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2일 화요일

요산요수(樂山樂水) ― 산과 바다의 음악적 빛깔에 관하여 : 드뷔시 《바다》, R.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은 글입니다.
원문 링크: http://g-phil.kr/?p=1446

▶ 소리의 빛깔에 관하여

선율과 리듬과 화성은 전통적으로 서양음악을 이루는 3요소로 꼽혀 왔지요.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음색'이 그 못지않게 중요해 졌습니다. 음색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작곡 기법은 관현악법(orchestration)이고, 음악학자 달하우스는 현대적인 관현악법의 가능성을 제시한 말러 교향곡 1번과 R. 슈트라우스 《돈 쥬앙》을 가리켜 음악적 모더니즘의 뿌리라고도 했습니다. 오늘 감상하실 드뷔시 《바다》와 R.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은 '음색'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 바다의 빛깔에 관하여 ― 드뷔시 교향시 《바다》

드뷔시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미술 사조에서 빌어온 이 말로 드뷔시를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지만, 적어도 교향시 《바다》에 관해 얘기하려면 '인상주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1악장 : 바다의 새벽부터 정오까지 (De l'aube à midi sur la mer)
2악장 : 파도의 희롱 (Jeux de vagues)
3악장 : 바람과 바다의 대화 (Dialogue du vent et de la mer)

1악장은 새벽에 해가 떠서 수평선을 붉게 물들이고, 마침내 해가 높이 떠올라 눈부신 한낮의 햇살을 쏟아내는 모습이 환상적으로 느껴집니다. 음악이 너무나 멋있어서 자세한 설명은 차라리 군더더기가 될 듯해요. 그런데 2악장과 3악장을 들으면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습니다. 이 음악을 들으면서 어딘가 안정감이 없어서 불편한 느낌이 든다면, '발전하는' 음악에 너무 익숙한 탓일지도 모릅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서양음악은, 마치 극(drama)이 기승전결 구조를 따르는 것처럼 어떤 '방향성'을 따라 '발전'하는 짜임새를 갖습니다. 그 바탕이 되는 화성 진행 원리를 작곡가이자 이론가 장필리프 라모는 뉴턴의 중력이론에 빗대기도 했지요. 여기에 계몽주의 사상이 결합하면, 베토벤 교향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둠에서 광명으로' 짜임새가 됩니다.

드뷔시 음악은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배보다 배꼽이 커질 수 있으니 '인상주의' 얘기만 할게요. 음악이 '발전'하지 않고 '방향성' 없이 그저 흘러가니까, 마치 그림을 보는 듯 음악이 정지해 있는 느낌이 들지요.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이 했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시간예술과 공간예술의 차이점을 메우는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드뷔시 음악을 듣고 갸우뚱하게 하는 또 다른 원인은 모네, 르누아르 등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입니다. 드뷔시 음악이 모네 등의 그림과 그렇게까지 닮은꼴은 아니잖아요? 이것은 음악과 미술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드뷔시가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들에게서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상파 화가 중에서도 빛을 묘사하는 획기적인 표현 기법을 개발한 영국 화가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어른어른한 색채로 그림에 담았던 미국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등이 드뷔시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입니다.

▲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 北斎),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뒤(冨嶽三十六景 神奈川沖浪裏)

우키요에(浮世絵)라는 일본 에도시대 풍속화는 인상주의 미술 사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지요. 드뷔시는 그 가운데 호쿠사이의 판화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뒤》를 보고 《바다》를 작곡했고, 이 판화가 초판 악보 표지로도 쓰였습니다. 음악을 들어보면 어딘가 동아시아 느낌이 나지요?

▶ 산의 빛깔에 관하여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음색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작곡기법이 관현악법이라고 앞서 말씀드렸지요. 관현악법과 관련해 중요한 작곡가로 드뷔시, 라벨, 말러,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을 꼽을 수 있지만, 20세기 관현악법 문헌들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작곡가를 한 사람만 꼽으라면 바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일 겁니다.

《알프스 교향곡》에서는 밤-일출-저녁노을-일몰-밤으로 이어지는 '빛' 음형이 다양한 빛깔로 변주됩니다. 그리고 시냇물과 폭포, 풀잎, 꽃잎 등과 더불어 반짝이는 빛도 참 멋지지요. 이 작품에는 표제가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이야기 한 편을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도 있어요. 알프스 산 빛깔은 바다 빛깔과는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까요?

1. 밤 (Nacht) : 파곳과 몇몇 악기가 '밤' 음형을 연주할 동안 다른 악기들이 촘촘한 간격으로 음을 쌓아서 화음이라기보다는 '덩어리'(cluster)를 이루며 무겁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트롬본과 튜바가 마치 여명처럼 흐릿하게 빛나는 음형을 연주합니다. 조금씩 날이 밝아옵니다.

2. 일출 (Sonnenaufgang) : '밤' 음형이 눈 부신 햇살로 바뀌어 마구 쏟아집니다. 이토록 찬란한 소리가 '밤'과 음악적 뿌리가 같다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잘 들어 보세요. 찬란한 햇빛 속에 낯은 음으로 자꾸만 내려가는 '밤' 음형이 들어 있습니다!

3. 등산 (Der Anstieg) : 힘찬 리듬으로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면 '밤'에 나왔던 음형들과 음악적 뿌리가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어째서 이 작품 제목에 '교향곡'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지 알 듯합니다. 말하자면 '밤'과 '일출'이 교향곡의 '도입부'라면, 이 대목이 바로 '제1 주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4. 숲의 입구 (Eintritt in den Wald) : 교향곡의 '제2 주제'라 할 만한 대목이지만, 여기서부터는 '산'에 집중하기로 하지요. 형식 분석에 매달리기에는 '경치'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야생의 위험을 무릅쓰고 숲으로 들어서면 눈앞에 신기한 나무가 가득합니다. 산새가 울고, 꽃이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5. 개울가에서 거닐다 (Wanderung neben dem Bache) : 그리고 시냇물이 보입니다. 물이 차갑습니다. 물고기가 헤엄쳐 다닙니다. 물길을 따라 걸어가면…

6. 폭포에서 (Am Wasserfall) : 폭포가 나옵니다. 커다란 물소리, 물방울이 이리저리 튀기는 모양, 그리고 그 물방울이 햇빛을 만나면…

7. 환영 (Erscheinung) : 폭포에 걸린 무지개, 그리고 물방울마다 반짝이며 너울거리는 빛 알갱이가 꿈결처럼 아름답습니다!

8. 꽃으로 덮인 풀밭에서 (Auf blumigen Wiesen) : 폭포를 지나 더 올라갑니다. 길가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 옵니다.

9. 알프스 목장에서 (Auf der Alm) : 뿔피리 소리, 방울 소리, 소와 양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들판을 뛰노는 모습이 눈에 보일 듯합니다.

10. 길을 잃고 수풀과 덤불 속에서 헤매다(Durch Dickicht und Gestrüpp auf Irrwegen) : 소와 양이 풀을 뜯던 평화로운 산이 길을 잃는 순간 목숨을 위협합니다. 수풀과 덤불이 팔다리를 물어뜯으려고 달려듭니다.

11. 얼음산에서 (Auf dem Gletscher) : 겨우 빠져나오니 눈앞에 얼음산이 보입니다. 만년설이 세월의 무게로 얼어붙은, 알프스 산맥이나 히말라야 산맥 등에서 볼 수 있는 산악 빙하입니다.

12. 위험한 순간들 (Gefahrvolle Augenblicke) : 산꼭대기로 가려면 위험한 곳을 올라야 합니다. 한 발 잘못 디디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돌 굴러떨어지는 소리 들리나요? 자, 겁내지 말고, 숨을 크게 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13. 정상에서 (Auf dem Gipfel) : 드디어 정상입니다! 너무 힘들게 올라왔습니다. 주저앉아서 조금만 쉬자고요. 산꼭대기를 휘돌며 불어오는 바람은 싱그럽기도 하지요!

14. 전망 (Vision) : 이곳이 바로 알프스 산입니다. 아찔한 높이와 거대한 크기에 몸이 떨려 옵니다. 이 산과 견주면 인간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입니까?

15. 안개가 올라오다 (Nebel steigen auf) : 표제 그대로입니다. 덧붙일 말이 없군요.

16. 해가 서서히 지다 (Die Sonne verdüstert sich allmählich) : '밤'이었다가 '일출'이었던 그 음형이 이제는 '저녁노을'로 바뀌었네요.

17. 애가 (Elegie) : 날은 차츰 어두워지고 안개는 올라오는데, 문득 쓸쓸한 기분이 듭니다.

18. 폭풍전의 고요 (Stille vor dem Sturm) : 해 지는 알프스 정상은 참 고요합니다. 그러나 폭풍이 몰려올 듯하니 더 늦기 전에 내려가야 합니다. 바람 소리를 내는 특수악기(wind machine)가 이 대목에 사용되었습니다.

19. 번개와 폭풍, 하산 (Gewitter und Sturm, Abstieg) : 경기필이 제작한 천둥소리를 내는 악기(thunder machine), 바람 소리를 내는 악기(wind machine), 그리고 오르간과 더불어 오케스트라 전체가 폭풍우처럼 쏟아집니다.

20. 일몰 (Sonnenuntergang) : '밤'과 '일출'과 '저녁노을'이었던 그 음형입니다. 폭풍을 뚫고 산에서 내려오는 사이에 해가 집니다.

21. 여운 (Ausklang) : 오르간 소리가 들립니다. 사실은 폭풍이 몰아칠 때부터 들리던 오르간 소리이지만, 이곳에서는 오르간이 음악을 지배하면서 경건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현이 주선율을 이어받아 찬가처럼 부풀렸다가 조금씩 '밤'으로 옮겨갑니다.

22. 밤 (Nacht) : 다시 밤입니다. 처음에 그랬듯이, 어둡고 고요한 밤…

▶ 산과 바다 ― 대자연의 음악에 관하여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입니다. 요산요수(樂山樂水)라고도 하지요. 이번 경기필 연주회 제목 "音樂山音樂水 ― 산과 바다"는 이 말에서 따왔습니다.

그런데 《바다》와 《알프스 교향곡》처럼 자연을 그린 작품도 멋지지만, 자연이 들려주는 '음악'도 참 멋지지요. 물소리, 새 소리, 바람 소리…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전혀 다르게 들리는 이런 소리를 찾아 떠나 보면 어떨까요? 봄나들이 가기 좋은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 티켓 예매

https://www.sacticket.co.kr/home/play/play_view.jsp?seq=14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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