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6일 일요일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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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4)



▶ 상황 20.

3막.

라인 처녀들이 노래하는 대목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한국 초연 때 삐걱거리던 라인 처녀들과는 차마 견줄 수 없다. 게다가 이 대목에서 하프 소리가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어쩌면 하프 소리가 가장 아름답게 들리는 극장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라인 처녀들이 지크프리트와 말을 나누는 대목 또한 훌륭하다. 그러나 2막과 마찬가지로 자막이 없어서 독일어 가사를 실시간으로 따라가지 못하니 조금씩 지루해진다. 하겐과 군터가 나오면서 조금 나아지다가 하겐이 혼란을 이끌어내려고 지크프리트에게 기억이 돌아오는 약을 먹이는 대목부터 집중력이 돌아왔다.

마침내 지크프리트가 브륀힐데를 만나던 기억을 떠올리는 대목에서는 소름이 돋고야 말았다. 끝내 지크프리트는 죽고 장송 행진곡이 흐른다. 그런데 '칼' 모티프가 나오는 대목에서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던가!


▲ <신들의 황혼> 3막 마디 950-958. © Dover.

▲ '칼(Sword)' 모티프. © Decca
(인용된 악보에 나오는 모티프와는 살짝 다르다.)


악보에서 주황색으로 동그라미 친 대목이 '칼' 모티프다. 그 앞서 나오는 셈여림표를 살펴보자. 인용한 악보에는 빠졌으나 마디 448부터 '매우 여리게'(pp)로 시작하여 조금씩 소리가 커진다. 보탄을 상징하는 '창' 모티프가 베이스클라리넷과 튜바 따위로 마치 울먹이듯 나오고 뒤이어 지크프리트를 상징하는 '칼' 모티프가 트럼펫으로 사납게 터져 나온다.

이 대목을 제대로 살피려면 마디 942에 나오는 모티프를 알아야 한다.

▲ 마디 937-944. © Dover.

잉글리시호른, 클라리넷, 오보에가 차례로 연주하는 저 모티프 이름을 아시겠는가? 바로 지클린데 모티프다. (故 박원철님 홈페이지에 보니 숄티 판 2분 54초부터 나온단다.)

▲ 지클린데 모티프. © Decca


바로 앞선 마디 938에는 매우 중요한 무대 지시가 나온다.
(Der Mond bricht durch die Wolken und beleuchtet immer heller den die Berghöhe erreichenden Trauerzug.)

(달이 구름 사이로 뚫고 나와 산 언덕에 이르른 장례 행렬을 차츰차츰 더 밝게 비춘다.)

지클린데는 지크프리트를 낳다가 죽은 어머니이며, 지크프리트가 죽은 일을 누구보다도 슬퍼할 사람이다.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며 그 얼굴이 구름을 헤치고 나온 둥근 달과 겹친다. 바그너는 바로 이 모습을 마디 942에서 잉글리시호른 따위로 나타냈다. '다크 포스'가 넘쳐나는 지크프리트 장송 행진곡에서 이 대목만이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있으며, 이 소리가 뒤이어 나타나는 '다크 포스'를 더욱 애닲게 만들고 있다.

여기까지 알았다면, 눈치가 빠른 사람은 '장송 행진곡' 첫머리에 나오며 그 뒤로 이곳저곳에서 되풀이해 나오는 이른바 '고통(Suffering)' 모티프가 지클린데 모티프에서 왔음을 또한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 마디 911-918. © Dover.

지크프리트가 마지막 대사를 끝내고 마디 913에서 팀파니(Pk.)가 리듬을 연주한 다음 마디 915에서 비올라(Br.)와 첼로(Vc.)가 연주하는 셋잇단음 음형이 바로 '고통' 모티프이다. (숄티 판 00:15초) 바로 이 모티프가 '지클린데' 모티프에 이어 또 한 차례 나오는데, 이곳에도 중요한 무대 지시가 있다.

▲ 마디 948-949. © Dover.

(Aus dem Rheine sind Nebel aufgestiegen und erfüllen allmählich die ganze Bühne, auf welcher der Trauerzug bereits unsichtbar geworden ist, bis nach vornen, so daß diese, während des Zwischenspieles, gänzlich verhüllt bleibt.)

(라인강에서 안개가 피어올라 무대를 조금씩 메운다. 장례 행렬은 이미 보이지 않으며, 마침내 안개가 무대 앞쪽까지 꽉 채워 막이 바뀔 동안 무대는 완전히 감춰져 있다.)

이때 '고통' 모티프와 저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저음이 어우러진 '다크 포스'가 안개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라 극장을 가득 메운다. 그리고 마침내 '칼' 모티프가 사납게 터져 나온다. 보탄이 울부짖고, 군터가 울부짖고, 기비훙 사내들이 울부짖고, 우리 모두 울부짖는 듯한 이 소리를 트럼펫이 홀로 연주한다. (숄티 판 4분 7초)

'칼' 모티프가 나오기에 앞서 트럼펫은 쉬고 있으며, 크레셴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트럼펫이 갑자기 포르테(f)로 터져 나오는 대목은 여러모로 갑작스럽다. 따라서 이 대목은 말러 교향곡에서 곧잘 나오는 ☞ 개파(Durchbruch)를 내다보게 한다.

이 대목에서 '깜짝 효과'를 가장 잘 살린 녹음은 숄티-빈필 녹음이다.


© Decca

'칼' 모티프가 터져 나올 때부터 소리가 매우 크고, 마디 956에 나오는 온음표를 두 배로 늘여 연주하며, 이때 끝도 없이 크레셴도를 하여 듣는 사람이 숨 넘어가게 하며, 끝내 이 트럼펫 연주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게끔 한다.


▲ 게오르그 숄티 지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Decca

(음반 찾기 귀찮아서 故 박원철님 홈페이지에서 wma 파일을 받아 편집한 다음 MP3 파일로 만들었다. 가뜩이나 옛날 녹음을 두 차례 손실 인코딩했더니 음질이 대략 좋지 않다.)

그런데 이날 연주는 마디 448부터 '매우 여리게'(pp)가 아닌 '조금 여리게'(mp)쯤으로 시작해 소리를 잔뜩 키우는 바람에 '칼' 모티프가 주는 '깜짝 효과'가 빛바래 버렸다. 그러나 나는 뜻밖에 틸레만의 해석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사나운 트럼펫이 뒤로 물러났으나 그 앞서 나오는 잔뜩 부풀어 오른 '다크 포스'가 너무나 멋졌기 때문이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내가 가진 음반 수십 가지를 모조리 들어보았다. 트럼펫을 사납게 다스린 녹음이 있는가 하면 그에 앞선 '다크 포스'를 잘 살린 녹음도 있었다. 그러나 이날 들은 연주와 견줄 수 있는 녹음은 없었으며, 그나마 바렌보임-바이로이트 1992년 녹음이 비슷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바이로이트 녹음이 대체로 '다크 포스'를 잘 살린 듯하다. 어쩌면 틸레만이 이 대목을 이렇게 다스린 까닭이 '바이로이트 사운드'에 있지는 않았을까. 바이로이트가 아니라면 '다크 포스'를 이렇게까지 부풀리기는 어려우며, 또 바이로이트에서는 둥글둥글한 음향 때문에 트럼펫 한 대로 '깜짝 효과'를 내기는 어려워서 이렇게 해야 자연스럽지 않을까. 어쩌면 '바이로이트 사운드'를 가장 잘 알려주는 대목이 바로 이 대목인지도 모른다.

3막 3장에 이르러 하겐, 군터, 구트루네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목도 훌륭하다. 그러나 브륀힐데가 나타나니 그 카리스마가 다른 사람을 모조리 눌러버린다. 린다 웟슨(Linda Watson)이 뿜어주시는 저 여왕님 포스! 마침 반지를 '득템' 하려던 하겐마저도 '버로우'시킬 만하다. 이른바 '구원(Liebeserlösung)' 모티프가 나오면서부터 나는 조금 울었다.


▲ <발퀴레> 3막, '구원' 모티프. © Decca
('브륀힐데 신격화' 모티프라고도 하며, 故 박원철님 홈페이지에는 '구속(Redemption)' 모티프라고 나온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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