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 매체에 보낸 원고는 발간된 뒤에나 블로그에 올리곤 합니다. 그런데 이 글은 연주회 프로그램 해설이라 미리 올려도 좋지 싶네요. 내일 고양에서 열리는 구자범-경기필 연주회입니다.
나중에 붙임: 구글이 데이터 오류 났는지 글 날려먹어서 새로 올립니다. 아오….
▶ 트리스탄 화음, 어쩌다 마주친 그대 눈동자
짝사랑을 앓아보았는가. 사랑하는 임과 어쩌다 눈 마주쳤을 때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아보았는가. 또는 연인을 처음 본 순간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듯한 느낌을 받아보았는가. 바그너는 바로 그러한 눈 마주침을 《트리스탄과 이졸데》 첫 화음으로 나타낸 듯하다. 이와 관련해 바그너가 직접 언급한 일은 없다. 그러나 극 중에서 이 화음과 엮인 모티프는 눈 마주침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또 이 모티프는 때때로 영화에서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장면에 패러디 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금지된 사랑을 다루고 있으며, 바그너는 이 작품을 쓸 때 마틸데 베젠동크 부인과 불륜 관계였다.
이 화음은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하며 '트리스탄 화음'(Tristan Chord)이라 부른다. 그때까지 서양음악이 바탕으로 삼던 조성 체계를 이 화음이 무너뜨려 버렸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무조음악 시대를 열어젖힌 작품은 쇤베르크 현악사중주 2번이지만, 무조음악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작품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이며, 그 핵심은 트리스탄 화음이다. 트리스탄 화음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면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란다. 그러나 글쓴이에게 그럴 깜냥이 없을뿐더러 이 글에서는 지면이 모자라므로 어쩔 수 없이 전문 용어를 잔뜩 써서 짧게 설명하겠다. 관련 지식이 없는 사람은 모르는 대로 흘려 읽어도 좋다.
조성음악은 '긴장과 이완'을 근본 원리로 삼는다. 불협화음을 쓰려면 그에 앞서 '예비'를 해야 하고, 불협화음을 쓰고 난 뒤에는 안정된 협화음으로 '해결'해야 한다. 화성법 지식이 없는 사람은 모차르트 음악에 기본 3화음만 나온다고 오해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예비'와 '해결'을 잘했을 뿐 모차르트도 불협화음을 얼마든지 썼다. 심지어 모차르트가 트리스탄 화음을 쓴 일도 있다면 믿겠는가? 사실이다.
트리스탄 화음은 F―B―D♯―G♯ 또는 단3도, 감5도, 단7도 음정으로 쌓거나 이것을 전위시킨 화음이며, 따라서 변종 반감7화음이다. 모차르트를 비롯한 이전 작곡가도 썼던 이 화음이 바그너의 발명품(?)처럼 불리는 까닭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 화음이 쓰인 맥락 때문이다. 음악이 으뜸화음으로 시작하지 않고 조성이 분명하지 않은 단선율로 시작하는 대목부터 문제다. 이것을 얼렁뚱땅 A 단조로 보면 트리스탄 화음은 프랑스 6화음이라 할 수 있고, G♯ 음은 전타음이 된다. 그런데 전타음이 비정상적으로 길다. 더군다나 이 음이 해결되어야 할 A 음은 A♯ 음으로 가는 '경과음'처럼 쓰였다. 주객전도다. 게다가 이 화음과 얽힌 모티프는 딸림7화음으로 끝나지만, 어떻게든 해결되어야 하는 이 화음이 다른 조성 영역으로 곧바로 옮겨가 버린다. 같은 패턴이 되풀이된다.
조성을 A 단조가 아닌 A♭ 단조 등으로 보면 트리스탄 화음은 또 달리 해석된다. 그러나 설명이 길어지니 여기서 줄이자. 중요한 것은 이 화음으로 말미암아 조성이 확립되지 않은 채로 화성이 선율 속을 둥둥 떠다니게 된다는 사실이다. '무한선율'이라는 말이 그래서 생겨났다. 그리고 반음계적인 조바꿈이 일탈이 아닌 본질처럼 바뀌었으니 음계음과 변화음, 화성음과 비화성음을 구분하는 일이 큰 의미가 없어졌다. 조성은 이렇게 붕괴했다.
▶ 아름다운 꿈결인가 파도치는 물결인가
트리스탄 화음을 실제로 연주하는 일은 이론적 설명과는 또 다른 문제다. 여기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조성적 중심이 사라지고 화성이 둥둥 떠다니면서 나타나는 몽환적인 느낌을 살리는 해석이다. 음 하나하나가 서로 부딪히게 하기보다 차라리 부드럽게 스쳐 지나가게끔 하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트리스탄 화음은 불협화음이 아니라 아름다운 꿈결을 신비로운 음향으로 나타낸 것이 된다. 이어지는 음악에서도 꿈결처럼 어른어른한 느낌이 잘 살아나게끔 다스리는 해석이 어울린다. 지휘자 대다수가 이 해석을 따른다고 할 수 있으며, 글쓴이가 판단하기에 가장 아름다운 꿈결을 빚어낸 지휘자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다.
둘째는 짝사랑하는 임과 어쩌다 눈 마주쳤을 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살리는 해석이다. 강력한 불협화음에서 나오는 음향적 충격을 되도록 날것 그대로 살려야 한다. 목관악기의 어택(attack)을 날카롭게 살리고 그에 앞서 나오는 현악기의 크레셴도를 가파르게 다스린다. 이어지는 음악에서는 이졸데를 절정으로 이끈 노랫말처럼 "파도치는 물결 속에"(In dem wogenden Schwall) 몸을 내던지는 듯한 격정을 살린다. 글쓴이는 이 해석을 지지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해석을 따른 지휘자는 글쓴이가 아는 한 셋뿐이다. 카를 뵘, 한스 크나퍼츠부슈, 마리스 얀손스.
이번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지휘자 구자범은 어떤 해석을 보일지 궁금하다. 아름다운 꿈결인가, 파도치는 물결인가?
▶ 서곡인가 전주곡인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는 서곡이 없다. 이번 연주회에서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곡은 서곡이 아닌 1막 전주곡이다. 왜 서곡이 아닌 전주곡인가? 서곡과 전주곡은 어떻게 다른가? 서곡과 전주곡은 자주 헷갈리는 개념이다. 둘 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뜻으로 쓰인 탓에 더욱 헷갈리기 쉽다. 이 글에서는 혼동을 줄이고자 바그너 시대 맥락에서 쓰인 오페라 서곡과 오페라 전주곡에 대해서만 얘기하겠다.
서곡은 영어로는 'Overture'이다. '입구' 또는 '문'을 뜻하는 라틴어 'apertura'에서 온 말이다. 'apertus'라고 하면 드러낸다, 펼쳐 보인다는 뜻이다. 오페라에서 서곡은 전체 줄거리를 음악으로 요약해서 들려주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처음 듣는 오페라도 서곡을 들어 보면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것, 요즘 하는 말로 스포일러(spoiler)다. 네타바레(ネタバレ)다. 미리니름이다. 바그너는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뭐? ○○○가 범인이라고? 이런!
전주곡은 영어로 'Prelude'이다. '준비하다' 또는 '미리 해보다'를 뜻하는 라틴어 'praeludere'에서 온 말이다. 독일어로 전주곡은 'Vorspiel'인데, 말짜임은 영어와 비슷하다. 바그너 오페라 또는 악극(Musikdrama)에서 전주곡은 결말을 알려주지 않는다. 전주곡은 막이 오르기에 앞서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할 뿐이며, 서곡과 달리 막마다 제법 길게 나온다. 전주곡은 음악적으로도 완결되지 않은 채 다음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으뜸화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바그너는 오페라 《로엔그린》에서부터 서곡 대신 전주곡을 썼다.
▶ 사랑의 죽음, 죽음과 변용
"사랑의 죽음"(Liebestod)이라는 말은 본디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을 설명하면서 쓴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관습적으로 이졸데가 노래하는 마지막 장면, "부드럽고 상냥하게 그이가 웃음 짓네"(Mild und leise wie er lächelt)를 '사랑의 죽음'이라 부른다. 바그너는 이 장면을 일컬어 "이졸데의 변용"(Isoldes Verklärung)이라 했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가사 없이 관현악으로 편곡된 판본을 연주한다.)
변용(Verklärung, Transfiguration)은 쇼펜하우어 사상에서 따온 말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런데 바그너는 쇼펜하우어 사상에 열광했으되 입맛에 맞게 비틀어 작품에 반영했으므로, 이 글에서는 글쓴이도 잘 모르는 쇼펜하우어 얘기를 늘어놓는 대신 바그너가 쓴 노랫말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 절정에는 이런 노랫말이 나온다.
Ohne Nennen, |
이름을 부르지 말고, |
쇼펜하우어가 말한 '변용'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과 비슷한 개념이고, 따라서 죽음과 변용은 동의어에 가깝다. 그런데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와 달리 "지고한 사랑의 쾌락"(höchste Liebeslust)으로 그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명백히 성애를 가리키며, 따라서 바그너에게 죽음과 변용과 섹스는 동의어가 된다. 위 노랫말과 더불어 음악에 나타난 성적 고양감은 "우리 이제 죽으리, 한 몸으로"(So stürben wir, um ungetrennt)라는 말로부터 비롯한다. 또한 "새롭게 자각하고"(neu Erkennen)라 할 때 "Erkennen"이라는 말은 독일어 성경에서 "아담이 하와를 알고…" 할 때처럼 성교한다는 뜻이기도 하며, 이와 동시에 트리스탄과 이졸데 각자의 에고를 초월해 하나가 된 상태, 곧 죽음과 변용을 뜻한다. "이름을 부르지 말고"(Ohne Nennen)라는 말은 변용을 거쳐 새로운 자아로 거듭났으므로 서로 이름을 부르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고한 사랑의 쾌락"은 마지막 순간 마르케 왕 일당이 나타나면서 안타깝게 부서진다. 이것이 3막 끝에 이르러 트리스탄이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이어진다. 이미 죽은 트리스탄과 하나 되어 "새롭게 자각"하려면 이졸데 또한 죽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졸데는 "지고한 사랑의 쾌락"과 함께 죽음을 맞는다.
In dem wogenden Schwall, |
파도치는 물결 속에, |
글쓴이는 몇 가지 이유로 "지고한 쾌락"을 "더없는 기쁨"이라 옮겼지만, 원어는 "höchste Lust"로 2막에 나오는 "höchste Liebeslust"와 거의 같은 말이다. 엑스터시(ecstasy)인 동시에 죽음과 변용이다. 그리고 이 작품 대본에는 위 노랫말에 이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이어진다.
"이졸데는 변용된 듯 브랑게네 품에서 트리스탄 몸 위로 부드럽게 쓰러진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넋을 잃고 바라본다. 마르케는 주검에 축복을 내린다. 막이 천천히 내린다."
바그너의 망상이 유난스럽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한다는 생각을 바그너만 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대중가요 노랫말 가운데 이런 것도 있지 않은가.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 지금 멀리서 우리의 낙원이 손짓하며 우리를 부르네." 이 노래는 실제로 동반자살한 연인을 추모하는 곡이라고 한다.
▶ 모더니즘의 씨앗과 바그너의 후예들
'트리스탄 화음'으로 대표되는 바그너 음악 어법은 후대 작곡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가운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바그너의 후예'를 대표할 만한 작곡가이다. 그리고 오페라 《살로메》는 슈트라우스 작품 가운데 바그너의 영향이 가장 크게 나타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구스타프 말러 또한 슈트라우스 못지않은 바그네리안(Wagnerian) 작곡가였다. (다만, 말러는 나중에 바그너와 맞수였던 브람스 음악 어법을 변증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말러와 슈트라우스가 바그너에게 받은 영향은 화성 어법만은 아니다. '라이트모티프'로 대표되는 극(drama)적 장치 또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음악학자 달하우스(Karl Dahlhaus, 1928~1989)는 1889년을 서양음악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꼽으며 '음악적 모더니즘'이 이때부터 비롯했다고 보았다. 이해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돈 후안》과 말러 교향곡 1번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859년에 완성된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견주면, 이 두 작품의 화성 어법은 차라리 퇴보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달하우스가 두 작품에서 발견한 '음악적 모더니즘'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화성이 아닌 음색, 바로 현대적인 관현악법이다.
말러와 슈트라우스는 당대를 대표할 만한 관현악법 대가였다. 그런데 이 두 사람에 앞서 관현악법에 혁명을 불러온 작곡가가 둘 있었으니, 베를리오즈와 바그너였다. 그러니까 바그너는 화성법으로나 관현악법으로나 현대음악에 씨앗 역할을 한 셈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은 바그너 관현악법을 대표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트리스탄 화음'에서 목관악기가 빚어내는 음색이나 '사랑의 죽음'에서 빛을 머금은 듯 넘실거리는 현, 그리고 그 속에서 맑게 울려 퍼지는 하프 소리 등은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