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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7일 월요일

뉴욕필, 디지털 박물관 열어… 번스타인이 메모 남긴 말러 악보 등 인터넷으로 열람 가능

뉴욕필이 디지털 박물관(Digital Archives)을 열었습니다. 번스타인이 지휘자로 있던 1943~1970년 시절 자료를 일차로 공개했고 앞으로 더 많이 공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번스타인이 뉴욕필 데뷔한 때가 1943년이며, 음악감독으로 있던 기간은 1958~1969년입니다.)

번스타인이 메모를 남긴 말러 악보가 현재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지만, 저는 바그너 악보에 무슨 메모를 남겼는지가 더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바그너 《신들의 황혼》 3막 마디 950-4.
© 2001 - 2011 New York Philharmonic. All rights reserved.

악보는 이른바 '지크프리트 장송 행진곡'에서 트럼펫 폭발하는 대목이지요. 번스타인은 바이올린 바로 위에 "poco a poco in 4 ~~→ T"라고 써놨습니다. "T{" 뒤에 나오는 성부가 트럼펫이고요. 한 마디에 4박자로 비팅(beating)해서 트럼펫 나올 때까지 크레셴도 하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연주할 때 이른바 '바이로이트 양식' 또는 '돌파(Durchbruch)' 양식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지휘자에 따라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고 쓴 일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5)

저는 위 메모를 보고 번스타인이 '바이로이트 양식'을 따르지 않았나 추측했습니다. 마침 유튜브를 찾아보니 음원이 있네요.

4분 3초쯤부터가 위 악보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음질이 그다지 좋지는 않으나 트럼펫을 그다지 극적으로 부풀리지 않고 앞서 나오는 현 크레셴도를 살립니다. 더군다나 악보 다음 쪽에 나오는 마디 956 트럼펫 온음표는 악보에 지시한 길이대로만 연주할 뿐 아니라 갑자기 음량을 줄이기까지 합니다. 숄티가 이 트럼펫 온음표를 절정으로 잡고 두 배로 늘여 연주하며 음 길이만큼 크레셴도로 다스린 대목과는 많이 다르지요.

뉴욕필 디지털 박물관에 더 재미난 내용이 많으니 찾아보세요:
http://archives.nyphil.org

☞ 『뉴욕 타임스』 기사

2009년 10월 18일 일요일

바그너 3문 3답

방명록과 메일로 누가 질문을 해서 이참에 새 글로 올립니다. 참고로 저한테 연락하려면 트위터가 가장 빠르고 그다음이 블로그입니다. 메일은 하루에 한 번씩은 확인하지만 더 빠르다고 하기는 어려워요. ^^

▶ 바그너 음악은 '아름다운가'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은 그 대상보다는 '아름답다'라는 말 속에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지요. 베토벤 《교향곡 5번 C 단조》는 아름답습니까? 친구들은 아름답다고 합니까? 부모님은? 13세기 유럽 사람은 어떨까요?

▶ 가사와 음악의 관계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네요.

① 두운. 당시에는 각운이 '대세'였으나 바그너는 두운을 썼습니다. 《니벨룽의 반지》에서는 시작부터 두운이 나오지요. "바이아 바가 보게 두 벨레~"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을 참고하세요: 안인희,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 (서울: 민음사 2003)

② 가사 그리기(word painting). 가사와 음악이 어우러지게 하는 기법은 중세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입니다. 이를테면 '지옥'이라는 가사에서 하행 도약 음정이 나오거나 불협화음이 나오는 식이지요.

③ 라이트모티프. 가사 그리기와 나란히 생각할 수 있겠는데, 자세한 내용은 요기를 참고하세요: http://wagnerian.textcube.com/entry/Leitmotiv

▶ 신계 멸망의 의미

작품을 내놓고 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 했으니 해석하는 사람 마음이겠지요. '살아남은 놈이 강한 놈이다.'라는 명제에 비추면 신보다 인간이 강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

발할 성에 대한 가장 흔한 해석은 몰락해 가는 거대 권력입니다. 이를테면 나치 시대 베를린이 함락될 때 '발할 성이 무너졌다!'라고들 했지요. 그날 독일 라디오 방송이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하루 내내 《신들의 황혼》을 틀었다는 말도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바로 아래 글을 참고하세요. 또 9·11 사건 때에도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신들의 황혼》 오리지널 대본에는 음악에는 쓰이지 않은 브륀힐데의 독백이 더 있습니다. 바그너 자신의 '해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자세한 내용은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를 참고하세요.

그밖에 《니벨룽의 반지》 영상물이 여럿 있으니 연출을 어찌했는지를 살펴보면 연출가가 이 대목을 어찌 해석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 슈투트가르트 극장 프로덕션(Zagrosek 지휘) 같은 엽기 연출도 꼭 참고하세요. ^^

2009년 8월 17일 월요일

2005.09.29. 《신들의 황혼》 - 게르기예프 / 마린스키 극장 오페라단

신들의 황혼 Götterdämmerung -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오페라단
9월 29일(목) 저녁 5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 휘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연 출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감 독 : 블라디미르 미르조예프 Vladimir Mirzoev
무대 디자인: 조시 티시핀 George Tsypin

브륀힐데 : 올가 세르게예바 Olga Sergeyeva
지크프리트 : 알렉세이 스테블리안코 Alexey Steblianko
군터 : 예뎀 우메로프 Edem Umerov
알베리히 : 빅토르 체르노모르츠예프 Viktor Chernomortsev
하겐 : 알렉세이 탄노비츠키 Alexei Tannovistsky
구트루네 : 발레리아 스텐키나 Valeria Stenkina
발트라우테 : 올가 사보바 Olga Savova
노른 1 : 루드밀라 카누니코바 Liudmila Kanunikova
노른 2 : 스베틀라나 볼코바 Svetlana Volkova
노른 3 : 타티아나 크라브초바 Tatiana Kravtsova
보클린데 : 마르가리타 알라베르디안 Margarita Alaverdian
벨군데 : 리아 셰브초바 Lia Shevtsova
플로스힐데 : 안나 키크나드제 Anna Kiknadze



<신들의 황혼>에서는 앞선 시리즈와는 달리 서막 및 1막부터 연주의 완성도가 높았다. 다른 '반지' 시리즈에 비해 현의 비중이 적은 편이라 다이내믹과 밸런스 사이의 트레이드-오프(trade off) 문제도 덜했다. (현의 음량 부족 문제에 대해서는 <라인의 황금> 편을 참고하라.) 연주자들의 집중력이 <발퀴레> 2막보다는 못했지만 전체적으로는 4부작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연주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1막부터 너무 열심히 한 탓인지 3막에서는 끝을 향해 갈수록 연주가 조금씩 불안정해졌던 것은 옥에 티였다.

템포는 빠른 편이었으며, 맹약 장면과 기비히 무사들이 군터를 환영하는 장면 등에서는 깜짝 놀랄 만큼 빠른 템포로 몰아붙였다. 이 부분의 템포를 빠르게 한 것은 나름대로 참신한 해석이었고, 또 러시아 지휘자 및 악단과 어울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바그너 음악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를 해치는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다. 맹약 장면과 군터 환영 장면은 바그너 특유의 제의(祭儀) 장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바그너의 작품은 그 자체가 제의적이기도 하지만, 작품 속의 제의 장면은 감상자에게 특별한 영적 고양감을 일으키곤 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하라: 안인희,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 (서울: 민음사 2003) 202-205쪽.) 음악으로 제의적 효과를 일으키기 위해 템포는 느린 것이 좋으며, 이 점에서 바그너식 제의의 정점에 선 작품은 바그너가 무대신성제전극(Bühnenweihfestspiel)이라고 불렀던 작품인 <파르지팔>이다. (1막에서 성배기사들의 행렬 장면과 성배 의식 장면을 들어보라.) 하겐이 기비히 무사들을 소집하는 장면과 그에 이어지는 합창도 전체적으로 훌륭했지만, 역시 제의적 요소를 살리는 데에는 실패했다. 지크프리트 장송행진곡과 브륀힐데 자살 장면("저기 라인 강가에 강한 장작들을 나를 위해 더미로 쌓아다오! Starke Scheite schichtet mir dort am Rande des Rheins zuhauf!" 이후부터 끝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서막 전주곡 마디 6과 마디 14에서는 트럼펫의 음정이 엉뚱하게 들렸다. 악보를 완전히 숙지하고 있지는 않아서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는데, 지금 생각으로 가장 가능성이 큰 가설은 제1 트럼펫이 여린 음을 내지 않아 돌출되었다는 것이다. 마디 6에서 제1 트럼펫의 A♭(실음은 C♭) 음은 E 단조 6도 화음의 소프라노 성부에 중복된 근음(root)이다. 제2, 제3 트럼펫은 각각 화음의 5음과 3음을 연주하며, 베이스 성부의 근음은 제1 트롬본 등이 담당한다. 그런데 마디 6의 주선율은 화음의 5음인 G♭(실음 기준)에서 C♭을 거쳐 E♭이 된다. 결국, 제1 트럼펫의 C♭(실음)은 비화성음은 아니지만 주선율 차원에서는 마치 비정상적으로 긴 선행음(Anticipation)처럼 기능 했다. 즉, 제1 트럼펫이 두드러지면서 선율 음인 G♭을 누르고 전체 선율 윤곽을 망가트린 것이다. 마디 14 역시 동형진행이므로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림 1. 서막 전주곡 마디 5-9.
New York: G. Schirmer, 1904. Plate 26809.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서막 마디 359에서는 리듬이 이상하게 들렸다. 사실은 연주자가 실수하거나 엉뚱한 루바토를 쓰지 않고 오히려 인템포로 연주했는데 왜 그렇게 들렸을까? 답은 템포에 있다. 다음을 들어보자.


그림 2. 서막 마디 358-361. © 2005 김원철.

© 2005 김원철


이것은 마디 327에 나오는 모티프의 변형이다.


그림 3. 서막 마디 327-329. ©1997-2002 by Fabrizio Calzaretti.

© 2005 김원철


그런데 마디 360의 셋잇단음 스타카토 부분을 강박에 배치하다 보니 원래 모티프와 리듬 윤곽이 다르게 들린다. 이 때문에 리듬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며, 마디 359의 변칙적인 리듬은 마치 연주자가 실수라도 한 것처럼 들리게 한다. 그러나 템포를 느리게 하면 덜 어색해진다. 다음은 <그림 2>에서 템포를 ♩= 120에서 ♩= 80으로 고친 것이다.


그림 4. 서막 마디 358-361. © 2005 김원철.

© 2005 김원철


이제 훨씬 자연스럽다. (찬가처럼 크게 부풀린 관현악 총주를 상상하라.) 이날 연주는 ♩= 120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 100 이상으로 들렸다. 개인적으로는 ♩= 90 이하의 템포일 때 리듬이 어색하지 않게 들린다. 그 이상의 템포를 원할 경우 4분음 셋잇단 리듬에 루바토를 쓸 필요가 있다. 음반에서는 대개 템포와 상관 없이 루바토를 쓰고 있으며, 루바토를 쓰지 않은 녹음으로는 불레즈의 1979년 녹음이 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녹음에서도 연주자가 완벽하게 기계적인 템포를 소화하지는 못했다.)

2막 전주곡은 바이올린과 비올라에 의한 리듬이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리듬의 변칙성은 언뜻 들어서는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악보를 들여다 보면 사실은 매우 복잡함을 알 수 있다. 이날 연주에서는 '실수를 하나 안 하나 어디 두고 보자!' 하는 심정으로 특별히 주의 깊게 들었는데, 역시 연주회장의 극악한 음향 환경 때문에 현의 운궁이 또렷하게 전달되지도 않았다. 마지못해 내린 결론은 실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림 5. 2막 전주곡.
New York: G. Schirmer, 1904. Plate 26809.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2막 3장에서 하겐의 "호이호! 호이호호호! 기비히의 대장부들아. 일어들 나시오! Hoiho! Hoihohoho! Ihr Gibichsmannen, machet euch auf!"와 함께 연주되는 스티어호른(Stierhorn) 소리가 빠진 것도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발퀴레> 때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바그너는 하겐이 무대에서 C, 무대 뒤 왼쪽에서 D♭, 오른쪽에서 D로 불어서 입체적인 효과를 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요즘 바이로이트에서는 그냥 오케스트라 피트 관악기 위치에서 트롬본이 연주한다고 한다. 스티어호른 두 대가 동시에 소리 낼 때에는 단2도 또는 장2도 음정으로 강력한 불협화음이 되는데,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역시 스티어호른을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3막에서 지크프리트의 "깨우는 자가 왔소. 그가 입맞춤으로 당신을 깨우고 있소. Der Wecker kam; er küßt dich wach," 대목(마디 891-899)의 목관과 트럼펫에 의한 리듬은 여린 다이내믹 속에서도 죽어가는 지크프리트의 강렬한 흥분 상태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 부분에서는 피아니시모에서부터 시작하는 섬세한 크레셴도와 데크레셴도가 필요한데, 역시 세종문화회관은 이것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이 부분은 <지크프리트> 3막과도 링크되는데, 그날 연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림 6. 3막 마디 891-899.
New York: G. Schirmer, 1904. Plate 26809.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유명한 '지크프리트 장송행진곡'에서는 전체적으로 박진감 있게 잘했으나 몇몇 부분은 아쉬웠다. 마디 926에서 마디 927까지 현에 의해 피아노(p)에서 포르티시모(ff)로 세 단계를 거쳐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크레셴도도 약했고, 마디 960-962에서는 현이 호른 및 베이스 트럼펫과 안티폰(antiphon)처럼 주고받는데, 이때 현의 급박한 다이내믹 변화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물론 일차적으로 연주회장 탓이다.) 마디 953에서 갑자기 터져 나오는 트럼펫의 포르테(f)와 이어지는 크레셴도는 말러의 이른바 '개파(Durchbruch)'를 예견하게 하는 갑작스럽고도 강렬한 국면 전환 효과를 불러오며, 숄티의 녹음에서는 특히 마디 956의 크레셴도를 매우 길게 늘이기도 했다. (라이브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연주자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인간이 아니다.) 이날 연주에서는 그러한 다이내믹의 대비가 크지 않아서 극적 효과가 약했다. (원인은 연주회장의 극악한 음향과 트럼펫 주자의 기력 소진이 반반일 것으로 생각된다.)

마디 957부터는 트라이앵글과 테너 드럼(Rührtrommel) 등의 롤(roll)을 과장하면 현의 음량 부족에 의해 밸런스가 무너질 것을 걱정할 필요 없이 금관이 강력한 포르티시모를 마음껏 낼 수 있기 때문에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이날 연주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마디 953의 트럼펫 음량부터 지휘자의 의도가 작용했던 것일까? 이 부분에서 현 소리를 버리지 않은 것은 장단점이 있겠지만 극적인 효과는 어쨌든 부족했다.




그림 7. 3막 마디 935-967.
New York: G. Schirmer, 1904. Plate 26809.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마디 969에서는 서막 마디 359와 같은 템포 문제가 있었다. 마디 969-974에서는 대부분의 음반에서 적당히 루바토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이날 공연에서는 줄곧 인템포로 연주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림 8. 3막 마디 969-970. © 2005 김원철.

© 2005 김원철


마디 974 셋째 박에서는 일종의 착청(錯聽; '착시'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착청'도 있다.)을 만들어내야 한다. 서막 마디 360 넷째 박에서는 목관에 의해 유도되는 주선율의 옥타브 도약이 있지만, 같은 모티프로 링크되는 3막 마디 974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림 9. 3막 마디 973-974. © 2005 김원철.

© 2005 김원철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이 들려야 한다.


그림 10. 3막 마디 973-974에서 착청(錯聽) 효과에 의한 옥타브 도약을 반영한 것. © 2005 김원철.

© 2005 김원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심벌즈가 팀파니와 테너 드럼(Rührtrommel)의 롤(roll)을 동반하여 일으키는 강력한 차폐 효과(masking effect)와 그에 이어지는 음고 복원 효과(pitch restoration effect)이다. '음고 복원 효과'란 '음소 복원 효과 (phonemic restoration effect)'를 변형시킨 것으로 내가 지어낸 말이다. 음소 복원 효과는 워렌(Richard M. Warren)이 1970년에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한 논문에서 유래한 용어로, 워렌은 피험자에게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녹음된 문장을 들려주었다:


The state governors met with their respective legislatures convening in the capital city.


여기에서 "legislatures"의 가운데 /s/ 소리는 삭제하고 대신에 기침 소리를 넣었다. 그러나 피험자들은 이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으며, 어떤 소리가 하나 빠졌다고 알려주어도 그 위치를 알지 못했다. 사라진 /s/ 음소는 지각 과정에서 '복원'된 것이다. 후속 실험에서는 제거된 음소(*eel) 대신에 복원된 음소가 문장의 맥락에 따라 다른 음소(wheel, heel, peel, meal 등)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마디 974에서 심벌즈 등의 소리가 충분히 크지 않으면 음고 복원 효과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실제로 몇몇 음반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날 연주에서는 심벌즈 등이 음고 복원 효과를 일으킬 만큼 충분히 컸다.

브륀힐데의 "저기 라인 강가에 강한 장작들을 나를 위해 더미로 쌓아다오! Starke Scheite schichtet mir dort am Rande des Rheins zuhauf!" 이후부터는 긴 호흡으로 피날레를 향해 서서히 나아가며 주술적인 효과를 일으킨다. 이날 연주에서는 다이내믹의 폭이 좁은 것이 역시 아쉬웠다. (원인은 연주회장의 음향 문제와 연주자들이 지친 것이 반반으로 판단된다.) 다만, 마디 1538부터 바이올린에 의해 연주되는 이른바 '구원(redemption; Liebeserlösung)'의 모티프는 연주회장의 음향 환경을 감안하면 매우 좋았다.



그림 11. 구원의 모티프 (<발퀴레> 3막).
출처: http://www.utexas.edu/courses/wagner/148.html


브륀힐데 역의 올가 세르게예바는 이번 '반지' 시리즈 가운데 최고의 브륀힐데였다. 몸매도 브륀힐데 치고는 매우 날씬한 편이었다. <발퀴레>에서의 브륀힐데와 지클린데 등도 그랬지만, 뛰어난 성량에 비해 몸매는 가냘픈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음색은 귀네스 존스를 닮았다는 의견이 많았다. 극이 후반부로 가면서 고음 처리를 완벽하게 하지 못하고 실제보다 반음 정도 낮은 음을 낸 적이 있었던 것이나, 또는 2막의 이른바 '복수의 3중창'에서 갑작스런 저음 처리를 힘들어했던 것 등은 옥에 티였다. 특히 "그의 피로써 그가 속죄하기를! mit seinem Blut büß' er die Schuld!"에서는 가수와 오케스트라가 완전한 유니즌을 이룰 만큼 대사의 무게가 큰 부분이라 성량이 부족한 것이 몹시 아쉬웠다. <발퀴레>의 브륀힐데를 맡은 적이 있단다.

지크프리트 역의 알렉세이 스테블리안코는 테너 같지 않고 베이스나 바리톤 같았는데, 그것이 원래 목소리인지 이날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덕분에 군터로 변장했을 때에도 베이스-바리톤인 군터의 목소리를 일부러 흉내 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 재미있었다. (오히려 군터 역의 바리톤 예뎀 우메로프보다 낮게 들릴 때도 가끔 있었다.) 새 흉내는 발성은 뛰어났지만 굵은 목소리 때문에 연극적인 측면에서는 낙제점이었다. <신들의 황혼>의 지크프리트는 <지크프리트>의 지크프리트만큼 강력한 헬덴 테너일 필요는 없고 고음처리도 덜 필요하기 때문에 음역이 낮아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크프리트>에서의 레오니드 자코자예프와 음색의 차이가 컸던 점은 좋지 않았다. 게다가 2막 후반부에서부터 지친 기색을 보이다가 3막에서는 목소리가 잠겨서 몇 번이나 기침을 했던 것은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런데 프로필을 보면 의외로 주역 가수인 것 같다. (역시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일까?) 로엔그린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군터 역의 예뎀 우메로프는 <라인의 황금>에서의 알베리히였는데, 알베리히보다는 군터에 어울렸다. (알베리히와 군터를 같은 가수가 소화한다는 것은 사실 넌센스다.) 군터 역할에 역량을 집중했더라면 더욱 뛰어난 가창을 들려줄 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쉽다. "그의 피로써 그가 속죄하기를! mit seinem Blut büß' er die Schuld!"에서 브륀힐데와 마찬가지로 저음을 시원하게 처리하지 못했던 점은 옥에 티였다.

하겐 역의 알렉세이 탄노비츠키는 1976년생의 젊은 가수로 주역이 아닌 모양인데, 그 카리스마는 주연들을 압도할 정도였다. 다만, 뛰어난 연기력에 비해 음색의 사악한 맛은 부족했다. 커튼콜 때에는 공연 중의 카리스마를 무색하게 할 만큼 순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열광적인 박수를 받자 매우 놀라는 것 같았다. 프로필에 따르면,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필하모닉 홀에서 있었던 베르디 레퀴엠 연주회에 대해 한 비평가는 "탄노비츠키의 아름답고 낭랑한 음색, 완벽할 정도로 깔끔하게 표현된 곡, 마치 홀린 듯한 관객들"이라고 평했다 한다. 바그너 경력은 없었던 모양이다.

알베리히 역의 빅토르 체르노모르츠예프는 <지크프리트>에서도 알베리히였는데, <지크프리트>에서 뛰어난 가창을 들려주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단역이라서 별다른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구트루네 역의 발레리아 스텐키나는 훌륭했지만, 단역을 맡은 탓에 특별히 주목받지는 못했다. 쿤드리와 지클린데를 맡았던 적이 있단다. 음색이 지클린데 역에는 잘 어울릴 것 같지만, 쿤드리를 맡기에는 너무 가는 목소리가 아닐까 싶다. 발트라우테 역의 올가 사보바는 <발퀴레>의 브륀힐데였는데, 이번에는 반지를 라인의 처녀들에게 돌려주라며 브륀힐데를 야단치는 역할을 맡은 것이 재미있다. 좀 더 따끔하게 야단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전체적으로 썩 잘했다.

첫 번째 노른 역의 루드밀라 카누니코바는 <발퀴레>의 슈베르틀라이테이다. 원래 단역 가수인 듯한데, 단역치고는 꽤 잘했다. 그런데 의외로 오르트루트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두 번째 노른 역의 스베틀라나 볼코바는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에서 프리카 역으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가수인데, 이날에는 역할 비중이 좀 축소되어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세 번째 노른 역의 타티아나 크라브초바는 <발퀴레>의 헬름비게인데, <발퀴레>에서 깔끔하고 강력한 '하이 C'를 들려주었던 것과는 달리 이날에는 좀 얌전해서 불만이었다. 특히 "끊어졌네! Es riß!"에서의 성량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인 처녀들의 합창은 <라인의 황금> 때보다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고 딕션도 별로였다. 보클린데 역의 마르가리타 알라베르디안은 헬름비게와 <파르지팔>의 꽃처녀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벨군데 역의 리아 셰브초바는 <라인의 황금>에서도 벨군데였으며, <발퀴레>에서는 게르힐데였다. 플로스힐데 역의 안나 키크나드제는 <발퀴레>의 그림게르데이다.

2막에서의 남성 합창은 지난 6월 13일에 있었던 간사이 니키카이 오페라단의 <탄호이저>와 비교하게 된다. 마린스키의 합창 수준은 매우 높았지만, 간사이 니키카이 오페라단에 비하면 한 수 아래였다. 주역 가수들의 기량은 마린스키 쪽이 월등했던 것을 보면 역시 일본은 합창이 강한 모양이다.

뒷얘기. '신비기인'의 좌석 위치를 확인해 두었다가 공연이 끝나고 나서 결국 말을 걸어보았다. 기억을 더듬어 재구성한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원철: 실례합니다.
신비녀: 안녕하세요?
김원철: 외람된 말씀이지만(과잉 정중 모드), 당신이 그 유명한 바그네리안...
신비녀: (말 끊으며) 맞아요. 당신은 한국인인가요 아니면 공연 보러 한국에 온 건가요?
김원철: 한국인입니다.
신비녀: 나 이곳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정말 멋진 곳이로군요! 어쩌고저쩌고... (수다 모드로 돌변함.)
김원철: 그렇게 말씀하시니 기쁘군요.
신비녀: 그런데, 연주자 대기실이 어디인지 아세요?
김원철: 모르겠네요. 에, 그러니까, 바그너 공연을 보러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는?
신비녀: 맞아요.
김원철: 존경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 "I adore you!"라고 해버렸다. 남녀 사이에서 'adore'를 쓰면 사랑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런, 나이가 많아 보이던데... 그녀는 그냥 웃더라.)


신비녀: 어쩌고저쩌고... (계속 수다 모드)

김원철: 당신은 유명세에 비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는데, 이름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신비녀: 이번 공연에 대해 TV로 방송이 나갔다던데, 못 봤나 보죠?
김원철: 저는 TV를 안 보거든요.
신비녀: 이러쿵저러쿵... (이름은 안 가르쳐주면서 계속 수다)
김원철: 일본 공연에도 갈 건가요?
신비녀: 물론이죠.
김원철: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


이렇게 해서 <니벨룽의 반지> 한국 초연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는 연주회장의 열악한 음향 환경에서도 상당히 뛰어난 연주를 들려주었다. 물론 이번 공연에 대해 좋게만 평가할 수는 없다. 연주자들은 최상의 상태로 공연에 임했다 할 수 없으며 가수 기용의 적절함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지휘자는, 저 탁월한 기본기를 빼버리고 작품에 대한 해석만 놓고 본다면, 대체로 악보에 충실하기는 했지만 불레즈처럼 확실한 주관을 가지고 차가운 해석을 한 것이 아니라 나이브(naive)하게 악보를 따라가기만 했다. 그럼에도 독일인이 아닌 러시아인이 바그너의 음악을 이만큼 완성도 있게 연주한 것은 대단하다. 무엇보다 이번 공연은 한국 초연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올해는 바그네리안에게 매우 뜻깊은 해이다. <탄호이저>가 원어로는 사실상 국내 초연되었고, <니벨룽의 반지> 국내 초연도 마침내 이루어졌다. '반지'를 자력으로 무대에 올리려는 움직임도 있다. 10월 20일에는 바이로이트에서 호평받고 있는 베이스 연광철이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마르케 왕의 모놀로그를 부를 예정이며, 10월 30일에는 왕년의 바그너 가수 귀네스 존스가 온다. 그리고 성배의 그 다음 계시는 12월 15일,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이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를 주목하라!

2005년 10월 11일 씀.
2006년 1월 10일 고침.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5.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10일 월요일

바그너 한글 대본 모음

☞ 《연애금지》 (Das Liebesverbot) 한글 대본 (번역: 류지선, 출처: 바그네리안)
☞ 《리엔치》 (Rienzi) 한글 대본 (번역: 류지선, 출처: 바그네리안)
☞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 독한 대본
    (번역: 구훈, 출처: 고클래식)
☞ 《탄호이저》 (Tannhäuser und der Sängerkrieg auf Wartburg) 독한 대본
    (번역자 미상,  출처: 고클래식)
☞ 《로엔그린》 (Lohengrin) 독한 대본 (번역: 구훈,  출처: 고클래식)
☞ 《니벨룽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 독한 대본
    (번역자 미상, 출처: 고클래식)
    - 《라인의 황금》 (Das Rheingold)
    - 《발퀴레》 (Die Walküre) 1막, 《발퀴레》 2-3막
    - 《지크프리트》 (Siegfried) 1막, 《지크프리트》 2-3막
    - 《신들의 황혼》 (Götterdämmerung) 서막-1막, 《신들의 황혼》 2-3막
※ 《니벨룽의 반지》 대본은 엄선애가 번역한 단행본을 추천합니다. ☞ 故 박원철님 서평
☞ 《베젠동크 가곡》 (Wesendonck Lieder) 독한 대역본
    (번역: 유지원,  출처: 바그네리안)
☞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독한 대본
    (번역: 허정윤,  출처: 고클래식)
☞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독한 대본
    (번역: 김보근,  출처: 고클래식)
☞ 《파르지팔》 (Parsifal) 독한 대본 (번역자 미상,  출처: 고클래식)

※ 저작권은 번역자에게 있습니다. 번역자가 확실한 파일은 김원철이 번역자에게 허락을 받고 퍼왔으며, PDF 파일로 바꾸어 올렸습니다. 번역자를 알 수 없는 파일은 외부 링크만 걸어두었습니다.

2009년 8월 6일 목요일

바그너 길라잡이

리하르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1813. 5. 22 라이프치히 - 1883. 2. 13 베네치아)
 

▶  개요: 위키피디아 검색 결과
▶  바그너 관련 용어

▶  서평: 안인희,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 (서울: 민음사 2003)
▶  바그너 색깔론
▶  바그너를 처음 접하는 분께
▶  바그너를 제법 들어보았으나 재미가 없다고 느끼는 분께
▶  바그너 대본 자료실
▶  바그너 주요 작품과 추천 음반
▶  바그너 디스코그래피 (고클래식)
▶  바그너 디스코그래피 (http://www.wagnerdiscography.com/)
▶  바이로이트 사운드
▶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표 구하는 법
▶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  바그너 주요 작품 연구

☞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

☞ 《탄호이저》 (Tannhäuser (und der Sängerkrieg auf Wartburg))

☞ 《로엔그린》 (Lohengrin)

+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 《니벨룽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

☞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 《파르지팔》 (Parsifal)

▶ 바깥 고리

2009년 7월 26일 일요일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5)

지난 글 읽기:

☞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1)
☞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2)
☞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3)
☞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4)



▶ 상황 20.

3막.

라인 처녀들이 노래하는 대목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한국 초연 때 삐걱거리던 라인 처녀들과는 차마 견줄 수 없다. 게다가 이 대목에서 하프 소리가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어쩌면 하프 소리가 가장 아름답게 들리는 극장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라인 처녀들이 지크프리트와 말을 나누는 대목 또한 훌륭하다. 그러나 2막과 마찬가지로 자막이 없어서 독일어 가사를 실시간으로 따라가지 못하니 조금씩 지루해진다. 하겐과 군터가 나오면서 조금 나아지다가 하겐이 혼란을 이끌어내려고 지크프리트에게 기억이 돌아오는 약을 먹이는 대목부터 집중력이 돌아왔다.

마침내 지크프리트가 브륀힐데를 만나던 기억을 떠올리는 대목에서는 소름이 돋고야 말았다. 끝내 지크프리트는 죽고 장송 행진곡이 흐른다. 그런데 '칼' 모티프가 나오는 대목에서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던가!


▲ <신들의 황혼> 3막 마디 950-958. © Dover.

▲ '칼(Sword)' 모티프. © Decca
(인용된 악보에 나오는 모티프와는 살짝 다르다.)


악보에서 주황색으로 동그라미 친 대목이 '칼' 모티프다. 그 앞서 나오는 셈여림표를 살펴보자. 인용한 악보에는 빠졌으나 마디 448부터 '매우 여리게'(pp)로 시작하여 조금씩 소리가 커진다. 보탄을 상징하는 '창' 모티프가 베이스클라리넷과 튜바 따위로 마치 울먹이듯 나오고 뒤이어 지크프리트를 상징하는 '칼' 모티프가 트럼펫으로 사납게 터져 나온다.

이 대목을 제대로 살피려면 마디 942에 나오는 모티프를 알아야 한다.

▲ 마디 937-944. © Dover.

잉글리시호른, 클라리넷, 오보에가 차례로 연주하는 저 모티프 이름을 아시겠는가? 바로 지클린데 모티프다. (故 박원철님 홈페이지에 보니 숄티 판 2분 54초부터 나온단다.)

▲ 지클린데 모티프. © Decca


바로 앞선 마디 938에는 매우 중요한 무대 지시가 나온다.
(Der Mond bricht durch die Wolken und beleuchtet immer heller den die Berghöhe erreichenden Trauerzug.)

(달이 구름 사이로 뚫고 나와 산 언덕에 이르른 장례 행렬을 차츰차츰 더 밝게 비춘다.)

지클린데는 지크프리트를 낳다가 죽은 어머니이며, 지크프리트가 죽은 일을 누구보다도 슬퍼할 사람이다.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며 그 얼굴이 구름을 헤치고 나온 둥근 달과 겹친다. 바그너는 바로 이 모습을 마디 942에서 잉글리시호른 따위로 나타냈다. '다크 포스'가 넘쳐나는 지크프리트 장송 행진곡에서 이 대목만이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있으며, 이 소리가 뒤이어 나타나는 '다크 포스'를 더욱 애닲게 만들고 있다.

여기까지 알았다면, 눈치가 빠른 사람은 '장송 행진곡' 첫머리에 나오며 그 뒤로 이곳저곳에서 되풀이해 나오는 이른바 '고통(Suffering)' 모티프가 지클린데 모티프에서 왔음을 또한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 마디 911-918. © Dover.

지크프리트가 마지막 대사를 끝내고 마디 913에서 팀파니(Pk.)가 리듬을 연주한 다음 마디 915에서 비올라(Br.)와 첼로(Vc.)가 연주하는 셋잇단음 음형이 바로 '고통' 모티프이다. (숄티 판 00:15초) 바로 이 모티프가 '지클린데' 모티프에 이어 또 한 차례 나오는데, 이곳에도 중요한 무대 지시가 있다.

▲ 마디 948-949. © Dover.

(Aus dem Rheine sind Nebel aufgestiegen und erfüllen allmählich die ganze Bühne, auf welcher der Trauerzug bereits unsichtbar geworden ist, bis nach vornen, so daß diese, während des Zwischenspieles, gänzlich verhüllt bleibt.)

(라인강에서 안개가 피어올라 무대를 조금씩 메운다. 장례 행렬은 이미 보이지 않으며, 마침내 안개가 무대 앞쪽까지 꽉 채워 막이 바뀔 동안 무대는 완전히 감춰져 있다.)

이때 '고통' 모티프와 저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저음이 어우러진 '다크 포스'가 안개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라 극장을 가득 메운다. 그리고 마침내 '칼' 모티프가 사납게 터져 나온다. 보탄이 울부짖고, 군터가 울부짖고, 기비훙 사내들이 울부짖고, 우리 모두 울부짖는 듯한 이 소리를 트럼펫이 홀로 연주한다. (숄티 판 4분 7초)

'칼' 모티프가 나오기에 앞서 트럼펫은 쉬고 있으며, 크레셴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트럼펫이 갑자기 포르테(f)로 터져 나오는 대목은 여러모로 갑작스럽다. 따라서 이 대목은 말러 교향곡에서 곧잘 나오는 ☞ 개파(Durchbruch)를 내다보게 한다.

이 대목에서 '깜짝 효과'를 가장 잘 살린 녹음은 숄티-빈필 녹음이다.


© Decca

'칼' 모티프가 터져 나올 때부터 소리가 매우 크고, 마디 956에 나오는 온음표를 두 배로 늘여 연주하며, 이때 끝도 없이 크레셴도를 하여 듣는 사람이 숨 넘어가게 하며, 끝내 이 트럼펫 연주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게끔 한다.


▲ 게오르그 숄티 지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Decca

(음반 찾기 귀찮아서 故 박원철님 홈페이지에서 wma 파일을 받아 편집한 다음 MP3 파일로 만들었다. 가뜩이나 옛날 녹음을 두 차례 손실 인코딩했더니 음질이 대략 좋지 않다.)

그런데 이날 연주는 마디 448부터 '매우 여리게'(pp)가 아닌 '조금 여리게'(mp)쯤으로 시작해 소리를 잔뜩 키우는 바람에 '칼' 모티프가 주는 '깜짝 효과'가 빛바래 버렸다. 그러나 나는 뜻밖에 틸레만의 해석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사나운 트럼펫이 뒤로 물러났으나 그 앞서 나오는 잔뜩 부풀어 오른 '다크 포스'가 너무나 멋졌기 때문이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내가 가진 음반 수십 가지를 모조리 들어보았다. 트럼펫을 사납게 다스린 녹음이 있는가 하면 그에 앞선 '다크 포스'를 잘 살린 녹음도 있었다. 그러나 이날 들은 연주와 견줄 수 있는 녹음은 없었으며, 그나마 바렌보임-바이로이트 1992년 녹음이 비슷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바이로이트 녹음이 대체로 '다크 포스'를 잘 살린 듯하다. 어쩌면 틸레만이 이 대목을 이렇게 다스린 까닭이 '바이로이트 사운드'에 있지는 않았을까. 바이로이트가 아니라면 '다크 포스'를 이렇게까지 부풀리기는 어려우며, 또 바이로이트에서는 둥글둥글한 음향 때문에 트럼펫 한 대로 '깜짝 효과'를 내기는 어려워서 이렇게 해야 자연스럽지 않을까. 어쩌면 '바이로이트 사운드'를 가장 잘 알려주는 대목이 바로 이 대목인지도 모른다.

3막 3장에 이르러 하겐, 군터, 구트루네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목도 훌륭하다. 그러나 브륀힐데가 나타나니 그 카리스마가 다른 사람을 모조리 눌러버린다. 린다 웟슨(Linda Watson)이 뿜어주시는 저 여왕님 포스! 마침 반지를 '득템' 하려던 하겐마저도 '버로우'시킬 만하다. 이른바 '구원(Liebeserlösung)' 모티프가 나오면서부터 나는 조금 울었다.


▲ <발퀴레> 3막, '구원' 모티프. © Decca
('브륀힐데 신격화' 모티프라고도 하며, 故 박원철님 홈페이지에는 '구속(Redemption)' 모티프라고 나온다.)


(다음 편에 계속.)

2009년 7월 9일 목요일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4)

지난 글 읽기:

☞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1)
☞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2)
☞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3)



▶ 상황 18.

2막 전주곡이 흐른다. 소리가 생각보다 작다.

그러고 보니 발코니가 많이 높다. 발코니 좌석이 중간 등급인 까닭이 여기에 있나 보다. 그런데 거리를 헤아려도 소리가 작다. 틸레만이 '발작'을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내 생각에는 바이로이트 음향이 원래 이렇지 않을까 싶다.

음반으로만 듣고 꿈꾸던 바이로이트 사운드! 그 실체는 조금은 실망스러웠으나 끝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직접음이 적어서 자칫 흐리멍덩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리버브' 효과가 알맞게 들어가서 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럽게 감싸 안아 끌어당기는 야릇한 맛이 있었다. 단지 소리가 작을 뿐. ㅠ.ㅠ

그렇다고 '목욕탕 사운드'였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작은 소리도 꼼꼼하게 잘 울려주어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보다 200배쯤 또렷했고,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보다 2배쯤 또렷했다. 라인강 처녀들이 호흡이 안 맞았는지 아주 잠깐 멈칫하거나 그밖에 이음매가 자연스럽지 못했던 곳도 똑똑하게 잘 들렸다.

그보다 먼저 전주곡에 나오는 어지럽게 꼬인 리듬이 음반으로 들을 때보다도 훨씬 또렷하게 들려서 깜짝 놀랐다. 도대체 활을 어떻게 쓰기에 저런 소리가 날까. 그리고 저 밑에서 울려나오는 저음 현... 아아, 이것이 바이로이트 사운드!

이 음향으로 <신들의 황혼>이 아니라 <파르지팔>을 들었어야 하는데. 안 되겠다, 바이로이트 다시 가야겠다. 가고야 만다. 불끈!

http://fs.textcube.com/blog/0/2070/attach/XSal6ESP2A.jpg

모르시는 분이 있을까 싶어 잠깐 설명하자면, 바이로이트 축전극장 오케스트라 피트는 객석에서 보이지 않는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는 1층에서도 지휘자 머리쯤은 보이지만, 여기서는 오케스트라 피트가 무대 밑으로 들어가서 객석에서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사진으로 확인하시라. 이거 2층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때문에 오케스트라 소리가 지휘자 뒤에 있는 음향판에서 튕겨난 다음 무대 벽에서 다시 튕겨나 그제야 객석으로 날아온다.


전주곡이 끝나고 하겐과 알베리히가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자막이 없다. OTL
자막이 없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준비한 게 바로 이북리더 리브리에였는데...

소니 이북리더 리브리에(Librié)

리브리에는 전자잉크 디스플레이라서 백라이트가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지 않고 몰래 대본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변에 조금이라도 빛이 있을 때 얘기이고 아주 깜깜한 곳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바이로이트 축전극장이 바로 그랬다. 리브리에에 <니벨룽의 반지> 독일어-한국어 대본과 악보를 잔뜩 담아 왔으나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졌다. '폐인 정신'이 이런 곳까지 닿았을 줄이야!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생각했다가 이런 낭패를 겪는구나. 아 참, 건전지도 잃어버렸었지! OTL

독일어 대사를 실시간으로 따라가지 못하고 줄거리를 떠올려 가며 공연을 보려니 집중력이 떨어진다. 알베리히와 하겐이 대화를 나누는 2막 1장이나 브륀힐데가 하겐에게 지크프리트 약점을 알려주는 5장은 지루하게 느껴졌으며 무리한 일정에 따른 피로가 몰려오기까지 했다. 다음에 또 오려면 아예 날 잡고 독일어 텍스트를 달달 외워버려야겠다.

3장에서 하겐이 "호이호! 호이호호호! 기비히 사나이들아, 일어나라! Hoiho! Hoihohoho! Ihr Gibichsmannen, machet euch auf!" 하는 대목에 이르니 재미가 되살아난다. 하겐을 맡은 가수가 한스-페터 쾨니히(Hans-Peter König)라는데 카리스마가 대단하다.

이 대목에서는 스티어호른(Stierhorn)이라는 특이한 악기가 쓰이는데, 그야말로 '무식한' 소리를 내는 비상소집용 나팔이다. (독일어 'Stier'는 '소 bull'라는 뜻이다.) 더욱 '무식한' 대목은 화음이다. 바그너는 하겐이 무대에서 C 음을 연주하게 하고 무대 뒤 왼쪽에서 D♭ 음, 오른쪽에서 D 음을 불어서 입체적인 효과를 내는 동시에 반음씩 다른 음이 부딪혀 무시무시한 불협화음을 내도록 했으며, 숄티 판 음반에서 이 소리를 제대로 잡았다. 그러나 요즘에는 스티어호른 대신 좀 더 '음악적인' 트롬본을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연주하는 게 대세라더니 이날도 그랬다. 소리가 제법 거칠기는 했으나 틀림없이 트롬본 소리였다. 조금은 아쉬웠으나 이렇게 하는 쪽이 틸레만 스타일과도 더 어울렸다.

이어서 하겐과 기비히 사내들이 떠드는 대목에서는 얄궂은 곳이 있다. 소프라노한테나 시키는 트릴을 베이스한테 시킨 대목이다.

Ⓟ Mainz: B. Schott's Söhne, 1908. Plate 28000.

HAGEN
Einen Eber fällen sollt ihr für Froh;
Einen stämmigen Bock stechen für Donner;
Schafe aber schlachtet für Fricka,
daß gute Ehe sie gebe!

하겐
프로께 바칠 산돼지를 한 마리 잡고
도너께 바칠 힘센 숫염소를 한 마리 잡고
프리카께는 양을 잡아 바쳐서
결혼을 축복해 주십사 빕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임병수 음반 재킷을 인용하려고 했으나 저작권 문제가 골치 아파서..;;

가사를 보면 양을 잡으라는 대목이니 트릴로 양 흉내를 내라는 뜻이다. 그런데 베이스가 트릴이 되나? 음반을 들어보면 이 대목에서 안 되는 트릴을 해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더욱 우습다. 이날 하겐이 이 대목을 어찌하나 조금은 짓궂은 마음으로 귀담아들었더니 한스-페터 쾨니히는 그냥 비브라토로 은근슬쩍 넘어가고 말았다. 이럴 때에는 좀 망가지란 말이야!

어찌 보면 이건 연출 탓도 있지 싶다. 연출가는 기비히 사람들을 '문명인'으로 꾸미고 지크프리트를 '야만인 천둥벌거숭이'로 꾸며 놨다. 그래서 기비히 사람들이 즐거워하면서 서로 무기를 마구 부딪치는 대목에서도 유럽 사교모임처럼 점잖게 넘어가더라.

http://fs.textcube.com/blog/0/2070/attach/Xc79KfFFCb.png
누가 지크프리트인지 한눈에 알아보셨는가?

군터와 브륀힐데가 나오면서부터 브륀힐데를 맡은 린다 왓슨(Linda Watson)이 무대를 휘어잡는다. 오옷! 저 여왕님 포스! 다른 가수들도 너무너무 잘해서 그냥 음반을 듣는 듯하다. 한국 초연 때 그 보고 있기 조마조마하던 마린스키 극장 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르다.


▶ 상황 19.


2막이 끝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내가 <니벨룽의 반지> 한국 초연 리뷰를 쓴 게 학술지에 실렸다는 얘기를 했더니 '저놈 진짜 환자였군' 하는 반응이다. '반지 음반 뭐 좋아해요?' 하기에 뵘, 바렌보임, 크나퍼츠부슈 등등을 읊어대었다.

"세상에 그걸 다 가지고 있어요? 우리는 카라얀 판을 가지고 있는데 그건 어때요?"
"카라얀 좋죠. 그게 숄티 판과 비교되면서 저평가될 때가 잦은데 알고 보면 어쩌고저쩌고..."
"카라얀 판에서 하겐이 누군지 혹시 알아요?"
"음, 누구더라... 잠깐만요. 제 PDA에 데이터베이스가 있어요. 아, 카를 리더부슈! 이 사람 정말 유명하죠."
"노래 잘해요?"
"그럼요. 엄청난 가수예요. 그거 알아요? 바렌보임 판에는 필립 강이라고 한국인이 하겐인데 어쩌고 저쩌고..."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 편에 계속.)


다음 글 읽기:

☞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5)


2008년 5월 21일 수요일

1933년 바이로이트 신들의 황혼 게네랄프로베 중에서 - 프리다 라이더 & 막스 로렌츠

- SiteLink #1 : http://kr.youtube.com/watch?v=1Xmr-8HjWow

말로만 듣던 프리다 라이더 목소리 첨 들어본다. @.@;
노래 진짜 끝내주게 잘한다.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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