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7일 일요일

새로운 작품이 있는 공연을 위하여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은 글입니다.

원문 링크 : http://g-phil.kr/?p=1479

"국내 어느 교향악단도 한국 작곡가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작곡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길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나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거나 동인들의 주머니를 털어 관현악단을 사는(!) 방법, 젊은 작곡가라면 콩쿠르에 응모하는 방법 등이 있을 뿐이다. 지원을 받기도, 관현악단을 사기도, 콩쿠르에 응모하기도 어려운 입장에 있는 작곡가들은 당연히 그나마 연주가 용이한 실내악에 치중할 수밖에 없고 이는 곧 양적인 감소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에 뒤따르는 질적 저하를 초래하게 된다."

작곡가 전상직 선생께서 10년 전에 쓰신 글입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당시 명칭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발간하는 『문예연감』 서양음악 분야에서 한 해를 정리하는 의미로 쓰신 글이었지요. 이 글에서 지적하신 우리나라 작곡계 형편은 10년이 지난 2013년 현재 조금은 나아졌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인 듯합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그곳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곳에는 작곡가가 활동하기 훨씬 좋은 든든한 인프라가 있어요. 오케스트라 또는 오페라 극장 등에서 작곡가에게 새 작품을 위촉하고, 그 작품이 초연되면 애호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어 다른 악단이 그 작품을 또 연주하는 선순환이 일어나곤 합니다.

요즘은 방송 인터넷 중계가 흔해서, 조금만 찾아 보면 외국 유명 악단의 공연 실황을 들을 수 있지요. 공연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발표된지 몇 해 지나지 않은 작품들이 한 곡쯤 들어 있곤 합니다. 아예 현대 작품만 연주하는 공연도 제법 있고요.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현대음악 공연은 '그들만의 잔치'가 되기 일쑤이지요.

조금 자극적인 통계 수치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2012년판 『문예연감』에 나타난 2011년 전체 공연 건수는 8,274건입니다. 그 가운데 작곡발표회로 분류된 공연은 1.1%이고, 경기 지역만 따지면 단 한 건입니다. 한 건도 공연되지 못한 해도 있고요. 다른 범주로 분류된 공연에서 신작이 초연된 사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평소 공연장에서 창작곡을 얼마나 들을 수 있는지를 경험적으로 생각해 보면, 사실은 이 수치도 생각보다 많다고 느껴집니다.

"한해의 작곡계를 돌아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가장 큰 아쉬움은 자발적 청중의 부재와 그로 인한 창작곡의 고립현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여전히 작곡가 단체(동인)들의 발표회 및 몇몇 현대음악제라는 인적(人的), 공간적으로 폐쇄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답답함을 더해온다." (전상직)

음악 애호가라면 윤이상이나 진은숙 같은 세계적인 작곡가의 이름을 떠올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어요. '피겨 여왕'이라 불리는 김연아 선수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나라에 피겨 스케이트 선수를 기르는 인프라가 훌륭해서 김연아 선수가 성공했다고 하기는 어렵잖아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 예술 창작을 지원하는 공공기관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술단체가 신작을 초연하면, 작곡가와 예술단체가 각각 지원금을 신청할 수 있지요. 그러나 국민이 낸 세금으로 어느 예술가와 예술단체를 지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어느 작품이 얼마만큼 훌륭한지 어떻게 평가할까요?

"그외 공연장이나 연주단체들의 기획프로그램과 연주자 개개인의 연주회에서 창작품을 연주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며 그 또한 행사용이거나 문예진흥기금 수령을 위한 방편으로 짜맞춤형 연주회에 창작품이 이용되는 경우가 많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작곡가 이만방 선생이 2006년 『문예연감』에 쓰신 글입니다. 공공기관답게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객관적인 기준으로 작품을 평가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이 생기곤 하지요. 정부가 나서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그 지원금이 넉넉한 것도 아니어서, 이를테면 문화예술위원회 지원을 확정 받아놓고도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신작 오페라 공연이 취소된 사례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초연이 종연(終演)이 되곤 한다는 것입니다. 작곡가가 자비를 들이거나 지원금을 받아 신작을 발표하면, 대개 초연을 끝으로 그 작품이 다시 연주되기 어렵다는 뜻이지요. 다시 연주되더라도 '그들만의 잔치'라 할 만한 공연이 되기 일쑤이고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번 공연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그간 한국의 악단들이 동시대 한국 작곡가의 곡을 프로그램에 삽입해 소개하는 공연은 종종 있었지만, 이번 공연처럼 대규모 공립 오케스트라가 동시대 현역 작곡가 한 사람의 곡들로만 정기연주회 전체 프로그램을 구성해 연주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번 공연에서 연주되는 곡들은 어쩌면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예술작품은 어떤 면에서 공공재(公共財)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작품을 청중에게 소개하는 일에 경기필이 나서고자 합니다.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류재준의 밤》 공연을 준비하면서 티켓 판매 부진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공공 예술단체로서 수익률보다는 국내 최초로 한국 작곡가를 집중 조명한다는 취지에 뜻을 두고 이번 공연에 예산을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경기필이 작곡가에게 저작권료를 지급함은 물론 협연자와 합창단 등 모든 비용을 지원하는 이번 공연이, 현 시대의 작곡가들에게 진정한 예술 창작 의욕을 고양하고 음악애호가들에겐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넓히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글 찾기

글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