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9일 목요일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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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황 18.

2막 전주곡이 흐른다. 소리가 생각보다 작다.

그러고 보니 발코니가 많이 높다. 발코니 좌석이 중간 등급인 까닭이 여기에 있나 보다. 그런데 거리를 헤아려도 소리가 작다. 틸레만이 '발작'을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내 생각에는 바이로이트 음향이 원래 이렇지 않을까 싶다.

음반으로만 듣고 꿈꾸던 바이로이트 사운드! 그 실체는 조금은 실망스러웠으나 끝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직접음이 적어서 자칫 흐리멍덩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리버브' 효과가 알맞게 들어가서 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럽게 감싸 안아 끌어당기는 야릇한 맛이 있었다. 단지 소리가 작을 뿐. ㅠ.ㅠ

그렇다고 '목욕탕 사운드'였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작은 소리도 꼼꼼하게 잘 울려주어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보다 200배쯤 또렷했고,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보다 2배쯤 또렷했다. 라인강 처녀들이 호흡이 안 맞았는지 아주 잠깐 멈칫하거나 그밖에 이음매가 자연스럽지 못했던 곳도 똑똑하게 잘 들렸다.

그보다 먼저 전주곡에 나오는 어지럽게 꼬인 리듬이 음반으로 들을 때보다도 훨씬 또렷하게 들려서 깜짝 놀랐다. 도대체 활을 어떻게 쓰기에 저런 소리가 날까. 그리고 저 밑에서 울려나오는 저음 현... 아아, 이것이 바이로이트 사운드!

이 음향으로 <신들의 황혼>이 아니라 <파르지팔>을 들었어야 하는데. 안 되겠다, 바이로이트 다시 가야겠다. 가고야 만다. 불끈!

http://fs.textcube.com/blog/0/2070/attach/XSal6ESP2A.jpg

모르시는 분이 있을까 싶어 잠깐 설명하자면, 바이로이트 축전극장 오케스트라 피트는 객석에서 보이지 않는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는 1층에서도 지휘자 머리쯤은 보이지만, 여기서는 오케스트라 피트가 무대 밑으로 들어가서 객석에서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사진으로 확인하시라. 이거 2층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때문에 오케스트라 소리가 지휘자 뒤에 있는 음향판에서 튕겨난 다음 무대 벽에서 다시 튕겨나 그제야 객석으로 날아온다.


전주곡이 끝나고 하겐과 알베리히가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자막이 없다. OTL
자막이 없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준비한 게 바로 이북리더 리브리에였는데...

소니 이북리더 리브리에(Librié)

리브리에는 전자잉크 디스플레이라서 백라이트가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지 않고 몰래 대본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변에 조금이라도 빛이 있을 때 얘기이고 아주 깜깜한 곳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바이로이트 축전극장이 바로 그랬다. 리브리에에 <니벨룽의 반지> 독일어-한국어 대본과 악보를 잔뜩 담아 왔으나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졌다. '폐인 정신'이 이런 곳까지 닿았을 줄이야!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생각했다가 이런 낭패를 겪는구나. 아 참, 건전지도 잃어버렸었지! OTL

독일어 대사를 실시간으로 따라가지 못하고 줄거리를 떠올려 가며 공연을 보려니 집중력이 떨어진다. 알베리히와 하겐이 대화를 나누는 2막 1장이나 브륀힐데가 하겐에게 지크프리트 약점을 알려주는 5장은 지루하게 느껴졌으며 무리한 일정에 따른 피로가 몰려오기까지 했다. 다음에 또 오려면 아예 날 잡고 독일어 텍스트를 달달 외워버려야겠다.

3장에서 하겐이 "호이호! 호이호호호! 기비히 사나이들아, 일어나라! Hoiho! Hoihohoho! Ihr Gibichsmannen, machet euch auf!" 하는 대목에 이르니 재미가 되살아난다. 하겐을 맡은 가수가 한스-페터 쾨니히(Hans-Peter König)라는데 카리스마가 대단하다.

이 대목에서는 스티어호른(Stierhorn)이라는 특이한 악기가 쓰이는데, 그야말로 '무식한' 소리를 내는 비상소집용 나팔이다. (독일어 'Stier'는 '소 bull'라는 뜻이다.) 더욱 '무식한' 대목은 화음이다. 바그너는 하겐이 무대에서 C 음을 연주하게 하고 무대 뒤 왼쪽에서 D♭ 음, 오른쪽에서 D 음을 불어서 입체적인 효과를 내는 동시에 반음씩 다른 음이 부딪혀 무시무시한 불협화음을 내도록 했으며, 숄티 판 음반에서 이 소리를 제대로 잡았다. 그러나 요즘에는 스티어호른 대신 좀 더 '음악적인' 트롬본을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연주하는 게 대세라더니 이날도 그랬다. 소리가 제법 거칠기는 했으나 틀림없이 트롬본 소리였다. 조금은 아쉬웠으나 이렇게 하는 쪽이 틸레만 스타일과도 더 어울렸다.

이어서 하겐과 기비히 사내들이 떠드는 대목에서는 얄궂은 곳이 있다. 소프라노한테나 시키는 트릴을 베이스한테 시킨 대목이다.

Ⓟ Mainz: B. Schott's Söhne, 1908. Plate 28000.

HAGEN
Einen Eber fällen sollt ihr für Froh;
Einen stämmigen Bock stechen für Donner;
Schafe aber schlachtet für Fricka,
daß gute Ehe sie gebe!

하겐
프로께 바칠 산돼지를 한 마리 잡고
도너께 바칠 힘센 숫염소를 한 마리 잡고
프리카께는 양을 잡아 바쳐서
결혼을 축복해 주십사 빕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임병수 음반 재킷을 인용하려고 했으나 저작권 문제가 골치 아파서..;;

가사를 보면 양을 잡으라는 대목이니 트릴로 양 흉내를 내라는 뜻이다. 그런데 베이스가 트릴이 되나? 음반을 들어보면 이 대목에서 안 되는 트릴을 해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더욱 우습다. 이날 하겐이 이 대목을 어찌하나 조금은 짓궂은 마음으로 귀담아들었더니 한스-페터 쾨니히는 그냥 비브라토로 은근슬쩍 넘어가고 말았다. 이럴 때에는 좀 망가지란 말이야!

어찌 보면 이건 연출 탓도 있지 싶다. 연출가는 기비히 사람들을 '문명인'으로 꾸미고 지크프리트를 '야만인 천둥벌거숭이'로 꾸며 놨다. 그래서 기비히 사람들이 즐거워하면서 서로 무기를 마구 부딪치는 대목에서도 유럽 사교모임처럼 점잖게 넘어가더라.

http://fs.textcube.com/blog/0/2070/attach/Xc79KfFFCb.png
누가 지크프리트인지 한눈에 알아보셨는가?

군터와 브륀힐데가 나오면서부터 브륀힐데를 맡은 린다 왓슨(Linda Watson)이 무대를 휘어잡는다. 오옷! 저 여왕님 포스! 다른 가수들도 너무너무 잘해서 그냥 음반을 듣는 듯하다. 한국 초연 때 그 보고 있기 조마조마하던 마린스키 극장 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르다.


▶ 상황 19.


2막이 끝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내가 <니벨룽의 반지> 한국 초연 리뷰를 쓴 게 학술지에 실렸다는 얘기를 했더니 '저놈 진짜 환자였군' 하는 반응이다. '반지 음반 뭐 좋아해요?' 하기에 뵘, 바렌보임, 크나퍼츠부슈 등등을 읊어대었다.

"세상에 그걸 다 가지고 있어요? 우리는 카라얀 판을 가지고 있는데 그건 어때요?"
"카라얀 좋죠. 그게 숄티 판과 비교되면서 저평가될 때가 잦은데 알고 보면 어쩌고저쩌고..."
"카라얀 판에서 하겐이 누군지 혹시 알아요?"
"음, 누구더라... 잠깐만요. 제 PDA에 데이터베이스가 있어요. 아, 카를 리더부슈! 이 사람 정말 유명하죠."
"노래 잘해요?"
"그럼요. 엄청난 가수예요. 그거 알아요? 바렌보임 판에는 필립 강이라고 한국인이 하겐인데 어쩌고 저쩌고..."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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