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30일 월요일

바그너 색깔론 떡밥: "Richard Wagner in the year 2000" 부분 번역



아래 글은 "Richard Wagner in the year 2000: Is an End in Sight to the Misconceptions? - A Lecture"라는 글 가운데 일부입니다. 누가 쓴 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첨부한 파일은 영어 원문입니다. 옛날에 하이텔 바그네리안 회원들이 조금씩 나눠서 전문을 번역했는데, 제가 번역한 곳을 조금 손보아 여기에 올립니다. 번역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나중에 시간 날 때 새로 고쳐야겠습니다. (일단은 말로만..;;)

글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바그너는 원래 좌파였고 진중권이나 유시민 같은 이미지였습니다. 바그너가 니체랑 친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나중에 니체가 바그너를 욕했던 것도 '진중권인 줄 알았더니 김문수더라' 이런 맥락이었습니다. 히틀러 때문에 왜곡된 요즘 이미지는 김문수도 아니고 조갑제죠. -_-; 글쓴이는 바그너가 출세하고 나서도 여전히 좌파였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글쎄요, 저는 별로 동의하지 않지만 뭐 그런 주장도 있군요. 코지마가 쓴 일기에 나온다는데 저는 안 읽어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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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가 비스마르크, 제국주의, 내면지향적 독일문화와 독일다운 모든 것을 비난했던 것은 '바이로이트 에세이'에서도 알 수 있지만 제대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아직도 바그너를 오해하고 오용하는 까닭을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당대와 그 이후 세대를 거의 광신적으로 숭배하는 사람과 비방하는 사람으로 양분시킨 작곡가는 바그너뿐이다. 또 동서고금을 통틀어 바그너만큼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위한 제물 역할을 한 사람도 없다. 바그너는 당대뿐만 아니라 아직도 정치적으로 특별한 사람이다. 이것은 단지 그의 악명 높은 반유대주의 때문만은 아니며,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는 아돌프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1945년 이후에 바그너의 이름이 많은 경우에 아돌프 히틀러라는 이름과 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은 히틀러의 무식하고 멍청한 바그너주의 때문이다. 비교적 최근인 1997년에 Joachim Köhler는 500페이지나 되는 그의 저서 <바그너의 히틀러>에서 역사가 어떤 식으로 왜곡될 수 있는지를 기막히게 보여주었다! 바그너와 히틀러 사이의 역사적인, 즉 연대기적인 관계를 따지자면 제목은 차라리 “히틀러의 바그너”로 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나 모든 오해의 뿌리로 돌아가 보자. 바그너를 그토록 매혹적으로 만드는 것은 단지 그의 말글 및 철학적 견해가 가지는 모순과 그의 작품이 가지는 다면성과 넓이 때문이다. 바그너 작품에서 공통분모를 뽑아낼 수는 없다. 억지로 해봐야 축소 왜곡이 될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바그너는 오용될 수 있고, 언제나 그렇게 오용되어왔다. 좌익과 우익을 막론한 이데올로기의 상징물이 되었으며 모든 모순점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버렸다.

빌헬름 2세 시절, 바이마르 공화국, 제3제국(나치),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의 독일 공화국은 모두 저마다 필요에 따라 바그너를 재단했다. 그의 특이하고 사교성 없는 성격, 그의 철학적 정치적 생각, 그의 예술적 이상향, 그의 음악과 그의 극장은 리하르트 바그너에 대한 예술적 역사적 의의를 끊임없이 재검토하고 재분류하게 했다.

바그너는 동시대인들로부터 의심을 샀는데, 그 원인은 그가 생애의 절반 이상 중산층의 대단한 골칫거리였고 이는 그가 부유했던 초로기에 접어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가 1844년 드레스덴 반란의 핵심적 역할을 했고 한때는 수배대상이었던 혁명가라는 세간의 평은 그를 평생토록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그는 또한 유난히 수다스럽고 분별없으며 뻔뻔스러운 방식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에세이 폭격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맞받아쳤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바그너가 무정부주의자, 위험한 혁명가, 거들떠볼 가치도 없는 이상주의자, 그리고 뻔뻔스런 허풍쟁라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의 악극은 당시에도 끊임없는 논쟁거리였다. 그가 쓴 글 “미래의 음악”은 글 속에 나오는 유토피아와 마찬가지로 심한 비웃음을 받았다. 바그너는 항상 넘치는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그 소재는 초기 프랑스 사회주의와 Young German 운동으로부터 고무된 그의 진보적인 생각이었는데, 이는 일련의 에세이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의 악극에도 반영된 것이다. 심지어 바그너가 예술가로 명성을 얻고, 제2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이후에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황제의 눈에 띄었으며, 대부호로서 호사스러운 삶을 누리게 되어 그때까지 그의 생애 대부분을 그늘 지우던 경제적 문제에서 해방되었을 때에도, 심지어 그때에도 그는 초기 사회주의자들, 특히 푸르동과 또한 바쿠닌과 Max Stirner로부터 영향 받은 사회 문화적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에 진실했고, 이는 1883년 그가 죽을 때까지 그러했다. 코지마의 일기에 모든 의심을 떨치는 증거가 있다. 그의 사회주의 이상향, 부르주아에 반대하면서 그 자신이 부르주아였던 사실, 그리고 독일인에 대한 그의 회의적인 시각 등에도 그는 이내 “가장 독일적인” 작곡가로 선언되었다. 이것은 니체가 이마 가장 지각 있게 예견한 바 있다. “독일인은 그들이 숭배할 수 있는 바그너를 창조하였다.”

리하르트 바그너 자신은 어떠한 형태로든 분류되기를 거부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가 죽은 뒤에는 다양한 파벌들이 그를 이용해 먹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좌파 지식인들과 독일민주주의공화국의 바그너 학자들은 바그너를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예언가로 선언하였고, 나치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은 그를 아리안적이고(Aryan) 반유대주의적인(anti-Semitic) 세계관의 선구자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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