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6일 화요일

2014.12.13. 서울시향-정명훈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

제가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일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대전에 초청을 받아서 그쪽에서 요구했던 프로그램인 말러 교향곡 1번과 쳄린스키 《인어공주》를 연주했는데, 리허설 때까지는 그럭저럭 잘했다가 본 공연 때 체력 고갈로 급격하게 망가지더군요. 아마 구자범 시대 경기필 최악의 연주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수원에서 대전까지 차로 이동해서 당일 공연하는 일이 그만큼 체력적으로 힘들었던 겁니다.

그런데 서울시향이 무려 통영까지 와서 당일 공연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잘하더군요. 평소 연주력이야 경기필보다 당연히 낫겠지만, 체력까지 그렇게 큰 차이가 난다고는 믿기 어렵습니다. 이날 프로그램이 훨씬 가벼운 탓도 있었겠지만, 거리가 훨씬 먼 것을 생각하면 역시 신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날 공연장에 있었던 분은 그 이유를 대충 짐작할 겁니다. 지휘자가 관객 앞에서 직접 말한 것처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연주하니 소리가 너무 좋아서 연주에 몰입이 훨씬 잘됐을 거예요.

(나중에 붙임: 단순한 몰입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연주회장 음향 환경에 따라 체력 소모도 차이가 매우 클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부는 악기' 연주자들은 확실히 힘들어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특히 목관 악기는 제법 망가졌죠. 괴물 같은 외국인 금관 연주자들은 그렇다 치고요. (트럼펫 수석 알렉상드르 바티 덜덜덜…) 페이스북에는 이날 공연 이후 감기몸살을 호소하는 목관악기 연주자도 있더군요. 통영 공연이 아니더라도 일정이 아주 빡빡했나 보더라고요. 우리나 그쪽이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지만, 하루 먼저 와서 다음 날 공연했으면 훨씬 좋은 연주를 들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현악기는 서울 공연과 비교해도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을 만큼 훌륭했습니다. 어쩌면 실제로는 망가졌는데 연주회장이 워낙 좋아서 전체적으로 좋게 들렸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저는 이날 관객에게 피해 주지 않고 기록용 사진을 찍으려고 5층 꼭대기까지 올라갔는데요, 전부터 통영국제음악당 5층 소리가 좋은 걸 알고는 있었지만,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2층 맨 앞자리와 비교해 오히려 나은 점이 있다는 생각에 새삼 놀랐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과장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서울시향 더블베이스 연주자들이 이렇게나 잘하나 싶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예술의 전당에서 안 들리던 초저역대가 또렷하게 들렸고, 전체적인 음량도 더 크게 느껴졌고, 그것을 넘어 연주력 자체가 차원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서울시향 개편 이후 첫 공연부터 최근까지 서울시향의 발전 과정을 꾸준히 지켜본 사람입니다만, 10년이 다 되도록 서울시향 더블베이스 연주자들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연주회장 실내음향이 이렇게나 중요한 거였습니다.

음향 차이를 지휘자의 해석 차이로 착각할 만한 곳도 있었습니다. 특히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3악장은 서울에서 들었을 때 무시무시하게 폭력적으로 들렸지만, 통영에서는 훨씬 얌전하게 들리더라고요. 심지어 템포도 옛날보다 훨씬 빠르다고 느꼈습니다. 그동안 해석이 달라졌나 싶어서 서울 공연 방송 녹음을 확인해 봤더니 웬걸, 큰 차이가 없더라고요. 아마도 통영국제음악당 5층 꼭대기에서 아무리 미세한 소리까지 잘 들렸어도 절대적인 음량 차이는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1층에서 들었던 분들은 서울 공연 이상의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싶어요.

4악장은 반대로 5층 꼭대기에서도 통영 공연이 훨씬 좋게 들렸습니다. 2008년 서울 공연 때, 서울시향 월간지 『SPO』에 기고한 리뷰에서 저는 "절망 속에서 처절하게 허우적거리는 대신 차분히 관조하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썼는데, 근거로 들었던 주요 해석 포인트는 이번 공연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미세한 소리까지 잘 들려서 그런지 느낌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어쩌면 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연주자들부터 감정이입이 되었을까요?

앞서 목관악기가 망가졌다고 썼지만, 차이콥스키 1악장에서 클라리넷 부수석 임상우 씨 솔로 연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서울시향이 2008년에 아마도 처음으로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을 연주했을 때, 클라리넷 수석으로 채재일 씨가 새로 들어와서 충격적인 명연주를 들려주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이날 임상우 씨 연주는 채재일 씨가 넘사벽만은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어딘가 결정적인 '한 방'이 모자라기는 했는데, 이유가 뭔지 주제 넘게 분석하려 들지는 않겠습니다. 아마 본인이 가장 잘 알 테고, 전보다 나아진 모습을 보았으니 알아서 잘하겠죠.

그리고 팀파니 객원. 이름이 롤란드 뭐시기라던데, 참 잘하더군요. 서울시향 팀파니 수석이자 라디오 프랑스 필 수석이기도 한 아드리앙 페뤼송이 라디오 프랑스 필 지휘자 대타로 지휘 대뷔를 하게 되면서 임시로 데려온 모양입니다. 온 김에 눌러 앉히려고 꼬드기는 모양이던데요. 아마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수석이라죠?

또, 트럼펫. 2008년에는 알렉상드르 바티가 없었지만, 이날에는 바티가 있었습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알렉상드르 바티는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수석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붙임: 여기 그만둔 지 좀 됐다네요. ㅡ,.ㅡa) 한 마디로 세계 정상급 연주자라는 말이죠. 그 전에 가레스 플라워스라는 사람이 잠시 수석으로 있다가 나가 버렸는데, 그때 사람들 많이 아쉬워했었죠. 그런데 얼마 안 가 알렉상드르 바티가 온 겁니다. 검색해 보니 2009년 일이로군요. 그 대단한 연주자가 통영에도 왔습니다. 이날 연주도 아주 뭐, 끝장이었습니다. ^^

…쓰다 보니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할 말은 많지만 여기서 줄이고, 저는 이만 잠자러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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