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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18일 월요일

쳄린스키 《인어공주》와 말러 교향곡 1번 《거인》, 실연을 이겨내는 젊은이의 초상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진에 실은 글입니다.
원문: http://g-phil.kr/?p=1429

▶ 사랑의 아픔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쳄린스키

인어공주는 왜 사람이 되려고 했을까요? 사랑 때문이라면 마녀를 찾아갔을 때 다른 것을 부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안데르센이 쓴 원작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인어공주가 참말로 원했던 것은 영혼이기 때문이랍니다.

구자범 지휘자 선생님은 쳄린스키가 교향시 《인어공주》를 쓰면서 '영혼' 얘기를 음악에 담았다고 생각해요. 쳄린스키는 알마 쉰들러를 짝사랑했지만, 알마는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했죠. 그런데 '알마'(Alma)는 스페인어 또는 옛 이탈리아어로 '영혼'이라는 뜻이래요. 라틴어 '아니마'(anima)에서 온 말이고요.

그러니까 영혼을 갈구하는 인어공주는 알마('영혼')를 사랑했던 쳄린스키 자신과 닮알습니다. 끝내 영혼을 얻게 되는 인어공주처럼, 쳄린스키도 끝내 알마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작품을 썼던 것이지요.

원작에 나오는 영혼 이야기가 잘 기억나지 않으세요? 이참에 진짜 줄거리를 제대로 알아 볼까요?

바닷속 왕국에서 살던 인어공주는 언니들에게 말로만 듣던 물밖 세상을 동경해요. 그리고 15살 생일을 맞아 드디어 물밖으로 나옵니다. 물위에 배가 떠있고 사람들이 춤추고 불꽃놀이도 해요. 사람들 가운데 왕자님이 가장 멋져요. 그런데 밤이 되면서 폭풍이 몰아치고, 왕자님은 물에 빠져 죽어가고, 인어공주가 왕자님을 구해서 바닷가로 데려가요. 그리고 가까운 신전에서 온 아가씨가 나타날 때까지 왕자님을 지켜 봐요. 정신을 잃은 왕자님은 그때까지 인어공주를 보지 못해요.

인어공주는 할머니를 찾아가, 사람들은 물에 빠지지만 않으면 영원히 살 수 있느냐고 여쭈어요. 할머니는 이렇게 말해요. 300년을 사는 인어와 달리 사람은 훨씬 일찍 죽어요. 그런데 인어는 죽으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지만, 사람은 죽으면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살아요.

인어는 왕자를 그리워하고 사람의 영혼을 부러워한 나머지 마녀를 찾아가요. 그리고 인어 꼬리를 사람 다리로 만들어 주는 약을 얻는 대신 혀를 잘라 주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잃어요. 마녀는 이렇게 경고해요. 사람이 되면 다시는 바다로 돌아올 수 없어요. 약을 마시면 다리가 생겨서 누구보다도 멋진 춤을 출 수 있지만, 걸을 때마다 칼에 꿰뚫리는 듯한 고통이 뒤따라요. 영혼을 얻으려면 진실한 사랑을 찾아 입맞춤을 하고, 사랑을 얻고, 그 사람과 결혼해야 해요. 그러면 그 사람의 영혼 일부가 인어공주에게 흘러들어가요. 만약 그 사람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다음날 아침 해뜰 무렵 인어공주는 죽어서 물거품이 돼요.

인어공주는 약을 마시고 다리를 얻어 왕자를 만나요. 왕자는 인어공주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인어공주는 고통을 참고 왕자와 춤춰요. 그러나 왕자의 아버지는 왕자한테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하라고 말해요. 왕자는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지만, 물에 빠졌다가 깨어났을 때 만났던 여자가 그 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바꿔요.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요. 인어공주는 절망에 빠져 동트기를 기다려요. 그때 인어공주의 다섯 언니가 찾아와 이렇게 말해요. 다섯 언니는 마녀를 찾아가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 주고 마법이 깃든 칼을 얻었어요. 인어공주가 그 칼로 왕자를 찔러 죽이고 피를 다리에 적시면 다시 인어가 되어 바다로 돌아갈 수 있어요.

인어공주는 끝내 왕자를 죽이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물거품이 돼요. 그런데 인어공주는 여전히 밝은 햇살을 볼 수 있었어요. 햇살 사이를 투명한 모양으로 떠다니는 공기의 딸들(Luftens Døttre; daughters of air)이 어리둥절해 하는 인어공주에게 이렇게 말해줘요. 인어공주는 영혼을 얻고자 온 마음을 다 바쳐 노력했기 때문에 공기의 딸이 되었어요. 앞으로 300년 동안 착한 일을 하면 영혼을 얻어 하늘나라에 갈 수 있지요. 그리고 착한 아이를 찾을 때마다 영혼을 얻기까지 걸리는 기간이 한 해씩 줄어들고, 나쁜 아이를 만날 때마다 흘려야 하는 눈물 한 방울에 하루씩 기간이 늘어난답니다.

▶ 청년 말러가 좌절을 딛고 일어선 이야기

쳄린스키가 그토록 원했던 '알마'라는 여인은 다름 아닌 말러와 결혼했습니다. 말러는 마흔이 넘어서 꽃다운 알마와 결혼한 행운아였지만, 그런 말러도 쳄린스키 나이 때에는 실연으로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교향곡 1번에는 그런 경험이 녹아 있지요.

구자범 지휘자 선생님께서 어떤 모임에서 말러 교향곡 1번에 관해 강연을 해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쉽게 간추려서 제가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게요. 교향곡 1번은 말러가 직접 가사를 쓴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라는 연가곡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말러는 교향곡 1번 악장마다 표제를 붙였다가 없애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습니다.

제1악장 : 동틀 무렵,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풍경처럼 몸 속 깊은 곳까지 시원해지는 오스트리아의 산과 들이 보입니다. (악보에는 "자연의 소리처럼"이라는 나타냄말이 있습니다.)

뻐꾸기 소리가 들리고, 꽃들이 노래하고, 멀리서 기상나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때 트럼펫이 무대 밖에서 연주합니다. 그리고 좀 있다가 조용히 무대에 입장하지요. 연주에 지각한 사람이 아니니 오해하지는 마세요.)

청년 말러가 나타납니다. 이때 말러의 연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가운데 "아침 들판을 걸었네"에 쓰였던 선율이 나옵니다. 풀잎에 이슬이 반짝이고 새들과 초롱꽃이 "안녕하세요! 아름다운 세상이에요!"하고 인사하는 그곳에서 청년 말러는 사랑을 잃고 홀로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이제 나의 행복이 다시 올까? 아니! 아니! 다시는 내게 행복이 꽃피지 않으리!"

그러나 찬란한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것을 본 말러는 새로운 희망을 얻습니다. 이제 그 여인을 잊을 수 있을 듯합니다. 가슴을 활짝 펴고, 산을 내려가자! 뛰자! 뛰자!

2악장 : 랜틀러(ländler)라는 형식의 춤곡입니다. '땅'을 뜻하는 영어 'land'와 말뿌리가 같지요. 시골 사람들이 춤추며 즐기는 장면입니다. 오늘은 결혼식이 있는 날. 산에서 마을로 내려온 청년 말러는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사내와 혼례를 올리는 모습을 보며 또다시 가슴 아파합니다.

호른 소리와 함께 청년 말러의 추억이 현실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미뉴엣과 짝을 이루는 '트리오'(Trio)입니다. 여기서는 '랜틀러'와 짝이지요. 너무나 아름다운 선율, 사랑에 빠져 행복했던 추억이 절로 떠오르는 음악입니다. 이윽고 호른 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현실이 되돌아옵니다.

3악장 : 청년 말러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더블베이스가 약음기를 끼고 괴상망측한 음색으로 흐느낍니다. 그런데 선율이 어째 익숙하지요? "자크 수사님"(Frère Jacques)이라는 동요입니다. 독일어권에서는 "마르틴 수사님"(Bruder Martin)이고, 영어권에서는 "요한 수사님"(Brother John)이지요. "아 유 슬리핑, 아 유 슬리핑" 하는 영어 가사를 기억하시는 분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말러는 이 유명한 동요를 교향곡에 쓰면서 선율과 리듬과 음색을 고약하게 비틀어 놨습니다. 즐겁게 놀 때 부르는 노래를 장송행진곡처럼 만들다니, 지독한 반어법이지요. 이 선율을 오케스트라가 부풀립니다. 이때 악보에는 "뻔뻔하게"(Keck) 같은 괴상한 나타냄말이 나옵니다.

이렇게 일그러진 동요 선율이 흘러 서글픈 음악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싸구려 길거리 음악, 서커스 광고, '뽕짝'(?) 음악이 끼어듭니다. 청년 말러의 의식세계가 현실과 뒤섞이고, 뒤틀리고, 일그러지는 대목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절망에 빠져서 방황하는데 마침 길거리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요.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 "자~ 애들은 가라!" "기임~밥!" 청년 말러는 세상에서 홀로 버려진 듯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삶의 희망을 잃었던 청년 말러는 보리수 그늘에서 문득 깨달음을 얻습니다. 마치 싯다르타처럼요! 이때 연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가운데 "내 연인의 푸른 눈동자"에 쓰였던 선율이 나옵니다. "길가에 보리수 한 그루 있어, 그곳에서 처음으로 단잠을 잤노라! 나에게 꽃 뿌리는 보리수 아래서 삶을 잊었노라. 모든 것이 다시금 좋아지리라! 사랑도, 고통도, 세상도, 꿈도!"

그러나 비틀린 동요 선율이 다시 나타납니다. 청년 말러는 아직 참된 평안을 얻지 못했습니다.

4악장 : 폭풍우가 몰아칩니다. 금관이 마치 아가리를 벌린 지옥 입구처럼 으르렁거리는 이 대목은 사실 바그너가 《파르지팔》에서 썼던 '성배' 음형, 또는 리스트가 여러 작품에서 썼던 '십자가' 음형을 비틀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 말러는 지옥을 벗어나 다시 깨달음을 얻고, '지옥' 음형이 살짝 바뀌어 '천국'의 성스러운 찬가가 됩니다. 곡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고양감이 음악을 뒤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장된 고양감'만큼이나 거짓된 승리, 불완전한 깨달음입니다.

1악장에 나왔던 "자연의 소리"가 다시 나옵니다. 그러나 이내 잔뜩 뒤틀린 '현실'이 반격해 옵니다. 몇 차례에 걸친 작은 깨달음이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빛이 바래는 모습은 마치 불교의 가르침 같습니다. 깨달음에는 수많은 단계가 있으니 참된 깨달음을 얻으려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고요.

청년 말러의 참된 깨달음은 '천국' 음형과 함께 나타나되, 앞선 거짓 승리와 달리 과장되지 않습니다. 악보에는 "승전가"라고 나옵니다. 호른 연주자들과 일부 트럼펫·트롬본 연주자가 말러의 지시대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승리의 팡파르를 연주합니다.

▶ 거인(Titan)과 초인(Übermensch)

말러 교향곡 1번에는 '거인'(Titan)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인족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구자범 지휘자 선생님은 그보다는 정신적인 의미,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뜻한다고 생각하시더군요.

이렇게 생각하면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한 초인(Übermensch)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음악에 나타나는 '깨달음'의 성격이 좀 다른 듯하기는 하지만요. (박순영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의 설명을 빌자면, "니체가 말하는 독일어의 위버멘쉬(Über-mensch)는 다른 차원으로 이행하는, 저편으로 넘어가는(Über- gehen), 자신을 극복하려는 사람"이며, “어린아이처럼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목표를 향해 몰입하는 단계”가 참된 깨달음의 단계입니다.)

2012년 2월 20일 월요일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바그너의 후예들이 들려주는 어른을 위한 동화》 리뷰

※ 경기도문화의전당이 발간하는 월간지 『예술과 만남』에 보낸 원고입니다.
※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 http://g-phil.kr/?p=797

'이야기'가 있는 연주회… 극적 효과와 심리적 표현 돋보여

구자범 지휘자는 '바그너의 후예들이 들려주는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연주회 제목에 걸맞은 '이야기'를 준비했다. 바로 음악과 어우러지는 자막이다. 그 가운데 《인어공주》는 이 곡을 처음 듣는 사람도 쉽게 음악을 즐길 수 있게끔 자막을 더욱 자세하게 만들었다. 쳄린스키는 이 작품에 표제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날 연주회 때 상영된 자막은 구자범 지휘자가 작품을 꼼꼼하게 분석해서 자신의 해석을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자막은 악보 이곳저곳에서 찾을 수 있는 단서를 바탕으로 만들었으므로 작위적으로 말을 갖다 붙였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악보에는 "구조 요청하듯이"(wie hilferufend)라는 지시어가 나온다(1악장 마디 303). 왕자가 '사람 살려'라고 외치는 대목이라는 뜻이다. 물론, 배가 통째로 가라앉은 마당에 왕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구조 요청할 수도 있지 않으냐고 반론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악보를 좀 더 살펴보면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사람 살려' 음형이 나오고 바로 이어서 인어공주가 헤엄쳐 가는 듯한 음형이 이어진다. 둘째, '사람 살려' 음형은 두 번 나오며, 두 번째 나올 때는 소리가 좀 더 가까워진다. 인어공주가 다가갔다는 뜻이다. 셋째, '사람 살려' 음형이 두 번 나온 뒤에는 조금씩 음악이 조용해지다가 얼마 안 가서 '사랑 노래'가 이어진다.

이때 '사람 살려' 음형에는 이른바 '음색 원근법'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비슷한 음량으로 음색만을 바꾸어 거리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곡 기법으로, 말러가 교향곡 5번 1악장 마지막에 사용한 바 있다. 쳄린스키는 '사람 살려' 음형을 처음에는 오보에로, 나중에는 클라리넷으로 써서 점점 가까워지는 듯한 효과를 주었다. 그리고 구자범 지휘자는 여기에 극적 효과를 하나 더했다. 두 번째 '사람 살려'를 좀 더 느리고 여리게 다스려 왕자가 지쳐서 정신을 잃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것이다.

서스펜스 영화 같은 심리 표현 담아낸 구자범 지휘자의 탁월한 해석

구자범과 경기필이 들려준 '이야기'가 가장 멋졌던 곳은 아무래도 '폭풍' 등 긴장감이 높아지는 대목이겠지만, 구자범이 보여준 해석이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3악장에서 자막이 '슬픔'이라고 나갔던 대목, 마디 51이었다. 이곳에 나오는 선율(모티프)은 앞서 여러 차례 나왔던 것이고, 기악 음악을 이루는 일반적인 원리를 생각하면 이곳에서도 앞서와 비슷한 템포로 구조적 통일성을 주어야 할 듯하다. 실제로 내가 여태껏 들어본 연주에서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 제임스 저드, 안드레이 보레이코 등이 모두 그렇게 했다.

그러나 구자범은 달랐다. 템포를 갑자기 뚝 떨어트리고 부드럽고 가녀리게 다스려 순음악적인 '구조'와 '통일성'보다는 심리적 표현을 강조했다. 나는 구자범이 옳다고 생각한다. 악보를 보면 이 대목에 "매우 부드럽게, 회한을 담아"(sehr zart, wehmütig)라는 지시어가 있고, 3악장 첫머리에는 연주에 고통을 가득 담으라는 지시어(Sehr gedehnt, mit schmerzvollem Ausdruck)가 있어 '슬픔' 대목과는 성격이 달라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뜻을 구자범-경기필만큼 잘 살린 연주를 나는 들어본 일이 없다.

심리적 표현을 말하자면 자막이 '칼을 들고 주저하는 인어공주'라고 나갔던 대목(3악장 마디 138)을 빼놓을 수 없다. 반음계적 선율과 불안하게 흐르는 화음으로 긴장감을 쌓아 가는 동안 앞서 나왔던 선율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고, 마침내 긴장감이 폭발하는 듯하다가 멈추고 다시 이어지는 극적 연출은 히치콕 감독이 만든 서스펜스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날 경기필이 들려준 연주는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끔 했다.

첫 곡으로 연주된 훔퍼딩크 《헨젤과 그레텔》 모음곡 또한 말이 필요 없을 만큼 훌륭했다. 구자범은 본디 오페라 지휘자이며, 오페라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서 그 솜씨가 매우 잘 드러났다. 곳곳에서 단원들 얼굴에 웃음이 번졌고, 지휘자는 행복해하는 듯했다. 그 분위기가 객석으로 퍼졌음은 말할 나위 없다.

마녀의 오븐이 폭발하는 대목에 쓰인 악기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 듯하여 설명을 덧붙인다. 이것은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특별 제작한 악기이다. 악보에는 선더머신(Donnermaschine; 독일어)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것은 악기 이름이라기보다 천둥소리를 내는 기계장치를 통칭하는 말이다. 경기필이 만든 이 악기와 가장 비슷한 것은 선더시트(thunder sheet)라는 악기로, 경기필은 천둥소리가 아닌 폭발음을 내고자 재질과 구조를 조금 달리 했다. 물론, 폭발하는 대목에는 큰북 등 다른 타악기가 힘을 합쳐 크게 '한 방'을 터트린다.

2012년 1월 11일 수요일

안데르센 동화 『인어공주』에 대하여

※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http://g-phil.kr/?p=731

인어공주는 왜 사람이 되려고 했을까요? 사랑 때문이라면 마녀를 찾아갔을 때 다른 것을 부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안데르센이 쓴 원작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인어공주가 참말로 원했던 것은 영혼이기 때문이랍니다.

구자범 지휘자 선생님은 쳄린스키가 교향시 《인어공주》를 쓰면서 '영혼' 얘기를 음악에 담았다고 생각해요. 쳄린스키는 알마 쉰들러를 짝사랑했지만, 알마는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했죠. 그런데 '알마'(Alma)는 이탈리아어 또는 스페인어로 '영혼'이라는 뜻이래요. 라틴어 '아니마'(anima)에서 온 말이고요.

원작에 나오는 영혼 이야기가 잘 기억나지 않으세요? 이참에 진짜 줄거리를 제대로 알아 볼까요?


인어공주는 바닷속 왕국에서 임금님이신 아버지, 할머니, 다섯 언니와 함께 살았어요. 언니들은 해마다 물밖에 나가서 바깥 세상을 보고 왔지만, 인어공주는 아직 어려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언니들한테 얘기만 들어야 했어요.

마침내 인어공주는 15살이 되어 물 밖으로 나가요. 물위에 배가 떠있고 사람들이 춤추고 불꽃놀이도 해요. 사람들 가운데 왕자님이 가장 멋져요. 그런데 밤이 되면서 폭풍이 몰아치고, 왕자님은 물에 빠져 죽어가고, 인어공주가 왕자님을 구해서 바닷가로 데려가요. 그리고 가까운 신전에서 온 아가씨가 나타날 때까지 왕자님을 지켜 봐요. 정신을 잃은 왕자님은 그때까지 인어공주를 보지 못해요.

인어공주는 할머니를 찾아가, 사람들은 물에 빠지지만 않으면 영원히 살 수 있느냐고 여쭈어요. 할머니는 이렇게 말해요. 300년을 사는 인어와 달리 사람은 훨씬 일찍 죽어요. 그런데 인어는 죽으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지만, 사람은 죽으면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살아요.

인어는 왕자를 그리워하고 사람의 영혼을 부러워한 나머지 마녀를 찾아가요. 그리고 인어 꼬리를 사람 다리로 만들어 주는 약을 얻는 대신 혀를 잘라 주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잃어요. 마녀는 이렇게 경고해요. 사람이 되면 다시는 바다로 돌아올 수 없어요. 약을 마시면 다리가 생겨서 누구보다도 멋진 춤을 출 수 있지만, 걸을 때마다 칼에 꿰뚫리는 듯한 고통이 뒤따라요. 영혼을 얻으려면 진실한 사랑을 찾아 입맞춤을 하고, 사랑을 얻고, 그 사람과 결혼해야 해요. 그러면 그 사람의 영혼 일부가 인어공주에게 흘러들어가요. 만약 그 사람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다음날 아침 해뜰 무렵 인어공주는 죽어서 물거품이 돼요.

인어공주는 약을 마시고 다리를 얻어 왕자를 만나요. 왕자는 인어공주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인어공주는 고통을 참고 왕자와 춤춰요. 그러나 왕자의 아버지는 왕자한테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하라고 말해요. 왕자는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지만, 물에 빠졌다가 깨어났을 때 만났던 여자가 그 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바꿔요.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요. 인어공주는 절망에 빠져 동트기를 기다려요. 그때 인어공주의 다섯 언니가 찾아와 이렇게 말해요. 다섯 언니는 마녀를 찾아가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 주고 마법이 깃든 칼을 얻었어요. 인어공주가 그 칼로 왕자를 찔러 죽이고 피를 다리에 적시면 다시 인어가 되어 바다로 돌아갈 수 있어요.

인어공주는 끝내 왕자를 죽이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물거품이 돼요. 그런데 인어공주는 여전히 밝은 햇살을 볼 수 있었어요. 햇살 사이를 투명한 모양으로 떠다니는 공기의 딸들(Luftens Døttre; daughters of air)이 어리둥절해 하는 인어공주에게 이렇게 말해줘요. 인어공주는 영혼을 얻고자 온 마음을 다 바쳐 노력했기 때문에 공기의 딸이 되었어요. 앞으로 300년 동안 착한 일을 하면 영혼을 얻어 하늘나라에 갈 수 있지요. 그리고 착한 아이를 찾을 때마다 영혼을 얻기까지 걸리는 기간이 한 해씩 줄어들고, 나쁜 아이를 만날 때마다 흘려야 하는 눈물 한 방울에 하루씩 기간이 늘어난답니다.


※ 『인어공주』와 세 가지 결말

안데르센은 처음에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냈어요. 그리고 나중에 '공기의 딸들' 대목을 덧붙였는데, 안데르센은 이것이 본디 의도했던 이야기라고도 했어요.

그런데 '착한 아이, 나쁜 아이' 대목은 안데르센이 나중에 또 한 번 이야기를 고치면서 덧붙인 것이에요. 이 대목은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이를테면 『메리 포핀스』를 쓴 P. L. 트라버스는 이렇게 말했어요. "착한 아이가 되라고 겁주는 빅토리아 시대 교훈적 이야기에서 유래한 […] 이것은 협박 편지입니다. 아이들은 알아요. 그런데 말은 안 하죠."

― 티켓 예매 ―

인터파크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11018554

2009년 8월 25일 화요일

2007.10.06. 본 윌리암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 코플랜드 클라리넷 협주곡 / 쳄린스키 인어공주 - 마틴 프뢰스트 / 제임스 저드 / 서울시향

2007년 10월 6일(토)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James Judd
협연자 : Martin Fröst, Cl

Vaughan Williams: Fantasia on a Theme by Thomas Tallis(15')
Copland: Clarinet Concerto (18')
Zemlinsky: Die Seejungfrau (45')



레이프 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 1872-1958; 둘째 아내 Ursula가 쓴 전기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Rayf"로 읽는다)의 <토마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은 16세기 영국 작곡가 토마스 탈리스(Thomas Tallis)의 찬송가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교회선법을 따르는 정선율(cantus firmus)과 16세기식 대위법, 아멘 종지(plagal cadence) 등의 고음악 양식에 영화 <반지의 제왕>에 배경음악으로 써도 어울릴 듯한 영국풍 선율이 더해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었으며, 이 모든 것이 현대적인 음악 어법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본 윌리엄스만의 남다른 음악이 되었다. 화성과 조성 구조는 후기 낭만주의의 반음계적 어법과 통했고, 불균등하고 불규칙한 프레이즈 구조는 영국 음악의 전통에서 유래했으면서도 20세기 초의 음악사적 흐름과도 맞닿았다.

그런가 하면 작곡가가 교회 오르간 연주자였던 만큼 16-17세기 영국 오르간 소리를 흉내 내기도 했다. 이 작품은 현악 사중주단과 현악 오케스트라, 그리고 2-2-2-2-1명으로 이루어진 제2 오케스트라로 편성되어 있으며, 음악학자 Edwin Evans에 따르면 이것은 영국 오르간을 이루는 서로 다른 건반들(Solo, Great, Choir)에 각각 해당한다. 본 윌리엄스는 제2 오케스트라를 제1 오케스트라와 되도록 떨어트려 놓으라고 지시하고 있는데, 서울시향을 지휘한 제임스 저드(James Judd)는 제2 오케스트라를 객석 기준으로 무대 왼쪽 연주자 대기실에 들어가도록 했다. 덕분에 합창 반주 오르간(Choir organ)의 느낌이 꽤 잘 살아났으며 서울시향의 연주 또한 훌륭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오르간의 음향 자체를 그럴싸하게 흉내 냈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브루크너처럼 관악기로 실제 오르간의 파이프와 비슷한 소리를 내도록 한 것도 아니고, <진은숙의 아르스노바> 시리즈에서 소개한 바 있는 조지 벤자민처럼 음향학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오르간의 배음(harmonics) 구조를 흉내 낸 것도 아니라 미리 알고 듣지 않는다면 오르간을 쉽게 연상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연주회장이 예술의 전당이 아니라 명동 성당이었다면 혹시 진짜 오르간 같았을까?

20세기 서양음악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민속 음악을 끌어들여 새로운 음 소재로 쓰는 동시에 기존 서양음악에서 굳어진 화성과 리듬 등을 벗어나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 작곡가들은 미국적인 음 소재로 무엇보다 재즈를 열심히 활용했다. 원래 흑인 음악이었던 재즈를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제도권 음악계에 끌어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조지 거슈윈이라 할 수 있겠는데, 정작 거슈윈은 본래 '대중음악'을 하던 사람으로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하고 타고난 영감에 따라 작곡을 한 사람이다. 아론 코플랜드(Aaron Copland, 1900-1990)는 나디아 불랑제 등에게 정통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고 나서 재즈나 미국 민요 등을 자신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으며, 흑인 음악의 어둡고 끈적끈적한 느낌 대신에 이른바 '스윙(swing)' 등 재즈적인 요소를 20세기 클래식 음악의 흐름 속에 녹여 내었다 해서 미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코플랜드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협연한 마틴 프뢰스트(Martin Fröst)는 클라리넷치고는 꽤 특이한 음색으로 무척 돋보였다. 일반적인 클라리넷의 맑고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다듬고 또 다듬어 진주 빛깔을 머금은 소리로, 어찌 들으면 오보에 소리와도 닮아서 단단하게 막힌 듯하면서도 답답한 느낌은 없었다. 고음에서 소토 보체(sotto voce)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그윽한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으며, 여린 음이 멀리 퍼져 나가도록 하는 신기한 능력은 프뢰스트의 심상치 않은 기량을 엿볼 수 있게 했다. 미세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곧고 매끄럽고 빈틈 없는 소리는 몸서리칠 만큼 놀라웠다. 세련된 소리는 서울시향이 차츰 만들어가는 음색과도 잘 맞았으며, 몸매를 드러내는 정장 차림에 순정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귀공자의 오라가 더욱 잘 어울렸다.

이날 연주된 곡들의 공통점은 20세기 초 작품이면서도 쇤베르크로 대표되는 무조 음악의 중력권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쳄린스키(Alexander Zemlinsky, 1871-1942)는 말러, 쇤베르크 등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벨에포크(belle époque)를 살았던 마지막 낭만주의자라 할 수 있으며, 쇤베르크와 상당한 친분이 있었지만 끝까지 조성음악을 포기하지는 않아서 그의 작품은 반음계적 화성과 화려한 관현악법 등 후기 낭만주의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인어공주 Die Seejungfrau>는 안데르센의 동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같은 명랑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고 원작의 느낌에 좀 더 가까워 보였다. 널리 알려진 동화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세계와는 거리가 먼 잔인한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다. 특히 안데르센의 동화는 살인과 근친상간과 저주와 공개 처형 등 온갖 끔찍한 사건들로 가득하다. 이것은 안데르센의 불행한 삶과 시대의 어두운 면이 투영된 결과이며, 또 어쩌면 쳄린스키가 사랑했던 여인 알마 쉰틀러를 구스타프 말러에게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고통이 투영된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다. (쳄린스키의 경우 원작과는 성 역할이 반대다.)

이 작품은 1905년에 초연되었는데도 아직도 개인에게 악보를 팔지 않는 모양이라 리뷰를 쓰기에 곤란한 점이 많다. 서울시향의 연주는 음반과 견주어 간략한 인상을 말하자면 악기 사이에 응집력이 꽤 훌륭했고 밸런스도 좋은 편이었다. 바다의 거대한 흐름도 잘 살렸다. 금관의 박력도 양호했으나 트롬본이 웬일인지 평소답지 않게 소극적이었던 점은 조금은 아쉬웠다. 이를테면 2악장에서 F-C-F-G 모티프로 트럼펫과 트롬본 등이 서로 다른 음가로 연주하는 부분에서, 트롬본의 무게중심이 부족한 상태에서 트럼펫 등이 상대적으로 너무 두드러진 탓에 소란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지휘자 제임스 저드는 KBS 교향악단을 자주 지휘해서 국내에 꽤 알려진 지휘자인데, 원래 실력이 좋은 지휘자이겠지만 국내 악단과 특히 잘 맞는 지휘자가 아닐까 싶다. 서울시향도 제임스 저드와 잘 맞는다는 사실을 이번 연주회로 알 수 있었으니 이쯤 되면 그가 지휘를 맡는 연주회는 큰 믿음을 주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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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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