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9일(일)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루도비크 모를로
협연자 : 미샤 브뤼거고스먼(소프라노)
리아도프, 마법의 호수, 바바야가, 키키모라
A. Liadov, The Enchanted Lake / Baba-Yaga, Kikimora
라벨, 셰에라자드
M. Ravel, Scheherazade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제7번 c#단조, 작품131
S. Prokofiev, Symphony No. 7 in c#minor, Op.131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7번은 주선율이 은근히 까다롭게 조각나 이 악기 저 악기에 흩어져 있어서, 어찌 들으면 베베른이 썼던 기법인 이른바 '음색선율'(Klangfarbenmelodie)을 프로코피예프식으로 바꿔놓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지휘자는 그 선율 조각들을 잘 모아서 하나로 꿰는데 적지 않게 마음을 쏟아야 한다. 음반을 들어보면 일류 지휘자와 일류 악단 녹음에서도 '꿰맨 자국'이 곧잘 드러나기도 하며, 작품 해석 차이는 다른 작품과 견주면 덜 나는 편이다.
다시 말하면 이 곡은 서울시향한테 '위험한'(?) 작품이어서 유럽 악단 수준을 꾸준히 좇아가는 서울시향이 가장 모자란 곳을 숨김없이 드러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휘자 루도비크 모를로는 '꿰맨 자국'을 없애고 소리를 예쁘게 다듬는 솜씨가 남달랐다. 객원 지휘자가 악단을 데리고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그런데도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7번을 짧은 시간에 이렇게까지 말끔하게 다듬었다면, 서울시향이 날이 갈수록 연주 솜씨가 좋아진다고는 해도 지휘자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소리를 다듬는데 너무 마음을 쏟다 보면 과감한 해석을 하지 못해서 자칫 연주가 맨송맨송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날 연주에서는 작품에 담긴 화끈한 소리와 아기자기한 소리 따위가 제법 그럴싸하게 살아났으며, 이때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타악기 연주자들이었다. 그리고 타악기 가운데 하나만 꼽으라면 '큰북'이 이날 가장 멋졌다.
오케스트라용 36인치 큰북이 내는 소리는 웬만큼 세게 두드려대지 않으면 평범한 가정용 오디오로는 잘 들리지 않는다. 글쓴이 방에 있는 중급 오디오로는 큰북 소리가 잘 들리기는 하는데 음색이 연주회장에서 듣던 것과는 좀 다르다. 최고급 오디오 가운데서도 설치가 잘된 놈들만 그럴싸한 소리를 내는데, 글쓴이는 오디오로 제대로 된 36인치 큰북 소리를 딱 한 번 들어보았다. 그런데 이날 연주회에서 큰북이 들려주는 '오디오스러운'(?) 음향적 쾌감이 매우 컸다.
이를테면 2악장에서 가파른 아첼레란도에 이은 마디 18과 마디 239, 또는 크레셴도를 업은 총주에 이어지는 마디 134에서 그랬으며, 이때 큰북이 '쿵쿵' 두드려대는 단단하면서도 묵직한 소리가 그야말로 '악마의 쾌(快)'라 할 만했다. 2악장이 끝날 무렵인 마디 476부터는 2악장 가운데 가장 멋진 곳이어서 조금 앞선 마디 431부터 나중에 앙코르로 연주하기도 했는데, 여기서도 이를테면 마디 484에서 큰북이 '쿵쿵쿵' 하는 소리가 참으로 멋졌다.
3악장에서는 마디 17에서 하프, 피아노, 플루트, 현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마치 겨울철 난롯가처럼 따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 들릴락말락 큰북 소리가 얹어지니 첫눈이 내리는 듯한 설렘도 느껴졌다. 또 '난롯가' 음형이 총주로 나오는 마디 39에서는 마디 43부터 나오는 큰북 소리에 맞추어 심장이 덩달아 두근거리는 듯했다. 지휘자는 악보에서 지시한 '느리고 풍부한 표정으로'(Andante expressive)와 견주어 3악장 템포를 제법 빨리 잡았으며, 덕분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미리 느껴지기까지 했다.
큰북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1악장에서도 마디 84 같은 곳에서 큰북이 멋진 소리를 들려주었고, 작은북과 글록켄슈필 따위가 더욱 두드러지는 4악장에서도 마디 274 또는 마디 387에서 큰북 소리가 음향적인 쾌감을 주었다. 4악장 마지막은 글록켄슈필 등이 앙증맞은 소리를 내면서 끝낼 수도 있고 또는 오케스트라 총주로 법석대며 끝낼 수도 있다. 이날 서울시향은 어찌할까 귀담아들었더니 글록켄슈필 등으로 얌전하게 끝내더라. 겨울에는 이게 낫다.
이날 큰북을 연주한 사람은 Raul Vergara였던 듯하다. 그런데 이날 첫 곡으로 연주한 리아도프 《마법의 호수》, 《바바야가》, 《키키모라》에서는 김미연이 큰북을 연주했다. 이때에도 큰북이 제법 멋져서 《마법의 호수》에서는 저 깊은 곳에서 북받쳐 오르는 땅 울림 같은 소리를 들려주었고, 《바바야가》에서는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7번 2악장 못지않은 '악마의 쾌(快)'를 들려주었다.
라벨 《셰에라자드》를 협연한 소프라노 미샤 브뤼거고스먼은 노랫말에 담긴 퇴폐적인 느낌을 흑인이 아니면 따라 하기도 어려울 듯한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매우 잘 살렸다. 또 블루스 음악 등에서 금관 악기를 흉내 내거나 할 때 성대를 떨면서 내는 콧소리와 비슷한 발성법을 이따금 쓰기도 했다. 다른 가수가 녹음한 음반을 들어보면 소녀 같거나 너무 정직한(?) 목소리가 노랫말이나 음악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미샤 브뤼거고스먼은 그야말로 노래에 딱 맞았다. 목소리에 힘과 '독기'가 좀 더 있었더라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살로메》에서 '살로메' 역을 하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