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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29일 일요일

바그너 파르지팔 모음곡, 베토벤 교향곡 3번 (2019. 9. 28. 사무엘 윤, 마르쿠스 슈텐츠, 서울시향) - 대충 생각나는 대로 쓴 메모

  • ‹파르지팔›을 발췌 연주하면 보통 관현악곡이거나 구르네만츠 역 베이스 정도가 나오는 게 보통인데, 이번 연주회는 구르네만츠가 아닌 암포르타스가 나온 점이 특이하고 신박했음. 사무엘 윤 선생이 협연자인 걸 보고 속으로 '저분이 구르네만츠 테크 트리가 아닌데 이게 뭐지?' 했다가 암포르타스인 걸 보고 이거구나 싶었음.

  • 막판에 사무엘 윤 선생이 퇴장했다가 합창석으로 재등장하더니 잠시 파르지팔에 빙의. 베이스바리톤이 파르지팔 대사를 치는 진풍경은 나름 참신했음.

  • 암포르타스가 돋보였다는 점에서 작년에 뮌헨에서 봤던 공연 생각도 났음. 크리스티안 게르하허의 암포르타스가 '인간의 고통'을 절절하게 보여줬다면, 사무엘 윤의 암포르타스는 '영웅의 고통'에 가까웠음. 둘 다 좋았지만, 영웅의 카리스마가 '고통'을 살짝 가리는 느낌이 있었던 것은 단점.

  • 오페라를 발췌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이 이어지도록 편곡을 잘했음. 그 과정에서 시간 순서가 좀 왔다리갔다리 했지만 위화감이 느껴지기보다 그냥 신박하다는 느낌. 나님 예전에 경기필에 있었을 때 바그너 공연 준비하면서, 지휘자 선생님이 ‹로엔그린› 마지막이 '끝나는 느낌'이 약하다고 고민하시는 걸 보고 차라리 1막 피날레로 점프하자고 제안했던 생각도 났음. '그렇게 하면 바그네리안들이 욕하지 않을까요?'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 '종소리'는 '공'을 포함한 몇 가지 악기를 조합해 만들어내는 듯했는데 객석에서 제대로 안 보였음. 종소리 이슈는 ‹파르지팔› 초연 때부터 문제가 됐던 것으로, 핵심은 작곡가가 교회 종소리를 의도했으나 진짜 교회종을 쓰면 오케스트라와 안 어울린다는 것. 가장 흔한 해결책은 베이스튜뷸라벨인데, 서울시향이 갖고 있는 베이스튜뷸라벨은 3음짜리로 이걸로는 안 됨. ‹파르지팔›이 되는 4음짜리 베이스튜뷸라벨은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갖고 있는데 이걸 빌려다 썼으면 좋았을 듯. 이번 공연에서는 음색이 탁하게 들렸던 것이 단점.

  • 파르지팔과 베토벤 교향곡 3번을 엮은 프로그램 마음에 들었음. 인간이 자신의 격을 뛰어넘어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음악이라는 공통점. 서울시향의 베토벤 연주는 기법적으로 역사주의를 일부 수용한 듯했지만, 그런 것치고는 현악기가 너무 대편성이었음. 관악기는 호른 한 대 더블링한 것 빼고는 원래 편성 그대로. 현이 비대하니 4악장 후반부의 고양감을 살리는 건 좋았으나, 이를테면 1악장 발전부 클라이맥스에 나오는 충격적인 플루트 불협화음이 현 음량에 맞춘 트럼펫 소리에 묻혀서 어정쩡하게 들린다거나, 푸가토의 텍스처가 흐리멍덩하게 들린다거나 하는 문제가 있었음. 현악기 배치는 1바-2바를 좌우로 갈라놓은 걸 넘어서 첼로와 더블베이스까지 좌우대칭으로 쪼개 놓고 비올라를 정중앙으로. 이걸로 뭘 의도했는지 알쏭달쏭한데 결과적으로 특히 첼로 쪽에서 만득이 소리가…-_-;

2013년 11월 4일 월요일

바그너 《파르지팔》 한국 초연 뒷북 단상

그동안 바빠서 (귀찮아서) 못 쓰고 있던 글을 월간 『객석』 기사를 읽고 덧붙이는 식으로 짧게 써볼까 합니다.

☞ 「‘파르지팔’ 한국 초연을 논하다」 (월간 『객석』)

① 오케스트라 연주를 평가할 때, 공정한 판단을 하려면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의 오케스트라 피트가 좁다는 사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국내 공연장 어디라도 마찬가지인데, 외국 유명 오페라 극장에서는 오케스트라 피트에 사람들 우겨 넣으면 그럭저럭 '풀 편성' 오케스트라가 들어가는 것과 견주어 국내 공연장에서는 사실 바그너 같은 대편성 곡은 제대로 연주할 수 없을 만큼 좁지요. (KBS에서 둘째 날 공연을 녹화 방송했던데요, 들어보면 얼마 안 되는 현악기 연주자들이 '깨작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리더군요. 실제 공연장에서는 이렇게까지 심하게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고, 동아일보와 전화 인터뷰할 때에도 저는 그 얘기를 했었지만, 동아일보나 『객석』이나 공연장에 대한 기사를 특집으로 자세히 다루지 않는 이상 이런 얘기를 쓰기 쉽지 않으리라 짐작됩니다.

② 이런 사정을 헤아리고 나면 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는, 귀에 들린 소리 자체도 훌륭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공연장에서 만난 바그네리안들도 '코심이 이렇게까지 잘할 줄 몰랐다'라며 놀라워하더군요. 이건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에서 금관 연주자 네 명 데려온 것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코심 단원들이 그만큼 노력했으니 이런 연주가 가능했을 테지요. 로타 차그로제크가 그만큼 대단한 지휘자이기도 하겠고요. 앙상블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휘자가 재빨리 수습하는 솜씨가 대단했습니다.

③ 로타 차그로제크의 템포 설정은 몹시 빨랐습니다. 크나퍼츠부슈가 지휘한 바이로이트 녹음에 익숙하신 분께는 완전히 다른 작품처럼 느껴졌을 듯해요. 최근 바이로이트 등에서 공연한 실황 음원을 들어보면 이렇게 마구 달리는 해석이 유행인 듯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오케스트라 연주자가 몇 안 된다는 문제 때문에 템포를 느리게 하고싶어도 못 했을 겁니다. 템포가 느릴수록 소편성의 약점이 쉽게 드러나곤 하거든요. 이와 관련해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2005.10.20. 지휘자 이윤국을 주목하라! (서울바로크 합주단 /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

윗글 마지막 단락을 다시 읽으니 새삼 감개무량하네요. "못해도 좋으니까 〈파르지팔〉 같은 작품을 무대에 올려만 달란 말이야." 하던 때로부터 8년만에 드디어 초연이 됐습니다.

④ 가수들은 그냥 최고였습니다. 『객석』 기사에서 이용숙 선생이 "바이로이트 · 뮌헨에서 공연을 보았을 때도 가수진이 이 정도로 만족스러웠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파르지팔(크리스토퍼 벤트리스)과 쿤드리(이본 네프)가 몸 사리지 않고 열심히 노래해 줘서 참 좋았습니다. 외국 가수들이 한국에 와서 몸 사리느라 노래를 대충 하거나, 한국에만 오면 갑자기 아프거나 ― 주요 병명은 물론 꾀병 ― 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그래서 두 사람이 더욱 돋보였습니다. 그 가운데 이본 네프는 '쿤드리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발트라우트 마이어가 전성기에 저랬을까 싶을 정도였지요.

⑤ 구르네만츠가 파르지팔을 데리고 몬살바트 성으로 가면, 날이 갑자기 확 밝아지면서(Nach völliger Dunkelheit schnell zunehmender Tag) 종소리가 들리지요. 그런데 교회종을 그대로 쓰기에는 음악적, 음향적, 공간적으로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보통 '베이스 튜뷸라 벨'(Bass Tubular Bell)을 사용합니다. 악보에는 'Theater Glocken'(오페라극장용 종)이라고 되어 있네요.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바이로이트 초기에는 '파르지팔 종'(Parsifal Klavier Instrument)이라는 걸 만들어 썼고, 초연 때에는 여기에 탐탐과 공(Gong) 따위를 섞었다고도 합니다.

'튜뷸라 벨'은 관현악곡에 곧잘 쓰이는 악기이지요. 그런데 파르지팔에 필요한 '베이스 튜뷸라 벨'은 그보다 훨씬 길어서 연주자가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연주해야 합니다. 서울시향이 말러 교향곡 8번 연주할 때 에드워드 최 타악기 수석이 이렇게 연주하는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서울시향이 가진 건 말러 8번에 필요한 세 음짜리이고, 《파르지팔》을 연주할 수 있는 건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갖고 있습니다.

▲ 경기필 2012년 공연 영상: 《파르지팔》 1막 전주곡/간주곡, 3막 피날레.
17분 30초 전후로 해서 베이스 튜뷸라 벨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악기 전체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네요.

국립오페라단(또는 코심)이 이 악기를 경기필에서 빌려다 썼으면 좋았겠지만, 문제가 있어요. 악기가 너무 큽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구조를 생각하면 악기를 무대 뒤로 보내야 하는데, 이러면 소리가 작아지지요.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작은 소리를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차그로제크는 (아마도 연출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했겠지만) 그 반대 해석을 보였습니다. 공(Gong)을 대신 사용한 것은 그래서였을 겁니다.

종소리가 아닌 '공' 소리를 들었을 때, 처음에 들었던 생각은 '와, 이건 좀 깬다!'였습니다. 그런데 3막에서는 이 소리가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필리프 아를로의 연출 때문에 더욱 그랬어요. 아를로는 3막 성배의식 장면에서 암포르타스를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처럼 연출했고, 성배 기사들이 어서 의식을 진행하라며 암포르타스한테 사납게 손가락질했지요. 구세주에게 구원을 바라는 일이 한편으로는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연출이라 생각합니다. 이때 종소리를 대신한 '공'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큰 음량으로 사납게 울려대며 연출에 힘을 더했습니다. 저는 1막에서 제가 '공' 소리를 낯설게 느꼈던 것도 편견 때문이지 않았나 의심해 봤습니다. 3회 공연을 모두 감상하고 나서 내린 결론은, 그래도 1막에서는 좀… 의도는 이해하겠는데…-_-

⑥ 꽃처녀들 의상에 관해서는 유형종 · 이용숙 두 분 말씀에 공감하는데요, 그래도 노래는 훌륭했습니다. 꽃처녀 대목은 템포가 느릴 때에는 '마법의 정원'의 신비로운 느낌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그런 맛은 좀 모자랐습니다. 그러나 빠른 템포 때문에 오히려 잘 살아난 것이 있었습니다. 마치 식물들이 사람 말을 한다면 저런 느낌일까 싶은, 마치 풀꽃들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소리가 언어로 승화한 듯한, 꽃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속삭이는 소리가 헤테로포니(heterophony)처럼 어지럽게 흩날리는 독특한 음향 효과 말이지요.

⑦ 이곳에서 시간은 공간으로 화한다. Zum Raum wird hier die Zeit.

구르네만츠가 파르지팔을 데리고 몬살바트 성으로 갈 때, 얼마 안 걸었는데도 매우 멀리 왔다고 파르지팔이 놀라워하자 구르네만츠가 한 말입니다. 『객석』 기사에서 이용숙 선생이 한 말로는, 이 노랫말을 "연출부가 실제 장면과 맞춰보며 일부를 수정"했다는데, 그 결과가…

“시공간을 초월하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네”

바그너가 《파르지팔》에서 나타내고자 했던 신비주의적 종교관의 일면을 드러내는 원문이, 저 번역 때문에 그냥 중2병 쩔어주는 말로 전락했습니다. 아니, 바그너가 원래 중2병 쩔어주는 인간이었기는 한데, 그래도 이거랑 저거랑은 수준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아… OTL

저는 "실제 장면"을 들먹이는 말이 그저 변명일 뿐이라 생각하며, 대중은 무식해서 쉬운 것만을 좋아하리라 단정 짓는 오만한 생각을 저 이상한 번역에서 읽습니다.

"Zum Raum wird hier die Zeit."이라는 제목으로 독일어 학위논문을 쓰신 타이포그래피 전문가 유지원 님께서 "변화의 이행과정을 지시하는 'werden(become)' 동사"에 주목하며 시공간에 관한 독특한 고찰을 펼치는 글 참고:

☞ 「여성의 menstruation이라는 단어 속, 수량(quantum)적 어근」 (유지원)

"Zum Raum wird hier die Zeit."이라는 말은 동양인에게 익숙한 개념인 '축지법'을 연상시키지요. 저는 이것을 현대 물리학 이론에 비추어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인류가 우주선을 만들어 태양계를 벗어나려면, 현재 기술로 낼 수 있는 속도로는 7만 년쯤 걸린다고 합니다. (제 기억에 의존한 수치라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일찍이 밝힌 것처럼,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광속을 넘어서는 속도는 애초에 불가능하지요.

그런데 편법이 있습니다. 시공간을 비틀어 버리면 되거든요.

공간이 수축하고 팽창하는 속도는 광속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은 많이들 아시죠? 그런데 우주가 팽창할 때 가속 팽창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더 빠른 속도로 지구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니까 아주 먼 곳에서는 광속을 넘어서는 빠르기로 지구에서 멀어지는 곳도 있을 것이며, 그 너머를 지구에 사는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이 경계를 '우주 지평선'이라고 한다네요.

이 원리를 이용하면 과학소설 등에 나오는 '워프'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합니다. 우주선 주위를 '워프 버블'이라는 것으로 감싸고 앞쪽 공간을 수축, 뒤쪽 공간을 팽창시킴으로써 실제로 이동한 것보다 더 빨리 이동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걸 가능하게 하려면 시공간을 비트는데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해서 실용성은 없다, 라는 것이 그동안 통설이었는데, 최근 어떤 공학자가 획기적으로 적은 에너지로 이걸 가능하게 하는 아이디어를 내놨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나사(NASA)에서 연구하고 있다네요!

▲ 나사(NASA)의 '워프 드라이브' 프로젝트 소개 영상

그러니까 결론은, 몬살바트로 가는 길에는 성배의 신비로운 에너지를 이용한 워프 버블이 설치되어 있어서… 큼. 여기까지.

⑧ 노랫말 번역과 관련해 아쉬웠던 대목 또 하나는, 마지막에 나오는 "Erlösung dem Erlöser!"입니다.

▲ "Erlösung dem Erlöser!" 카라얀-베를린필 1980년 음반에서 발췌. ©DG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면 "구세주께 구원을!"입니다. 그런데 맥락을 생각하면 참 이상한 말이에요. 파르지팔이 성창으로 암포르타스를 고통에서 구원하고, 쿤드리를 세례로써 끝없이 되풀이되는 죄업에서 구원하고, 성배 기사들의 새로운 수장이 됨으로써 모두를 구원하는 이때에 '구세주께 구원을!'이라니? 이것이야말로 '이곳에서 시간은 공간으로 화한다'보다 훨씬 더 수수께끼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여러모로 고찰한, 저 유명한 '몬살바트' 사이트의 데릭 에버레트가 쓴 글(영어) 참고:

http://www.monsalvat.no/erlosung.htm

미학자 이진 선생께서 이 말을 화두로 《파르지팔》의 철학적 의미를 고찰한 글:

☞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그런데 이 말을, 이번 공연 자막에서는 전혀 수수께끼 같지 않은 엉뚱한 말로 바꿔치기했더군요. 뭐라고 했더라…

⑨ "바그너가 철저한 반유대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런 점들이 당연히 이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 (이용숙)

바그너는 "철저한"까지는 아니더라도 '명백한' 반유대주의자였고, 따라서 바그너의 작품에 반유대주의가 반영되어 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작품 속에 나타나는 어떤 것을 반유대주의와 엮어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추측'과 '해석'을 명백한 사실처럼 말하면 곤란합니다. 그것이 독일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해석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출가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를 성토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고 그저 바그너가 작품 속에서 말했던 구원과 깨달음에 집중했다는 이유로 연출가를 비난하는 말에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링크로 대신합니다:

☞ 바그너 색깔론 글타래

⑩ 연출가 필리프 아를로

저는 오페라를 감상할 때 음악에 집중하느라 연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요. 연출 논리로 음악을 희생시키는 연출가를 때때로 성토하기는 합니다만. 그런데 필리프 아를로는 그런 '만행'을 전혀 저지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음악을 연출에 훌륭하게 이용하기까지 했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종소리'가 좋은 예가 되겠지요. 음악과 대사와 연출이 유기적으로 얽혀 돌아가면서 그야말로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의 모범이 되었고, 공연을 감상하면서 저는 연출가의 음악적 식견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훌륭한 연출가라면 좀 자주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쓰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여기까지만 쓸게요. ^^

2012년 6월 18일 월요일

해설: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 보로딘 《이고르 공》 중 ‘폴로베츠인의 춤’ 등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http://g-phil.kr/?p=978


보로딘 《이고르 공》 중 ‘폴로베츠인의 춤’은 지난해 3월 24일 의왕시 서울소년원에서 있었던 구자범 지휘자 취임 후 첫 음악회에서 연주했던 곡입니다. 오페라 《이고르 공》은 외국에 잡혀 온 임금님 이야기입니다. 이고르 공이 이끄는 러시아 군대가 튀르크계 민족인 폴로베츠인과 전쟁을 하는데, 이고르 공이 크게 지고 포로로 사로잡히고 말아요. 그런데 폴로베츠의 '칸'은 이고르 공이 적장인데도 손님 대접을 하고 잔치를 열어서 위로해 주지요. ‘폴로베츠인의 춤’은 이때 나오는 음악입니다. 화려한 춤이 멋진 장면이고, 음악도 그만큼 화려합니다.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는 지난해 6월 24~25일 수원과 고양에서 있었던 정기공연 때 연주한 곡입니다. 이날 경기필은 《로마의 축제》, 《로마의 분수》와 더불어 '로마 3부작'을 국내 최초로 한자리에서 연주했지요. 《로마의 소나무》는 로마 시대 모습을 담은 곡으로, 소나무의 '눈'으로 바라본 로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4개 악장으로 되어 있는데요, 레스피기는 각 악장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① 보르게제 저택의 소나무 (I pini di Villa Borghese) : 보르게제 저택에 있는 소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뛰논다. 둥글게 돌면서 춤추고, 병정놀이하며 행진하고, 싸우고, 저녁 제비처럼 흥분해 소리치고, 떼 지어 돌아다닌다.

② 카타콤 부근의 소나무 (Pini presso una catacomba) : 소나무 그림자가 카타콤 입구에 드리운다. 깊은 곳에서 시편을 노래하는 구슬픈 소리가 솟아올라 장엄한 찬가처럼 공기 중에 떠다니다가 조금씩 신비롭게 사그라진다.

③ 쟈니콜로의 소나무 (I pini del Gianicolo) : 공기가 떨린다. 쟈니콜로에 소나무가 보름달 밝은 빛을 받고 서 있다. 나이팅게일이 노래한다.

④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I pini della Via Appia) : 어스름한 동틀 무렵 아피아 가도. 소나무 한 그루가 마법의 풍경을 지켜본다. 어렴풋하고 끊임없는 발소리. 시인인 소나무는 지나간 영광의 환상을 본다. 트럼펫 소리가 들리고, 새로 뜬 태양의 눈부심 속에서 집정관의 군대가 나타나 '신성한 길'(Via Sacra)을 따라 신전으로 개선행진을 한다.

바그너 《파르지팔》 1막 간주곡과 《로엔그린》 3막 전주곡은 올해 5월 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있었던 정기공연 때 연주한 곡입니다. 《파르지팔》과 《로엔그린》은 성배 수호 기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파르지팔》은 주인공 파르지팔이 성창(롱기누스의 창)을 찾아 나서면서 깨달음을 얻는 내용입니다. "자비심으로 깨달으리라, 순수한 바보여"라는 계시와 더불어 깨달음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이 담긴 작품이지요. 이번에 경기필이 연주할 1막 간주곡은 파르지팔과 성배 기사 구르네만츠가 성배 의식에 참석하고자 몬살바트 성으로 이동하는 장면에 나오는 음악이며, '장면전환 음악'이라고도 합니다. "이곳에서 시간은 공간으로 변한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대사에 이어지는 신비로운 음악이지요.

《로엔그린》은 《파르지팔》 이후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로엔그린은 파르지팔의 뒤를 이어 성배 수호 기사들을 이끌게 되는데,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은 로엔그린이 몬살바트 성을 떠나 활동하는 이야기입니다. 로엔그린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엘자'를 대신에 결투에 나섰다가 엘자와 결혼하지요. 3막 전주곡은 결혼식 장면을 이끄는 화려한 음악입니다.

말러 교향곡 3번은 올해 3월 17일 수원에서 있었던 정기공연 때 연주한 곡입니다. 말러는 교향곡 3번에 세계를 담고자 했고, 바위(1악장), 꽃(2악장), 동물(3악장), 사람(4악장), 천사(5악장), 사랑(6악장)의 관점에서 보는 세계를 에피소드처럼 들려주는 짜임새로 작품을 썼습니다. 이번에 경기필이 연주할 6악장에는 '사랑이 내게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데, 고통으로 가득한 세계를 사랑의 관점에서 보는 음악입니다. 6악장이 말러가 보고 싶어한 세계이고, 사랑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2012년 5월 5일 토요일

나는 바그네리안(Wagnerian)이다

※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http://g-phil.kr/?p=911

▶ 바그네리안과 크리스티안

옥스퍼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에서는 '바그네리안(Wagnerian)'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습니다.

① (형용사) 독일 오페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와 관련 있거나 그가 쓴 음악, 음악 이론 또는 극음악 작곡 이론과 관련 있는
② (명사) 바그너 숭배자 또는 지지자

'바그너―바그네리안'은 '크리스트―크리스티안'과 짜임새가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저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의 종교적으로 숭배한다는 뜻이지요. 바그너가 살았을 때부터 바그너―브람스 대립 구도가 있어서 이런 분위기가 손쉽게 생겨났고요. 더군다나 바그너가 민족주의를 불러내 가며 저주를 퍼부어댔던 프랑스에서도 바그네리안이 제법 많았다고 합니다.

저는 바그네리안입니다. 제가 블로그 등에서 쓰는 공식(?) 프로필에는 이런 말이 들어가지요:

(김원철은) 바그너가 《파르지팔》을 작곡하던 무렵으로부터 100년, 바그너가 서거한 지 95년 만에 태어났다. 김원철이 태어나던 날 몬살바트 성에서 성배 기사 세 명이 찾아와 축복했으며, 어려서부터 잔[杯] 종류, 특히 팥빙수 그릇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확인되지 않은 설이 있다. 스물두 살 되던 해에 성배의 계시를 받고 바그너 사도가 되었다. 현재 바그너 성지 순례를 위해 경전을 연구하고 있다.

이쯤 되면 저를 놀리는 말이 나올 법합니다. 이렇게요: "여러분께서는 지금 말기 증세를 보고 계십니다!"

▶ 바그너 색깔론

제가 바그네리안이라고 하면 제 정치성향이 극우적일 것이라고 오해하시는 분도 있어요. 억울합니다. 이참에 밝혀 둘게요. 저는 지난 총선 때 진보신당에 투표했습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좌파'는 아니고 '자유주의자(liberalist)'입니다. 유럽 해적당(Pirate Party) 강령을 이어받은 정당이 생긴다면 지지할 생각이고요.

바그너는 반유대주의자였습니다. 「음악 속 유대주의」(Das Judenthum in der Musik)라는 글을 처음에는 필명으로, 나중에는 실명으로 발표해서 악명을 떨쳤지요. 이 글에 나오는 '유대인'의 정체는 알고 보면 두 사람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젊은 바그너에게 수많은 도움을 주었던 작곡가 마이어베어, 그리고 바그너가 평생 열등감에 시달렸던 천재 멘델스존이지요. 이 두 사람은 바그너보다 먼저 성공한 유대인 음악가로 바그너 출세길에 걸림돌이 되었고, 바그너는 당시 독일에 창궐하던 반유대 정서를 이용해서 두 사람 때리기에 성공했습니다. 심보가 고약해요. 게다가 글에 나타난 인종주의는 두 사람을 공격하는 도구일 뿐이라 하기 어렵고, 바그너의 유대인 친구들을 읊어대는 정도로는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를 파시즘으로 곧바로 이어 말하는 일은 잘못입니다. 인종주의와 파시즘이 무관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둘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또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는 바그너 후손의 명백한 나치 부역 행위와도 곧바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20세기 유럽 사회가 저지른 잘못을 두고 19세기 사람인 바그너를 불러내 탓하는 일이 바르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또 알고 보면 바그너의 정치성향은 평면적이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바그너는 무정부주의자, 위험한 혁명가 등으로 불렸습니다. 푸르동, 바쿠닌 등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어울리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바그너는 본디 '좌파'였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좌파 지식인들과 독일민주공화국 바그너 학자들은 바그너를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예언가'로 선언하기도 했지요. '바그너=히틀러'라는 편견이 널리 퍼진 요즘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술가나 예술 작품 자체가 아니라 예술가 및 작품을 둘러싼 담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화평론가 이택광 선생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와 관련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바그너에게 책임을 묻는 그 행위를 확대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거론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야한다. 말하자면 나치에게 책임을 묻는 행위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행하는 만행에 대한 책임을 묻는 행위와 함께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책임을 묻는다'는 윤리적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당성이다.

유대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이택광 선생이 지적한 바로 그 문제를 두고 때때로 이스라엘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곤 합니다. 또한 바렌보임은 서동시집 오케스트라(West-Eastern Divan Orchestra)를 만들어 이끄는 등 음악으로 중동 평화에 이바지하고 노벨 평화상 후보에까지 올랐으며, 역사상 가장 자주 바그너 음악을 지휘했고, 텔아비브에서 처음으로 바그너 음악을 지휘하기도 했지요. 아직도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 오페라 전막이 공연된 일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그너 음악 일부가 공연된 일은 종종 있었고, 지난해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후손이 지휘하는 이스라엘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지크프리트 목가》를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2010년 11월에는 이스라엘에 바그너 협회가 생기고 법무부 허가까지 받았다네요.

▶ 음유시인 기사와 성배수호 기사

이번에 경기필이 공연하는 작품은 모두 기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이번 연주회에서 음유시인 기사가 나오는 두 작품을 1부에 연주하고, 성배 수호 기사가 나오는 두 작품을 2부에 연주합니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와 《탄호이저》는 둘 다 노래자랑 이야기입니다. 노래하는 기사가 나오고, 우승자는 신부를 얻게 된다는 설정도 비슷해요. 《파르지팔》과 《로엔그린》은 주인공이 성배 수호 기사라는 대목이 닮았습니다. 로엔그린이 파르지팔 후계자이기도 하지요.

▶ 기사 이야기, 음유시인, 그리고 게르만 전설

옛날부터 유럽에는 기사들의 모험을 그린 전설이 많았고, 기사들이 직접 음유시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지요. 12~14세기 독일-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던 기사 출신 음유시인을 민네징어(Minnesinger)라고 합니다.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에 나오는 탄호이저, 볼프람 폰 에셴바흐,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 등은 실존했던 민네징어입니다. '민네'(Minne)는 사랑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 사랑이란 주로 정신적인 사랑을 뜻했습니다. 『게르만 신화 · 바그너 · 히틀러』를 쓴 안인희 선생은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원래 기사는 봉건 군주의 신하였지만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면서 기독교 기사, 혹은 신의 기사로 불렸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 기독교도로서의 미덕은 헌신과 체념, 그리고 많은 경우 금욕적인 순결이었다. 십자군 전쟁 동안 기사들은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국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한동안 전쟁이 거의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이럴 경우 정상적이고 평화로운 결혼 생활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떤 기사들은 결혼을 포기하고 수도사처럼 생활하기도 했다. 그들은 신분이 고귀한 부인, 대개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군주의 부인을 사모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은 실질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징적이고 정신적인 사랑이었다. […] 기사에게 어울리는 사랑은 바로 이런 높은 사랑이고, 그것은 성모 숭배와 여러 가지로 닮은 점이 있다. 이런 높은 사랑의 전통으로부터 여성에게 깍듯한 기사도 전통이 생겨난 것이다.

오페라 《탄호이저》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실존 인물이 나오기도 하지만, 실제 있었던 일보다는 초현실적인 전설이 작품에 더 많이 들어가 있지요. 탄호이저는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교황 앞에서 뉘우친 일이 있는 사람인데,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에서는 교황이 '내 지팡이에 새싹이 돋지 않으면 그대는 용서받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탄호이저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지팡이에 참말로 새싹이 돋아버립니다. 더 자세한 줄거리를 이 글에서 소개하지는 않을게요.

민네징어가 12~14세기에 활동했다면, 14~16세기에는 마이스터징어(Meistersinger)라 불리는 음유시인이 활동했습니다. 마이스터징어는 대개 귀족이 아니라 장인 길드(guild)에서 활동한 평민 계층이었지요. 바그너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에 나오는 한스 작스(Hans Sachs)는 실존했던 마이스터징어입니다. 구두장이이기도 했고요.

경기필 공연에서는 '마이스터징어'라는 낯선 말을 '명가수'로 옮겼습니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기사인 '발터 폰 슈톨칭'이 마이스터징어에 도전하는 이야기인데, 바그너는 이 이야기에 빗대어 자신의 예술관을 드러내고 독일 예술을 찬양했습니다.

여기에는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토벤이 고전주의 음악 양식을 완성하고 낭만주의 시대를 열어젖힌 뒤로, 베토벤이 남긴 음악 유산을 정당하게 계승한 작곡가가 누구냐를 놓고 담론 투쟁이 일어납니다. 바그너를 중심으로 하는 파벌과 브람스 · 한슬리크를 중심으로 하는 파벌이 격렬한 투쟁을 벌였고, 그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이를테면 '수준 높은 애호가는 실내악을 듣는다'라는 속설은 본디 바그너 진영이 진보적이라는 주장에 대항해 브람스-한슬리크 진영에서 내놓은 논리였지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 옛 규칙을 고집스럽게 떠받드는 인물인 '직스투스 베크메서'는 바그너가 브람스-한슬리크 진영, 더 정확히는 한슬리크(Eduard Hanslick)를 비꼬려고 꾸며낸 인물입니다. 바그너는 대본을 쓸 때 '한스 리히'(Hans Lich)라는 이름을 썼다가 너무 노골적이라서 '베크메서'로 바꿨다네요. 한슬리크는 당시 이름을 떨치던 음악학자이자 평론가로 바그너와는 사이가 매우 나빴지요. 베크메서와 대비되는 두 사람, 즉 새로운 시도를 망설이지 않는 발터 폰 슈톨칭과 '온고지신' 원칙을 가장 훌륭하게 실천하는 진정한 명인 한스 작스는 바그너 자신을 나타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성배와 현자의 돌

바그네리안이 생겨나는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설정이 주는 매력을 중요하게 꼽을 수 있을 듯합니다. 이번 경기필 연주회 포스터를 보고 사람들이 '게임 포스터 같다'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바그너 작품이나 요즘 유행하는 롤플레잉 게임(Role-playing game)이나 모두 신화와 마법의 세계를 그리거든요. 바그너 작품에 나오는 고유명사를 인터넷 검색해 보면 게임 관련 글이 더 많이 뜨기도 합니다.

《파르지팔》은 아서(Arthur) 왕을 따르던 '원탁의 기사'들이 성배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합니다. 명검 '엑스칼리버'와 마법사 '멀린'이 나오는 바로 그 전설이지요. 가웨인(Gawain), 랜슬롯(Lancelot), 퍼시벌(Percival), 트리스트람(Tristram), 갤러해드(Galahad) 등이 원탁의 기사로 유명하고요. 이 가운데 성배를 찾는 데 성공했던 기사는 퍼시벌, 달리 쓰면 파르지팔입니다.

퍼시벌(파르지팔)이 성배를 찾았다는 이야기는 그냥 전설이고, 실제로는 십자군 전쟁 때 템플기사단(Templar)이 찾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템플기사단이 십자군 전쟁에 참전할 때 단원 수는 명분과 어울리지 않게 9명뿐이었고, 사실은 단원들이 솔로몬 성전 터에 천막을 치고 10년 넘게 발굴·탐사 작업을 벌였다고 합니다. 거기서 뭘 찾아내거나 배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돌아와서 갑자기 큰돈을 벌고 어마어마한 권력을 거머쥐었습니다. 화폐를 발명한 사람들이 바로 템플기사단이기도 하지요.

그랬다가 갑자기 망했습니다. 템플기사단에 큰 빚을 진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템플 기사단을 이단으로 몰아 숙청해 버렸지요. 이 사건은 상식에 한참이나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미국 대통령이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해체하고 주요 인물을 국가반역죄로 처벌하는 일과 비슷하거든요. (FRB는 민간단체이면서도 달러 화폐를 독점 발행할 수 있는 엄청난 권리를 가지고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대통령이라도 함부로 할 수 있는 단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템플기사단 숙청 사건과 관련해 수많은 음모론이 생겨났습니다.

중세 기사이자 음유시인이었던 볼프람 폰 에셴바흐(Wolfram von Eschenbach)는 『파르치팔』(Parzival)이라는 서사시를 썼습니다. 바그너는 이 작품을 중요하게 참고해서 《파르지팔》(Parsifal)을 썼습니다. 볼프람을 《탄호이저》에 등장인물로 쓰기도 했고요. (에셴바흐는 성이 아니라 출신지입니다. 중세시대 사람이라 성이 없어요.)

『신의 지문』 등을 쓴 작가 그레이엄 핸콕은 볼프람이 템플기사단원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학술적으로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는 주장인데,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볼프람이 『파르치팔』을 쓰기 시작한 때는 십자군이 살라딘 군대에 패하여 예루살렘 왕국이 함락된 직후이며, 『파르치팔』에 묘사된 배경은 아서 왕 시대가 아닌 십자군 원정 당시와 맞아떨어진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 그레이엄 핸콕은 『파르치팔』에 묘사된 지리는 성궤가 숨겨진 위치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본격적인 음모론입니다. 볼프람은 성배가 돌(石)이라 했습니다. 음모론자들은 성배가 돌과 관련 있는 지식이며, 그 지식은 영생 또는 영혼 전이와 같은 초과학적 능력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중세시대에 유행했던 연금술은 불로불사를 가능하게 한다는 '현자의 돌'(elixir)을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고 합니다.

이집트에 피라미드가 세워진 때는 신석기시대였지요. 돌도끼 휘두르던 그때에 현대과학으로도 비밀을 밝히지 못하는 피라미드가 세워질 수 있었던 까닭을 학술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사시대'라고 부르는 옛날, 또는 그보다도 앞선 먼 옛날에 고등문명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배란 그 초고대문명에서 나온 파편이라고요.

음모론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단체 프리메이슨(Freemason)은 본디 '자유석공조합'이라는 뜻이지요. 숙청에서 살아남은 템플기사단원들이 만든 단체가 바로 프리메이슨이라고도 합니다. (프리메이슨은 서울 이태원, 경기도 파주, 그리고 부산에도 지부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노파심에서 덧붙이지만, 음모론에 너무 빠지지는 마시고 재미로만 봐 주세요. 단일세력이 세계를 암중 지배한다는 식의 거대음모론은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기밀문서만 봐도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지요. 중요한 것은 바그너가 《파르지팔》에서 나타낸 상상의 세계와 철학적 메시지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바그너는 1872년 베를린에서 프리메이슨 가입 신청을 했다가 "은근한 압력"을 받고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 뒤에 《파르지팔》을 썼지요. 바그너는 《파르지팔》에 나오는 성배기사단이 템플기사단과 복장이 비슷하다고도 했습니다. 바그너의 장인이었던 리스트는 1841년 프리메이슨 프랑크푸르트 지부에 가입했고, 1870년 부다페스트 지부에서 프리메이슨 3도 회원(Master)이 되었습니다. 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이름난 음악가 가운데 상당수가 적어도 한때나마 프리메이슨 또는 관련 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바그너는 성배가 '왕의 피'를 뜻하는 "상 레알"(Sang Réal)에서 온 말이라 했습니다. 영화 《다빈치 코드》 또는 원작 소설을 보면 비슷한 얘기가 나오지요? 다만, 바그너는 '왕의 피'를 혈통 개념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파르지팔》을 보면 암포르타스 왕이 성창(롱기누스의 창)에 찔려서 피를 흘리는 얘기가 나오는 정도이고, 수정으로 된 잔(Kristallschale)이 성배로 나옵니다. 앗, 그러고 보니 수정은 광물, 그러니까 돌이지요!

《로엔그린》은 《파르지팔》 이후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로엔그린은 파르지팔의 뒤를 이어 성배수호기사를 이끌게 되는데,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은 로엔그린이 몬살바트 성을 떠나 활동하는 이야기입니다. 로엔그린은 볼프람 폰 에셴바흐가 쓴 서사시 『파르치팔』(Parzival)에 처음 나오는 이름이며, 원작에서는 '로에란그린'(Loherangrin)이었다가 13세기 후반에 전해진 판본에서 로엔그린(Lohengrin)으로 바뀌었습니다.

▶ 파르지팔의 고통과 깨달음에 대하여

《파르지팔》에는 이런 계시가 나옵니다. "자비심으로 깨달으리라, 순수한 바보여"(durch Mitleid wissend, der reine Tor).

이 말은 《파르지팔》에서 바그너가 나타내고자 한 철학적 메시지를 대표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철학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래서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하시는 이진 선생이 쓴 글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를 빌려 올까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der doch alles weiss)' 구르네만츠도, 윤회로 영원히 반복되는 세월동안 무수한 일들을 보아온 쿤드리도(denn nie lügt Kundry, doch sah sie viel), 성스러운 자 성배왕 티투렐도, 직접 계시를 들은 암포르타스도, 성스러움의 이면에서 사악한 마법을 알아낸 클링조어도 그 앎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니 "너 정말 그냥 바보일 뿐이로구나!"라는 말을 할 때, 구르네만츠는 사실 자신도 모르는 맥락에서 진실을 말한 것이 된다.

"순수한 바보"만이 깨달음을 얻어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까닭은 지식이 깨달음을 방해하기 때문이라네요. 지식이 아니라 자비심(Mitleid)으로 깨달아야 하지요. 자비심을 뜻하는 독일어 "Mitleid"는 함께(Mit) 고통받는다(leiden)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남의 고통을 그저 아는 일과 그것을 함께 느끼는 일은 다릅니다.

그 좋은 예가 될 '책상 살인자(Schreibtischmörder)'라는 말이 있다. 나치의 경험이 만들어 낸 이 단어는 매사에 얌전하고 규정과 관습에 따라 모범적으로 살는 듯 '정상적으로' 보이는 인간이 거리낌없이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아이러니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 '남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평범한 삶을 위한 안전핀이 된다.

반면, 남의 고통을 느끼는 것 즉 자비심은 그 자체가 일상을 벗어나는 경험이자 실천이다. 자비심은 함께 고통을 겪는 삶으로,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보살행'으로 연결된다. 필자의 부족한 이해력의 한계 안에서나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참된 자비심(Mit-leid)는 곧 보살행(mit-leiden)이다.

이진 선생은 바그너가 영향받았던 쇼펜하우어 철학과 불교 사상을 아우르며, '함께 고통받는' 일에서 그치지 말고 '함께 기뻐하는'(Mit-Freude)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바그너가 음악으로 나타내고자 한 진정한 철학적 메시지라고 말합니다.

보살은 일체중생을 구제하려고 열반에 들지 않지만, 역설적이게도 실제로 보살에 의해 구제되는 중생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각자는 (자신 안에서 불성을 깨닫는 것을 통해) 각자를 구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행은 이러한 의미에서 보살의 '자기' 수행과 동일할 것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요, 살며 살게하라(Live and let live)는 지혜이다.

그리고 이럴 때, 고통받는 자에게 내미는 손길은 더이상 '함께 슬퍼하는 것도 함께 고통을 겪는 것도 Mit-Leid(en)'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차라리 "함께 기뻐한다 Mit-Freude"는 말로 비로소 제대로 전달된다.

[…] 어리석음과 폭력이 반복되는 잔인한 현실을 함께 바라보면서도 "만인은 만인에 대한 신(神)(homo homini deus)"이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으니 바로 스피노자다. 고통받는 이들을 더 이상 동정하지 말라고, 동정이 아닌 사랑을 외친 자가 있으니 니체다. 어쩌면 고통받는(leidend) 신(神) 디오니소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삶의 필연적인 수동성, 그에 따르는 고난, 절망과 슬픔의 정서을 바탕에 깔고 시작한다. 그렇지만 유한한 존재로 태어난 인간은 수동적인 체험 속에서도 자신 안의 신적 본성을 발견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어 이로써 점차 자유로워지며(스피노자), 오히려 가장 쓰디쓴 운명까지 모든 수동적인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운명에 대한 사랑, amor fati)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며(니체), 갈기갈기 찢겨졌던 신은 죽음을 딛고 부활한다(디오니소스).

[…]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심취해있던 1858년 10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에 보낸 한 편지를 보면 자신의 본성 그리고 예술적 성취의 근원이 연민(Mitleid)임을 고백하면서도 사랑 속에서 너무도 어렵게 얻어지는 기쁨(Mit-Freude)은 그에 대한 단순한 보완 이상이라고 적고 있음이 흥미롭다.

'함께 기뻐함'은 사랑으로 얻을 수 있는 기쁨이로군요. 이 대목에서 경기필이 지난 3월에 공연했던 말러 교향곡 3번을 떠올려도 좋지 않을까요?


― 티켓 예매 ―

예술의 전당 SACTicket
http://www.sacticket.co.kr/home/play/play_view.jsp?seq=12176

인터파크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S0001888

예스24
http://ticket.yes24.com/Home/Perf/PerfDetailInfo.aspx?IdPerf=11960

옥션티켓
http://ticket.auction.co.kr/Home/Perf/PerfDetailInfo.aspx?IdPerf=15320

2009년 8월 10일 월요일

바그너 한글 대본 모음

《연애금지》 (Das Liebesverbot) 한글 대본 (번역: 류지선, 출처: 바그네리안)
《리엔치》 (Rienzi) 한글 대본 (번역: 류지선, 출처: 바그네리안)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 독한 대본
    (번역: 구훈, 출처: 고클래식)
《탄호이저》 (Tannhäuser und der Sängerkrieg auf Wartburg) 독한 대본
    (번역자 미상,  출처: 고클래식)
《로엔그린》 (Lohengrin) 독한 대본 (번역: 구훈,  출처: 고클래식)
☞ 《니벨룽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 독한 대본
    (번역자 미상, 출처: 고클래식)
    - 《라인의 황금》 (Das Rheingold)
    - 《발퀴레》 (Die Walküre) 1막, 《발퀴레》 2-3막
    - 《지크프리트》 (Siegfried) 1막, 《지크프리트》 2-3막
    - 《신들의 황혼》 (Götterdämmerung) 서막-1막, 《신들의 황혼》 2-3막
※ 《니벨룽의 반지》 대본은 엄선애가 번역한 단행본을 추천합니다. ☞ 故 박원철님 서평
《베젠동크 가곡》 (Wesendonck Lieder) 독한 대역본
    (번역: 유지원,  출처: 바그네리안)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독한 대본
    (번역: 허정윤,  출처: 고클래식)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독한 대본
    (번역: 김보근,  출처: 고클래식)
《파르지팔》 (Parsifal) 독한 대본 (번역자 미상,  출처: 고클래식)

※ 저작권은 번역자에게 있습니다. 번역자가 확실한 파일은 김원철이 번역자에게 허락을 받고 퍼왔으며, PDF 파일로 바꾸어 올렸습니다. 번역자를 알 수 없는 파일은 외부 링크만 걸어두었습니다.

2009년 8월 6일 목요일

바그너 길라잡이

리하르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1813. 5. 22 라이프치히 - 1883. 2. 13 베네치아)
 

▶  개요: 위키피디아 검색 결과
▶  바그너 관련 용어

▶  서평: 안인희,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 (서울: 민음사 2003)
▶  바그너 색깔론
▶  바그너를 처음 접하는 분께
▶  바그너를 제법 들어보았으나 재미가 없다고 느끼는 분께
▶  바그너 대본 자료실
▶  바그너 주요 작품과 추천 음반
▶  바그너 디스코그래피 (고클래식)
▶  바그너 디스코그래피 (http://www.wagnerdiscography.com/)
▶  바이로이트 사운드
▶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표 구하는 법
▶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  바그너 주요 작품 연구

☞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

☞ 《탄호이저》 (Tannhäuser (und der Sängerkrieg auf Wartburg))

☞ 《로엔그린》 (Lohengrin)

+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 《니벨룽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

☞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 《파르지팔》 (Parsifal)

바깥 고리

2009년 3월 18일 수요일

바그너와 프리메이슨

프리메이슨 공인 회원 명단에 리스트(Liszt)가 있어서 바그너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했는데, 구체적인 근거를 찾았다.

리스트는 1841년 프랑크푸르트 "Zur Einigkeit" 지부에 가입, 1870년 부다페스트 "Zur Einigkeit" 지부에서 3도 회원(Master)이 되었다.
바그너는 프리메이슨 입회 및 연금술과 관련한 생각을 일부러 <파르지팔>에 담았던 것으로 추측되며, 1872년 베를린에서 프리메이슨 가입 신청을 했으나 은근한 압력(discreet pressure)을 받고 포기했다.
- Cecil Hill/Roger J.V. Cotte, "Masonic music.", NGD2

김원철 주: 연금술은 현자의 돌(elixir) 제작이 최종 목표였으며, 성배 및 프리메이슨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참고:
http://blog.naver.com/patomusic/120007969434
http://blog.naver.com/patomusic/120007970578

2008년 9월 17일 수요일

쿤드리, 릴리쓰, 성배, 그리고 템플기사단

아래 글을 읽고 씀:
http://blog.goclassic.co.kr/conrad30/1221630807

잘 읽었습니다. 제 의견을 몇 가지 말씀드릴게요.

1. 쿤드리를 막달라 마리아에 대입하니 좀 어색하다고 느낍니다. 구르네만츠를 세례 요한에 비유하면 더 어색해집니다. 클링조르는 쿤드리를 헤로디아스라 했거든요.

클링조르
오라! 오라! 내게로!
네 주인이 부르노라 이름 없는 이여,
태초의 마녀여, 지옥의 장미여!
너는 헤로디아스였고, 또 무엇이었느냐?
거기서는 군드리기아스였고, 여기서는 쿤드리이니!
오라, 이리 오라, 쿤드리!
네 주인이 부르노라. 명을 받들라!
(번역: 김원철)

제가 생각하는 쿤드리의 정체는 릴리쓰(Lilith), 태초의 악이자 아담과 이브를 꾀어낸 뱀입니다.
참고:
http://en.wikipedia.org/wiki/Lilith

2. 바그너는 성배(San(ct) Gral)가 '왕의 피'(Sang Réal)에서 온 말이라 했습니다. 이 점에서는 <다빈치 코드>와 같습니다. 다만, 바그너가 '왕의 피'를 메로빙거 왕조 혈통이라 생각했다는 증거는 못 봤습니다. 저는 바그너가 '왕의 피'를 상징적인 뜻에서 이스라엘 왕, 즉 예수 그리스도가 흘린 피라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파르지팔>에서는 암포르타스가 흘린 피이기도 하지요.
참고:
http://wagnerian.textcube.com/137

3. <파르지팔>은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파르치팔>이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지요. 그레이엄 핸콕에 따르면 볼프람은 템플기사단원이었습니다. 템플기사단은 성전으로 가는 길목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는데, 그때 단원 수는 명분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9명뿐이었고, 실제로는 솔로몬 성전 터에 천막을 치고 10년 넘게 발굴/탐사 작업을 벌였다고 합니다. 거기서 뭘 찾아내거나 배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복귀하고 나서 갑자기 왕이나 교황과 대등한 돈과 권력을 거머쥐었습니다. 그리고 볼프람이 <파르치팔>을 쓰기 시작한 때는 십자군이 살라딘 군대에 패하여 예루살렘 왕국이 함락된 직후이며, <파르치팔>에 묘사된 배경은 아서 왕 시대가 아닌 십자군 원정 당시와 맞아떨어진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 그레이엄 핸콕은 <파르치팔>에 묘사된 지리는 성궤가 숨겨진 위치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바그너는 <파르지팔>에 나오는 성배기사단이 템플기사단과 복장이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템플기사단원이었던 볼프람은 성배가 돌(石)이라 했고, 요즘에는 돌과 관련한 비전 지식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템플기사단이 이단으로 몰려 숙청당한 다음 생존자가 영국으로 도망가 새로 만든 비밀 결사가 '자유 석공 조합' 즉 프리메이슨이라고 하지요. 프리메이슨이 템플기사단을 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거의 공공연한 비밀인 것 같더군요. 바그너가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그너의 장인이었던 리스트는 공인된 프리메이슨 회원이었습니다. (나중에 붙임: 바그너는 프리메이슨 가입신청했다가 사실상 거부당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쓴 게 <파르지팔>이지요.)

참고:
http://blog.naver.com/patomusic/120007969434
http://blog.naver.com/patomusic/120007970578

2006년 9월 13일 수요일

볼조겐의 파르지팔 해설 독일어 원문

- SiteLink #1 : http://www.erzabtei.de/antiquariat/online_bibliothek/wagner/parsifal/parsifal_test.html



Wolzogen, Hans ¬von¬:
Thematischer Leitfaden durch die Musik des Parsifal, nebst einem Vorworte über den Sagenstoff des Wagner'schen Dramas. - 2. Aufl. - Leipzig : Senf, 1882. - 92 S. : mit Notenbeispielen


2006년 3월 27일 월요일

성배는 "왕의 피 Sang Réal"

" 중세 문헌에는 "Grales'을 '잔'이라고 하는 것 외에, 에센바하 처럼 '돌'이라고 하는 說도 있다(글쎄, 여기서는 '돌(石)'이라고 했네요!) 바그너는, 메카의 카바신전에 있는 기적의 검정돌 이야기에 촉발된 크리스찬이, 이것을 아리마타야의 요셉전설과 결합해서 이야기 형태로 전하다가, 어느듯 '왕의 피 Sang Real(e 위에 点 있음)'이 '聖스러운 그랄 San Gral'로 사투리화 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M.메젠동크에게 보낸 편지 1859.5.29). 오늘날은 그리스어의 '그라텔(杯)을 어원이라 하는 설이 설이 유력하다."

일본바그너협회 감수 <파르지팔> 白水社 2000년 발행

- 다음카페 바그네리안, 조서연님의 글에서 퍼옴.


원문을 찾아보니 1859년 5월 30일자 편지임. 29일자 편지와 30일자 편지가 붙어있어 착각한 것으로 보임.

Daher denn auch die Sage, dass der Gral (Sang Réal) (daraus San(ct) Gral) die fromme Ritterschaft einzig ernähre, und zu den Mahlzeiten er Speise und Trank gewähre.

[Sämtliche Briefe: Bd. 11: Briefe von April bis Dezember 1859, S. 167. Digitale Bibliothek Band 107: Richard Wagner: Werke, Schriften und Briefe, S. 14763 (vgl. Wagner-SB Bd. 11, S. 107)]

http://www.8ung.at/fzmw/2000/2000T1-Dateien/2000T1-5.htm

2005년 10월 30일 일요일

[펌]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펌]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 (1) | 바그너 환자의 망상 포스트 삭제 2005/10/30 13:04

http://blog.naver.com/wagnerian97/40019029037
출처 : 새롭게 피어나는 꿈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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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삶 즉 고통
(1) 암포르타스의 고통
(2) 고통의 전시장


2. 구원: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
(1) 수난(Leiden, Passion)
(2) 자비(Mitleid)와 보살행(mit-leiden)

3. 글 밖에서 비로소 시작될 이야기: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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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 즉 고통

(1) 암포르타스의 고통


극적 얼개의 표면에 우선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물론 암포르타스의 고통이다.

쿤드리의 유혹에 빠진 암포르타스는 성창(聖槍)을 잃고, 마법사 클링조어가 휘두른 그 성창에 찔린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는다. 다른 모든 이야기들은 이 사건을 시/공간적 중심에 놓고 엮여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역시 표면적인 흐름 속에서는 주인공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순수한 바보 '파르지팔' 조차도 성배왕의 고통을 순수한 바보가 없애주리라는 예언 아래 묶여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극으로서의 <파르지팔>이 던지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면 그것은 '파르지팔'이 마침내 암포르타스의 고통에 동정을 느끼게 되는 장면(2막)에서 모두 해소될 수도 있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굳이 3막이 필요했던 것인가? 왜 파르지팔은 암포르타스를, 쿤드리를 바로 구원하지 못하고 긴 세월을 방랑해야만 했을까?

이 의문은 <파르지팔>의 모든 인물들이 자신에 주어진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으로 풀리지는 않을까?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로써 <파르지팔>이 담고 있는 보다 깊은 문제의식을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누가 또 고통받고 있는가?


(2) 고통의 전시장

무엇보다도 쿤드리를 보라. 구세주를 비웃은 죄로 영겁 속에서 무수한 생을 거듭살며 속죄를 위해 구세주를 찾아 세상을 헤메봐도 환상 속에서 다시 만난 구세주를 거듭 비웃어야만 하는 저주가 가져오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저주를 깨뜨릴 수 있는 자, 자신의 유혹을 견뎌낼 수 있는 자 즉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을 자에게 내민 손이 그들을 파멸시키는 순간 쿤드리는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다만 거친 한숨을 몰아쉰다.
"저 암포르타스도 강하지 못했어, 모두가 ... 너무도 약했어! 나처럼 모두들 내게 내린 저주로 몰락하고 마는구나! (Schwach auch er! Schwach.. alle! Meinem Fluche mit mir alle verfallen!)"

1막과 2막의 쿤드리가 자신의 상반된 모습을 다른 상태에서도 의식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연출 상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어떤 해석에 따르건 최소한 무의식적으로라도 아라비아에서 가져온 물약과 지칠줄 모르는 노고에 감사를 표하려는 암포르타스를 바라보는 것만큼 원인제공자 쿤드리에게 괴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병주고 약주는 사람도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구원을 바라며 내미는 나의 손이 언제나 저주받은 유혹으로 해석된다면.

KUNDRY
(unruhig und heftig am Boden sich bewegend) (땅바닥에 쓰러진 그대로 초조하고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며)
Nicht Dank! Haha! Was wird es helfen? 고마워하지 말아요! 하하!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담?
Nicht Dank! Fort, fort! Ins Bad! 고마워하지 말아요! 어서, 어서! 몸을 씻어요!



그런 쿤드리를 지배하는 클링조어는 어쩌면 고통에서 자유롭지는 않을까? 아니, 이 클링조어의 절규를 들어보라. "이 끔찍한 괴로움이여! (Furchtbare Not!)"
그는 돈 지오반니 혹은 이아고 같은 확신범이 아니다. 이교도 출신인 그를 경멸하고 모욕했던 성배기사단은 끝내 그에게 속죄도, 성스러운 것으로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성스러움을 상징하는 성배와 성창을 향한 그의 염원(Sehnen)과 갈구(Drang)는 차츰차츰 그를 지배하는 고통의 굴레가 되어 원치 않았던 악역을 떠맡긴다. 클링조르의 요새와 성배기사단의 성이 대칭되듯 닮아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적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 '적'과 '나'는 본성상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일견 클링조어의 대척점에 서있는 듯 보이는 성배기사단 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내용을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듯 해골로(렌호프 연출) 혹은 굳어버린 석조상(아이힝어 연출)으로 등장하는 선왕 티투렐의 현재 모습에서 성배와 성창을 하사받을 때의 성스러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삶에 대한 진정성이 없는 명령문으로만 존재하는 이념체계란 하나의 존재자로서의 이념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철저한 참담함이 아닐까.

성기사 구르네만츠도 벌써 1막부터 근심에 사로잡혀 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der doch alles weiss)' 지혜로운 그라지만 그 지혜도 본질적 고통의 문제 앞에는 무력할 뿐이다. 헛된 기대와 노력을 뒤로 하고 세월은 흘러 언제나 정정할 것만 같았던 그도 선왕 티투렐을 앗아간 그 죽음 만을 기다리는 늙은 은둔자가 되었다(3막), 더 이상 희망을 품을 능력을 상실한 채 가실 일 없는 근심과 걱정으로 등까지 구부정해진 늙은이는 그런 자신을 알아보는 파르지팔에게 자조적으로 말한다.

GURNEMANZ
So kennst auch du mir noch? 날 아직도 알아본단 말이오?
Erkennst mich wieder, 이런 나를,
den Gram und Not so tief gebeugt? 깊은 근심과 걱정만큼이나 구부정해져버린 이런 나를?




성배기사들도 자기 존재의 이유와 목적은 오래전에 잊은 듯 성배의 빛으로 연명하는데 급급하다. 1막의 행진곡풍 합창은 언뜻 그저 건전하게만 울려퍼지는 듯 싶다. 그러나 그 노래가 더욱 '건전하게 울려 퍼질 수록' 일말의 의심도 섞여있지 않은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은 더욱 심화된다. 폭력과 장조의 만남은 오히려 역겹고 메스꺼운 느낌을 자아내어야 할 것이다 - 마치 큐브릭의 <시계태엽오렌지>에서 폭력적 장면과 오버랩되어 '환희의 송가'가 울려퍼지고 이를 강제로 지켜보며 괴로워하는 알렉스(말콤 맥도웰 분) 그리고 이를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연구자들의 관계처럼, 환호하는 기사들의 중심에는 그들의 요구로 자기 의지에 반해 성배의 덮개를 벗겨내고 다시 상처가 벌어져 피를 흘리는 암포르타스가 있다.




(왼쪽: 베를린 슈타츠 오퍼에 새로 오른 아이힝어의 연출에서 성배는 바로 암포르타스의 심장으로, 그리고 끊임없는 폭력으로 고통받는 대지 혹은 지구로 치환되었다. 본 공연에 대한 짧은 평을 이 글 마지막에 달아 놓았다.)





그런데 성배기사들이 보이는 폭력성은 마치 사냥꾼들에 둘려싸여 구석에 몰린 '상처입은' 들짐승의 난폭함과 같다. 혹은 화생방실을 가득채운 지독히 매운 가스에 눈물콧물을 흘리다 옆사람을 밀치며 출구로 뛰쳐나가는 xxx번 훈련병의 무분별함과도 같다. 이러한 종류의 폭력은 집단과 제도에 의해 행사되기에 그로부터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 폭력의 희생자들이 움켜쥐는 지푸라기 바로 그것이다. 쿤드리를 의심하고 괴롭히는 기사들의 모습도(1막) 보이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피해를 받고 있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일 뿐이다.

'가슴 속의 고통'(Herzeleide)라는 이름을 지녔던 파르지팔의 어머니, 뱃속의 자식을 보지 못하고 추적자들에 살해당하는 그의 아버지도 이러한 점에서 예외가 아닌 것이다. (파르지팔 자신의, 그리고 '더럽혀진 손'에 의해 신음하는 '성스러움=구세주=성배와 성창'의 고통에 대해서는 잠시 미루어 놓는다.)


한밤의 꿈 속에 나오는 수많은 타인의 얼굴들이 하나하나 어떤 식으로든 꿈꾸는 내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그래서 서로 닮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섬뜩했던 적은 혹시 없는지? 예술가의 백일몽으로서의 예술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그 역할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예술가가 품은 생각과 이미지 곧 하나의 ‘완결된’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에게 이 세계가 모순에 가득찬 불완전한 것으로 비친다고 해도 그 이미지 자체는 완결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실제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필자는 마린스키극장-바덴바덴페스티벌 공동연출의 <투란도트>를 보고서야 비로소 푸치니가 동 작품의 모든 인물을 '그가 무엇을 욕망하는가'의 관점에서 파악해 인간에 있어 욕망의 문제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투란도트>는 '욕망의 전시장' 혹은 '욕망의 자연주의적 실험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이를 '고통의 전시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파르지팔>에서 각 인물들은 하나같이 상처입고 고통으로 괴로워하는데, 또한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각각의 인물들에서 '암포르타스'의 모습이 투영된다. 그리고 이 때의 '일반명사로서의' 암포르타스는 불특정의 인간이 아니라 '고통받는 자'로서의 인간을 보편적으로 표상한다.


과거 예수의 옆구리에서 피를 흘렸던 성창은 다시 암포르타스를 찌르게 된다.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다면 암포르타스는 이를 통해 인간을 '대표해서' 고통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진정한 치료는 물론, 그를 잊게 해주는 환상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이러한 고통이란 바로 존재의 고통, 어드덧 나서 어느덧 죽어야 하는 삶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고통일 것이다.

그 고통이 원죄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하든지 끊어내지 못한 인연의 끈에서 말미암는다고 말하든지, 아니면 후자를 더욱 분명하게 따져보아, 쇼펜하우어에 있어 어떻게 고대 인도 베다의 가르침이 낭만적 허무주의로 변형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그 때의 고통이란 무목적적 의지가 개별자들에게 강요하는 '살라! 욕망하라! 서로서로 물어 뜯으라!' 라는 명령에 우리가 복종하는 데에서 온다고 보든지 간에... 이 삶의 고통 자체는 하지만 그 어떤 종교나 사상이 아닌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임에는 변함이 없으리라.

(계속)

[펌]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2) | 바그너 환자의 망상 포스트 삭제 2005/10/3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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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새롭게 피어나는 꿈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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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삶 즉 고통
(1) 암포르타스의 고통
(2) 고통의 전시장

2. 구원: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
(1) 수난(Leiden, Passion)
(2) 자비(Mitleid)와 보살행(mit-leiden)


3. 글 밖에서 비로소 시작될 이야기: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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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원

(1) 수난(Leiden, Passion)


이와 같이 인류가, 아니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보편적인 고통에 대한 치유는 응당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암포르타스도 쿤드리도 클링조어도, 이 모든 이들이 진정 원한 것은 모두 단 한 가지, '구원'이었다.

그렇지만 만일 모두가 이겨내지 못할 고통 속에 있다면 과연 어떤 누가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양 기꺼이 혹은 감히 다른 누군가에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이러한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의문은 <파르지팔>에서 왜 하필 '순수한 바보'만이 구원자의 자격을 지닌 것인가라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앞서 '모든 자가 고통받고 있다'라고 적고는 '파르지팔'이란 인물이 느끼는 고통에 대한 아무런 언급 없이 지나쳤던 것에 대한 해명도 함께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잠시 논의의 속도를 늦춰 보아도 좋을까? 왜냐하면 이 구원이 어떻게 가능할 것이냐의 문제는 우선 구원해야할 고통이 어떤 원인에서 나온다고 보느냐에 따라 상이하게 파악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이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은, 그의 발목을 묶고 있는 족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본 <파르지팔>에서 바그너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결정적이었음은 (바그너가 쇼펜하우어를 제한없이 받아 들인 것은 아님을 감안해도) 명백하다. 쇼펜하우어의 주저를 접하기 전이었던 <탄호이저>에서조차 발견되는 두 인물의 사상적 친화성은 놀라울 정도다.

바그너의 예술 만큼이나 매혹적인 쇼펜하우어의 사상인데다, 거기에 니체와 헤겔을 함께 초대하면 더욱더 흥미로울 듯하다. 하지만 필자는 <파르지팔>에 논의를 한정하기 위해,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라는 극중의 계시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려한다.

이제까지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상처(Wunde)' '고통(Schmerz)' '괴로움(Weh)' '고난(Not)' '수난(Leid)' 과 같은 말들을 당연한 개념인양 특별한 구분 없이 사용했다. 이것이 사실 큰 문제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꼭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중 '수난Leid'이라는 말의 특수성이다. 이 단어를 동사(leiden)로 바꿔보면 "(괴로운/부정적인/피하고 싶은 무엇인가를) 감수하다, 견디다, 앓다, 그것으로 고통받다"와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괴로움'은 '고난'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우리가 그것을 경험함으로써만 그것은 존재한다. '고통'이나 '괴로움' 과 같은 말로 지칭되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흔히 '감정'이라는 근원적인 현상에게 부당하게 부여되는) 어떤 찰나적인, 스쳐 지나가는 심적 상태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고통받다leiden'라는 것은 단단한 현실이다. 그것은 외부세계와의 관계에 있어 수동적/피동적인 위치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인간에 있어 '경험하다' 혹은 '살다'라는 말의 다른 얼굴이다.

여기에 덧붙여 서양철학의 한 조류에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세상에 내던져졌다(geworfen)'다고 말하는 것도 <파르지팔>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 귀담아 들어볼 만 하다. 일상적인 숙고로도 이 점은 자명해 보이는데,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태어나 자신의 호오에 무관하게 이미 결정되어져 있는 시대와 장소, 사회제도와 가족관계라는 망망대해 속에 조각배처럼 떠다니는 개인에게 닥쳐오는 (최소한 유한한 능력을 지닌 인간의 눈에는) 우발적인 사건들의 파도! 그 속에서 인간은 출발점에서부터 "- 되어지다"라고 일컬어지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우리가 문제로 삼는 고통은 엄격히 말해 삶 자체를 말하며,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은 곧 삶 자체로부터의 구원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수난(passion과 passive라는 두 단어를 비교해보라) 그리고 열반 직전 부처가 겪는 시련을 포함, 많은 종교적 진리의 완성은 스스로 고행을 택하든 남에 의해 박해를 받건 언제나 고난을 수반했다는 점을 떠올려 볼 만 하다.

<파르지팔>의 부제(Bühnen Weihefestspiel)는 무대신성제전극(舞臺神聖祭典劇), 신성무대축전극(舞臺神聖祭典劇)과 같이 때로는 거창하게 혹은 '무대 봉헌극'처럼 간결하게 번역되는데, '공연을 통해 (새로 열리는) 극장/무대를 신성하게 만든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독일에서 '집들이'는 약간은 농을 섞어 Einweihungsparty라고 한다.)
이와 같이 그 부제에서부터 예술을 통해 종교를 구원한다는 바그너의 이상이 담긴 본 작품에서 삶 즉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선 어떤 통과의례, 곧 삶(=고통)을 거치게 된다는 것은 앞서 보았던 종교적 원형과도 일치한다.


하지만 말이다, 이것은 참으로 거대한(뻔뻔한) 역설이 아닌가? 아직 필자의 길고 난삽한 문장에 현혹되지 않은 이라면 바로 되물을 것이다. 고통을 없애달라는 기도 끝에 고통스러운 삶을 선물로 받은 격이 아닌가??

아니, 필자도 그러한 의문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싶다. 바로 그렇다. 어쩌면 바로 그래서 "고통으로 깨달을지니(durch Leid wissend)"라고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물론 다음에서 보겠지만 "고통으로 믿으리니(durch Leid glaubend)"라고 말하는 것은 더욱 부적절했으리라는 점도 분명하다.


(2) 자비(Mitleid)와 보살행(mit-leiden)

자비와 보살행이라니?! 비둘기, 빵과 포도주(=피), 성배와 성창이라는 가장 대중적인 기독교적 상징들이 등장하는 <파르지팔>에 대한 글에서 이렇게 불교용어를 써도 되는 것인가... 하고 묻는 분께는 된다...고 말씀드리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불교적(쇼펜하우어식으로 왜곡된 점을 감안해 '불교의'로 적지 않는다) 세계관이 어떻게 <파르지팔>에 스며들어 있는지에 대한 논의들, <파르지팔>로 표현하려던 바가 전달 되었다고 보고 중단된 바그너의 불교적 우화 <승리자들 die Sieger>에 대한 이야기 등은 몬살바트 사이트 등에서 훌륭하게 다뤄지고 있기에 굳이 사족을 달지 않는게 좋겠다.


다만 여기에서 최근 오페라연출자 하리 쿠퍼가 한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해 남긴 흥미로운 코멘트를 하나 소개한다. "만일 바그너가 <파르지팔>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분명 '자비심(필자주: 역시 Mitleid. 여기에선 '박애'나 '동정심'이 적절할까?)과 믿음'이라고 말했을 것이지, 결코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라고 쓰지 않았을 것이다."
( * 하리 쿠퍼 인터뷰는 필자 블로그의 꼭지글을 참조하시길)

설령 기독교가 불교와 '자비심/연민/박애/동정'의 가치는 공유할지라도 반면 '깨달음(Erkenntnis, 인식)'은 불교에서와는 달리 기독교에 있어 그 만큼의 지위를 누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믿음(Glauben)'이 놓인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종교의 우열을, 게다가 이런 피상적인 논의를 기화로 가리려 한다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앞서 말했든 구원의 문제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라는 방법론적 문제이다.

인물 '파르지팔'이 걸어갈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라고 적혀있는 고난과 방랑의 길이 지닌 의미가 중요하다.

이제야 간신히 글의 처음에서 제기했던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마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극으로서의 <파르지팔>이 던지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면 그것은 '파르지팔'이 마침내 암포르타스의 고통에 동정을 느끼게 되는 장면(2막)에서 모두 해소될 수도 있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굳이 3막이 필요했던 것인가? 왜 파르지팔은 암포르타스를, 쿤드리를 바로 구원하지 못하고 긴 세월을 방랑해야만 했을까?

달리 묻자면, 2막과 3막 사이의 대본으로 기록되지 않은 세월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자비심(Mit-leid)이라는 말에는 쌍둥이 형제들이 있다. 동정(Com-passion), 또 공감(Mit-gefühl, Sym-pathy)이 그들이다. 연민이나 박애도 빼놓지 말자. 이들이 뜻하는 것은 어원적으로도 내가 아닌 남의 고통을 나도 함께 '느낀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한번 저 계시를 막막한 심정으로 음미해 본다: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

... 그런데 어떻게 느낀다는 것을 통해 수 있을까?!

만일 느낌을 주관적인 감정 혹은 미적인 영역에, 앎을 객관적인 참의 영역에 각각 분리시킨다면 두 영역간의 이러한 이행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두 영역간에 이행이 가능하다면, 즉 "자비심으로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은 느낌도 앎도 '삶'이라는 것, 산다는 것, 체험하는 것의 다른 이름들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단초를 인문학적으로 짚어가면 미학에서는 예술론과 감성학의 관계, 그리고 미학과 인식론 및 윤리학의 공통분모를 찾는 문제로 연결되지 않을까 짐작한다.)

그렇게 보면 단순히 '경험한다/겪는다'는 것이 반드시 '느낀다'라는 것과 같은 뜻을 지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만일 삶을 산다는 것의 본질이 고통받는 것이라면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자보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자, 괴로워하는 자는 보다 구원을 향해 한걸음 앞에 있다고 하겠다. 이 점에서 최소한 <파르지팔>의 주요인물들은 질식할 것 같은 경건함으로(1막의 성배기사) 혹은 욕망에의 탐닉 속에서(2막의 '꽃') 자신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군중들에 대비된다. 파르지팔의 말을 빌리자면 "네 고통은 복되도다 (Gesegnet sei dein Leiden)"(3막).


그렇다면 고통을 느끼는 자 중 왜 '순수한/순전한 바보(der reine Tor)' 파르지팔만이 구세주의 자격을 부여받는가?

첫번째의 대답을 '모르는 자만이 새롭게 알 수 있다'라고 시작하면 너무 무모한가?

우선 '바보'라는 말에는 누구나 당연히 '아는' 것들을 모르는 자에 대한 '아는 자'들의 비난이 담겨있다. '순수한' 이라는 멋진 수식어는 '바보'라는 말에 붙어 "너 진짜 바보 멍텅구리로구나! du bist aber ein reiner Tor!" 라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명제를 만든다.

GURNEMANZ
Was stehst du noch da? 너는 아직도 뭔가 하고 있는거냐?
Weisst du, was du sahst? 너는 네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기나 하느냐?
(Parsifal fasst sich krampfhaft am Herzen und schüttelt dann ein wenig mit dem Haupte) (파르지팔은 경련이 난 것처럼 심장 언저리를 쥐어짜더니 이윽고 고개를 젓는다)
Du bist doch eben nur ein Tor! 아니 너 정말 그냥 바보일 뿐이로구나!


'모든 것을 다 아는 (der doch alles weiss)' 구르네만츠도, 윤회로 영원히 반복되는 세월동안 무수한 일들을 보아온 쿤드리도(denn nie lügt Kundry, doch sah sie viel), 성스러운 자 성배왕 티투렐도, 직접 계시를 들은 암포르타스도, 성스러움의 이면에서 사악한 마법을 알아낸 클링조어도 그 앎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니 "너 정말 그냥 바보일 뿐이로구나!"라는 말을 할 때, 구르네만츠는 사실 자신도 모르는 맥락에서 진실을 말한 것이 된다.


두번째로, 자신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leiden) 자와 남의 고통까지 함께 괴로워하는(Mit-leid) 자의 차이를 숙고해 볼만 하다.

앞서 보았듯 개인에 있어 고통이 하나의 실체적 경험인 것처럼 자비심(Mit-leid)도 그저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타인에 적선하듯 떠올리는 감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우선 다른 이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새로운 '앎'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말하듯 '남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죄'가 된다.


그 좋은 예가 될 '책상 살인자(Schreibtischmörder)'라는 말이 있다. 나치의 경험이 만들어 낸 이 단어는 매사에 얌전하고 규정과 관습에 따라 모범적으로 살는 듯 '정상적으로' 보이는 인간이 거리낌없이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아이러니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 '남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평범한 삶을 위한 안전핀이 된다.

반면, 남의 고통을 느끼는 것 즉 자비심은 그 자체가 일상을 벗어나는 경험이자 실천이다. 자비심은 함께 고통을 겪는 삶으로,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보살행'으로 연결된다. 필자의 부족한 이해력의 한계 안에서나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참된 자비심(Mit-leid)는 곧 보살행(mit-leiden)이다.

그렇다면 우선 파르지팔은 더욱 '삶을 살아야만' 했다. 파르지팔이 자만하거나 쿤드리를 하찮고 부정한 여인으로 보아서가 아니라 파르지팔은 자신이야말로 구원받아야 하는 비참한 자임을 깨닫았기에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다. (뭇 사람의 눈에는 천해 보이던 여인의 발을 씻어주던 예수를 떠올려보라.) 따라서 이 유혹에 빠질 때 저주를 받는 것은 쿤드리 만은 아니다.

PARSIFAL
Auf Ewigkeit 영원히
wärst du verdammt mit mir 너는 나와 함께 지옥에 떨어지리
für eine Stunde 단 한시간 동안이라도
Vergessens meiner Sendung 내 소명을 잊은채
in deines Arms Umfangen! 네 품에 나를 맡긴다면


만일 <파르지팔>에 2.5막이 있었다면, 연출가들은 아마도 즐거운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파르지팔의 수난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라는 막중한 과제는 상상력이 풍부한 연출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만큼 매력적인 소재가 될 것이다. 피곤에 찌들어 귀가하는 일상인의 모습도 좋을테고 영문을 모르고 전쟁에 끌려왔던 병사의 귀향을 그려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켜졌으면 하는 것은 3막에서 파르지팔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일체의 희망을 잃어버린 채이어야한다는 점이다. 그는 암포르타스와 쿤드리, 그리고 클링조어에 못지 않은 절망을 그 심연까지 스스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하지만 파르지팔은 그 심연에서 나의 비참함이 너의 비참함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

이러한 점에서, 극의 마지막에서 파르지팔이 성배의 덮개를 벗기고 성 밖의 세계로 나아가게끔 형상화한 쿠퍼의 연출은 보살행으로서의 파르지팔의 행로를 훌륭하게 마무리한 예가 아닌가 한다.


다시 적지만, 필자는 <파르지팔>을 그리고 <파르지팔>이라는 거울에 비쳐진 삶과 세상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논의가 종교나 특정 학문의 틀을 넘어선다면 구태여 그 이야기를 가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출세간(出世間)이 곧 입세간(入世間)이다. 도를 깨쳤다고 해서 우리가 사는 세간을 떠나서 별천지에 사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이제까지의 논의에 딱 들어맞지만 이는 하이데거를 해설하는 어느 원로철학자의 말이다. 혹은, 키에슬로브스키의 "세가지 색" 연작 중 '박애'를 상징하는 <빨강 Rouge>을 오랫만에 빌려와 오늘 저녁 함께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계속)

[펌]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 (3) | 바그너 환자의 망상 포스트 삭제 2005/10/3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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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새롭게 피어나는 꿈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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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삶 즉 고통
(1) 암포르타스의 고통
(2) 고통의 전시장

2. 구원: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
(1) 수난(Leiden, Passion)
(2) 자비(Mitleid)와 보살행(mit-leiden)

3. 글 밖에서 비로소 시작될 이야기: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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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 밖에서 비로소 시작될 이야기: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만일 이야기를 <파르지팔> 작품 자체에 국한해야 한다면, 이 세번째 글은 쓰지 않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나 계획없는 긴 글을 써야했던 동기는 바로 여기 어느 언저리에 있었던 것 같다. 지난 9월 11일 베를린 슈타츠오퍼 전후 재개관을 기념해 열린 <파르지팔> 공연의 리뷰를 쓰려던 것이 원래의 의도 였지만, 솟아나는 무수한 상념들을 옆으로 밀어 놓은 채 어느 가수가 노래를 잘했더라 하는 식의 글을 쓰기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반면 이 상념들을 잠정적으로라도 정리해 보려니 그 무게에 눌려 글을 시작하지도 못한 채 한 달이 훨씬 지난 주말에야 겨우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이제야 적자면 필자는
"구세주에게 구원을! (Erlösung dem Erlöser!)"이라는 말로 끝나는 <파르지팔>에서 자율성(Autonomie)의 문제를 떠올렸다. 자율성의 문제라는 말은 달리 적자면 어떻게 수동적인 상태에서 스스로 능동적인 상태 혹은 자유로운 상태로 나아갈 수 있느냐의 질문이다.


<파르지팔>의 얘기로 다시 돌아오자. 앞의 글에서 본 악극의 모든 인물이 고통받는다고 썼다. 이제 그 마지막으로 남겨두었던 고통받는 '구세주=성스러움=성배와 성창'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구원(Erlösung)이라는 말에는 묶인 것을 풀어낸다는(lösen), 곧 해원(解寃)의 의미가 들어있다. 암포르타스를 구원한다는 말은 그에 부여된 직무(Amt)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준다는 뉘앙스가 있다면(이 부분은 몬살바트의 한
컬럼에서 이미 지적된 바 있다), 그렇다면 '구원자'가 짊어진 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어쩌면 그것은 구원자 혹은 구세주에게 구원을 바라는 타율적인 시선 자체가 아닐까? 물론 구원자가 구원을 기다리는 가엾은 이를 귀찮아 하거나 부담스러워 할 리는 없다. 문제는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이 고통이고 그 근원적인 존재의 고통이 인간의 수동성에서 말미암는다고 했을 때, 과연 내가 아닌 남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이 해결방안이 될 수 있느냐에 있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대승불교의 보살행에 대한 설명에는 흥미로운 점이 많은데, 문외한의 입장에서 참으로도 용감히 이를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
보살은 일체중생을 구제하려고 열반에 들지 않지만, 역설적이게도 실제로 보살에 의해 구제되는 중생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각자는 (자신 안에서 불성을 깨닫는 것을 통해) 각자를 구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행은 이러한 의미에서 보살의 '자기' 수행과 동일할 것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요, 살며 살게하라(Live and let live)는 지혜이다.

그리고 이럴 때, 고통받는 자에게 내미는 손길은 더이상 '함께 슬퍼하는 것도 함께 고통을 겪는 것도 Mit-Leid(en)'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차라리 "함께 기뻐한다 Mit-Freude"는 말로 비로소 제대로 전달된다.

간단히 말해, 구원은 자율성의 회복이며 고통에서 기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잠정적인 결론은 그러나 과연 쇼펜하우어 사상에 탐닉했던 바그너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가장 그 영향의 심도를 잘 드러내는 작품의 하나일 <파르지팔>과 어울릴 수 있을까?


이제까지 이 글에서 우리는 삶은 고해(苦海)요, 쇼펜하우어 식으로 말하자면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 무목적적 의지를 마치 자신의 개별적 욕망인양 받아들인 개인들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욕망과 충돌하고 폭력이 출현하며 결국 모든 개별자는 충족되지 않는 자신의 욕망, 그리고 타인의 욕망의 도구로 전락되어야 하는 고통 아래에서 괴로워하게 된다'는 세계관을 바그너의 악극과 함께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말하자면 그런 세계에서 "만인은 만인에 대한 늑대(homo homini lupus)"이다. '타인의 권리가 시작되는 곳에서 나의 권리는 끝나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세계에서 구원이란 일시적으로는 예술의 도움을 통해, 항구적으로는 삶의 덧없음에 대한 정관을 통해 저 무목적적 의지에 봉사하기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물론 이로써 고통은 극복된다. 하지만 끝에 찾아오는 정서는 필자가 지금 '구원'이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활기찬 기쁨, 무엇인가 새롭고 자유로운 질서를 함께 구성해나가는 즐거움에 비해서는 정(靜)적인 인상을 준다.


반면, 어리석음과 폭력이 반복되는 잔인한 현실을 함께 바라보면서도 "만인은 만인에 대한 신(神)(homo homini deus)"이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으니 바로 스피노자다. 고통받는 이들을 더 이상 동정하지 말라고, 동정이 아닌 사랑을 외친 자가 있으니 니체다. 어쩌면 고통받는(leidend) 신(神) 디오니소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삶의 필연적인 수동성, 그에 따르는 고난, 절망과 슬픔의 정서을 바탕에 깔고 시작한다. 그렇지만 유한한 존재로 태어난 인간은 수동적인 체험 속에서도 자신 안의 신적 본성을 발견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어 이로써 점차 자유로워지며(스피노자), 오히려 가장 쓰디쓴 운명까지 모든 수동적인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운명에 대한 사랑, amor fati)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며(니체), 갈기갈기 찢겨졌던 신은 죽음을 딛고 부활한다(디오니소스).

이렇게 볼 때, 필자가 <파르지팔>을 듣고 보며 쫓아온 생각의 끝은 쇼펜하우어나 바그너가 생각했던 길과는 대척점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심취해있던 1858년 10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에 보낸 한
편지를 보면 자신의 본성 그리고 예술적 성취의 근원이 연민(Mitleid)임을 고백하면서도 사랑 속에서 너무도 어렵게 얻어지는 기쁨(Mit-Freude)은 그에 대한 단순한 보완 이상이라고 적고 있음이 흥미롭다. '이 순간의 바그너' 그리고 '25년 후 <파르지팔>을 완성하는 바그너'(같은 편지에서 한참 후에나 마무리될 <파르지팔> 3막에 대해 바그너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라! 하나의 사상이 익어가는 동안 시간은 마치 음악 속에서처럼 다른 방식으로 흐르나보다), 여러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겠지만 '동정이냐 사랑이냐라는 지점에서 바그너 및 쇼펜하우어와 결별하는 니체'가 서로로부터 과연 얼마만큼 먼 곳에 서 있는지를 곰곰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이 글은 정말 이것으로 마치자. 이런 이야기는 굳이 필자가 아니라도, 굳이 오늘이 아니라도 어짜피 삶에서, 글 밖에서 계속 이어지므로.


- 이진


[짧은 공연평: 슈타츠오퍼, 아이힝어 신연출, 바그너 <파르지팔> 9월 11일 공연]


본 연출에는 쿠퍼의 원숙하고도 심오한 연출을 기억하던 청중과 비평 양자로부터 많은 비판이 쏟아졌지만, 필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최소한 <파르지팔>이 겨냥하고 있는 고통(혹은 수동성)과 폭력의 직접적인 관계를 분명히 드러냈다는 점 만큼은 평가하고 싶다.

앞서 적었던 1막과 3막에서 성배기사단이 보여주는 폭력성은 렌호프 연출에서도 훌륭했지만, 성배 곧 심장을 썰어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행진곡을 부르는 아이힝어의 1막 연출은 객석에 큰 충격을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러한 시도가 선정성으로 매도되지 않으려면 전체적으로 극에 대핸 일정한 논리가 설득력있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선 1막의 '시간이 공간으로 되는' 순간을 보자. 진정 성스러운 것 즉 이 지구라는 대지와 그 위에 함께 살고 있는 생명체들이 전쟁과 파괴, 환경오염으로 고통받았던 긴 세월의 편린들은 회전하는 여러개의 스크린에 나란히 투사되었다. 동시에 나란히 존재를 허용하는 것이 '공간'의 주요한 본성이라고 볼 때 상당히 적절한 시도였다.

이어 2막 2장에 등장한 파르지팔이 1막과는 다른 십자군 복장을 하고 '이교도'의 땅을 쳐들어 가는 것으로 설정하여 '폭력'의 문제를 연출가가 계속 염두에 두고 있다는 심증을 굳힐 수 있었다.

3막에 있어 폭력의 문제는 현대 도시인에게 그 폭력성을 더이상 느끼지 못하게 될 정도로 흔해져버린 어느 광경을 통해 그려졌다. 도시인들이 여유롭게 산보하는 뒤쪽의 넓은 무대와 차가운 바람이 지나가는 썰렁한 노숙자의 잠자리는 철책으로 가로 막혀져 있고,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노숙자에 대한 무관심, '비정상적인 삶'에 대한 경멸이 그 자체로 폭력적임을 잘 부각시켰다.





이 날의 음악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바라고 평할 것이 없었다. 특히 2막은 숨도 못쉬고 지나간 듯한 굉장한 연주였다.

같은 날 포츠담광장의 필하모니 홀에서는 거리를 생각하면 의외로 베를린에서 만나기 어렵던 얀손스와 콘체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말러6번이 연주되었기에 공연의 선택에 있어 상당히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돌아보면, 이날의 연주는 "바렌보임-슈타츠오퍼-바그너" 라는 조합 앞에서는 망설이지 말자는 필자 나름의 신조를 재확인해주는 훌륭한 것이었다.

건강이 걱정될 만큼 초인적인 일정으로 슈타츠오퍼에 열정을 쏟아붙는 이 사람이 지휘대에 서는 날이라면 시간과 생활비를 어떻게든 쪼개서 연주회장을 찾아가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끝)
[펌] 아래 글에 대한 김원철님의 의견 및 제 답변입니다. | 바그너 환자의 망상 포스트 삭제 2005/10/30 13:03

http://blog.naver.com/wagnerian97/40019029011
출처 : 새롭게 피어나는 꿈
김원철 (wagnerian): 잘 읽었습니다. 많은 것을 새로 깨닫게 하는 글이로군요. 그런데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두 군데 있어 이진님의 의견을 여쭙습니다.

1.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할 당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진님께서는 그 이전 작품인 <탄호이저>에서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고 하셨군요. 훗날 바그너가 <탄호이저>의 몇몇 부분을 새로 오케스트레이션하거나 없던 부분을 새로 추가하기도 했지만, 이진님의 논점은 음악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본에도 약간의 수정이 있었지만 군더더기를 없애는 정도였다고 알고 있거든요.

2. 이진님께서는 바그너에 영향을 끼친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해 ‘구원’과 그에 따르는 개념들에 초점을 맞추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욕정의 완전한 평정’을 얘기한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바그너는 성애를 통한 ‘열광적인 기쁨과 황홀’을 얘기했다는군요. 아래 링크의 첫 페이지에 인용된 엄선애의 글을 참고하세요. 이진님은 1858년 10월 서신을 인용하셨지만, 엄선애가 인용한 서신은 같은 해 12월 것입니다. 10월 서신에 나타난 바그너의 태도가 어떤지는 저의 독일어 실력이 엉터리라 알 수 없군요.

http://wagnerian.ecomstation.co.kr/wagner/tristan/sexuality_rhythm/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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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 역시 쇼펜하우어의 영향에 대한 논의가 <탄호이저>와 관련하여 그다지 자주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다음은 잘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논의를 위해 정리하겠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출간된 것은 1819년이지만 그의 사상은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전역에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냉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그너는 이 책을 1854년 가을에서야 발견하여 다음 해 여름까지 4차례에 걸쳐 통독했다고 합니다. 한편 문제의 <탄호이저>는 1845년 초연되고 1861년 수정되기 때문에 설령 두 사람이 1845년 시대적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이 작품에서 '쇼펜하우어의 결정적인 영향력'을 말하기는 힘들다는데 동의합니다.

글을 몰아쓰면서 '<탄호이저>에서 펼쳐진 바그너의 세계관과 쇼펜하우어의 사상에서 깊은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견해와 뒤에 이어진 '<트리스탄과 이졸데> 및 <파르지팔> 에서 동 철학자의 결정적인 영향력이 발견된다'는 생각을 한 문장 안에 우겨넣다보니 오해살 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후 수정하겠습니다)

그런데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의 삶과 철학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한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쇼펜하우어 사상에 급격히 빠져들게 되었던 것은 그 안에서 '이미 자신 안에 움트고 있었던 세계관과 본질적인 부분에서 공감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게다가 <탄호이저> 초연 보다 훨씬 이후인 니체와 바그너의 결별과 관련해서도 이 작품은 시간의 순서를 거스르는 듯한 묘한 인상을 주는 것 같습니다. <탄호이저> 자체에 대한 생각은 다른 기회에 더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2. 두번째 지적하신 '열광적인 기쁨과 황홀'은 사실 제가 '함께 슬퍼함 혹은 연민'의 짝으로 등장시킨 '함께 기뻐함Mit-Freude'이라는 개념과 동일합니다. <파르지팔>을 쇼펜하우어적인 '함께 슬퍼함'이라는 개념에 묶어서만 생각해야 한다면 제가 따라간 생각의 끝인 '함께 기뻐함'이라는 결론은 길을 잃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10월이나 12월 편지에서 언급된 '함께 기뻐함'이라는 바그너 자신의 언급에서 <파르지팔>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가능성이 열릴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것이 제가 전하려던 생각입니다. 따라서 10월 편지과 12월 편지의 입장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 글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심취해있던 1858년 10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에 보낸 한 편지를 보면 자신의 본성 그리고 예술적 성취의 근원이 연민(Mitleid)임을 고백하면서도 사랑 속에서 너무도 어렵게 얻어지는 기쁨(Mit-Freude)은 그에 대한 단순한 보완 이상이라고 적고 있음이 흥미롭다"

이와 같이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사상이 동일시될 수 없는 지점이 바그너가 동 철학자에 심취해 있던 시기 한가운데에서 발견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다시 앞의 답변에서 말씀드렸던 니체와 바그너의 결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2005년 10월 16일 일요일

[펌] 파르지팔 2막 1장 클링조르 가수별 비교

출처: 프리챌 바그네리안 (옛 하이텔 바그네리안, 지금은 네이버 바그네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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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sifal의 'Klingsor' 장면 감상담
작성자         이하일 (laudamus65)          회원등급        
번호         2355          조회수        
11         소스보기 소스  크게보기 크게
작성일         2005-10-15 오후 11:44:20
친구관리         홈피를 봅니다홈피  메일을 보냅니다메일  쪽지를 보냅니다쪽지  무선메시지를 보냅니다문자   작성자를 내주소록에 추가합니다 주소록추가   작성자가 입은 아바타옷들을 골라서 입어보거나 구입할 수 있습니다 입은 옷 사기  
http://home.freechal.com/monsalvat/02/2/1228984  

10월 진행자입니다. 약속했던바 개인사정으로 늦게 올립니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프로그램을 놀라운 집중력으로 따라준 회원들께
감사드립니다. 감상부분은 바그너 중에서도 특히 '노래'가 없고 음악은
오케스트라에 전부 의존되며 가수는 독백내지 대화로 일관되는 것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소감으로 나왔던 얘기들을 (대충 가볍게)
되짚어 보겠습니다.

1. 카라얀 빈 슈타츠오퍼 라이브/발터 베리:

나쁜 음질로 오케스트라 듣기엔 거북/그래도 인상깊은 연주/베리의 절도있는 딕션/
음흉하다기보단 젊고 힘차고 좋은음성/노래라기보다는 연극 스타일인데 상당수의
다른 바리톤들도 그랬음/

2. 크나퍼츠부시 바이로이트 라이브/구스타프 나이들링어:

역시 최고의 바그너해석가 크나의 바로 그 황홀한 싸운드!/역대 바그너
악역 바리톤의 일인자 나이들링어 다운 노숙한 가창/그러나 다소 노인네틱한
늙은 음성/그만큼 여유있게 배역을 소화한 바리톤/가수의 음악성은 알베리히역에서
뿐만 아니라 여기서도 발휘됨

3. 불레즈 바이로이트 라이브/ 도널드 맥킨타이어:

바리톤 다소 평범한 듯/노인음성 아니나 그렇다고 젊은이스럽지도 않음/바리톤이
귀네드 존스의 쿤드리에 힘으로 밀리는 듯/초창기 귀네드존스 여사의 음성이
인상적이었음/불레즈의 군더더기없고 빠른 템포가 맘에듦/반대로 여유를 두지
않고 많은 것을 그대로 막 지나치는 듯한 불레즈의 메마른 해석이 불만이라는
상반된 의견 공존/의외로 맥킨의 클링조르역이 가장 무난했다는 의견도 있음

4. 솔티 빈 필/졸탄 켈레멘:

역동적인 오케스트레이션에 비해 나약한 느낌의 바리톤/테너같은 음색으로 바리톤
을 부르는 리릭바리톤 스타일/다른 바리톤이 연극적이고 대화풍이라면 차라리
노래풍인 아주 독특한 클링조르/바이브레이션으로 보아도 힘을 쓰지않고 가볍게
노래하는 방식임을 짐작/드라마틱한 바리톤이 주류인 배역 치고는 다소
왜소한 느낌/그러나 악역이라고 반드시 강해야 할 필요는 없을 수도.

5. 카라얀 베르린 필/지크문트 님스게른:

또랑또랑하고 젊은 바리톤/음흉한 바리톤은 대개 노인네틱한 어두운 목소리가 많으나
카랑카랑하고 다소 밝은 음성/이 점은 동 지휘자의 구 녹음에서와 유사/클링조르가
노인네가 아님을 상기할 때 역동적인 악역이 더 맞을 수도 있음/그렇게 본다면 카라얀의
클링조르 캐스팅 시점은 나름대로 설득력/그 점을 좋게 볼 수도/
예의 인공적 카라얀적 관현악/마치 동굴에서 음결이 휘감아 오는 듯/ 실황이라면 불가능
했을 독특한 다층적 음향구조/쿨~한 싸운드 마약같은 최면적 요소가 있음/
독일어 딕션은 가장 뭉개지지않고 정확했음

6. 슈타인 바이로이트/레이프 로아[LD]:

연출과 영상이 단조롭고 재미가 없음/슈타인의 관현악은 음질 등이 달리 인상적이지 못함/
클링조르역 로아의 외모는 그럴싸하나 딱히 명창이라고 하기 힘듦/흠잡을 곳 없으나
배역에 깊이 몰입해서 악보대로 노래하는 것 이상의 인물 구현 수준에 미흡/호평할 것 없으나
그렇다고 비판할 만한 점도 없음

7. 레바인 바이로이트 라이브/프란츠 마추라 :

굵은 선 느린 템포/극장의 공간과 현장이 느껴지는 녹음/프란츠 마추라는 호평받은 클링조르
배역임/음악적으로 성숙한 연기와 가창/고음에서 부담스럽게 발성은 무겁고 발성적으로
힘을 들어간 듯한 바이브레이션/음흉한 만큼이나 너무 노익네같음/젊은 시절 마이어의 쿤드리
배역 내공을 여기서도 엿봄/카라얀 두 녹음에서의 클링조르와 매우 대조적/솔티판의 가볍고
비굴한 듯한 켈레멘의 해석과도 상극

8. 바렌보임 베를린 필/귄터 폰 카넨:

악역이라기보단 왠지 바보같은 클링조르/역동성 면에선 카라얀 판에서보다 약하고 악마적
흉악성 면에선 크나퍼츠부시, 레바인판에서보다 약함/다소 순진한 듯한 클링조르/
그러나 악인이 반드시 영웅적 포스이거나 대가풍일 필요는 없겠음/음질 좋고 관현악은 듣기
좋음/감상된 부분만 보아선 관현악에 대해선 이렇다할 호불호 의견 없음

9. 나가노 도이치페스티벌/톰 폭스[dvd]:

영상과 무대가 흥미로움/클링조르의 의상이 너무 우화적이고 만화적이라 어색/
폭스의 가창은 괜찮음/관현악 부분이 녹음상 약하게 잡힌 느낌/영상과 같이 보아도 큰
부가적 재미는 느끼지 못함/가수의 역할에 흠잡을 곳 없으나 기존의 대가들에 비해
달리 그것을 넘어서거나 또다른 개성을 부여하지는 못했음

이상입니다.
현장에서 나왔던 갑론을박을 기억에 의존에서 썼기에 주요 의견이 빠졌을 수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참석자들이 최고로 꼽았던(복수 추천도 있음) 가수는 (단 한분의 추천인 것 포함하여)

나이들링어, 님스게른, 맥킨타이어, 마추라가 있으며,

가장 유니크한 개성으로 이목을 집중시킨 가수는 졸탄 켈레멘이었습니다. -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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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원철                
정리를 참 잘하셨네요. 제 홈피에 퍼갈게요.  
2005/10/16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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