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바그너 색깔론 ― 이택광 떡밥

이택광 블로그에서 ☞'이택광 빠' 선언을 하고 나니 이택광 블로그에 바그너 관련 글이 올라왔다. 이거 나 보라고 쓴 듯하다. ㅡ,.ㅡa

☞ 이택광, 〈이스라엘과 바그너〉

이 글은 김원철이 이제껏 읽어본 ☞바그너 색깔론 떡밥 가운데 가장 편견 없고 논지가 명쾌하며 무리한 주장도 없다. 그러나 글이 짧은 만큼 자세한 사실 관계를 담아내지 못했고, 따라서 바그너를 헐뜯는 사람과 감싸는 사람이 모두 오해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투덜댈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나는 자칭타칭 바그네리안으로서 이 글에 보충 설명과 지엽적인 반론, 그리고 내가 바그너를 듣는 행위 변명을 겸하는 '댓글'을 쓰려고 한다.

먼저 알아둘 사실이 하나 있다. 바그너는 애초에 사상적·정치적 일관성이 없는 인간이라서 이를테면 바그너를 파시즘의 조상이라 규정하고 나면 이내 바그너가 사실은 좌파였다는 반론과 함께 수많은 증거를 만나게 된다. (바그너가 좌파였다는 얘기를 처음 듣는 사람은 ☞ 〈바그너 색깔론 떡밥: "Richard Wagner in the year 2000" 부분 번역〉을 참고하시라.) 바그너에게서 굳이 일관성을 찾자면 두 가지를 들 수 있겠다. 하나는 기회주의, 다른 하나는 19세기 천재 담론에 바탕을 둔 자뻑 망상, '나 바그너를 숭배하라!'

바그너의 반유대주의 혐의는 "K. Freigedank"("자유로운 생각")이라는 필명으로 내놓은 ☞〈음악 속 유대주의〉(Das Judenthum in der Musik)라는 글에서 비롯한다. 이때 바그너를 감싸는 근거로 바그너의 수많은 유대인 친구들과 ☞《파르지팔》을 초연한 유대인 지휘자 등이 불려 나오는데, 이 또한 기회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

〈음악 속 유대주의〉에 나오는 '유대인'의 정체는 알고 보면 두 사람으로 줄일 수 있다. 젊은 바그너에게 수많은 도움을 주었던 마이어베어(Giacomo Meyerbeer, 1791―1864), 그리고 바그너가 평생 열등감에 시달렸던 '엄친아' 멘델스존.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바그너보다 먼저 성공한 유대인 음악가로 바그너 출세길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데 있다. 바그너는 당시 독일에 창궐하던 반유대 정서를 이용하여 이 두 사람을 타격했고,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바그너는 은인을 배신한 고약한 마음씨와 '듣보잡이 진중권 물어뜯는 듯한' 찌질함을 함께 드러내고 말았다. 무엇보다 이 글에 나타난 인종주의는 유대인 친구들을 읊어대는 정도로는 변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를 파시즘으로 곧바로 이어 말하는 일은 잘못이다. 인종주의와 파시즘이 무관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둘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또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는 바그너 후손의 명백한 나치 부역 행위와도 곧바로 이어지지 않는다. 적지 않은 사람이 이런 잘못을 저지르곤 하는데, 그와 달리 이택광이 반유대주의까지만 거론한 대목은 참으로 적절하다.

사상이 불순한(?) 예술가가 내놓은 작품이 훌륭할 리 없다는 순진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을 설득하기는 이택광 말마따나 "멸치를 고래라고 설득시키는 일보다 더 어려울" 터이니(☞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속 편할지도 모르겠다.

진짜 황당한 부류는 바그너를 들으면 파시스트가 될 거라고 공포를 조장해대는 사람인데, 나는 이와 관련해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을 빌어와 비꼬기도 했다. 그런 주장이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 원인을 마릴린 맨슨에게 뒤집어씌우는 짓거리와 마찬가지로 참된 원인을 은폐할 뿐이라는 얘기다. (자세한 내용은 ☞ 〈볼링 포 히틀러 (Bowling for Hitler)〉 참고. 괜히 흥분해서 무슨 소린지도 모르고 지껄여댄 대목도 더러 있으니 적당히 걸러서 읽으시라. ㅡ,.ㅡa)

이택광은 모든 예술행위는 정치적이며, 순수예술 또한 마찬가지라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작품을 내놓고 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움베르토 에코)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그 정치성이 평면적이지 않다는 사실 또한 지적할 필요가 있다. 바그너와 관련지어 말하자면 "바이마르 공화국 좌파 지식인들과 독일민주주의공화국 바그너 학자들이 바그너를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예언가로 선언"(☞참고)했던 사실에서도 이것이 잘 드러난다. 내 주변을 돌아보아도 바그네리안으로 소문난 사람들 가운데 계급 이익에 충실한 몇몇 사람을 빼고 나면 대체로 진보 세력에 호의적이다. (김원철은 진보신당을 지지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술가나 예술 작품 자체가 아니라 예술가 및 작품을 둘러싼 담론이라 하겠는데, 이런 맥락에서 텔아비브에서 처음으로 바그너 음악을 지휘한 사람이 유대인이면서 그 누구보다도 자주 바그너 작품을 지휘한 다니엘 바렌보임이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참고: ☞〈‘행동하는 음악가’ 다니엘 바렌보임〉. 바렌보임과 에드워드 W. 사이드가 나눈 대화를 담은 『평행과 역설』이라는 책도 있는데, 한글 번역이 엉망진창이라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ㅠ.ㅠ)

그리고 이택광은 바그너와 관련해 매우 훌륭한 정치적 담론을 내놓았다.

그리고 바그너에게 책임을 묻는 그 행위를 확대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거론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야한다. 말하자면 나치에게 책임을 묻는 행위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행하는 만행에 대한 책임을 묻는 행위와 함께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책임을 묻는다'는 윤리적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당성이다.

이택광이 인상적인 대목이라며 인용한 동영상은 ☞《라인의 황금》 피날레, 불레즈 지휘에 셰로(Patrice Chéreau) 연출 ☞바이로이트 실황이다(☞ DVD 정보 참고). 내가 보기에 이 영상물에서 가장 멋진 대목은 ☞《신들의 황혼》 피날레다. 처연한 음악(이른바 '희생' 모티프), 흰색과 붉은색의 강렬한 대비, 객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담담한 눈빛을 보시라.

제 목:이 모든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 줄 ... 관련자료:없음 [6905] 보낸이:이정환 (andie ) 2002-01-14 17:10 조회:48

[이 모든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 줄 아십니까?]

불레즈의 신들의 황혼 맨 끝장면을 보면 라인의 처녀들이 브륀힐데가 돌려준 반지를 들고 환호하며 다시 라인강으로 사라지고 발할성은 불타오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대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객석에는 등을 보인채... 그들은 발할이 타오르면서 라인강의 모티브가 서정적으로 흐르면 모두들 하나 둘 씩 천천히 일어나면서 몸을 돌려 관객석을 바라다 본다.

담담하고 처연한 표정으로 ... 그들은 이렇게 관객들에게 묻는 듯 하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끝 맺음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라고....

*내가 예전에 말했듯이 반지의 주제는 사랑이다. 누구보다 바그너에 열광했던 히틀러는 기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바로 링의 전체를 가로지르는 일관된 주제. 즉, 진실되고 희생적인 사랑없이는 이 세상은 결코 평화로울수도 정의로울수도 없다라는 것을 ... 히틀러의 방법론은 어디에도 사랑이나 배려 정의가 없었다. 이 것이 그를 엄청난 전화로 몰고 갔고 결국은 비참하게 종말을 맞게 한다!

베를린이 함락되고 히틀러가 자살하던 날,

독일방송은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한채, 하루종일 '신들의 황혼'을 틀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것은 매우 상징적이고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독일은 결국 그 허위로 세워진 발할의 붕괴를 겪었고, 그 폐허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며 결국 민족의 재통일마저 이뤄냈다. 아직도 여러 문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독일의 유럽공동체내에서의 위치는 일본의 아시아에서의 리더십 부재와의 현실 (솔직히 일본이 그 가진 돈과 힘만큼 아시아의 맹주행세를 할수 있는가? 어림 없는 얘기다. 일본은 불분명한 전후처리로 인해 아시아에서 아직도 왕따 신세다) 과는 대조될만큼 독일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고, 그러한 변화를 다른 유럽 국가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다.

바그너를 들으면서 특히 링을 들으면서(아니 이제부턴 보고 들으면서 ^^; 홈씨어터 5.1채널 쥑입니다요) 아직까지도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바그너 텍스트의 위대함에 경탄을 금치 못하겠군요!

정말 반지 시리즈는 음악과 극 그리고 모든 그 이후 예술의 방향을 다시 점검하게 한 위대한 걸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그네리안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반지는 오늘도 나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 줄 아십니까' 라고....

바그네리안 앤디.

― 하이텔 '바그네리안' 게시판에서 퍼옴.


이 글과 관련해 김원철이 추천하는 글:

☞ 박노자, 비극의 상업화, 홀로코스트. 한겨레21, 2002.11.28.

☞ 이진, 이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 시트콤 속의 바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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