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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5일 화요일

포스트모더니즘과 반지성주의 ― 이택광에게 물었더니

http://wallflower.egloos.com/3601072

윗글을 읽고 댓글로 궁금한 것을 물었더니 이택광 샘 답하시기를,

  • 김원철 2011/03/15 11:54 # 삭제 답 글

    저는 반지성주의가 포스터모더니즘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해 왔는데, 이 글을 보니 이택광 샘은 다르게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짧게라도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 이택광 2011/03/15 14:57 #

    반지성주의는 19세기 영미권에서 발현된 근대적인 사상이죠.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사람들이 당시에 "우리 모두는 homo economicus다"고 했을 때, 이 선언에 새겨진 혁명성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트주의에 근거한 모든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전제들을 허물어뜨리는 파괴성이 있었던 것이죠. 물론 밀을 반지성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일정하게 이런 사상적 자장에 놓여 있다는 걸 부정하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김원철님처럼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반지성주의적인 측면을 읽을 수 있다면, 아마도 반지성주의의 기원적 문제의식을 포스트모던 철학도 일부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내가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두고 반드시 나쁜 의미로 쓰이는 말이 아니라고 말하는 까닭이 이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랑시에르 같은 경우도 교육제도를 통한 지식의 습득에 회의적이고 지식의 엘리트주의를 반대한다는 측면에서 반지성주의적인 경향성을 발견할 수가 있죠.

아오, 뭔가 알듯 말듯…-_-;

김원철이 옛날에 썼던 글과 관련해 고민 좀 해 봐야 할 주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반지성주의로: 김시형의 《Hope of September 09》에 대하여」


2010년 12월 27일 월요일

과학자 vs 인문학자 싸움 구경 ③ 논하기와 증명하기, 비평과 분석, 학문과 비학문

이 글은 ☞ 〈과학자 vs 인문학자 싸움 구경 ② 논하기인가 증명하기인가〉라는 글에 이어진다. aleph-k(이하 '알렙')가 쓴 반론을 먼저 읽으시라:

http://aleph-k.blogspot.com/2010/12/1-2-vs.html

▶ '알렙'의 '방언 드립'

'알렙'이 하고자 하는 말은 잘 알겠다. 그렇게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괄호 속에 "jargon"이라는 말을 씀으로써 알 수 있는 얘기다. 내가 그걸 몰라서 얘기한 줄 알았나? 그렇게 믿고 싶은 건 아니고? 왜 내가 문제 제기한 것들은 자꾸만 피해 가시나?

① '학술 용어' 또는 '전문 용어'라 써도 될 말을 굳이 '방언'이라 쓴 까닭은 무엇인가? '방언'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에 기대어 이택광 등을 헐뜯으려는 뜻이 참말로 없었나? 혹시 '알렙'은 '언어관습'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싶은가?

② 글 쉽게 쓰라고 징징대는 말에 한윤형이 반론을 했고, 나는 그것을 본문에도 썼으며, 그에 앞서 '알렙'한테 댓글로도 어찌 생각하는지 물었다. 이제 나는 '알렙'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째로 한다. 한윤형의 '우리 편 전문가' 담론에 대해 '알렙'은 어떤 반론을 할 수 있나?

난 대중이 '쉬운 글'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중은 뭔가 전문적이고 어려운 어휘를 마구 섞어쓰는 '우리편 전문가'가 내 편을 들어주길 바란다. 미네르바 글이 그런 것 아니었던가. 그의 비평 자체는 '뺑끼'임이 밝혀졌지만 말이다. 우리는 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ㅇㅁㅂ ㄳㄲ'라든가 'ㄱㄷㅈ ㄳㄲ'와 같은 감성을 포기할 생각이 없고, 이 감성을 어떤 전문가가 지지해주길 바라는 것이 아닌가? 쉽게 글을 쓰는 사람은 무시해도 좋은 얼간이일 뿐이다. 가령 살인적으로 친절한 글쓰기와 무한에 가까운 소통을 서비스로 제공하는 이 블로그가 한 사례인데, 내가 친절하게 대꾸하면 대꾸할수록 덧글러들은 술취한 한국 남성이 술집 아가씨 대하듯 나를 대할 뿐이다.

☞ 한윤형, 〈글쓰기의 가독성과 글쟁이의 밥그릇〉

③ 비슷한 얘기인데, 내가 이택광 글에서 '팔루스'라는 말뜻을 몰라도 글 내용을 대충은 이해하겠다고 썼더니 '알렙'은 전문 용어로 가득한 글을 인용하면서 ― 한의학과 사주팔자 얘기라더라 ― "이런 말을 들어도 '대충 이해가 가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라며 비아냥거린다. 이런 비겁한 말장난을 하면서 '알렙'은 내 주장을 "말장난"일 뿐이라 주장하던데?

나는 이택광 글이 정말로 가독성이 부족했다면 악플도 달리지 않고 까도 창궐하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내가 아는, 가독성이 낮은 글을 쓰는 사람들의 블로그는 대개 덧글없이 휑하다. 이택광의 글에 악플이 달리는 이유는 적어도 그의 글에 어떤 수준의 가독성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가 내가 관심있는 대상을 다루고 있어서 들춰보았고, 8-9할은 알아들을 수 있는데 잘 모르겠는 이론용어 때문에 1-2할을 알아먹을 수가 없으니 신경질이 나는 것이다. 8-9할을 알아들을 수 있는 글을 쓰다는 건 이택광의 '한국어 능력'과 관련이 있다. 그 정도 한국어 능력이 없음이 명백해 보이는 분들이 그의 글의 가독성을 문제삼을 때 성질이 나는 이유도 그래서다. 쉬운 글을 읽고 싶다면 여전히 홍세화나 진중권이나 박노자나 김규항의 글을 읽을 수 있다. 그들에 비하면 듣보잡이지만 나같은 사람의 글도 있다. 굳이 문체가 있는 사람의 글을 붙들고 그의 글을 거세하려고 발광들을 하는 모습을 보면 꼴같잖지 않겠나.

― 한윤형, 같은 글.

▶ 논하기―증명하기 또는 비평―분석

내가 쓴 '논증 드립'이라는 말은 주로 김우재를 겨냥해 한 말이었으나 '알렙'이 쓴 글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있기에 '알렙' 얘기도 했다. 그랬더니 '알렙'은 이렇게 썼다. "내 글을 논증 드립이라고 읽는 건, 독해력의 문제다. 나는 선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이 뒤섞인 담론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 찾아 보시라."

글쎄, '알렙'이 정신분석학을 공격한 몇몇 글을 내 알량한 독해력으로 읽어 보니, 김우재 또는 아이추판다가 쓴 글과 논점이 아주 똑같아서 하나마나 한 소리더라. 그래서 대충 읽었더니 내가 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 다시 꼼꼼히 읽어보기는 귀찮으니 이 글에서는 그냥 '말장난 드립' 얘기를 해보겠다.

'알렙'은 내가 '논하기'와 '증명하기'를 단순 이분법으로 몰고 갔다고 이해한 모양인데, 내가 소제목부터 오해할 만하게 썼으니 내 잘못이 작지 않음을 인정한다. 다만, 내 글은 김우재가 '학문'과 학문이 아닌 '잡글'을 나누고 이택광 글이 '학문'이 아니라 못 박은 일을 두고 대응 논리로 세운 것이었음을 밝혀 둔다.

"그렇게 보면, 이게 그렇게 단순한 두 가지 방법의 대립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설사 경험적인 '입증'과 선험적인 '논의'를 일단 대별하고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둘이 쉽게 분리되는 건 아니다."
"여기서 논의와 증명이 서로 구분되는 것일까?"

그러니까 이런 말은 오히려 내가 김우재 등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애초에 이택광이 김우재한테 '오지랖' 발언을 하고, 뒤이어 주로 이공계 쪽 전공자들이(?) 공분에 동참하며 '인문학자들의 기득권'(?)을 성토하면서 생긴 일이 아니던가. 내가 앞선 ☞글에서 한윤형이 풀어쓴 맥락을 인용해 놨으니 모르시는 분들은 읽어 보시라.

나는 논하기―증명하기, 또는 학문―비학문 사이 경계가 모호한 예로 강정수님 블로그와 내 ☞석사 학위논문을 예로 들었다. 이참에 내 논문 얘기를 좀 더 해보겠다. 음악학에서는 음악 비평을 하위 분과로 꼽는데, 나는 음악 비평으로 학위 논문을 쓰면서 이게 도대체 음악학이 맞기는 한지를 두고 제법 길게 고찰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인용한다.

이처럼 음악 비평은 다른 음악학 하위 분과와 견주면 학술적인 바탕이 그다지 튼튼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음악 비평을 음악학 하위 분과로 놓아야 한다면, 무엇보다 연주 비평을 음악학 하위 분과로 놓아야 한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음악 분석은 음악 비평과는 달리 음악학 하위 분과임을 조금도 의심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로브 사전 '분석'(analysis) 항목에서는 분석과 비평 모두 "정도의 차이"(difference of degree)만이 있을 뿐 주관성과 객관성을 모두 띤다고 한다.

[…]

이러한 사정을 헤아릴 때, '비평'을 '분석'과 구분하면서도 음악학 하위 분과로 인정하려면 '분석'과 같은 수준의 객관성과 체계성을 '비평'에 요구해서는 곤란하리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¹⁾ 그러한 요구를 모두 받아들인 '비평'은 이미 '비평'이 아닌 '분석'일 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평을 음악학 하위 분과로 인정하려면 그 특수성까지도 인정해야 한다. 비평이 분석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비평이 분석으로부터 객관성을 어느 정도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지 비평이 분석과 같아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²⁾

[…] 그러나 여기서는 음악 비평을 음악학으로 볼지를 따지고 있으므로, 결국 음악 비평을 음악학으로 용인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객관성과 체계성을 어느 수준으로 놓을지가 문제 된다.

1) 여기서 '체계'라는 말은 '체계음악학'과는 다른 일반적인 뜻이다.
2) 음악 비평의 객관성과 주관성에 대한 고찰은 다음을 참고하라: 신설령, "음악비평의 역사와 실제." 『음악과 민족』 (부산: 민족음악학회, 1994), 제8호, pp.251-274.

― 김원철, "연주분석에 바탕을 둔 학술적 연주비평 가능성 모색: 정명훈이 지휘한 2006~2009 서울시향 정기연주회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2. pp.34-36.

그러니까 "~학으로 용인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객관성과 체계성을 어느 수준으로 놓을지"는 해당 분야 학자들이 합의할 문제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이 그 수준을 만족하는지 어떤지는 정신분석학자가 합의할 문제다. 좀 더 너그럽게 생각하면 심리학자 또는 인지과학자까지도 이와 관련해 발언할 권리가 있다. 이택광도 사실은 정신분석학자가 아니므로 심리학자 및 인지과학자와 비슷한 수준에서만 발언할 권리가 있겠다. 그러나 그 분야와 관련 없는 사람, 그러니까 인지과학자가 아닌 생물학자가 정신분석학이 학문이 맞는지 아닌지를 따지려고 한다면 괜한 '오지랖'일 수 있다. 이택광은 '아이추판다'가 자신을 비판하는 일까지는 용납할 수 있다고 어느 글에선가 썼더라. (논점에 따라 괜한 '오지랖'이 아닐 수도 있다. 김우재가 학술지에 무슨 글을 썼다던데 안 읽어 봐서 모르겠다. 이것은 이택광이 대응할 일이다.)

'알렙'에게 묻겠다. 내 논문은 제쳐 두고, 강정수 님 블로그 글 가운데 논문으로 가치 있는 글이 있다고 생각하시나, 없다고 생각하시나?

▶ 하나마나 한 얘기

아무리 주체와 욕망에 대한 철학적 이론으로 변모된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작동 방식'에 대한 가설을 그 내부에 포함하고 있는 한, 이것은 과학적 심리학에 의해서 제한되거나 반박될 수 있는 주장들을 담고 있게 된다. 아이추판다는 조 모씨의 미국 대학 총기 난사 사건에 대해서 이택광이 그가 정신분석을 받았다면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그렇게 했다. 이 반사실적 가정문은 특정한 대상 조 모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택광이 생각하는 '미국식 심리 치료'와 라깡식의 정신분석 사이의 차이에 대한 일반적인 가설이므로, 라깡식 정신분석이 다른 임상 치료법에 비해 더 나은 치료 효과를 거둔다는 경험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반박된다는 뜻이다. 이런 주장이 바로 '입증'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주장의 한 예가 된다.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 aleph-k

정신분석학자 또는 그 이론을 빌어 글 쓰는 사람이 하는 말은 결국 '아님 말고'다. 그것을 반박하는 객관적인 증거가 나오면 '아님 말고'가 아니라 '헛소리'가 된다. 이거 반대하는 사람? 손?

그러나 이러한 경험적인 과학에서 선험적인 메이트릭스(인문학 이론?)로 이론을 변모시킨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인간 존재를 해명하는데 적절한 이론인가에 대해서는 설득력있는 방식으로 그 타당성과 적절성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아님 말고'에 입증 책임을 묻다니 참 괴상한 사고방식이다. '아님 말고'식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더 나은 설명을 내놓으면 된다.

이를테면 김우재는 '조정환-이택광 촛불 논쟁'을 두고 ☞ "어떤 이론을 촛불에 적용시키고자 할 때, 과연 우리는 촛불이라는 사태에 대한 충분한 분석을 전제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문제 삼았다. 여기서 "충분한 분석"이란 정량화된 데이터로 뒷받침되는 분석을 일컫는 듯하다. 문제 제기 자체는 정당하다. 그러나 "그 문제의식은 실제 그러한 비평활동을 행함으로써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 그것을 다시한번 주장한다고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김우재는 '조정환-이택광 촛불 논쟁'을 구체적으로 논박하는 통계 수치 하나 제시하지 않았다. 못했겠지.

( ※ 이희경, "비평이 있는 비평을 위하여." 『낭만음악』 (서울: 낭만음악사, 1993 겨울), 제6권 제1호 (통권 21호). pp. 233-278. )

'데이터'가 절대적으로 모자란 상태에서 어떻게든 무언가를 논하려면 '아님 말고' 식으로 주장만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그 주장에 설득될지 말지는 읽는 이 마음일지라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부 논리가 탄탄한가 아닌가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사유하는 훈련은 인문학자가 과학자보다 더 많이 했다.

☞ 김원철, 〈과학자 vs 인문학자 싸움 구경: 인문학에 '아님 말고'를 허하라〉

2010년 12월 26일 일요일

과학자 vs 인문학자 싸움 구경 ② 논하기인가 증명하기인가

▶ 블로그 이사 때문에 글이 제법 늦었다.

구글 이너마들이 텍스트큐브를 없애버리고 블로거닷컴으로 통합해 버렸는데, 옛날 주소를 리디렉트(redirect) 해준다기에 다른 곳으로 이사하기도 뭣하더라. 생각보다 이사를 깔끔하게 해주기는 했다. 몇몇 버그가 아직 남아 있지만, 차차 해결하기로 하고.

아무튼, 이 글은 아랫글에 이어지는 글이다:

☞ 〈과학자 vs 인문학자 싸움 구경: 인문학에 '아님 말고'를 허하라〉

▶ 통약불가능? 지금 불가능한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가?

윗글에서 나는 학문 대상을 ― 그다지 명확하게 쓰지는 않았지만 ― ①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것 ② 얻을 수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 ③ 지금 기술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것 ④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나눈 다음 ②와 ③ 때문에 과학만으로는 곤란하다고 썼다.

'데이터'라는 말은 알고 봤더니 질적인 내용도 포함할 수 있는 말이더라. 그러나 이 글에서는 과학에서 말하는 양적인 데이터만을 말하기로 하자.

그런데 ③을 ④로 오해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 듯하다. ☞'저련'이 예로 든 '가바가이 문제'나 이택광이 말한 "오빠들 마음 속의 갈등"이 실제로 그 '오빠들' 마음속에서 일어났는지 아닌지 등은 기술적 제약이 없다고 가정하면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내가 ☞'루시앨' 블로그에 썼던 댓글을 인용하겠다.

재현가능성 문제는 기술적 제약이 없다면 대부분 해결 가능합니다. 자세히 설명하려면 얘기가 길어지는데, 《스타트렉》을 보면 비슷한 사례가 몇 차례 나오죠.

[…] 스타트렉 얘기는 이미 지나가버린 일을 재구성할 때 필요한 개념인데, 이걸 설명하려면 너무 많은 얘기를 해야 하므로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람 뇌에서 일어나는 신경 반응을 ① 원자 수준에서 ② 나노세컨드(nanosecond) 단위로 ③ 실시간으로 ④ 원격으로 ⑤ 인체에 무해하게 기록·분석하는 장치가 개발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가바가이' 문제 등이 한 방에 해결됩니다. 지금도 뇌 지도 그리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그런 장치가 개발됐을 때쯤이면 '뇌 스캐너'는 실시간 만능 통역기가 됩니다. 아예 외계 지성체를 만나더라도 '뇌 스캐너'가 그 외계인에게도 똑같이 쓸모 있기만 하면 외계 언어를 해독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지요. 해독 작업이 끝나면 외계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실시간 만능 통역기가 됩니다.

그런데 '저련'은 이번에는 '초랑색' 어쩌고 하는 패러독스(?)를 예로 들었다. 그러나 이 예는 개념 정의가 처음부터 논리에 맞지 않으므로 정의 자체를 폐기하는 데서 얘기가 끝나야 하지 않을까. 다시 물었더니 아래와 같이 답하더라. 나는 이것이 내 주장에 타당한 반박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인용은 해 둔다.

원철님 논지의 핵심이 <어떤 이론적 차이든 경험적으로 밝혀낼 수 있다>라고 읽었기 때문입니다. 인용한 두 사례는, 그것이 불가능한 이론적 개념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고전적인 사례입니다.

경험적 증거 수집 능력의 증대는, <이른바 문화적 영역에 대한 해석의 배경 이론으로 적합한 것을 선택하는 문제>의 핵심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원철님에 대한 논박으로 제가 생각한 것입니다.

이택광이 소녀시대에 대한 비평을 통해 시도하는 것은 소녀시대에 대한 대중들의 수용을 나름의 합리적 이야기로 정리해 보고자 하는 것인듯 합니다. 즉 역사적 작업이죠. 그런데 이 역사적 작업은 소녀시대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을 규제하는 개념에 대한 것입니다. 이 개념의 규제가 이뤄지는지, 저 개념의 규제가 이뤄지는지를 조작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가, 이게 문제겠지요. 이건 개념마다 물어봐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같은 경험적 증거만을 주지만 서로 다른 개념이 적용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제가 언급한 두 가지 고전적인 사례입니다.

'저련' 블로그에 내가 댓글로 썼다시피, 내가 알기로 데이터 얻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딱 하나 있다. 전자(electron)가 움직이는 궤적은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이 관찰할 수 없다고 한다. 전자를 관찰하려면 빛 또는 다른 어떤 종류라도 '에너지'를 전자에 쏴서 돌아오는 에너지를 받아야 하는데, 그 에너지 자체가 전자가 움직이는 궤적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확률적 '분포'밖에는 알 수 없다. 나도 잘 모르는 내용이라 더 자세한 설명은 안 해준다. 궁금하신 분들은 '양자역학'과 '불확정성 원리'로 검색해 보시라.

▶ 이택광의 '오지랖' 발언: 추상적 진실과 구체적 맥락 사이

이 글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좀 더 뒤에 나오지만, 그에 앞서 참고하면 좋을 얘기를 해 둔다. 새로 정리하기는 귀찮으니 한윤형이 쓴 ☞글에서 나랑 한윤형이 댓글로 주고받은 내용을 퍼오겠다.

한윤형

김우재는 트위터에서 오랫동안 이택광에 대한 반감을 표출해왔습니다. 뭐 그게 이택광이 말한 '맥락'인 셈인데, 이택광 글 맘에 안 든다, 안 좋다, 라고 거듭 언명하는 수준에선 큰 문제도 아니었지요. 싫다는데 어쩔 겁니까. 한국 사회나 진보담론이 과학자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투덜거림에선 참 여러가지 얘기거리들이 떠오르지만...

문제가 된 건 김우재가 이택광의 글을 링크를 걸면서 '학자로서의 양심' '논문같지도 않은 논문' 운운한 것인데, 이건 분명 "네 글 싫다." / "저딴 놈 글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와는 다른 차원의 발화죠. 이택광이 학문도 아닌 학문을 부여잡고 논문같지도 않은 논문을 써가며 학자로서의 양심을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건 굉장히 학적인 문제고 말을 꺼낸 사람이 입증해야 할 책임을 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김우재는 "지금 선생님 논문을 읽고 있다.", "곧 글을 비평해 드리겠다."라고 했으니 입증은 하기도 전에 단언부터 한 셈입니다. 뭐 트위터에서 한 소리니 좀 뒷담화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옹호할 수도 있긴 한데 발화만 보자면 그렇습니다.

이에 대해 이택광이 트위터에서 말을 걸었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까드리겠습니다."라는 김우재의 발언에 "초파리 연구자가 문화연구에 왜 간섭하나요?"라고 대꾸했습니다. 이 발언이 과히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김우재의 발언을 이해하려 드는 잣대에서라면 별로 과한 발언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김우재의 반응은 과학자이면서 문화연구가인 어느 학자의 견해를 블로그에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지요. 해당 발언에서 드러나는 이택광이 '편협'함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비트겐슈타인이나 니체가 박사학위도 없이 교수임용 받은게 어떻게 박사학위 없는 다른 사람이 교수임용 해달라고 떼를 쓸 수 있는 '근거'가 되겠습니까? 별 것도 아닌 제 발화에 대해선 논리성을 검증하겠다고 덤벼드는 분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선 침묵하더군요. 이택광이 뭐라고 하든 김우재가 정교한 글로 이택광을 비판한다면 될 일입니다. "과학자를 무시한다."는 주장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지요.

저는 이런 문제를 굳이 기술하여 누가 어느 부분에서 잘못했고 잘했고 하는 얘기를 쓰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생략한 것이지요. 그런데 원철 님도 그렇고 많은 님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해대니 이렇게라도 정리를 해두어야 할 것 같네요.

2010/12/12 11:41

김원철

윤형님이 정리해주신 맥락 설명은 매우 타탕합니다. 그러나 제가 쓴 '추상적 진실'이라는 말에 보충설명이 필요할 듯하네요. 김현진 떡밥 때 민노씨가 쓴 말인데요: http://minoci.net/982 그러니까 맥락과 무관하게 열폭할 빌미를 제공했다는 '추상적 진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김우재는 그 빌미를 가지고 이공계 전공자 전체를 상대로 공분을 호소했고, 실제로 그게 먹혔거든요. 심지어 capcold님 같은 분마저 낚이시던데요. 그런데도 제가 이 사건을 〈과학자 vs 인문학자 싸움〉으로 정의하니 일부로 논점을 흐리네 어쩌네…-_-

2010/12/12 12:05

한윤형

그 '추상적 진실'은 <디 워> 사태 때 "평론가들이 대중에게 선빵을 날렸다."는 김규항의 주장과 같은 것이겠지요?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그 '추상적 진실'이란게 정말로 진실인지 아닌지 파헤쳐봐야 하는 게 아닙니까?

무슨 우주 공간 설명하기 위해 블랙 메탈을 가정하는 물리학자들도 아니고...물리적 사건이야 돌이킬 수가 없으니까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무슨 가정이든 동원해야 하지만, 사람이야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무슨 소리들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왠 말장난이랍니까?

2010/12/12 12:16

김원철

그 말씀이 맞기는 한데요, 아무리 그러셔 봐야 이미 열폭한 사람들은 보고싶은 것만 보면서 '이택광 개객기'에 동참할 테니 저는 차라리 '이택광 잘못했음. 그러나 김우재는 변우재. 끗' 이러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윤리적 게으름이랄까요. -_-; 그리고 저는 김현진 떡밥에서는 민노씨가 '추상적 진실'을 앞세워 이택광을 비판한 일은 잘못이라고 못박았습니다. 왜 왔다갔다 하는지 궁금하시면 맥락을 봐 주세요. -_-;; http://wagnerian.textcube.com/581

2010/12/12 12:45

한윤형

이공계생과 인문대생의 문제는 또 별도로 중요한 논점인 것 같긴 한데...저는 이게 인터넷상에서만 보이는 미시적인 대립인지 아니면 실제로 상호간에 거대한 반감이 형성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단 말이죠...-0-;;;

2010/12/12 12:48

▶ 논하기 vs 증명하기

김우재 등이 인문학 전체를 공격했다는 내 주장에 대해 김우재 등이 내놓은 대답은 이렇다: 인문학이 문제라는 뜻이 아니라 정신분석학이 '논증'이라는 '기본'이 안 됐기 때문에 문제라는 뜻일 뿐이며, "여기 어디에도 과학과 인문학의 대립은 없다." 김우재가 블로그에 써놓은 수많은 글을 보면 참말로 그뿐일까 싶기는 하지만, 일단 ☞ 〈논증과 권위〉 같은 글만 보면 그렇단다.

논증이라는 말은 증명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 나는 정신분석학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 정신분석학에 제대로 된 논증이 없다는 주장은 타당한 듯하다. 정신분석학자건 아니건 그에 대해 반박하는 사람을 나는 못 봤다.

그러나 그뿐이다. 정신분석학에 논증이 없으므로 정신분석학에 바탕을 둔 정치·문화 평론이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는 둥 하는 호들갑이 논리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한윤형이 쓴 ☞글을 참고하시라.

내가 문제 삼고 싶은 대목은 논증이 없으면 학문이 아니라는 태도이다. 참말로 그런가? 이것은 가치판단 문제이고 자연과학을 전공한 사람을 설득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되므로 사회과학 쪽 예를 들어 조심스럽게 말해 보겠다.

이 글을 관심 있게 읽는 사람이라면 강정수 님을 아시리라 생각한다. ☞블로그에 참 좋은 글을 많이 쓰셔서, 나처럼 언론학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이른바 '소셜미디어 혁명'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눈치챌 수 있게 해 주시는 고마운 분이다. 그런데 블로그에 올려두고 말기에는 아까운 글이 많아서 몇몇 분이 강정수 님께 논문을 써보라고 권했더니, 강정수 님은 주장만 가득한 글이라 학술지에 싣기에는 곤란하다고 말씀하셨다. 그 뒤로 나와 강정수 님이 트위터로 주고받은 대화를 기억에 의존해 되살리면 이렇다.

김원철: 왜요, 우리 지도교수님이 곧잘 하시던 말씀인데, 논문은 '논하는 글'입니다.
강정수: 이 바닥에서는 논문은 곧 '증명'이라고 말합니다.
김원철: 헐, 제가 사정을 몰라 실례했네요. ;;
강정수: 아니요. 학계를 비꼰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강정수 님도 증명이 있어야 학문적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여러분은 어찌 생각하시는가? 강정수 님 ☞블로그를 읽고 각자 판단하시기 바란다.

사회과학과 달리 인문학 논문 가운데는 증명은 거의 없고 주장만 가득한 것들도 더러 있다. 나만 해도 제대로 된 논증이 없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 받았다. 그리고 내 전공은 Musikwissenschaft, 우리말로는 '음악학'이다. 음악 전문 사전을 찾아보면 음악학 하위 분과로 음악 비평을 포함한다. 자세한 내용은 내 논문에서 음악 분석과 음악 비평 사이 경계에 대해 고찰한 〈응용음악학을 위하여〉 단원을 참고하시라.

사정이 이러니 증명이 없으면 학문이 아니라는 태도는 인문학 전체를 공격하는 말일 수도 있다.

▶ 학술 용어와 학술 방언

'논증 드립'은 과학자뿐 아니라 자칭 '철학 덕후'인 'aleph-k'(이후 '알렙') 같은 사람도 하더라. 이 얘기는 위에 했으니 넘어가자. 그런데 '알렙'이 ☞ 〈정직하게, 더 정직하게〉라는 글에서 이택광 등을 헐뜯으며 "씨발 알아먹을 말을 해라"라고 하기에 나는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1. 실명 써야 정직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저는 실명을 좋아해서 실명 씁니다. ^^;

  2. 지젝·네그리·라캉·뭐시기 들먹이지 않고 쉽게 쓰려고 나름 노력하는 한윤형 씨한테 찌질이들이 훈장질하겠다고 뎀비는 일에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한윤형 씨가 오늘 쓴 글도 참고하시고요: http://yhhan.tistory.com/1289

  3. 저는 지젝·네그리·라캉·뭐시기 쥐뿔도 모르지만, 이택광 샘 글에서 "네그리가 한 말처럼" 같은 말 대략 무시하고 읽으면 논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은 없던데요. 낯선 학자 이름이 나온다고 글을 이해 못 하리라고 너무 성급하게 단정하지는 않으셨는지요.

  4. 제가 이택광 샘한테 불만일 때는 학자 이름이 아니라 국어사전에 없는 낱말을 일상어처럼 쓰시곤 하는 대목입니다. 이를테면 저는 '팔루스'가 뭔지 몰라서 검색하느라 한참 헤매다가 결국 댓글로 질문했는데, 이런 건 원어 표기만 해 줘도 알아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이죠.

2010년 12월 16일 오전 3:32

'실명 드립'은 다른 사람이 쓴 댓글에 '알렙'이 "정직함에 민감하면서 역시 익명이시군요 ㅋㅋㅋㅋㅋㅋ 누가 보면 제 여친이라도 되는 분인 줄 알겠어요."라고 썼기에 한 말인데 이게 중요하지는 않으니 넘어가시라.

그런데 '알렙'은 내 질문에 답하지는 않고 이런 댓글을 달았더라.

aleph_k :

'팔루스'란 개념은 특정한 학파만의 방언(jargon) 아닌가요? ^^; 누군가 라고 말할 때 그걸 듣는 청자는 프로이트가 제안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라깡의 독창적인 해석이라는 복잡한 이론의 대강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고 '전제되고' 있는 겁니다. 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매우 싫어요 ^^;

2010년 12월 16일 오후 4:43

'방언'이라는 말 뒤 괄호 속에 "jargon"이라 써놨으니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그러나 '학술 용어'라 해도 될 말을 굳이 '방언'이라 한 대목은 비겁해 보인다. '방언'이라는 말은 '표준어'와 구분해 쓰는 말이다. 그런데 표준어는 누가 무슨 기준으로 정하나? 어떤 것은 '학술 용어'이고 어떤 것은 '학술 방언'인가? 이쯤 되면 '권위'는 누가 앞세우면서 적반하장인지 모르겠다.

내가 예로 든 '팔루스'(phallus)라는 말은 이택광이 쓴 ☞ 〈김연아가 미국보다 더 좋은 까닭〉이라는 글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팔루스'가 무슨 뜻인지 몰라도 아랫글을 대충 이해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한국인들이 미국을 김연아보다 더 사랑하는 건 아니다. 한국인들은 미국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 미국의 팔루스가 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팔루스는 타자의 욕망을 나타내는 기표이다. 이 욕망의 기표는 결핍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미국의 팔루스가 되고자 한다는 건 미국의 결핍을 충족시킴으로서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표현은 의미화를 전제한다. '나는 너를 원해'라는 이 발화에서 중요한 건 '너'라는 기표이다. 쉽게 말하면, 한국인은 미국의 '너'로 의미화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인들은 김연아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자신들이 바로 미국이 욕망하는 기표이기를 염원한다고 볼 수 있다. 이건 우리 모두 미국인이 되자는 '대만 식 친미주의'와 다른 노선이다. 이미 이런 전조들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 중 <다이 어나더 데이>가 개봉했을 때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 한국이 정확하게 재현되지 않았다고 불매운동을 벌였던 사건은 앞으로 펼쳐질 이런 욕망의 구조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징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뜻을 모르는 단어 때문에 찝찝하면 나처럼 물어볼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한윤형은 ☞ 〈글쓰기의 가독성과 글쟁이의 밥그릇〉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난 대중이 '쉬운 글'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중은 뭔가 전문적이고 어려운 어휘를 마구 섞어쓰는 '우리편 전문가'가 내 편을 들어주길 바란다. 미네르바 글이 그런 것 아니었던가. 그의 비평 자체는 '뺑끼'임이 밝혀졌지만 말이다. 우리는 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ㅇㅁㅂ ㄳㄲ'라든가 'ㄱㄷㅈ ㄳㄲ'와 같은 감성을 포기할 생각이 없고, 이 감성을 어떤 전문가가 지지해주길 바라는 것이 아닌가? 쉽게 글을 쓰는 사람은 무시해도 좋은 얼간이일 뿐이다. 가령 살인적으로 친절한 글쓰기와 무한에 가까운 소통을 서비스로 제공하는 이 블로그가 한 사례인데, 내가 친절하게 대꾸하면 대꾸할수록 덧글러들은 술취한 한국 남성이 술집 아가씨 대하듯 나를 대할 뿐이다.

[…]

나는 이택광 글이 정말로 가독성이 부족했다면 악플도 달리지 않고 까도 창궐하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내가 아는, 가독성이 낮은 글을 쓰는 사람들의 블로그는 대개 덧글없이 휑하다. 이택광의 글에 악플이 달리는 이유는 적어도 그의 글에 어떤 수준의 가독성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가 내가 관심있는 대상을 다루고 있어서 들춰보았고, 8-9할은 알아들을 수 있는데 잘 모르겠는 이론용어 때문에 1-2할을 알아먹을 수가 없으니 신경질이 나는 것이다. 8-9할을 알아들을 수 있는 글을 쓰다는 건 이택광의 '한국어 능력'과 관련이 있다. 그 정도 한국어 능력이 없음이 명백해 보이는 분들이 그의 글의 가독성을 문제삼을 때 성질이 나는 이유도 그래서다. 쉬운 글을 읽고 싶다면 여전히 홍세화나 진중권이나 박노자나 김규항의 글을 읽을 수 있다. 그들에 비하면 듣보잡이지만 나같은 사람의 글도 있다. 굳이 문체가 있는 사람의 글을 붙들고 그의 글을 거세하려고 발광들을 하는 모습을 보면 꼴같잖지 않겠나.

내가 이택광 글을 읽으면서 짜증 났던 대목은 '팔루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 말이 국어사전에도 안 나오는데 원어 표기도 없어서 영어 사전을 찾을 수도 없어서였다. 말뜻을 모르면 사전 찾을 수 있게 써주기라도 해야지. 물어본 다음 답글 달릴 때까지 기다리려면 귀찮잖아. 이와 관련한 내 생각은 아랫글을 참고하시라:

☞ 〈글 쉽게 쓰기〉
☞ 〈글 쉽게 쓰기 vs. 알아서 읽으라고 배 째기〉

2010년 11월 28일 일요일

과학자 vs 인문학자 싸움 구경: 인문학에 '아님 말고'를 허하라

▶ 싸움났다.

아, 북한 시키들 얘기 말고. ㅡ,.ㅡ

이택광이 ☞ 〈정신분석학과 문화비평〉이라는 글을 올렸더니 ☞김우재가 트위터로 시비 걸고, 이택광이 비아냥거리다가 빌미 제공. 그런데 알고 봤더니 김우재가 옛날부터 꾸준히 시비를 걸었다고. 그 뒤 서로 원색적으로 비난.

여기에 낚인 분들이 내놓은 반응 가운데, 예상 가능한 피곤하고 찌질한 것들은 무시하고, 관심 둘 만한 것들을 눈에 띄는 대로 모아 보니 대충 이렇더라.

― aleph_k, 〈정신분석에 대한 한 가지 이야기〉
http://aleph-k.blogspot.com/2010/11/blog-post_26.html

― 아이추판다, 〈유령 학문〉
http://nullmodel.egloos.com/3508192

― (나중에 보탬) 김우재, 〈인문좌파를 위한 논증 가이드〉
http://heterosis.tistory.com/251

― (또 보탬) 저련, 〈통약불가능하다는 것〉 
http://blog.naver.com/non_organ/70098266319
↑ 이 떡밥이 왜 과학자 vs 인문학자 떡밥인지 이해 안 되는 사람은 이 글 필독

― (또 보탬) 한윤형, 〈라캉 정신분석과 비평의 문제?〉
http://yhhan.tistory.com/1286

― (또 보탬) 루시엘, 〈보다보다 못해서 개입.〉
http://freecracy.egloos.com/5405185
↑ 본문보다 댓글이 더 흥미진진한 글. ^^

― (또 보탬) 김원철, 〈과학자 vs 인문학자 싸움 구경 ② 논하기인가 증명하기인가〉
http://wagnerianwk.blogspot.com/2010/12/vs.html

여기에 더해 김우재 ☞블로그에서 '이택광'으로 검색했더니, 겉으로 라캉으로 대표되는 정신분석학을 공격하는 모양새이지만, 자세히 보면 과학자가 인문학자에게 보이는 반감이 '라캉'을 빌미로 드러나기도 하더라.

두 바닥이 서로 다른 프레임으로 따지다 보니 결정적인 대목에서 논지를 오해하거나 또는 (어쩌면) 알면서도 말 돌리기를 시도하는 모습이 관찰된다. 저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다는 얘기. 그래서 나도 내 편견과 깜냥에 바탕을 두고 썰을 풀어 보겠다.

▶ 과학자들이 화를 내는 까닭

과학자들이 정신분석학 또는 인문학을 공격하는 까닭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데이터 쌓느라고 이렇게 개고생 하는데, 저 시키들은 입으로만 나불거리잖아!"

여기에 중요한 전제가 있다. '정신분석학자, 또는 인문학자들은 자신이 무언가에 대해 썰을 풀 때 그 결함을 지적하는 과학적 증거를 만나면 그것을 개무시한다!'

이 전제는 사실인가? 위에서 소개한 글에서는 그렇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때때로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아닌 경우도 관찰된다.

포르트 다 놀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하신대로 그것은 발달론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그것을 분석가들은 모르지 않습니다. 분석가들이 포르트 다 뿐 아니라 프로이트의 사례를 하나의 전범으로서 간주하는 것은 우선은 그것이 프로이트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이론화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죠.

아이추판다님 글에서 Quid라는 사람이 단 댓글 가운데 일부다. 아이추판다님이 소개한 '포르트 다' 사례가 헛소리임이 밝혀졌을지라도 프로이트가 이론을 전개하는 방식은 참고할 만하다는 얘기다. 어떤 과학 논문에 결함이 발견되어 결론이 폐기되더라도, 실험에 쓰인 그럴싸한 기법이 있다면 다음 실험에 써먹을 수는 있다는 얘기와 비슷해 보인다.

문제는 결함이 밝혀졌을 때 정신분석학자나 인문학자들이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진심으로 노력하느냐다. 인문학자들은 그렇다고 주장한다.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몇몇 인문학자는 그럴 필요 없다고 우기는 듯하다. 내가 보기에는 과학자들이 하는 말이 옳을 때가 잦은 듯하다.

과학이 인문학을 점령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이 나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김우재가 바로 이렇게 주장하는 듯한데, 내가 이해한 바로 이것은 인문학이 쓸모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인문학자가 과학적 증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한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학자는 쓸모없으며, 따라서 그 자리를 과학자가 빼앗아 인문학적 사유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문학자는 과학을 배울 능력이 없으니 인문학 또한 과학자가 해야 옳다는 뜻이다.

▶ '데이터'는 어디까지 인정되는가

과학자는 증거도 없는 주장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과학에서도 증거를 어느 수준까지 인정하느냐 하는 기준이 분야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 까닭을 설명하는 주장으로 이런 게 있더라:

저는 인문학에는 깡통이고 통계와 관련된 공부를 한 케이스인데요, 여러 사회학에서 적용되는 통계를 볼 때 루시앨님의 첫번째 논지인 통계에 대한 다른 해석이 경험에 대한 다른 해석이라는 말에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제 관찰로는 대부분은 경험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아니라,

  1. 해당 학문의 수학적 모델 수립에 대한 성숙도
  2. 해당 학문의 연구자들의 수학 실력

이 두가지 팩터가 결정합니다. 수리통계적 근거가 약해도 accept 되는 분야는 수리적 support가 약하다고 해석하는 것이지, 경험에 대한 해석의 차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왜곡이라고 봅니다.

aleph_k님 글에 달린 댓글이다. 과연 그럴까?

사람 뇌를 연구한다고 생각해 보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특정 뇌 부위에 전극을 꽂아 놓고 실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 머리에 전극을 막 꽂을 수는 없다. (731부대는 했을지도…) 그래서 다양한 뇌 영상 기법이나 특정 뇌 부위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기법 따위가 개발되었다.

그 가운데 fMRI를 따져 보자. fMRI 데이터 분석 과정에는 어지간한 통계학 전공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가볍게 넘어서는 고급 수학 기법이 잔뜩 나온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수학 실력 운운하기는 어렵다. 연구자가 수학적 원리를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 대개 이렇더라 ― 계산은 컴퓨터가 하고 그 과정은 표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fMRI는 수많은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고, 그 가운데 하나라도 무너지면 fMRI 연구들을 모두 폐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뇌를 지나가는 혈류가 띠는 자기공명 특성은 정해진 회귀모형을 언제나 만족하는가, 뇌영상을 바탕으로 통계 처리하기에 앞서 해주는 수학적 변형 절차들은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하지 않는가, fMRI 분석 결과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뇌 좌표는 인종·성별·나이 등을 초월해 호환 가능한가, 등등.

이렇게 바탕이 허술한 연구 방법이 인정받는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더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없지는 않은데, 그 방법은 연구자가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쓸 수 있거나 돈 문제 등 현실적인 사정 때문에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이 정도 허술함은 치명적이지 않다고 그 분야 학자들이 합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합의하지 않는 학자도 더러 있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도 싸움나더라.)

좀 더 단순한 예를 들어 보자. 쥐를 가지고 실험을 해서 신경생리학적으로 의미 있는 어떤 결론을 냈다. 이 연구를 다음과 같이 공격할 수 있다.

Q: 쥐를 가지고 실험했다고 말해 봐야 쥐도 수많은 종류가 있고 유전자를 따지면 천차만별인데 그거 어떻게 믿냐?
A: 유전자 통제했다능.
Q: 그럼 특정 유전자를 가진 쥐에 한정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일 뿐이잖아?
A: 다른 종으로 또 실험하겠다능.
Q: 세상 모든 쥐를 다 실험할 테야? 유전자 레벨로 내려가면 가능한 경우의 수가 얼마인지는 알아?
A: …

그러면 이 실험은 그냥 폐기해야 할까? 이런 식이라면 신경생리학, 생물학, 심리학 따위가 존재 기반을 잃고 만다. 그러므로 어느 수준에서는 모자라나마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때 한 가지만 지키면 된다. 뒤집을 수 없는 결론이 나왔다고 우기지 말기. 그래서 결론은 이런 식이 된다. "A라는 실험 결과는 B를 시사한다."

실험 디자인에 제약이 많을수록 결론은 조심스러워지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설득력 있는 결론을 얻고자 실험 디자인에 수많은 잔머리를 동원하거나 정교한 통계 기법에 기대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수준까지 학술적으로 타당한지를 따지면 분야마다 기준은 달라진다. 물리학보다 생물학이, 생물학보다 심리학이, 심리학보다 경제학이 대체로 더 많은 '노이즈'를 떠안고 가야 하며, 그것을 극복하려고 더 복잡한 통계 기법을 동원하는 듯하다. 이때 더 복잡한 통계 기법을 썼다는 사실이 반드시 더 설득력 있는 결론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사정이 이러니 특정 분야 학자가 다른 분야 학자들에게 '너네는 과학이 아니라능!' 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일도 있더라. 그리고 인문학이야말로 가장 손쉽게 공격할 수 있는 먹이가 된다.

▶ 인문학에 '아님 말고'를 허하라

인문학자가 하는 말에는 '아님 말고'라는 말이 숨어 있다. 내가 보기에 인문학자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거니와 그것을 대놓고 말하기에는 모양새가 나지 않으니 그냥 생략하고 내부 논리가 탄탄한지만을 따지는 듯하다. 과학자에게 학문이란 '의심하고 증명하는 것'이지만, 인문학자에게 학문이란 '논하는 것'이다. 과학자가 보기에 이게 날로 먹는 듯싶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역사 변동을 수식으로 모델링할 수 있는가? 그 모델을 바탕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구체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가? 아시모프가 쓴 SF 소설 『파운데이션』을 보니 어느 수학자가 그런 일을 한다. 나는 처음에 코웃음 쳤지만, 참고 읽다 보니 어쩌면 그런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더라. 그런데 그런 일이 당장 가능한가? 수학자들이 역사학 좀 공부하면 할 수 있을까?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동안 노력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어림도 없다. 그 까닭을 일일이 따질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러면 역사 연구는 하지 말아야 할까? 김우재는 과학자들이 역사 연구도 해야 한다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참말로 역사 연구를 하시려고?

이를테면 김우재는 '조정환-이택광 촛불 논쟁'을 두고 ☞ "어떤 이론을 촛불에 적용시키고자 할 때, 과연 우리는 촛불이라는 사태에 대한 충분한 분석을 전제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문제 삼았다. 여기서 "충분한 분석"이란 정량화된 데이터로 뒷받침되는 분석을 일컫는 듯하다. 문제 제기 자체는 정당하다. 그러나 "그 문제의식은 실제 그러한 비평활동을 행함으로써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 그것을 다시한번 주장한다고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김우재는 '조정환-이택광 촛불 논쟁'을 구체적으로 논박하는 통계 수치 하나 제시하지 않았다. 못했겠지.

( ※ 이희경, "비평이 있는 비평을 위하여." 『낭만음악』 (서울: 낭만음악사, 1993 겨울), 제6권 제1호 (통권 21호). pp. 233-278. )

'데이터'가 절대적으로 모자란 상태에서 어떻게든 무언가를 논하려면 '아님 말고' 식으로 주장만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그 주장에 설득될지 말지는 읽는 이 마음일지라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부 논리가 탄탄한가 아닌가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사유하는 훈련은 인문학자가 과학자보다 더 많이 했다.

▶ 아쉬운 쪽은 인문학자다

인문학자가 과학적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인문학자가 과학을 무시하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설득할 책임은 결국 인문학자에게 있다. 이것은 논리 문제라기보다는 권력 문제다. 과학자들은 '증거'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그 무기를 가지고 인문학자를 몰아세우면서 입으로만 나불대지 말고 증거를 대라고 말한다. 사회적 권력도 과학자가 더 세다. 과학자는 실용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돈'으로 연결할 수 있으나 인문학자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보여줄 수는 없다.

김우재 같은 급진적인 과학자를 설득하려면 과학자가 쓰는 언어, 그 가운데 무엇보다 데이터로 '증거'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통계학에서 가설 검정을 왜 하는지를 올바로 이해하고, 통계학자가 도움말을 줄 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능력쯤은 있어야 한다. 이걸 못하겠으면 설득하기를 포기할 수밖에.

그런데 인문학자들이 논하는 학문 영역은 날이 갈수록 과학에 침식당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역사 변동을 수학으로 모델링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어떡할지를 지금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대목이다.

2010년 9월 14일 화요일

이택광의 '공인'과 민노씨의 '공인' : 연예인은 공인인가 아닌가

어젯밤에 트위터로 민노씨와 나눈 대화를 퍼옴. 새로 정리해 쓰기는 귀찮다능. ㅡ,.ㅡㅋ

dahlhaus: 개념글: 공인이라는 정치적 지점: 신정환과 MC몽의 경우 (이택광) http://wallflower.egloos.com/3438728 이거슨 @minoci 님의 '공인' 논리에 반박이 될 듯합니다. http://www.minoci.net/252

minoci: @dahlhaus 원철씨 덕분에 글 잘 읽었습니다. :) 1. 연예인의 공인성을 '즐거움'이란 표준으로 판단하는데, 글쎄요. 공적 시스템 자원(지상파는 공공재. 공공의 관심)을 활용할 수 있는 사회적인 지위라고 평가하는게 합리적일 듯 합니다.

minoci: @dahlhaus 2. 마지막 세 문단은 그 수사적 현란함 때문에 도무지 잘 읽히지가 않네요... 단두대라는 표현 대신에 길로틴(기요틴, 혹은 기요탱)을 써서 얻어지는 수사적 효과가 무엇인지 의문입니다. ㅡ.ㅡ;;

dahlhaus: @minoci 연예인에 대한 판단은 이택광샘 것이 아니라 대중의 판단을 고발한 것이죠. 말씀하신 세 단락은 정치인과 고위 관료 비리에는 눈 돌리면서 만만한 연예인만 욕한다는 얘기를 비튼 듯합니다. 이게 결국 탈정치적 억압기제고요. 마지막 문장이 압권.

dahlhaus: @minoci 민노씨의 공인 개념은 또 다르지만, 대중이 연예인을 광대 취급하는 현실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다음에야 민노씨의 공인 개념 또한 탈정치적 억압기재를 강화할 위험이 매우 크지 않을까요? 저는 택사마 글을 그리 읽었습니다.

minoci: @dahlhaus 글쎄요. 저는 그 수사적 과잉으로 모호하기 짝이 없는 문장을 왜 원철씨께서 그렇게 명징한 것으로 이해하시는지, 제가 이해력이 이토록 부족한 것인지... 그 문장을 좀 풀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dahlhaus: @minoci 음;; 제가 잘못 읽었을 수도 있으니 걍 제 생각이라 해둘게요 ㅡ,.ㅡㅋ 말하자면 마녀사냥이 마녀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 지배계급한테 매우 바람직(?)한 것과 마찬가지죠. 한윤형씨가 말하는 '사이버 민중주의'도 비슷하고요.

그리고 김원철이 옛날에 쓴 글도 참고하시라:

〈김현진 사생활 폭로 및 다구리 사태 ― 민노씨의 뒷북에 대하여〉
http://wagnerian.textcube.com/581

2009년 11월 14일 토요일

글 쉽게 쓰기 vs. 알아서 읽으라고 배 째기

이택광 블로그에서 내 댓글에 반박이 달려서 또 댓글 달았는데, 링크 때문인지 스팸으로 분류됨. -_-; 그래서 트랙백 날림.

그러니까 이 글은 아래 링크한 원문과 댓글을 읽고 나서 읽으시라:

☞ 이택광, 〈냉소주의 시대의 인문학자〉


아열대님 댓글은 제 댓글을 그냥 쉽게 쓰라는 무책임한 요구로 뭉뚱그려 받아들이신 듯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옛날에 쓴 글 트랙백 날릴 테니 읽어보시면 오해가 풀릴지 모르겠습니다.

☞ 글 쉽게 쓰기

제가 쉽게 쓰라고 한 곳은 어휘 및 통사구조 수준인데, 만약 그마저도 못하겠다고 하신다면 "주체의 미메시스적 능력" 운운은 그저 자신의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핑계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쯤 되면 『계몽의 변증법』 서문은 오히려 제가 인용해야 할 말이 됩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려는 마음가짐 참 좋지요. 그러나 마음가짐만으로 되나요? 이미 인지체계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데? 신문에 한자가 넘쳐나던 시절을 기억하십니까? "주체의 미메시스적 능력"을 그런 식으로 확대 적용한다면 한자가 넘쳐나더라도 조금도 문제 되지 않을 테지요. 한자사전 찾아보면 다 나오니까요. 신문에서 한자를 가장 먼저 털어버린 곳은 한겨레입니다. 가장 늦게, 그것도 마지못해 털어버린 신문은 조선일보입니다. 그러면 한겨레 신문이야말로 "주체의 미메시스적 능력"을 망쳐놓은 주범이요, 조선일보야말로 그것을 끝까지 지키고자 노력한 '정론지'일까요?

언어 문제는 권력 문제입니다. 한겨레가 한자를 털어버릴 때에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겠지요. 하버마스는 '언론이 공공재이며 민주주의 필수조건이므로 올바른 언론 공급 및 소비가 사회적 과제'라 했습니다. 그런데 언론이 대중의 이해수준을 뛰어넘는 언어체계로 장벽을 쌓는다면? 스스로 권력주체가 되어 대중 위에 군림할 뿐이죠. 요즘 같은 인터넷 환경이라면 대중은 그 권력주체에 냉소를 퍼부으면서 반지성주의라는 또 다른 장벽을 쌓겠고요.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어떤 학생이 논문을 쓰는데, 지도교수가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게끔 쉽게 써라.' 했답니다. 이 말은 논문을 난도질해 초등학생 수준에 맞는 '동화'를 쓰라는 요구일까요? 언어 문제를 권력 문제로 돌이켜보아야 이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매직 넘버 세븐'(magic number 7)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사람의 단기 기억 폭(Short-term memory span)이 전화번호 7자리 숫자 따위를 외울 만큼이라는 얘기입니다. 사실은 하버드대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라서 실제 평균은 5 안팎이라고도 하지요. 단기 기억 폭만이 아니라 사람이 처리할 수 있는 주의자원(attention resource)은 터무니없이 작습니다. 이 주의자원을 과제에 맞게 효율적으로 다루려면 훈련이 필요하고요. 훈련이 안 된 사람과 소통을 잘하려면 쓸데없는 '메모리' 낭비를 줄여야 합니다. 버려야 할 '메모리'는 무엇일까요?

참고:

☞ 컴퓨터로 글을 읽는 것은 책으로 읽는 것보다 주의를 분산, 학습에 저해된다

☞ 인지향상 (CE)테크놀로지: 미래 인지과학기술 응용의 초점

2009년 10월 31일 토요일

김현진 사생활 폭로 및 다구리 사태 ― 민노씨의 뒷북에 대하여

나는 김현진이 누구인지 모른다. 기껏해야 한윤형씨 블로그 글을 읽고 '그런 사람이 있나 보다.' 수준으로 기억할 뿐이다. 이 블로그를 찾는 사람도 대부분 김현진을 모르리라 생각한다. 클래식 음악 얘기를 하는 이 블로그에서는 김현진 사태보다 ☞'크레디아 비리 의혹 사태'를 말해야 알맞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굳이 뒷북 글을 쓰는 까닭은 민노씨 글에 짧게 댓글을 달았다가 소통이 제대로 안 되고 민노씨 화만 돋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민노씨 글에 다는 '댓글'이라 할 수 있다.

▶ 김현진 사건 정리

http://heeyo.egloos.com/1963001
http://heeyo.egloos.com/1963042
http://heeyo.egloos.com/1963052

☞ 민노씨.네 ― 〈추상적 진실과 구체적 진실 : 혹은 편들기와 정당화의 차이〉


▶ '드립'이라는 말

나는 '드립'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모른다. 한윤형씨 블로그에서 '―드립'이라는 말을 보고 재미있어서 뜻도 모르고 썼는데, 민노씨가 "조롱"과 "공격"으로 받아들이니 가치중립적인 뜻으로는 쓸 수 없는 말인가 보다. 생각해 보니 한윤형씨도 이 말을 좋은 뜻으로 쓴 일은 없었지 싶다.

따라서 내가 "'주성영' 드립"이라는 말을 쓴 일은 바르지 않다. 민노씨께 사과 올린다. (_._)

그런데 진짜 '드립'이 무슨 뜻인지, 어디서 왔는지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눈치가 대략 게임 용어에서 온 듯한데, 김원철은 겜맹이다. ㅡ,.ㅡa

▶ '공인'과 '유명인'

원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다. 김현진을 '주성영'으로 바꿔치기하는 일은 잘못되었다.

이택광 논리를 쫓자면 국회의원 주성영이 술집 여사장에게 '행패'를 부린 건 '주성영'과 '술집 여사장'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이니, 주성영 '개인'에 대한 도덕적 공격을 감행하는 것은 크게 동의하기 힘든 일이 된다.

주성영이 아니라 조갑제라면 나는 민노씨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 조갑제는 ― 내가 잘못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 주성영과는 달리 공직에 있지 않아서 김현진과 바꿔칠 수 있으나 주성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주성영은 공인이나 김현진과 조갑제는 공인이 아니다.

그러나 민노씨는 '공인'이라는 말을 '유명인'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는 듯하다. 나이브한 수준에서 연예인을 '공인' 운운하는 게 아니라 연예인을 공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확신과 근거가 있다는 말이다. 민노씨 논리체계에서 연예인을 포함한 모든 유명인은 '공인'이며, 따라서 김현진을 주성영으로 바꿔쳐도 아무런 문제 없다.

나와 민노씨 사이에 의견이 갈리는 까닭은 '공인' 개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논의는 골치 아파진다. '공인'을 다루는 민노씨 주장이 제법 타당하기 때문이다.

▶ '공인'과 권력

공인이 일반인과 다른 수준의 비판을 감당해야 하는 까닭은 그들이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인'을 어찌 정의할지는 '권력'을 어찌 정의할지와 같은 문제가 된다. 김현진은 권력이 있는가? 조갑제는 권력이 있는가? 나는 김현진과 조갑제가 가진 '언론권력'이 진짜 권력이 아닌 유사권력으로 책임 영역과 수준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택광 인용으로 대신하겠다.

87년 이후 한국으로 유입된 '시민사회론'의 영향 때문인지, 한국에서 '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대체로 하버마스의 뉘앙스를 많이 풍긴다. 그래서 항상 한국에서 중요한 것은 '공공적 합의'라는 말이지만, 도대체 이게 한국사회에서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한 성찰은 없다. (…) 연예인이나 명사를 '공인'이라고 부르고 이들에게 일반인보다 더 강한 도덕성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속류화한 하버마스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애먼 하버마스가 엉뚱한 곳에 와서 고생한다는 느낌이다. 나는 이런 결과의 책임을 가라타니 고진처럼 하버마스의 이론 자체에 내재한 결함에서 찾을 생각은 없다. 하버마스를 면밀하게 읽어보면, 그가 말하는 의사소통의 공간이라는 건 '이상적인 것'이지 결코 실현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택광 ―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나는 이택광이 정의하는 '공인'과 내가 정의하는 '공인'이 일치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택광은 칸트 얘기를 하고 있는데 나는 그 얘기가 알쏭달쏭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택광은 김현진 같은 이를 '작가'라 부르며 '유사권력의 책임 영역'에 뚜렷한 선을 그었으므로 김현진과 관련해서는 내 생각과 맞아떨어지는 듯하다.

지금 일부 진지한 이들조차도 인터넷상에서 특정 개인에 대해 가하는 다구리를 '공공적 합의'라고 착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내가 칸트를 끌고 들어온 것이다. 칸트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라는 영역 내에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지 아니면 사적으로 사용하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김현진이 작가로서 하는 행동과 실제로 드러난 행동이 달랐다는 사실을 다구리의 정당성으로 들이미는 이들이 있지만, 이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칸트의 정의에 따르면, '작가'는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현실에서 공무원이거나 정치가이거나 회사원이거나 하는 문제를 넘어선다. 작가로서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상정하고 글을 쓰는 순간 그는 공적으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칸트의 말대로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항상 자유로운 행위이다. 말하자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누구나 그것을 출판해서 독자들에게 내놓을 수 있다. 이런 사용은 제한 받지 않는다.

☞ 이택광 ―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 민노씨의 논점 일탈

나는 이번 사건을 글 제목에 쓴 바와 같이 "김현진 사생활 폭로 및 다구리 사태"로 이해한다. 2PM 재범 사건에서 "Korea is gay" '드립'보다 네티즌의 다구리와 그 바탕에 숨은 대중의 비틀린 욕망이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김현진 사건에서 김현진이 저지른 죄보다는 대중의 다구리와 비틀린 욕망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택광은 김현진 사건과 2PM 사건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 '비틀린 욕망'을 분석했고, 한윤형은 여기서 더 나아가 섹스·연애 칼럼리스트 및 워너비들이 블로그로 '유사권력'을 쌓는 방식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김현진을 공격했다는 그 '자매'들이 이번에는 한윤형을 공격했다. 공격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쓴 '무기'가 논리가 아닌 사생활 폭로라는 비겁한 짓거리라는 대목이 문제다. 민노씨는 이것을 단순히 "과도한 비판과 비난"이라 했으니 내가 보기에는 논점 일탈이다. 내가 민노씨 글에서 댓글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나는 남을 뒤에서 헐뜯는 말을 몹시 싫어한다. 자세한 내용은 ☞ 〈남 뒤에서 헐뜯기〉로 대신하겠다. 그러나 뒤에서 좀 헐뜯어도 되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공인'이다. 나는 김현진이 '공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김현진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짓거리가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이택광은 하버마스와 칸트까지 불러내서 바로 이 얘기를 했고, 또 김현진의 허물을 이유로 '작가 김현진'을 사회적 교수형에 처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민노씨 주장과는 달리 '신세대 에세이스트'라는 아이콘은 이택광이 보호하고자 한 가치의 본질이 아니다.

▶ 다시 '공인'과 '유명인'

나는 처음에 민노씨가 한윤형 글을 읽지 않아서 사건 맥락을 제대로 파악 못하지 않았나 의심했다. 그러나 댓글로 한윤형 글을 읽었음을 알았으니, 결국 의견이 갈리는 근본 원인은 '공인'을 서로 다르게 정의하고 있다는 데에 있는 듯하다.

이거 참 결론 안 나는 문제다. 그래서 민노씨가 '김현진'을 '주성영'으로 바꿔친 방식을 흉내 내어 이번에는 '2PM 재범'으로 바꿔친 다음 민노씨 글을 요약해 봤다. 민노씨를 비꼬려는 뜻은 없으나 '공인'에 대한 내 주장을 확인시키고 민노씨 논리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에는 적절하리라 본다.

▶ '김현진'을 '주성영'으로, 다시 '2PM 재범'으로

2PM 재범은 "Korea is gay"라는 말로 한국을 폄하했다. 민노씨 주장을 좇자면 재범이 어떤 맥락에서 이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유명인에게 주로 문제가 되는 건 '추상적인 진실'이다. "폄하" 그 자체가 문제 된다. 왜 폄하했대? 무슨 상황이었대? 언제 어디에서 폄하했대? 무슨 말로 폄하했대? 이런 걸 관심 있어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일단 '폄하했다'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민노씨는 ☞ 〈소셜미디어와 대한민국 : 소통과 다양성이라는 환상〉이라는 글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리승환이 지적하는 것처럼 "한국은 좆같은 나라"이기도 한데, 그 맥락은 거세되고, 고민할만한 가능성, 즐겁게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증발한 채로, 그 불경한 목소리만 거룩하기 짝이 없는 대한민국, 그 고결한 시장의 법칙에 의해 '일망타진'된다.

그러니까 민노씨 글은 '추상적인 진실'을 무시하고 '구체적인 진실'과 그 맥락에 매달리는 오류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걸 쉬운 말로 '편들기'라고 한다.

▶ 김현진과 2PM 재범

이 글은 민노씨 보라고 쓴 글이다. 그러나 이 블로그를 찾는 사람은 다양하므로 독해력 떨어지는 누군가가 내 글을 오해할까 걱정되어 굳이 이택광 글을 또 인용한다. 요 밑에 쓴 글에서 밝힌 바 있듯이 김원철은 이택광'빠'다.

진보라는 이념이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위해 그 진보의 담론이 동원된다는 사실을 이번 사태는 잘 보여준다. 김현진 해프닝은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2PM의 박재범을 쫓아낸 그 멘털리티가 다른 얼굴로 나타난 것뿐이다.

☞ 이택광 ― 〈김현진에 대해〉

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바그너 색깔론 ― 이택광 떡밥

이택광 블로그에서 ☞'이택광 빠' 선언을 하고 나니 이택광 블로그에 바그너 관련 글이 올라왔다. 이거 나 보라고 쓴 듯하다. ㅡ,.ㅡa

☞ 이택광, 〈이스라엘과 바그너〉

이 글은 김원철이 이제껏 읽어본 ☞바그너 색깔론 떡밥 가운데 가장 편견 없고 논지가 명쾌하며 무리한 주장도 없다. 그러나 글이 짧은 만큼 자세한 사실 관계를 담아내지 못했고, 따라서 바그너를 헐뜯는 사람과 감싸는 사람이 모두 오해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투덜댈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나는 자칭타칭 바그네리안으로서 이 글에 보충 설명과 지엽적인 반론, 그리고 내가 바그너를 듣는 행위 변명을 겸하는 '댓글'을 쓰려고 한다.

먼저 알아둘 사실이 하나 있다. 바그너는 애초에 사상적·정치적 일관성이 없는 인간이라서 이를테면 바그너를 파시즘의 조상이라 규정하고 나면 이내 바그너가 사실은 좌파였다는 반론과 함께 수많은 증거를 만나게 된다. (바그너가 좌파였다는 얘기를 처음 듣는 사람은 ☞ 〈바그너 색깔론 떡밥: "Richard Wagner in the year 2000" 부분 번역〉을 참고하시라.) 바그너에게서 굳이 일관성을 찾자면 두 가지를 들 수 있겠다. 하나는 기회주의, 다른 하나는 19세기 천재 담론에 바탕을 둔 자뻑 망상, '나 바그너를 숭배하라!'

바그너의 반유대주의 혐의는 "K. Freigedank"("자유로운 생각")이라는 필명으로 내놓은 ☞〈음악 속 유대주의〉(Das Judenthum in der Musik)라는 글에서 비롯한다. 이때 바그너를 감싸는 근거로 바그너의 수많은 유대인 친구들과 ☞《파르지팔》을 초연한 유대인 지휘자 등이 불려 나오는데, 이 또한 기회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

〈음악 속 유대주의〉에 나오는 '유대인'의 정체는 알고 보면 두 사람으로 줄일 수 있다. 젊은 바그너에게 수많은 도움을 주었던 마이어베어(Giacomo Meyerbeer, 1791―1864), 그리고 바그너가 평생 열등감에 시달렸던 '엄친아' 멘델스존.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바그너보다 먼저 성공한 유대인 음악가로 바그너 출세길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데 있다. 바그너는 당시 독일에 창궐하던 반유대 정서를 이용하여 이 두 사람을 타격했고,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바그너는 은인을 배신한 고약한 마음씨와 '듣보잡이 진중권 물어뜯는 듯한' 찌질함을 함께 드러내고 말았다. 무엇보다 이 글에 나타난 인종주의는 유대인 친구들을 읊어대는 정도로는 변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를 파시즘으로 곧바로 이어 말하는 일은 잘못이다. 인종주의와 파시즘이 무관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둘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또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는 바그너 후손의 명백한 나치 부역 행위와도 곧바로 이어지지 않는다. 적지 않은 사람이 이런 잘못을 저지르곤 하는데, 그와 달리 이택광이 반유대주의까지만 거론한 대목은 참으로 적절하다.

사상이 불순한(?) 예술가가 내놓은 작품이 훌륭할 리 없다는 순진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을 설득하기는 이택광 말마따나 "멸치를 고래라고 설득시키는 일보다 더 어려울" 터이니(☞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속 편할지도 모르겠다.

진짜 황당한 부류는 바그너를 들으면 파시스트가 될 거라고 공포를 조장해대는 사람인데, 나는 이와 관련해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을 빌어와 비꼬기도 했다. 그런 주장이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 원인을 마릴린 맨슨에게 뒤집어씌우는 짓거리와 마찬가지로 참된 원인을 은폐할 뿐이라는 얘기다. (자세한 내용은 ☞ 〈볼링 포 히틀러 (Bowling for Hitler)〉 참고. 괜히 흥분해서 무슨 소린지도 모르고 지껄여댄 대목도 더러 있으니 적당히 걸러서 읽으시라. ㅡ,.ㅡa)

이택광은 모든 예술행위는 정치적이며, 순수예술 또한 마찬가지라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작품을 내놓고 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움베르토 에코)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그 정치성이 평면적이지 않다는 사실 또한 지적할 필요가 있다. 바그너와 관련지어 말하자면 "바이마르 공화국 좌파 지식인들과 독일민주주의공화국 바그너 학자들이 바그너를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예언가로 선언"(☞참고)했던 사실에서도 이것이 잘 드러난다. 내 주변을 돌아보아도 바그네리안으로 소문난 사람들 가운데 계급 이익에 충실한 몇몇 사람을 빼고 나면 대체로 진보 세력에 호의적이다. (김원철은 진보신당을 지지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술가나 예술 작품 자체가 아니라 예술가 및 작품을 둘러싼 담론이라 하겠는데, 이런 맥락에서 텔아비브에서 처음으로 바그너 음악을 지휘한 사람이 유대인이면서 그 누구보다도 자주 바그너 작품을 지휘한 다니엘 바렌보임이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참고: ☞〈‘행동하는 음악가’ 다니엘 바렌보임〉. 바렌보임과 에드워드 W. 사이드가 나눈 대화를 담은 『평행과 역설』이라는 책도 있는데, 한글 번역이 엉망진창이라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ㅠ.ㅠ)

그리고 이택광은 바그너와 관련해 매우 훌륭한 정치적 담론을 내놓았다.

그리고 바그너에게 책임을 묻는 그 행위를 확대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거론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야한다. 말하자면 나치에게 책임을 묻는 행위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행하는 만행에 대한 책임을 묻는 행위와 함께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책임을 묻는다'는 윤리적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당성이다.

이택광이 인상적인 대목이라며 인용한 동영상은 ☞《라인의 황금》 피날레, 불레즈 지휘에 셰로(Patrice Chéreau) 연출 ☞바이로이트 실황이다(☞ DVD 정보 참고). 내가 보기에 이 영상물에서 가장 멋진 대목은 ☞《신들의 황혼》 피날레다. 처연한 음악(이른바 '희생' 모티프), 흰색과 붉은색의 강렬한 대비, 객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담담한 눈빛을 보시라.

제 목:이 모든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 줄 ... 관련자료:없음 [6905] 보낸이:이정환 (andie ) 2002-01-14 17:10 조회:48

[이 모든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 줄 아십니까?]

불레즈의 신들의 황혼 맨 끝장면을 보면 라인의 처녀들이 브륀힐데가 돌려준 반지를 들고 환호하며 다시 라인강으로 사라지고 발할성은 불타오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대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객석에는 등을 보인채... 그들은 발할이 타오르면서 라인강의 모티브가 서정적으로 흐르면 모두들 하나 둘 씩 천천히 일어나면서 몸을 돌려 관객석을 바라다 본다.

담담하고 처연한 표정으로 ... 그들은 이렇게 관객들에게 묻는 듯 하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끝 맺음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라고....

*내가 예전에 말했듯이 반지의 주제는 사랑이다. 누구보다 바그너에 열광했던 히틀러는 기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바로 링의 전체를 가로지르는 일관된 주제. 즉, 진실되고 희생적인 사랑없이는 이 세상은 결코 평화로울수도 정의로울수도 없다라는 것을 ... 히틀러의 방법론은 어디에도 사랑이나 배려 정의가 없었다. 이 것이 그를 엄청난 전화로 몰고 갔고 결국은 비참하게 종말을 맞게 한다!

베를린이 함락되고 히틀러가 자살하던 날,

독일방송은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한채, 하루종일 '신들의 황혼'을 틀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것은 매우 상징적이고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독일은 결국 그 허위로 세워진 발할의 붕괴를 겪었고, 그 폐허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며 결국 민족의 재통일마저 이뤄냈다. 아직도 여러 문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독일의 유럽공동체내에서의 위치는 일본의 아시아에서의 리더십 부재와의 현실 (솔직히 일본이 그 가진 돈과 힘만큼 아시아의 맹주행세를 할수 있는가? 어림 없는 얘기다. 일본은 불분명한 전후처리로 인해 아시아에서 아직도 왕따 신세다) 과는 대조될만큼 독일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고, 그러한 변화를 다른 유럽 국가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다.

바그너를 들으면서 특히 링을 들으면서(아니 이제부턴 보고 들으면서 ^^; 홈씨어터 5.1채널 쥑입니다요) 아직까지도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바그너 텍스트의 위대함에 경탄을 금치 못하겠군요!

정말 반지 시리즈는 음악과 극 그리고 모든 그 이후 예술의 방향을 다시 점검하게 한 위대한 걸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그네리안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반지는 오늘도 나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 줄 아십니까' 라고....

바그네리안 앤디.

― 하이텔 '바그네리안' 게시판에서 퍼옴.


이 글과 관련해 김원철이 추천하는 글:

☞ 박노자, 비극의 상업화, 홀로코스트. 한겨레21, 2002.11.28.

☞ 이진, 이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 시트콤 속의 바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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