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0일 월요일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바그너의 후예들이 들려주는 어른을 위한 동화》 리뷰

※ 경기도문화의전당이 발간하는 월간지 『예술과 만남』에 보낸 원고입니다.
※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 http://g-phil.kr/?p=797

'이야기'가 있는 연주회… 극적 효과와 심리적 표현 돋보여

구자범 지휘자는 '바그너의 후예들이 들려주는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연주회 제목에 걸맞은 '이야기'를 준비했다. 바로 음악과 어우러지는 자막이다. 그 가운데 《인어공주》는 이 곡을 처음 듣는 사람도 쉽게 음악을 즐길 수 있게끔 자막을 더욱 자세하게 만들었다. 쳄린스키는 이 작품에 표제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날 연주회 때 상영된 자막은 구자범 지휘자가 작품을 꼼꼼하게 분석해서 자신의 해석을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자막은 악보 이곳저곳에서 찾을 수 있는 단서를 바탕으로 만들었으므로 작위적으로 말을 갖다 붙였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악보에는 "구조 요청하듯이"(wie hilferufend)라는 지시어가 나온다(1악장 마디 303). 왕자가 '사람 살려'라고 외치는 대목이라는 뜻이다. 물론, 배가 통째로 가라앉은 마당에 왕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구조 요청할 수도 있지 않으냐고 반론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악보를 좀 더 살펴보면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사람 살려' 음형이 나오고 바로 이어서 인어공주가 헤엄쳐 가는 듯한 음형이 이어진다. 둘째, '사람 살려' 음형은 두 번 나오며, 두 번째 나올 때는 소리가 좀 더 가까워진다. 인어공주가 다가갔다는 뜻이다. 셋째, '사람 살려' 음형이 두 번 나온 뒤에는 조금씩 음악이 조용해지다가 얼마 안 가서 '사랑 노래'가 이어진다.

이때 '사람 살려' 음형에는 이른바 '음색 원근법'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비슷한 음량으로 음색만을 바꾸어 거리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곡 기법으로, 말러가 교향곡 5번 1악장 마지막에 사용한 바 있다. 쳄린스키는 '사람 살려' 음형을 처음에는 오보에로, 나중에는 클라리넷으로 써서 점점 가까워지는 듯한 효과를 주었다. 그리고 구자범 지휘자는 여기에 극적 효과를 하나 더했다. 두 번째 '사람 살려'를 좀 더 느리고 여리게 다스려 왕자가 지쳐서 정신을 잃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것이다.

서스펜스 영화 같은 심리 표현 담아낸 구자범 지휘자의 탁월한 해석

구자범과 경기필이 들려준 '이야기'가 가장 멋졌던 곳은 아무래도 '폭풍' 등 긴장감이 높아지는 대목이겠지만, 구자범이 보여준 해석이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3악장에서 자막이 '슬픔'이라고 나갔던 대목, 마디 51이었다. 이곳에 나오는 선율(모티프)은 앞서 여러 차례 나왔던 것이고, 기악 음악을 이루는 일반적인 원리를 생각하면 이곳에서도 앞서와 비슷한 템포로 구조적 통일성을 주어야 할 듯하다. 실제로 내가 여태껏 들어본 연주에서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 제임스 저드, 안드레이 보레이코 등이 모두 그렇게 했다.

그러나 구자범은 달랐다. 템포를 갑자기 뚝 떨어트리고 부드럽고 가녀리게 다스려 순음악적인 '구조'와 '통일성'보다는 심리적 표현을 강조했다. 나는 구자범이 옳다고 생각한다. 악보를 보면 이 대목에 "매우 부드럽게, 회한을 담아"(sehr zart, wehmütig)라는 지시어가 있고, 3악장 첫머리에는 연주에 고통을 가득 담으라는 지시어(Sehr gedehnt, mit schmerzvollem Ausdruck)가 있어 '슬픔' 대목과는 성격이 달라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뜻을 구자범-경기필만큼 잘 살린 연주를 나는 들어본 일이 없다.

심리적 표현을 말하자면 자막이 '칼을 들고 주저하는 인어공주'라고 나갔던 대목(3악장 마디 138)을 빼놓을 수 없다. 반음계적 선율과 불안하게 흐르는 화음으로 긴장감을 쌓아 가는 동안 앞서 나왔던 선율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고, 마침내 긴장감이 폭발하는 듯하다가 멈추고 다시 이어지는 극적 연출은 히치콕 감독이 만든 서스펜스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날 경기필이 들려준 연주는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끔 했다.

첫 곡으로 연주된 훔퍼딩크 《헨젤과 그레텔》 모음곡 또한 말이 필요 없을 만큼 훌륭했다. 구자범은 본디 오페라 지휘자이며, 오페라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서 그 솜씨가 매우 잘 드러났다. 곳곳에서 단원들 얼굴에 웃음이 번졌고, 지휘자는 행복해하는 듯했다. 그 분위기가 객석으로 퍼졌음은 말할 나위 없다.

마녀의 오븐이 폭발하는 대목에 쓰인 악기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 듯하여 설명을 덧붙인다. 이것은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특별 제작한 악기이다. 악보에는 선더머신(Donnermaschine; 독일어)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것은 악기 이름이라기보다 천둥소리를 내는 기계장치를 통칭하는 말이다. 경기필이 만든 이 악기와 가장 비슷한 것은 선더시트(thunder sheet)라는 악기로, 경기필은 천둥소리가 아닌 폭발음을 내고자 재질과 구조를 조금 달리 했다. 물론, 폭발하는 대목에는 큰북 등 다른 타악기가 힘을 합쳐 크게 '한 방'을 터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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