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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2일 화요일

요산요수(樂山樂水) ― 산과 바다의 음악적 빛깔에 관하여 : 드뷔시 《바다》, R.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은 글입니다.
원문 링크: http://g-phil.kr/?p=1446

▶ 소리의 빛깔에 관하여

선율과 리듬과 화성은 전통적으로 서양음악을 이루는 3요소로 꼽혀 왔지요.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음색'이 그 못지않게 중요해 졌습니다. 음색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작곡 기법은 관현악법(orchestration)이고, 음악학자 달하우스는 현대적인 관현악법의 가능성을 제시한 말러 교향곡 1번과 R. 슈트라우스 《돈 쥬앙》을 가리켜 음악적 모더니즘의 뿌리라고도 했습니다. 오늘 감상하실 드뷔시 《바다》와 R.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은 '음색'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 바다의 빛깔에 관하여 ― 드뷔시 교향시 《바다》

드뷔시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미술 사조에서 빌어온 이 말로 드뷔시를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지만, 적어도 교향시 《바다》에 관해 얘기하려면 '인상주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1악장 : 바다의 새벽부터 정오까지 (De l'aube à midi sur la mer)
2악장 : 파도의 희롱 (Jeux de vagues)
3악장 : 바람과 바다의 대화 (Dialogue du vent et de la mer)

1악장은 새벽에 해가 떠서 수평선을 붉게 물들이고, 마침내 해가 높이 떠올라 눈부신 한낮의 햇살을 쏟아내는 모습이 환상적으로 느껴집니다. 음악이 너무나 멋있어서 자세한 설명은 차라리 군더더기가 될 듯해요. 그런데 2악장과 3악장을 들으면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습니다. 이 음악을 들으면서 어딘가 안정감이 없어서 불편한 느낌이 든다면, '발전하는' 음악에 너무 익숙한 탓일지도 모릅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서양음악은, 마치 극(drama)이 기승전결 구조를 따르는 것처럼 어떤 '방향성'을 따라 '발전'하는 짜임새를 갖습니다. 그 바탕이 되는 화성 진행 원리를 작곡가이자 이론가 장필리프 라모는 뉴턴의 중력이론에 빗대기도 했지요. 여기에 계몽주의 사상이 결합하면, 베토벤 교향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둠에서 광명으로' 짜임새가 됩니다.

드뷔시 음악은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배보다 배꼽이 커질 수 있으니 '인상주의' 얘기만 할게요. 음악이 '발전'하지 않고 '방향성' 없이 그저 흘러가니까, 마치 그림을 보는 듯 음악이 정지해 있는 느낌이 들지요.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이 했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시간예술과 공간예술의 차이점을 메우는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드뷔시 음악을 듣고 갸우뚱하게 하는 또 다른 원인은 모네, 르누아르 등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입니다. 드뷔시 음악이 모네 등의 그림과 그렇게까지 닮은꼴은 아니잖아요? 이것은 음악과 미술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드뷔시가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들에게서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상파 화가 중에서도 빛을 묘사하는 획기적인 표현 기법을 개발한 영국 화가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어른어른한 색채로 그림에 담았던 미국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등이 드뷔시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입니다.

▲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 北斎),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뒤(冨嶽三十六景 神奈川沖浪裏)

우키요에(浮世絵)라는 일본 에도시대 풍속화는 인상주의 미술 사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지요. 드뷔시는 그 가운데 호쿠사이의 판화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뒤》를 보고 《바다》를 작곡했고, 이 판화가 초판 악보 표지로도 쓰였습니다. 음악을 들어보면 어딘가 동아시아 느낌이 나지요?

▶ 산의 빛깔에 관하여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음색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작곡기법이 관현악법이라고 앞서 말씀드렸지요. 관현악법과 관련해 중요한 작곡가로 드뷔시, 라벨, 말러,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을 꼽을 수 있지만, 20세기 관현악법 문헌들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작곡가를 한 사람만 꼽으라면 바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일 겁니다.

《알프스 교향곡》에서는 밤-일출-저녁노을-일몰-밤으로 이어지는 '빛' 음형이 다양한 빛깔로 변주됩니다. 그리고 시냇물과 폭포, 풀잎, 꽃잎 등과 더불어 반짝이는 빛도 참 멋지지요. 이 작품에는 표제가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이야기 한 편을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도 있어요. 알프스 산 빛깔은 바다 빛깔과는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까요?

1. 밤 (Nacht) : 파곳과 몇몇 악기가 '밤' 음형을 연주할 동안 다른 악기들이 촘촘한 간격으로 음을 쌓아서 화음이라기보다는 '덩어리'(cluster)를 이루며 무겁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트롬본과 튜바가 마치 여명처럼 흐릿하게 빛나는 음형을 연주합니다. 조금씩 날이 밝아옵니다.

2. 일출 (Sonnenaufgang) : '밤' 음형이 눈 부신 햇살로 바뀌어 마구 쏟아집니다. 이토록 찬란한 소리가 '밤'과 음악적 뿌리가 같다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잘 들어 보세요. 찬란한 햇빛 속에 낯은 음으로 자꾸만 내려가는 '밤' 음형이 들어 있습니다!

3. 등산 (Der Anstieg) : 힘찬 리듬으로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면 '밤'에 나왔던 음형들과 음악적 뿌리가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어째서 이 작품 제목에 '교향곡'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지 알 듯합니다. 말하자면 '밤'과 '일출'이 교향곡의 '도입부'라면, 이 대목이 바로 '제1 주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4. 숲의 입구 (Eintritt in den Wald) : 교향곡의 '제2 주제'라 할 만한 대목이지만, 여기서부터는 '산'에 집중하기로 하지요. 형식 분석에 매달리기에는 '경치'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야생의 위험을 무릅쓰고 숲으로 들어서면 눈앞에 신기한 나무가 가득합니다. 산새가 울고, 꽃이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5. 개울가에서 거닐다 (Wanderung neben dem Bache) : 그리고 시냇물이 보입니다. 물이 차갑습니다. 물고기가 헤엄쳐 다닙니다. 물길을 따라 걸어가면…

6. 폭포에서 (Am Wasserfall) : 폭포가 나옵니다. 커다란 물소리, 물방울이 이리저리 튀기는 모양, 그리고 그 물방울이 햇빛을 만나면…

7. 환영 (Erscheinung) : 폭포에 걸린 무지개, 그리고 물방울마다 반짝이며 너울거리는 빛 알갱이가 꿈결처럼 아름답습니다!

8. 꽃으로 덮인 풀밭에서 (Auf blumigen Wiesen) : 폭포를 지나 더 올라갑니다. 길가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 옵니다.

9. 알프스 목장에서 (Auf der Alm) : 뿔피리 소리, 방울 소리, 소와 양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들판을 뛰노는 모습이 눈에 보일 듯합니다.

10. 길을 잃고 수풀과 덤불 속에서 헤매다(Durch Dickicht und Gestrüpp auf Irrwegen) : 소와 양이 풀을 뜯던 평화로운 산이 길을 잃는 순간 목숨을 위협합니다. 수풀과 덤불이 팔다리를 물어뜯으려고 달려듭니다.

11. 얼음산에서 (Auf dem Gletscher) : 겨우 빠져나오니 눈앞에 얼음산이 보입니다. 만년설이 세월의 무게로 얼어붙은, 알프스 산맥이나 히말라야 산맥 등에서 볼 수 있는 산악 빙하입니다.

12. 위험한 순간들 (Gefahrvolle Augenblicke) : 산꼭대기로 가려면 위험한 곳을 올라야 합니다. 한 발 잘못 디디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돌 굴러떨어지는 소리 들리나요? 자, 겁내지 말고, 숨을 크게 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13. 정상에서 (Auf dem Gipfel) : 드디어 정상입니다! 너무 힘들게 올라왔습니다. 주저앉아서 조금만 쉬자고요. 산꼭대기를 휘돌며 불어오는 바람은 싱그럽기도 하지요!

14. 전망 (Vision) : 이곳이 바로 알프스 산입니다. 아찔한 높이와 거대한 크기에 몸이 떨려 옵니다. 이 산과 견주면 인간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입니까?

15. 안개가 올라오다 (Nebel steigen auf) : 표제 그대로입니다. 덧붙일 말이 없군요.

16. 해가 서서히 지다 (Die Sonne verdüstert sich allmählich) : '밤'이었다가 '일출'이었던 그 음형이 이제는 '저녁노을'로 바뀌었네요.

17. 애가 (Elegie) : 날은 차츰 어두워지고 안개는 올라오는데, 문득 쓸쓸한 기분이 듭니다.

18. 폭풍전의 고요 (Stille vor dem Sturm) : 해 지는 알프스 정상은 참 고요합니다. 그러나 폭풍이 몰려올 듯하니 더 늦기 전에 내려가야 합니다. 바람 소리를 내는 특수악기(wind machine)가 이 대목에 사용되었습니다.

19. 번개와 폭풍, 하산 (Gewitter und Sturm, Abstieg) : 경기필이 제작한 천둥소리를 내는 악기(thunder machine), 바람 소리를 내는 악기(wind machine), 그리고 오르간과 더불어 오케스트라 전체가 폭풍우처럼 쏟아집니다.

20. 일몰 (Sonnenuntergang) : '밤'과 '일출'과 '저녁노을'이었던 그 음형입니다. 폭풍을 뚫고 산에서 내려오는 사이에 해가 집니다.

21. 여운 (Ausklang) : 오르간 소리가 들립니다. 사실은 폭풍이 몰아칠 때부터 들리던 오르간 소리이지만, 이곳에서는 오르간이 음악을 지배하면서 경건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현이 주선율을 이어받아 찬가처럼 부풀렸다가 조금씩 '밤'으로 옮겨갑니다.

22. 밤 (Nacht) : 다시 밤입니다. 처음에 그랬듯이, 어둡고 고요한 밤…

▶ 산과 바다 ― 대자연의 음악에 관하여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입니다. 요산요수(樂山樂水)라고도 하지요. 이번 경기필 연주회 제목 "音樂山音樂水 ― 산과 바다"는 이 말에서 따왔습니다.

그런데 《바다》와 《알프스 교향곡》처럼 자연을 그린 작품도 멋지지만, 자연이 들려주는 '음악'도 참 멋지지요. 물소리, 새 소리, 바람 소리…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전혀 다르게 들리는 이런 소리를 찾아 떠나 보면 어떨까요? 봄나들이 가기 좋은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 티켓 예매

https://www.sacticket.co.kr/home/play/play_view.jsp?seq=14328

2010년 3월 22일 월요일

기계도 구분하지 못하는 음질 차이를 사람이 듣고 구분할 수 있는가?

기계도 구분하지 못하는 음질 차이를 사람이 듣고 구분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없다!'라고 자신 있게 주장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때때로 각종 수치와 그래프가 마구 덤비니 모르는 사람은 속아 넘어가기 딱 좋기도 하다. 그러나 '기계도 구분 못하는데' 어쩌고 하는 소리는 과학·공학의 탈을 쓴 미신이다. 관련 전공자가 오히려 더 빠지기 쉬운 미신이라 더욱 고약한 미신이다. 그 까닭은 한 가지만 물어보면 알 수 있다.

기계로 음색을 어떻게 측정할 건데?

당신이 과학을 대충이라도 배웠다면 이 대목에서 대오각성해야 한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하나 더 묻겠다. '음색' 정의가 뭔데? '소리의 색깔'같은 말만 바꾼 대답을 하려거든 그냥 '믿쑵니다'만 외치고 과학 얘기는 꺼내지 마라.

음향학을 어깨 넘어라도 배웠으면 음색을 결정하는 변수를 읊어댈 수도 있겠다. 그러면 그 변수만 잘 측정하고 통제할 수 있으면 기계가 사람보다 낫겠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음향학을 헛배웠다는 증거다. 다시 묻겠다. 음색 정의가 뭔데?

기계가 못하면 사람도 못한다는 신앙은 마치 컴퓨터가 사람 두뇌보다 우수하다는 신앙과도 같다. 계산이야 말할 것도 없이 컴퓨터가 훨씬 잘하지. 그런데 로봇이 정명훈보다 지휘를 잘하나? 컴퓨터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얘기 들어 봤나? 왜 구글 번역기는 아직도 그 모양인가?

인간이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기계도 할 수 없다.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 그것을 구현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러더라. 과학은 의심하는 것이라고. 당신은 의심하기를 잊고 함부로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는가?

마지막으로 참고할 만한 글 하나:

☞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 ― 리게티 《아트모스페르》

2009년 6월 1일 월요일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 ― 리게티 《아트모스페르》


☞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 ― 들어가며
☞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 ― 베베른 Op.10



음색(音色)이란 무엇인가? 영어로는 'timbre'라 하고 독일어로는 'Klangfarbe'라 부르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소리의 색깔'처럼 말만 바꾼 수준을 벗어난 뜻풀이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 음을 만드는 구성 요소의 차이로 생기는, 소리의 감각적 특색. 소리의 높낮이, 크기가 같더라도 진동체나 발음체, 진동 방법에 따라 음이 갖는 감각적 성질에는 차이가 생긴다. ≒소리맵시ㆍ음빛깔. (표준국어대사전)

- 악기 소리나 목소리가 발성이나 악기에 따라 (음높이 및 세기와 달리) 띄는 특징으로... (옥스포드 영어사전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 세기(loudness)와 높이(pitch)가 같은 두 소리를 듣는이가 다르다고 느끼게끔 하는 감각 속성 (미국표준협회 ANSI, 1960)

- 음높이, 음량, 음길이와는 다른 기준을 사용하여 두 소리가 다르다고 판단하게끔 하는 청감각 속성 (Pratt & Doak, 1976)

서로 다른 뜻풀이에 한 가지 닮은 곳이 있다. '음색은 무엇이다'가 아니라 '음색은 무엇 무엇이 아니다'라며 이른바 부정적 정의(negative definition)를 내린 대목이다. 음색을 결정하는 요인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음색은 배음(harmonics) 스펙트럼, 포만트(formant), 위상(phase), 엔벨로프(envelope), 비브라토 주기 및 진폭 등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 글은 음향학 개론이 아니므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 다만, 소리를 이루는 모든 것이 음색과 엮여 있으며 위에서 음색과 구분한 음높이, 음량, 음길이 또한 음색을 결정하는 요인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20세기 들어 서양음악에서 음색이 선율과 리듬과 화성 못지않게 중요해졌다는 얘기는 이미 한 바 있다. 그런데 1950년대 말부터는 음색을 뺀 나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음악마저 나타났다. 앞글에서 짧게 소개한 총열주의 음악에서 '음' 하나하나가 중요한 역할을 하며 논리와 질서를 이루었다면, 그 반발로 나타난 이른바 음향음악(Klangkomposition)에서는 음들이 모여 이룬 '음향층' 또는 '덩어리 Cluster'가 음악이 된다. 선율과 리듬은 조각조각 나뉘어 카오스 속에서 녹아버리고, 화음은 음 덩어리가 되어 '음'과 '소음' 사이를 넘나든다. 이를테면 피아노 건반을 주먹이나 팔꿈치로 '쿵' 내려쳤을 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된 '덩어리'가 음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리게티(Ligeti György Sándor, 1923-2006, 헝가리계 루마니아 사람으로 성을 앞에 쓴다)는 총열주의 음악을 비판하며 들리지 않는 '구조'가 아니라 들리는 '형상'을 음악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1년 작품 《아트모스페르》(Atmosphères)를 들어보자. 이 작품의 '구조'는 귀로 듣고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악보를 들여다보아도 음표의 카오스 속에서 정신을 잃기 쉽다. 그러나 예쁜 여자를 알아보는데 피부세포를 분석할 필요는 없는 법. 굳이 악보를 분석할 사람은 먼저 돋보기를 준비한 다음 음표가 아무리 많아도 '떡실신'하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 그리고 나서 악보를 본다면 작곡가의 위대한 '노동'에 존경을 바치게 되리라.
《아트모스페르》 마디 88-92. © Universal Edition

그러면 이 곡의 '형상'은 무엇인가? 소리 또는 '음향'이 덩어리를 이루어 흘러가는 게 느껴지는가? 이 덩어리는 멈춰 있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며, 자라거나 줄어들고 뭉치거나 흩어지기도 한다. 이 곡은 스탠리 큐브릭이 감독한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처음과 마지막에 쓰이기도 했는데(마지막 장면에서는 리게티의 다른 작품과 함께 편집), 소리로 된 '형상'이 화면과 어떻게 어우러지는지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여기서 잠깐! 큐브릭은 리게티 허락 없이 멋대로 이 음악을 썼으며, 리게티는 6년 동안 법정싸움을 한 끝에 고작 3,500달러만을 보상금으로 받았다고 한다. 거대자본의 횡포를 잠시 규탄해 주자.)

그런가 하면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소리가 흘러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움직인다'라고 할 수 있는가? 전체적으로 보면 이 음악은 멈춰 있지 않은가? 맞다.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이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 곡은 멈춰 있는 듯 느껴진다. 리게티는 이를 두고 "얼어붙은 시간"이라 했으며, 이것은 리게티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판타지이자 초기 작품을 대표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다만, 이른바 클러스터(덩어리) 기법을 쓴 작품이 모두 그렇지는 않으며 작곡가에 따라 또 작곡 시기에 따라 모두 느낌이 다르다. 그러나 같은 해 발표된 펜데레츠키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는 어찌 들으면 《아트모스페르》와 제법 닮았다.
'노동'을 줄이려고 꾀를 낸 펜데레츠키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 마디 18.
© Schott Music

'아트모스페르'는 대기(大氣)를 뜻하기도 하고 '분위기'를 뜻하기도 한다. 이 곡 제목은 두 가지 뜻 모두를 아우른다 하겠는데, 음반을 들어보면 둘 가운데 어느 쪽에 무게를 싣느냐에 따라, 또 '숲'과 '나뭇잎 위 하루살이'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살리느냐에 따라 해석이 조금씩 달라지는 듯하다. 당신이 오디오쟁이라면 '형상'이 차지하는 3차원 공간이 때때로 바뀌는 모습을 살펴보는 재미 또한 놓치지 마시라.

《아트모스페르》는 오디오쟁이에게 특별한 쓰임새가 있다. 당신이 오디오쟁이라면 이 곡을 듣고 바로 느낌이 와야 한다. 오디오를 길들일 때 쓰는 이른바 '오디오 에이징 음악'과 비슷하지 않은가! 당신이 'XLO Burn-in CD'를 구하지 못했다면 《아트모스페르》로 오디오를 길들여 보면 어떨까? 자꾸 듣다 보면 좋아질지도 모른다! 오디오를 길들이는 당신을 가족이 한심해한다면 현대음악이라며 으스댈 수도 있겠다. '에헴! 들어나 봤나 리게티?'

오디오 길들이기가 목적이라면 《아트모스페르》 말고도 좋은 현대음악이 많다. '전자음악'으로 분류되는 음악 대부분이 오디오의 한계를 박박 긁어댄다. 파이프 오르간 음악 또한 마찬가지인데, 따지고 보면 '클러스터 기법'의 유래를 바로크 시대 오르간 음악에서 찾을 수도 있다. 이왕이면 오르간 음악 또한 바흐보다는 메시앙이나 뒤뤼플레(Duruflé)같은 현대 작곡가를 들어보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겠다.

다음 시간에는 클러스터 기법을 '한국적으로' 활용한 윤이상 음악을 소개하겠다.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9.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8년 12월 16일 화요일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 ― 베베른 Op.10


☞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 ― 들어가며



동요 선율은 단순하다. 왜 그럴까? 〈학교 종〉을 계명창으로 불러보자. 솔솔라라솔솔미 솔솔미미레 솔솔라라솔솔미 솔미레미도. 선율을 이루는 음을 순서대로 나열해 보자. 도레미솔라. 다섯 음으로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다섯 음은 모두 피아노 흰 건반에 들어맞는다. '솔'이 열한 번 나오고 '미'가 여섯 번, '라'가 네 번, '레'가 두 번 나온다. '도'는 딱 한 번 나오지만 맨 마지막에 나와서 곡을 끝맺으므로 알고 보면 매우 중요하다.

이 곡은 C 장조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 C 음, 즉 '도'를 '으뜸음'으로 하는 음계인 '도레미파솔라시'로 선율이 이루어져 있다. 이 곡에 가장 자주 나온 '솔'은 C 장조에서 '딸림음'이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도미넌트(dominant)이다. 말 그대로 선율을 다스리는 음이다. 으뜸음이 주인공이라면 딸림음은 악당이다. 원래 주인공보다 악당이 더 멋있는 법이지만 끝내는 주인공이 이긴다. 썩 좋은 비유는 아니고 오류도 있지만 여기서는 이렇게만 하고 넘어가자.

이처럼 선율을 이루는 음들이 맺는 관계는 평등하지 않으며, '조성(調性; tonality)'이라 부르는 위계질서를 따른다. 그리고 위계질서가 잘 잡힌 선율일수록 듣기에 편안하지만 그만큼 단순하기도 하다. 단순한 선율은 그만큼 흥미를 잃기 쉬우며 적절한 일탈은 선율을 더욱 넉넉하고 재미있게 만든다. 서양음악에 오늘날과 같은 조성이 생겨난 것은 17세기 즈음인데(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조성'이라는 개념은 19세기에 와서 생겼고 그전에는 C 장조, a 단조 하는 '조(調; key)' 개념이 있었다.) 그 뒤로 점차 '일탈'이 잦아져 조성 구조는 복잡해지고 화음도 그만큼 복잡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다가 20세기에 와서는 '일탈'이 넘쳐나다 못해 '위계질서' 자체가 무너지고 선율을 이루는 음들이 평등해졌다. 바로 조성이 없는 음악, 무조음악이다. (조성이 생겨나기 전에도 음악이 있었지만 '선법'이라는 비슷한 위계질서가 있었으므로 '무조음악'이라는 용어를 쓸 때 헷갈리지 말자.) 서양음악사에 처음 나타난 무조음악은 1908년 세계초연된 쇤베르크 현악사중주 2번 3, 4악장이며, 4악장에 나오는 '나는 다른 행성의 공기를 느낀다.'라는 의미심장한 노랫말로 이름 높다.

쇤베르크는 무조음악을 손쉽게 작곡하려고 1921년에 이른바 '12음 기법'을 만들어냈다. (12음 기법이 나오기 전에도 무조음악이 있었으며, 쇤베르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달에 홀린 피에로》는 1912년 작품으로 무조음악이되 12음 기법으로 쓴 작품이 아니다.) 12음 기법은 한 옥타브를 이루는 음 열두 개를 수열처럼 음렬(音列)로 만들어 쓴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으며 그 때문에 '음렬주의(Serialism)'라는 말도 생겨났다. 더 나중에는 리듬과 셈여림 따위를 마찬가지로 잘게 나누어 음렬처럼 쓰는 이른바 '총열주의(Total Serialism)'도 나타났는데, 유럽에서는 영미권과는 언어 관습이 달라서 '음렬주의'라 하면 보통 '총열주의'를 가리킨다.

현대음악이 어렵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은 현대음악은 곧 12음 음악이라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12음 음악은 현대음악의 한 갈래일 뿐이며, 어찌 보면 12음 음악이 20세기 서양음악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처음부터 12음 음악을 들을 생각은 버려도 좋다. 베베른의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 Op.10》은 베베른이 1911년부터 1913년에 걸쳐 작곡했으며, 12음 기법을 쓰지는 않았지만 조성이 없는 음악이다. 그러나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에서 이런 음악을 소개하는 일은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을 익히기 가장 좋은 방법은 악보를 보고 직접 분석해 보는 것이다. 5악장 작품인데 4악장은 길이가 고작 여섯 마디밖에 안 될 만큼 작품 길이가 터무니없이 짧으므로 악보를 통째로 외워버려도 좋다. 짧다는 것은 어쩌면 베베른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일지도 모른다.

악보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선율을 들으려 하지 말고 음색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 알고 보면 오디오 테스트용 음악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하프와 약음기 낀 트롬본, 하프와 첼레스타, 하프와 플루트가 차례로 한 음씩 연주하며 음악이 시작되는데 이때 음색이 어떻게 바뀌는지 들어보라. 이때 플루트는 혀나 목젖을 떨어 '아르르' 하는 소리를 내는 이른바 '플러터 텅잉(flutter-tonguing)' 주법을 쓴다. 이처럼 선율이 흐를 때 음색이 계속 바뀌게 하는 작곡 기법을 '음색선율(Klangfarbenmelodie)'이라고 하며, 베베른은 음색과 함께 길이, 셈여림, 그리고 음높이에 따라 달라지는 색깔까지 12음 기법 속에서 짜임새 있게 사용하여 훗날 총열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선율이 흐르면서 음색이 바뀌니 악기 또한 계속 바뀌고 그때마다 소리가 나는 위치도 바뀐다. 당신이 오디오쟁이라면 이때 음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잘 들어보라. 소리가 나는 곳이 앞뒤, 왼쪽 오른쪽, 위아래로 계속 움직이는데 마치 요정이 빛을 뿌리며 무대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 뭔가 이상하다. 2채널 스피커로 음상이 아래위로도 맺히게 할 수 있는가? 특수 녹음을 하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이제껏 들어본 음반 가운데 그런 녹음은 없었으며 연주회장에서 실제 연주를 들어보고서야 나는 이제까지 음반으로 들은 것은 제대로 된 감상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베베른 음반을 내놓은 레코딩 엔지니어들은 반성하시라.

3악장에서는 큰북과 차임벨(Tubular bell)이 낮고 여린 소리로 '우르릉'하는데 오디오 저음 재생 능력을 시험하기에 좋다. 악보에는 '들릴 듯 말 듯하게 kaum hörbar'라고 써놨는데 아예 안 들리면 곤란하다. 글쓴이 오디오는 소리는 다 나는데 음색이 진짜 악기 소리와는 좀 다르다. 그런데 최고급 오디오로 들어보니 진짜 악기 소리가 나더라.

20세기 서양음악의 중요한 특징으로 음색을 꼽는다면, 무조음악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쇤베르크는 그저 낭만주의자였을 뿐 현대음악 작곡가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불레즈는 "쇤베르크는 죽었다"라는 악명 높은 글에서 이처럼 쇤베르크를 헐뜯으며 베베른에게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대음악에서 음색은 이토록 중요하다. 다음 시간에는 음색을 뺀 나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음악을 소개하겠다.

음반을 살 때 주의할 점.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Op.10이며 다른 하나는 작품 번호가 없다. 둘은 다른 작품이니 헷갈리지 않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참고할 점. '베베른'은 'Webern'을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쓴 것인데 실제 발음은 '베번'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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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글타래: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 - 리게티 <아트모스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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