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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2일 수요일

2008.12.30.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교향곡 9번 - 스베틀린 루세브 / 정명훈 / 서울시향

※ 나중에 고침: 니키친 → 니키틴(Никитин)

원래 ☞《파르지팔》 2막이었다가 프로그램이 바뀌어버린 연주회. 실바스티, 네메스, 니키틴이 각각 파르지팔, 쿤드리, 클링조르였는데 뒤늦게 인드라 토마스가 끼어들어 앙상블을 망쳐놓은, 그러나 그것만 빼면 참 좋았던 연주회.


2008년 12월 30일(화)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Svetlin Roussev/vn, Indra Thomas/sop, Judit Nemeth/mez, Jorma Silvasti/ten, Evgeny Nikitin/bar, 서울시합창단, 국립합창단, 서울모테트합창단

Beethoven,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61
Beethoven, Symphony No. 9 in d minor, Op. 125 "Choral"


정명훈 지휘자는 서울시향을 맡고서 그 이듬해부터 악단 기본기를 닦겠다며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2년 만에 다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하게 되었으니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같고 또 무엇이 다를까. 먼저 단원들이 저마다 더 나은 솜씨를 길렀고 악장 스베틀린 루세브와 클라리넷 수석 채재일 등 훌륭한 연주자를 새로 뽑기도 했다. 악단이 함께 만들어내는 소리도 더욱 좋아졌다. 또 지지난해와는 달리 연주회장이 세종문화회관이 아니라 예술의 전당이라 더욱 듣기 좋은 소리가 되었다.

정명훈의 해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편성 악단을 쓰고 템포를 대체로 느리게 잡으면서도 금관을 뒤로 물려서 소리에 기름기를 빼는 등 역사주의 연주 경향을 중용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옛날 녹음에만 익숙한 사람에게는 맥빠진 연주라고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특히 4악장 도입부에서는 트럼펫이 주선율을 연주하는 옛 관습을 버리고 악보 그대로 연주하는 유행을 따랐으며, 그 때문에 목관악기가 주선율을 연주하고 트럼펫은 목관악기를 살짝 거들기만 하면서 투명한 소리를 내었다. 지지난해에는 연주회장이 저 거대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이라 이 대목에서 마치 앙상블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진 것처럼 들렸으나 올해에는 제법 그럴싸한 소리가 났다. 2악장 둘째 주제(마디 93)에서도 마찬가지로 호른이 주선율을 이끄는 대신 뒤로 물러나 악보대로 연주했다.

1악장 종결구 저음 오스티나토(ostinato)가 시작되는 마디 513에서 템포를 크게 늦춘 다음 1악장이 끝날 때까지 속도를 높인 것도 여전했다. 3악장 마디 133에서는 제2 바이올린이 피아니시모로 연주해야 하지만 서울시향은 일부러 포르티시모에 마르카토로 꾹꾹 눌러 마치 비올라처럼 들리게 했다. 시향이 연주한 3악장은 밝고 포근했으나 이 대목만큼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느낌을 올해에도 받았다. 그래, 따듯한 위로를 받았으니 한 번쯤 목놓아 울기도 해야겠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하면서 독창자들이 연주를 망치지 않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없다. 가수들이 오페라 아리아를 부를 때에는 잘해도 교향곡에서 다른 악기에 녹아드는 데에는 익숙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외국에서 제법 잘 나가는 가수들을 모셔와서 기대했는데 소프라노만 아니었으면 참 좋았을 뻔했다. 소프라노 인드라 토마스가 노래할 때마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화음이 망가지곤 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고음 처리가 까다로운 마디 841에서는 억지로 소리를 쥐어짜느라 리듬엔블루스처럼 되어버렸다. 연주가 끝나고 누리꾼들 사이에서 소프라노를 탓하는 소리가 컸다. '오 벗이여, 이 소리가 아니야!'

가수들이 무대 앞으로 나오지 않고 금관악기와 나란히 서서 노래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목소리가 다른 악기와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하려면 이렇게 하는 게 좋으며 지지난해에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금관악기와 타악기 소리 때문에 가수들이 제 목소리를 듣기 어려워지는 게 문제다. 게다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은 무대 위 음향이 매우 나쁘다고 한다. 가수 바로 뒤에 투명한 반사판을 두었으나 그것만으로는 한참 모자랐던 모양이라 베이스바리톤 예프게니 니키틴은 노래할 때마다 오른손을 귀에 갖다대기도 했다. 나는 그래도 가수를 뒤에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대에 적응할 시간을 좀 더 주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예프게니 니키틴은 지난 2005년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국내 초연 때 보탄(방랑자)을 맡았던 가수다. 그때는 목소리가 꽤 단단했는데 3년 만에 다시 보니 조금 부드러워진 대신 깊은 소리로 바뀌었다. 그러나 작품 성격이 다른 만큼 고약한 독일어 발음이 더 자주 발목을 잡았고 이것이 좋지 않은 루바토로 이어져 선율이 느슨해지곤 했다. 특히 /r/ 발음에 굳이 모음 하나 음표 하나를 더 넣어 부르는 게 마음에 안 들었으며, "Wo dein sanfter Flügel weilt" 할 때 엉뚱하게도 "Wo" 바로 뒤에 숨을 쉬어버려 가사 전달과 선율 흐름을 모두 망치기도 했다. 다만, 중창 때에는 다른 가수와 어울려 훌륭한 앙상블을 이루었다.

테너 요르마 실바스티는 경력을 보면 상대적으로 다른 가수들에 밀리는 듯싶지만 이날 노래를 들어보니 오히려 가장 뛰어났다. 맑고 탱글탱글하면서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악단과 하나가 되었고 딕션 또한 나무랄 데 없었다. 메조소프라노 유디트 네메스는 비중이 작아서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으나 테너와 함께 화음에 탄탄한 기둥을 만들어 내는 솜씨가 매우 훌륭했으며 딕션도 좋았다.

합창단은 이날 진짜 주인공이었다 할 만큼 멋졌다. 우리나라 합창단 어려운 사정은 안 봐도 뻔한데 이렇게 좋은 연주를 해내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한 시향 악장 스베틀린 루세브는 부드럽고 우아한 '프랑스풍' 연주를 들려주었다. 베토벤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싫어할 사람도 있을 듯싶지만, 편견을 버리고 들으면 매우 훌륭한 연주였다.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16일 일요일

2005.09.27. 《지크프리트》 - 게르기예프 / 마린스키 극장 오페라단

지크프리트 Siegfried -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오페라단
9월 27일(화) 저녁 5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 휘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연 출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감 독 : 블라디미르 미르조예프 Vladimir Mirzoev
무대 디자인: 조시 티시핀 George Tsypin

지크프리트 : 레오니드 자코자예프 Leonid Zakhozhaev
브륀힐데 : 라리사 고골레프스카야 Larissa Gogolevskaya
미메 : 바실리 고르슈코프 Vassily Gorshkov
방랑자 : 예프게니 니키틴 Evgeny Nikitin
알베리히 : 빅토르 체르노모르츠예프 Viktor Chernomortsev
파프너 : 게네디 베주벤코프 Gennady Bezzubenkov
에르다 : 즐라타 불리체바 Zlata Bulycheva
새 : 잔나 돔브로프스카야 Zhanna Dombrovskaia



<지크프리트> 1막 전주곡은 관악기 주자들의 합주력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목관끼리, 또는 금관끼리 여린 음으로 합주를 할 때 국내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는 어택(attack)과 밸런스가 어긋나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졸이게 할 때가 많다. 그런데 지난 2003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체임버 오케스트라 내한 연주회 때 <지크프리트 목가>의 호른 두 대가 단3도로 나란히 스타카토로 연주하는 부분에서, 어택과 밸런스를 마치 악기 하나가 연주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맞추면서도 호른 주자에게 흔한 미스톤 하나 없이 현 소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가는 것을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이것이 독일과 한국의 차이란 말인가...

이날 연주에서는 바순 2대의 7도 하행 부분(마디 4)과 바순 3대의 스타카토 부분(마디 51), 잉글리쉬 호른의 단2도 하행에 바순 3대가 합세하는 부분(마디 79)이 모두 깔끔했고, 약음기를 낀 비올라 등과의 리듬 교환도 자연스러웠다. 다만, 셈여림의 세세한 변화를 공연장이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던 점은 아쉬웠다. 테너 튜바 2대와 베이스 튜바 2대의 크레셴도(마디 72, 마디 79)도 좋았고, 호른과 트롬본, 콘트라바스 트롬본이 가세하는 부분(마디 84)도 좋았다. 금관을 강조하면서 현이 묻혀 버리는 문제는 큰 음량이 꼭 필요한 곳이라 어쩔 수 없었다. (현의 음량 부족 문제에 대해서는 <라인의 황금> 편을 참고하라.)

이날 지휘자의 '임기응변'은 <발퀴레> 때보다 더 나아진 것 같았지만 연주자들의 집중력은 오히려 <발퀴레> 때만 못했고, 특히 1막에서는 작품에 익숙지 않은 사람도 알아챌 만한 금관의 실수가 여러 번 있어서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았는데도 많은 사람이 어수선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1막에서 실수가 많았던 가장 큰 이유는 템포가 빨랐기 때문일 텐데, 이 때문에 가수들도 숨가빠 했다. 이번 공연의 특징 중 하나는 단막 작품인 <라인의 황금>까지 포함해서 1막 연주의 완성도가 다른 막에 비해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단원들이 '반지' 시리즈 사이마다 다른 연주회 일정을 소화하는 강행군을 하느라 지친 탓에 2막에서야 몸이 풀린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었고, 나는 우스갯소리로 '게르기예프가 1막 끝나고 단원들에게 '한바탕' 한 것이 아닐까?'라고도 했다. 2막부터는 매우 좋았고, 3막의 "만세, 태양이여! 만세, 빛이여! 만세! 빛나는 날이여! Heil dir, Sonne! Heil dir, Licht! Heil dir, leuchtender Tag!" 부분부터는 현의 앙상블이 특히 뛰어났다. 다만, 3막 전주곡 등 현의 비중의 큰 곳에서는 (현이 매우 열심히 연주했지만) 다이내믹에 문제가 생기는 점은 어쩔 수 없었다.

지크프리트 역의 레오니드 자코자예프는 <발퀴레>의 지크프리트와는 달리 뛰어난 지구력을 자랑하면서 깔끔한 노래를 들려주었다. 1막까지만 해도 빠른 템포 때문에 약간씩 불안정해지는 목소리를 듣고 '2막부터는 망가지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웬걸, 3막이 끝날 때까지 안정된 목소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 큰 성량으로 곧게 뻗어나가는 고음을 들려주었다면 전설의 바그너 가수가 되살아난 것 같았겠지만, 그것까지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리라. <발퀴레> 때의 지크프리트처럼 '아 노퉁!'과 같은 불필요한 선행음(Anticipation)을 사용한 것은 옥에 티였다. 음색은 르네 콜로가 경박함을 벗고 진중한 헬덴 테너가 된 듯했다. 에릭과 로엔그린, 프로(Proh) 등의 역할을 맡은 적이 있고, 말러의 <대지의 노래> 테너 솔로도 했단다. 자코자예프는 외모 또한 뛰어났다. 키도 크고 몸매도 날씬했다. 다만, 어깨와 가슴에는 '공사'를 좀 했다. (시력이 나빠서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확인해 주었다.) 연극배우와 록 가수를 했던 경력이 있단다. 사진을 보니 언뜻 페터 호프만을 닮았는데, 더 자세히 보면 매서운 척하는 표정이 록 가수 신해철을 닮았다.

브륀힐데 역의 라리사 고골레프스카야는 <발퀴레>의 브륀힐데를 크게 능가하는 대단한 강성 소프라노였으며, 표현할 수 있는 다이내믹의 폭이 컸던 만큼 크레셴도를 잘했다. 몸매 또한 '현실 세계의 브륀힐데'에 매우 근접했다. 다른 역할은 가수가 바뀌어도 음색이 비슷해서 일관성을 해치는 일이 잘 없었는데, 브륀힐데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퀴레>의 브륀힐데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는데다가 지크프리트에 비해 성량이 너무 커서 힘 조절을 하고 있던 지크프리트를 초라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성량은 컸지만 고음 처리가 조금씩 위태로웠고, 마지막 대사인 "lachender Tod! 웃는 죽음이로다!"에서는 대사를 빼먹기도 했다. 다른 가수들도 대사를 빼먹은 적이 있지만(프롬프터가 있기는 하지만 듣자 하니 대가들도 의외로 이런 실수를 곧잘 한단다.) 고골레프스카야가 빼먹은 것은 다가올 파국에 대한 복선 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대사라는 것이 문제다. "Tod(죽음)" 부분은 '하이 C'인데, 바그너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한 옥타브를 낮추어 지크프리트와 유니즌을 이룰 수도 있도록 이중으로 표시했다. 어쩌면 고골레프스카야는 '하이 C'로만 불러야 하는 줄 알았던 것은 아닐까? 음색은 살짝 비르기트 닐손을 연상시키기도 했지만 힘과 표현력 모두 닐손과는 차이가 컸다. 쿤드리, 젠타, 오르트루트를 맡은 적이 있단다. 쿤드리는 좀 갸우뚱하기도 하고, 젠타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오르트루트는 모르겠다. 엘자 역과 강렬한 음색 대비를 할 수도 있겠지만, 엘자가 너무 연약하면 오르투르트에게 압도되어 졸지에 조연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

미메 역의 바실리 고르슈코프는 <라인의 황금> 때의 니콜라이 가시예프와 비슷한 음색이었으며 미메에 매우 잘 맞았다. 그러나 성량이 너무 작은 것이 문제였다. 특히 저음은 거의 들리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니콜라이 가시예프와는 달리 바그너 경력도 없단다. 둘이 서로 바꿨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크프리트>의 미메는 의외로 음색에 어울리지 않는 저음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어쩌면 가시예프보다는 그래도 고르슈코프가 성역이 낮았던 것일까? 그래도 연기는 참 좋았다. 음반에서도 언제나 엉터리인 망치 리듬은 예상보다 양호했다. 그러나 내가 지휘자라면 차라리 미메나 지크프리트에게는 솜 망치를 들려주고 망치 소리는 오케스트라 타악기 주자에게 맡기겠다.

방랑자 역의 예프게니 니키틴은 <라인의 황금> 때의 보탄이었는데, 그때보다 더 잘했다. 역할의 특성상 호흡이 긴 편이어서 노래하기 편한 점도 있었겠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참 잘했다. 차라리 미하일 키트와 바꿔서 <발퀴레> 보탄을 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니키틴이 부르는 '보탄의 고별'을 상상해보니 왠지 잘할 것 같다.

알베리히 역의 빅토르 체르노모르츠예프는 <라인의 황금>에서의 예뎀 우메로프보다 훨씬 잘했으며 헬덴 바리톤 냄새가 났다. 사악한 표현도 우메로프보다 더 잘했다. 파프너 역의 게네디 베주벤코프는 악보대로 확성기를 사용했고, 전체적으로 잘했지만 비브라토를 일부러 억제한 듯한 발성이 약간씩 흔들리기도 했다. 에르다 역의 즐라타 불리체바는 <라인의 황금> 때와 마찬가지로 훌륭했다. 새 역의 잔나 돔브로프스카야는 새 소리를 흉내 내려는 노력은 좋았으나 목소리가 굵고 비브라토도 깊은 것이 흠이었다. <파르지팔>에서 꽃처녀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뒷얘기. <라인의 황금> 때 봤던 '신비기인'은 역시 C열 오른쪽으로 가는 것을 확인했다. <신들의 황혼> 때에는 위치를 확인해 뒀다가 말을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진 찍히는 줄도 모르고 독보삼매경.


2005년 10월 5일 씀.
2005년 10월 31일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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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5. 《발퀴레》 - 게르기예프 / 마린스키 극장 오페라단

발퀴레 Die Walküre -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오페라단
9월 25일(일) 저녁 6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 휘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연 출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감 독 : 율리아 페브즈너 Yulia Pevzner
무대 디자인: 조시 티시핀 George Tsypin

보탄 : 미하일 키트 Mikhail Kit
브륀힐데 : 올가 사보바 Olga Savova
지크문트 : 올레그 발라쇼프 Oleg Balashov
지클린데 : 믈라다 후도레이 Mlada Hudoley
훈딩 : 게네디 베주벤코프 Gennady Bezzubenkov
프리카 : 스베틀라나 볼코바 Svetlana Volkova
게르힐데 : 리아 셰브초바 Lia Shevtsova
오르틀린데 : 루드밀라 카시아넨코 Liudmila Kasianenko
발트라우테 : 나덴자다 세르뒤크 Nadezhda Serdiuk
슈베르틀라이테 : 루드밀라 카누니코바 Liudmila Kanunikova
헬름비게 : 타티아나 크라브초바 Tatiana Kravtsova
지크루네 : 나데자다 바실리예바 Nadezhda Vasilieva
그림게르데 : 안나 키크나드제 Anna Kiknadze
로스바이세 : 뤼보브 소콜로바 Liubov Sokolova



솔직히 말해 <라인의 황금> 공연은 약간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더 솔직해지자면 공연을 보는 동안 온갖 독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한국 초연인 점을 생각해 실망스러운 부분은 최대한 잊어 버리고 장점 위주로 본 것이었다. 시차 적응도 덜 된 데다가 낮에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한 뒤에 <라인의 황금>을 또 공연하는 강행군 때문에 단원들이 지쳤던 것이리라. 그런데 <발퀴레> 때에는 체력을 회복했는지 훨씬 나아진 소리를 들려주었고, 게르기예프는 공연장의 극악한 음향 환경에 더욱 적응을 한 듯했다.

현은 음향적 공백을 더욱 메워주었고, 특히 1막에서 선동적인 리듬을 타고 흐르는 저음 현이 좋았다. '보탄의 고별' 장면에서는 부드럽게 공연장을 휘감는 소노리티가 일품이었다. 다만, 1막 전주곡에서는 공연장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다이내믹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를테면 포르테(f)에서 반 마디 만에 피아노(p)로, 다시 한 마디 반 동안 스타카토로 크레셴도 시켜서 포르테로 이어지는 등의 급박한 다이내믹의 변화는 세종문화회관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오케스트라가 무대 위로 올라가 제대로 된 편성으로 연주해도 시원찮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현의 음량 부족 문제에 대해서는 <라인의 황금> 편을 참고하라.)

1막 전주곡 마디 62부터 나오는 ☞'도너' 모티프에서는 베이스 튜바, 테너 튜바, 트롬본이 차례로 첫 음을 흐릿하게 연주했고, 트럼펫은 좀 나았다가 베이스 트럼펫에서 다시 흐려졌다. 저음 쪽의 악기일수록 이 부분을 못했는데, 아무래도 저음 악기가 완전4도 도약을 재빠르게 하기 힘든 탓이지 싶다. 마디 62에는 다음과 같은 지시가 붙어 있다. "이 주제(도너 모티프)에서 짧은 여린박(Auftakt) 음은 매우 강하고 또렷하게 들리도록 해야 한다. Bei diesem Thema (Donner-Motiv) müssen die kurzen Auftakt noten sehr stark und deutlich hörbar werden." ('도너 모티프'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고 있는 점이 수상하기는 하지만, 내 추측에 지시어 자체는 바그너 자신이 붙인 것이며 모티프 이름은 편집자가 첨가한 것 같다. 도버 판(C. F. Peters, Leipzig, n.d. [ca. 1910].) 총보를 참고했다. 더 권위 있는 악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부분에 대해 알려주면 고맙겠다. - 나중에 붙임: 펠릭스 모틀이 붙인 지시어란다.) <라인의 황금> 때부터 도너와 관련 있는 부분이 좋지 않은 점은 유감이다. 북유럽 신화에서 도너(토르)가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면 게르기예프는 신화 연구를 게을리했다는 혐의를 벗기 힘들다.

2막 전주곡은 개인적으로 마디 54부터 마디 65까지의 팀파니 소리가 백미라고 생각하는데, 악보 상으로는 포르테(f)와 피아노(p) 사이를 오가고 있지만 다이내믹의 낙차를 더 크게 과장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뵘의 녹음 등을 들어보면 그렇게 연주하기도 한다. 특히 게르기예프에게는 이것이 연주회장의 음향 핸디캡을 메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을 것인데, 예상 밖으로 팀파니 주자는 정직한 음량을 고집했다. 오히려 크레셴도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 불만이었다.

2막은 이번 '반지' 시리즈를 통틀어 최고였다고 할 만큼 대단했다. 특히 프리카 등장 이후부터는 프리카의 뛰어난 가창에 힘입어 빠른 템포로 극의 흐름을 완전히 움켜쥐고 관객을 몰입하게 하였다. 지루하기로 유명한 <발퀴레> 2막을 이토록 흥미진진하게 만들다니! 물론 실수도 적지 않았지만, 이들의 연주에는 그 모든 것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마력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라인의 황금>을 듣고 '거장' 운운했던 것은 취소하는 것이 좋겠다. 보라, 여기에 진짜 거장이 있다!

3막도 매우 좋았고, 유명한 3막 전주곡 '발퀴레의 기행'에서는 금관과 타악기만을 앞세우기보다는 목관 악기의 회오리바람을 놓치지 않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보탄의 고별' 장면에서는 템포가 좀 빠르긴 했지만 역시 음반으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현장의 감동이 있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이 격해져서 "내 창 끝을 두려워하는 자는 이 불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리라! Wer meines Speeres Spitze fürchtet, durchschreite das Feuer nie!" 이후부터는 차분한 감상이 불가능해질 정도였는데, 심지어 막이 내리기 시작하자마자 성급하게 박수가 터져 나올 때(많은 사람이 지적했지만 이것 참 문제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나도 모르게 박수를 따라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멈추었을 정도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호흡은 거칠어졌으며 가슴은 요동치고 다리는 후들거리는 것을 겨우 수습하고 밖으로 나간 다음, 지인들과 함께 오늘 공연이 얼마나 대단했는지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라인의 황금> 때 실망해서 <지크프리트>와 <신들의 황혼> 표를 팔아버렸거나 또는 처음부터 <발퀴레> 표만 샀던 사람들이 이날 공연이 끝나고 나머지 표를 구하느라고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보탄 역의 미하일 키트는 <라인의 황금>에서 보탄을 맡았던 예프게니 니키틴보다 음색이 더 깊이 있었고 특히 여린 음의 표현력이 뛰어났지만,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니키틴보다 못했다. 강력한 프리카에게 혼쭐나서 쩔쩔매는 듯한 모습은 오히려 극과 어울리기도 했다. ☞사무엘 윤과 비교하자면 지난 2004년 11월 12일 연주회에서의 사무엘 윤이 훨씬 잘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프로필을 보니 역시 바그너 경력이 없단다. 이런 가수가 대뜸 보탄 같은 큰 역할을 맡은 것이 대단한데, 이 점을 고려하면 사실은 매우 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보탄을 물리친 '아줌마'의 모습을 보여준 프리카 역의 스베틀라나 볼코바는 <라인의 황금>에서 프리카를 맡았던 바로 그 사람이다. 전날 공연에서도 심상치 않더니 이날에는 완전히 주연급으로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고음과 저음, 포르테와 피아노의 교차가 민첩하고 시원시원했으며, 오케스트라와 상호작용하여 긴장감을 높여나가는 솜씨가 굉장했다. 프로필을 다시 보니 아직 극장 내에서 주역 가수로 완전히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앞으로 큰 성장을 기대해도 좋겠다.

지클린데 역의 믈라다 후도레이도 만만치 않았다. 볼코바에 비하면 부드러웠지만 은근히 힘있는 목소리였고, 앞으로 강성 소프라노로 거듭난다면 브륀힐데도 못할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보다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은 외모였는데, 특히 몸매가 매우 뛰어났다. 2막에서 흐트러진 자세로 쓰러져 있을 때에는 옷이 위로 말려 올라가 뛰어난 다리맵시를 자랑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크문트가 괘씸하게도 슬쩍 다가가서 옷자락을 내리더라. 어우, 야아~!) 프로필을 보니 역시 살로메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일곱 베일의 춤을 추면 얼마나 멋질까! (험험... 정신 차리자.) 그밖에 구트루네 역과 젠타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지크문트 역의 올레그 발라쇼프는 주연치고는 약간은 실망스러웠다. 듣자 하니 러시아처럼 햇볕이 부족한 곳에서는 테너가 나오기 힘들고 대신 뛰어난 베이스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프로필에 따르면 바그너 경력이 없는 모양인데 단번에 이렇게 큰 역할을 맡은 것만 봐도 그렇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사실 대단한 열연을 한 것으로 좋게 봐주는 것이 좋겠다. 실연으로 큰 실수 없이 역할을 해낸 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다만 "벨제! 벨제! Wälse! Wälse!" 부분에서 호흡량이 음반으로 들을 수 있는 것보다 1/3에서 1/5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아 벨제!,' '아 노퉁!' 등과 같이 불필요한 선행음(Anticipation)을 곧잘 사용한 것인데, 선행음의 남용은 음악을 유치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므로 좋지 않은 습관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버거운 역할을 맡느라 몹시 힘든 마당에 '아' 같은 유성음(voiced sound)으로 발성을 시작하는 것은 좋은 전략이기도 하므로, 이렇게라도 해서 역할을 완수할 수 있다면 오히려 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노래하다 지쳐서 쓰러지거나 목이 망가지기라도 했다면 얼마나 큰 망신이겠는가?

브륀힐데 역의 올가 사보바는 <신들의 황혼>의 발트라우테이기도 하다. 프리카나 지클린데 못지않게 잘했지만, 메조소프라노라서 저음이 강한 대신 고음이 약한 것은 약간은 아쉬운 점이기도 했다. '호요토호!'가 그랬고, 특히 옥타브 도약으로 '하이 C'를 내야 하는 부분에서는 포르타멘토를 사용해 억지로 짜내는 것이 흠이었다. 바그너 경력은 없단다.

훈딩 역의 게네디 베주벤코프는 <라인의 황금>과 <지크프리트>의 파프너 역이기도 했다. 역시 강력한 초저역이 대단했으며, 이 점에서는 '반지' 시리즈의 출연진 가운데 최고라고 할 만했다. 발음에 러시아어의 냄새가 유난히 짙은 것은 야만적인 훈딩을 표현하는 데에는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으나, 원론적으로는 단점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겐 역의 알렉세이 탄노비츠키로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신들의 황혼>에서 '진짜 탄노비츠키'를 만나기 전까지 '저 사람이 하겐 역을 잘할까?' 하는 우려가 있었으며, '진짜 탄노비츠키'를 본 사람들은 오히려 대타로 오인하기도 했다.

게르힐데 역의 리아 셰브초바와 헬름비게 역의 타티아나 크라브초바는 힘을 아낄 이유가 없는 만큼 '호요토호!'에서 깔끔하고 힘 있는 고음 처리를 했다. 특히 타티아나 크라브초바는 옥타브 도약 '하이 C'에서도 올가 사보바 같은 포르타멘토 없이 시원하게 내질렀다. 다른 발퀴레도 '올인'(또는 'Now or never!')의 태도로 열심히 불렀다.

<라인의 황금> 때 누워 있던 석상들은 일어서 있고 등에 날개가 달리는 등 위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는 이것을 보고 역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에바 1호가 변한 괴물을 연상했는데, 그 원형은 인도 신화에 나오는 파괴와 창조의 신 '시바'라고 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 가이낙스


2005년 10월 4일 씀.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5.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15일 토요일

2005.09.24. 《라인의 황금》 - 게르기예프 / 마린스키 극장 오페라단

라인의 황금 Das Rheingold -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오페라단
2005년 9월 24일(토) 저녁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 휘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연 출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감 독 : 율리아 페브즈너 Yulia Pevzner
무대 디자인: 조시 티시핀 George Tsypin

보탄 : 예프게니 니키틴 Evgeny Nikitin
프리카 : 스베틀라나 볼코바 Svetlana Volkova
알베리히 : 예뎀 우메로프 Edem Umerov
로게 : 콘스탄틴 플루즈니코프 Konstantin Pluzhnikov
파졸트 : 바딤 크라베츠 Vadim Kravets
파프너 : 게네디 베주벤코프 Gennady Bezzubenkov
미메 : 니콜라이 가시예프 Nikolai Gassiev
도너 : 에드워드 장 Eduard Tsanga
프로 : 예프게니 아키모프 Evgeny Akimov
보클린데 : 잔나 돔브로브스카야 Zhanna Dombrovskaia
벨군데 : 리아 셰브초바 Lia Shevtsova
플로스힐데 : 나덴자다 세르뒤크 Nadezhda Serdiuk
프라이아 : 타티아나 보로디나 Tatiana Borodina
에르다 : 즐라타 불리체바 Zlata Bulycheva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에서 바그너 음악을 처음으로 연주한 사람이다. 그런데 러시아가 나치로부터 입은 피해는 유태인 못지않은 것이라 이 때문에 러시아가 떠들썩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러시아는 자본주의 국가와는 달리 클래식 공연 문화가 대중 예술로서 확고한 입지를 유지하고 있으며, 심지어 연주회장에 대한 정부의 예산 축소에 따라 입장료를 인상한다는 발표가 나자 (그래 봐야 우리 기준으로는 터무니없이 싼 가격이란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며 대중 집회가 열린 적도 있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니 게르기예프는 자칫 '인민의 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바그너에 손댄 것이 된다. 이스라엘에서 바그너를 연주한 것이 '깜짝 이벤트'에 불과했던 바렌보임과는 달리 게르기예프는 러시아 악단을 이끌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바그너 공연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2005년 9월, 그는 <니벨룽의 반지> 한국 초연이자 '반지' 4부작 각각의 한국 초연을 지휘한 사람이 되었다. 우려와는 달리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다. 공연 전부터 여러 곳에서 관련 강좌가 열렸고 많은 참여가 있었다. 클래식 관련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바그너와 관련한 문답과 토론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반지'를 쉽게 해설해 놓은 ☞ 박원철씨의 웹사이트는 공연 전후로 트래픽(traffic)이 폭주했다. 무엇보다, 표가 팔렸다. 그리고 마침내 공연 날짜는 다가왔다.

연주에 대한 감상을 쓰기에 앞서 공연장의 음향 환경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은 객석은 크고 오케스트라 피트는 작아서 음량 손실이 매우 크다. 일류 오케스트라도 이것을 극복할 수는 없다.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예상한 바와도 같다. 지난 6월 11일부터 13일까지 있었던 간사이 니키카이 오페라단-서울시향의 <탄호이저>를 보고 내가 쓴 ☞ 감상문 가운데 일부를 인용한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오케스트라 피트는 기대했던 것보다 너무 작았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보다는 가로로 조금 더 넓은 것 같았지만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이 때문에 오는 9월에 게르기예프가 마린스키극장 오페라단을 이끌고 와도 압도적인 스케일의 음향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노들섬에 짓는다는 새 오페라하우스가 유일한 희망이란 말인가. 제발 전시용에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작을 때 음량 면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 현일 것이다. 바그너는 <탄호이저>를 오케스트레이션할 때 대규모 현악 파트를 염두에 두었으며, 극장의 현악 주자의 수를 정규인원보다 더 많이 둘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번 공연에서 서울시향의 현은 부족한 인원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음량을 내주었다. 12일 공연에서는 현이 금관과 합창 등에 묻혀 버리는 때가 종종 있었지만 13일에는 훨씬 나았다. 이것이 단순히 연주자들이 13일에 더욱 분발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극장 1층과 3층의 음향의 요술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12일 2층에서 들었던 어떤 사람도 "좀 오버하자면 다이나믹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밋밋함의 연속이었"다고 평한 것을 보면 12일보다 13일의 연주가 더 좋았다는 내 느낌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역시 소편성으로는 표현할 수 있는 다이내믹의 폭에 한계가 있었다. 이를테면, 서곡 마디 32에서부터 비올라-제2 바이올린-첼로-제1 바이올린-콘트라바스로 연이어 점층하는 셋잇단 리듬의 크레셴도는 그 폭이 충분히 크지 못했으며, 마디 37에서 마침내 트롬본이 이른바 ☞ '순례자의 합창' 모티프를 찬가처럼 크게 부풀려 연주할 때 현과 호른 등은 바이올린의 음량에 제약을 받아 제 힘을 내지 못했다. 2막 4장의 이른바 '입당행진곡' 부분에서는 무대 위에 배치된 12대의 트럼펫이 들려주는 압도적인 소리가 큰 매력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역시 '절제'를 위해 트럼펫 주자들이 무대 뒤편으로 숨어 버리고는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연출을 했다.


2막 4장, 입당행진곡 중 트럼펫 팡파르. 그림을 누르면 미디 음악이 연주됩니다.

© 1997-2002 by Fabrizio Calzaretti.



이번 공연 팜플렛에 나타난 오케스트라 파트별 단원 수와 <라인의 황금> 악보에 명시된 연주자 수를 비교해 보면 문제가 좀 더 명확해진다. 관악기와 타악기는 특수 악기까지 생각하면 필요한 만큼 있는 것 같지만, 현악기 주자들의 수를 보면 제1 바이올린 1명과 제2 바이올린 6명, 비올라 3명, 첼로 3명, 콘트라바스 1명, 모두 14명의 연주자가 부족하다. 공간이 충분하다면 객원 주자를 쓸 수도 있겠지만, 그 좁은 공간에 악보에 지시된 대로 108명(호른 더블링과 프롬프터 등을 고려하면 110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을까? 1층에서는 오케스트라 피트를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3층에서 연주자 수를 세어 본 사람의 말에 따르면 80명이 채 안 되는 인원이 피트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고 한다. 오케스트라 피트의 크기 말고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객석 수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등의 유수 공연장에 비해 1.5~2배 정도 많다는 점도 문제이겠다. 한편, 객석의 규모와도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공연장의 주파수별 소리 전달 특성이 다른 것 같다. 즉 저음이 많이 깎여서 양감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이런 사정을 모두 감안하면 이번 공연에서 현 소리는 꽤 큰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더. 만약 숄티의 녹음을 기준으로 이번 공연에서의 음량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면 당신은 뭘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과장된 소리는 실제 공연장에서는 들을 수 없다. 기준은 바이로이트 실황으로 해야 설득력이 있다.

어쨌거나 현의 절대적인 음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최대한 다이내믹을 살리기 위해서는 밸런스를 무시하고 금관과 타악기를 내세워 뿜빰거리던가, 또는 다이내믹을 희생시켜 정교하지만 밋밋한 연주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게르기예프는 절충안을 택했다. 화성적으로 풍부한 울림이 필요한 곳에서는 다이내믹보다는 밸런스를 택했고, 강력한 다이내믹이 필요한 곳에서는 과감히 밸런스를 포기했다. 음악적 맥락에 따라 최적의 선택을 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최선의 책략일 것인데, 공연장의 음향 환경에 적응할 기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을 게르기예프와 단원들에게는 철저하게 임기응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임기응변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다. 게르기예프는 진정한 거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인의 황금>은 현의 비중이 매우 큰 작품이라 어쩔 수 없는 결점이 꽤 많았다. 전주곡에서는 점층 효과에 의한 유장한 맛이 부족하고 대신 어수선한 느낌을 주었다. 이후로도 1장 내내 이어지는 현에 의한 물살의 표현이나 기타 현의 역할이 두드러지는 곳에서 여지없이 음량의 한계를 드러냈다. 거인들이 등장할 때에는, 다이내믹을 살리는 것이 최대의 목표가 되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겠지만, 베이스 트럼펫과 3대의 트롬본, 콘트라바스 트롬본의 4도 도약(편의상 '안티폰 antiphon'이라고 부르자.)이 주선율로부터 크게 돌출되어 선율 윤곽을 해쳤다. 현 소리는 작은 데다 '안티폰'에 대항할 금관은 콘트라바스 튜바 하나뿐이라 차라리 팀파니가 주선율마저 압도해 버리는 형국이었다.



'거인' 모티프. © 1997-2002 by Fabrizio Calzaretti.

그림 파일을 누르면 음악이 연주됩니다. 음악 출처: 박원철 홈페이지 © Decca


사소한 실수라고 보기에는 음악의 맥락상 비중이 만만치 않았던 곳도 있었다. 2장 첫 마디에서 테너 튜바의 음정 불안이 그랬고, 파졸트가 "당신의 창이 보호를 한다는 약속의 엄숙함이 모두 장난이란 말이오? Die dein Speer birgt, sind sie dir Spiel, des berat'nen Bundes Runen?  (한글 번역은 엄선애 교수의 것을 참고했음)" 할 때 "Speer(창)"와 동시에 나오는 ☞ '창'의 모티프에서 제1, 제3 호른과 제2, 제4 호른이 교차하는 "Spiel"과 "des" 사이(마디 넷째 박)의 음정 불안이 그랬다.


"Die dein Speer birgt, sind sie dir Spiel, des berat'nen Bundes Runen?"

© 1899 by B. Schott's Söhne, Mayence.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가수들의 수준은 기대 이상이었다. 솔직히 '러시아 사람이 독일 음악을 제대로 이해할까?' 하는 생각을 어느 정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가수들에 만족할 수 있었다. 물론 음반이 귀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불만스러운 부분도 많았겠지만, 실제 공연장에서 음반 수준의 연주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다. 전설의 명가수들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고, 스튜디오 녹음 같은 최상의 컨디션은 실제 공연장에서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탄 역의 예프게니 니키틴은 단단한 목소리를 가진 젊은 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한스 호터의 보탄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영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꽤 잘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다른 가수와 비교하자면 토마스 스튜어트나 ☞사무엘 윤과 비슷하다고 하겠는데, 토마스 스튜어트는 그렇다 치고 사무엘 윤이 예프게니 니키틴보다 한 수 위라고 말한다면 한국인을 너무 편애하는 것일까? 니키틴의 노래를 들으면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네덜란드인의 아리아 가운데 "죽은 자들이 모두 일어날 때, 나는 소멸하리라. Wann alle Toten auferstehn, dann werde ich in Nichts vergehn." 하는 대목이 생각났는데, 프로필을 보니 실제로 네덜란드인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알베리히 역의 예뎀 우메로프는 사악한 맛이 부족해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는데, 개인적으로는 좋게 들었고 사악한 연기도 꽤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이번 공연에서 군터 역으로도 나왔다. <로엔그린>의 텔라문트 백작과 전령(팜플렛에는 '헤럴드의 왕'이라고 되어 있다. '왕의 전령(Der Heerrufer des Königs; The King's Herald)'의 오역으로 판단된다.)을 맡은 적이 있단다.

로게 역의 콘스탄틴 플루즈니코프는 실수가 좀 있었지만, 굉장한 열연을 했던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프로필을 보니 로엔그린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어릿광대 같은 연기를 하던 사람이 로엔그린의 나레이션(In fernem Land)을 부르는 것은 상상이 잘 안 된다. 성배의 가호를 받는 성기사가 아니라 촐싹대는 바람둥이가 아닐지?

파졸트 역의 바딤 크라베츠는 사랑을 갈구하는 거인을 매우 잘 표현했다. 그 빛나는 가창은 이날 최고의 가수라 부를 만했고, 마르티 탈벨라를 연상시킨다는 말도 나왔다. 파졸트 말고는 바그너 경력이 없다는데, 하겐 쪽으로 개발해 봐도 괜찮지 싶다. 파프너 역의 게네디 베주벤코프는 저음을 강조하여 파졸트와 음색의 구분을 이룬 것이 마음에 들었다.

도너 역의 에드워드 장(고려의 후예라고 하며 러시아식 발음은 '짱가'에 가깝다고 한다.)은 유명한 '헤다! 헤다! 헤도!' 대목을 잘해야 박수를 많이 받을 텐데, 아쉽게도 천둥과 번개의 신답지 않게 패기가 부족했다. 연출상의 결정적인 실수도 있었는데, 망치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다. 창이 보탄을 상징한다면 망치는 도너를 상징한다. 북유럽 신화에서 도너(토르)의 망치 '묠니르(Mjöllnir; '묘르닐'이라고도 하는데, 일본식 발음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비슷한 예로 '궁니르'를 '궁그닐'이라고도 한다. 일본식 발음으로 고치면 각각 '묘루니루,' '궁구니루'가 된다.)'는 전장에서 수많은 거인족을 물리친 궁극의 병기로, <니벨룽의 반지>에서는 '반지'나 보탄(오딘)의 창 '궁니르(Gunnir)'만한 비중은 없지만 알고 보면 대단한 아이템이라 할 수 있다. 숄티 판에서는 일부러 망치(천둥) 소리를 따로 집어넣기도 했는데, 이날 공연에서는 악보에 표시된 팀파니 소리만으로 해결했고, 그마저 망치의 위력을 보여줄 만큼 음량이 크지는 않았다.

프리카 역의 스베틀라나 볼코바는 극중 비중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는데도 매우 인상깊었다. <발퀴레> 때에는 더욱 강력한 모습을 기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르지팔>의 꽃처녀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미메 역의 니콜라이 가시예프도 조연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만큼 훌륭했다. 로게를 맡은 적도 있단다. 프로 역의 예프게니 아키모프는 조연으로는 괜찮았지만 주연급은 아니었다. 이 사람이 <발퀴레>의 지크문트라는 잘못된 정보를 접하고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키잡이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프라이아 역의 타티아나 보로디나는 <로엔그린>에서 엘자를 맡은 적이 있단다. 에르다 역의 즐라타 불리체바는 부드럽고 깔끔한 음색이 영락없는 에르다였다. <지크프리트>의 에르다이기도 하다.

라인 처녀들의 합창에서는 화음의 밸런스가 영 안 맞았다. 제일 윗 성부를 맡은 보클린데는 목소리가 너무 컸고, 가운데 성부를 맡은 벨군데는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보클린데 역의 잔나 돔브로브스카야는 <파르지팔>에서 꽃처녀를 맡은 적이 있단다. 벨군데 역의 리아 셰브초바는 이번 <발퀴레>에서 게르힐데를 맡았고, <파르지팔>의 꽃처녀와 <발퀴레>의 브륀힐데를 한 적도 있단다. (어째 좀 이상하다. 브륀힐데라니. 저 작은 목소리로? 팜플렛의 오류가 아닐까.) 플로스힐데 역의 나덴자다 세르뒤크는 <발퀴레>의 발트라우테이기도 하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브랑게네를 맡은 적도 있단다.

니벨룽족은 남자 어른이 여성 또는 어린이와 섞여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날 공연에서는 모두 어린이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은 시각적으로는 좋지만 알베리히의 위협에 따른 비명 소리가 이상해지는 단점이 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김리의 목소리를 떠올려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될 것이다.

연출 문제는 나에게는 워낙 관심 밖이라 별로 할 말은 없다. 대신 소박한 인상만 기록으로 남겨 두기로 한다. 무대 장식 등 겉으로 보이는 부분을 제외하면 대본에 나타난 지시에 충실한 고전적인 연출이었는데, 연출을 단지 음악을 보조하는 역할 정도로만 여기는 나로서는 이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흔히 그렇듯이 연출이 음악의 우위에 자리 잡아 음악 해석을 방해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낫지 않은가? 무대 세트는 여러 신화를 짜깁기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런 점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저 말 많았던 석상이 더더욱 그렇다. 라인 처녀들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옷차림이 얌전해서 조금은 실망했다. 대신 푸른 빛을 내는 머리카락을 뒤집어 쓴 무용수들의 옷차림이 야했다. 푸른 빛 머리는 마치 해초(海草) 같았는데, 참 마음에 드는 장식이었다. 용을 표현한 아이디어는 대체로 호평을 받은 것 같은데, 나는 어째 부채춤이 생각나서 우습기만 했다. 거대한 '라인의 황금' 속에 프라이아가 들어간 것을 보고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생각났다. 알베리히의 의상은 <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오는 사오정을 연상시켜서 좀 우습다고 생각했다.

© KBS 출처: http://www.kbs.co.kr/2tv/superboard/character.shtml


뒷얘기. 공연 시작 직전에 목발을 짚은 금발의 백인 여성과 세종문화회관 직원의 말다툼이 잠시 주의를 끌었는데, 다리 불편을 호소하면서 1층 C열 오른쪽 통로 쪽 빈자리에 앉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 여자가 R 등급 티켓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결국 억지를 부려서 내 자리와 통로를 사이에 둔 자리에 앉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그너 공연을 찾아 전 세계를 돌아다니기로 유명한 사람이란다. 이름이나 기타 신상 정보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비 기인이라고 하니 그런 줄 알았으면 말이라도 걸어볼 걸 그랬다.

2005년 10월 3일 씀.
2006년 1월 10일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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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5.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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