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4일 월요일

바그너 《파르지팔》 한국 초연 뒷북 단상

그동안 바빠서 (귀찮아서) 못 쓰고 있던 글을 월간 『객석』 기사를 읽고 덧붙이는 식으로 짧게 써볼까 합니다.

☞ 「‘파르지팔’ 한국 초연을 논하다」 (월간 『객석』)

① 오케스트라 연주를 평가할 때, 공정한 판단을 하려면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의 오케스트라 피트가 좁다는 사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국내 공연장 어디라도 마찬가지인데, 외국 유명 오페라 극장에서는 오케스트라 피트에 사람들 우겨 넣으면 그럭저럭 '풀 편성' 오케스트라가 들어가는 것과 견주어 국내 공연장에서는 사실 바그너 같은 대편성 곡은 제대로 연주할 수 없을 만큼 좁지요. (KBS에서 둘째 날 공연을 녹화 방송했던데요, 들어보면 얼마 안 되는 현악기 연주자들이 '깨작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리더군요. 실제 공연장에서는 이렇게까지 심하게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고, 동아일보와 전화 인터뷰할 때에도 저는 그 얘기를 했었지만, 동아일보나 『객석』이나 공연장에 대한 기사를 특집으로 자세히 다루지 않는 이상 이런 얘기를 쓰기 쉽지 않으리라 짐작됩니다.

② 이런 사정을 헤아리고 나면 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는, 귀에 들린 소리 자체도 훌륭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공연장에서 만난 바그네리안들도 '코심이 이렇게까지 잘할 줄 몰랐다'라며 놀라워하더군요. 이건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에서 금관 연주자 네 명 데려온 것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코심 단원들이 그만큼 노력했으니 이런 연주가 가능했을 테지요. 로타 차그로제크가 그만큼 대단한 지휘자이기도 하겠고요. 앙상블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휘자가 재빨리 수습하는 솜씨가 대단했습니다.

③ 로타 차그로제크의 템포 설정은 몹시 빨랐습니다. 크나퍼츠부슈가 지휘한 바이로이트 녹음에 익숙하신 분께는 완전히 다른 작품처럼 느껴졌을 듯해요. 최근 바이로이트 등에서 공연한 실황 음원을 들어보면 이렇게 마구 달리는 해석이 유행인 듯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오케스트라 연주자가 몇 안 된다는 문제 때문에 템포를 느리게 하고싶어도 못 했을 겁니다. 템포가 느릴수록 소편성의 약점이 쉽게 드러나곤 하거든요. 이와 관련해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2005.10.20. 지휘자 이윤국을 주목하라! (서울바로크 합주단 /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

윗글 마지막 단락을 다시 읽으니 새삼 감개무량하네요. "못해도 좋으니까 〈파르지팔〉 같은 작품을 무대에 올려만 달란 말이야." 하던 때로부터 8년만에 드디어 초연이 됐습니다.

④ 가수들은 그냥 최고였습니다. 『객석』 기사에서 이용숙 선생이 "바이로이트 · 뮌헨에서 공연을 보았을 때도 가수진이 이 정도로 만족스러웠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파르지팔(크리스토퍼 벤트리스)과 쿤드리(이본 네프)가 몸 사리지 않고 열심히 노래해 줘서 참 좋았습니다. 외국 가수들이 한국에 와서 몸 사리느라 노래를 대충 하거나, 한국에만 오면 갑자기 아프거나 ― 주요 병명은 물론 꾀병 ― 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그래서 두 사람이 더욱 돋보였습니다. 그 가운데 이본 네프는 '쿤드리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발트라우트 마이어가 전성기에 저랬을까 싶을 정도였지요.

⑤ 구르네만츠가 파르지팔을 데리고 몬살바트 성으로 가면, 날이 갑자기 확 밝아지면서(Nach völliger Dunkelheit schnell zunehmender Tag) 종소리가 들리지요. 그런데 교회종을 그대로 쓰기에는 음악적, 음향적, 공간적으로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보통 '베이스 튜뷸라 벨'(Bass Tubular Bell)을 사용합니다. 악보에는 'Theater Glocken'(오페라극장용 종)이라고 되어 있네요.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바이로이트 초기에는 '파르지팔 종'(Parsifal Klavier Instrument)이라는 걸 만들어 썼고, 초연 때에는 여기에 탐탐과 공(Gong) 따위를 섞었다고도 합니다.

'튜뷸라 벨'은 관현악곡에 곧잘 쓰이는 악기이지요. 그런데 파르지팔에 필요한 '베이스 튜뷸라 벨'은 그보다 훨씬 길어서 연주자가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연주해야 합니다. 서울시향이 말러 교향곡 8번 연주할 때 에드워드 최 타악기 수석이 이렇게 연주하는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서울시향이 가진 건 말러 8번에 필요한 세 음짜리이고, 《파르지팔》을 연주할 수 있는 건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갖고 있습니다.

▲ 경기필 2012년 공연 영상: 《파르지팔》 1막 전주곡/간주곡, 3막 피날레.
17분 30초 전후로 해서 베이스 튜뷸라 벨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악기 전체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네요.

국립오페라단(또는 코심)이 이 악기를 경기필에서 빌려다 썼으면 좋았겠지만, 문제가 있어요. 악기가 너무 큽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구조를 생각하면 악기를 무대 뒤로 보내야 하는데, 이러면 소리가 작아지지요.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작은 소리를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차그로제크는 (아마도 연출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했겠지만) 그 반대 해석을 보였습니다. 공(Gong)을 대신 사용한 것은 그래서였을 겁니다.

종소리가 아닌 '공' 소리를 들었을 때, 처음에 들었던 생각은 '와, 이건 좀 깬다!'였습니다. 그런데 3막에서는 이 소리가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필리프 아를로의 연출 때문에 더욱 그랬어요. 아를로는 3막 성배의식 장면에서 암포르타스를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처럼 연출했고, 성배 기사들이 어서 의식을 진행하라며 암포르타스한테 사납게 손가락질했지요. 구세주에게 구원을 바라는 일이 한편으로는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연출이라 생각합니다. 이때 종소리를 대신한 '공'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큰 음량으로 사납게 울려대며 연출에 힘을 더했습니다. 저는 1막에서 제가 '공' 소리를 낯설게 느꼈던 것도 편견 때문이지 않았나 의심해 봤습니다. 3회 공연을 모두 감상하고 나서 내린 결론은, 그래도 1막에서는 좀… 의도는 이해하겠는데…-_-

⑥ 꽃처녀들 의상에 관해서는 유형종 · 이용숙 두 분 말씀에 공감하는데요, 그래도 노래는 훌륭했습니다. 꽃처녀 대목은 템포가 느릴 때에는 '마법의 정원'의 신비로운 느낌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그런 맛은 좀 모자랐습니다. 그러나 빠른 템포 때문에 오히려 잘 살아난 것이 있었습니다. 마치 식물들이 사람 말을 한다면 저런 느낌일까 싶은, 마치 풀꽃들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소리가 언어로 승화한 듯한, 꽃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속삭이는 소리가 헤테로포니(heterophony)처럼 어지럽게 흩날리는 독특한 음향 효과 말이지요.

⑦ 이곳에서 시간은 공간으로 화한다. Zum Raum wird hier die Zeit.

구르네만츠가 파르지팔을 데리고 몬살바트 성으로 갈 때, 얼마 안 걸었는데도 매우 멀리 왔다고 파르지팔이 놀라워하자 구르네만츠가 한 말입니다. 『객석』 기사에서 이용숙 선생이 한 말로는, 이 노랫말을 "연출부가 실제 장면과 맞춰보며 일부를 수정"했다는데, 그 결과가…

“시공간을 초월하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네”

바그너가 《파르지팔》에서 나타내고자 했던 신비주의적 종교관의 일면을 드러내는 원문이, 저 번역 때문에 그냥 중2병 쩔어주는 말로 전락했습니다. 아니, 바그너가 원래 중2병 쩔어주는 인간이었기는 한데, 그래도 이거랑 저거랑은 수준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아… OTL

저는 "실제 장면"을 들먹이는 말이 그저 변명일 뿐이라 생각하며, 대중은 무식해서 쉬운 것만을 좋아하리라 단정 짓는 오만한 생각을 저 이상한 번역에서 읽습니다.

"Zum Raum wird hier die Zeit."이라는 제목으로 독일어 학위논문을 쓰신 타이포그래피 전문가 유지원 님께서 "변화의 이행과정을 지시하는 'werden(become)' 동사"에 주목하며 시공간에 관한 독특한 고찰을 펼치는 글 참고:

☞ 「여성의 menstruation이라는 단어 속, 수량(quantum)적 어근」 (유지원)

"Zum Raum wird hier die Zeit."이라는 말은 동양인에게 익숙한 개념인 '축지법'을 연상시키지요. 저는 이것을 현대 물리학 이론에 비추어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인류가 우주선을 만들어 태양계를 벗어나려면, 현재 기술로 낼 수 있는 속도로는 7만 년쯤 걸린다고 합니다. (제 기억에 의존한 수치라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일찍이 밝힌 것처럼,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광속을 넘어서는 속도는 애초에 불가능하지요.

그런데 편법이 있습니다. 시공간을 비틀어 버리면 되거든요.

공간이 수축하고 팽창하는 속도는 광속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은 많이들 아시죠? 그런데 우주가 팽창할 때 가속 팽창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더 빠른 속도로 지구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니까 아주 먼 곳에서는 광속을 넘어서는 빠르기로 지구에서 멀어지는 곳도 있을 것이며, 그 너머를 지구에 사는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이 경계를 '우주 지평선'이라고 한다네요.

이 원리를 이용하면 과학소설 등에 나오는 '워프'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합니다. 우주선 주위를 '워프 버블'이라는 것으로 감싸고 앞쪽 공간을 수축, 뒤쪽 공간을 팽창시킴으로써 실제로 이동한 것보다 더 빨리 이동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걸 가능하게 하려면 시공간을 비트는데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해서 실용성은 없다, 라는 것이 그동안 통설이었는데, 최근 어떤 공학자가 획기적으로 적은 에너지로 이걸 가능하게 하는 아이디어를 내놨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나사(NASA)에서 연구하고 있다네요!

▲ 나사(NASA)의 '워프 드라이브' 프로젝트 소개 영상

그러니까 결론은, 몬살바트로 가는 길에는 성배의 신비로운 에너지를 이용한 워프 버블이 설치되어 있어서… 큼. 여기까지.

⑧ 노랫말 번역과 관련해 아쉬웠던 대목 또 하나는, 마지막에 나오는 "Erlösung dem Erlöser!"입니다.

▲ "Erlösung dem Erlöser!" 카라얀-베를린필 1980년 음반에서 발췌. ©DG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면 "구세주께 구원을!"입니다. 그런데 맥락을 생각하면 참 이상한 말이에요. 파르지팔이 성창으로 암포르타스를 고통에서 구원하고, 쿤드리를 세례로써 끝없이 되풀이되는 죄업에서 구원하고, 성배 기사들의 새로운 수장이 됨으로써 모두를 구원하는 이때에 '구세주께 구원을!'이라니? 이것이야말로 '이곳에서 시간은 공간으로 화한다'보다 훨씬 더 수수께끼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여러모로 고찰한, 저 유명한 '몬살바트' 사이트의 데릭 에버레트가 쓴 글(영어) 참고:

http://www.monsalvat.no/erlosung.htm

미학자 이진 선생께서 이 말을 화두로 《파르지팔》의 철학적 의미를 고찰한 글:

☞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그런데 이 말을, 이번 공연 자막에서는 전혀 수수께끼 같지 않은 엉뚱한 말로 바꿔치기했더군요. 뭐라고 했더라…

⑨ "바그너가 철저한 반유대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런 점들이 당연히 이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 (이용숙)

바그너는 "철저한"까지는 아니더라도 '명백한' 반유대주의자였고, 따라서 바그너의 작품에 반유대주의가 반영되어 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작품 속에 나타나는 어떤 것을 반유대주의와 엮어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추측'과 '해석'을 명백한 사실처럼 말하면 곤란합니다. 그것이 독일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해석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출가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를 성토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고 그저 바그너가 작품 속에서 말했던 구원과 깨달음에 집중했다는 이유로 연출가를 비난하는 말에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링크로 대신합니다:

☞ 바그너 색깔론 글타래

⑩ 연출가 필리프 아를로

저는 오페라를 감상할 때 음악에 집중하느라 연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요. 연출 논리로 음악을 희생시키는 연출가를 때때로 성토하기는 합니다만. 그런데 필리프 아를로는 그런 '만행'을 전혀 저지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음악을 연출에 훌륭하게 이용하기까지 했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종소리'가 좋은 예가 되겠지요. 음악과 대사와 연출이 유기적으로 얽혀 돌아가면서 그야말로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의 모범이 되었고, 공연을 감상하면서 저는 연출가의 음악적 식견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훌륭한 연출가라면 좀 자주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쓰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여기까지만 쓸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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