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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5일 금요일

필립 글래스와 미니멀리즘 음악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듣고 싶은 음악도 많고 어쭙잖게 주워들은 지식도 제법(?) 있던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읽던 누나가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곡을 아느냐고 제게 묻더군요. 저는 그 곡이 '시타르'라는 인도 악기를 록 음악 역사상 최초로 도입한 곡이며, 이후 '롤링스톤스'라는 밴드가 시타르를 아주 멋지게 쓴 음악을 발표했고, 그 곡이 유명 TV 드라마에 쓰였다는 사실을 신이 나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1960년대 록음악, 반전운동, 히피 문화, 인도 명상의 유행 등은 같은 맥락을 공유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롤링스톤스의 〈Paint It Black〉이라는 곡이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하는 미국 드라마 〈머나먼 정글〉에서 사용된 것도 우연이 아니더군요. 음악학자 이희경은 이와 관련해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반전운동과 민권운동의 바람이 거세게 일던 1960년대 미국에서 젊은이들의 반문화 운동이 절정을 이룬 행사다. 1969년 8월 15일,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첫날 밤. 인도의 전통 현악기인 시타르를 연주하는 샹카르(Ravi Shankar)가 다섯 번째 무대에 올랐다. […] 샹카르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비틀즈의 멤버 해리슨(George Harrison)에게 시타르를 가르친 스승으로, 이미 1967년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관중 수만 명을 사로잡았다."

딴 얘기를 조금 하자면, 인용한 책은 최근에 출판된 『메트로폴리스의 소리들』입니다. 여유가 있으면 이 책을 정독한 다음 서평을 쓰고 싶지만, 통영국제음악제 준비로 정신이 없어서 필요한 부분만 읽고 조금 인용했습니다. 이희경 선생은 저 유명한 도널드 J. 그라우트의 『서양음악사』 번역에 참여하신 음악학자이며, 『리게티, 횡단의 음악』 · 『작곡가 강석희와의 대화』 등의 저자이자 『진은숙, 미래의 악보를 그리다』를 번역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이분이 쓴 책이라면 믿고 구입하실 것을 추천해요.

한편, 미국 작곡가 필립 글래스는 1960년대에 파리에서 나디아 불랑제를 사사하면서 라비 샹카르 음악을 처음 접하고, 그것을 계기로 인도 음악에 빠져들었습니다. 인도와 티베트 등을 여행하면서 요가와 명상을 배우기도 했다네요.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짧은 음형이 조금씩 바뀌면서 되풀이되는 곡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라 몬테 영, 테리 라일리, 스티브 라이히 등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아이디어를 사용한 작품을 내놓았고, 이것을 흔히 '미니멀리즘' 음악이라 부릅니다.

미니멀리즘 음악은 인도 음악의 명상적이고 때로는 환각적인 성격을 서양음악 테두리 안에서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무조음악이 대세이던 주류 현대음악에 미니멀리즘이 대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성이 분명히 있으면서도 낭만주의 시대 기능화성과 목표지향적인 패러다임을 비껴갔기 때문이지요. 현대음악은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음악이 이렇게 생겨났고, 대중음악에서 미니멀리즘을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필립 글래스는 록 음악가 데이비드 보위와 브라이언 이노의 음악에서 주요 음형을 따다가 교향곡을 쓰기도 했지요.

헨릭 구레츠키, 아르보 패르트 등 어마어마한 대중적 성공을 거둔 현대음악 작곡가도 나타났고, 이들의 주요 작품도 미니멀리즘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 올해 통영국제음악제와 나란히 열리는 ISCM 세계현대음악제에서 연주될 곡 가운데 이를테면 미시 마촐리 합창곡 〈Vesper Sparrow〉(저녁 참새) 또한 미니멀리즘 음악이라 할 수 있어요. 이 곡은 참새들이 노래하는 애니메이션이 눈에 보일 듯 재미난 작품이라 현대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 번 들으면 홀딱 반할 거라고 장담합니다.

무엇보다 이번 통영국제음악제에서는 필립 글래스 오페라 《미녀와 야수》가 공연됩니다. 그리고 작곡가 필립 글래스를 직접 만나볼 수 있는 "필립 글래스: 저녁의 대화" 공연에서는 필립 글래스가 직접 연주하는 필립 글래스 피아노 음악과 더불어 통영국제음악재단 플로리안 리임 대표가 필립 글래스와 대화를 나눌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2011년 9월 23일 금요일

아르프, »Mémoire (추억)« für Flöte und Orchester

※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원본 출처: http://g-phil.kr/?p=342


글: 에마뉘엘 제라르 (김원철 옮김)

이 작품은 클라우스 아르프가 플루트 연주자 장클로드 제라르(Jean-Claude Jérard)를 위해 작곡한 네 번째 곡이다. 앞서 작곡한 곡으로는 플루트 독주와 녹음기 두 대를 위한 《토마토 샐러드》(Tomatensalat), 플루트, 하프, 타악기와 무용수를 위한 《사중주》(Quartett), 플루트 여섯 대를 위한 《현미경》(Mikroskopie)이 있다.

음악은 세 음짜리 세포가 플루트로 나타난 뒤에 악기를 옮겨 가며 진화한다. 이 모티프는 《토마토 샐러드》에서 되풀이되던 가락을 따온 것이며, 이것은 마치 기억이 떠오르고, 재빨리 잡아채이고, 넘겨져 회상되는 듯하다. 이러한 에코 현상, 다시 말해 자꾸만 서두르는 듯한 리듬은 조금씩 소리의 겉면을 이루어 악기군을 옮겨 다닌다.

두 번째 모티프인 짤막한 16분음 상행 음형이 현악기로 나타나고, 뒤이어 바순과 호른이 응답한다. 플루트가 앙상블 위로 솟아오르고, 모티프 사이를 옮겨 다니고, 압도하고, 앞을 예고한다. 절정에 이르면 새로운 모티프가 나타난다. 점8분음표―16분음표 하행 음형이 호른으로 나오고, 현악기 리듬은 그동안 조금씩 늘어나고 느려진다. 목관악기가 천천히 죽어가고, 플루트는 이러한 변형이 일어날 동안 조용하다. 플루트 가락이 되살아나자마자 리듬은 다시 느슨해진다.

플루트를 반주하는 현악기군과 클라리넷 두 대 소리가 시적인 긴 악구가 끝날 때까지 들린다. 이 소리마저 사그라지면 오보에 둘과 클라리넷 하나가 해결되지 못한 a단조 화음으로 남는다. 플루트 독주는 처음 두 마디를 뒤집은 음형과 함께 끝난다. 마치 기억이 작업하고, 유지되고, 저장되고, 진화하고, 쇠퇴했다가 때때로 다시 깨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곡은 갑자기 멈춘다. 죽음이 어루만지는 순간 생각의 끈이 끊어지는 것처럼.

작곡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작품 속 기억은 개인적인 회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추억을 일깨우도록 의도한 자극이며, 이 자극은 플루트가 일으키고 다른 악기로 옮겨가며 더욱 발전합니다." 클라우스 아르프는 함부르크 주립 오페라단에서 있었던 (장클로드 제라르와 아르프 자신의) 공통된 옛일을 암시하며 윙크와 함께 덧붙였다. "알려진 주제선율들이 가리키는 것이 있다면 모두 일부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잘 들어보고, 기억해 보자…

※ 옮긴이 주: 이 글은 음반 속지에 있는 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본디 문단 구분이 없는 글이었으나 옮긴이가 멋대로 문단을 나누었음을 밝힙니다.

☞ 미니멀리즘 음악에 대하여 (글: 서의석)

― 티켓 예매 ―

고양아람누리
http://www.artgy.or.kr/PF/PF0201V.aspx?showid=0000003323

인터파크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MN=Y&GoodsCode=11010067

2009년 11월 6일 금요일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반지성주의로: 김시형의 《Hope of September 09》에 대하여

소노리테 목관5중주단 테마음악회 “프랑스의 목관음악 - 프랑스 6인조 ”

2009년 10월 14일(수) 오후 8시 00분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홀

Flute 장선우, Oboe 조경은, Clarinet 김종철, Bassoon 이지현, Horn 김호동

E. Satie(1866~1925) - Te Veux (나는 너를 원해) for Flute and Piano
G. Auric(1899~1983) - Trio for Oboe, Clarinet and Bassoon
D. Milhaud(1892~1983) - La Chimineé du roi René (The Chimney of King René) Suite for Woodwind Quintet
김시형(1972~) 세계초연 - Hope of September 09 for Woodwind Quintet
F. Poulenc(1899~1963) - Sextour pour piano, flute, hautbois, clarinett, bassoon et cor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연예술창작기금지원사업으로 기획한 국민평가단 평가 자료를 겸하는 글이며, 평가서 항목에 맞추어 썼음을 밝힙니다.

▶ 공연작품의 예술적 수월성

소노리테 목관오중주단 단원은 부천·인천·원주시향 단원이기도 하다. 저마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음이 이 사실에서 드러나지만, 그것만으로 좋은 실내악 앙상블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노리테 목관오중주단은 이미 한두 번 맞춰보고는 이를 수 없는 수준에 올랐음을 이날 연주회에서 보여주었다. 유럽 일류 악단에 비할 바는 아니나 국내급 연주자들이 길지 않은 시간에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한계치에 가까운 실력이었다.

▶ 공연계획 실행의 충실성

보도자료에는 단원 개개인 소개만 있을 뿐 오중주단 소개가 없다. 홈페이지도 없는 듯하다. 이 악단이 만들어진 지 그다지 오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정황 증거라 하겠는데, 실내악으로 돈벌이하기 어려운 현실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럽 일류 악단에는 있으나 소노리테 목관오중주단에는 없는 것은 역사와 전통,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악단만의 색깔이다.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것은 돈과 시간과 노력이다.

▶ 공연성과 및 해당분야 발전에의 기여도

실내악이 활성화되면 오케스트라 수준까지 함께 올라가는 이중 효과가 있다. 또 단원들이 시향 단원 간판을 밑천으로 사교육 돈벌이에 나설 시간을 아껴서 실내악 앙상블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실내악을 향한 열정과 목표의식이 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예술위원회가 공연창작기금을 지원할 가치가 높다.

▶ 총평

음악학자 타루스킨(Richard Taruskin)은 프랑스 6인조 음악이 '일상'을 예술적으로 변용시켰다 하여 "라이프스타일 모더니즘"이라 이름 붙였다. 이러한 양식은 낭만주의, 표현주의, 인상주의 등을 반대하고 대안을 찾는 가운데 에릭 사티와 장 콕토를 모범 삼아 나타났으며, 사상적으로 다다이즘 및 초현실주의와도 조금씩 닿아 있다.

음악 밖에서는 제1·2차 세계대전 사이 상대적 안정기이자 영화와 라디오라는 새로운 매체가 나타나고 대중문화가 싹트던 "황금의 20년대"를 배경으로 하며, 비슷한 시기 독일에서도 힌데미트, 바일, 아이슬러, 크셰넥 등이 낭만주의와 표현주의 등을 반대하며 '실용적인' 음악을 추구했다.

음악학자 다누저(H. Danuser)는 이 시기 음악이 미학적으로 고급 예술관과 저급 예술관 사이, 양식적으로 진보적 성향과 복고적 성향 사이에 있다고 보고 "중간음악 mittlere Musik"이라 이름 붙였다.

즉 젊은 작곡가들의 사고는 이중의 부정을 통해 나타났다. 그들은 한편 절대 예술음악의 사상을 부정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다이즘에서 주장되는 "예술의 부정" 또한 부정했다. 이들은 예술작품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한 치도 버린 것이 아니다. 전통으로부터의 의식적인 전향은 서로 서로 모순이 되는 음악적 사고들의 병행 또는 공존을 가능케 했고, 이렇게 나타난 작품은 ― 미학적 가치적도로 판단되지 않고 ― 그때 그때마다 요구된 기능의 충족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 오희숙, 『20세기 음악 I: 역사·미학』 (서울: 심설당, 2006). 400쪽.

김시형의 《Hope of September 09》는 얼핏 들으면 프랑스 6인조 사이에 한 자리 꿰차도 될 만큼 미학적·양식적으로 '라이프스타일 모더니즘' 또는 '프랑스풍 중간음악'과 닮은꼴이었다. 티 나지 않게 미니멀리즘 기법을 쓴 대목이 참신하다 할 수 있겠으나, 정통적인 미니멀리즘 기법이 아니라 모티프를 변화·발전시키는 '전통적' 기법에 미니멀리즘을 자연스럽게 녹여내어 새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끔 하고 있었다. (다만, 악보를 보지 못하고 내 청각 경험만으로 판단하는 까닭에 객관적인 판단이라 자신하기 어렵다. 작곡가와 연락해 악보 파일을 받기로 했는데, 이메일을 보냈다고 하나 내가 받은 것은 없다. 자꾸 보채기 뭣해서 그냥 청각 경험만으로 글을 쓰기로 했다.)

김시형이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에 와서 20세기 초 양식을 되살린 까닭은 무엇일까. '중간음악'은 12음 기법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적 신음악과 담론 투쟁 끝에 패배했다. 그렇다면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미니멀리즘은 포스트모더니즘 음악 양식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김시형의 《Hope of September 09》가 '포스트모던'한가?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적 성향을 전통적 음악 양식 속에 꼭꼭 숨긴 이 작품은 미니멀리즘 기법을 부분적으로 활용했다고 해서 곧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음악으로 분류할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김시형은 아마도 현대음악이 청중과 동떨어진 현실을 고민했을 터이다. 전문가 집단이 고립되어 가는 경향은 바로 1920년대 즈음부터 나타났다 할 수 있으므로 김시형이 이 시기 음악에 주목한 일은 자연스럽다.

시민적 문화의 소멸은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확실하게 음악에서 나타난다. 많은 테크닉적 섬세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공허하게 나아간다. 왜냐하면 현대 음악은 사상이 없고 공동체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공동체를 잃어버린 예술은 그 자신을 잃게 된다.

― 한스 아이슬러(Hans Eisler), Musik und Politik Schrifen 1924~1948, G. Mayer(ed.), Leipzig 1973, 32쪽. 재인용: 오희숙, 『20세기 음악 I: 역사·미학』 (서울: 심설당, 2006). 397쪽.

그러나 김시형이 백화점 진열장에서 상품 끄집어내듯 '중간음악'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을 끄집어 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현실은 1920년대와는 또 다르며, 김시형 작품은 바로 오늘날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보면 《Hope of September 09》는 차라리 반지성주의와 닿아 있다 하겠다. 그리고 어쩌면 반지성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한국사회의 특징을 설명할 수 있는 여러 개념 중에 ‘반지성주의’라는 것이 있다. 지금 목도하고 있는 한국사회와 그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이 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을 것 같다. 물론 anti-intellectualism으로 표기하는 영어를 한국어로 ‘반지식인주의’가 아니라 ‘반지성주의’라고 옮기는 건 이 개념에 담겨 있는 복합적인 의미 때문이다. 반지성주의는 지성과 이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지력으로 사물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철학적 태도를 뜻하는 한편으로, 지식인에 대한 직접적인 반감과 불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서 황우석 사태나 〈디 워〉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한국사회의 특성에 들어맞는 의미는 두 번째 항목일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와 두 번째 항목은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관련성을 갖고 있다. 첫 번째에서 언급된 그 ‘철학적 태도’가 자의반 타의반 두 번째에 제시된 ‘지식인들에 대한 적대감과 불신’을 합리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우려와 경고로서 루카치는 『이성의 파괴』라는 큼직한 책을 썼다. 요즘은 누구도 이 책을 거들떠보지 않지만, 각론의 차원은 그렇다고 쳐도, 이 책에서 제기된 문제는 큰 틀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것이다.

(…)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경제학이나 사회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떤 “향락”의 문제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 반지성주의는 바로 이 향락의 지속을 방해하는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이다. 문제는 이런 분노가 오해와 달리 ‘보수주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 이택광, 〈반지성주의에 대해〉 http://wallflower.egloos.com/1650995 (2009년 11월 6일 읽음.)

예술이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는 화두로 돌아가 보자. 《Hope of September 09》는 전통적 기능화성에 기대지는 않으나 무조음악도 아니어서 대중이 귀로 듣고 그 흐름을 인지하는데 근본적인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대중적'인가? 대중음악이 주류로 뿌리내리고 더 나아가 예술음악이 설 자리를 위협하는 오늘날 김시형의 시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차라리 최우정처럼 대중음악 어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클래식 음악 속에 녹여내며 예술음악이 나아갈 바를 찾아야 옳지 않을까? 음악학자 오희숙은 "'중간'이라는 위치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입장을 보이는 가치 절하적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당시의 음악적 위기에 대한 신세대의 해결 모색으로 본다면 그 의미를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변명은 김시형에게도 마찬가지로 할 수 있는가?

한 가지 더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창작곡을 수용하는 주체는 청중만이 아니며, 그 곡을 연주하는 연주자 또한 중요한 작품 수용자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창작곡은 대중에게 이해받기에 앞서 연주자에게 이해받아야 한다. 그리고 한국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이 아방가르드 음악에 느끼는 거부감은 대중과 그다지 다르다고 말하기 어려울 터이다. 그러나 《Hope of September 09》라면 연주자들의 평가가 대중과 다를 수도 있다. 수동적으로 감상하지 않고 연주를 하는 처지라면 《Hope of September 09》가 제법 흥미로운 작품일 수 있으며, 짐작건대 소노리테 목관오중주단은 이 작품을 연주하면서 즐거웠으리라. 《Hope of September 09》는 대중이 아닌 연주자로 하여금 현대음악을 수용하도록 도와주는 '당의정'으로 가치가 있다 하겠다.

2009년 8월 25일 화요일

2007.07.13. 아르보 패르트 '라멘타테' / 브루크너 교향곡 4번 - 루비모프 / 보레이코 / 서울시향

2007년 7월 13일(금)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Andrey Boreyko
협연자 : Alexeï Lubimov, pf.

Arvo Pärt: Lamentate (37')
Bruckner: Symphony No.4 in E flat Major, “Romantic”(70')



서양음악사에서 1945년 이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새로움에 대한 요구가 강하던 시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전횡 등은 서양 중심의 인류 문명 자체에 대한 처절한 회의와 반성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이전 시대로부터의 철저한 단절이 진보적인 작곡가들의 모토가 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총열주의(Total Serialism)'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음악은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대중과의 괴리가 심했던 측면도 있으며, 음악학자 타루스킨(Richard Taruskin)의 말처럼 "특허청으로 달려가는" 음악은 그 자체가 단절의 대상이 되어버린 아이러니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에 대한 대립적 경향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이며, 그 가운데 미니멀리즘과 '새로운 단순성(Neue Einfachheit)'이 대표적이다. '새로운 단순성' 그룹의 작곡가들은 조성이 해체된 음악에 반대하며 과감히 조성을 다시 사용하여 청중에게 다가가고자 하였으며, 무조 음악의 모토인 '불협화음의 해방'과 대비되는 '협화음의 해방'이라는 말로 역사적 의의를 찾기도 한다.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 1935~)는 '새로운 단순성' 그룹으로 활동하지 않았으면서도 전통 지향적인 음악 양식과 미학관 등을 근거로 림(Wolfgang Rihm)과 함께 이 그룹의 대표적 작곡가로 평가되고 있다.

'새로운 단순성(Neue Einfachheit)'은 영어 표현인 "New Simplicity"와 혼동할 여지가 있는데 후자는 바로 미니멀리즘 음악을 가리키며, 조성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과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독일어 표현과는 구분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패르트의 음악을 후기 미니멀리즘 양식의 일종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최소한으로 절제된 음 소재를 변형, 반복하는 특징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패르트 자신의 용어로는 "종소리 양식(Tintinnabuli-Stil)"이라고도 하며, 단순한 화음과 중세 음악의 선법 구조, 종교적 내면성과 '침묵'의 적극적 활용 등을 특징으로 한다.

<라멘타테 Lamentate>는 2002년 작품으로 패르트 음악의 이러한 특징이 잘 나타나 있어 현대음악치고는 상당히 듣기 쉽다. 또한 이 작품은 러시아 정교의 기도문이 음악의 흐름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진노의 날'이나 '사후심판' 부분에서는 금관 악기와 타악기가 난무하여 너무 오래 이어지는 종교적 고요함이 관객의 수면을 유발하지 않도록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쉬워도 현대음악이라 낯설었던지 관객의 반응은 산만한 편이었다. 패르트의 작품에 담긴 것과 같은 '여백의 미'는 원래 한국이 원조라 하겠으나 삶의 여유를 잃어버린 현대인에게는 빛바랜 감이 있는 듯싶다.

패르트의 '종소리'에는 교회의 풍부한 울림이 제격이겠지만 예술의 전당의 음향은 이날따라 건조하게 느껴졌다. 서울시향의 연주가 다소 뻣뻣하게 들렸던 것은 합주력 부족도 원인이겠으나 연주회장의 음향 특성이 작품과 맞지 않았던 탓이 컸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알렉세이 루비모프(Alexeï Lubimov)의 피아노 연주는 오케스트라의 안개에 묻히지 않고 투명하면서도 몽환적인 울림으로 무대를 감싸며 악곡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데 성공했다. 이는 그랜드 피아노의 악기 특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루비모프의 섬세한 터치가 마법의 힘을 발휘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르보 패르트와 안톤 브루크너를 관통하는 이날 연주회의 키워드는 '종교'다. 그러나 <라멘타테>가 우주 속에 홀로 던져진 패르트의 처절한 고독과 구원에 대한 갈망을 담았다면, 교향곡 4번의 브루크너는 번뇌 끝에 신의 광휘를 찾아냈다. 또는, 적어도 그렇게 착각하고 있다.

브루크너의 신앙의 언어는 파이프 오르간이다. 그는 교회 오르간 연주자였으며 그가 작곡한 관현악곡에도 오르간의 특성이 묻어나온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연주자들에게 재앙으로 다가온다. 오르간의 긴 울림을 표현하느라 관악기 주자들은 하늘 대신 무대가 노래지고, 현악기 주자들은 거대한 울림 속에서 끊임없이 물결치는 파도를 만들어내느라 팔이 빠진다. 그 와중에서도 파이프 오르간의 울림을 재현하느라 엄정한 악기 간 밸런스를 유지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휘자 안드레이 보레이코(Andrey Boreyko)는 그래서인지 독창적인 표현에 매달리기보다는 무난한 해석으로 '오르간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데 주력한 듯하다. 결과는 매우 훌륭했다. 앙상블이 종종 흐트러지는 가운데서도 두터운 화성에 의한 '오르간 사운드'만큼은 내가 이제껏 들어본 국내악단의 브루크너 중 단연 최고였다. 이날따라 금관 악기의 활약이 유난히 돋보였으며, 특히 호른과 트롬본이 몇몇 티 나는 실수를 했음에도 전체적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현악기 또한 국내 악단에 기대할 수 있는 브루크너로는 최상급의 연주였으며, 금관의 강력한 소리에 지지 않고 당당하게 어우러지곤 했다. 그러나 외국 유수 악단과 비교하자면 특히 현이 좀 더 분발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여전히 남는다. 전체적으로 현의 음량이 금관에 약간은 밀리는 듯했으며, 가끔은 금관 소리에 묻혀버리는 일도 있었다. 이를테면 2악장 마디 107에서 제1 바이올린의 스타카토 음형이 호른과 트롬본 소리에 가려서 주선율의 역할을 잃어버린 것이 옥에 티였다.

4악장 마디 358에서는 바이올린이 활 끝으로 연주하도록 지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가늘고 날렵한 데타셰(détaché) 주법을 의도한 것으로 판단되며 실제로 대부분 음반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시향은 레가토 위주로 부드럽게 넘어가 버렸으며, 보잉을 미처 눈여겨보지는 못했으나 활 끝으로 연주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 결과 마치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듯 산만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느낌은 전혀 살지 않았고 단지 무표정하게 지나가는 선율이 되었다.

이날 연주는 꽤 훌륭했지만 연주회장 주변에 소문난 마니아들의 모습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은 유감이다. 정명훈 없는 서울시향은 별 볼 일 없을 것이라는 편견이 그들에게 생긴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그러나 서울시향의 정기연주회는 생각보다 수준이 높으며 또 나날이 발전해가고 있다. 직접 확인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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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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