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1일 일요일

안인희 ―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 (서울: 민음사, 2003).

안인희 ―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 (서울: 민음사, 2003).

※ 2003년 민음사 〈올해의 논픽션상〉 수상작 역사와 문화 부문



▶ 글쓴이

안인희.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독문학을 공부했고, 1986~1987년에 독일 밤베르크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90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 표지의 저자 소개 중에서.

▶ 목차

I. 게르만 신화와 영웅전설
   1. 보물 이야기
   2. 기사 이야기
   3. 사랑 이야기
   4. 가수들
   5. 북유럽의 신화
   6. 니벨룽겐의 노래
II. 신화를 다루기 위하여
   1. 신화와 원형
   2. 이야기의 구조
III. 바그너의 세계: 신화를 문학과 음악으로
   1. 낭만주의 문학
   2. 바그너의 생애
   3. 음악연극 작품으로 본 바그너 사유의 길
   4. 니체의 바그너 비판
IV. 히틀러: 신화와 예술을 직접 현실로
   1. 시대적 배경
   2. 히틀러의 세계관
   3. 예술과 정치

▶ 서평

이른바 ☞'바그네리안(Wagnerian)'이라는 말은 바그너가 마니아를 끌어들이는 예술가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마니악한 취미일수록 진입 장벽이 높은 법. 바그너 진입 장벽으로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독일어, 반음계적 화성, 그리고 히틀러. '히틀러의 음악가' 바그너를 올바로 알려면 '히틀러의 나라' 독일을 알아야 한다. 글쓴이는 이런 말로 책을 연다.

독일 사람들은 예전에 자신들의 나라를 "시인과 철학자들의 나라"라고 부르곤 했다. (…) 그러나 이런 모든 자부심은 단 한마디 앞에서 어이없이 스러지고 만다. "히틀러."

'바그너=히틀러'라는 편견은 어쩌면 가장 고약한 바그너 진입 장벽일지 모른다. 그 장벽이 고약한 까닭은 작품 바깥에서만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그너의 작품에는 제3제국의 국가 행사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사실은 히틀러가 바그너에게서 차용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히틀러 시대에 대해 철저히 비판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오늘날의 세대들이 제3제국 시대의 제의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을 소화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여전히 열렬한 "바그너 숭배자(Wagnerianer)"들이 존재하지만, 상당히 많은 독일인들이 처음부터 바그너의 작품에 거부감을 보인다. 우리는 오히려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공연에서 정통적인 바그너 공연을 더 쉽게 볼 수 있다. (341쪽)

더군다나 그 편견은 날조된 괴담을 등에 업고 ― 이를테면 아우슈비츠에서 바그너 음악을 연주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 ― 바그너를 듣는 이를 겨냥해 '파시스트'라는 인종주의적 혐의를 덮어씌우기도 한다. 이러한 편견과 괴담 맞은편에는 '홀로코스트 부인주의'가 있겠으나, 객관성을 좇는 전통적인 바그너 연구가의 입장은 "히틀러가 혼자 미쳐서 바그너 가지고 소란을 떤 것이지, 바그너 자신은 히틀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는 정도다(☞박원철 서평에서 인용). 그러나 안인희는 새로운 프레임으로 '편견'과 '편들기'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이 책은 게르만 신화 → 도이치 낭만주의 → 바그너 → 히틀러로 이어지는 문화사적 흐름을 짚으며 바그너―히틀러 관계를 둘러싼 객관적인 지식을 쌓도록 도와준다. 이 흐름을 꿰뚫는 모티프는 "붕괴와 몰락"이며, 북유럽 신화와 엮어 말하자면 '라그나로크(Ragnarök)'이다. 이 모티프는 책 내용뿐 아니라 디자인으로도 나타나는데, 디자이너 ☞유지원은 한때 ☞바그네리안 동호회 회원이었으며 알 만한 사람은 아는 그 유지원이다.

박원철이 서평에서 지적했듯이, 바그너―히틀러 관계를 둘러싼 안인희의 논리에는 빈틈이 많다. 그러나 대안적 주장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논리적 완결성은 남은 과제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더군다나 그 빈틈은 책 한 권으로 메울 수 있다고 믿기 어렵다.

그래도 한 가지 아쉬운 곳을 말하자면, 이야기를 '히틀러'에서 끝내며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에는 어떤가 하는 것"은 읽는이 몫으로 떠넘긴 대목이다.

도이치 민족은 오랜 세월을 두고 유럽 역사의 피해자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어느 날 가해자의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한 민족의 오래 묵은 억울함이 어떤 과정을 거쳐 끔찍한 역사를 만들어냈는지 이 책에서 관찰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남은 질문은,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에는 어떤가 하는 것으로 넘어간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독자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343쪽)

글쓴이가 읽는이 몫으로 남겼으니 책을 읽은 내가 찾은 '모범답안'을 알려주겠다.

그리고 바그너에게 책임을 묻는 그 행위를 확대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거론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야한다. 말하자면 나치에게 책임을 묻는 행위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행하는 만행에 대한 책임을 묻는 행위와 함께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책임을 묻는다'는 윤리적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당성이다.

☞ 이택광, 〈이스라엘과 바그너〉

이것은 독일에서 독일 문학을 공부하면서 독일 사람에게 정서적 동질감을 키웠을 글쓴이가 감히 하지 못했던 말이라 헤아릴 수 있겠는데, 그 속내는 박노자가 쓴 글에 비추어 엿볼 수 있다.

대부분 ‘근대성’이란 것을 말할 때, 그 특징으로 “의문을 갖고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합리적 사고”를 든다. 이 측면에서 ‘근대의 요람’임을 자랑하는 서구나 미국의 대중적 역사 기억은 과연 근대적일까. ‘합리성’을 내세워 다른 지역의 문화를 평가절하하는 구미에서조차 비판적 분석이나 다른 역사적 사건과 비교할 수 없는 공공(公共)의 역사적 기억의 ‘성역’(聖域)이 있다. 다름이 아닌 홀로코스트(Holocaust), 즉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의 약 600만명의 유대인이 파쇼에 의해 대학살된 사건이다.

이는 세계사에서 전대미문의, 미증유의 사건이라는 전제, 인류가 저지른 어떤 가혹행위와도 견줄 수 없다는 테제, 히틀러가 자행한 범죄 가운데서 가장 흉악하다는 주장 등을 업고 아무런 비판 없이 ‘기존 사실’로 받아들인다. 어릴 때부터 교과서와 영화 등의 매체로부터 주입된 홀로코스트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외경(畏敬)도 한몫하지만, 홀로코스트에 대해 그 뜻을 약간이라도 상대화시키는 듯한 기미를 공석에서 보이면 곧장 ‘홀로코스트 부인주의자’(Holocaust-denier)의 딱지를 지닐 수도 있다. 딱지가 붙으면 더 이상 학술·대중 매체에서 발언권을 갖기가 힘들다. 마치 중세 유럽의 지식인들이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예리한 발언으로 독신죄(瀆神罪; 기독교의 신을 모욕하는 죄목)에 걸려 사회로부터 ‘출척’(黜陟)당한 전근대적인 현실을 방불케 한다.

☞ 박노자, 〈비극의 상업화, 홀로코스트〉. 한겨레21, 2002.11.28.

이 책은 독일·오스트리아 문화사를 바탕으로 한 바그너 입문서라 할 수 있다. 입문서로 이 책에 매길 수 있는 가장 큰 값어치는 번역서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 박원철 서평에서 잘 드러난다.

처음 책을 들었을때, 한참동안 저자가 누군인지 찾고 있었습니다.
안인희라는 이름을 보았지만, 번역자인줄 알았지 설마 우리나라 사람이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라는 주제를 감히 건들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거지요.

바그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그 뒤에 박준용의 ☞ 『바그너 오딧세이』 (서울: 씨디가이드, 2002)를 읽으면 더욱 좋겠고, 포이어바흐·니체·쇼펜하우어를 아우르는 철학적인 내용을 알려면 브라이언 매기가 쓰고 김병화가 옮긴 ☞ 『트리스탄 코드』 (서울: 심산, 2005)를 읽어도 좋겠다. 미학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김문환이 쓴 본격 학술서인 ☞ 『총체예술의 원류』 (서울: 느티나무, 1989)―나중에 바뀐 제목은 『바그너의 생애와 예술』―를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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