 해씩 줄어들고, 나쁜 아이를 만날 때마다 흘려야 하는 눈물 한 방울에 하루씩 기간이 늘어난답니다.

▶ 청년 말러가 좌절을 딛고 일어선 이야기

쳄린스키가 그토록 원했던 '알마'라는 여인은 다름 아닌 말러와 결혼했습니다. 말러는 마흔이 넘어서 꽃다운 알마와 결혼한 행운아였지만, 그런 말러도 쳄린스키 나이 때에는 실연으로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교향곡 1번에는 그런 경험이 녹아 있지요.

구자범 지휘자 선생님께서 어떤 모임에서 말러 교향곡 1번에 관해 강연을 해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쉽게 간추려서 제가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게요. 교향곡 1번은 말러가 직접 가사를 쓴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라는 연가곡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말러는 교향곡 1번 악장마다 표제를 붙였다가 없애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습니다.

제1악장 : 동틀 무렵,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풍경처럼 몸 속 깊은 곳까지 시원해지는 오스트리아의 산과 들이 보입니다. (악보에는 "자연의 소리처럼"이라는 나타냄말이 있습니다.)

뻐꾸기 소리가 들리고, 꽃들이 노래하고, 멀리서 기상나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때 트럼펫이 무대 밖에서 연주합니다. 그리고 좀 있다가 조용히 무대에 입장하지요. 연주에 지각한 사람이 아니니 오해하지는 마세요.)

청년 말러가 나타납니다. 이때 말러의 연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가운데 "아침 들판을 걸었네"에 쓰였던 선율이 나옵니다. 풀잎에 이슬이 반짝이고 새들과 초롱꽃이 "안녕하세요! 아름다운 세상이에요!"하고 인사하는 그곳에서 청년 말러는 사랑을 잃고 홀로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이제 나의 행복이 다시 올까? 아니! 아니! 다시는 내게 행복이 꽃피지 않으리!"

그러나 찬란한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것을 본 말러는 새로운 희망을 얻습니다. 이제 그 여인을 잊을 수 있을 듯합니다. 가슴을 활짝 펴고, 산을 내려가자! 뛰자! 뛰자!

2악장 : 랜틀러(ländler)라는 형식의 춤곡입니다. '땅'을 뜻하는 영어 'land'와 말뿌리가 같지요. 시골 사람들이 춤추며 즐기는 장면입니다. 오늘은 결혼식이 있는 날. 산에서 마을로 내려온 청년 말러는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사내와 혼례를 올리는 모습을 보며 또다시 가슴 아파합니다.

호른 소리와 함께 청년 말러의 추억이 현실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미뉴엣과 짝을 이루는 '트리오'(Trio)입니다. 여기서는 '랜틀러'와 짝이지요. 너무나 아름다운 선율, 사랑에 빠져 행복했던 추억이 절로 떠오르는 음악입니다. 이윽고 호른 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현실이 되돌아옵니다.

3악장 : 청년 말러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더블베이스가 약음기를 끼고 괴상망측한 음색으로 흐느낍니다. 그런데 선율이 어째 익숙하지요? "자크 수사님"(Frère Jacques)이라는 동요입니다. 독일어권에서는 "마르틴 수사님"(Bruder Martin)이고, 영어권에서는 "요한 수사님"(Brother John)이지요. "아 유 슬리핑, 아 유 슬리핑" 하는 영어 가사를 기억하시는 분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말러는 이 유명한 동요를 교향곡에 쓰면서 선율과 리듬과 음색을 고약하게 비틀어 놨습니다. 즐겁게 놀 때 부르는 노래를 장송행진곡처럼 만들다니, 지독한 반어법이지요. 이 선율을 오케스트라가 부풀립니다. 이때 악보에는 "뻔뻔하게"(Keck) 같은 괴상한 나타냄말이 나옵니다.

이렇게 일그러진 동요 선율이 흘러 서글픈 음악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싸구려 길거리 음악, 서커스 광고, '뽕짝'(?) 음악이 끼어듭니다. 청년 말러의 의식세계가 현실과 뒤섞이고, 뒤틀리고, 일그러지는 대목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절망에 빠져서 방황하는데 마침 길거리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요.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 "자~ 애들은 가라!" "기임~밥!" 청년 말러는 세상에서 홀로 버려진 듯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삶의 희망을 잃었던 청년 말러는 보리수 그늘에서 문득 깨달음을 얻습니다. 마치 싯다르타처럼요! 이때 연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가운데 "내 연인의 푸른 눈동자"에 쓰였던 선율이 나옵니다. "길가에 보리수 한 그루 있어, 그곳에서 처음으로 단잠을 잤노라! 나에게 꽃 뿌리는 보리수 아래서 삶을 잊었노라. 모든 것이 다시금 좋아지리라! 사랑도, 고통도, 세상도, 꿈도!"

그러나 비틀린 동요 선율이 다시 나타납니다. 청년 말러는 아직 참된 평안을 얻지 못했습니다.

4악장 : 폭풍우가 몰아칩니다. 금관이 마치 아가리를 벌린 지옥 입구처럼 으르렁거리는 이 대목은 사실 바그너가 《파르지팔》에서 썼던 '성배' 음형, 또는 리스트가 여러 작품에서 썼던 '십자가' 음형을 비틀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 말러는 지옥을 벗어나 다시 깨달음을 얻고, '지옥' 음형이 살짝 바뀌어 '천국'의 성스러운 찬가가 됩니다. 곡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고양감이 음악을 뒤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장된 고양감'만큼이나 거짓된 승리, 불완전한 깨달음입니다.

1악장에 나왔던 "자연의 소리"가 다시 나옵니다. 그러나 이내 잔뜩 뒤틀린 '현실'이 반격해 옵니다. 몇 차례에 걸친 작은 깨달음이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빛이 바래는 모습은 마치 불교의 가르침 같습니다. 깨달음에는 수많은 단계가 있으니 참된 깨달음을 얻으려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고요.

청년 말러의 참된 깨달음은 '천국' 음형과 함께 나타나되, 앞선 거짓 승리와 달리 과장되지 않습니다. 악보에는 "승전가"라고 나옵니다. 호른 연주자들과 일부 트럼펫·트롬본 연주자가 말러의 지시대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승리의 팡파르를 연주합니다.

▶ 거인(Titan)과 초인(Übermensch)

말러 교향곡 1번에는 '거인'(Titan)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인족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구자범 지휘자 선생님은 그보다는 정신적인 의미,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뜻한다고 생각하시더군요.

이렇게 생각하면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한 초인(Übermensch)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음악에 나타나는 '깨달음'의 성격이 좀 다른 듯하기는 하지만요. (박순영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의 설명을 빌자면, "니체가 말하는 독일어의 위버멘쉬(Über-mensch)는 다른 차원으로 이행하는, 저편으로 넘어가는(Über- gehen), 자신을 극복하려는 사람"이며, “어린아이처럼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목표를 향해 몰입하는 단계”가 참된 깨달음의 단계입니다.)

2010년 10월 26일 화요일

말러 교향곡 10번 (데릭 쿡 판본) ― 제임스 드프리스트 / 서울시향

2010-10-07 오후 08:0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 제임스 드프리스트 James DePreist, conductor

말러, 교향곡 제10번 (데릭 쿡 버전 Ⅱ)
Mahler, Symphony No. 10 (Deryck Cooke ver. 2)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입니다. 이번에는 편집을 조금 이상하게 해서 마치 김문경 씨가 지어낸 말을 제가 표절해 쓴 것처럼 되어버렸더군요. ㅠ.ㅠ 새삼 밝혀 두지만, '사나운 브람스'와 '흰 건반 베베른'은 제가 아니라 김문경 씨가 지어낸 말입니다.


구스타프 말러는 낭만주의 마지막 세대 작곡가이자 현대음악 시대를 여는데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리고 현대음악과 관련해 말러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현대적인 관현악법에서 나오는 현대적인 음색이다. 음악학자 달하우스는 말러 교향곡 1번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돈 후안》이 발표된 1889년을 음악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꼽으며 '음악적 모더니즘'이 이때부터 비롯했다고 보는데, 현대적인 관현악법이 두 작품에서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음색이야말로 현대음악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현대음악가 말러'가 본격적으로 재조명 받은 때는 20세기 후반부터다. 불레즈 등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이러한 생각을 이끌었고, 몇몇 작곡가는 지휘자로도 활동하며 새로운 말러 해석을 내놓았으며, 현대음악에 관심 있는 전문 지휘자들이 함께 하며 큰 흐름을 만들어 갔다. 오디오 기술이 발전하고 '마크 레빈슨' 등 현대적인 소리를 뽐내는 명품 오디오 브랜드가 성공을 거두면서 '현대음악가 말러'가 폭넓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바탕 또한 마련되었다.

음악평론가 김문경은 말러를 낭만주의자로 보는 전통적인 말러 해석을 '사나운 브람스' 계열이라 이름 붙였으며, 번스타인, 텐슈테트, 바비롤리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현대적인 말러 해석은 '흰 건반 베베른' 계열이라 할 수 있으며 불레즈, 길렌, 샤이, 마이클 틸슨 토머스 등을 대표적인 지휘자로 꼽을 수 있다.

이번 서울시향 연주회에서 말러 교향곡 10번을 지휘한 제임스 드프리스트는 '흰 건반 베베른' 계열 해석을 선보였다. 숨어있는 성부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드러내며 다채로운 음색을 잘 살렸다는 대목에서 그렇게 볼 수 있겠는데, 그러나 소리를 예쁘게 다듬는데 신경을 많이 써서 현대음악다운 무표정함이 묻어날 때는 드물었다.

때때로 목관 악기로 맛깔스런 앙상블을 살려내어 '식물성 음색'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를테면 2악장에서 바그너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를 인용한 듯 목관 악기가 아기자기하게 얽히는 대목이 그랬으며, 이곳에서 서울시향 목관악기 연주자들은 매우 훌륭한 앙상블을 만들어 냈다.

말러 음악에 곧잘 나오는 신경질적이고 때로 악마적이기까지 한 음형은 지휘자가 달콤쌉쌀한 느낌을 앞세우고 예쁘게 다듬은 음색 속에 녹아서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클라리넷 부수석 임상우가 연주한 E♭조 클라리넷이나 부악장 웨인 린이 연주한 독주 바이올린 등이 좀 더 되바라진 소리를 내지 못한 대목은 조금 아쉽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달콤한 슬픔'이 가장 서럽게 흐르는 5악장에서 커다란 효과를 거두었으며, 마치 1악장부터 4악장까지가 모두 5악장을 돋보이게 하는 긴 전주곡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플루트 수석 박지은이 연주한 칸틸레나(cantilena) 선율은 너무나 애달팠고, 김미연이 연주한 큰북 소리는 심장을 내려치는 듯했다. 코다에 바로 앞서 칸틸레나 주제로 크게 부풀리는 대목에서는 누구라도 울컥하는 느낌을 받았으리라.

5악장 마지막에 현이 부풀어 오르는 이른바 '알므슈!'(Almsh!) 대목은 말러답지 않게 너무 단순하고 뜬금없다고 느껴진다. 이것은 말러가 남긴 스케치에 그리 쓰여 있다고 하지만, 만약 오케스트레이션까지 말러가 완성했다면 이 대목을 조금 더 매끄럽게 이어지도록 어떻게든 손을 보지 않았을까. 이날 지휘자는 크레셴도를 써서 성긴 이음매를 만들었으나 서울시향이 만들어낸 크레셴도가 썩 매끄럽지는 않았다. 루바토를 좀 더 쓰거나 해서 부드럽게 다스렸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말러 교향곡 10번은 4단짜리 약식 총보로는 말러가 끝까지 완성했으며, 데릭 쿡 등이 완성한 판본에서 오케스트레이션과 대위구 첨가 수준을 넘어 완전히 새로 쓰여진 곳은 없다. 이런 까닭에 글쓴이는 이 작품을 사실상 완성된 악곡으로 보는 관점에 동의해 왔다. 그러나 말러를 '음악적 모더니즘'의 아버지로 본다면 이 작품에 '음색'이라는 핵심 요소가 미완성이라는 사실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완성판 녹음을 남긴 지휘자가 대부분 '흰 건반 베베른' 계열 지휘자인 까닭 또한 음색에 빈 곳을 메울 아이디어를 그들이 나름대로 갖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1악장만 연주해야 옳다는 뜻은 아니다. 데릭 쿡 판본을 가장 정통성 있는 '원전판'(Urtext) 악보처럼 여기되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판본이 꾸준히 시도되고 소개되어야 한다. 악보를 파기하라는 유언을 남긴 말러가 이것을 어찌 생각할지는 또 다른 문제이겠으나, 그리 따지자면 죽은 작곡가가 쓴 일기와 편지 따위를 연구하는 일 또한 죄스러운 일일 터이다. 어차피 관음증적 욕망을 떨치지 못한 동반자 의식을 지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열린 텍스트와 열린 마음이다. 카펜터, 마제티, 바르샤이, 또 다른 판본은 어떨까?

2010년 1월 20일 수요일

말러 교향곡 2번 5악장 노랫말 ― 김상봉 교수 옮김

출처: (원 출처는 광주시향 카페인 듯)
http://blog.goclassic.co.kr/chachaung/1263949998

관련 기사: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119021009

독일어 가사와 나란히 편집하려고 했다가 포기. 생각보다 많이 고쳤구나. ;; 실제로 노래 부를 수 있게 옮기려다 보니 이렇게 된 듯.

* * *

지휘자 구자범이 광주에서 518 때 연주할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5악장 우리 말 가사.

역사 -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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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자, 일어나!
내 벗, 내 님,
새 아침에
영원한 생명,  영원한 생명,
그 밝은 빛, 그 빛 널 비추리.

우리 살리려, 너 피 흘려,
우리 살리려, 너 피 흘려.

새 날, 새 아침,
새 날, 새 아침에
네 앞에 눈부신 빛 비추리.

오 그대, 내 사랑 그대.
너 슬퍼하지 말라.

네 꿈, 오 네 꿈,
네가 꿈꾼 세상
이제 우리가 이루어 가리.

오 그대,
너 뜻없이 산 것 아니리.
뜻없는 눈물도 아니리.

빛을 따른 자, 다 죽었으나,
모두 다시 살아나리.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
예비하라! 예비하라 새 삶을!

오 고통스런 내 삶,
나 외롭지 않네.
오 어두운 저 죽음,
나 두렵지 않네.

나 높이 날아 오르리라,
새 날, 새 세상 향해
사랑 날개로,
참 빛, 눈 부신 그 곳으로.

나 높이 날아 오르리라,
사랑 날개 타고.
사랑 날개 타고 높이 날아 오르리라.

살기 위해 죽으리라!
살기 위해 죽으리라!

일어나!
자, 일어나!
내 사랑아, 너 일어나!

어둠을 뚫고,
어둠을 뚫고,

한 빛, 한 빛,
한 빛 되어 살아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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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1. 이 5악장 전에 앨토 솔로로 불리는 4악장의 제목이 "Urlicht" .
즉,  '참 빛' 혹은 '한 빛' 입니다.
광주도 '빛 고을' 이라는 뜻인데...
광주시향 카페에 4악장 가사는 안 올라와 있네요.
 
2. 공교롭게도 말러는 1911년 "5월 18일"에 서거했습니다.

2010년 1월 9일 토요일

2010년 말러 교향곡 연주 일정(국내)

☞다음 말러 카페에서 ☞'그루터기'님이 올려주신 일정을 ☞'aftermahler'님이 엑셀 파일로 정리했고, 이것을 제가 구글 오피스로 옮겨서 아무나 편집할 수 있게 했습니다.

아무나 편집할 수 있다고 장난치면 안 됩니다. ^^


나중에 붙임. 누가 알맹이를 날려 먹었네요. 아놔! -_-;;

그래서 편집 제한 걸어놓은 문서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편집하고 싶은 사람은 댓글 등으로 구글 아이디를 알려주세요. 그러나 제가 아는 사람한테만 권한 드립니다. -_-^

댓글로는 비밀글이 안 되는데, 아이디를 공개된 곳에 밝히기 뭣한 사람은 방명록에 써주세요.

2009년 12월 28일 월요일

정명훈 '말러 때문에 지휘자 됐다.' 발언 진위 논쟁

― 교향곡을 연주해 보고 싶어서 지휘자가 됐다면서 말러 등을 예로 들었는데 언론이 왜곡했다.
― 아니다, 프랑스에서 인터뷰로 그런 말 했다.
― 베토벤 할 때에는 베토벤 때문에 지휘자 됐다고 했다.

원문 링크:
http://gall.dcinside.com/list.php?id=classic&no=56820

프랑스 인터뷰 링크:
http://www.resmusica.com/article_1055_musique_symphonique_myung-whun_chung_paris_gustav_mahler_l_elan_vers_l_infini.html
(문제 발언: "je suis devenu chef d'orchestre pour diriger Mahler")


2009년 4월 20일 월요일

개파(Durchbruch)

옛날에 고클래식에 썼던 글 퍼옴:
http://blog.goclassic.co.kr/wagnerian/1151372978

원래 아래 글에 이어지는 글이었음:
http://blog.goclassic.co.kr/wagnerian/1151252449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의외로 제대로 설명해놓은 곳을 찾기 힘드네요. "Durchbruch"는 영어로는 "breakthrough"인데, 우리말로는 개파(改破) 또는 파현(??)으로 번역됩니다. 원어나 영어는 쉬운 말인데 우리말 번역어는 어려운 한자어 조합이니 좋지 않군요.

김문경씨는 말러 교향곡 1번 1악장의 개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f 단조로 대변되는 지옥의 영역은 피날레에서 따온 부분으로 되어 있다. 피날레의 제1주제가 예시되고 음산한 분위기 사이로 트럼펫의 팡파르가 삽입된다. 불안한 크레센도가 막바지에 이를 때 갑자기 심벌의 광채와 함께 트럼펫이 팡파르 주제를 크게 외치며 D장조의 갑작스런 클라이맥스가 도래한다(악보 14. 350-353마디). 이 부분을 아도르노는 '개파(改破, Durchbruch)'란 특수 형식으로 설명하였다. '개파'란 말러의 음악 속에 나타나는 급전환을 의미하며 아도르노는 이 부분을 "앞서의 모든 교향적 울림과 그에 동반되는 음악적 고조상태와의 균형도 전혀 이루지 못하는 음의 폭발이 이루어져 마침내 장막을 찢어버린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개파는 '유토피아로의 이행'을 의미하며 이 '유토피아'는 성취될 수 없는 가상의 것으로 규정되고 있다.

그런데 아도르노의 이런 심오한 철학에서 한발짝 물러나서 보면 '개파' 부분은 '순간적인 영역 이동'과 '바그너적 효과'의 결합으로 볼 수도 있다. 이 '개파' 부분은 지옥의 영역에서 유래한 '불길한 감7화음'에서 천국의 영역인 D장조의 '승리의 팡파르'로 잠시의 지체도 없이 바로 연결되고 있다. 베토벤은 환희로 나아가는데 있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예를 들어 교향곡 9번의 피날레에서의 저현의 레치타티보) 말러는 마치 축지법을 쓴 듯 영역을 자유로이 이동한다. 또한 심벌즈, 트라이앵글, 베이스 드럼의 갑옷으로 치장하여 등장하는 이 급전환은 브람스의 논리적 구축보다는 바그너의 효과와 초자연적 마법의 세계와 더 가깝다. 마치 <반지>에서 돈너가 망치로 내려치자 무지개 다리가 생기고 보탄이 창으로 내려치자 불꽃이 이는, 그런 종류를 상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 김문경, 『구스타프 말러 - 방랑과 뿔피리』 서울: 관훈기획, 2004. pp.117-118.

저는 '개파'에서 ☞바그너적 효과를 얘기한 김문경씨의 설명이 핵심을 꿰뚫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음악사적으로 볼 때 ☞바그너로부터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고, 음악 내적인 부분을 좀 더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은 요소를 최대한 활용해서 "순간적인 영역 이동"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먼 조성으로의) 전조
- 화성 진행 맥락의 단절적 변화
- 음정의 도약에 의한 모티프 변형
- 아고긱과 뒤나믹, 텍스처의 일탈적 변화
- 각종 타악기를 동반한 음색의 변화

도움이 되었기를.


spinozian: 'Durchbruch'는 중세 신비주의 수도사 마이스트 에크하르트의 중요한 개념이지요. 동양의 선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아주 중요하구요.06/06/27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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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nozian: 아도르노가 썼든 누가썼던, 그리고 음악에 적용한다고 해도 결국 철학적 의미와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보통 '돌파'라고 옮기지요. 심플한 말이 이미 있는데 '개파'라고 옮기는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06/06/27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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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gnerian: 그렇군요. 앞으로는 '돌파'라고 해야겠습니다.06/06/28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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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는 브람스와 바그너를 모두 계승한 진테제

옛날에 고클래식에 썼던 글 발췌 인용:

브람스와 대척점을 이루는 작곡가로 흔히 바그너를 꼽습니다. 브람스가 논리와 이성의 세계에 속한다면 바그너는 신화와 마법의 세계에 속합니다. 말러는 처음에는 바그너 중력권에 있었다가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브람스적 요소를 받아들인 케이스죠. 베토벤은 이들 작곡가 모두를 잉태한 아버지(어머니)에 해당하고요. 사견입니다만, 그래서 저는 "베토벤의 적자"를 가리기 위한 '투쟁 구도'를 이렇게 봅니다. 베토벤의 정신을 계승한 것은 바그너, 베토벤의 형식을 계승한 것은 브람스, 바그너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브람스를 수용하여 진정한 계승 구도를 완성한 것이 말러. 베토벤이 고전주의를 완성하고 낭만주의로 가는 문을 열어젖힌 사람이라면, 말러는 낭만주의에서 20세기 음악으로 가는 다리가 된 사람입니다. 다소 무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조만간에 의견을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

wagnerian: 제 주장을 오해하실 분 있으실까 봐 굳이 덧붙입니다. 브람스가 이성과 논리의 세계에 속한 작곡가라는 말은 브람스의 음악이 머리로 듣는 음악이며 감성과는 담을 쌓은 작곡가라는 말과는 전혀 다릅니다. 브람스의 음악도 훌륭한 감성을 담고 있지요. 단지 그 감성의 이면에는 치밀한 논리가 받쳐주고 있는 겁니다. 앞뒤 가리지 않는 마스터베이션보다 잘 정제된 감성이 훨씬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그너류의 음악도 얼핏 보기에는 중구난방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 치밀하게 다듬어진 것입니다.

- http://blog.goclassic.co.kr/wagnerian/1166074874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6.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8년 10월 3일 금요일

서울시향 2002년 말러 교향곡 5번 연주회 평 모음

서울시향이 개편 전에 어땠는지를 잘 보여준 이른바 '말러 5번 사건'
연주자는 연주로 말하는 법.

여러 얘기들 중에서 많은분들께서 지적하신 서울시향의 관객들을 무시해버린 무성의한 연주태도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휘자 곽승씨 마저도 연주도중 지휘를 포기해버린 사태에 대해서
과연 서울시향 단원들이 할 말이 있을까요?

 

각 악기군의 긴장된 독(獨)주,
마치 미궁을 헤매는 교향악단의 모습같았습니다.
다들 목격하셨겠지만,
오죽했으면 초반에 의욕이 넘쳐보이던 지휘자께서 지치고 무기력해진
모습을 보였겠습니까.

 

다들 아주 부드러운 표현들을 쓰시는군요.
'아쉬움'이란 건
더 나은 연주를 기대할 수 있었을 때 쓰는 표현이 아닐지...
정말 간만에 좋은 분들과 얘기 나누어서 즐거웠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군요.
아니, 할 말은 많은데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2007년 10월 24일 수요일

불레즈-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말러 8번

딴 짓 하면서 설렁설렁 들어보고 했던 짧은 생각들:

연주 자체가 그닥 잘된 것 같지는 않으나 곡이 워낙 좋으니 그냥저냥 좋게 들림. 군데군데 역시 불레즈다 싶은 참신한 해석이 돋보이지만 호소력을 갖도록 큰 흐름 속에 녹여내지는 못하고 어째 좀 헐렁하다 싶음.

전에는 들을 수 없던 오르간의 극저음에 전율함. 이 녹음이 특별한 것인가 아니면 얼마 전에 들여놓은 앰프의 위력인가. @.@;; 다른 음반 들어보려다가 귀찮아서 관둠.

accente 섹션 직전에 테너가 "lumen, lumen" 하는 부분은 원래 다른 성부에 가려서 잘 안 들리는 게 정상인데, 불레즈는 다른 성부 다 죽여놓고 테너가 포르테로 질러버린다. 황당~ 다크 포스가 지배하는 분위기에서 테너가 무슨 선지자처럼 "빛이여! 광명이여!" 하는 부분인데 여기서는 선지자가 아니라 걍 메시아다. 님하, 과장도 정도껏 쫌! -_-;; (전에 서울대 연주 때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 부분이 사실 끝내주게 멋진 부분이라 내가 때맞춰 테너 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그 쌤 나랑 눈 마주치고는 씩 웃으면서 크레셴도를... 아놔..-_-;)

영광의 성모 떠오는 장면에서 하모니움 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 게다가 현이 달콤하지 않고 서늘한데다 군데군데 글리산도꺼정..; 영광의 성모의 정체는 처녀 귀신? ㅋ

영광의 성모 노래하기 직전에 첼레스타 살리는 건 어떤 면에서는 샤이 판보다도 낫다. 역시 불레즈인가..@.@;; 성모 노래할 때 하모니움 소리 또렷하게 들림. 하모니움이야말로 성모가 가진 신성력(또는, 귀신력-_-)의 정수라는 것인가.

테너, 물건이다! @.@;; 컨트롤이 조금만 더 자연스러우면 전설급 가수로도 손색이 없다. 이름이 요한 보타구나. 기억해두자. 보타야 보타야 너 바그너 안 할래? 음... 찾아봤더니 트리스탄 바렌보임 판에서 멜롯이었구나. 거러췌, 좀 있으면 바이로이트에서도 제대로 뜨겠네!

다른 가수를은 그냥 그랬는데 막판에 소프라노들이 소토 보체를 꽤 그럴싸하게 한 건 좋았음.

생각나는 건 이 정도. 제대로 집중해서 들으면 재미난 데가 꽤 많을 듯...

2005년 7월 12일 화요일

브람스와 말러: 논리력과 상상력

고클래식에 있는 어떤 글을 읽고 드는 생각이 있어 씁니다. 글에 나타난 세 개의 논점을 대변하는 문장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말꼬리 잡는 방식과 비슷해 보여서 썩 마음에 들지는 않군요. 원문을 읽지 않으신 분은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브루크너의 문제는'방법론'에 있어서의 다양성이 베토벤이나 브람스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 브루크너의 음악이 형식 논리로 보면 좀 엉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음악을 판단하려는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서울과 의정부시가 맞붙은 곳에
자리잡은 이 집은 가난한 집이다
그래도 뜰은 볼 만하다
감나무와
버드나무와
무궁화꽃이 피며
이름도 모를 잡나무가 있다

장모님과
여고 삼 년인 영진과
마누라 그리고 셋방 든 홍씨와
합해서 일곱 명이 살고 있는 이 집은
뜰로서 부끄럽지 않다.

언제나 푸르고 녹색인 뜰
맑고 곱고 아담한 뜰

나는 생각나면
이 뜰에서 쉰다
그 포근함이며
깨끗한 공기여


이 시 어떻습니까? 뭔가 좀 엉성하다고요? 맞습니다. 제 집 뜰이 "언제나 푸르고 녹색"이라는데, 언제부터 감나무, 버드나무, 무궁화 따위가 상록수였습니까? 그리고 버드나무까지 있는 뜰이 아담하기는 뭐가 아담합니까? 그리고 시에 나타난 인물은 주인공까지 합해 다섯 명인데 엉뚱하게도 일곱 명이라고 우깁니다. 시를 쓴 사람은 간단한 산수도 할 줄 모른답니까? 뭐 이따위 엉터리 시를 인용했느냐고요? 네, 이야기 형태의 시에서 앞뒤 매무새가 맞지 않다면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볼까요?


"(…) 시인은 실제 뜰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2연을 보면 그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감나무는 장모님과 대응되고(감나무의 이미지, 특히 노인의 피부와 감나무 껍질의 질감의 유사성을 생각해 보라), 버드나무와 여고 삼 년생인 영진이 대응되고(버드나무는 옛부터 나긋나긋한 젊은 여자에 대한 비유로 흔히 사용된다), 무궁화꽃과 마누라가 대응되고(시인에게 꽃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식구는 마누라뿐이다. 그리고 나이든 마누라는 무궁화처럼 오래 된 꽃이다), 이름도 모를 잡나무는 셋방 식구들과 대응된다(셋방 식구들의 이름은 잘 모른다).

이러한 대응을 잘 살펴볼 때, 시인이 정말로 자랑하고자 하는 것은 꽃나무로 이루어진 정원이 아니라 사랑스런 가족들로 이루어진 가정의 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셋방 식구들까지 잘 어울려 사는 훈훈한 가정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3연에서 언제나 푸르고 밝고 곱고 아담한 집안의 분위기가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시인은 삶에 지치면 가족의 포근한 품안에서 쉰다고 말한다. 마지막 구절 "그 포근함이여 / 깨끗한 공기여"에서는 실제 포근함과 깨끗함에 언어의 껍질을 깨고 독자의 마음에까지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다. 변두리의 가난한 집이지만 그 집안의 분위기는 천금으로도 바꿀 수 없는 포근함과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 (이남호)

- 오탁번., "둥근 과일과 떠오르는 달", [현대시의 이해]. 서울: 나남신서 (1998). 40-41쪽.

참고로 위 시는 천상병의 <우리집 뜰>입니다. <귀천>은 다들 아시죠?

음악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형식논리를 잣대로 삼을 수도 있지만 상상력도 훌륭한 잣대가 될 수 있습니다. 둘 가운데 어느 것을 중요시할 것인지는 각자의 가치판단에 따를 일입니다만, 한 가지만을 절대시하려는 태도는 곤란하겠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음악 전공자들이 기교는 뛰어나지만 음악적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곧잘 듣습니다.

*

"말러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구성력'입니다. 쉽게 말해 그의 곡은 '웅장하고 멋지게 쓰여진 여러 조각조각들의 모임'이죠."

--> 브루크너와는 달리 말러의 '구성력'과 관련해서는 위 주장에 쉽게 동의하기 힘듭니다. 말러의 음악을 악식론적으로 분석하려면 곤란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석의 기준이 베토벤과 브람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브루크너는 너무 단순해서 탈이고 말러는 너무 변화가 커서 탈이니 적당한 것이 좋겠다면, 그 '적당함'의 기준은?) 왜 그래야 할까요? 바흐를 기준으로 하면 안 될까요? 옳거니, 바흐를 기준으로 하면 베토벤도 브람스도 뛰어난 작곡가입니다만, 말러를 그보다 못한 작곡가라 말하기는 힘들어집니다. 말러는 특히 교향곡 9번 3악장을 작곡하면서 말러의 작곡기법을 깔보는 사람을 조롱하려는 의도를 담았다고 합니다. 대위법으로 말러 교향곡 9번 3악장과 견줄 작품은 과연?

베토벤을 절대 기준으로 놓고 보더라도 여전히 논란거리는 남습니다. 악식론적으로 따져서 곤란한 것은 말러 뿐 아니라 베토벤도 마찬가지거든요. 이를테면 "템페스트" 소나타 1악장에서 제시부의 경계는 어디일까요? 이에 대해 학자들이 일치된 의견을 내는 것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화 하나:

김원철: 마디 20까지가 인트로(intro)이면서 그 속에 제시부에 사용된 주제가 다 들어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선생님: 나름대로 그럴 듯하기는 한데, 참 파격적인 악식론이로구나. 그렇다면 이것을 소나타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김원철: 모르겠네요. ㅡ,.ㅡ (까짓 거 소나타 형식이 아니라고 해도 그만이죠, 뭐. ㅡㅡ;)

"템페스트" 소나타 악보 보기

*

"즉, 필요한 최소한의 소리를 쓰는게 아니라 그의 곡 특유의 '표현력'을 위한다는 목적 아래 가급적 많은 악기(쓸데없지 않은 이상인 부분이 더 많긴 하지만..)가 매 순간 사용되죠."

--> 역시 기준점의 문제입니다. 말러의 관현악법에 낭비가 있다면 그 기준은? (아아, 여기서 말러의 초기 교향곡을 예로 들지는 마세요. 젊은 작곡가는 누구나 허영심이 있기 마련입니다. 허영심을 따지자면 바그너의 <리엔치>야 말로.. ^^;)

*

마지막으로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제기. 서양음악의 형식론은 음악에 유기성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런데 꼭 그래야만 할까요? 길게 쓰기 귀찮으니 예전에 썼던 글 하나만 링크 걸고 도망갑니다. 음악의 눈 (樂眼)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5.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덧글 모음:

pheidias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고클의 그 글을 봤었는데, 교향곡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교향곡이 내포하는 것이 어떤것이던 결국 형식과 구조라는 것과 씨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고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교향곡을 기준으로 바라본다면 브루크너와 말러에 대해서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것도 어느정도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은 됩니다... 물론 그런 측면에서 그들의 작품의 우열을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교향곡이라는 음악을 담는 그릇에대해 가지고 있는 각 작곡가의 생각자체가 다르다고 할수 있으니..

특 히 그 글에서 말러의 관현악법의 낭비라는 것과 말러의 구성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동의할수 없군요...^^ 님의 말대로 말러의 초기작이야 그렇다해도 후기 교향곡의 스코어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수 있을지... 그리고 말러의 대위법적 자질을 접어두고라도 3번 교향곡 1악장 같은곡을, 정말 중구난방의 음악조각들을 소나타 형식(?)에 담아낸 능력은 어찌 보는지...

간만에 좋은 글을 읽어 쓸데없는 말 남긴것 같습니다...^^
2005/07/12 19:04


김원철 앗, 블로그질 사흘 만에 첫 덧글입니다! 고맙습니다~~ >_< 2005/07/12 20:25
schnittke: 글을 참 맛나게 쓰셨네요.
^ㅡ^
05/07/13 08:04
tpch3: 상당히 깊은 생각을 하고 계시는 군요^^ 제가 나름대로 짧게 간단한 반박을 다시 해보자면 일단 저는 브루크너와 말러의 '교향곡'을 재료로 해서 말을 한 것입니다. 이는 앞글의 내용을 보시면 잘 알것입니다. 최소한 '교향곡'이란 장르의 특성과 그것이 '절대음악'이란 것을 생각한다면 과연 상상력과 논리력 중 어느것이 선택되어야 할지는 금방 분명해 질 것입니다. 반대로 '판타지'를 쓰는데 논리력을 논할 사람은 거의 없겠지요. 가곡 등 기타 양식을 논할때 말러와 브람스의의 가곡 중 누가 더 뛰어나냐는 정말로 힘든 논쟁거리가 될 것입니다. 또하나, 형식의 명확성을 말하고 계시는데 저는 그 명확성을 논한것이 아닙니다^^ 작곡가라면 그 의도에 따라 각 부분부분의 구분을 명확히 할 수도,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도록 오버랩해서 다소 모호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부분부분관의 논리적인 관계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또는 앞과 뒤에 있어서 그 이유가 불분명하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관현악법 낭비에 대한 문제는 저도 사실 매우 조심스러운 것인데 실은 님처럼 후기보단 초기의 곡을 노린 것이 더 크다고 고백합니다. 그 분야의 최고자(?)는 역시 님의 말씀처럼 바그너가 되겠지요^^ 05/07/13 11:25
김원철 (wagnerian): 제가 원래 글에서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곽태평님께서 말씀하시는 '교향곡'이라는 개념 자체가 베토벤 등의 음악적 유산에 종속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전통적' 교향곡 개념을 고수한다면 말러의 교향곡은 더 이상 '교향곡'일 수 없습니다. 말러는 단지 'Symphonie'라는 말의 어원적 개념을 빌어 자신의 작품을 '교향곡(Symphonie)'이라고 했을 뿐이지요. 그리고 '절대음악'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습니다만(저는 바그네리안입니다. 한슬릭 즐~ ^^), '전통적' 교향곡의 개념을 버리고 나면 꼭 그것이 '절대음악'이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참고로 저는 순수한 의미의 '절대음악'은 하나의 지향점이 될 수는 있을지라도 실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05/07/13 15:09
김원철 (wagnerian): 또한, '판타지'의 세계에서도 내부적인 논리는 필요합니다. 제가 예로 든 천상병의 시를 보더라도 상상력을 보태고 난 뒤에는 앞뒤가 잘 맞아떨어집니다. 즉, 객관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나면(그 '객관성'의 기준 자체가 베토벤-브람스인 것이 불만이라는 것은 이미 얘기했지요?) 언뜻 모호해 보이는 부분 부분의 관계가 분명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론 감상자(또는 해석자)의 상상력입니다. (사실은 '판타지'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기존의 틀에서 자유로워지면 이론적 분석이 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지휘자는 자신의 판타지를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할 수 있거나 또는 각자의 판타지를 이끌어내어 하나로 융합해내기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이러한 점에서 천재적이라는 얘기를 모 연주자에게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05/07/13 15:09
tpch3: 유감스럽게도 저 개인적인 견해로는 '교향곡'이란 개념 자체를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베토벤의 것에 종속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음악사적으로봐도 분명히 드러나거니와 '하이든'이 틀을 형성하고 '베토벤'에 의하여 일단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 뒤에 나오는 '브루크너'나 '말러' 내지는 '브람스'는 이에 대한 변형 등으로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말 한정시켜 말을 한다면 말씀처럼 말러의 것은 '교향곡'이라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음악에 있어서 '형식' 내지는 '악식'에 관한 문제는 그렇게 쉽게 왈가왈부 할 만한것도, 쉽게 여러 본질중 몇 개를 제외하고 폭넓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못됩니다. '절대음악'의 개념을 싫어하시는 듯 한데 이는 님의 취향이지 일반적인 정의나 통용되는 생각은 아닌 듯 합니다. 저는 가급적 객관적으로 보기를 원하기 때문에 역시 한쪽이 명백히 맞다고 생각하기를 원치는 않으나 이 부분에 대해선 별 수 없다 생각할 정도로 저 주변과의 논의에서도 결정이 났고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판타지'의 예를 든 것은 그곳에 논리가 없다는 게 아니라 '교향곡'과의 비교를 위한 것입니다. '객관성'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하셨는데05/07/13 17:05
tpch3: 그렇다면 이 세상에 모든 음악이 표제 음악이 되어버리겠군요^^ 음악사상 가장 완벽한 형식이라 하는 '소나타'와 '푸가'를 생각해보십시요. 어느 범주에 들어가는지 판단은 쉽게 내리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05/07/13 17:41
김원철 (wagnerian): '교향곡'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으니 대충 상황정리가 된 것이지요? ^^05/07/13 18:05
김원철 (wagnerian): 저는 '절대음악'을 싫어한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말러의 음악을 최대한 절대음악의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논지는 절대음악-표제음악 이분법은 낡은 흑백논리라는 것입니다. 제가 '한슬릭 즐~'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했습니다만, 사실 한슬릭의 논리는 당시에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편의상 좌익-우익의 비유를 하자면, 당시에는 극우파가 판치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추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극좌파의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좌우의 이념 대립이 언제까지나 흑아니면 백 식의 일차원적인 대결 양상이 되면 곤란합니다. '객관성'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고 모든 음악이 표제음악이 된다는 생각은 마치 우파가 정권을 잃으니 한반도가 빨갱이 천지가 된다는 발상과도 같습니다. (어째 정치 얘기를 하자니 뉘앙스가 좀 이상해지는 것도 같습니다. 그냥 편의상 비유로만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결국 하고싶은 주장은 절대음악-표제음악 이분법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근본적인 문제제기: 세상에 절대적인 객관 또는 절대적인 주관이 있을 수 있습니까? 어떤 수학자는 수학 논리 체계 또한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합니다. (누구더라..--a)05/07/13 18:07
ashkenazy7: 제가 괜히 끼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어떤 잣대에서 보는가에 따라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아는 미국에서 음악학으로 박사를 하신 분 이야기 들어보면 우리가 요즘 그렇게 흥분하며 연주가 많이 되고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은 사실 서구의 음악학에서는 그리 비중을 차지 못하고 그냥 슬쩍 언급만하는 정도라네요. 그리고 작곡을 전공하시는 분도 형식을 중요시하는 서구, 특히 독일 음악 쪽에서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 높이 평가될 수 없으며, 러시아 음악의 특징인 서사적인 흐름 안에서 평가된다면 달라질 수 있지 않겠냐고 말씀하시더군요. 사실 러시아에서는 쇼스타코비치가 러시아의 베토벤 아닙니까?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현재 교향곡은 소멸되고 있는 장르라고 알고 있습니다. 20세기 초.중반에도 하르트만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향곡을 작곡하신 분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경향의 작곡가였고요.
그래서 해체되기 일보직전의 후기 낭만주의 교향곡을 브람스나 베토벤 교향곡의 잣대에서 평가하기보다는 그 시대의 관점에 맞추어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네요
05/07/13 20:20
tpch3: 두 분의 의견 잘 읽었습니다. 자꾸만 저의 의견이 넓게 확대 해석되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까운데 저는 최소한 같은 '장르'의 곡들에 비해서 시대를 초월하여 비교를 할 수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곡이쓰여질 때 단순히 그 곡뿐만 아니라 그 시대상황, 작곡가의 상태 등이 곡의 여러 중요 요소가 되겠지만 곡 자체의 완성도 등을 논할 때 분명 시대와 상관없는 '음악적 절대성'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저는 '곡 그 자체'만을 상대로 하였으며 그 밖의 시대관점이랄지 작곡가만의 특색은 가능한 배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절대음악에 관한 이야기는 원 글과 상관없이 확대되어 나온 이야기 같으므로 더이상 논하지 않겠습니다. 김원철님의 말씀도 제가 읽기에도 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뜻하지 않게 제 글이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을 매우 아쉽게 생각하며 이쯤에서 논의를 마치고자 합니다. 저도 더이상 제 생각을 끝까지 맞는 것이라 주장할 뜻도 없고(애초에 그걸 원한 것이 아니였으니까요) 같이 음악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서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어쨋든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봅니다. 저 뿐만 아니라 모든 고클인들이 자신의 생각을 재정리하며05/07/14 01:33
tpch3: 또한 다른 많은 의견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많은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이만 ㅡ05/07/14 01:33
scherzo: 역사성을 배제한 '음악적 절대성'이란 게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부터 생각해 보아야 것 같은데요?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평가하고 싶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고 그런 시도도 어느 정도는 확실히 가치 있는 것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객관성'이라는 개념조차 이미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개념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를 테면, '교향곡'이라는 장르의 의미가 이미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 개념인데, 그것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베토벤의 교향곡과 말러의 교향곡은 같은 장르이면서도 같은 장르가 아닌 것이죠. 그리고 '곡 그 자체' 안에도 이미 많은 역사성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배제하는 순간 그 음악은 절름발이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원히 통용되는 예술사도, '객관적' 음악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음악사는 새로운 것, 살아있는 감수성, 시대의 정신적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언젠가 객관적 음악사라는 것이 있게 된다면, 그때는 음악 자체가 죽었다고 추측해도 된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05/07/14 19:21
김원철 (wagnerian): 역사성을 배제한 '음악적 절대성'이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음악학자를 본 적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한 전제는 음악사적 발전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더군요. 즉 바흐-모차르트-베토벤-브람스로 이어지는 조성 시대가 서양음악의 황금기였고, 그 이전의 음악은 미개하며, 그 이후의 음악은 사양길이라는 식입니다. 미국의 꽤 유명한 학자인데, 내한 강연회에서 그 말을 듣고 황당해 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가 훗날 수업시간에 그에 대한 저의 의견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아, 저놈이 미친놈이구나!" (일동 쓰러짐)05/07/14 21:50
김원철 (wagnerian): 역사성을 배제한 '음악적 절대성'이 있는지 없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있다면 그것을 함부로 정의하려는 태도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를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라 했던가요?05/07/14 21:55

2004년 11월 27일 토요일

리카르도 샤이의 말러 9번

리카르도 샤이의 말러 9번

번호: 8175 글쓴이: 김원철
조회: 222 날짜: 2004/10/28 23:02

자세한 감상은 나중에 시간이 생기면 쓰기로 하고 일단 뽐뿌질부터 합니다. ^^;

일단 샤이의 스타일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 목관악기와 비올라를 강조, 내성을 잘 살려 악기간 밸런스가 잘 맞는다는 느낌을 주면서 목관악기적인 '식물성' 사운드를 만듬.
- 1악장부터 마지막 악장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크레셴도(단순히 음량만을 뜻하지만은 않고 비유적인 의미도 포함)
- 디테일이 뛰어나면서 전체적인 일관성 또한 유지
- 느린 템포(특히 1악장. '크레셴도'의 맥락에서 이해)
- '웬만하면' 인템포.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사운드.
- 번스타인-텐슈테트 식의 발작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비추

말러 9번 음반들은 대부분 한 악장 이상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샤이의 말러 9번은 모든 악장이 좋은 몇 안 되는 음반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3악장의 엄정한 폴리포니를 들으면 미칩니다.
4악장 코다는 아바도에 대한 벤치마킹의 흔적이 살짝 보이지만
아바도와는 또 다릅니다. 그야말로 '샤이표'라 할 만한 연주.
1악장은 처음 들을 때에는 피곤한 상태에서 반쯤 졸면서 듣느라
좀 무르다 싶었는데, 다시 들어보니 그렇지 않더군요.
그러나 번스타인-베를린필 연주에 미치는 분께는 역시 비추.

저의 말러 9번 선호도 순위를 매기자면
1. 샤이
2. 아바도-베를린필
3. 카라얀 라이브
4. 카라얀 스튜디오
5. 바비롤리-베를린필
6. 번스타인-빈필
7. 노이만-게반트하우스
8. 줄리니
9. 기타 순외

꼬리말 쓰기꼬리말 쓰기
히페리온 강렬하지만 과격하지 않고 부드럽지만 늘어지지 않은, 균형이 잘 잡힌 음반이라고 생각합니다. 테크닉도 흠잡을 데가 없구요. 사운드는 '쿨'해서 모던한 느낌이었습니다. 한데 제 취향 탓인지 아주 좋지는 않더라구요. 결과를 대충 예상했으면서도 사서 들어야 직성이 풀리니 음악 애호가의 병이라 하겠습니다. ^^ [2004/10/29]
Dorian 음... 맘에 안 드신다 이거요? 그럼... 제가 무슨 말 할지 다 아시죠? ㅋㅋㅋ [2004/10/29]
Karajan 원철님, 번스타인/빈필이라 함은 영상물을 말씀하시는건가요? 아님 콘서트헤보우나 베를린필 버전을 잘못 표기하신건지... 바비롤리가 순위안에 들어가신다니 개인적으론 놀랍네요^^ 제가 들었던 샤이의 9번은 과연 샤이다운 연주더군요. 90분에 육박하는 연주시간도 그렇고 어떤 면에선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봅니다. [2004/10/29]
Karajan 도리안 이사람아... 자네는 샤이전집 나오면 그거 산다고 했잖은가...!! ㅎㅎ 나도 히페뤼님 생각처럼 결코 내 취향의 연주는 아니라서 딱히 땡기는 음반은 아니지만 좋은연주임엔 분명한듯 싶네...(원철님처럼 1등을 주기엔 어렵겠지만...^^) 다소 아쉬운건 지난번 3번만큼의 연주완성도를 느끼기엔 역부족이 아닐지... [2004/10/29]
김원철 번스타인/빈필 DVD로 가지고 있습니다. 템포 발작만 빼면 전체적으로 고른 완성도를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베를린필은 악기간 밸런스가 너무 엉망이라 듣기 괴롭고, 콘서트헤보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2004/10/29]
iceman 원철님 선호도 순위를 보니 저는 다 안 들어본 지휘자네요. ㅋㅋㅋ, 9번도 딸랑 2장(번스타인 구(sony: 이게 베를린 필 맞나 -_-;;)반, 텐슈테트) 만 소장하고 있습니다. 말러는 전체적으로 두장으로 줄이다 보니, 못 들은 음반들도 꽤 되네요. ㅋㅋㅋ [2004/10/29]
Karajan 번스타인 구반이라면 아마도 뉴욕필이겠죠(아닌가? ㅎㅎ) 저도 번스타인/빈필 영상물(베를린필하모니홀 실황연주)을 가지고 있는데 그거보면 번스타인 지휘폼이 너무나 웃겨서 감상에 상당한 지장을 주더군요~ㅋㅋㅋ 물론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번스타인/콘서트헤보우는 최상급의 9번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2004/10/29]
박하사탕 원철님 잘 지내시는지요..샤이 9번이라..구미가 당기긴 한데...처한 상황이,,,쩝. [2004/10/30]
Harnoncourt 음... 번스타인/비엔나 필 영상물은 구할 길이 없겠죠? ㅠ.ㅠ 꺼이꺼이... 그나저나 번스타인 지휘폼은 정말 멋있죠. 레니 아니고서는 그거 감히 흉내낼 수 없죠. / 음... 만약에 말러 초보라면 번스타인/콘서트헤보우는 필청의 음반이라 사료됩니다. [2004/10/30]
Karajan 번스타인/베를린필(DG 1979년 실황)은 다소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연주이긴 하지만(분명 베를린필이 번스타인 스타일에 적응하기 어려웠겠죠~^^) 듣기 괴로울 정도는 아닌 것 같던데~ㅎㅎ(뭐 듣는이에 따라 다르겠죠) 서로가 최초이자 최후의 만남이었기에 역사적 가치도 충분히 있고 연주도 상당히 괜찮은 것 같습니다^^ [2004/10/30]
Andrei 샤이의 말러는 1~4악장까지 균형이 잘 잡힌 좋은 연주 같은데요.. 실제 연주홀에서의 느낌과는 조금 다른, dry한 소리가 납니다. 1악장의 경우, 불레즈의 완벽한 연주와는 격이 약간 떨어집니다. [200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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