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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18일 화요일

2005.12.15.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 /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창단 20주년 기념연주회 (제149회 정기연주회)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
2005년 12월 15일 (목) 저녁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 : 이대욱
트리스탄 : 리차드 데커(Richard Decker)
이졸데 : 프란세스 진저(Frances Ginzer)
브랑게네 : 김여경
마르케 왕 : 양희준
멜롯 : 전태상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이 국내 초연된 것이 1961년이다(KBS 교향악단, 데이비드 샤피로 지휘). 그리고 44년 만에 2막이 초연되었다. 불과 석 달 전에 <니벨룽의 반지> 국내 초연이 있었는데다 6개월 전에는 <탄호이저>가 1979년 국내 초연 이후 처음으로 전 막 공연되기도 한 터라 이번 공연이 상대적으로 빛바랜 감이 있기는 하지만, 바그네리안 입장에서는 어쨌든 역사적인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한편, 코리안심포니는 여러모로 바그너와 인연이 많은 악단이다. 초대 음악감독이자 상임지휘자였던 고(故) 홍연택 선생은 국내 최초로 바그너 오페라 전 막 공연을 지휘한 분이시기도 하다(1974년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국립오페라단). 또한 한국을 대표하는 바그네리안이신 김민 선생이 코심의 이사장을 거쳐 현재 음악감독을 맡고 계시기도 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개인적으로도 특별한 작품이다. 처음으로 진지한 태도로 대본을 따라가며 전 막을 감상한 바그너 작품이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바그너 작품 가운데 가장 깊이 파헤친 작품이기도 하기에 이번 공연에 감회가 남달랐다.

마침내 시작된 공연에서는 우선 무대가 어두워진 다음 박수 칠 기회를 주지 않고 지휘자가 조용히 등장하는 바이로이트적(?) 연출이 아주 좋았다. 불이 켜지는 동시에 '낮'의 모티프가 터져 나올 것을 기대했는데, 의외로 1막 전주곡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조명의 총체예술적 효과는 반감되었으나 예정에 없던 부분을 덤으로 감상하게 되었으니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다.

이대욱의 해석은 특별히 모나지 않은 대신 참신함도 없이 무던했다. 이것은 현이 음표를 따라가기에 바빴던 탓이 크다고 생각되는데,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역량을 고려하면 현악기 주자들이 사력을 다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연습을 게을리했다고 할 수도 없다. 다른 작품도 아니고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아니던가? 이런 작품은 국내 오케스트라가 연주해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무될 만하다. 현의 음량이 전체적으로 부족한 편이었지만 꼭 필요한 부분에서는 꽤 힘을 내기도 했다.

그래도 아쉬웠던 부분을 몇 가지만 떠올려 보자면, 우선 저 유명한 '오 사랑의 밤이여 우리를 덮어다오 O sink hernieder, Nacht der Liebe' 대목에서 현에 의한 몽환적인 리듬이 전혀 살아나지 않았다. 리듬 처리 자체가 충분히 또렷하지 못했고 보잉이 일치되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피아니시모에 약음기를 사용하라는 지시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모든 현이 같은 리듬을 사용하는 것치고는 음량이 너무 작았다. 결과는 꿈결처럼 붕 뜬 느낌의 리듬 대신에 안개 낀 듯 흐릿한 소리였다.

음악해석학(musical hermeneutics)에 기대어 말하자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은 바그너 이전의 전통적인 '불'의 심상이 아닌 '물'의 심상을 통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데, 크래머(Lawrence Kramer)가 이에 대해 상세히 논한 바 있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 다시 말해 사랑이야말로 (실질적으로든 비유적으로든) 인간을 창조하는 무엇이다. (...) [어느 누구도] 자신을 있게 한 사랑의 행위를 초월할 수 없으며, 단지 되풀이할 수 있을 뿐이다. (...) 그리고 이러한 반복을 통해 사랑은 파도가 밀물과 썰물에 따라 변하고 사라졌다 되살아나는 것을 닮은 특질을 가질 수 있게 된다. (135쪽)

리비도는 요컨대 다름 아닌 액체이며, 실로 프로이트가 즐겨 사용한 비유는 액체, 곧 사람들의 내면과 다른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흐름의 속성을 가진다. 전통적인 욕망의 불은 끊임없이 순환하고 끊임없이 율동 하는 매개체, 즉 물로 교체되었다. (141쪽)

욕망의 액체화로부터의 이상하지만 또한 지속적인 지류(支流)는 이 등장인물[Kate Chopin의 소설 The Awakening (1899)에 나오는 인물]의 성별에 따라 구분된 요구들 사이의 권력투쟁이다. 여자다움에 있어서, 욕망은 무엇보다도 바다, 파도의 밀물과 썰물, 이졸데의 'wogender Schwall'로 표현된다. 이러한 용례는 남녀 예술가 모두에게 일반적이다. (142쪽)

콘서트 버전의 전주곡에 바그너 자신이 붙인 프로그램 노트를 우선 살펴보면,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끊임없이 갈망하고 동경하며 자신을 스스로 갱신하는 밀물과 썰물로서의 욕망을 표현하는 것으로 줄곧 이해되었다. (147쪽),

- Lawrence Kramer., Musical Form and Fin-de-Siecle Sexuality. In Music as Cultural Practice 1800-1900,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2막 2장, 'O sink hernieder, Nacht der Liebe,' mm. 1111-1122.
Ⓟ New York : Broude Brothers, [1900?]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이러한 물의 심상은 '끝없이 영원히, 하나 됨을 자각하리라 endlos ewig, ein-bewusst'에 이르면 거대한 파도로 변한다(마디 1598). 강력하게 몰아치던 음악은 '지고한 사랑의 쾌락이여! höchste Liebeslust!'에서 갑자기 여리게 변한 다음 다시 크레셴도를 부르는데(마디 1619), 이렇게 갑작스러운 음량 변화는 진정한 폭발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며 감상자의 주의를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장치가 된다. ('지고한 사랑의 쾌락이여! höchste Liebeslust!'는 사랑의 2중창 마지막 대사이며, 마르케 왕의 등장과 함께 좌절된 사랑의 완성, 즉 쇼펜하우어적 해탈이 바그너에 의해 변용된 "열광적인 기쁨과 황홀"의 상태이다. 좌절된 사랑이 진정으로 완성되는 것은 작품의 끝 부분이며, 작품 전체의 마지막 대사는 이졸데의 '지고한 쾌락이여! höchste Lust!'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날 연주에서는 이 부분이 정신없는 동형진행(sequence) 속에 얼렁뚱땅 넘어가 버렸다.

1막 전주곡에서 때때로 호른 소리가 거칠 게 돌출되곤 했던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은 어쩌면 호른 주자의 실수일지도 모르지만 여기서는 일단 지휘자의 해석으로 간주하기로 하자. 도버 판 총보 첫머리에 있는 지시문에 따르면(펠릭스 모틀이 쓴 것으로 추정됨) 바그너는 부드러운 음색을 만들기 위해 내추럴 호른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고 하는데, 연주자가 충분히 뛰어나다면 밸브 호른을 써도 무방하다고 한다. 잘은 모르지만 현대의 호른도 이 점에서 당시의 밸브 호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호른이 지나치게 돌출되는 것은 그다지 좋은 해석이라 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며, 실제 음악적 맥락으로 보아도 이는 마찬가지다. 감정의 기복을 살리려는 의도였다면 이른바 '트리스탄 코드'를 중심으로 하는 세 번의 동형진행에서 다이내믹의 변화를 크게 하며 특히 마디 10과 마디 16의 스포르찬도를 강조하는 것 등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2막 전주곡에서는 베이스 클라리넷에 의한 이른바 '☞ 조급한 이졸데의 모티프' 부분에서 악기군 사이의 리듬 충돌에 묘한 매력이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이것을 '☞ 이졸데 리듬'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음반에서는 이것을 살리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리듬 충돌을 피해간다. 이날 연주회에서는 현 소리를 아주 작게 함으로써 리듬 충돌의 핵심 원인이 되는 현의 싱코페이션 리듬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베이스 클라리넷 소리는 내가 알던 악기의 음색에 비해 너무 부드러워서 바순으로 대체한 것으로 오해하고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연주가 끝난 뒤 지휘자가 베이스 클라리넷 주자를 일으켜 세웠을 때 다시 한 번 놀라야 했다.

마르케 왕의 '어떤 불행으로도 씻을 수 없는 이 불명예를 왜 내게 주는가? Die kein Elend sühnt, warum mir diese Schmach?' 직후 베이스 클라리넷 소리를 들을 때면, 지난 2003년 9월 8일에 있었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체임버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지휘: 로버트 쾨니히, 베이스: 전승현)에서 받았던 강렬한 기억이 떠오른다. 이날 베이스 클라리넷 주자는 크레셴도 폭을 최대로 늘림으로써 비탄에 빠진 마르케 왕의 심리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이 대목을 마르케왕의 모놀로그 전체의 절정으로 부각시켰다. 지휘자 로버트 쾨니히는 코심과 연주회를 통해 상당한 친분을 쌓고 있기 때문에 이번 연주회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지휘자의 해석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내심 기대했는데 웬걸, 여느 음반과 비슷하게 폭 좁은 크레셴도로 밋밋하게 넘어가 버렸다.

트리스탄 역의 리차드 데커(Richard Decker)는 음색이 배역에 나름대로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바그너 가수로서의 힘은 부족해 보였다. 이성이 마비될 만큼 강렬한 파토스를 표현하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웠으며, 성량 자체도 충분히 크지 못해서 오케스트라 소리에 묻힐 때가 더러 있었다. 연주회장의 음향 문제를 고려하더라도 예전에 같은 장소에서 들었던 귀네스 존스나 사무엘 윤 등의 목소리를 떠올려 보면 리차드 데커는 바그너 가수의 미덕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한국에서의 공연을 만만히 보고 목소리를 아낀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공연 내내 크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그러한 의혹을 뒷받침한다. 만약 그가 한국인이었다면 우리에게도 바그네리안 테너가 있다며 기뻐했겠지만, 많은 돈을 들여 모셔왔을 외국인 가수가 이 정도라면 그 돈이 좀 아깝다. 트리스탄, 에릭(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등의 역할을 맡은 바 있으며 내년에 지크문트 역을 맡을 예정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 지크문트 역이 매우 잘 어울릴 것 같다.

이졸데 역의 프란세스 진저(Frances Ginzer)는 리차드 데커보다 훨씬 더 실망스러웠다. 목소리가 오케스트라 소리에 파묻혀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때가 많았으며, 강세를 받지 못한 음을 속으로 먹어 버린 탓에(독일어 무성음 처리는 열심히 하더라) 레가토나 칸타빌레에 대한 개념이 있기나 할까 싶을 정도로 선율 윤곽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나마 고음 처리를 곧잘 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이것은 결국 작품의 악명 높은 고음 처리를 위해 목을 지나치게 아낀 덕이 아닐까 싶다. 노래를 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고음 자랑을 하러 나온 것인지? 브륀힐데, 이졸데, 엘자, 젠타 등 바그너 경력은 상당하며 음색이 바그너에 잘 어울리기도 했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이날 공연을 만만하게 생각했다는 의혹은 더욱 짙다. 평론가로부터 "거대한 성량과 따스함을 가진 최고의 소프라노"라는 극찬을 받은 적이 있단다.

브랑게네 역의 김여경은 성량만 본다면 프란세스 진저와 역할을 바꿨으면 좋았을 것이다. (물론 이졸데 역의 살인적인 고음을 감당할 만한 성역이 아니었겠지만.) 2막 1장 동안 줄곧 이졸데를 압도했으며, 2장에 두 차례 등장하는 아리오소도 매우 뛰어났다. 타게리트(Tagelied)의 전통을 잇는 2막 2장의 아리오소에서 도입 부분의 크레셴도는 마치 영화의 페이드인(fade-in)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데, 이 부분을 매끄럽게 처리하는 가수는 음반으로도 흔치 않다. 김여경의 '페이드인' 처리는 꽤 양호했다. 무엇보다 바그너를 이만큼 훌륭히 소화해내는 한국인 여자 가수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몹시 반갑다. 마르케 왕의 등장을 알리는 브랑게네의 비명 소리가 없어서 잠깐 놀랐는데, 이어지는 쿠르베날의 대사가 2막에서는 단 한 마디 뿐이라(위험합니다, 트리스탄님! Rette dich, Tristan!) 캐스팅에서 빠졌다는 점을 생각하니 정황이 이해되었다. 그래도 비명은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목소리를 아끼기 위한 것이었다면 바그너 가수가 될 자격은 없다 하겠다. 비명 소리가 빠진 대신 금관이라도 좀 더 크고 거친 소리를 내주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마르케 왕 역의 양희준은 저음의 깊이만으로도 탄복할 만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저음은 아무나 내는 것이 아니다. 성악이라는 것이 원래 타고난 목소리가 중요하겠지만, 특히 저음은 노력만으로는 만들 수 없는 특별한 것이라고 한다. 해석상의 특이한 점은 없었고 기존 대가들의 장점을 이어받아 정교하게 다듬은 모범적인 해석을 들려주었다. 그가 출연한 <니벨룽의 반지> 전곡 CD가 있다는데, 아마도 귄터 노이홀트의 바덴 가극장 녹음(Brilliant, 1993-95)에 나오는 파졸트(라인의 황금)와 파프너(지크프리트) 역인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음반에는 'Simon Yang'으로 표기되어 있다. 주목해야 할 새로운 바그너 가수 발견!

멜롯 역의 전태상은 배역의 존재감이 워낙 작아서 별로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목소리가 빛을 머금은 듯 밝고 단단하다고 느꼈으나 바그너에 어울리는 목소리는 아니라고 판단된다.

이 공연을 끝으로 위대한 바그너의 해는 갔다. 앞으로는 무슨 재미로 사나?

2005년 12월 17일 씀.
2006년 2월 9일 고침.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6.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17일 월요일

2005.09.29. 《신들의 황혼》 - 게르기예프 / 마린스키 극장 오페라단

신들의 황혼 Götterdämmerung -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오페라단
9월 29일(목) 저녁 5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 휘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연 출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감 독 : 블라디미르 미르조예프 Vladimir Mirzoev
무대 디자인: 조시 티시핀 George Tsypin

브륀힐데 : 올가 세르게예바 Olga Sergeyeva
지크프리트 : 알렉세이 스테블리안코 Alexey Steblianko
군터 : 예뎀 우메로프 Edem Umerov
알베리히 : 빅토르 체르노모르츠예프 Viktor Chernomortsev
하겐 : 알렉세이 탄노비츠키 Alexei Tannovistsky
구트루네 : 발레리아 스텐키나 Valeria Stenkina
발트라우테 : 올가 사보바 Olga Savova
노른 1 : 루드밀라 카누니코바 Liudmila Kanunikova
노른 2 : 스베틀라나 볼코바 Svetlana Volkova
노른 3 : 타티아나 크라브초바 Tatiana Kravtsova
보클린데 : 마르가리타 알라베르디안 Margarita Alaverdian
벨군데 : 리아 셰브초바 Lia Shevtsova
플로스힐데 : 안나 키크나드제 Anna Kiknadze



<신들의 황혼>에서는 앞선 시리즈와는 달리 서막 및 1막부터 연주의 완성도가 높았다. 다른 '반지' 시리즈에 비해 현의 비중이 적은 편이라 다이내믹과 밸런스 사이의 트레이드-오프(trade off) 문제도 덜했다. (현의 음량 부족 문제에 대해서는 <라인의 황금> 편을 참고하라.) 연주자들의 집중력이 <발퀴레> 2막보다는 못했지만 전체적으로는 4부작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연주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1막부터 너무 열심히 한 탓인지 3막에서는 끝을 향해 갈수록 연주가 조금씩 불안정해졌던 것은 옥에 티였다.

템포는 빠른 편이었으며, 맹약 장면과 기비히 무사들이 군터를 환영하는 장면 등에서는 깜짝 놀랄 만큼 빠른 템포로 몰아붙였다. 이 부분의 템포를 빠르게 한 것은 나름대로 참신한 해석이었고, 또 러시아 지휘자 및 악단과 어울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바그너 음악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를 해치는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다. 맹약 장면과 군터 환영 장면은 바그너 특유의 제의(祭儀) 장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바그너의 작품은 그 자체가 제의적이기도 하지만, 작품 속의 제의 장면은 감상자에게 특별한 영적 고양감을 일으키곤 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하라: 안인희,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 (서울: 민음사 2003) 202-205쪽.) 음악으로 제의적 효과를 일으키기 위해 템포는 느린 것이 좋으며, 이 점에서 바그너식 제의의 정점에 선 작품은 바그너가 무대신성제전극(Bühnenweihfestspiel)이라고 불렀던 작품인 <파르지팔>이다. (1막에서 성배기사들의 행렬 장면과 성배 의식 장면을 들어보라.) 하겐이 기비히 무사들을 소집하는 장면과 그에 이어지는 합창도 전체적으로 훌륭했지만, 역시 제의적 요소를 살리는 데에는 실패했다. 지크프리트 장송행진곡과 브륀힐데 자살 장면("저기 라인 강가에 강한 장작들을 나를 위해 더미로 쌓아다오! Starke Scheite schichtet mir dort am Rande des Rheins zuhauf!" 이후부터 끝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서막 전주곡 마디 6과 마디 14에서는 트럼펫의 음정이 엉뚱하게 들렸다. 악보를 완전히 숙지하고 있지는 않아서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는데, 지금 생각으로 가장 가능성이 큰 가설은 제1 트럼펫이 여린 음을 내지 않아 돌출되었다는 것이다. 마디 6에서 제1 트럼펫의 A♭(실음은 C♭) 음은 E 단조 6도 화음의 소프라노 성부에 중복된 근음(root)이다. 제2, 제3 트럼펫은 각각 화음의 5음과 3음을 연주하며, 베이스 성부의 근음은 제1 트롬본 등이 담당한다. 그런데 마디 6의 주선율은 화음의 5음인 G♭(실음 기준)에서 C♭을 거쳐 E♭이 된다. 결국, 제1 트럼펫의 C♭(실음)은 비화성음은 아니지만 주선율 차원에서는 마치 비정상적으로 긴 선행음(Anticipation)처럼 기능 했다. 즉, 제1 트럼펫이 두드러지면서 선율 음인 G♭을 누르고 전체 선율 윤곽을 망가트린 것이다. 마디 14 역시 동형진행이므로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림 1. 서막 전주곡 마디 5-9.
New York: G. Schirmer, 1904. Plate 26809.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서막 마디 359에서는 리듬이 이상하게 들렸다. 사실은 연주자가 실수하거나 엉뚱한 루바토를 쓰지 않고 오히려 인템포로 연주했는데 왜 그렇게 들렸을까? 답은 템포에 있다. 다음을 들어보자.


그림 2. 서막 마디 358-361. © 2005 김원철.

© 2005 김원철


이것은 마디 327에 나오는 모티프의 변형이다.


그림 3. 서막 마디 327-329. ©1997-2002 by Fabrizio Calzaretti.

© 2005 김원철


그런데 마디 360의 셋잇단음 스타카토 부분을 강박에 배치하다 보니 원래 모티프와 리듬 윤곽이 다르게 들린다. 이 때문에 리듬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며, 마디 359의 변칙적인 리듬은 마치 연주자가 실수라도 한 것처럼 들리게 한다. 그러나 템포를 느리게 하면 덜 어색해진다. 다음은 <그림 2>에서 템포를 ♩= 120에서 ♩= 80으로 고친 것이다.


그림 4. 서막 마디 358-361. © 2005 김원철.

© 2005 김원철


이제 훨씬 자연스럽다. (찬가처럼 크게 부풀린 관현악 총주를 상상하라.) 이날 연주는 ♩= 120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 100 이상으로 들렸다. 개인적으로는 ♩= 90 이하의 템포일 때 리듬이 어색하지 않게 들린다. 그 이상의 템포를 원할 경우 4분음 셋잇단 리듬에 루바토를 쓸 필요가 있다. 음반에서는 대개 템포와 상관 없이 루바토를 쓰고 있으며, 루바토를 쓰지 않은 녹음으로는 불레즈의 1979년 녹음이 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녹음에서도 연주자가 완벽하게 기계적인 템포를 소화하지는 못했다.)

2막 전주곡은 바이올린과 비올라에 의한 리듬이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리듬의 변칙성은 언뜻 들어서는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악보를 들여다 보면 사실은 매우 복잡함을 알 수 있다. 이날 연주에서는 '실수를 하나 안 하나 어디 두고 보자!' 하는 심정으로 특별히 주의 깊게 들었는데, 역시 연주회장의 극악한 음향 환경 때문에 현의 운궁이 또렷하게 전달되지도 않았다. 마지못해 내린 결론은 실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림 5. 2막 전주곡.
New York: G. Schirmer, 1904. Plate 26809.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2막 3장에서 하겐의 "호이호! 호이호호호! 기비히의 대장부들아. 일어들 나시오! Hoiho! Hoihohoho! Ihr Gibichsmannen, machet euch auf!"와 함께 연주되는 스티어호른(Stierhorn) 소리가 빠진 것도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발퀴레> 때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바그너는 하겐이 무대에서 C, 무대 뒤 왼쪽에서 D♭, 오른쪽에서 D로 불어서 입체적인 효과를 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요즘 바이로이트에서는 그냥 오케스트라 피트 관악기 위치에서 트롬본이 연주한다고 한다. 스티어호른 두 대가 동시에 소리 낼 때에는 단2도 또는 장2도 음정으로 강력한 불협화음이 되는데,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역시 스티어호른을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3막에서 지크프리트의 "깨우는 자가 왔소. 그가 입맞춤으로 당신을 깨우고 있소. Der Wecker kam; er küßt dich wach," 대목(마디 891-899)의 목관과 트럼펫에 의한 리듬은 여린 다이내믹 속에서도 죽어가는 지크프리트의 강렬한 흥분 상태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 부분에서는 피아니시모에서부터 시작하는 섬세한 크레셴도와 데크레셴도가 필요한데, 역시 세종문화회관은 이것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이 부분은 <지크프리트> 3막과도 링크되는데, 그날 연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림 6. 3막 마디 891-899.
New York: G. Schirmer, 1904. Plate 26809.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유명한 '지크프리트 장송행진곡'에서는 전체적으로 박진감 있게 잘했으나 몇몇 부분은 아쉬웠다. 마디 926에서 마디 927까지 현에 의해 피아노(p)에서 포르티시모(ff)로 세 단계를 거쳐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크레셴도도 약했고, 마디 960-962에서는 현이 호른 및 베이스 트럼펫과 안티폰(antiphon)처럼 주고받는데, 이때 현의 급박한 다이내믹 변화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물론 일차적으로 연주회장 탓이다.) 마디 953에서 갑자기 터져 나오는 트럼펫의 포르테(f)와 이어지는 크레셴도는 말러의 이른바 '개파(Durchbruch)'를 예견하게 하는 갑작스럽고도 강렬한 국면 전환 효과를 불러오며, 숄티의 녹음에서는 특히 마디 956의 크레셴도를 매우 길게 늘이기도 했다. (라이브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연주자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인간이 아니다.) 이날 연주에서는 그러한 다이내믹의 대비가 크지 않아서 극적 효과가 약했다. (원인은 연주회장의 극악한 음향과 트럼펫 주자의 기력 소진이 반반일 것으로 생각된다.)

마디 957부터는 트라이앵글과 테너 드럼(Rührtrommel) 등의 롤(roll)을 과장하면 현의 음량 부족에 의해 밸런스가 무너질 것을 걱정할 필요 없이 금관이 강력한 포르티시모를 마음껏 낼 수 있기 때문에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이날 연주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마디 953의 트럼펫 음량부터 지휘자의 의도가 작용했던 것일까? 이 부분에서 현 소리를 버리지 않은 것은 장단점이 있겠지만 극적인 효과는 어쨌든 부족했다.




그림 7. 3막 마디 935-967.
New York: G. Schirmer, 1904. Plate 26809.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마디 969에서는 서막 마디 359와 같은 템포 문제가 있었다. 마디 969-974에서는 대부분의 음반에서 적당히 루바토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이날 공연에서는 줄곧 인템포로 연주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림 8. 3막 마디 969-970. © 2005 김원철.

© 2005 김원철


마디 974 셋째 박에서는 일종의 착청(錯聽; '착시'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착청'도 있다.)을 만들어내야 한다. 서막 마디 360 넷째 박에서는 목관에 의해 유도되는 주선율의 옥타브 도약이 있지만, 같은 모티프로 링크되는 3막 마디 974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림 9. 3막 마디 973-974. © 2005 김원철.

© 2005 김원철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이 들려야 한다.


그림 10. 3막 마디 973-974에서 착청(錯聽) 효과에 의한 옥타브 도약을 반영한 것. © 2005 김원철.

© 2005 김원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심벌즈가 팀파니와 테너 드럼(Rührtrommel)의 롤(roll)을 동반하여 일으키는 강력한 차폐 효과(masking effect)와 그에 이어지는 음고 복원 효과(pitch restoration effect)이다. '음고 복원 효과'란 '음소 복원 효과 (phonemic restoration effect)'를 변형시킨 것으로 내가 지어낸 말이다. 음소 복원 효과는 워렌(Richard M. Warren)이 1970년에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한 논문에서 유래한 용어로, 워렌은 피험자에게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녹음된 문장을 들려주었다:


The state governors met with their respective legislatures convening in the capital city.


여기에서 "legislatures"의 가운데 /s/ 소리는 삭제하고 대신에 기침 소리를 넣었다. 그러나 피험자들은 이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으며, 어떤 소리가 하나 빠졌다고 알려주어도 그 위치를 알지 못했다. 사라진 /s/ 음소는 지각 과정에서 '복원'된 것이다. 후속 실험에서는 제거된 음소(*eel) 대신에 복원된 음소가 문장의 맥락에 따라 다른 음소(wheel, heel, peel, meal 등)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마디 974에서 심벌즈 등의 소리가 충분히 크지 않으면 음고 복원 효과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실제로 몇몇 음반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날 연주에서는 심벌즈 등이 음고 복원 효과를 일으킬 만큼 충분히 컸다.

브륀힐데의 "저기 라인 강가에 강한 장작들을 나를 위해 더미로 쌓아다오! Starke Scheite schichtet mir dort am Rande des Rheins zuhauf!" 이후부터는 긴 호흡으로 피날레를 향해 서서히 나아가며 주술적인 효과를 일으킨다. 이날 연주에서는 다이내믹의 폭이 좁은 것이 역시 아쉬웠다. (원인은 연주회장의 음향 문제와 연주자들이 지친 것이 반반으로 판단된다.) 다만, 마디 1538부터 바이올린에 의해 연주되는 이른바 '구원(redemption; Liebeserlösung)'의 모티프는 연주회장의 음향 환경을 감안하면 매우 좋았다.



그림 11. 구원의 모티프 (<발퀴레> 3막).
출처: http://www.utexas.edu/courses/wagner/148.html


브륀힐데 역의 올가 세르게예바는 이번 '반지' 시리즈 가운데 최고의 브륀힐데였다. 몸매도 브륀힐데 치고는 매우 날씬한 편이었다. <발퀴레>에서의 브륀힐데와 지클린데 등도 그랬지만, 뛰어난 성량에 비해 몸매는 가냘픈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음색은 귀네스 존스를 닮았다는 의견이 많았다. 극이 후반부로 가면서 고음 처리를 완벽하게 하지 못하고 실제보다 반음 정도 낮은 음을 낸 적이 있었던 것이나, 또는 2막의 이른바 '복수의 3중창'에서 갑작스런 저음 처리를 힘들어했던 것 등은 옥에 티였다. 특히 "그의 피로써 그가 속죄하기를! mit seinem Blut büß' er die Schuld!"에서는 가수와 오케스트라가 완전한 유니즌을 이룰 만큼 대사의 무게가 큰 부분이라 성량이 부족한 것이 몹시 아쉬웠다. <발퀴레>의 브륀힐데를 맡은 적이 있단다.

지크프리트 역의 알렉세이 스테블리안코는 테너 같지 않고 베이스나 바리톤 같았는데, 그것이 원래 목소리인지 이날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덕분에 군터로 변장했을 때에도 베이스-바리톤인 군터의 목소리를 일부러 흉내 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 재미있었다. (오히려 군터 역의 바리톤 예뎀 우메로프보다 낮게 들릴 때도 가끔 있었다.) 새 흉내는 발성은 뛰어났지만 굵은 목소리 때문에 연극적인 측면에서는 낙제점이었다. <신들의 황혼>의 지크프리트는 <지크프리트>의 지크프리트만큼 강력한 헬덴 테너일 필요는 없고 고음처리도 덜 필요하기 때문에 음역이 낮아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크프리트>에서의 레오니드 자코자예프와 음색의 차이가 컸던 점은 좋지 않았다. 게다가 2막 후반부에서부터 지친 기색을 보이다가 3막에서는 목소리가 잠겨서 몇 번이나 기침을 했던 것은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런데 프로필을 보면 의외로 주역 가수인 것 같다. (역시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일까?) 로엔그린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군터 역의 예뎀 우메로프는 <라인의 황금>에서의 알베리히였는데, 알베리히보다는 군터에 어울렸다. (알베리히와 군터를 같은 가수가 소화한다는 것은 사실 넌센스다.) 군터 역할에 역량을 집중했더라면 더욱 뛰어난 가창을 들려줄 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쉽다. "그의 피로써 그가 속죄하기를! mit seinem Blut büß' er die Schuld!"에서 브륀힐데와 마찬가지로 저음을 시원하게 처리하지 못했던 점은 옥에 티였다.

하겐 역의 알렉세이 탄노비츠키는 1976년생의 젊은 가수로 주역이 아닌 모양인데, 그 카리스마는 주연들을 압도할 정도였다. 다만, 뛰어난 연기력에 비해 음색의 사악한 맛은 부족했다. 커튼콜 때에는 공연 중의 카리스마를 무색하게 할 만큼 순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열광적인 박수를 받자 매우 놀라는 것 같았다. 프로필에 따르면,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필하모닉 홀에서 있었던 베르디 레퀴엠 연주회에 대해 한 비평가는 "탄노비츠키의 아름답고 낭랑한 음색, 완벽할 정도로 깔끔하게 표현된 곡, 마치 홀린 듯한 관객들"이라고 평했다 한다. 바그너 경력은 없었던 모양이다.

알베리히 역의 빅토르 체르노모르츠예프는 <지크프리트>에서도 알베리히였는데, <지크프리트>에서 뛰어난 가창을 들려주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단역이라서 별다른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구트루네 역의 발레리아 스텐키나는 훌륭했지만, 단역을 맡은 탓에 특별히 주목받지는 못했다. 쿤드리와 지클린데를 맡았던 적이 있단다. 음색이 지클린데 역에는 잘 어울릴 것 같지만, 쿤드리를 맡기에는 너무 가는 목소리가 아닐까 싶다. 발트라우테 역의 올가 사보바는 <발퀴레>의 브륀힐데였는데, 이번에는 반지를 라인의 처녀들에게 돌려주라며 브륀힐데를 야단치는 역할을 맡은 것이 재미있다. 좀 더 따끔하게 야단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전체적으로 썩 잘했다.

첫 번째 노른 역의 루드밀라 카누니코바는 <발퀴레>의 슈베르틀라이테이다. 원래 단역 가수인 듯한데, 단역치고는 꽤 잘했다. 그런데 의외로 오르트루트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두 번째 노른 역의 스베틀라나 볼코바는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에서 프리카 역으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가수인데, 이날에는 역할 비중이 좀 축소되어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세 번째 노른 역의 타티아나 크라브초바는 <발퀴레>의 헬름비게인데, <발퀴레>에서 깔끔하고 강력한 '하이 C'를 들려주었던 것과는 달리 이날에는 좀 얌전해서 불만이었다. 특히 "끊어졌네! Es riß!"에서의 성량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인 처녀들의 합창은 <라인의 황금> 때보다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고 딕션도 별로였다. 보클린데 역의 마르가리타 알라베르디안은 헬름비게와 <파르지팔>의 꽃처녀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벨군데 역의 리아 셰브초바는 <라인의 황금>에서도 벨군데였으며, <발퀴레>에서는 게르힐데였다. 플로스힐데 역의 안나 키크나드제는 <발퀴레>의 그림게르데이다.

2막에서의 남성 합창은 지난 6월 13일에 있었던 간사이 니키카이 오페라단의 <탄호이저>와 비교하게 된다. 마린스키의 합창 수준은 매우 높았지만, 간사이 니키카이 오페라단에 비하면 한 수 아래였다. 주역 가수들의 기량은 마린스키 쪽이 월등했던 것을 보면 역시 일본은 합창이 강한 모양이다.

뒷얘기. '신비기인'의 좌석 위치를 확인해 두었다가 공연이 끝나고 나서 결국 말을 걸어보았다. 기억을 더듬어 재구성한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원철: 실례합니다.
신비녀: 안녕하세요?
김원철: 외람된 말씀이지만(과잉 정중 모드), 당신이 그 유명한 바그네리안...
신비녀: (말 끊으며) 맞아요. 당신은 한국인인가요 아니면 공연 보러 한국에 온 건가요?
김원철: 한국인입니다.
신비녀: 나 이곳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정말 멋진 곳이로군요! 어쩌고저쩌고... (수다 모드로 돌변함.)
김원철: 그렇게 말씀하시니 기쁘군요.
신비녀: 그런데, 연주자 대기실이 어디인지 아세요?
김원철: 모르겠네요. 에, 그러니까, 바그너 공연을 보러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는?
신비녀: 맞아요.
김원철: 존경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 "I adore you!"라고 해버렸다. 남녀 사이에서 'adore'를 쓰면 사랑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런, 나이가 많아 보이던데... 그녀는 그냥 웃더라.)


신비녀: 어쩌고저쩌고... (계속 수다 모드)

김원철: 당신은 유명세에 비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는데, 이름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신비녀: 이번 공연에 대해 TV로 방송이 나갔다던데, 못 봤나 보죠?
김원철: 저는 TV를 안 보거든요.
신비녀: 이러쿵저러쿵... (이름은 안 가르쳐주면서 계속 수다)
김원철: 일본 공연에도 갈 건가요?
신비녀: 물론이죠.
김원철: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


이렇게 해서 <니벨룽의 반지> 한국 초연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는 연주회장의 열악한 음향 환경에서도 상당히 뛰어난 연주를 들려주었다. 물론 이번 공연에 대해 좋게만 평가할 수는 없다. 연주자들은 최상의 상태로 공연에 임했다 할 수 없으며 가수 기용의 적절함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지휘자는, 저 탁월한 기본기를 빼버리고 작품에 대한 해석만 놓고 본다면, 대체로 악보에 충실하기는 했지만 불레즈처럼 확실한 주관을 가지고 차가운 해석을 한 것이 아니라 나이브(naive)하게 악보를 따라가기만 했다. 그럼에도 독일인이 아닌 러시아인이 바그너의 음악을 이만큼 완성도 있게 연주한 것은 대단하다. 무엇보다 이번 공연은 한국 초연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올해는 바그네리안에게 매우 뜻깊은 해이다. <탄호이저>가 원어로는 사실상 국내 초연되었고, <니벨룽의 반지> 국내 초연도 마침내 이루어졌다. '반지'를 자력으로 무대에 올리려는 움직임도 있다. 10월 20일에는 바이로이트에서 호평받고 있는 베이스 연광철이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마르케 왕의 모놀로그를 부를 예정이며, 10월 30일에는 왕년의 바그너 가수 귀네스 존스가 온다. 그리고 성배의 그 다음 계시는 12월 15일,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이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를 주목하라!

2005년 10월 11일 씀.
2006년 1월 10일 고침.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5.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16일 일요일

2005.09.27. 《지크프리트》 - 게르기예프 / 마린스키 극장 오페라단

지크프리트 Siegfried -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오페라단
9월 27일(화) 저녁 5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 휘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연 출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감 독 : 블라디미르 미르조예프 Vladimir Mirzoev
무대 디자인: 조시 티시핀 George Tsypin

지크프리트 : 레오니드 자코자예프 Leonid Zakhozhaev
브륀힐데 : 라리사 고골레프스카야 Larissa Gogolevskaya
미메 : 바실리 고르슈코프 Vassily Gorshkov
방랑자 : 예프게니 니키틴 Evgeny Nikitin
알베리히 : 빅토르 체르노모르츠예프 Viktor Chernomortsev
파프너 : 게네디 베주벤코프 Gennady Bezzubenkov
에르다 : 즐라타 불리체바 Zlata Bulycheva
새 : 잔나 돔브로프스카야 Zhanna Dombrovskaia



<지크프리트> 1막 전주곡은 관악기 주자들의 합주력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목관끼리, 또는 금관끼리 여린 음으로 합주를 할 때 국내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는 어택(attack)과 밸런스가 어긋나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졸이게 할 때가 많다. 그런데 지난 2003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체임버 오케스트라 내한 연주회 때 <지크프리트 목가>의 호른 두 대가 단3도로 나란히 스타카토로 연주하는 부분에서, 어택과 밸런스를 마치 악기 하나가 연주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맞추면서도 호른 주자에게 흔한 미스톤 하나 없이 현 소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가는 것을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이것이 독일과 한국의 차이란 말인가...

이날 연주에서는 바순 2대의 7도 하행 부분(마디 4)과 바순 3대의 스타카토 부분(마디 51), 잉글리쉬 호른의 단2도 하행에 바순 3대가 합세하는 부분(마디 79)이 모두 깔끔했고, 약음기를 낀 비올라 등과의 리듬 교환도 자연스러웠다. 다만, 셈여림의 세세한 변화를 공연장이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던 점은 아쉬웠다. 테너 튜바 2대와 베이스 튜바 2대의 크레셴도(마디 72, 마디 79)도 좋았고, 호른과 트롬본, 콘트라바스 트롬본이 가세하는 부분(마디 84)도 좋았다. 금관을 강조하면서 현이 묻혀 버리는 문제는 큰 음량이 꼭 필요한 곳이라 어쩔 수 없었다. (현의 음량 부족 문제에 대해서는 <라인의 황금> 편을 참고하라.)

이날 지휘자의 '임기응변'은 <발퀴레> 때보다 더 나아진 것 같았지만 연주자들의 집중력은 오히려 <발퀴레> 때만 못했고, 특히 1막에서는 작품에 익숙지 않은 사람도 알아챌 만한 금관의 실수가 여러 번 있어서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았는데도 많은 사람이 어수선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1막에서 실수가 많았던 가장 큰 이유는 템포가 빨랐기 때문일 텐데, 이 때문에 가수들도 숨가빠 했다. 이번 공연의 특징 중 하나는 단막 작품인 <라인의 황금>까지 포함해서 1막 연주의 완성도가 다른 막에 비해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단원들이 '반지' 시리즈 사이마다 다른 연주회 일정을 소화하는 강행군을 하느라 지친 탓에 2막에서야 몸이 풀린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었고, 나는 우스갯소리로 '게르기예프가 1막 끝나고 단원들에게 '한바탕' 한 것이 아닐까?'라고도 했다. 2막부터는 매우 좋았고, 3막의 "만세, 태양이여! 만세, 빛이여! 만세! 빛나는 날이여! Heil dir, Sonne! Heil dir, Licht! Heil dir, leuchtender Tag!" 부분부터는 현의 앙상블이 특히 뛰어났다. 다만, 3막 전주곡 등 현의 비중의 큰 곳에서는 (현이 매우 열심히 연주했지만) 다이내믹에 문제가 생기는 점은 어쩔 수 없었다.

지크프리트 역의 레오니드 자코자예프는 <발퀴레>의 지크프리트와는 달리 뛰어난 지구력을 자랑하면서 깔끔한 노래를 들려주었다. 1막까지만 해도 빠른 템포 때문에 약간씩 불안정해지는 목소리를 듣고 '2막부터는 망가지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웬걸, 3막이 끝날 때까지 안정된 목소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 큰 성량으로 곧게 뻗어나가는 고음을 들려주었다면 전설의 바그너 가수가 되살아난 것 같았겠지만, 그것까지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리라. <발퀴레> 때의 지크프리트처럼 '아 노퉁!'과 같은 불필요한 선행음(Anticipation)을 사용한 것은 옥에 티였다. 음색은 르네 콜로가 경박함을 벗고 진중한 헬덴 테너가 된 듯했다. 에릭과 로엔그린, 프로(Proh) 등의 역할을 맡은 적이 있고, 말러의 <대지의 노래> 테너 솔로도 했단다. 자코자예프는 외모 또한 뛰어났다. 키도 크고 몸매도 날씬했다. 다만, 어깨와 가슴에는 '공사'를 좀 했다. (시력이 나빠서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확인해 주었다.) 연극배우와 록 가수를 했던 경력이 있단다. 사진을 보니 언뜻 페터 호프만을 닮았는데, 더 자세히 보면 매서운 척하는 표정이 록 가수 신해철을 닮았다.

브륀힐데 역의 라리사 고골레프스카야는 <발퀴레>의 브륀힐데를 크게 능가하는 대단한 강성 소프라노였으며, 표현할 수 있는 다이내믹의 폭이 컸던 만큼 크레셴도를 잘했다. 몸매 또한 '현실 세계의 브륀힐데'에 매우 근접했다. 다른 역할은 가수가 바뀌어도 음색이 비슷해서 일관성을 해치는 일이 잘 없었는데, 브륀힐데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퀴레>의 브륀힐데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는데다가 지크프리트에 비해 성량이 너무 커서 힘 조절을 하고 있던 지크프리트를 초라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성량은 컸지만 고음 처리가 조금씩 위태로웠고, 마지막 대사인 "lachender Tod! 웃는 죽음이로다!"에서는 대사를 빼먹기도 했다. 다른 가수들도 대사를 빼먹은 적이 있지만(프롬프터가 있기는 하지만 듣자 하니 대가들도 의외로 이런 실수를 곧잘 한단다.) 고골레프스카야가 빼먹은 것은 다가올 파국에 대한 복선 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대사라는 것이 문제다. "Tod(죽음)" 부분은 '하이 C'인데, 바그너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한 옥타브를 낮추어 지크프리트와 유니즌을 이룰 수도 있도록 이중으로 표시했다. 어쩌면 고골레프스카야는 '하이 C'로만 불러야 하는 줄 알았던 것은 아닐까? 음색은 살짝 비르기트 닐손을 연상시키기도 했지만 힘과 표현력 모두 닐손과는 차이가 컸다. 쿤드리, 젠타, 오르트루트를 맡은 적이 있단다. 쿤드리는 좀 갸우뚱하기도 하고, 젠타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오르트루트는 모르겠다. 엘자 역과 강렬한 음색 대비를 할 수도 있겠지만, 엘자가 너무 연약하면 오르투르트에게 압도되어 졸지에 조연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

미메 역의 바실리 고르슈코프는 <라인의 황금> 때의 니콜라이 가시예프와 비슷한 음색이었으며 미메에 매우 잘 맞았다. 그러나 성량이 너무 작은 것이 문제였다. 특히 저음은 거의 들리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니콜라이 가시예프와는 달리 바그너 경력도 없단다. 둘이 서로 바꿨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크프리트>의 미메는 의외로 음색에 어울리지 않는 저음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어쩌면 가시예프보다는 그래도 고르슈코프가 성역이 낮았던 것일까? 그래도 연기는 참 좋았다. 음반에서도 언제나 엉터리인 망치 리듬은 예상보다 양호했다. 그러나 내가 지휘자라면 차라리 미메나 지크프리트에게는 솜 망치를 들려주고 망치 소리는 오케스트라 타악기 주자에게 맡기겠다.

방랑자 역의 예프게니 니키틴은 <라인의 황금> 때의 보탄이었는데, 그때보다 더 잘했다. 역할의 특성상 호흡이 긴 편이어서 노래하기 편한 점도 있었겠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참 잘했다. 차라리 미하일 키트와 바꿔서 <발퀴레> 보탄을 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니키틴이 부르는 '보탄의 고별'을 상상해보니 왠지 잘할 것 같다.

알베리히 역의 빅토르 체르노모르츠예프는 <라인의 황금>에서의 예뎀 우메로프보다 훨씬 잘했으며 헬덴 바리톤 냄새가 났다. 사악한 표현도 우메로프보다 더 잘했다. 파프너 역의 게네디 베주벤코프는 악보대로 확성기를 사용했고, 전체적으로 잘했지만 비브라토를 일부러 억제한 듯한 발성이 약간씩 흔들리기도 했다. 에르다 역의 즐라타 불리체바는 <라인의 황금> 때와 마찬가지로 훌륭했다. 새 역의 잔나 돔브로프스카야는 새 소리를 흉내 내려는 노력은 좋았으나 목소리가 굵고 비브라토도 깊은 것이 흠이었다. <파르지팔>에서 꽃처녀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뒷얘기. <라인의 황금> 때 봤던 '신비기인'은 역시 C열 오른쪽으로 가는 것을 확인했다. <신들의 황혼> 때에는 위치를 확인해 뒀다가 말을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진 찍히는 줄도 모르고 독보삼매경.


2005년 10월 5일 씀.
2005년 10월 31일 고침.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5.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5.09.25. 《발퀴레》 - 게르기예프 / 마린스키 극장 오페라단

발퀴레 Die Walküre -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오페라단
9월 25일(일) 저녁 6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 휘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연 출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감 독 : 율리아 페브즈너 Yulia Pevzner
무대 디자인: 조시 티시핀 George Tsypin

보탄 : 미하일 키트 Mikhail Kit
브륀힐데 : 올가 사보바 Olga Savova
지크문트 : 올레그 발라쇼프 Oleg Balashov
지클린데 : 믈라다 후도레이 Mlada Hudoley
훈딩 : 게네디 베주벤코프 Gennady Bezzubenkov
프리카 : 스베틀라나 볼코바 Svetlana Volkova
게르힐데 : 리아 셰브초바 Lia Shevtsova
오르틀린데 : 루드밀라 카시아넨코 Liudmila Kasianenko
발트라우테 : 나덴자다 세르뒤크 Nadezhda Serdiuk
슈베르틀라이테 : 루드밀라 카누니코바 Liudmila Kanunikova
헬름비게 : 타티아나 크라브초바 Tatiana Kravtsova
지크루네 : 나데자다 바실리예바 Nadezhda Vasilieva
그림게르데 : 안나 키크나드제 Anna Kiknadze
로스바이세 : 뤼보브 소콜로바 Liubov Sokolova



솔직히 말해 <라인의 황금> 공연은 약간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더 솔직해지자면 공연을 보는 동안 온갖 독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한국 초연인 점을 생각해 실망스러운 부분은 최대한 잊어 버리고 장점 위주로 본 것이었다. 시차 적응도 덜 된 데다가 낮에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한 뒤에 <라인의 황금>을 또 공연하는 강행군 때문에 단원들이 지쳤던 것이리라. 그런데 <발퀴레> 때에는 체력을 회복했는지 훨씬 나아진 소리를 들려주었고, 게르기예프는 공연장의 극악한 음향 환경에 더욱 적응을 한 듯했다.

현은 음향적 공백을 더욱 메워주었고, 특히 1막에서 선동적인 리듬을 타고 흐르는 저음 현이 좋았다. '보탄의 고별' 장면에서는 부드럽게 공연장을 휘감는 소노리티가 일품이었다. 다만, 1막 전주곡에서는 공연장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다이내믹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를테면 포르테(f)에서 반 마디 만에 피아노(p)로, 다시 한 마디 반 동안 스타카토로 크레셴도 시켜서 포르테로 이어지는 등의 급박한 다이내믹의 변화는 세종문화회관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오케스트라가 무대 위로 올라가 제대로 된 편성으로 연주해도 시원찮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현의 음량 부족 문제에 대해서는 <라인의 황금> 편을 참고하라.)

1막 전주곡 마디 62부터 나오는 ☞'도너' 모티프에서는 베이스 튜바, 테너 튜바, 트롬본이 차례로 첫 음을 흐릿하게 연주했고, 트럼펫은 좀 나았다가 베이스 트럼펫에서 다시 흐려졌다. 저음 쪽의 악기일수록 이 부분을 못했는데, 아무래도 저음 악기가 완전4도 도약을 재빠르게 하기 힘든 탓이지 싶다. 마디 62에는 다음과 같은 지시가 붙어 있다. "이 주제(도너 모티프)에서 짧은 여린박(Auftakt) 음은 매우 강하고 또렷하게 들리도록 해야 한다. Bei diesem Thema (Donner-Motiv) müssen die kurzen Auftakt noten sehr stark und deutlich hörbar werden." ('도너 모티프'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고 있는 점이 수상하기는 하지만, 내 추측에 지시어 자체는 바그너 자신이 붙인 것이며 모티프 이름은 편집자가 첨가한 것 같다. 도버 판(C. F. Peters, Leipzig, n.d. [ca. 1910].) 총보를 참고했다. 더 권위 있는 악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부분에 대해 알려주면 고맙겠다. - 나중에 붙임: 펠릭스 모틀이 붙인 지시어란다.) <라인의 황금> 때부터 도너와 관련 있는 부분이 좋지 않은 점은 유감이다. 북유럽 신화에서 도너(토르)가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면 게르기예프는 신화 연구를 게을리했다는 혐의를 벗기 힘들다.

2막 전주곡은 개인적으로 마디 54부터 마디 65까지의 팀파니 소리가 백미라고 생각하는데, 악보 상으로는 포르테(f)와 피아노(p) 사이를 오가고 있지만 다이내믹의 낙차를 더 크게 과장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뵘의 녹음 등을 들어보면 그렇게 연주하기도 한다. 특히 게르기예프에게는 이것이 연주회장의 음향 핸디캡을 메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을 것인데, 예상 밖으로 팀파니 주자는 정직한 음량을 고집했다. 오히려 크레셴도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 불만이었다.

2막은 이번 '반지' 시리즈를 통틀어 최고였다고 할 만큼 대단했다. 특히 프리카 등장 이후부터는 프리카의 뛰어난 가창에 힘입어 빠른 템포로 극의 흐름을 완전히 움켜쥐고 관객을 몰입하게 하였다. 지루하기로 유명한 <발퀴레> 2막을 이토록 흥미진진하게 만들다니! 물론 실수도 적지 않았지만, 이들의 연주에는 그 모든 것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마력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라인의 황금>을 듣고 '거장' 운운했던 것은 취소하는 것이 좋겠다. 보라, 여기에 진짜 거장이 있다!

3막도 매우 좋았고, 유명한 3막 전주곡 '발퀴레의 기행'에서는 금관과 타악기만을 앞세우기보다는 목관 악기의 회오리바람을 놓치지 않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보탄의 고별' 장면에서는 템포가 좀 빠르긴 했지만 역시 음반으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현장의 감동이 있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이 격해져서 "내 창 끝을 두려워하는 자는 이 불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리라! Wer meines Speeres Spitze fürchtet, durchschreite das Feuer nie!" 이후부터는 차분한 감상이 불가능해질 정도였는데, 심지어 막이 내리기 시작하자마자 성급하게 박수가 터져 나올 때(많은 사람이 지적했지만 이것 참 문제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나도 모르게 박수를 따라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멈추었을 정도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호흡은 거칠어졌으며 가슴은 요동치고 다리는 후들거리는 것을 겨우 수습하고 밖으로 나간 다음, 지인들과 함께 오늘 공연이 얼마나 대단했는지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라인의 황금> 때 실망해서 <지크프리트>와 <신들의 황혼> 표를 팔아버렸거나 또는 처음부터 <발퀴레> 표만 샀던 사람들이 이날 공연이 끝나고 나머지 표를 구하느라고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보탄 역의 미하일 키트는 <라인의 황금>에서 보탄을 맡았던 예프게니 니키틴보다 음색이 더 깊이 있었고 특히 여린 음의 표현력이 뛰어났지만,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니키틴보다 못했다. 강력한 프리카에게 혼쭐나서 쩔쩔매는 듯한 모습은 오히려 극과 어울리기도 했다. ☞사무엘 윤과 비교하자면 지난 2004년 11월 12일 연주회에서의 사무엘 윤이 훨씬 잘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프로필을 보니 역시 바그너 경력이 없단다. 이런 가수가 대뜸 보탄 같은 큰 역할을 맡은 것이 대단한데, 이 점을 고려하면 사실은 매우 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보탄을 물리친 '아줌마'의 모습을 보여준 프리카 역의 스베틀라나 볼코바는 <라인의 황금>에서 프리카를 맡았던 바로 그 사람이다. 전날 공연에서도 심상치 않더니 이날에는 완전히 주연급으로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고음과 저음, 포르테와 피아노의 교차가 민첩하고 시원시원했으며, 오케스트라와 상호작용하여 긴장감을 높여나가는 솜씨가 굉장했다. 프로필을 다시 보니 아직 극장 내에서 주역 가수로 완전히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앞으로 큰 성장을 기대해도 좋겠다.

지클린데 역의 믈라다 후도레이도 만만치 않았다. 볼코바에 비하면 부드러웠지만 은근히 힘있는 목소리였고, 앞으로 강성 소프라노로 거듭난다면 브륀힐데도 못할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보다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은 외모였는데, 특히 몸매가 매우 뛰어났다. 2막에서 흐트러진 자세로 쓰러져 있을 때에는 옷이 위로 말려 올라가 뛰어난 다리맵시를 자랑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크문트가 괘씸하게도 슬쩍 다가가서 옷자락을 내리더라. 어우, 야아~!) 프로필을 보니 역시 살로메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일곱 베일의 춤을 추면 얼마나 멋질까! (험험... 정신 차리자.) 그밖에 구트루네 역과 젠타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지크문트 역의 올레그 발라쇼프는 주연치고는 약간은 실망스러웠다. 듣자 하니 러시아처럼 햇볕이 부족한 곳에서는 테너가 나오기 힘들고 대신 뛰어난 베이스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프로필에 따르면 바그너 경력이 없는 모양인데 단번에 이렇게 큰 역할을 맡은 것만 봐도 그렇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사실 대단한 열연을 한 것으로 좋게 봐주는 것이 좋겠다. 실연으로 큰 실수 없이 역할을 해낸 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다만 "벨제! 벨제! Wälse! Wälse!" 부분에서 호흡량이 음반으로 들을 수 있는 것보다 1/3에서 1/5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아 벨제!,' '아 노퉁!' 등과 같이 불필요한 선행음(Anticipation)을 곧잘 사용한 것인데, 선행음의 남용은 음악을 유치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므로 좋지 않은 습관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버거운 역할을 맡느라 몹시 힘든 마당에 '아' 같은 유성음(voiced sound)으로 발성을 시작하는 것은 좋은 전략이기도 하므로, 이렇게라도 해서 역할을 완수할 수 있다면 오히려 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노래하다 지쳐서 쓰러지거나 목이 망가지기라도 했다면 얼마나 큰 망신이겠는가?

브륀힐데 역의 올가 사보바는 <신들의 황혼>의 발트라우테이기도 하다. 프리카나 지클린데 못지않게 잘했지만, 메조소프라노라서 저음이 강한 대신 고음이 약한 것은 약간은 아쉬운 점이기도 했다. '호요토호!'가 그랬고, 특히 옥타브 도약으로 '하이 C'를 내야 하는 부분에서는 포르타멘토를 사용해 억지로 짜내는 것이 흠이었다. 바그너 경력은 없단다.

훈딩 역의 게네디 베주벤코프는 <라인의 황금>과 <지크프리트>의 파프너 역이기도 했다. 역시 강력한 초저역이 대단했으며, 이 점에서는 '반지' 시리즈의 출연진 가운데 최고라고 할 만했다. 발음에 러시아어의 냄새가 유난히 짙은 것은 야만적인 훈딩을 표현하는 데에는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으나, 원론적으로는 단점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겐 역의 알렉세이 탄노비츠키로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신들의 황혼>에서 '진짜 탄노비츠키'를 만나기 전까지 '저 사람이 하겐 역을 잘할까?' 하는 우려가 있었으며, '진짜 탄노비츠키'를 본 사람들은 오히려 대타로 오인하기도 했다.

게르힐데 역의 리아 셰브초바와 헬름비게 역의 타티아나 크라브초바는 힘을 아낄 이유가 없는 만큼 '호요토호!'에서 깔끔하고 힘 있는 고음 처리를 했다. 특히 타티아나 크라브초바는 옥타브 도약 '하이 C'에서도 올가 사보바 같은 포르타멘토 없이 시원하게 내질렀다. 다른 발퀴레도 '올인'(또는 'Now or never!')의 태도로 열심히 불렀다.

<라인의 황금> 때 누워 있던 석상들은 일어서 있고 등에 날개가 달리는 등 위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는 이것을 보고 역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에바 1호가 변한 괴물을 연상했는데, 그 원형은 인도 신화에 나오는 파괴와 창조의 신 '시바'라고 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 가이낙스


2005년 10월 4일 씀.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5.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15일 토요일

2005.09.24. 《라인의 황금》 - 게르기예프 / 마린스키 극장 오페라단

라인의 황금 Das Rheingold -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오페라단
2005년 9월 24일(토) 저녁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 휘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연 출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감 독 : 율리아 페브즈너 Yulia Pevzner
무대 디자인: 조시 티시핀 George Tsypin

보탄 : 예프게니 니키틴 Evgeny Nikitin
프리카 : 스베틀라나 볼코바 Svetlana Volkova
알베리히 : 예뎀 우메로프 Edem Umerov
로게 : 콘스탄틴 플루즈니코프 Konstantin Pluzhnikov
파졸트 : 바딤 크라베츠 Vadim Kravets
파프너 : 게네디 베주벤코프 Gennady Bezzubenkov
미메 : 니콜라이 가시예프 Nikolai Gassiev
도너 : 에드워드 장 Eduard Tsanga
프로 : 예프게니 아키모프 Evgeny Akimov
보클린데 : 잔나 돔브로브스카야 Zhanna Dombrovskaia
벨군데 : 리아 셰브초바 Lia Shevtsova
플로스힐데 : 나덴자다 세르뒤크 Nadezhda Serdiuk
프라이아 : 타티아나 보로디나 Tatiana Borodina
에르다 : 즐라타 불리체바 Zlata Bulycheva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에서 바그너 음악을 처음으로 연주한 사람이다. 그런데 러시아가 나치로부터 입은 피해는 유태인 못지않은 것이라 이 때문에 러시아가 떠들썩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러시아는 자본주의 국가와는 달리 클래식 공연 문화가 대중 예술로서 확고한 입지를 유지하고 있으며, 심지어 연주회장에 대한 정부의 예산 축소에 따라 입장료를 인상한다는 발표가 나자 (그래 봐야 우리 기준으로는 터무니없이 싼 가격이란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며 대중 집회가 열린 적도 있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니 게르기예프는 자칫 '인민의 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바그너에 손댄 것이 된다. 이스라엘에서 바그너를 연주한 것이 '깜짝 이벤트'에 불과했던 바렌보임과는 달리 게르기예프는 러시아 악단을 이끌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바그너 공연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2005년 9월, 그는 <니벨룽의 반지> 한국 초연이자 '반지' 4부작 각각의 한국 초연을 지휘한 사람이 되었다. 우려와는 달리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다. 공연 전부터 여러 곳에서 관련 강좌가 열렸고 많은 참여가 있었다. 클래식 관련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바그너와 관련한 문답과 토론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반지'를 쉽게 해설해 놓은 ☞ 박원철씨의 웹사이트는 공연 전후로 트래픽(traffic)이 폭주했다. 무엇보다, 표가 팔렸다. 그리고 마침내 공연 날짜는 다가왔다.

연주에 대한 감상을 쓰기에 앞서 공연장의 음향 환경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은 객석은 크고 오케스트라 피트는 작아서 음량 손실이 매우 크다. 일류 오케스트라도 이것을 극복할 수는 없다.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예상한 바와도 같다. 지난 6월 11일부터 13일까지 있었던 간사이 니키카이 오페라단-서울시향의 <탄호이저>를 보고 내가 쓴 ☞ 감상문 가운데 일부를 인용한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오케스트라 피트는 기대했던 것보다 너무 작았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보다는 가로로 조금 더 넓은 것 같았지만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이 때문에 오는 9월에 게르기예프가 마린스키극장 오페라단을 이끌고 와도 압도적인 스케일의 음향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노들섬에 짓는다는 새 오페라하우스가 유일한 희망이란 말인가. 제발 전시용에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작을 때 음량 면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 현일 것이다. 바그너는 <탄호이저>를 오케스트레이션할 때 대규모 현악 파트를 염두에 두었으며, 극장의 현악 주자의 수를 정규인원보다 더 많이 둘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번 공연에서 서울시향의 현은 부족한 인원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음량을 내주었다. 12일 공연에서는 현이 금관과 합창 등에 묻혀 버리는 때가 종종 있었지만 13일에는 훨씬 나았다. 이것이 단순히 연주자들이 13일에 더욱 분발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극장 1층과 3층의 음향의 요술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12일 2층에서 들었던 어떤 사람도 "좀 오버하자면 다이나믹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밋밋함의 연속이었"다고 평한 것을 보면 12일보다 13일의 연주가 더 좋았다는 내 느낌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역시 소편성으로는 표현할 수 있는 다이내믹의 폭에 한계가 있었다. 이를테면, 서곡 마디 32에서부터 비올라-제2 바이올린-첼로-제1 바이올린-콘트라바스로 연이어 점층하는 셋잇단 리듬의 크레셴도는 그 폭이 충분히 크지 못했으며, 마디 37에서 마침내 트롬본이 이른바 ☞ '순례자의 합창' 모티프를 찬가처럼 크게 부풀려 연주할 때 현과 호른 등은 바이올린의 음량에 제약을 받아 제 힘을 내지 못했다. 2막 4장의 이른바 '입당행진곡' 부분에서는 무대 위에 배치된 12대의 트럼펫이 들려주는 압도적인 소리가 큰 매력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역시 '절제'를 위해 트럼펫 주자들이 무대 뒤편으로 숨어 버리고는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연출을 했다.


2막 4장, 입당행진곡 중 트럼펫 팡파르. 그림을 누르면 미디 음악이 연주됩니다.

© 1997-2002 by Fabrizio Calzaretti.



이번 공연 팜플렛에 나타난 오케스트라 파트별 단원 수와 <라인의 황금> 악보에 명시된 연주자 수를 비교해 보면 문제가 좀 더 명확해진다. 관악기와 타악기는 특수 악기까지 생각하면 필요한 만큼 있는 것 같지만, 현악기 주자들의 수를 보면 제1 바이올린 1명과 제2 바이올린 6명, 비올라 3명, 첼로 3명, 콘트라바스 1명, 모두 14명의 연주자가 부족하다. 공간이 충분하다면 객원 주자를 쓸 수도 있겠지만, 그 좁은 공간에 악보에 지시된 대로 108명(호른 더블링과 프롬프터 등을 고려하면 110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을까? 1층에서는 오케스트라 피트를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3층에서 연주자 수를 세어 본 사람의 말에 따르면 80명이 채 안 되는 인원이 피트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고 한다. 오케스트라 피트의 크기 말고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객석 수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등의 유수 공연장에 비해 1.5~2배 정도 많다는 점도 문제이겠다. 한편, 객석의 규모와도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공연장의 주파수별 소리 전달 특성이 다른 것 같다. 즉 저음이 많이 깎여서 양감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이런 사정을 모두 감안하면 이번 공연에서 현 소리는 꽤 큰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더. 만약 숄티의 녹음을 기준으로 이번 공연에서의 음량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면 당신은 뭘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과장된 소리는 실제 공연장에서는 들을 수 없다. 기준은 바이로이트 실황으로 해야 설득력이 있다.

어쨌거나 현의 절대적인 음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최대한 다이내믹을 살리기 위해서는 밸런스를 무시하고 금관과 타악기를 내세워 뿜빰거리던가, 또는 다이내믹을 희생시켜 정교하지만 밋밋한 연주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게르기예프는 절충안을 택했다. 화성적으로 풍부한 울림이 필요한 곳에서는 다이내믹보다는 밸런스를 택했고, 강력한 다이내믹이 필요한 곳에서는 과감히 밸런스를 포기했다. 음악적 맥락에 따라 최적의 선택을 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최선의 책략일 것인데, 공연장의 음향 환경에 적응할 기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을 게르기예프와 단원들에게는 철저하게 임기응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임기응변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다. 게르기예프는 진정한 거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인의 황금>은 현의 비중이 매우 큰 작품이라 어쩔 수 없는 결점이 꽤 많았다. 전주곡에서는 점층 효과에 의한 유장한 맛이 부족하고 대신 어수선한 느낌을 주었다. 이후로도 1장 내내 이어지는 현에 의한 물살의 표현이나 기타 현의 역할이 두드러지는 곳에서 여지없이 음량의 한계를 드러냈다. 거인들이 등장할 때에는, 다이내믹을 살리는 것이 최대의 목표가 되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겠지만, 베이스 트럼펫과 3대의 트롬본, 콘트라바스 트롬본의 4도 도약(편의상 '안티폰 antiphon'이라고 부르자.)이 주선율로부터 크게 돌출되어 선율 윤곽을 해쳤다. 현 소리는 작은 데다 '안티폰'에 대항할 금관은 콘트라바스 튜바 하나뿐이라 차라리 팀파니가 주선율마저 압도해 버리는 형국이었다.



'거인' 모티프. © 1997-2002 by Fabrizio Calzaretti.

그림 파일을 누르면 음악이 연주됩니다. 음악 출처: 박원철 홈페이지 © Decca


사소한 실수라고 보기에는 음악의 맥락상 비중이 만만치 않았던 곳도 있었다. 2장 첫 마디에서 테너 튜바의 음정 불안이 그랬고, 파졸트가 "당신의 창이 보호를 한다는 약속의 엄숙함이 모두 장난이란 말이오? Die dein Speer birgt, sind sie dir Spiel, des berat'nen Bundes Runen?  (한글 번역은 엄선애 교수의 것을 참고했음)" 할 때 "Speer(창)"와 동시에 나오는 ☞ '창'의 모티프에서 제1, 제3 호른과 제2, 제4 호른이 교차하는 "Spiel"과 "des" 사이(마디 넷째 박)의 음정 불안이 그랬다.


"Die dein Speer birgt, sind sie dir Spiel, des berat'nen Bundes Runen?"

© 1899 by B. Schott's Söhne, Mayence.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가수들의 수준은 기대 이상이었다. 솔직히 '러시아 사람이 독일 음악을 제대로 이해할까?' 하는 생각을 어느 정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가수들에 만족할 수 있었다. 물론 음반이 귀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불만스러운 부분도 많았겠지만, 실제 공연장에서 음반 수준의 연주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다. 전설의 명가수들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고, 스튜디오 녹음 같은 최상의 컨디션은 실제 공연장에서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탄 역의 예프게니 니키틴은 단단한 목소리를 가진 젊은 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한스 호터의 보탄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영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꽤 잘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다른 가수와 비교하자면 토마스 스튜어트나 ☞사무엘 윤과 비슷하다고 하겠는데, 토마스 스튜어트는 그렇다 치고 사무엘 윤이 예프게니 니키틴보다 한 수 위라고 말한다면 한국인을 너무 편애하는 것일까? 니키틴의 노래를 들으면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네덜란드인의 아리아 가운데 "죽은 자들이 모두 일어날 때, 나는 소멸하리라. Wann alle Toten auferstehn, dann werde ich in Nichts vergehn." 하는 대목이 생각났는데, 프로필을 보니 실제로 네덜란드인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알베리히 역의 예뎀 우메로프는 사악한 맛이 부족해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는데, 개인적으로는 좋게 들었고 사악한 연기도 꽤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이번 공연에서 군터 역으로도 나왔다. <로엔그린>의 텔라문트 백작과 전령(팜플렛에는 '헤럴드의 왕'이라고 되어 있다. '왕의 전령(Der Heerrufer des Königs; The King's Herald)'의 오역으로 판단된다.)을 맡은 적이 있단다.

로게 역의 콘스탄틴 플루즈니코프는 실수가 좀 있었지만, 굉장한 열연을 했던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프로필을 보니 로엔그린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어릿광대 같은 연기를 하던 사람이 로엔그린의 나레이션(In fernem Land)을 부르는 것은 상상이 잘 안 된다. 성배의 가호를 받는 성기사가 아니라 촐싹대는 바람둥이가 아닐지?

파졸트 역의 바딤 크라베츠는 사랑을 갈구하는 거인을 매우 잘 표현했다. 그 빛나는 가창은 이날 최고의 가수라 부를 만했고, 마르티 탈벨라를 연상시킨다는 말도 나왔다. 파졸트 말고는 바그너 경력이 없다는데, 하겐 쪽으로 개발해 봐도 괜찮지 싶다. 파프너 역의 게네디 베주벤코프는 저음을 강조하여 파졸트와 음색의 구분을 이룬 것이 마음에 들었다.

도너 역의 에드워드 장(고려의 후예라고 하며 러시아식 발음은 '짱가'에 가깝다고 한다.)은 유명한 '헤다! 헤다! 헤도!' 대목을 잘해야 박수를 많이 받을 텐데, 아쉽게도 천둥과 번개의 신답지 않게 패기가 부족했다. 연출상의 결정적인 실수도 있었는데, 망치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다. 창이 보탄을 상징한다면 망치는 도너를 상징한다. 북유럽 신화에서 도너(토르)의 망치 '묠니르(Mjöllnir; '묘르닐'이라고도 하는데, 일본식 발음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비슷한 예로 '궁니르'를 '궁그닐'이라고도 한다. 일본식 발음으로 고치면 각각 '묘루니루,' '궁구니루'가 된다.)'는 전장에서 수많은 거인족을 물리친 궁극의 병기로, <니벨룽의 반지>에서는 '반지'나 보탄(오딘)의 창 '궁니르(Gunnir)'만한 비중은 없지만 알고 보면 대단한 아이템이라 할 수 있다. 숄티 판에서는 일부러 망치(천둥) 소리를 따로 집어넣기도 했는데, 이날 공연에서는 악보에 표시된 팀파니 소리만으로 해결했고, 그마저 망치의 위력을 보여줄 만큼 음량이 크지는 않았다.

프리카 역의 스베틀라나 볼코바는 극중 비중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는데도 매우 인상깊었다. <발퀴레> 때에는 더욱 강력한 모습을 기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르지팔>의 꽃처녀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미메 역의 니콜라이 가시예프도 조연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만큼 훌륭했다. 로게를 맡은 적도 있단다. 프로 역의 예프게니 아키모프는 조연으로는 괜찮았지만 주연급은 아니었다. 이 사람이 <발퀴레>의 지크문트라는 잘못된 정보를 접하고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키잡이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프라이아 역의 타티아나 보로디나는 <로엔그린>에서 엘자를 맡은 적이 있단다. 에르다 역의 즐라타 불리체바는 부드럽고 깔끔한 음색이 영락없는 에르다였다. <지크프리트>의 에르다이기도 하다.

라인 처녀들의 합창에서는 화음의 밸런스가 영 안 맞았다. 제일 윗 성부를 맡은 보클린데는 목소리가 너무 컸고, 가운데 성부를 맡은 벨군데는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보클린데 역의 잔나 돔브로브스카야는 <파르지팔>에서 꽃처녀를 맡은 적이 있단다. 벨군데 역의 리아 셰브초바는 이번 <발퀴레>에서 게르힐데를 맡았고, <파르지팔>의 꽃처녀와 <발퀴레>의 브륀힐데를 한 적도 있단다. (어째 좀 이상하다. 브륀힐데라니. 저 작은 목소리로? 팜플렛의 오류가 아닐까.) 플로스힐데 역의 나덴자다 세르뒤크는 <발퀴레>의 발트라우테이기도 하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브랑게네를 맡은 적도 있단다.

니벨룽족은 남자 어른이 여성 또는 어린이와 섞여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날 공연에서는 모두 어린이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은 시각적으로는 좋지만 알베리히의 위협에 따른 비명 소리가 이상해지는 단점이 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김리의 목소리를 떠올려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될 것이다.

연출 문제는 나에게는 워낙 관심 밖이라 별로 할 말은 없다. 대신 소박한 인상만 기록으로 남겨 두기로 한다. 무대 장식 등 겉으로 보이는 부분을 제외하면 대본에 나타난 지시에 충실한 고전적인 연출이었는데, 연출을 단지 음악을 보조하는 역할 정도로만 여기는 나로서는 이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흔히 그렇듯이 연출이 음악의 우위에 자리 잡아 음악 해석을 방해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낫지 않은가? 무대 세트는 여러 신화를 짜깁기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런 점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저 말 많았던 석상이 더더욱 그렇다. 라인 처녀들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옷차림이 얌전해서 조금은 실망했다. 대신 푸른 빛을 내는 머리카락을 뒤집어 쓴 무용수들의 옷차림이 야했다. 푸른 빛 머리는 마치 해초(海草) 같았는데, 참 마음에 드는 장식이었다. 용을 표현한 아이디어는 대체로 호평을 받은 것 같은데, 나는 어째 부채춤이 생각나서 우습기만 했다. 거대한 '라인의 황금' 속에 프라이아가 들어간 것을 보고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생각났다. 알베리히의 의상은 <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오는 사오정을 연상시켜서 좀 우습다고 생각했다.

© KBS 출처: http://www.kbs.co.kr/2tv/superboard/character.shtml


뒷얘기. 공연 시작 직전에 목발을 짚은 금발의 백인 여성과 세종문화회관 직원의 말다툼이 잠시 주의를 끌었는데, 다리 불편을 호소하면서 1층 C열 오른쪽 통로 쪽 빈자리에 앉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 여자가 R 등급 티켓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결국 억지를 부려서 내 자리와 통로를 사이에 둔 자리에 앉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그너 공연을 찾아 전 세계를 돌아다니기로 유명한 사람이란다. 이름이나 기타 신상 정보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비 기인이라고 하니 그런 줄 알았으면 말이라도 걸어볼 걸 그랬다.

2005년 10월 3일 씀.
2006년 1월 10일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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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5.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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