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8일 토요일

이졸데 리듬

1막에서 서로 사랑을 확인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밀회를 즐기기 위해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린다. 이졸데는 멜롯의 간계를 간파한 브랑게네의 만류를 뿌리치고 횃불을 땅에 던져 끔으로써 트리스탄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초조한 마음으로 트리스탄을 기다린다. 이때의 관현악은 2막 전주곡에 거의 그대로 링크되어 있다.

마디 3의 첫째 박까지 이어지는 모티프는 흔히 ‘낮’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쇼펜하우어의 용어로는 외부로 드러나는 물질세계에서의 현상으로, 이는 ‘밤’으로 대변되는 내적 의식세계의 실체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Barry Millington, "Tristan und Isolde," NGD2.)

Ⓟ New York : G. Schirmer, c1934.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횃불이 서서히 꺼지며 ‘밤’의 세계가 펼쳐지고(마디 3 ∼ 마디 8), 트리스탄을 기다리는 이졸데의 초조한 마음이 베이스 클라리넷의 마치 발을 동동 구르는 듯한 모티프로 나타난다(마디 9 ∼ 마디 11).

이때, 마디 10에서 나타나는 음향적 충격에 주목하라. (나중에 고침: 이곳에 나오는 화음은 '변종 트리스탄 화음'이라 할 수 있겠으나 화성 진행은 이 글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2막 전주곡 m.9-10.
Ⓟ New York : G. Schirmer, c1934.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2막 전주곡 m.1-13.
Ⓟ New York : Broude Brothers, [1900?]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마디 10에서의 진정한 충격은 리듬에서 나타난다. 마디 9에서부터 나타나는 현에 의한 빠른 싱코페이션 리듬은 베이스 클라리넷에 의한 주선율과 충돌하며, 마디 10의 둘째 박에서 클라리넷과 호른이 같은 리듬 분할로 현의 음형을 이어받으면서도 싱코페이션은 갑자기 단절되어 그 리듬에 묘한 충돌이 일어난다. 이것은 또한 베이스 클라리넷의 A(실제 음은 G) 음에도 영향을 준다. 즉 클라리넷과 호른의 ‘방해’로 인하여 베이스 클라리넷의 A 음이 실제보다 (현악기에 의한 관성이 남아 있는 가상의 쉼표만큼) 먼저 연주된 것처럼 들리는 것이다. 이것은 이졸데의 조급한 심정을 직접적으로, 또 감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1막 전주곡에서의 음향적 충격이 '트리스탄 코드'로 대표된다면, 2막 전주곡에서 음향적 충격을 주는 이 리듬은 '이졸데 리듬'이라 부를 만하다.

그러나 이것을 연주자들이 ‘오류’로 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수많은 음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악기의 음량을 마디 10에서 갑자기 줄이거나, 또는 처음부터 현악기의 음량을 아주 작게 하기도 한다. 악보에서는 모든 악기를 여리게(p) 연주하도록 하고 있다. 베이스 클라리넷은 악기의 특성상 강한 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거의 듣지 못할 정도로 여린 피아니시모를 내는데에도 오히려 다른 악기보다 뛰어나다. (Hans Kunitz, Die Instrumentation: Clarinette, Breitkopf & Hartel (Leipzig, 1983). 이만방 역, 키다라 악기론 시리즈: 클라리넷, ARTSOURCE (서울: 1989).) 따라서 현악기의 음량을 아주 작게 하는 것은 주선율을 지나치게 부각시키고자 하는 자의적 해석으로 볼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리듬의 불일치 문제를 비켜가기 위한 편법으로 의심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현악기의 리듬 분할을 바꾸어 쉼표를 길게, 싱코페이션 리듬을 짧게 한 또 다른 ‘책략’도 있다. 여기에 템포마저 느리게 잡으면 리듬의 충돌을 크게 희석시킬 수 있다. 그러나 느긋한 템포는 주인공의 조급한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데에는 실패 요인으로 작용한다. 악보에서는 템포를 빠르게 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Sehr lebhaft; Molto vivace).

클라리넷과 호른의 어택(attack)이 베이스 클라리넷의 A보다 살짝 늦게 나오는 연주도 있다. 토마스 비첨의 1937년 녹음(1951년, 나치의 패망 이후 6년간의 침묵 끝에 새로운 바이로이트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 녹음은 바그너 시대의 원형에 가깝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에서는 템포를 몹시 빠르게 함으로써 잘못된 리듬에도 불구하고 양호한 수준의 음향적 충격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이 녹음에서 클라리넷과 호른의 어택이 늦어진 것은 지휘자의 의도라기보다는 연주자의 실수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한 측면이 있는데, 마디 10에서는 꽤 정확한 리듬 처리를 보이다가 마디 14에서 그러한 ‘실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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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4.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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