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프랑크 페터 침머만 (바이올린)
Beethoven, Violin Concerto in D, Op. 61
Dvorak, Symphony No. 9 in e, Op. 95 "From the New World"
음식 재료를 여러 가지 많이 쓴다고 아무나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나 여러 재료를 두루 잘 쓰는 요리사는 재료가 다양할수록 더 맛있는 음식을 잘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셈여림, 빠르고 느림, 거친 소리와 매끈한 소리 등 표현할 수 있는 재료가 많을수록 좋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한 프랑크 페터 치머만은 가지가지 재료를 적절히 쓰는 재주가 남달랐다. 이를테면 빠른 음형에서 윗활로 긁으면서 매끄러운 소리를 내다가도 다른 부분에서는 아랫활로 날카로운 소리를 내기도 했고, 때때로 발까지 굴러가며 힘차게 활을 그어댔으며 여린 소리는 또 매우 여리게 내서 뒤쪽에 앉은 사람은 잘 안 들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연주회장이 세종문화화관이 아니라면 좋았으련만.
치머만의 연주가 딱딱했다는 의견이 더러 있던데,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음향 탓에 소리가 좀 메마르게 들리기도 했고 연주자가 독일 사람이라 그런지 잔꾀를 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연주해서 무뚝뚝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딱딱하다는 말은 너무 한쪽만 보고 한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가만 보니 <SPO> 연주자 소개말에 이런 말이 있다.
"그는 매우 냉철하면서 객관적으로 음악을 대하는 연주자다. 감정보다는 이성을, 흥분하여 말하기보다는 논리적으로 표현하려 하고 디테일 또한 절대 대충 처리하는 법이 없다."
이 말은 치머만이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만 연주하는 메마른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라고 믿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 말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저 말에서 '그'를 '브람스'로, '연주자'를 '작곡가'로 바꿔보면 어떨까? 작곡 기법을 따지자면 참말로 옳다. 브람스만큼 논리적으로 작곡한 사람도 드물다. 그러나 브람스 음악이 '머리로 듣는' 음악인가?
치머만은 브람스 같은 연주자다. 가지가지 재료를 적절히 쓰는 방법에는 치밀한 계산이 뒷받침하는 듯했지만, 그 소리에는 깊은 감성이 우러나왔다. 그에게 이성과 감성 가운데 어느 하나가 먼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중용'이라는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연주자가 또 있을까.
치머만이 들려준 연주는 다 좋았지만 딱 한 군데 내가 싫어하는 해석을 보여준 곳이 있었다. 3악장 마디 331에 나오는 F# 음을 너무 짧게 끊어버린 것이다. 이곳은 작품 전체의 절정에 해당하는 곳으로 D 장조 으뜸화음을 길게 늘인 'I-VI-I-ii-V-I'꼴 화성 진행을 되풀이하면서 마치 '승리의 팡파르'같은 분위기를 내되 그 고양감을 독주 바이올린 선율에 집중시켜 놓았다. 여기서 F# 음에 따라붙는 화음은 버금가온화음(VI)이고 앞 마디의 선율 D-C#-D-E-F#에 이어져 화성과 선율 모두 F# 음에 고양감을 실어주고 있다. 그러나 치머만은 이 중요한 음을 악보에서 지시한 것보다도 훨씬 짧게 지나가듯 연주했다. 소리를 좀 더 늘여서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는 금빛 반짝이는 소리를 들려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앙코르로 연주한 파가니니의 <신이여 왕을 지켜 주소서> 변주곡은 치머만의 왼손 테크닉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소름 끼치도록 잘 보여주었다. 하긴, 테크닉이 이쯤 되고 보면 감성적인 연주자라는 소리를 듣기 어렵기도 하겠다.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은 '응원 교향곡'이라고도 불릴 만큼 4악장 제1 주제가 응원가로 자주 쓰이기도 하고 또 386세대에게는 '전대협 팡파르'로 기억되기도 한다. 이런 지나친 명성은 자칫 음악이 선정적으로 흐르게 할 위험이 있으며, 더군다나 이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민요풍 선율과 리듬을 잘못 살리면 자칫 촌스러워지기 쉽다. 정명훈은 템포를 제법 느리게 잡고 저음 현을 두드러지게 한 '거장풍' 해석으로 위험을 비켜갔다.
특히 1악장 도입부에서는 악보에 있는 메트로놈 지시보다 두 배 이상 느린 템포로 시작해 음형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빨라지도록 했으며, 코다에 유난히 힘을 실어주고 템포도 바짝 조여서 마치 1악장 전체에 크레셴도와 아첼레란도를 준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4악장 도입부에서도 느린 템포로 시작해 아첼레란도를 썼다.
1악장은 소나타 형식을 따르지만 제2 주제가 나오기 앞선 마디 91에서 플루트와 오보에가 연주하는 '사이비' 제2 주제가 나오는 점이 특이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브루크너가 그렇게 한 것처럼 주제 셋을 거느린 별난 소나타 형식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통적인 형식에 맞추어 보면 이 주제는 제2 주제가 될 수 없다. 이 작품이 e 단조를 따르므로 제2 주제는 e 단조의 관계장조인 G 장조라야 하지만 이 주제는 g 단조이기 때문이다. 정명훈은 진짜 제2 주제가 나오는 마디 149에서 템포를 크게 늦추어 제1 주제 및 '사이비' 제2 주제와 뚜렷이 구분하고 전통적인 형식미를 살렸다.
2악장에서는 잉글리시 호른 독주도 멋있었지만, 마디 54부터 나오는 콘트라베이스 피치카토와 마디 78부터 나오는 첼로 트레몰로를 주선율처럼 앞세운 것이 이날 연주 가운데 가장 멋있었다. 다만, 마디 107부터 109까지 세 번 나오는 모두쉼표(Generalpause)를 느린 템포에 비해 가볍게 다룬 것이 조금은 뜻밖이었다. 3악장이 끝나기 바로 앞서 나오는 모두쉼표 또한 과장없이 가볍게 처리했다. 3악장 템포는 악보 지시보다 빠른 편이었고 금관과 팀파니의 활약이 돋보였다.
4악장에서는 저 유명한 제1 주제도 좋았지만 제2 주제(마디 66) 클라리넷 선율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객원인지 단원인지 헷갈리는 이 연주자는(나중에 붙임: 서울시향 클라리넷 수석 ☞채재일) 얼마 전부터 시향 정기연주회에서 좋은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데, 나는 이제 완전히 팬이 되어버렸다. 마디 320에서 곡을 끝맺기 전에 잠시 힘을 빼며 호른과 팀파니가 폭풍전야처럼 긴장감을 쌓아가는 것도 나무랄 데 없었다.
이 작품은 '신세계로부터'라는 표제가 말해주듯이 미국을 노골적으로 찬양한 작품이다. 그러나 정명훈은 앙코르로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 4악장 '환희'를 연주하기에 앞서 올림픽 출전 선수를 응원하는 말을 해서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또한 '응원 교향곡'으로 만들었다. 어쨌거나, 화이팅!
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