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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26일 목요일

2009.10.10. 코다이 《갈란타 춤곡》 /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 / 베토벤 교향곡 7번 ― 호칸 하르덴베리에르 / 디에고 마테우스 / 서울시향

디에고 마테우스는 '대타' 지휘자였다. 본디 미코 프랑크가 지휘를 맡기로 했다가 갑자기 아파서 지휘자가 바뀌었단다. 그런데 '대타'치고는 솜씨가 너무 뛰어난데다가 개성이 매우 뚜렷했다. 코다이 《갈란타 춤곡》에서는 악보에서 지시한 메트로놈 값에 견주어 터무니없이 느린 템포로 한 걸음씩 차분히 걷는 듯했으며, 이를테면 마디 180에서 트라이앵글과 글록켄슈필 소리가 아기자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또 느린 템포를 업고 클라리넷 수석 채재일이 루바토로 잔뜩 멋을 낸 독주를 뽐내기도 했다.

저런 템포로 나중에 가서 어쩌려나 걱정이 들었으나 웬걸, 제대로 빨라지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만한 곳, 이를테면 마디 209나 마디 236 등에서는 템포가 악보 지시에 맞게끔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바뀌었다가 다시 마디 336에서 도로 크게 느려졌다. 그러면서 곳곳에 나오는 리타르단도, 아첼레란도, 악센트 따위를 맛깔스럽게 살리는 솜씨가 매우 인상 깊었다. 번스타인이 울고 갈 '고무줄 템포'라 하겠는데, 그래서 작품에 나타나는 처절한 파토스가 빛이 바랜 대신에 블랙 코미디 같은 익살이 살아났다. 글쓴이는 이날 첫 곡만 듣고도 디에고 마테우스를 미코 프랑크보다 윗줄에 놓기로 마음먹었다. 미코 프랑크는 배 좀 아플 테다.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을 협연한 호칸 하르덴베리에르는 거친 트럼펫 소리를 부드럽게 다듬는 솜씨가 매우 훌륭했으며, 짧은 프레이즈만으로도 기품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진줏빛으로 그윽하게 울리는 소리 빛깔은 금빛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트럼펫다운' 소리와는 조금 달라서 트럼펫이 아니라 오보에나 클라리넷 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1악장 처음에 마치 오블리가토 악기처럼 주선율을 거든 대목이 색달랐고, 2악장에서는 템포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했는지 티 나지 않게 짧은 긴장을 만들어 오케스트라 템포를 끌고 가는 솜씨가 인상 깊었다. 앙코르로 연주한 피아졸라 《Oblivion》에서는 하몬 뮤트(harmon mute)를 써서 마일스 데이비스를 닮은 소리를 뽐내기도 했다.

이날 연주회 주제를 하나만 꼽으라면 '트럼펫'이라 할 수 있겠는데, 베토벤 교향곡 7번에서 트럼펫이 돋보이는 곳은 4악장이다. 그러나 눈에 띄는 트럼펫 솔로 악구는 없고 A, E, F♯ 음이 대부분으로, 베토벤 시대 트럼펫은 구조적으로 낼 수 없는 음이 많았다. 그런데도 트럼펫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 곡에서 트럼펫은 선율이 아니라 리듬을 이끌어가며, 그 때문에 관악기보다 타악기에 가깝다. 4악장 내내 되풀이해 나오는 '♬♪' 리듬과 여린박에 붙은 스포르찬도를 곡이 끝날 때까지 깔끔하게 살리는 일은 일류 오케스트라 단원에게도 쉽지 않다. 명반으로 소문난 클라이버―빈필 음반은 알고 보면 트럼펫 리듬을 숨긴 '편법'에 빚지고 있다.

이날 트럼펫을 연주한 단원은 Jeffrey Holbrook과 Niels E. Heidoe였는데, 모든 곳에서 고른 소리를 내지는 못했으나 전체적으로 매우 훌륭한 연주였다. 지휘자가 4악장 템포를 몹시 빨리 잡고 신나게 달려대는데도 '♬♪' 리듬을 깔끔하게 다스렸으며 스포르찬도 리듬 또한 매우 훌륭했다. 다만, 도돌이표가 있는 마디 12에서는 '♬♪' 리듬을 또렷하게 살리지 않고 전략적으로 팀파니 뒤로 숨는 듯해서 조금 아쉬웠고, 스포르찬도 음형에서는 이따금 센박이 너무 세서 스포르찬도한테 덤비기도 했다.

Jeffrey Holbrook은 빠른 음형을 깔끔하게 연주하는 솜씨가 매우 뛰어난 연주자인데, 그러나 매우 큰 소리는 잘 내지 못하는 듯해 아쉽다. 이를테면 마디 219에서는 호른과 팀파니 소리에 밀려 빛을 잃었고, 마디 341에서는 '♬♪' 리듬도 팀파니와 목관 등에 기댔다. 마디 402에서는 모든 악기가 크레셴도를 하는 동안 트럼펫이 결정적인 '한 방'을 터트리지 못했고, 셈여림표가 마침내 'fff'에 이르렀을 때에는 'ff'에서 한 계단 더 올라서지 못했다.

지휘자 디에고 마테우스는 《갈란타 춤곡》에서 보여준 과장벽을 베토벤 교향곡에서는 함부로 내보이지 못하다가 4악장에서야 참았던 '끼'를 터트렸다. 템포가 빨라도 너무 빨라서 오케스트라가 티 나지 않게 버벅거렸으나 끝까지 큰 실수 없이 호흡을 놓치지 않고 잘했으며, 단원들 얼굴에는 쫓기는 표정이 아니라 신나 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앙상블만을 말하자면 3악장이 가장 훌륭했으나 '감동'을 말하자면 4악장이 앞선 악장을 압도했다.

고백하건대 글쓴이는 이날 지휘자가 바뀌었음은 알았으나 바뀐 지휘자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연주를 들으면서 언뜻 번스타인과 두다멜을 떠올렸는데, 디에고 마테우스가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교향악단 악장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고 깜짝 놀랐다. 이날 연주회에 숨은 주제를 하나 더 말하자면 '춤곡'이라 하겠는데, 베토벤 교향곡 7번이나 코다이 《갈란타 춤곡》은 알고 보면 라틴 댄스였던 것이다. 이쯤 되면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교향악단이 앙코르로 즐겨 연주하던 곡을 떠올려야 한다. 맘보!

2009년 9월 2일 수요일

2008.12.04. 코다이 갈란타 춤곡 /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 라흐마니노프 교향적 춤곡 - 발렌티나 리시차 / 제임스 저드 / 서울시향

2008년 12월 4일(목)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James Judd
협연자 : Valentina Lisitsa

Kodaly, Dances of Galanta
Grieg, Piano Concerto in a, Op. 16
Rachmaninoff, Symphonic Dances, Op. 45



악기는 보통 온도와 습도 변화에 민감하며 옛날 악기일수록 더하다. 이번 연주회는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데다 미리 무대에 나와서 연습하는 관악기 연주자들이 평소보다 많아서 조금 걱정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코다이 <갈란타 춤곡>에서 호른이 일찌감치 큼지막한 실수를 하더니 플루트가 실수를 이어받고 다른 악기들도 영 제소리를 못 낸다. 지휘자의 해석은 나쁘지 않은 듯했고 뒤로 갈수록 차근차근 긴장감을 쌓아나가는 모습이 멋졌으나 실수가 너무 잦아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다 함께 헤매는 가운데 클라리넷 수석 연주자 혼자서 평소처럼 야무지게 연주해서 눈에 확 띄었으며 이 곡에서 가장 비중이 큰 악기가 클라리넷이라 더욱 돋보였다. 언젠가 밝힌 바 있듯이 글쓴이는 클라리넷 수석 채재일 씨 팬이다.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한 발렌티나 리시차는 늘씬한 몸매를 보아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힘과 테크닉을 자랑했다. 무시무시한 트릴과 글리산도를 듣고 있자니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이 이렇게 연주하기 어려운 곡이었던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며, 글쓴이는 음악을 듣기보다는 테크닉을 듣고 있음을 여러 차례 깨닫곤 했다. 이것이야말로 리시차가 가진 장점이자 치명적인 단점이 아닐까. 리시차가 들려준 '음악'은 눈부신 테크닉만한 깊이는 없고 그저 평범하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그나마 테크닉에 가려버리곤 했다. 이렇게 음악이 아닌 '서커스'를 들려주어서야 듣는이가 받을 수 있는 감동이 얼마나 깊을지는 뻔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음악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듣는 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테크닉이야말로 참된 고급 테크닉이 아닐까.

그러나 앙코르에서는 맘먹고 테크닉을 뽐내는 모습이 그것대로 좋았으며 '라 캄파넬라'를 아찔한 빠르기로 연주하는 것을 듣고는 할 말을 잃었다. 관객이 좋다꾸나 손뼉을 쳐주니 빼지도 않고 커튼콜 한 번에 한 곡씩 네 곡이나 연주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자 키신이냐!'

라흐마니노프 <교향적 춤곡> 연주는 악기나 사람이나 이제 몸이 다 풀린 듯 다부졌다. 특히 1악장 중간에 나오는 그윽한 색소폰 선율과 그에 딸린 목관 앙상블이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이 곡에서 은근히 멋지게 나오는 베이스클라리넷도 작품 곳곳에서 돋보였다. 3악장 마디 235 이후 또는 1악장 마디 154 이후부터 긴 호흡으로 긴장감을 쌓아가는 대목이 매우 좋았고 때때로 알맞게 터트려주는 타악기 소리도 멋졌다.

금관도 제법 잘했으나 2악장 처음을 비롯해 금관끼리 화음을 만들어내는 대목에서 데크레셴도-크레셴도가 깔끔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2악장 마디 19에서 독주 바이올린이 루바토로 부드럽게 시작하는 연주를 글쓴이는 싫어하는데, 이날 악장을 맡은 웨인 린(?)은 악보에 있는 음가 그대로 재빠르게 연주해서 썩 마음에 들었다. 다만, 음색이 좀 더 날카로웠으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지휘자 제임스 저드는 국내 악단이 데려올 수 있는 객원 지휘자 가운데 최상급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날 <교향적 춤곡> 해석도 매우 훌륭했으며, 그 가운데 2악장에 해석이 흥미로운 곳이 많았다. 군데군데 루바토를 쓰면서도 느슨해지지 않았고, 그런 가운데 콘트라베이스가 저음을 단단하게 찍어주어 슬프면서도 퇴폐적인 '슬라브 왈츠' 느낌을 잘 살렸다. 프레이즈를 새로 시작하는 곳에서 템포를 크게 떨어트렸다가 아첼레란도를 쓰곤 했던 대목도 참신했다.

2악장 마디 119와 이어지는 대목에서 테누토와 헤어핀(hairpin; <>)을 겹쳐놓은 곳은 보통 리테누토를 써서 템포를 조였다 풀었다 한다. 그러나 제임스 저드는 갑자기 템포를 너무 떨어트린 탓에 이곳에서 템포가 바뀌는 듯 마는 듯했다. '처음 빠르기로 돌아가 조금 덜 빠르게 A tempo poco meno mosso'라는 지시가 있기는 하지만 갑자기 너무 느려지니 지루한 느낌이 들었으며, 마디 47에서 악보에 없는 리테누토를 맛깔스럽게 쓴 일과 어울리지 않아 갸우뚱했다. 아마도 프레이즈를 새로 시작할 때 템포를 떨어뜨린 다음 아첼레란도 쓰는 일에 일관성을 두려고 그러지 않았나 싶었으나 이곳에서만큼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마디 169에서 템포를 떨어뜨렸다가 마디 171에서 다시 조이라는 지시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아첼레란도를 썼는데, 조금 느슨한 느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제법 그럴싸했다.

3악장 마디 162에는 이상한 지시가 붙어 있다. '템포 바꾸지 말고, 그러나 서두르듯이 L'istesso tempo, ma agitato'라니, 템포를 바꾸란 말인가 말란 말인가. 음반을 들어보면 이 대목에서 갑자기 빨라지기도 하고 지루하게 늘어지기도 해서 제임스 저드는 어떻게 할지 관심 있게 들어보았다. 그랬더니 아주 살짝 빨라지는 듯싶었다. 아무래도 이게 정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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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31일 월요일

2008.08.12.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 프랑크 페터 침머만 / 정명훈 / 서울시향

2008년 8월 12일(화) 오후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프랑크 페터 침머만 (바이올린)

Beethoven, Violin Concerto in D, Op. 61
Dvorak, Symphony No. 9 in e, Op. 95 "From the New World"



음식 재료를 여러 가지 많이 쓴다고 아무나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나 여러 재료를 두루 잘 쓰는 요리사는 재료가 다양할수록 더 맛있는 음식을 잘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셈여림, 빠르고 느림, 거친 소리와 매끈한 소리 등 표현할 수 있는 재료가 많을수록 좋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한 프랑크 페터 치머만은 가지가지 재료를 적절히 쓰는 재주가 남달랐다. 이를테면 빠른 음형에서 윗활로 긁으면서 매끄러운 소리를 내다가도 다른 부분에서는 아랫활로 날카로운 소리를 내기도 했고, 때때로 발까지 굴러가며 힘차게 활을 그어댔으며 여린 소리는 또 매우 여리게 내서 뒤쪽에 앉은 사람은 잘 안 들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연주회장이 세종문화화관이 아니라면 좋았으련만.

치머만의 연주가 딱딱했다는 의견이 더러 있던데,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음향 탓에 소리가 좀 메마르게 들리기도 했고 연주자가 독일 사람이라 그런지 잔꾀를 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연주해서 무뚝뚝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딱딱하다는 말은 너무 한쪽만 보고 한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가만 보니 <SPO> 연주자 소개말에 이런 말이 있다.

"그는 매우 냉철하면서 객관적으로 음악을 대하는 연주자다. 감정보다는 이성을, 흥분하여 말하기보다는 논리적으로 표현하려 하고 디테일 또한 절대 대충 처리하는 법이 없다."

이 말은 치머만이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만 연주하는 메마른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라고 믿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 말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저 말에서 '그'를 '브람스'로, '연주자'를 '작곡가'로 바꿔보면 어떨까? 작곡 기법을 따지자면 참말로 옳다. 브람스만큼 논리적으로 작곡한 사람도 드물다. 그러나 브람스 음악이 '머리로 듣는' 음악인가?

치머만은 브람스 같은 연주자다. 가지가지 재료를 적절히 쓰는 방법에는 치밀한 계산이 뒷받침하는 듯했지만, 그 소리에는 깊은 감성이 우러나왔다. 그에게 이성과 감성 가운데 어느 하나가 먼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중용'이라는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연주자가 또 있을까.

치머만이 들려준 연주는 다 좋았지만 딱 한 군데 내가 싫어하는 해석을 보여준 곳이 있었다. 3악장 마디 331에 나오는 F# 음을 너무 짧게 끊어버린 것이다. 이곳은 작품 전체의 절정에 해당하는 곳으로 D 장조 으뜸화음을 길게 늘인 'I-VI-I-ii-V-I'꼴 화성 진행을 되풀이하면서 마치 '승리의 팡파르'같은 분위기를 내되 그 고양감을 독주 바이올린 선율에 집중시켜 놓았다. 여기서 F# 음에 따라붙는 화음은 버금가온화음(VI)이고 앞 마디의 선율 D-C#-D-E-F#에 이어져 화성과 선율 모두 F# 음에 고양감을 실어주고 있다. 그러나 치머만은 이 중요한 음을 악보에서 지시한 것보다도 훨씬 짧게 지나가듯 연주했다. 소리를 좀 더 늘여서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는 금빛 반짝이는 소리를 들려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앙코르로 연주한 파가니니의 <신이여 왕을 지켜 주소서> 변주곡은 치머만의 왼손 테크닉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소름 끼치도록 잘 보여주었다. 하긴, 테크닉이 이쯤 되고 보면 감성적인 연주자라는 소리를 듣기 어렵기도 하겠다.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은 '응원 교향곡'이라고도 불릴 만큼 4악장 제1 주제가 응원가로 자주 쓰이기도 하고 또 386세대에게는 '전대협 팡파르'로 기억되기도 한다. 이런 지나친 명성은 자칫 음악이 선정적으로 흐르게 할 위험이 있으며, 더군다나 이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민요풍 선율과 리듬을 잘못 살리면 자칫 촌스러워지기 쉽다. 정명훈은 템포를 제법 느리게 잡고 저음 현을 두드러지게 한 '거장풍' 해석으로 위험을 비켜갔다.

특히 1악장 도입부에서는 악보에 있는 메트로놈 지시보다 두 배 이상 느린 템포로 시작해 음형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빨라지도록 했으며, 코다에 유난히 힘을 실어주고 템포도 바짝 조여서 마치 1악장 전체에 크레셴도와 아첼레란도를 준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4악장 도입부에서도 느린 템포로 시작해 아첼레란도를 썼다.

1악장은 소나타 형식을 따르지만 제2 주제가 나오기 앞선 마디 91에서 플루트와 오보에가 연주하는 '사이비' 제2 주제가 나오는 점이 특이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브루크너가 그렇게 한 것처럼 주제 셋을 거느린 별난 소나타 형식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통적인 형식에 맞추어 보면 이 주제는 제2 주제가 될 수 없다. 이 작품이 e 단조를 따르므로 제2 주제는 e 단조의 관계장조인 G 장조라야 하지만 이 주제는 g 단조이기 때문이다. 정명훈은 진짜 제2 주제가 나오는 마디 149에서 템포를 크게 늦추어 제1 주제 및 '사이비' 제2 주제와 뚜렷이 구분하고 전통적인 형식미를 살렸다.

2악장에서는 잉글리시 호른 독주도 멋있었지만, 마디 54부터 나오는 콘트라베이스 피치카토와 마디 78부터 나오는 첼로 트레몰로를 주선율처럼 앞세운 것이 이날 연주 가운데 가장 멋있었다. 다만, 마디 107부터 109까지 세 번 나오는 모두쉼표(Generalpause)를 느린 템포에 비해 가볍게 다룬 것이 조금은 뜻밖이었다. 3악장이 끝나기 바로 앞서 나오는 모두쉼표 또한 과장없이 가볍게 처리했다. 3악장 템포는 악보 지시보다 빠른 편이었고 금관과 팀파니의 활약이 돋보였다.

4악장에서는 저 유명한 제1 주제도 좋았지만 제2 주제(마디 66) 클라리넷 선율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객원인지 단원인지 헷갈리는 이 연주자는(나중에 붙임: 서울시향 클라리넷 수석 ☞채재일) 얼마 전부터 시향 정기연주회에서 좋은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데, 나는 이제 완전히 팬이 되어버렸다. 마디 320에서 곡을 끝맺기 전에 잠시 힘을 빼며 호른과 팀파니가 폭풍전야처럼 긴장감을 쌓아가는 것도 나무랄 데 없었다.

이 작품은 '신세계로부터'라는 표제가 말해주듯이 미국을 노골적으로 찬양한 작품이다. 그러나 정명훈은 앙코르로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 4악장 '환희'를 연주하기에 앞서 올림픽 출전 선수를 응원하는 말을 해서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또한 '응원 교향곡'으로 만들었다. 어쨌거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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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8.07.05.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 니콜라스 안겔리치 / 정명훈 / 서울시향

서울시향 클라리넷 수석 채재일이 무대를 휘어잡아 《비창 교향곡》 바순 독주를 빛바래게 해버린 연주회. 어마어마한 '포스'를 뿜어내는 진줏빛 소토 보체(sotto voce)에 깜짝 놀랐으나 정명훈이 뿜어내는 존재감이 이날따라 워낙 대단해서 채재일한테 논점을 모아주기 어려웠다. 이 일이 못내 아쉬워서 다음 연주회 때 맘먹고 칭찬한다는 게 고작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4악장 2주제... -_-; 이날 숨은 주인공은 채재일이었다. 완소 채재일 씨 짱 드셈. >_<


2008년 7월 5일(토)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니콜라스 안겔리치(피아노)

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in E-flat, Op. 73 "Emperor"
Tchaikovksy, Symphony No. 6 in b, Op. 74 "Pathetique"


정명훈이 서울시향을 지휘할 때면 앙상블이 갑자기 크게 좋아지곤 한다. 정명훈이 지휘를 잘하기도 하고 대가의 존재감 때문에 단원들이 열심히 연주하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이름난 외국 악단에서 객원 연주자를 데려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객원 덕에 앙상블이 좋아졌으니 진짜 서울시향 실력이 아니라고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객원 연주자의 수준 높은 연주를 시향 단원들이 듣고 배울 테니 말이다. 서울시향은 그 뒤로도 '찾아가는 연주회' 등으로 같은 곡을 '복습'하면서 배운 것을 바로 써먹을 수 있다. 또 객원으로 왔다가 단원으로 눌러앉는 사람도 더러 있다. 악장 스베틀린 루세브나 팀파니 수석 아드리앙 페루숑이 그렇다. 옛날에는 시향 단원이 객원 연주자를 따라가지 못해서 객원들만 두드러질 때가 잦았지만, 요즘은 크게 나아져서 오케스트라 전체가 함께 성장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날 연주는 그 가운데서도 손꼽을 만큼 훌륭했다.

니콜라스 안겔리치가 협연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은 무척 낯설게 들렸다. 서울시향은 대편성으로 묵직하게 밀어붙였지만 안겔리치는 오케스트라에 팽팽하게 맞서지 않고 살짝 흘리면서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연주했다. 또 마치 쇼팽을 연주하듯 루바토를 과장해서 쓰고 곳곳에서 소토 보체(sotto voce)로 연주하는가 하면 페달을 너무한다 싶을 만큼 잔뜩 써댔다. 무대로 걸어나올 때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던 생각이 겹치면서 협연자가 몸이 아프지는 않은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엉터리 연주라고 화를 내야 할까. 생각 끝에 나는 참신한 해석이라고 좋게 여기기로 했다.

우리는 어쩌면 '황제'라는 표제 때문에 생각이 틀에 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표제는 악보 출판업자가 장삿속으로 붙였을 뿐 작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작품은 그저 피아노 협주곡일 뿐이며 '황제'와 관련한 상상을 보태어 그에 걸맞은 웅장함을 바라는 것은 잘못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봐, 그래도 안겔리치는 너무하지 않아? 저게 쇼팽이지 어딜 봐서 베토벤이라는 거야?" 그 말대로 안겔리치가 한 연주는 베토벤답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꼭 베토벤다워야 할 까닭이 있는가? 움베르토 에코는 '작품을 내놓고 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라고 했다. 작가가 의도한 것만을 고이 받들어 모실 게 아니라 누구나 자유롭게 열린 해석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제까지 알고 있던 '황제 협주곡'은 잠시 잊어버리고 연주자가 내놓은 색다른 해석을 기꺼이 받아들여 보면 어떨까?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연주는 오늘따라 더욱 뛰어난 서울시향의 앙상블과 '다크 포스' 넘치는 정명훈의 해석이 맞물린 명연주였다. 1악장에서 음악에 긴장감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거대한 크레셴도를 만드는 솜씨가 훌륭했고 바순과 클라리넷 독주 또한 표정이 잘 살아있는 뛰어난 연주였다. 마디 161에서 터져 나온 총주는 어찌나 사나운지 바로 앞에서 울다 지쳐 잠드는 듯하던 클라리넷 소리를 갈가리 찢어발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부 러시아 지휘자가 남긴 녹음과는 달리 트럼펫을 앞세워 귀 따갑게 으르렁거리지 않고 악기 사이에 균형을 잘 맞췄다.

3악장에서는 빠른 템포로 달리면서도 앙상블이 흐트러지지 않은 점이 매우 훌륭했다. 긴장감을 조금씩 쌓아올리다 마디 229에서 크게 터트릴 때에는 특히 현이 몹시 날카롭게 끊어 긁어대며 섬뜩한 소노리티를 만들어내었다. 차갑게 비웃는 듯한 행진곡 리듬이 내가 이제껏 들어본 그 어떤 연주보다도 폭력적이고 무시무시했다. 마치 나치 시대 독일군 사열식을 보는 것처럼, 또는 스탈린 시대 러시아 군대처럼, 또는….

4악장은 슬프고도 슬펐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현이 울부짖지 않고 왠지 차갑게 가라앉은 것 같았고, 절망 속에서 처절하게 허우적거리는 대신 차분히 관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디 81에서는 게네랄파우제(Generalpause)를 생각보다 가볍게 다루어 바로 뒤이어 목놓아 울어대는 바이올린과 첼로에 무게를 실어주지 않았다. 곡이 끝날 때 콘트라베이스가 연주하는 셋잇단음 리듬은 심장이 조금씩 느려지다가 멈추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이날 연주는 여기에서도 생각보다 담담했다. 정명훈이 표현하는 절망이 이만큼밖에 깊지 않다고 믿기는 어렵다. 정명훈은 왜 그랬을까?

답은 앙코르에서 드러났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 4악장을 앙코르로 연주한 것이다! (4악장을 통째로 연주하지는 않고 마디 60부터 148까지를 건너뛰었다.) 정명훈은 차이콥스키가 교향곡 5번 4악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짜 승리'라도 억지로 '5악장'으로 덧붙여 절망과 체념 속에 주저앉지 않으려고 했나 보다. 심벌즈를 세 대나 그러모아 요란하게 쳐댄 것은 더더욱 교향곡 5번 4악장 같은 역설을 만들어내었다. 그러고 보니 '앞선 악장'에서 정명훈이 절망과 체념 대신 담으려고 했던 것은 커다란 분노가 아니었을까. 정명훈이 옛날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요즘 들어 무슨 일을 겪었는지 궁금하다.

이날 연주가 끝나고 누리꾼 사이에 박수 예절을 놓고 논란이 되었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3악장이야 워낙 '뿜빰빰'하고 법석을 피우며 끝나니 박수가 터져 나오는 일은 이제 당연한 일(?)이기도 하며 더군다나 알면서 일부러 박수를 보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4악장은 죽어가듯이 천천히 여리게 끝나기 때문에 여운을 주는 '침묵 악장'이 매우 중요하다. 이날은 잔향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박수가 터져 나오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었으나 잔향이 없어지고 채 5초가 지나지 않아 끝내 성급한 박수가 나왔다. 그때까지 지휘봉을 높이 들고 있던 정명훈은 김 샜다는 듯이 팔을 내리고 말았다. 잔향이 없어지기에 앞서 치는 손뼉을 '안다 박수'라고 하여 비꼬아 말하기도 하는데, 이날 박수는 '안다 박수'는 아니고 '깬다 박수'라고 하더라. 성급한 박수는 여운을 즐기려는 다른 관객에게 피해를 주니 곡이 조용히 끝날수록 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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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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