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16일 일요일

2005.09.27. 《지크프리트》 - 게르기예프 / 마린스키 극장 오페라단

지크프리트 Siegfried -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오페라단
9월 27일(화) 저녁 5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 휘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연 출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감 독 : 블라디미르 미르조예프 Vladimir Mirzoev
무대 디자인: 조시 티시핀 George Tsypin

지크프리트 : 레오니드 자코자예프 Leonid Zakhozhaev
브륀힐데 : 라리사 고골레프스카야 Larissa Gogolevskaya
미메 : 바실리 고르슈코프 Vassily Gorshkov
방랑자 : 예프게니 니키틴 Evgeny Nikitin
알베리히 : 빅토르 체르노모르츠예프 Viktor Chernomortsev
파프너 : 게네디 베주벤코프 Gennady Bezzubenkov
에르다 : 즐라타 불리체바 Zlata Bulycheva
새 : 잔나 돔브로프스카야 Zhanna Dombrovskaia



<지크프리트> 1막 전주곡은 관악기 주자들의 합주력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목관끼리, 또는 금관끼리 여린 음으로 합주를 할 때 국내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는 어택(attack)과 밸런스가 어긋나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졸이게 할 때가 많다. 그런데 지난 2003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체임버 오케스트라 내한 연주회 때 <지크프리트 목가>의 호른 두 대가 단3도로 나란히 스타카토로 연주하는 부분에서, 어택과 밸런스를 마치 악기 하나가 연주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맞추면서도 호른 주자에게 흔한 미스톤 하나 없이 현 소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가는 것을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이것이 독일과 한국의 차이란 말인가...

이날 연주에서는 바순 2대의 7도 하행 부분(마디 4)과 바순 3대의 스타카토 부분(마디 51), 잉글리쉬 호른의 단2도 하행에 바순 3대가 합세하는 부분(마디 79)이 모두 깔끔했고, 약음기를 낀 비올라 등과의 리듬 교환도 자연스러웠다. 다만, 셈여림의 세세한 변화를 공연장이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던 점은 아쉬웠다. 테너 튜바 2대와 베이스 튜바 2대의 크레셴도(마디 72, 마디 79)도 좋았고, 호른과 트롬본, 콘트라바스 트롬본이 가세하는 부분(마디 84)도 좋았다. 금관을 강조하면서 현이 묻혀 버리는 문제는 큰 음량이 꼭 필요한 곳이라 어쩔 수 없었다. (현의 음량 부족 문제에 대해서는 <라인의 황금> 편을 참고하라.)

이날 지휘자의 '임기응변'은 <발퀴레> 때보다 더 나아진 것 같았지만 연주자들의 집중력은 오히려 <발퀴레> 때만 못했고, 특히 1막에서는 작품에 익숙지 않은 사람도 알아챌 만한 금관의 실수가 여러 번 있어서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았는데도 많은 사람이 어수선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1막에서 실수가 많았던 가장 큰 이유는 템포가 빨랐기 때문일 텐데, 이 때문에 가수들도 숨가빠 했다. 이번 공연의 특징 중 하나는 단막 작품인 <라인의 황금>까지 포함해서 1막 연주의 완성도가 다른 막에 비해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단원들이 '반지' 시리즈 사이마다 다른 연주회 일정을 소화하는 강행군을 하느라 지친 탓에 2막에서야 몸이 풀린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었고, 나는 우스갯소리로 '게르기예프가 1막 끝나고 단원들에게 '한바탕' 한 것이 아닐까?'라고도 했다. 2막부터는 매우 좋았고, 3막의 "만세, 태양이여! 만세, 빛이여! 만세! 빛나는 날이여! Heil dir, Sonne! Heil dir, Licht! Heil dir, leuchtender Tag!" 부분부터는 현의 앙상블이 특히 뛰어났다. 다만, 3막 전주곡 등 현의 비중의 큰 곳에서는 (현이 매우 열심히 연주했지만) 다이내믹에 문제가 생기는 점은 어쩔 수 없었다.

지크프리트 역의 레오니드 자코자예프는 <발퀴레>의 지크프리트와는 달리 뛰어난 지구력을 자랑하면서 깔끔한 노래를 들려주었다. 1막까지만 해도 빠른 템포 때문에 약간씩 불안정해지는 목소리를 듣고 '2막부터는 망가지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웬걸, 3막이 끝날 때까지 안정된 목소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 큰 성량으로 곧게 뻗어나가는 고음을 들려주었다면 전설의 바그너 가수가 되살아난 것 같았겠지만, 그것까지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리라. <발퀴레> 때의 지크프리트처럼 '아 노퉁!'과 같은 불필요한 선행음(Anticipation)을 사용한 것은 옥에 티였다. 음색은 르네 콜로가 경박함을 벗고 진중한 헬덴 테너가 된 듯했다. 에릭과 로엔그린, 프로(Proh) 등의 역할을 맡은 적이 있고, 말러의 <대지의 노래> 테너 솔로도 했단다. 자코자예프는 외모 또한 뛰어났다. 키도 크고 몸매도 날씬했다. 다만, 어깨와 가슴에는 '공사'를 좀 했다. (시력이 나빠서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확인해 주었다.) 연극배우와 록 가수를 했던 경력이 있단다. 사진을 보니 언뜻 페터 호프만을 닮았는데, 더 자세히 보면 매서운 척하는 표정이 록 가수 신해철을 닮았다.

브륀힐데 역의 라리사 고골레프스카야는 <발퀴레>의 브륀힐데를 크게 능가하는 대단한 강성 소프라노였으며, 표현할 수 있는 다이내믹의 폭이 컸던 만큼 크레셴도를 잘했다. 몸매 또한 '현실 세계의 브륀힐데'에 매우 근접했다. 다른 역할은 가수가 바뀌어도 음색이 비슷해서 일관성을 해치는 일이 잘 없었는데, 브륀힐데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퀴레>의 브륀힐데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는데다가 지크프리트에 비해 성량이 너무 커서 힘 조절을 하고 있던 지크프리트를 초라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성량은 컸지만 고음 처리가 조금씩 위태로웠고, 마지막 대사인 "lachender Tod! 웃는 죽음이로다!"에서는 대사를 빼먹기도 했다. 다른 가수들도 대사를 빼먹은 적이 있지만(프롬프터가 있기는 하지만 듣자 하니 대가들도 의외로 이런 실수를 곧잘 한단다.) 고골레프스카야가 빼먹은 것은 다가올 파국에 대한 복선 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대사라는 것이 문제다. "Tod(죽음)" 부분은 '하이 C'인데, 바그너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한 옥타브를 낮추어 지크프리트와 유니즌을 이룰 수도 있도록 이중으로 표시했다. 어쩌면 고골레프스카야는 '하이 C'로만 불러야 하는 줄 알았던 것은 아닐까? 음색은 살짝 비르기트 닐손을 연상시키기도 했지만 힘과 표현력 모두 닐손과는 차이가 컸다. 쿤드리, 젠타, 오르트루트를 맡은 적이 있단다. 쿤드리는 좀 갸우뚱하기도 하고, 젠타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오르트루트는 모르겠다. 엘자 역과 강렬한 음색 대비를 할 수도 있겠지만, 엘자가 너무 연약하면 오르투르트에게 압도되어 졸지에 조연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

미메 역의 바실리 고르슈코프는 <라인의 황금> 때의 니콜라이 가시예프와 비슷한 음색이었으며 미메에 매우 잘 맞았다. 그러나 성량이 너무 작은 것이 문제였다. 특히 저음은 거의 들리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니콜라이 가시예프와는 달리 바그너 경력도 없단다. 둘이 서로 바꿨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크프리트>의 미메는 의외로 음색에 어울리지 않는 저음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어쩌면 가시예프보다는 그래도 고르슈코프가 성역이 낮았던 것일까? 그래도 연기는 참 좋았다. 음반에서도 언제나 엉터리인 망치 리듬은 예상보다 양호했다. 그러나 내가 지휘자라면 차라리 미메나 지크프리트에게는 솜 망치를 들려주고 망치 소리는 오케스트라 타악기 주자에게 맡기겠다.

방랑자 역의 예프게니 니키틴은 <라인의 황금> 때의 보탄이었는데, 그때보다 더 잘했다. 역할의 특성상 호흡이 긴 편이어서 노래하기 편한 점도 있었겠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참 잘했다. 차라리 미하일 키트와 바꿔서 <발퀴레> 보탄을 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니키틴이 부르는 '보탄의 고별'을 상상해보니 왠지 잘할 것 같다.

알베리히 역의 빅토르 체르노모르츠예프는 <라인의 황금>에서의 예뎀 우메로프보다 훨씬 잘했으며 헬덴 바리톤 냄새가 났다. 사악한 표현도 우메로프보다 더 잘했다. 파프너 역의 게네디 베주벤코프는 악보대로 확성기를 사용했고, 전체적으로 잘했지만 비브라토를 일부러 억제한 듯한 발성이 약간씩 흔들리기도 했다. 에르다 역의 즐라타 불리체바는 <라인의 황금> 때와 마찬가지로 훌륭했다. 새 역의 잔나 돔브로프스카야는 새 소리를 흉내 내려는 노력은 좋았으나 목소리가 굵고 비브라토도 깊은 것이 흠이었다. <파르지팔>에서 꽃처녀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뒷얘기. <라인의 황금> 때 봤던 '신비기인'은 역시 C열 오른쪽으로 가는 것을 확인했다. <신들의 황혼> 때에는 위치를 확인해 뒀다가 말을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진 찍히는 줄도 모르고 독보삼매경.


2005년 10월 5일 씀.
2005년 10월 31일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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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5.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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