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연주회 리뷰 같은 거 귀찮아서 잘 안 쓰는데, 무려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실연으로 듣고 온 만큼 짧게나마 써봅니다.
바그너 작품은 영화에 비유하자면 'B급 영화'와 닮은 데가 있습니다. 저와 이름 비슷하신 박원철 님도 생전에 비슷한 말씀을 하셨죠. 정명훈 샘은 'B급' 정서를 표현하는 일에 약점이 있는 듯합니다. 옛날에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들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트리스탄과 이졸데》 들으면서 새삼 느꼈습니다. 1막 해석이 마음에 안 들어서 적당한 표현을 생각하다가 이 생각이 들더군요. 2막과 3막은 정명훈 샘의 장점으로 단점을 충분히 가릴 수 있었고, 무엇보다 3막은 끝내주게 훌륭했습니다. 3막이 좋으면 다 좋은 거다, 하는 생각이 들 만큼이요.
서울시향은 요즘 실력이면 이쯤은 할 수 있겠다고 예상은 했지만, 무려 바그너를 제대로 연주하는 걸 실제로 들으니까 이건 뭐… ㅠ.ㅠ
잉글리시 호른 연주하셨던 분, 어디서 데려온 누군지 모르겠지만, 엄청나시더군요. 이분 어떻게 서울시향에 주저앉혀 주시면…^^;
그리고 알렉상드르 바티 본좌. 말이 필요 없습니다. 바그네리안이 아니면 잘 모를 대목만 하나 설명하자면, 3막에서 배가 보이고 뿔피리 소리 바뀌는 대목은 본디 잉글리시 호른이 연주해야 합니다. 극 중에서 목동이 연주하는 그 악기거든요. 바그너는 이 대목을 '트럼펫처럼' 연주하라고 했는데, 아예 트럼펫으로 연주하기도 합니다. 저도 그게 낫다고 생각하고요. 어제는 바티 본좌가 발코니에서 이 대목을 연주했죠. 어제 연주한 악기는 일반적인 트럼펫이 아니고, 서울시향 페이스북 보니까 무슨 목제 트럼펫(?)인 모양이던데, 그래서 트럼펫 주제에 '식물성' 음색이 나더군요. 이 대목에 아주 딱이었습니다.
가수들은 브랑게네 말고는 다들 조금씩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중간 휴식이 너무 짧았던 탓이 컸지 싶네요. 1막에서는 '페이스 조절'하느라 힘을 아끼는 티가 났고, 1시간 가까이 쉴 새 없이 소리를 질러대는 무지막지한(!) 2막을 지나 3막으로 가니까 트리스탄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이더군요. 4시쯤에 시작해서 바이로이트식으로 중간 휴식 1시간쯤 넣으면 얼마나 좋아요. 예술의 전당 님하들아, 대관 어떻게 좀!
그런데 그것까지 고려해도 트리스탄은 좀 별로였습니다. 다 죽어가는 트리스탄 목소리가 너무 멀쩡해요. 정작 질러 줄때는 힘들어하면서 말이죠. 이졸데도 딕션이 별로. 무엇보다 2막에서 "Frau Minne will"(사랑의 여신의 의지다)를 대충 얼버무린 대목은 용서가 안 됩니다. 쿠르베날은 실력이 대단한 건 알겠는데, 그 좋은 실력을 제대로 못(안) 뽑아낸 듯. 트위터 보니 몸 상태가 최상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한국에만 오면 갑자기 아픈 가수가 한둘이 아니라 뭐…-_-; 마르케 왕은 잘하기는 했지만, 연광철 샘을 비롯해서 훨씬 잘하는 한국인 가수가 여럿이라… 1막 1장에 나오는 선원은 가사의 표면만 읽고 리트처럼 부르더군요. 맥락 다 무시하고 가사의 표면만 보면 잘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전체 드라마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이 대목이 이렇게 되고 맙니다.
뭐, 무려 《트리스탄과 이졸데》였다는 점을 헤아리고 나면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내년에는 니나 스템메, 린다 왓슨, 로버트 딘 스미스, 스티븐 굴드, 뭐 이런 분들 좀… 그래도 서울시향이 국내 오케스트라 중에 돈 제일 많잖아요? ^^;
나중에 붙임:
존 맥 매스터(트리스탄), 이름가르트 빌스마이어(이졸데), 예카테리나 구바노바 (브랑게네), 크리스토퍼 몰트먼(쿠르베날), 미하일 페트렌코(마르케 왕), 외
Soloists : John Mac Master(Tristan), Irmgard Vilsmaier(Isolde), Ekaterina Gubanova(Brangane), Christopher Maltman(Kurwenal), Mikhail Petrenko(Mar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