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6일 일요일

메시앙 《잊혀진 제물》 진은숙 《바이올린 협주곡》 라벨 《어미 거위》 《라 발스》 ― 비비아네 하그너 / 정명훈 / 서울시향

2010-05-20 오후 08:0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정명훈
협연: Viviane Hagner

메시앙, 잊혀진 제물 Messiaen, Les Offrandes oubliées
진은숙, 바이올린 협주곡 Chin, Violin Concerto
라벨, 어미 거위 Ravel, Ma Mère l’Oye
라벨, 라 발스 Ravel, La Valse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5년을 준비해왔습니다. 이제는 유럽 무대에서도 꿀리지 않을 기량을 보여줄 자신이 있습니다.”

서울시향이 유럽 무대에서 연주한다. 억지로 만들어낸 연주회가 아니라 정식으로 초청받아 갔다고 한다. 김주호 대표 말처럼, 이제는 서울시향이 유럽에서 상품성을 인정받게 됐다는 뜻이다. 정명훈이라는 거장이 지닌 이름값만으로 악단이 덩달아 인정받기는 어렵다. 서울시향이 그만한 실력을 길렀기에 가능한 일이다.

"준비가 덜 됐을 때는 안 하는 게 나아요. 괜히 창피만 당한다고. 하지만 이젠 준비가 됐어요. 적어도, 유럽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선 겁니다.”

정명훈은 이렇게 말했단다. 지난 5년 동안 서울시향을 지켜본 글쓴이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수석급 단원들은 웬만한 유럽 지방악단에서도 한 자리 차지할 만한 실력을 지녔고, 그 가운데 한둘은 유럽에서도 수석 자리를 노릴 만하다. 몇몇 외국인 단원은 유럽 악단 수석을 겸하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재정적·행정적 지원이 있으면 그리 오래지 않아 이를 수도 있다. 문제는 현이다. 역사와 전통 없이 현이 제대로 된 소리를 내기는 어렵다. 서울시향이 유럽에 간다는 말은 현이 그만한 수준에 올랐다는 말이다. 글쓴이가 판단하기에 현악 연주자들이 보여주는 응집력이 때때로 유럽 수준을 살짝 넘보게 된 때가 지난해 즈음이다. 실수 없이 악보를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뉘앙스를 자연스럽게 살려내는 일이 지난해부터 차츰 늘고 있다. 악기군끼리 어우러짐 또한 크게 늘었다.

이날 연주회는 유럽에서 연주할 곡들을 미리 선보이는 자리였다. 그 가운데 진은숙 바이올린 협주곡이 가장 반가웠다. 서울시향이 이 곡을 연주한 일이 두어 차례 있지만, 글쓴이는 그때마다 다른 일 때문에 기회를 놓쳐서 실연은 이날 처음 들었다. 아직 악보를 개인에게 팔지 않고 오케스트라에 빌려주기만 하는지라 글쓴이는 이 곡을 음반으로만 알 수밖에 없었는데, 이날 연주를 들어보니 켄트 나가노가 지휘한 몬트리올 심포니 녹음은 너무 얌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명훈이 지휘한 서울시향은 마림바와 여러 타악기 따위를 음반보다 앞세워 가믈란(gamelan; 인도네시아 전통 음악 또는 악기) 느낌을 조금 더 살렸고, 독주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대등하게 어우러져 교향곡 느낌마저 들었다. 스튜디오 작업을 거친 음반이 실연과 다른 탓도 있겠으나, 그것을 헤아려도 이날 타악기가 독주 바이올린 소리를 자신 있게 치고 나올 때가 잦았다.

1악장에서 큰북이 내는 묵직한 소리가 독주 바이올린과 어우러지는 대목을 글쓴이는 참 좋아하는데, 이날 시향 타악기 연주자 김문홍이 무대 오른쪽에서 큰북을 맡아 마치 바이올린과 2중주를 하는 듯했다. 타악기 수석 에드워드 최는 무대 왼쪽 벽 가운데쯤에 바짝 붙어서 글록켄슈필과 갖가지 타악기를 연주했고, 김미연은 무대 왼쪽 뒷벽에서 마림바 따위를 연주하는 등 타악기만으로도 입체감을 주었다.

여기에 다른 악기 소리가 마치 살아있는 빛알갱이처럼 뭉치고 흩어지곤 했으며, 독주 바이올린은 빛 가루를 뿌리며 무리를 이끌고 날아다니는 듯했다. 빛 요정들이 떠들썩하게 장난을 치는 모습이 이럴까. 협연을 맡은 비비아네 하그너는 어렵기로 소문난 이 곡을 마치 가볍게 몸 풀듯 아무렇지도 않게 연주하곤 했으나 개방현으로 연주하는 대목에서는 몇 차례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라벨 관현악곡은 화려한 색채감을 빼면 짜임새가 단순해서 연주자의 해석이 끼어들 곳이 적으며, 음색을 얼마나 맛깔스럽게 살리느냐가 연주자에게 중요할 때가 잦다. 이날 연주된 《어미 거위》 모음곡과 《라 발스》 또한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지휘자 역할이 매우 중요하면서도 지휘자 못지않게 악단이 많은 주목을 받게 할 수 있으니 서울시향을 유럽에 알리기에 매우 훌륭한 곡이라 하겠다.

이날 연주는 시시콜콜 따질 일 없이 그저 좋았다고만 말해도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 이미 여러 차례 연주한 일이 있어서 서울시향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곡이라고도 할 만한 《라 발스》는 말할 것도 없고, 《어미 거위》 모음곡 또한 심각한 표정 지을 일 없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곡에 나무랄 데 없는 연주였다.

메시앙 《잊혀진 제물》도 훌륭했지만, 사납게 몰아치는 가운데 부분에서 현이 조금 더 단단히 뭉친 소리를 내주었으면 싶었다. 서울시향이 앞으로 더 나아질 곳이 얼마든지 있음이 이런 곳에서 드러난다 하겠는데, 정명훈 말마따나 이번 유럽 연주 여행이 “서울시향의 단원들에게 큰 공부와 자극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유럽 오케스트라를 보면서 자신들을 되돌아볼 기회도 생길 테고, 음향이 훌륭한 연주회장을 두루 경험해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눈이 잔뜩 높아질 서울시향 단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전용 연주회장이다. 계획에 차질 없이 하루빨리, 그러나 음향에는 배려에 모자람 없이 지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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