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1일 월요일

드뷔시 《야상곡》과 홀스트 《행성》, 밤과 우주의 음악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진에 실은 글입니다.
☞ 원문 링크 : http://g-phil.kr/?p=1358

▶ 드뷔시, 홀스트, 그리고 어떤 모더니즘

"말하자면 두 가지 아방가르드가 나란히 형성되고 있었다. 파리 사람들은 밝은 일상의 세계로 옮겨갔다. 빈 사람들은 반대 방향으로 가면서, 성스러운 횃불로 무시무시한 심연을 밝혀 나갔다."

음악평론가 알렉스 로스(Alex Ross)는 1900년대 유럽 음악계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빈 사람들"은 쇤베르크, 베베른, 베르크 등을 가리키고, "파리 사람들"은 드뷔시, 사티 등을 가리키지요. 쇤베르크가 무조음악으로 나아갈 때, 드뷔시는 전통적인 기능화성과 장·단조 체계를 살짝 비켜가면서 재즈나 각국의 민속 음악 등 이국적인 요소를 자신의 음악에 녹여 내는 식으로 새로움을 추구했습니다.

드뷔시 음악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모더니티'(modernity)는 현대적인 관현악법에서 오는 현대적인 음색입니다. 음악학자 달하우스(Carl Dahlhaus)는 말러 교향곡 1번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돈 후안》이 초연된 1890년을 음악적 모더니즘의 시초로 보았지요. 바로 두 작품에서 나타나는 현대적인 관현악법 때문입니다. 그리고 드뷔시가 빚어낸 음색은 때때로 '인상주의'라 불리는 음악 어법과 결합해 프랑스 모더니즘 음악 전통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영국 작곡가 구스타프 홀스트(Gustav Holst)도 어찌 보면 드뷔시와 비슷한 길을 갔습니다. 영국 민요 선율을 음악에 녹여내고자 했고, 인도 음악에 영향을 받았으며, 복조성(polytonality)이나 교회선법 등으로 전통적인 조성음악 어법을 살짝 비켜가는 동시에 현대적인 관현악법으로 나름의 현대성을 좇았습니다.

▶ 드뷔시 《야상곡》

야상곡(Nocturne)이라 하면 쇼팽이나 존 필드 등이 작곡한 서정적인 피아노곡을 곧잘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드뷔시 《야상곡》은 미국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의 《야상곡》 연작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작곡한 3악장 관현악곡으로, 작곡가가 한 말을 빌자면 "야상곡의 흔한 형식이 아니라 낱말이 암시하는 여러 가지 인상과 빛이 만드는 특별한 효과"를 낸 작품입니다.

작곡가는 '구름'(Nuages) 악장을 이렇게 설명했지요. "하늘의 변함없는 정경과 구름의 느리고 장엄한 움직임이 잿빛에 살짝 흰 빛깔을 더하여 사라지는 모습을 나타낸다."

'구름' 악장에서는 목관악기와 바이올린이 음악을 끌고 가면서 중간 음역이 비어 있을 때가 잦습니다. 그래서 음악이 붕 떠있는 느낌을 주지요. 화성 진행도 전통적인 방식과 달리 음악 속을 둥둥 떠다닙니다. 음악학자 타루스킨(Richard Taruskin)은 음색과 음역 등의 요인이 악곡을 지배하면서 전통적인 조성·화성 체계를 회피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축제'(Fêtes) 악장은 파리에 있는 볼로뉴 숲(Bois de Boulogne)에서 열리는 축제를 묘사한 음악입니다. 드뷔시는 이렇게 설명했지요. "공기가 떨리고 춤추는 리듬과 갑자기 터져 나오는 빛을 떠올리게끔 한다. 여기에 행진 에피소드(현란하고 비현실적인 환상)가 나타나 축제 장면을 지나며 합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배경은 꿋꿋하게 변함없이 이어지는데, 음악과 반짝이는 가루가 우주적인 리듬 속에서 뒤섞이는 축제 분위기이다."

'인어'(Sirènes) 악장에는 여성 합창단이 가사 없이 부르는 '인어의 노래'가 나오지요. 드뷔시는 이와 관련해 "바다의 모습과 끊임없는 리듬을 그렸으며, 달빛을 받은 은빛 물결 속에서 인어가 웃으며 지나갈 때 부르는 신비로운 노래가 들린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인어'와 '세이렌'은 조금 다르지만, 때때로 두 낱말이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하므로 이 글에서는 그냥 '인어'라고 쓰겠습니다.)

드뷔시 《야상곡》은 1900년 12월 9일 파리에서 1·2악장이 초연되었고, 1901년 10월 27일 전곡이 초연되었습니다.

▶ 홀스트 《행성》

홀스트 《행성》은 7악장으로 된 관현악곡으로 1918년 9월 29일 영국에서 초연되었습니다. 홀스트는 본디 점성술에 영감을 받아 이 곡을 썼다고 해요. 생각해 보면 그때 기술로는 태양계 행성을 자세히 관찰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과학적 사실보다 점성술에서 더 큰 영감을 받는 게 자연스러웠겠지요.

그런데 음악을 들어 보면, 마치 천체망원경으로 촬영한 고해상도 사진을 보는 듯합니다. 아니, 아예 우주선을 타고 가까이에서 행성들을 구경하는 느낌마저 들어요. 참 신기하지요. 현대적인 관현악법에서 오는 현대적인 음색이 가장 큰 비결이라 할 수 있을 거예요.

화성, 전쟁을 가져오는 자 : 화성을 뜻하는 ‘마르스’(Mars)는 로마 신화에서 전쟁의 신 이름이지요. 이 곡은 워낙 강렬해서, 그냥 블록버스터 SF 영화 한 편 보듯이 감상하면 됩니다. 이 곡을 듣고 영화 《스타워즈》를 떠올리는 분도 있을 텐데요, 사실은 작곡가 존 윌리엄스가 《스타워즈》 주제곡에서 이 음악을 흉내 냈습니다. 특히 관현악법이 비슷해요.

금성, 평화를 가져오는 자 : 금성을 뜻하는 ‘비너스’(Venus)는 사랑의 여신이자 평화와 화합을 부르는 여신이기도 하지요. 음악이 참 우아하지만, 악보를 들여다보면 화성과 리듬, 템포 등이 잔뜩 꼬여 있습니다. 드뷔시 음악에 영향받은 홀스트의 '영국식 모더니즘'이 이렇게도 나타나는군요. 어찌 생각하면 이 곡에서 금관은 호른만 나오고 저음역 악기가 거의 안 나오는 점 등이 드뷔시 《야상곡》의 '구름' 악장과 닮은꼴입니다.

수성, 날개 달린 전령 : 수성을 뜻하는 ‘머큐리’(Mercury)는 로마 신화에서 상업과 교역의 신인 메르쿠리우스(Mercurius)의 영어 이름이지요.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날개 달린 신발을 신은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음악을 들어 보면 재빠르게 날아다니는 듯한 음형이 나타납니다.

목성, 쾌락을 가져오는 자 : 목성을 뜻하는 ‘주피터’(Jupiter)는 로마 신화의 최고신이며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동일시되는 ‘유피테르’(Iuppiter)의 영어 이름이지요. 16분음표로 소나기처럼 후두두 시원하게 쏟아지는 현악기 소리가 마치 휘산제나 박하사탕을 입에 넣은 듯이 상쾌합니다. 곧이어 호른이 호쾌한 선율을 노래합니다. 이 대목은 1980년대 MBC 뉴스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되어 국내에 널리 알려졌지요. 중간에 찬가처럼 나오는 영국 민요풍 선율도 유명합니다.

토성, 황혼을 가져오는 자 : 토성을 뜻하는 ‘새턴’(Saturn)은 시간과 농업의 신이자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와 동일시되는 '사투르누스(Saturnus)'의 영어 이름이지요. 음악에서 느껴지는 몸서리 쳐지는 황량함은 마치 우주 전쟁으로 폐허가 된 별을 보는 듯합니다.

천왕성, 마법사 : 천왕성을 뜻하는 ‘우라누스’(Uranus)는 가이아의 아들이자 남편이며, 주피터(제우스)와 대립하는 하늘의 신 이름이지요. 바순이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듯한 음형이 어찌 들으면 뒤카(Paul Dukas)의 명곡 《마법사의 제자》와 닮았습니다. 장난꾸러기 마법사가 우주적인 규모로 분탕질을 치는 모습이 떠오른달까요. 그런데 처음 나오는 '솔-미♭-라-시' 음형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이것을 독일어식 음계로 바꾸면 'G-Es-A-H'가 되지요. 'Es'는 'S'를 영어식으로 읽은 발음과 같고, 여기에 알파벳 몇 개만 채워 넣으면 GuStAv-Holst, 그러니까 작곡가의 이름이 됩니다. 장난꾸러기 마법사의 정체는 작곡가 자신이로군요!

해왕성, 신비로운 자 : 해왕성을 뜻하는 '넵튠'(Neptune)은 로마 신화에서 바다의 신이자 그리스 신화의 '포세이돈'과 동일시되는 넵투누스(Neptūnus)의 영어 이름이지요. 인어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여성 합창이 음악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드뷔시 《야상곡》의 '인어' 악장과 닮은꼴입니다. 여성 합창뿐 아니라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는 음악 어법이 드뷔시와 비슷하기도 합니다.

▶ 망망대해와 망망우주(茫茫宇宙)

일상의 풍경을 그린 드뷔시 《야상곡》과 우주를 신화적 상상력으로 그린 홀스트 《행성》이 '바다'라는 공통분모로 만나는 대목이 흥미롭습니다. 홀스트가 드뷔시 음악에서 영향받기도 했지만, 바다와 우주가 닮았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망망대해'라는 말을 우주에 관해서도 쓸 수 있으니까요. 인공위성도 레이더도, 무선통신 기술도 없이 지도와 나침반만으로 바다를 헤매야 했던 시절에는 더하지 않았을까요.

그러고 보면 우주선(宇宙船 · Starship)이라는 말은 우주를 항해하는 '배'라는 뜻이죠. 《스타트렉》이라는 유명한 SF 드라마를 보면, 우주를 탐사하는 군대 이름이 '우주해군'(Starfleet)이고 계급 체계가 미국 해군 계급과 일치합니다. 'USS 엔터프라이즈'라는 우주 전함은 미국 해군에서 현재 운용하고 있는 항공모함 이름이기도 하고요. 전함에 탑재된 무기 이름은 '광자 어뢰'(photon torpedo)입니다.

끝없이 넓게 펼쳐진 바다,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우주를 헤쳐나가는 인간이 느낄 외로움에는, 그래서 '인어의 노래'라는 판타지가 필요합니다. 드뷔시의 '인어'와 홀스트의 '인어'가 이렇게 만났습니다.

천지현황 우주홍황(天地玄黃 宇宙洪荒).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거칠다. 천자문이 이렇게 시작하지요. 우리 조상은 어려서 글을 익힐 때부터 우주에 대해 배웠다고 생각하니 새삼 신기합니다. 경기필이 연주하는 밤과 우주를 듣고 돌아가는 길에 밤하늘을 한 번 찬찬히 눈에 담아 보면 어떨까요?

※ 티켓 예매 :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12020805

2013년 1월 24일 일부 표기법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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