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15일 토요일

2005.09.24. 《라인의 황금》 - 게르기예프 / 마린스키 극장 오페라단

라인의 황금 Das Rheingold -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오페라단
2005년 9월 24일(토) 저녁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 휘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연 출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감 독 : 율리아 페브즈너 Yulia Pevzner
무대 디자인: 조시 티시핀 George Tsypin

보탄 : 예프게니 니키틴 Evgeny Nikitin
프리카 : 스베틀라나 볼코바 Svetlana Volkova
알베리히 : 예뎀 우메로프 Edem Umerov
로게 : 콘스탄틴 플루즈니코프 Konstantin Pluzhnikov
파졸트 : 바딤 크라베츠 Vadim Kravets
파프너 : 게네디 베주벤코프 Gennady Bezzubenkov
미메 : 니콜라이 가시예프 Nikolai Gassiev
도너 : 에드워드 장 Eduard Tsanga
프로 : 예프게니 아키모프 Evgeny Akimov
보클린데 : 잔나 돔브로브스카야 Zhanna Dombrovskaia
벨군데 : 리아 셰브초바 Lia Shevtsova
플로스힐데 : 나덴자다 세르뒤크 Nadezhda Serdiuk
프라이아 : 타티아나 보로디나 Tatiana Borodina
에르다 : 즐라타 불리체바 Zlata Bulycheva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에서 바그너 음악을 처음으로 연주한 사람이다. 그런데 러시아가 나치로부터 입은 피해는 유태인 못지않은 것이라 이 때문에 러시아가 떠들썩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러시아는 자본주의 국가와는 달리 클래식 공연 문화가 대중 예술로서 확고한 입지를 유지하고 있으며, 심지어 연주회장에 대한 정부의 예산 축소에 따라 입장료를 인상한다는 발표가 나자 (그래 봐야 우리 기준으로는 터무니없이 싼 가격이란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며 대중 집회가 열린 적도 있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니 게르기예프는 자칫 '인민의 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바그너에 손댄 것이 된다. 이스라엘에서 바그너를 연주한 것이 '깜짝 이벤트'에 불과했던 바렌보임과는 달리 게르기예프는 러시아 악단을 이끌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바그너 공연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2005년 9월, 그는 <니벨룽의 반지> 한국 초연이자 '반지' 4부작 각각의 한국 초연을 지휘한 사람이 되었다. 우려와는 달리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다. 공연 전부터 여러 곳에서 관련 강좌가 열렸고 많은 참여가 있었다. 클래식 관련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바그너와 관련한 문답과 토론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반지'를 쉽게 해설해 놓은 ☞ 박원철씨의 웹사이트는 공연 전후로 트래픽(traffic)이 폭주했다. 무엇보다, 표가 팔렸다. 그리고 마침내 공연 날짜는 다가왔다.

연주에 대한 감상을 쓰기에 앞서 공연장의 음향 환경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은 객석은 크고 오케스트라 피트는 작아서 음량 손실이 매우 크다. 일류 오케스트라도 이것을 극복할 수는 없다.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예상한 바와도 같다. 지난 6월 11일부터 13일까지 있었던 간사이 니키카이 오페라단-서울시향의 <탄호이저>를 보고 내가 쓴 ☞ 감상문 가운데 일부를 인용한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오케스트라 피트는 기대했던 것보다 너무 작았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보다는 가로로 조금 더 넓은 것 같았지만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이 때문에 오는 9월에 게르기예프가 마린스키극장 오페라단을 이끌고 와도 압도적인 스케일의 음향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노들섬에 짓는다는 새 오페라하우스가 유일한 희망이란 말인가. 제발 전시용에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작을 때 음량 면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 현일 것이다. 바그너는 <탄호이저>를 오케스트레이션할 때 대규모 현악 파트를 염두에 두었으며, 극장의 현악 주자의 수를 정규인원보다 더 많이 둘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번 공연에서 서울시향의 현은 부족한 인원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음량을 내주었다. 12일 공연에서는 현이 금관과 합창 등에 묻혀 버리는 때가 종종 있었지만 13일에는 훨씬 나았다. 이것이 단순히 연주자들이 13일에 더욱 분발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극장 1층과 3층의 음향의 요술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12일 2층에서 들었던 어떤 사람도 "좀 오버하자면 다이나믹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밋밋함의 연속이었"다고 평한 것을 보면 12일보다 13일의 연주가 더 좋았다는 내 느낌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역시 소편성으로는 표현할 수 있는 다이내믹의 폭에 한계가 있었다. 이를테면, 서곡 마디 32에서부터 비올라-제2 바이올린-첼로-제1 바이올린-콘트라바스로 연이어 점층하는 셋잇단 리듬의 크레셴도는 그 폭이 충분히 크지 못했으며, 마디 37에서 마침내 트롬본이 이른바 ☞ '순례자의 합창' 모티프를 찬가처럼 크게 부풀려 연주할 때 현과 호른 등은 바이올린의 음량에 제약을 받아 제 힘을 내지 못했다. 2막 4장의 이른바 '입당행진곡' 부분에서는 무대 위에 배치된 12대의 트럼펫이 들려주는 압도적인 소리가 큰 매력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역시 '절제'를 위해 트럼펫 주자들이 무대 뒤편으로 숨어 버리고는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연출을 했다.


2막 4장, 입당행진곡 중 트럼펫 팡파르. 그림을 누르면 미디 음악이 연주됩니다.

© 1997-2002 by Fabrizio Calzaretti.



이번 공연 팜플렛에 나타난 오케스트라 파트별 단원 수와 <라인의 황금> 악보에 명시된 연주자 수를 비교해 보면 문제가 좀 더 명확해진다. 관악기와 타악기는 특수 악기까지 생각하면 필요한 만큼 있는 것 같지만, 현악기 주자들의 수를 보면 제1 바이올린 1명과 제2 바이올린 6명, 비올라 3명, 첼로 3명, 콘트라바스 1명, 모두 14명의 연주자가 부족하다. 공간이 충분하다면 객원 주자를 쓸 수도 있겠지만, 그 좁은 공간에 악보에 지시된 대로 108명(호른 더블링과 프롬프터 등을 고려하면 110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을까? 1층에서는 오케스트라 피트를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3층에서 연주자 수를 세어 본 사람의 말에 따르면 80명이 채 안 되는 인원이 피트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고 한다. 오케스트라 피트의 크기 말고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객석 수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등의 유수 공연장에 비해 1.5~2배 정도 많다는 점도 문제이겠다. 한편, 객석의 규모와도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공연장의 주파수별 소리 전달 특성이 다른 것 같다. 즉 저음이 많이 깎여서 양감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이런 사정을 모두 감안하면 이번 공연에서 현 소리는 꽤 큰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더. 만약 숄티의 녹음을 기준으로 이번 공연에서의 음량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면 당신은 뭘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과장된 소리는 실제 공연장에서는 들을 수 없다. 기준은 바이로이트 실황으로 해야 설득력이 있다.

어쨌거나 현의 절대적인 음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최대한 다이내믹을 살리기 위해서는 밸런스를 무시하고 금관과 타악기를 내세워 뿜빰거리던가, 또는 다이내믹을 희생시켜 정교하지만 밋밋한 연주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게르기예프는 절충안을 택했다. 화성적으로 풍부한 울림이 필요한 곳에서는 다이내믹보다는 밸런스를 택했고, 강력한 다이내믹이 필요한 곳에서는 과감히 밸런스를 포기했다. 음악적 맥락에 따라 최적의 선택을 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최선의 책략일 것인데, 공연장의 음향 환경에 적응할 기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을 게르기예프와 단원들에게는 철저하게 임기응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임기응변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다. 게르기예프는 진정한 거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인의 황금>은 현의 비중이 매우 큰 작품이라 어쩔 수 없는 결점이 꽤 많았다. 전주곡에서는 점층 효과에 의한 유장한 맛이 부족하고 대신 어수선한 느낌을 주었다. 이후로도 1장 내내 이어지는 현에 의한 물살의 표현이나 기타 현의 역할이 두드러지는 곳에서 여지없이 음량의 한계를 드러냈다. 거인들이 등장할 때에는, 다이내믹을 살리는 것이 최대의 목표가 되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겠지만, 베이스 트럼펫과 3대의 트롬본, 콘트라바스 트롬본의 4도 도약(편의상 '안티폰 antiphon'이라고 부르자.)이 주선율로부터 크게 돌출되어 선율 윤곽을 해쳤다. 현 소리는 작은 데다 '안티폰'에 대항할 금관은 콘트라바스 튜바 하나뿐이라 차라리 팀파니가 주선율마저 압도해 버리는 형국이었다.



'거인' 모티프. © 1997-2002 by Fabrizio Calzaretti.

그림 파일을 누르면 음악이 연주됩니다. 음악 출처: 박원철 홈페이지 © Decca


사소한 실수라고 보기에는 음악의 맥락상 비중이 만만치 않았던 곳도 있었다. 2장 첫 마디에서 테너 튜바의 음정 불안이 그랬고, 파졸트가 "당신의 창이 보호를 한다는 약속의 엄숙함이 모두 장난이란 말이오? Die dein Speer birgt, sind sie dir Spiel, des berat'nen Bundes Runen?  (한글 번역은 엄선애 교수의 것을 참고했음)" 할 때 "Speer(창)"와 동시에 나오는 ☞ '창'의 모티프에서 제1, 제3 호른과 제2, 제4 호른이 교차하는 "Spiel"과 "des" 사이(마디 넷째 박)의 음정 불안이 그랬다.


"Die dein Speer birgt, sind sie dir Spiel, des berat'nen Bundes Runen?"

© 1899 by B. Schott's Söhne, Mayence.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가수들의 수준은 기대 이상이었다. 솔직히 '러시아 사람이 독일 음악을 제대로 이해할까?' 하는 생각을 어느 정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가수들에 만족할 수 있었다. 물론 음반이 귀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불만스러운 부분도 많았겠지만, 실제 공연장에서 음반 수준의 연주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다. 전설의 명가수들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고, 스튜디오 녹음 같은 최상의 컨디션은 실제 공연장에서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탄 역의 예프게니 니키틴은 단단한 목소리를 가진 젊은 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한스 호터의 보탄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영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꽤 잘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다른 가수와 비교하자면 토마스 스튜어트나 ☞사무엘 윤과 비슷하다고 하겠는데, 토마스 스튜어트는 그렇다 치고 사무엘 윤이 예프게니 니키틴보다 한 수 위라고 말한다면 한국인을 너무 편애하는 것일까? 니키틴의 노래를 들으면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네덜란드인의 아리아 가운데 "죽은 자들이 모두 일어날 때, 나는 소멸하리라. Wann alle Toten auferstehn, dann werde ich in Nichts vergehn." 하는 대목이 생각났는데, 프로필을 보니 실제로 네덜란드인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알베리히 역의 예뎀 우메로프는 사악한 맛이 부족해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는데, 개인적으로는 좋게 들었고 사악한 연기도 꽤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이번 공연에서 군터 역으로도 나왔다. <로엔그린>의 텔라문트 백작과 전령(팜플렛에는 '헤럴드의 왕'이라고 되어 있다. '왕의 전령(Der Heerrufer des Königs; The King's Herald)'의 오역으로 판단된다.)을 맡은 적이 있단다.

로게 역의 콘스탄틴 플루즈니코프는 실수가 좀 있었지만, 굉장한 열연을 했던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프로필을 보니 로엔그린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어릿광대 같은 연기를 하던 사람이 로엔그린의 나레이션(In fernem Land)을 부르는 것은 상상이 잘 안 된다. 성배의 가호를 받는 성기사가 아니라 촐싹대는 바람둥이가 아닐지?

파졸트 역의 바딤 크라베츠는 사랑을 갈구하는 거인을 매우 잘 표현했다. 그 빛나는 가창은 이날 최고의 가수라 부를 만했고, 마르티 탈벨라를 연상시킨다는 말도 나왔다. 파졸트 말고는 바그너 경력이 없다는데, 하겐 쪽으로 개발해 봐도 괜찮지 싶다. 파프너 역의 게네디 베주벤코프는 저음을 강조하여 파졸트와 음색의 구분을 이룬 것이 마음에 들었다.

도너 역의 에드워드 장(고려의 후예라고 하며 러시아식 발음은 '짱가'에 가깝다고 한다.)은 유명한 '헤다! 헤다! 헤도!' 대목을 잘해야 박수를 많이 받을 텐데, 아쉽게도 천둥과 번개의 신답지 않게 패기가 부족했다. 연출상의 결정적인 실수도 있었는데, 망치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다. 창이 보탄을 상징한다면 망치는 도너를 상징한다. 북유럽 신화에서 도너(토르)의 망치 '묠니르(Mjöllnir; '묘르닐'이라고도 하는데, 일본식 발음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비슷한 예로 '궁니르'를 '궁그닐'이라고도 한다. 일본식 발음으로 고치면 각각 '묘루니루,' '궁구니루'가 된다.)'는 전장에서 수많은 거인족을 물리친 궁극의 병기로, <니벨룽의 반지>에서는 '반지'나 보탄(오딘)의 창 '궁니르(Gunnir)'만한 비중은 없지만 알고 보면 대단한 아이템이라 할 수 있다. 숄티 판에서는 일부러 망치(천둥) 소리를 따로 집어넣기도 했는데, 이날 공연에서는 악보에 표시된 팀파니 소리만으로 해결했고, 그마저 망치의 위력을 보여줄 만큼 음량이 크지는 않았다.

프리카 역의 스베틀라나 볼코바는 극중 비중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는데도 매우 인상깊었다. <발퀴레> 때에는 더욱 강력한 모습을 기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르지팔>의 꽃처녀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미메 역의 니콜라이 가시예프도 조연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만큼 훌륭했다. 로게를 맡은 적도 있단다. 프로 역의 예프게니 아키모프는 조연으로는 괜찮았지만 주연급은 아니었다. 이 사람이 <발퀴레>의 지크문트라는 잘못된 정보를 접하고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키잡이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프라이아 역의 타티아나 보로디나는 <로엔그린>에서 엘자를 맡은 적이 있단다. 에르다 역의 즐라타 불리체바는 부드럽고 깔끔한 음색이 영락없는 에르다였다. <지크프리트>의 에르다이기도 하다.

라인 처녀들의 합창에서는 화음의 밸런스가 영 안 맞았다. 제일 윗 성부를 맡은 보클린데는 목소리가 너무 컸고, 가운데 성부를 맡은 벨군데는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보클린데 역의 잔나 돔브로브스카야는 <파르지팔>에서 꽃처녀를 맡은 적이 있단다. 벨군데 역의 리아 셰브초바는 이번 <발퀴레>에서 게르힐데를 맡았고, <파르지팔>의 꽃처녀와 <발퀴레>의 브륀힐데를 한 적도 있단다. (어째 좀 이상하다. 브륀힐데라니. 저 작은 목소리로? 팜플렛의 오류가 아닐까.) 플로스힐데 역의 나덴자다 세르뒤크는 <발퀴레>의 발트라우테이기도 하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브랑게네를 맡은 적도 있단다.

니벨룽족은 남자 어른이 여성 또는 어린이와 섞여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날 공연에서는 모두 어린이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은 시각적으로는 좋지만 알베리히의 위협에 따른 비명 소리가 이상해지는 단점이 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김리의 목소리를 떠올려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될 것이다.

연출 문제는 나에게는 워낙 관심 밖이라 별로 할 말은 없다. 대신 소박한 인상만 기록으로 남겨 두기로 한다. 무대 장식 등 겉으로 보이는 부분을 제외하면 대본에 나타난 지시에 충실한 고전적인 연출이었는데, 연출을 단지 음악을 보조하는 역할 정도로만 여기는 나로서는 이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흔히 그렇듯이 연출이 음악의 우위에 자리 잡아 음악 해석을 방해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낫지 않은가? 무대 세트는 여러 신화를 짜깁기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런 점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저 말 많았던 석상이 더더욱 그렇다. 라인 처녀들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옷차림이 얌전해서 조금은 실망했다. 대신 푸른 빛을 내는 머리카락을 뒤집어 쓴 무용수들의 옷차림이 야했다. 푸른 빛 머리는 마치 해초(海草) 같았는데, 참 마음에 드는 장식이었다. 용을 표현한 아이디어는 대체로 호평을 받은 것 같은데, 나는 어째 부채춤이 생각나서 우습기만 했다. 거대한 '라인의 황금' 속에 프라이아가 들어간 것을 보고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생각났다. 알베리히의 의상은 <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오는 사오정을 연상시켜서 좀 우습다고 생각했다.

© KBS 출처: http://www.kbs.co.kr/2tv/superboard/character.shtml


뒷얘기. 공연 시작 직전에 목발을 짚은 금발의 백인 여성과 세종문화회관 직원의 말다툼이 잠시 주의를 끌었는데, 다리 불편을 호소하면서 1층 C열 오른쪽 통로 쪽 빈자리에 앉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 여자가 R 등급 티켓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결국 억지를 부려서 내 자리와 통로를 사이에 둔 자리에 앉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그너 공연을 찾아 전 세계를 돌아다니기로 유명한 사람이란다. 이름이나 기타 신상 정보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비 기인이라고 하니 그런 줄 알았으면 말이라도 걸어볼 걸 그랬다.

2005년 10월 3일 씀.
2006년 1월 10일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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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5.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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