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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2일 화요일

요산요수(樂山樂水) ― 산과 바다의 음악적 빛깔에 관하여 : 드뷔시 《바다》, R.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은 글입니다.
원문 링크: http://g-phil.kr/?p=1446

▶ 소리의 빛깔에 관하여

선율과 리듬과 화성은 전통적으로 서양음악을 이루는 3요소로 꼽혀 왔지요.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음색'이 그 못지않게 중요해 졌습니다. 음색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작곡 기법은 관현악법(orchestration)이고, 음악학자 달하우스는 현대적인 관현악법의 가능성을 제시한 말러 교향곡 1번과 R. 슈트라우스 《돈 쥬앙》을 가리켜 음악적 모더니즘의 뿌리라고도 했습니다. 오늘 감상하실 드뷔시 《바다》와 R.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은 '음색'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 바다의 빛깔에 관하여 ― 드뷔시 교향시 《바다》

드뷔시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미술 사조에서 빌어온 이 말로 드뷔시를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지만, 적어도 교향시 《바다》에 관해 얘기하려면 '인상주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1악장 : 바다의 새벽부터 정오까지 (De l'aube à midi sur la mer)
2악장 : 파도의 희롱 (Jeux de vagues)
3악장 : 바람과 바다의 대화 (Dialogue du vent et de la mer)

1악장은 새벽에 해가 떠서 수평선을 붉게 물들이고, 마침내 해가 높이 떠올라 눈부신 한낮의 햇살을 쏟아내는 모습이 환상적으로 느껴집니다. 음악이 너무나 멋있어서 자세한 설명은 차라리 군더더기가 될 듯해요. 그런데 2악장과 3악장을 들으면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습니다. 이 음악을 들으면서 어딘가 안정감이 없어서 불편한 느낌이 든다면, '발전하는' 음악에 너무 익숙한 탓일지도 모릅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서양음악은, 마치 극(drama)이 기승전결 구조를 따르는 것처럼 어떤 '방향성'을 따라 '발전'하는 짜임새를 갖습니다. 그 바탕이 되는 화성 진행 원리를 작곡가이자 이론가 장필리프 라모는 뉴턴의 중력이론에 빗대기도 했지요. 여기에 계몽주의 사상이 결합하면, 베토벤 교향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둠에서 광명으로' 짜임새가 됩니다.

드뷔시 음악은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배보다 배꼽이 커질 수 있으니 '인상주의' 얘기만 할게요. 음악이 '발전'하지 않고 '방향성' 없이 그저 흘러가니까, 마치 그림을 보는 듯 음악이 정지해 있는 느낌이 들지요.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이 했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시간예술과 공간예술의 차이점을 메우는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드뷔시 음악을 듣고 갸우뚱하게 하는 또 다른 원인은 모네, 르누아르 등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입니다. 드뷔시 음악이 모네 등의 그림과 그렇게까지 닮은꼴은 아니잖아요? 이것은 음악과 미술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드뷔시가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들에게서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상파 화가 중에서도 빛을 묘사하는 획기적인 표현 기법을 개발한 영국 화가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어른어른한 색채로 그림에 담았던 미국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등이 드뷔시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입니다.

▲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 北斎),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뒤(冨嶽三十六景 神奈川沖浪裏)

우키요에(浮世絵)라는 일본 에도시대 풍속화는 인상주의 미술 사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지요. 드뷔시는 그 가운데 호쿠사이의 판화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뒤》를 보고 《바다》를 작곡했고, 이 판화가 초판 악보 표지로도 쓰였습니다. 음악을 들어보면 어딘가 동아시아 느낌이 나지요?

▶ 산의 빛깔에 관하여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음색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작곡기법이 관현악법이라고 앞서 말씀드렸지요. 관현악법과 관련해 중요한 작곡가로 드뷔시, 라벨, 말러,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을 꼽을 수 있지만, 20세기 관현악법 문헌들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작곡가를 한 사람만 꼽으라면 바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일 겁니다.

《알프스 교향곡》에서는 밤-일출-저녁노을-일몰-밤으로 이어지는 '빛' 음형이 다양한 빛깔로 변주됩니다. 그리고 시냇물과 폭포, 풀잎, 꽃잎 등과 더불어 반짝이는 빛도 참 멋지지요. 이 작품에는 표제가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이야기 한 편을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도 있어요. 알프스 산 빛깔은 바다 빛깔과는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까요?

1. 밤 (Nacht) : 파곳과 몇몇 악기가 '밤' 음형을 연주할 동안 다른 악기들이 촘촘한 간격으로 음을 쌓아서 화음이라기보다는 '덩어리'(cluster)를 이루며 무겁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트롬본과 튜바가 마치 여명처럼 흐릿하게 빛나는 음형을 연주합니다. 조금씩 날이 밝아옵니다.

2. 일출 (Sonnenaufgang) : '밤' 음형이 눈 부신 햇살로 바뀌어 마구 쏟아집니다. 이토록 찬란한 소리가 '밤'과 음악적 뿌리가 같다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잘 들어 보세요. 찬란한 햇빛 속에 낯은 음으로 자꾸만 내려가는 '밤' 음형이 들어 있습니다!

3. 등산 (Der Anstieg) : 힘찬 리듬으로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면 '밤'에 나왔던 음형들과 음악적 뿌리가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어째서 이 작품 제목에 '교향곡'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지 알 듯합니다. 말하자면 '밤'과 '일출'이 교향곡의 '도입부'라면, 이 대목이 바로 '제1 주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4. 숲의 입구 (Eintritt in den Wald) : 교향곡의 '제2 주제'라 할 만한 대목이지만, 여기서부터는 '산'에 집중하기로 하지요. 형식 분석에 매달리기에는 '경치'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야생의 위험을 무릅쓰고 숲으로 들어서면 눈앞에 신기한 나무가 가득합니다. 산새가 울고, 꽃이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5. 개울가에서 거닐다 (Wanderung neben dem Bache) : 그리고 시냇물이 보입니다. 물이 차갑습니다. 물고기가 헤엄쳐 다닙니다. 물길을 따라 걸어가면…

6. 폭포에서 (Am Wasserfall) : 폭포가 나옵니다. 커다란 물소리, 물방울이 이리저리 튀기는 모양, 그리고 그 물방울이 햇빛을 만나면…

7. 환영 (Erscheinung) : 폭포에 걸린 무지개, 그리고 물방울마다 반짝이며 너울거리는 빛 알갱이가 꿈결처럼 아름답습니다!

8. 꽃으로 덮인 풀밭에서 (Auf blumigen Wiesen) : 폭포를 지나 더 올라갑니다. 길가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 옵니다.

9. 알프스 목장에서 (Auf der Alm) : 뿔피리 소리, 방울 소리, 소와 양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들판을 뛰노는 모습이 눈에 보일 듯합니다.

10. 길을 잃고 수풀과 덤불 속에서 헤매다(Durch Dickicht und Gestrüpp auf Irrwegen) : 소와 양이 풀을 뜯던 평화로운 산이 길을 잃는 순간 목숨을 위협합니다. 수풀과 덤불이 팔다리를 물어뜯으려고 달려듭니다.

11. 얼음산에서 (Auf dem Gletscher) : 겨우 빠져나오니 눈앞에 얼음산이 보입니다. 만년설이 세월의 무게로 얼어붙은, 알프스 산맥이나 히말라야 산맥 등에서 볼 수 있는 산악 빙하입니다.

12. 위험한 순간들 (Gefahrvolle Augenblicke) : 산꼭대기로 가려면 위험한 곳을 올라야 합니다. 한 발 잘못 디디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돌 굴러떨어지는 소리 들리나요? 자, 겁내지 말고, 숨을 크게 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13. 정상에서 (Auf dem Gipfel) : 드디어 정상입니다! 너무 힘들게 올라왔습니다. 주저앉아서 조금만 쉬자고요. 산꼭대기를 휘돌며 불어오는 바람은 싱그럽기도 하지요!

14. 전망 (Vision) : 이곳이 바로 알프스 산입니다. 아찔한 높이와 거대한 크기에 몸이 떨려 옵니다. 이 산과 견주면 인간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입니까?

15. 안개가 올라오다 (Nebel steigen auf) : 표제 그대로입니다. 덧붙일 말이 없군요.

16. 해가 서서히 지다 (Die Sonne verdüstert sich allmählich) : '밤'이었다가 '일출'이었던 그 음형이 이제는 '저녁노을'로 바뀌었네요.

17. 애가 (Elegie) : 날은 차츰 어두워지고 안개는 올라오는데, 문득 쓸쓸한 기분이 듭니다.

18. 폭풍전의 고요 (Stille vor dem Sturm) : 해 지는 알프스 정상은 참 고요합니다. 그러나 폭풍이 몰려올 듯하니 더 늦기 전에 내려가야 합니다. 바람 소리를 내는 특수악기(wind machine)가 이 대목에 사용되었습니다.

19. 번개와 폭풍, 하산 (Gewitter und Sturm, Abstieg) : 경기필이 제작한 천둥소리를 내는 악기(thunder machine), 바람 소리를 내는 악기(wind machine), 그리고 오르간과 더불어 오케스트라 전체가 폭풍우처럼 쏟아집니다.

20. 일몰 (Sonnenuntergang) : '밤'과 '일출'과 '저녁노을'이었던 그 음형입니다. 폭풍을 뚫고 산에서 내려오는 사이에 해가 집니다.

21. 여운 (Ausklang) : 오르간 소리가 들립니다. 사실은 폭풍이 몰아칠 때부터 들리던 오르간 소리이지만, 이곳에서는 오르간이 음악을 지배하면서 경건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현이 주선율을 이어받아 찬가처럼 부풀렸다가 조금씩 '밤'으로 옮겨갑니다.

22. 밤 (Nacht) : 다시 밤입니다. 처음에 그랬듯이, 어둡고 고요한 밤…

▶ 산과 바다 ― 대자연의 음악에 관하여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입니다. 요산요수(樂山樂水)라고도 하지요. 이번 경기필 연주회 제목 "音樂山音樂水 ― 산과 바다"는 이 말에서 따왔습니다.

그런데 《바다》와 《알프스 교향곡》처럼 자연을 그린 작품도 멋지지만, 자연이 들려주는 '음악'도 참 멋지지요. 물소리, 새 소리, 바람 소리…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전혀 다르게 들리는 이런 소리를 찾아 떠나 보면 어떨까요? 봄나들이 가기 좋은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 티켓 예매

https://www.sacticket.co.kr/home/play/play_view.jsp?seq=14328

2013년 2월 18일 월요일

쳄린스키 《인어공주》와 말러 교향곡 1번 《거인》, 실연을 이겨내는 젊은이의 초상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진에 실은 글입니다.
원문: http://g-phil.kr/?p=1429

▶ 사랑의 아픔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쳄린스키

인어공주는 왜 사람이 되려고 했을까요? 사랑 때문이라면 마녀를 찾아갔을 때 다른 것을 부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안데르센이 쓴 원작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인어공주가 참말로 원했던 것은 영혼이기 때문이랍니다.

구자범 지휘자 선생님은 쳄린스키가 교향시 《인어공주》를 쓰면서 '영혼' 얘기를 음악에 담았다고 생각해요. 쳄린스키는 알마 쉰들러를 짝사랑했지만, 알마는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했죠. 그런데 '알마'(Alma)는 스페인어 또는 옛 이탈리아어로 '영혼'이라는 뜻이래요. 라틴어 '아니마'(anima)에서 온 말이고요.

그러니까 영혼을 갈구하는 인어공주는 알마('영혼')를 사랑했던 쳄린스키 자신과 닮알습니다. 끝내 영혼을 얻게 되는 인어공주처럼, 쳄린스키도 끝내 알마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작품을 썼던 것이지요.

원작에 나오는 영혼 이야기가 잘 기억나지 않으세요? 이참에 진짜 줄거리를 제대로 알아 볼까요?

바닷속 왕국에서 살던 인어공주는 언니들에게 말로만 듣던 물밖 세상을 동경해요. 그리고 15살 생일을 맞아 드디어 물밖으로 나옵니다. 물위에 배가 떠있고 사람들이 춤추고 불꽃놀이도 해요. 사람들 가운데 왕자님이 가장 멋져요. 그런데 밤이 되면서 폭풍이 몰아치고, 왕자님은 물에 빠져 죽어가고, 인어공주가 왕자님을 구해서 바닷가로 데려가요. 그리고 가까운 신전에서 온 아가씨가 나타날 때까지 왕자님을 지켜 봐요. 정신을 잃은 왕자님은 그때까지 인어공주를 보지 못해요.

인어공주는 할머니를 찾아가, 사람들은 물에 빠지지만 않으면 영원히 살 수 있느냐고 여쭈어요. 할머니는 이렇게 말해요. 300년을 사는 인어와 달리 사람은 훨씬 일찍 죽어요. 그런데 인어는 죽으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지만, 사람은 죽으면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살아요.

인어는 왕자를 그리워하고 사람의 영혼을 부러워한 나머지 마녀를 찾아가요. 그리고 인어 꼬리를 사람 다리로 만들어 주는 약을 얻는 대신 혀를 잘라 주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잃어요. 마녀는 이렇게 경고해요. 사람이 되면 다시는 바다로 돌아올 수 없어요. 약을 마시면 다리가 생겨서 누구보다도 멋진 춤을 출 수 있지만, 걸을 때마다 칼에 꿰뚫리는 듯한 고통이 뒤따라요. 영혼을 얻으려면 진실한 사랑을 찾아 입맞춤을 하고, 사랑을 얻고, 그 사람과 결혼해야 해요. 그러면 그 사람의 영혼 일부가 인어공주에게 흘러들어가요. 만약 그 사람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다음날 아침 해뜰 무렵 인어공주는 죽어서 물거품이 돼요.

인어공주는 약을 마시고 다리를 얻어 왕자를 만나요. 왕자는 인어공주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인어공주는 고통을 참고 왕자와 춤춰요. 그러나 왕자의 아버지는 왕자한테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하라고 말해요. 왕자는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지만, 물에 빠졌다가 깨어났을 때 만났던 여자가 그 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바꿔요.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요. 인어공주는 절망에 빠져 동트기를 기다려요. 그때 인어공주의 다섯 언니가 찾아와 이렇게 말해요. 다섯 언니는 마녀를 찾아가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 주고 마법이 깃든 칼을 얻었어요. 인어공주가 그 칼로 왕자를 찔러 죽이고 피를 다리에 적시면 다시 인어가 되어 바다로 돌아갈 수 있어요.

인어공주는 끝내 왕자를 죽이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물거품이 돼요. 그런데 인어공주는 여전히 밝은 햇살을 볼 수 있었어요. 햇살 사이를 투명한 모양으로 떠다니는 공기의 딸들(Luftens Døttre; daughters of air)이 어리둥절해 하는 인어공주에게 이렇게 말해줘요. 인어공주는 영혼을 얻고자 온 마음을 다 바쳐 노력했기 때문에 공기의 딸이 되었어요. 앞으로 300년 동안 착한 일을 하면 영혼을 얻어 하늘나라에 갈 수 있지요. 그리고 착한 아이를 찾을 때마다 영혼을 얻기까지 걸리는 기간이 한 해씩 줄어들고, 나쁜 아이를 만날 때마다 흘려야 하는 눈물 한 방울에 하루씩 기간이 늘어난답니다.

▶ 청년 말러가 좌절을 딛고 일어선 이야기

쳄린스키가 그토록 원했던 '알마'라는 여인은 다름 아닌 말러와 결혼했습니다. 말러는 마흔이 넘어서 꽃다운 알마와 결혼한 행운아였지만, 그런 말러도 쳄린스키 나이 때에는 실연으로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교향곡 1번에는 그런 경험이 녹아 있지요.

구자범 지휘자 선생님께서 어떤 모임에서 말러 교향곡 1번에 관해 강연을 해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쉽게 간추려서 제가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게요. 교향곡 1번은 말러가 직접 가사를 쓴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라는 연가곡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말러는 교향곡 1번 악장마다 표제를 붙였다가 없애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습니다.

제1악장 : 동틀 무렵,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풍경처럼 몸 속 깊은 곳까지 시원해지는 오스트리아의 산과 들이 보입니다. (악보에는 "자연의 소리처럼"이라는 나타냄말이 있습니다.)

뻐꾸기 소리가 들리고, 꽃들이 노래하고, 멀리서 기상나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때 트럼펫이 무대 밖에서 연주합니다. 그리고 좀 있다가 조용히 무대에 입장하지요. 연주에 지각한 사람이 아니니 오해하지는 마세요.)

청년 말러가 나타납니다. 이때 말러의 연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가운데 "아침 들판을 걸었네"에 쓰였던 선율이 나옵니다. 풀잎에 이슬이 반짝이고 새들과 초롱꽃이 "안녕하세요! 아름다운 세상이에요!"하고 인사하는 그곳에서 청년 말러는 사랑을 잃고 홀로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이제 나의 행복이 다시 올까? 아니! 아니! 다시는 내게 행복이 꽃피지 않으리!"

그러나 찬란한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것을 본 말러는 새로운 희망을 얻습니다. 이제 그 여인을 잊을 수 있을 듯합니다. 가슴을 활짝 펴고, 산을 내려가자! 뛰자! 뛰자!

2악장 : 랜틀러(ländler)라는 형식의 춤곡입니다. '땅'을 뜻하는 영어 'land'와 말뿌리가 같지요. 시골 사람들이 춤추며 즐기는 장면입니다. 오늘은 결혼식이 있는 날. 산에서 마을로 내려온 청년 말러는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사내와 혼례를 올리는 모습을 보며 또다시 가슴 아파합니다.

호른 소리와 함께 청년 말러의 추억이 현실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미뉴엣과 짝을 이루는 '트리오'(Trio)입니다. 여기서는 '랜틀러'와 짝이지요. 너무나 아름다운 선율, 사랑에 빠져 행복했던 추억이 절로 떠오르는 음악입니다. 이윽고 호른 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현실이 되돌아옵니다.

3악장 : 청년 말러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더블베이스가 약음기를 끼고 괴상망측한 음색으로 흐느낍니다. 그런데 선율이 어째 익숙하지요? "자크 수사님"(Frère Jacques)이라는 동요입니다. 독일어권에서는 "마르틴 수사님"(Bruder Martin)이고, 영어권에서는 "요한 수사님"(Brother John)이지요. "아 유 슬리핑, 아 유 슬리핑" 하는 영어 가사를 기억하시는 분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말러는 이 유명한 동요를 교향곡에 쓰면서 선율과 리듬과 음색을 고약하게 비틀어 놨습니다. 즐겁게 놀 때 부르는 노래를 장송행진곡처럼 만들다니, 지독한 반어법이지요. 이 선율을 오케스트라가 부풀립니다. 이때 악보에는 "뻔뻔하게"(Keck) 같은 괴상한 나타냄말이 나옵니다.

이렇게 일그러진 동요 선율이 흘러 서글픈 음악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싸구려 길거리 음악, 서커스 광고, '뽕짝'(?) 음악이 끼어듭니다. 청년 말러의 의식세계가 현실과 뒤섞이고, 뒤틀리고, 일그러지는 대목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절망에 빠져서 방황하는데 마침 길거리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요.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 "자~ 애들은 가라!" "기임~밥!" 청년 말러는 세상에서 홀로 버려진 듯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삶의 희망을 잃었던 청년 말러는 보리수 그늘에서 문득 깨달음을 얻습니다. 마치 싯다르타처럼요! 이때 연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가운데 "내 연인의 푸른 눈동자"에 쓰였던 선율이 나옵니다. "길가에 보리수 한 그루 있어, 그곳에서 처음으로 단잠을 잤노라! 나에게 꽃 뿌리는 보리수 아래서 삶을 잊었노라. 모든 것이 다시금 좋아지리라! 사랑도, 고통도, 세상도, 꿈도!"

그러나 비틀린 동요 선율이 다시 나타납니다. 청년 말러는 아직 참된 평안을 얻지 못했습니다.

4악장 : 폭풍우가 몰아칩니다. 금관이 마치 아가리를 벌린 지옥 입구처럼 으르렁거리는 이 대목은 사실 바그너가 《파르지팔》에서 썼던 '성배' 음형, 또는 리스트가 여러 작품에서 썼던 '십자가' 음형을 비틀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 말러는 지옥을 벗어나 다시 깨달음을 얻고, '지옥' 음형이 살짝 바뀌어 '천국'의 성스러운 찬가가 됩니다. 곡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고양감이 음악을 뒤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장된 고양감'만큼이나 거짓된 승리, 불완전한 깨달음입니다.

1악장에 나왔던 "자연의 소리"가 다시 나옵니다. 그러나 이내 잔뜩 뒤틀린 '현실'이 반격해 옵니다. 몇 차례에 걸친 작은 깨달음이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빛이 바래는 모습은 마치 불교의 가르침 같습니다. 깨달음에는 수많은 단계가 있으니 참된 깨달음을 얻으려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고요.

청년 말러의 참된 깨달음은 '천국' 음형과 함께 나타나되, 앞선 거짓 승리와 달리 과장되지 않습니다. 악보에는 "승전가"라고 나옵니다. 호른 연주자들과 일부 트럼펫·트롬본 연주자가 말러의 지시대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승리의 팡파르를 연주합니다.

▶ 거인(Titan)과 초인(Übermensch)

말러 교향곡 1번에는 '거인'(Titan)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인족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구자범 지휘자 선생님은 그보다는 정신적인 의미,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뜻한다고 생각하시더군요.

이렇게 생각하면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한 초인(Übermensch)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음악에 나타나는 '깨달음'의 성격이 좀 다른 듯하기는 하지만요. (박순영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의 설명을 빌자면, "니체가 말하는 독일어의 위버멘쉬(Über-mensch)는 다른 차원으로 이행하는, 저편으로 넘어가는(Über- gehen), 자신을 극복하려는 사람"이며, “어린아이처럼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목표를 향해 몰입하는 단계”가 참된 깨달음의 단계입니다.)

2013년 1월 21일 월요일

드뷔시 《야상곡》과 홀스트 《행성》, 밤과 우주의 음악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진에 실은 글입니다.
☞ 원문 링크 : http://g-phil.kr/?p=1358

▶ 드뷔시, 홀스트, 그리고 어떤 모더니즘

"말하자면 두 가지 아방가르드가 나란히 형성되고 있었다. 파리 사람들은 밝은 일상의 세계로 옮겨갔다. 빈 사람들은 반대 방향으로 가면서, 성스러운 횃불로 무시무시한 심연을 밝혀 나갔다."

음악평론가 알렉스 로스(Alex Ross)는 1900년대 유럽 음악계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빈 사람들"은 쇤베르크, 베베른, 베르크 등을 가리키고, "파리 사람들"은 드뷔시, 사티 등을 가리키지요. 쇤베르크가 무조음악으로 나아갈 때, 드뷔시는 전통적인 기능화성과 장·단조 체계를 살짝 비켜가면서 재즈나 각국의 민속 음악 등 이국적인 요소를 자신의 음악에 녹여 내는 식으로 새로움을 추구했습니다.

드뷔시 음악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모더니티'(modernity)는 현대적인 관현악법에서 오는 현대적인 음색입니다. 음악학자 달하우스(Carl Dahlhaus)는 말러 교향곡 1번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돈 후안》이 초연된 1890년을 음악적 모더니즘의 시초로 보았지요. 바로 두 작품에서 나타나는 현대적인 관현악법 때문입니다. 그리고 드뷔시가 빚어낸 음색은 때때로 '인상주의'라 불리는 음악 어법과 결합해 프랑스 모더니즘 음악 전통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영국 작곡가 구스타프 홀스트(Gustav Holst)도 어찌 보면 드뷔시와 비슷한 길을 갔습니다. 영국 민요 선율을 음악에 녹여내고자 했고, 인도 음악에 영향을 받았으며, 복조성(polytonality)이나 교회선법 등으로 전통적인 조성음악 어법을 살짝 비켜가는 동시에 현대적인 관현악법으로 나름의 현대성을 좇았습니다.

▶ 드뷔시 《야상곡》

야상곡(Nocturne)이라 하면 쇼팽이나 존 필드 등이 작곡한 서정적인 피아노곡을 곧잘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드뷔시 《야상곡》은 미국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의 《야상곡》 연작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작곡한 3악장 관현악곡으로, 작곡가가 한 말을 빌자면 "야상곡의 흔한 형식이 아니라 낱말이 암시하는 여러 가지 인상과 빛이 만드는 특별한 효과"를 낸 작품입니다.

작곡가는 '구름'(Nuages) 악장을 이렇게 설명했지요. "하늘의 변함없는 정경과 구름의 느리고 장엄한 움직임이 잿빛에 살짝 흰 빛깔을 더하여 사라지는 모습을 나타낸다."

'구름' 악장에서는 목관악기와 바이올린이 음악을 끌고 가면서 중간 음역이 비어 있을 때가 잦습니다. 그래서 음악이 붕 떠있는 느낌을 주지요. 화성 진행도 전통적인 방식과 달리 음악 속을 둥둥 떠다닙니다. 음악학자 타루스킨(Richard Taruskin)은 음색과 음역 등의 요인이 악곡을 지배하면서 전통적인 조성·화성 체계를 회피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축제'(Fêtes) 악장은 파리에 있는 볼로뉴 숲(Bois de Boulogne)에서 열리는 축제를 묘사한 음악입니다. 드뷔시는 이렇게 설명했지요. "공기가 떨리고 춤추는 리듬과 갑자기 터져 나오는 빛을 떠올리게끔 한다. 여기에 행진 에피소드(현란하고 비현실적인 환상)가 나타나 축제 장면을 지나며 합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배경은 꿋꿋하게 변함없이 이어지는데, 음악과 반짝이는 가루가 우주적인 리듬 속에서 뒤섞이는 축제 분위기이다."

'인어'(Sirènes) 악장에는 여성 합창단이 가사 없이 부르는 '인어의 노래'가 나오지요. 드뷔시는 이와 관련해 "바다의 모습과 끊임없는 리듬을 그렸으며, 달빛을 받은 은빛 물결 속에서 인어가 웃으며 지나갈 때 부르는 신비로운 노래가 들린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인어'와 '세이렌'은 조금 다르지만, 때때로 두 낱말이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하므로 이 글에서는 그냥 '인어'라고 쓰겠습니다.)

드뷔시 《야상곡》은 1900년 12월 9일 파리에서 1·2악장이 초연되었고, 1901년 10월 27일 전곡이 초연되었습니다.

▶ 홀스트 《행성》

홀스트 《행성》은 7악장으로 된 관현악곡으로 1918년 9월 29일 영국에서 초연되었습니다. 홀스트는 본디 점성술에 영감을 받아 이 곡을 썼다고 해요. 생각해 보면 그때 기술로는 태양계 행성을 자세히 관찰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과학적 사실보다 점성술에서 더 큰 영감을 받는 게 자연스러웠겠지요.

그런데 음악을 들어 보면, 마치 천체망원경으로 촬영한 고해상도 사진을 보는 듯합니다. 아니, 아예 우주선을 타고 가까이에서 행성들을 구경하는 느낌마저 들어요. 참 신기하지요. 현대적인 관현악법에서 오는 현대적인 음색이 가장 큰 비결이라 할 수 있을 거예요.

① 화성, 전쟁을 가져오는 자 : 화성을 뜻하는 ‘마르스’(Mars)는 로마 신화에서 전쟁의 신 이름이지요. 이 곡은 워낙 강렬해서, 그냥 블록버스터 SF 영화 한 편 보듯이 감상하면 됩니다. 이 곡을 듣고 영화 《스타워즈》를 떠올리는 분도 있을 텐데요, 사실은 작곡가 존 윌리엄스가 《스타워즈》 주제곡에서 이 음악을 흉내 냈습니다. 특히 관현악법이 비슷해요.

② 금성, 평화를 가져오는 자 : 금성을 뜻하는 ‘비너스’(Venus)는 사랑의 여신이자 평화와 화합을 부르는 여신이기도 하지요. 음악이 참 우아하지만, 악보를 들여다보면 화성과 리듬, 템포 등이 잔뜩 꼬여 있습니다. 드뷔시 음악에 영향받은 홀스트의 '영국식 모더니즘'이 이렇게도 나타나는군요. 어찌 생각하면 이 곡에서 금관은 호른만 나오고 저음역 악기가 거의 안 나오는 점 등이 드뷔시 《야상곡》의 '구름' 악장과 닮은꼴입니다.

③ 수성, 날개 달린 전령 : 수성을 뜻하는 ‘머큐리’(Mercury)는 로마 신화에서 상업과 교역의 신인 메르쿠리우스(Mercurius)의 영어 이름이지요.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날개 달린 신발을 신은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음악을 들어 보면 재빠르게 날아다니는 듯한 음형이 나타납니다.

④ 목성, 쾌락을 가져오는 자 : 목성을 뜻하는 ‘주피터’(Jupiter)는 로마 신화의 최고신이며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동일시되는 ‘유피테르’(Iuppiter)의 영어 이름이지요. 16분음표로 소나기처럼 후두두 시원하게 쏟아지는 현악기 소리가 마치 휘산제나 박하사탕을 입에 넣은 듯이 상쾌합니다. 곧이어 호른이 호쾌한 선율을 노래합니다. 이 대목은 1980년대 MBC 뉴스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되어 국내에 널리 알려졌지요. 중간에 찬가처럼 나오는 영국 민요풍 선율도 유명합니다.

⑤ 토성, 황혼을 가져오는 자 : 토성을 뜻하는 ‘새턴’(Saturn)은 시간과 농업의 신이자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와 동일시되는 '사투르누스(Saturnus)'의 영어 이름이지요. 음악에서 느껴지는 몸서리 쳐지는 황량함은 마치 우주 전쟁으로 폐허가 된 별을 보는 듯합니다.

⑥ 천왕성, 마법사 : 천왕성을 뜻하는 ‘우라누스’(Uranus)는 가이아의 아들이자 남편이며, 주피터(제우스)와 대립하는 하늘의 신 이름이지요. 바순이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듯한 음형이 어찌 들으면 뒤카(Paul Dukas)의 명곡 《마법사의 제자》와 닮았습니다. 장난꾸러기 마법사가 우주적인 규모로 분탕질을 치는 모습이 떠오른달까요. 그런데 처음 나오는 '솔-미♭-라-시' 음형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이것을 독일어식 음계로 바꾸면 'G-Es-A-H'가 되지요. 'Es'는 'S'를 영어식으로 읽은 발음과 같고, 여기에 알파벳 몇 개만 채워 넣으면 GuStAv-Holst, 그러니까 작곡가의 이름이 됩니다. 장난꾸러기 마법사의 정체는 작곡가 자신이로군요!

⑦ 해왕성, 신비로운 자 : 해왕성을 뜻하는 '넵튠'(Neptune)은 로마 신화에서 바다의 신이자 그리스 신화의 '포세이돈'과 동일시되는 넵투누스(Neptūnus)의 영어 이름이지요. 인어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여성 합창이 음악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드뷔시 《야상곡》의 '인어' 악장과 닮은꼴입니다. 여성 합창뿐 아니라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는 음악 어법이 드뷔시와 비슷하기도 합니다.

▶ 망망대해와 망망우주(茫茫宇宙)

일상의 풍경을 그린 드뷔시 《야상곡》과 우주를 신화적 상상력으로 그린 홀스트 《행성》이 '바다'라는 공통분모로 만나는 대목이 흥미롭습니다. 홀스트가 드뷔시 음악에서 영향받기도 했지만, 바다와 우주가 닮았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망망대해'라는 말을 우주에 관해서도 쓸 수 있으니까요. 인공위성도 레이더도, 무선통신 기술도 없이 지도와 나침반만으로 바다를 헤매야 했던 시절에는 더하지 않았을까요.

그러고 보면 우주선(宇宙船 · Starship)이라는 말은 우주를 항해하는 '배'라는 뜻이죠. 《스타트렉》이라는 유명한 SF 드라마를 보면, 우주를 탐사하는 군대 이름이 '우주해군'(Starfleet)이고 계급 체계가 미국 해군 계급과 일치합니다. 'USS 엔터프라이즈'라는 우주 전함은 미국 해군에서 현재 운용하고 있는 항공모함 이름이기도 하고요. 전함에 탑재된 무기 이름은 '광자 어뢰'(photon torpedo)입니다.

끝없이 넓게 펼쳐진 바다,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우주를 헤쳐나가는 인간이 느낄 외로움에는, 그래서 '인어의 노래'라는 판타지가 필요합니다. 드뷔시의 '인어'와 홀스트의 '인어'가 이렇게 만났습니다.

천지현황 우주홍황(天地玄黃 宇宙洪荒).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거칠다. 천자문이 이렇게 시작하지요. 우리 조상은 어려서 글을 익힐 때부터 우주에 대해 배웠다고 생각하니 새삼 신기합니다. 경기필이 연주하는 밤과 우주를 듣고 돌아가는 길에 밤하늘을 한 번 찬찬히 눈에 담아 보면 어떨까요?

※ 티켓 예매 :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12020805

2013년 1월 24일 일부 표기법 수정

2012년 5월 5일 토요일

나는 바그네리안(Wagnerian)이다

※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http://g-phil.kr/?p=911

▶ 바그네리안과 크리스티안

옥스퍼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에서는 '바그네리안(Wagnerian)'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습니다.

① (형용사) 독일 오페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와 관련 있거나 그가 쓴 음악, 음악 이론 또는 극음악 작곡 이론과 관련 있는
② (명사) 바그너 숭배자 또는 지지자

'바그너―바그네리안'은 '크리스트―크리스티안'과 짜임새가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저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의 종교적으로 숭배한다는 뜻이지요. 바그너가 살았을 때부터 바그너―브람스 대립 구도가 있어서 이런 분위기가 손쉽게 생겨났고요. 더군다나 바그너가 민족주의를 불러내 가며 저주를 퍼부어댔던 프랑스에서도 바그네리안이 제법 많았다고 합니다.

저는 바그네리안입니다. 제가 블로그 등에서 쓰는 공식(?) 프로필에는 이런 말이 들어가지요:

(김원철은) 바그너가 《파르지팔》을 작곡하던 무렵으로부터 100년, 바그너가 서거한 지 95년 만에 태어났다. 김원철이 태어나던 날 몬살바트 성에서 성배 기사 세 명이 찾아와 축복했으며, 어려서부터 잔[杯] 종류, 특히 팥빙수 그릇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확인되지 않은 설이 있다. 스물두 살 되던 해에 성배의 계시를 받고 바그너 사도가 되었다. 현재 바그너 성지 순례를 위해 경전을 연구하고 있다.

이쯤 되면 저를 놀리는 말이 나올 법합니다. 이렇게요: "여러분께서는 지금 말기 증세를 보고 계십니다!"

▶ 바그너 색깔론

제가 바그네리안이라고 하면 제 정치성향이 극우적일 것이라고 오해하시는 분도 있어요. 억울합니다. 이참에 밝혀 둘게요. 저는 지난 총선 때 진보신당에 투표했습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좌파'는 아니고 '자유주의자(liberalist)'입니다. 유럽 해적당(Pirate Party) 강령을 이어받은 정당이 생긴다면 지지할 생각이고요.

바그너는 반유대주의자였습니다. 「음악 속 유대주의」(Das Judenthum in der Musik)라는 글을 처음에는 필명으로, 나중에는 실명으로 발표해서 악명을 떨쳤지요. 이 글에 나오는 '유대인'의 정체는 알고 보면 두 사람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젊은 바그너에게 수많은 도움을 주었던 작곡가 마이어베어, 그리고 바그너가 평생 열등감에 시달렸던 천재 멘델스존이지요. 이 두 사람은 바그너보다 먼저 성공한 유대인 음악가로 바그너 출세길에 걸림돌이 되었고, 바그너는 당시 독일에 창궐하던 반유대 정서를 이용해서 두 사람 때리기에 성공했습니다. 심보가 고약해요. 게다가 글에 나타난 인종주의는 두 사람을 공격하는 도구일 뿐이라 하기 어렵고, 바그너의 유대인 친구들을 읊어대는 정도로는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를 파시즘으로 곧바로 이어 말하는 일은 잘못입니다. 인종주의와 파시즘이 무관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둘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또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는 바그너 후손의 명백한 나치 부역 행위와도 곧바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20세기 유럽 사회가 저지른 잘못을 두고 19세기 사람인 바그너를 불러내 탓하는 일이 바르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또 알고 보면 바그너의 정치성향은 평면적이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바그너는 무정부주의자, 위험한 혁명가 등으로 불렸습니다. 푸르동, 바쿠닌 등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어울리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바그너는 본디 '좌파'였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좌파 지식인들과 독일민주공화국 바그너 학자들은 바그너를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예언가'로 선언하기도 했지요. '바그너=히틀러'라는 편견이 널리 퍼진 요즘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술가나 예술 작품 자체가 아니라 예술가 및 작품을 둘러싼 담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화평론가 이택광 선생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와 관련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바그너에게 책임을 묻는 그 행위를 확대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거론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야한다. 말하자면 나치에게 책임을 묻는 행위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행하는 만행에 대한 책임을 묻는 행위와 함께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책임을 묻는다'는 윤리적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당성이다.

유대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이택광 선생이 지적한 바로 그 문제를 두고 때때로 이스라엘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곤 합니다. 또한 바렌보임은 서동시집 오케스트라(West-Eastern Divan Orchestra)를 만들어 이끄는 등 음악으로 중동 평화에 이바지하고 노벨 평화상 후보에까지 올랐으며, 역사상 가장 자주 바그너 음악을 지휘했고, 텔아비브에서 처음으로 바그너 음악을 지휘하기도 했지요. 아직도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 오페라 전막이 공연된 일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그너 음악 일부가 공연된 일은 종종 있었고, 지난해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후손이 지휘하는 이스라엘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지크프리트 목가》를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2010년 11월에는 이스라엘에 바그너 협회가 생기고 법무부 허가까지 받았다네요.

▶ 음유시인 기사와 성배수호 기사

이번에 경기필이 공연하는 작품은 모두 기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이번 연주회에서 음유시인 기사가 나오는 두 작품을 1부에 연주하고, 성배 수호 기사가 나오는 두 작품을 2부에 연주합니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와 《탄호이저》는 둘 다 노래자랑 이야기입니다. 노래하는 기사가 나오고, 우승자는 신부를 얻게 된다는 설정도 비슷해요. 《파르지팔》과 《로엔그린》은 주인공이 성배 수호 기사라는 대목이 닮았습니다. 로엔그린이 파르지팔 후계자이기도 하지요.

▶ 기사 이야기, 음유시인, 그리고 게르만 전설

옛날부터 유럽에는 기사들의 모험을 그린 전설이 많았고, 기사들이 직접 음유시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지요. 12~14세기 독일-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던 기사 출신 음유시인을 민네징어(Minnesinger)라고 합니다.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에 나오는 탄호이저, 볼프람 폰 에셴바흐,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 등은 실존했던 민네징어입니다. '민네'(Minne)는 사랑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 사랑이란 주로 정신적인 사랑을 뜻했습니다. 『게르만 신화 · 바그너 · 히틀러』를 쓴 안인희 선생은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원래 기사는 봉건 군주의 신하였지만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면서 기독교 기사, 혹은 신의 기사로 불렸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 기독교도로서의 미덕은 헌신과 체념, 그리고 많은 경우 금욕적인 순결이었다. 십자군 전쟁 동안 기사들은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국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한동안 전쟁이 거의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이럴 경우 정상적이고 평화로운 결혼 생활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떤 기사들은 결혼을 포기하고 수도사처럼 생활하기도 했다. 그들은 신분이 고귀한 부인, 대개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군주의 부인을 사모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은 실질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징적이고 정신적인 사랑이었다. […] 기사에게 어울리는 사랑은 바로 이런 높은 사랑이고, 그것은 성모 숭배와 여러 가지로 닮은 점이 있다. 이런 높은 사랑의 전통으로부터 여성에게 깍듯한 기사도 전통이 생겨난 것이다.

오페라 《탄호이저》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실존 인물이 나오기도 하지만, 실제 있었던 일보다는 초현실적인 전설이 작품에 더 많이 들어가 있지요. 탄호이저는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교황 앞에서 뉘우친 일이 있는 사람인데,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에서는 교황이 '내 지팡이에 새싹이 돋지 않으면 그대는 용서받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탄호이저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지팡이에 참말로 새싹이 돋아버립니다. 더 자세한 줄거리를 이 글에서 소개하지는 않을게요.

민네징어가 12~14세기에 활동했다면, 14~16세기에는 마이스터징어(Meistersinger)라 불리는 음유시인이 활동했습니다. 마이스터징어는 대개 귀족이 아니라 장인 길드(guild)에서 활동한 평민 계층이었지요. 바그너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에 나오는 한스 작스(Hans Sachs)는 실존했던 마이스터징어입니다. 구두장이이기도 했고요.

경기필 공연에서는 '마이스터징어'라는 낯선 말을 '명가수'로 옮겼습니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기사인 '발터 폰 슈톨칭'이 마이스터징어에 도전하는 이야기인데, 바그너는 이 이야기에 빗대어 자신의 예술관을 드러내고 독일 예술을 찬양했습니다.

여기에는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토벤이 고전주의 음악 양식을 완성하고 낭만주의 시대를 열어젖힌 뒤로, 베토벤이 남긴 음악 유산을 정당하게 계승한 작곡가가 누구냐를 놓고 담론 투쟁이 일어납니다. 바그너를 중심으로 하는 파벌과 브람스 · 한슬리크를 중심으로 하는 파벌이 격렬한 투쟁을 벌였고, 그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이를테면 '수준 높은 애호가는 실내악을 듣는다'라는 속설은 본디 바그너 진영이 진보적이라는 주장에 대항해 브람스-한슬리크 진영에서 내놓은 논리였지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 옛 규칙을 고집스럽게 떠받드는 인물인 '직스투스 베크메서'는 바그너가 브람스-한슬리크 진영, 더 정확히는 한슬리크(Eduard Hanslick)를 비꼬려고 꾸며낸 인물입니다. 바그너는 대본을 쓸 때 '한스 리히'(Hans Lich)라는 이름을 썼다가 너무 노골적이라서 '베크메서'로 바꿨다네요. 한슬리크는 당시 이름을 떨치던 음악학자이자 평론가로 바그너와는 사이가 매우 나빴지요. 베크메서와 대비되는 두 사람, 즉 새로운 시도를 망설이지 않는 발터 폰 슈톨칭과 '온고지신' 원칙을 가장 훌륭하게 실천하는 진정한 명인 한스 작스는 바그너 자신을 나타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성배와 현자의 돌

바그네리안이 생겨나는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설정이 주는 매력을 중요하게 꼽을 수 있을 듯합니다. 이번 경기필 연주회 포스터를 보고 사람들이 '게임 포스터 같다'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바그너 작품이나 요즘 유행하는 롤플레잉 게임(Role-playing game)이나 모두 신화와 마법의 세계를 그리거든요. 바그너 작품에 나오는 고유명사를 인터넷 검색해 보면 게임 관련 글이 더 많이 뜨기도 합니다.

《파르지팔》은 아서(Arthur) 왕을 따르던 '원탁의 기사'들이 성배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합니다. 명검 '엑스칼리버'와 마법사 '멀린'이 나오는 바로 그 전설이지요. 가웨인(Gawain), 랜슬롯(Lancelot), 퍼시벌(Percival), 트리스트람(Tristram), 갤러해드(Galahad) 등이 원탁의 기사로 유명하고요. 이 가운데 성배를 찾는 데 성공했던 기사는 퍼시벌, 달리 쓰면 파르지팔입니다.

퍼시벌(파르지팔)이 성배를 찾았다는 이야기는 그냥 전설이고, 실제로는 십자군 전쟁 때 템플기사단(Templar)이 찾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템플기사단이 십자군 전쟁에 참전할 때 단원 수는 명분과 어울리지 않게 9명뿐이었고, 사실은 단원들이 솔로몬 성전 터에 천막을 치고 10년 넘게 발굴·탐사 작업을 벌였다고 합니다. 거기서 뭘 찾아내거나 배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돌아와서 갑자기 큰돈을 벌고 어마어마한 권력을 거머쥐었습니다. 화폐를 발명한 사람들이 바로 템플기사단이기도 하지요.

그랬다가 갑자기 망했습니다. 템플기사단에 큰 빚을 진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템플 기사단을 이단으로 몰아 숙청해 버렸지요. 이 사건은 상식에 한참이나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미국 대통령이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해체하고 주요 인물을 국가반역죄로 처벌하는 일과 비슷하거든요. (FRB는 민간단체이면서도 달러 화폐를 독점 발행할 수 있는 엄청난 권리를 가지고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대통령이라도 함부로 할 수 있는 단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템플기사단 숙청 사건과 관련해 수많은 음모론이 생겨났습니다.

중세 기사이자 음유시인이었던 볼프람 폰 에셴바흐(Wolfram von Eschenbach)는 『파르치팔』(Parzival)이라는 서사시를 썼습니다. 바그너는 이 작품을 중요하게 참고해서 《파르지팔》(Parsifal)을 썼습니다. 볼프람을 《탄호이저》에 등장인물로 쓰기도 했고요. (에셴바흐는 성이 아니라 출신지입니다. 중세시대 사람이라 성이 없어요.)

『신의 지문』 등을 쓴 작가 그레이엄 핸콕은 볼프람이 템플기사단원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학술적으로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는 주장인데,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볼프람이 『파르치팔』을 쓰기 시작한 때는 십자군이 살라딘 군대에 패하여 예루살렘 왕국이 함락된 직후이며, 『파르치팔』에 묘사된 배경은 아서 왕 시대가 아닌 십자군 원정 당시와 맞아떨어진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 그레이엄 핸콕은 『파르치팔』에 묘사된 지리는 성궤가 숨겨진 위치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본격적인 음모론입니다. 볼프람은 성배가 돌(石)이라 했습니다. 음모론자들은 성배가 돌과 관련 있는 지식이며, 그 지식은 영생 또는 영혼 전이와 같은 초과학적 능력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중세시대에 유행했던 연금술은 불로불사를 가능하게 한다는 '현자의 돌'(elixir)을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고 합니다.

이집트에 피라미드가 세워진 때는 신석기시대였지요. 돌도끼 휘두르던 그때에 현대과학으로도 비밀을 밝히지 못하는 피라미드가 세워질 수 있었던 까닭을 학술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사시대'라고 부르는 옛날, 또는 그보다도 앞선 먼 옛날에 고등문명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배란 그 초고대문명에서 나온 파편이라고요.

음모론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단체 프리메이슨(Freemason)은 본디 '자유석공조합'이라는 뜻이지요. 숙청에서 살아남은 템플기사단원들이 만든 단체가 바로 프리메이슨이라고도 합니다. (프리메이슨은 서울 이태원, 경기도 파주, 그리고 부산에도 지부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노파심에서 덧붙이지만, 음모론에 너무 빠지지는 마시고 재미로만 봐 주세요. 단일세력이 세계를 암중 지배한다는 식의 거대음모론은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기밀문서만 봐도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지요. 중요한 것은 바그너가 《파르지팔》에서 나타낸 상상의 세계와 철학적 메시지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바그너는 1872년 베를린에서 프리메이슨 가입 신청을 했다가 "은근한 압력"을 받고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 뒤에 《파르지팔》을 썼지요. 바그너는 《파르지팔》에 나오는 성배기사단이 템플기사단과 복장이 비슷하다고도 했습니다. 바그너의 장인이었던 리스트는 1841년 프리메이슨 프랑크푸르트 지부에 가입했고, 1870년 부다페스트 지부에서 프리메이슨 3도 회원(Master)이 되었습니다. 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이름난 음악가 가운데 상당수가 적어도 한때나마 프리메이슨 또는 관련 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바그너는 성배가 '왕의 피'를 뜻하는 "상 레알"(Sang Réal)에서 온 말이라 했습니다. 영화 《다빈치 코드》 또는 원작 소설을 보면 비슷한 얘기가 나오지요? 다만, 바그너는 '왕의 피'를 혈통 개념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파르지팔》을 보면 암포르타스 왕이 성창(롱기누스의 창)에 찔려서 피를 흘리는 얘기가 나오는 정도이고, 수정으로 된 잔(Kristallschale)이 성배로 나옵니다. 앗, 그러고 보니 수정은 광물, 그러니까 돌이지요!

《로엔그린》은 《파르지팔》 이후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로엔그린은 파르지팔의 뒤를 이어 성배수호기사를 이끌게 되는데,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은 로엔그린이 몬살바트 성을 떠나 활동하는 이야기입니다. 로엔그린은 볼프람 폰 에셴바흐가 쓴 서사시 『파르치팔』(Parzival)에 처음 나오는 이름이며, 원작에서는 '로에란그린'(Loherangrin)이었다가 13세기 후반에 전해진 판본에서 로엔그린(Lohengrin)으로 바뀌었습니다.

▶ 파르지팔의 고통과 깨달음에 대하여

《파르지팔》에는 이런 계시가 나옵니다. "자비심으로 깨달으리라, 순수한 바보여"(durch Mitleid wissend, der reine Tor).

이 말은 《파르지팔》에서 바그너가 나타내고자 한 철학적 메시지를 대표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철학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래서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하시는 이진 선생이 쓴 글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를 빌려 올까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der doch alles weiss)' 구르네만츠도, 윤회로 영원히 반복되는 세월동안 무수한 일들을 보아온 쿤드리도(denn nie lügt Kundry, doch sah sie viel), 성스러운 자 성배왕 티투렐도, 직접 계시를 들은 암포르타스도, 성스러움의 이면에서 사악한 마법을 알아낸 클링조어도 그 앎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니 "너 정말 그냥 바보일 뿐이로구나!"라는 말을 할 때, 구르네만츠는 사실 자신도 모르는 맥락에서 진실을 말한 것이 된다.

"순수한 바보"만이 깨달음을 얻어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까닭은 지식이 깨달음을 방해하기 때문이라네요. 지식이 아니라 자비심(Mitleid)으로 깨달아야 하지요. 자비심을 뜻하는 독일어 "Mitleid"는 함께(Mit) 고통받는다(leiden)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남의 고통을 그저 아는 일과 그것을 함께 느끼는 일은 다릅니다.

그 좋은 예가 될 '책상 살인자(Schreibtischmörder)'라는 말이 있다. 나치의 경험이 만들어 낸 이 단어는 매사에 얌전하고 규정과 관습에 따라 모범적으로 살는 듯 '정상적으로' 보이는 인간이 거리낌없이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아이러니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 '남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평범한 삶을 위한 안전핀이 된다.

반면, 남의 고통을 느끼는 것 즉 자비심은 그 자체가 일상을 벗어나는 경험이자 실천이다. 자비심은 함께 고통을 겪는 삶으로,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보살행'으로 연결된다. 필자의 부족한 이해력의 한계 안에서나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참된 자비심(Mit-leid)는 곧 보살행(mit-leiden)이다.

이진 선생은 바그너가 영향받았던 쇼펜하우어 철학과 불교 사상을 아우르며, '함께 고통받는' 일에서 그치지 말고 '함께 기뻐하는'(Mit-Freude)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바그너가 음악으로 나타내고자 한 진정한 철학적 메시지라고 말합니다.

보살은 일체중생을 구제하려고 열반에 들지 않지만, 역설적이게도 실제로 보살에 의해 구제되는 중생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각자는 (자신 안에서 불성을 깨닫는 것을 통해) 각자를 구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행은 이러한 의미에서 보살의 '자기' 수행과 동일할 것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요, 살며 살게하라(Live and let live)는 지혜이다.

그리고 이럴 때, 고통받는 자에게 내미는 손길은 더이상 '함께 슬퍼하는 것도 함께 고통을 겪는 것도 Mit-Leid(en)'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차라리 "함께 기뻐한다 Mit-Freude"는 말로 비로소 제대로 전달된다.

[…] 어리석음과 폭력이 반복되는 잔인한 현실을 함께 바라보면서도 "만인은 만인에 대한 신(神)(homo homini deus)"이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으니 바로 스피노자다. 고통받는 이들을 더 이상 동정하지 말라고, 동정이 아닌 사랑을 외친 자가 있으니 니체다. 어쩌면 고통받는(leidend) 신(神) 디오니소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삶의 필연적인 수동성, 그에 따르는 고난, 절망과 슬픔의 정서을 바탕에 깔고 시작한다. 그렇지만 유한한 존재로 태어난 인간은 수동적인 체험 속에서도 자신 안의 신적 본성을 발견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어 이로써 점차 자유로워지며(스피노자), 오히려 가장 쓰디쓴 운명까지 모든 수동적인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운명에 대한 사랑, amor fati)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며(니체), 갈기갈기 찢겨졌던 신은 죽음을 딛고 부활한다(디오니소스).

[…]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심취해있던 1858년 10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에 보낸 한 편지를 보면 자신의 본성 그리고 예술적 성취의 근원이 연민(Mitleid)임을 고백하면서도 사랑 속에서 너무도 어렵게 얻어지는 기쁨(Mit-Freude)은 그에 대한 단순한 보완 이상이라고 적고 있음이 흥미롭다.

'함께 기뻐함'은 사랑으로 얻을 수 있는 기쁨이로군요. 이 대목에서 경기필이 지난 3월에 공연했던 말러 교향곡 3번을 떠올려도 좋지 않을까요?


― 티켓 예매 ―

예술의 전당 SACTicket
http://www.sacticket.co.kr/home/play/play_view.jsp?seq=12176

인터파크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S0001888

예스24
http://ticket.yes24.com/Home/Perf/PerfDetailInfo.aspx?IdPerf=11960

옥션티켓
http://ticket.auction.co.kr/Home/Perf/PerfDetailInfo.aspx?IdPerf=15320

2012년 1월 6일 금요일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바그너의 후예들이 들려주는 어른을 위한 동화》 (지휘: 구자범)

《바그너의 후예들이 들려주는 어른을 위한 동화》

  • 2012년 1월 14일 토요일 저녁 8시
  • 경기도문화의전당 행복한대극장
  • 중학생 이상 입장가 (만18세 이상 관람 권장)
  • 입장권: A석 3만원 / B석 2만원

프로그램

  • 훔퍼딩크 ―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 모음곡
  • 쳄린스키 ― 교향시 《인어공주》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예술감독: 구자범)는 《바그너의 후예들이 들려주는 어른을 위한 동화》 연주회를 1월 14일 토요일 8시 경기도문화의전당 행복한대극장에서 개최한다.

동화를 소재로 한 음악 작품이라면 자칫 작은 편성에 아기자기한 음악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이번에 연주하는 훔퍼딩크 《헨젤과 그레텔》 모음곡과 쳄린스키 교향시 《인어공주》는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거대한 스케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대편성 오케스트라, 현대적인 음색, 거대한 스케일로 만나는 어른을 위한 판타지!

쳄린스키와 훔퍼딩크는 바그너의 후예라 할 수 있고, 따라서 바그너에게 영향받은 후기낭만주의 음악 양식이 두 작품에 두드러진다. 그 가운데 중요한 특징으로는 먼저 거대한 규모를 꼽을 수 있다. 특히 쳄린스키 《인어공주》는 말러 교향곡과 맞먹는 대편성 작품으로 이 곡을 연주하려면 트롬본 4대, 호른은 최소 6대 등 100명이 넘는 연주자가 필요하다.

대편성 오케스트라는 거대한 다이내믹 레인지(dynamic range)와 극적 효과를 낳았고, 여기에 현대적인 관현악법이 더해져 현대적인 음색을 낳았다. 이로써 음악이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확장되었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작품들은 그만큼 연주하기 쉽지 않다. 특히 쳄린스키 《인어공주》는 그동안 국내에서 연주된 공식 기록이 단 두 차례밖에 없을 만큼 국내에서는 잘 연주되지 않는 작품이다.

후기낭만주의에 해당하는 두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반음계적 화성을 꼽을 수 있다. 극(drama)에 갈등과 해결 및 기승전결 구조가 있는 것처럼, 조성음악은 ‘긴장과 이완’을 근본 원리로 삼는다. 불협화음은 긴장을 낳고, 협화음은 이완을 낳으며, 불협화음을 쓰려면 그에 앞서 ‘예비’를 해야 하고, 불협화음을 쓰고 난 뒤에는 안정된 협화음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서양음악은 '더 많은 긴장'을 음악에 담아내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모차르트보다 베토벤이, 베토벤보다 바그너 음악이 더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추세는 바그너에 이르러 역사적 전환점을 맞게 된다. 긴장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음악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조성이 사실상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쇤베르크는 훗날 무조음악을 내놓았고, 쳄린스키와 훔퍼딩크는 바그너 음악 양식을 발전시켜 작품에 담았다.

구자범 지휘자가 취임한 뒤로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그동안 국내에서 많이 연주되지 못했던 명곡들을 선보이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 《바그너의 후예들이 들려주는 어른을 위한 동화》 역시 이러한 의도로 기획되었다. 동화적인 판타지, 후기낭만주의 음악 양식, 현대적인 관현악법에 힘입은 화려한 음색, 그리고 구자범 지휘자의 탁월한 해석이 만나는 이번 공연은 관객에게 커다란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훔퍼딩크,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 모음곡

Engelbert Humperdinck, Suit aus der Oper »Hänsel und Gretel«

훔퍼딩크(Engelbert Humperdinck, 1854~1921)는 바그너에게 큰 영향을 받은 작곡가로 바이로이트에서 《파르지팔》 공연을 돕고 바그너 아들 지크프리트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다.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은 그림 형제가 수집하여 출판한 『그림 동화』를 바탕으로 하는 훔퍼딩크의 대표작으로, 훔퍼딩크의 누이인 아델하이트 베테(Adelheid Wette)가 대본을 썼다. 라이트모티프 기법과 반음계적 화성 등 바그너에게 영향 받은 작곡 기법이 나타나며, 바그너의 음악적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작곡가이지 지휘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초연을 지휘했다. 이번에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곡은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을 바탕으로 하는 모음곡이다.

쳄린스키, 교향시 《인어공주》

Alexander Zemlinsky, »Die Seejungfrau«

쳄린스키(Alexander Zemlinsky, 1871-1942)는 말러, 쇤베르크 등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이른바 '벨 에포크'(belle époque · 황금시대)를 살았던 마지막 낭만주의자라 할 수 있다. 쇤베르크와 상당한 친분이 있었지만 끝까지 조성음악을 포기하지 않은 쳄린스키는 반음계적 화성과 화려한 관현악법 등 바그너 영향이 짙은 후기 낭만주의 음악 어법을 작품에 담았다. 《인어공주》(Die Seejungfrau)는 안데르센 동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나타나는 명랑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고 원작 느낌에 좀 더 가깝다. 안데르센 동화는 알고 보면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세계만이 아닌 각박한 현실 또한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 이것은 안데르센의 불행한 삶과 시대의 어두운 면이 투영된 결과이며, 또 어쩌면 쳄린스키가 사랑했던 여인 알마 쉰들러를 구스타프 말러에게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고통이 투영된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지휘 : 구자범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 후 동 대학원 철학과 재학 중 도독
독일 만하임 음대 대학원 지휘과 졸업
독일 하겐 시립 오페라 극장, 다름슈타트 국립 오페라 극장 지휘자
하노버 국립 오페라 극장 수석 지휘자
광주 시립교향악단 지휘자
현,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 티켓 예매 ―

인터파크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11018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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