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황혼 Götterdämmerung -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오페라단
9월 29일(목)
저녁 5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 휘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연 출 : 발레리 게르기예프
Valery Gergiev
감 독 : 블라디미르 미르조예프 Vladimir Mirzoev
무대 디자인: 조시 티시핀 George Tsypin
브륀힐데 : 올가
세르게예바 Olga Sergeyeva
지크프리트
: 알렉세이 스테블리안코 Alexey Steblianko
군터 : 예뎀 우메로프 Edem Umerov
알베리히
: 빅토르 체르노모르츠예프 Viktor Chernomortsev
하겐 : 알렉세이 탄노비츠키 Alexei Tannovistsky
구트루네 : 발레리아
스텐키나 Valeria Stenkina
발트라우테 : 올가 사보바 Olga Savova
노른 1 : 루드밀라 카누니코바 Liudmila
Kanunikova
노른 2
: 스베틀라나 볼코바 Svetlana Volkova
노른 3 : 타티아나 크라브초바 Tatiana Kravtsova
보클린데
: 마르가리타 알라베르디안 Margarita Alaverdian
벨군데 : 리아 셰브초바 Lia
Shevtsova
플로스힐데 : 안나 키크나드제 Anna Kiknadze
<신들의 황혼>에서는 앞선 시리즈와는 달리 서막
및 1막부터 연주의 완성도가 높았다. 다른 '반지' 시리즈에 비해 현의 비중이 적은
편이라 다이내믹과 밸런스 사이의 트레이드-오프(trade off) 문제도 덜했다.
(현의 음량 부족 문제에 대해서는 <라인의 황금> 편을 참고하라.) 연주자들의
집중력이 <발퀴레> 2막보다는 못했지만 전체적으로는 4부작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연주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1막부터 너무 열심히 한 탓인지 3막에서는 끝을 향해 갈수록 연주가
조금씩 불안정해졌던 것은 옥에 티였다.
템포는 빠른 편이었으며, 맹약 장면과 기비히
무사들이 군터를 환영하는 장면 등에서는 깜짝 놀랄 만큼 빠른 템포로 몰아붙였다.
이 부분의 템포를 빠르게 한 것은 나름대로 참신한 해석이었고, 또 러시아 지휘자
및 악단과 어울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바그너 음악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를 해치는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다. 맹약 장면과 군터
환영 장면은 바그너 특유의 제의(祭儀) 장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바그너의 작품은
그 자체가 제의적이기도 하지만, 작품 속의 제의 장면은 감상자에게 특별한 영적
고양감을 일으키곤 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하라: 안인희,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
(서울: 민음사 2003) 202-205쪽.) 음악으로 제의적 효과를 일으키기 위해 템포는 느린 것이 좋으며,
이 점에서 바그너식 제의의 정점에 선 작품은 바그너가 무대신성제전극(Bühnenweihfestspiel)이라고
불렀던 작품인 <파르지팔>이다. (1막에서 성배기사들의 행렬 장면과 성배
의식 장면을 들어보라.) 하겐이 기비히 무사들을 소집하는 장면과 그에 이어지는 합창도 전체적으로 훌륭했지만, 역시 제의적
요소를 살리는 데에는 실패했다. 지크프리트 장송행진곡과 브륀힐데 자살 장면("저기
라인 강가에 강한 장작들을 나를 위해 더미로 쌓아다오! Starke Scheite schichtet
mir dort am Rande des Rheins zuhauf!" 이후부터 끝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서막
전주곡 마디 6과 마디 14에서는 트럼펫의 음정이 엉뚱하게 들렸다. 악보를
완전히 숙지하고 있지는 않아서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는데, 지금
생각으로 가장 가능성이 큰 가설은 제1 트럼펫이 여린 음을 내지 않아 돌출되었다는
것이다. 마디 6에서 제1 트럼펫의 A♭(실음은 C♭) 음은 E 단조 6도 화음의
소프라노 성부에 중복된 근음(root)이다. 제2, 제3 트럼펫은 각각 화음의 5음과 3음을
연주하며, 베이스 성부의 근음은 제1 트롬본 등이 담당한다. 그런데 마디 6의 주선율은
화음의 5음인 G♭(실음 기준)에서 C♭을 거쳐 E♭이
된다. 결국, 제1 트럼펫의 C♭(실음)은
비화성음은 아니지만 주선율 차원에서는 마치 비정상적으로 긴 선행음(Anticipation)처럼 기능
했다.
즉, 제1 트럼펫이 두드러지면서 선율 음인
G♭을 누르고 전체 선율 윤곽을 망가트린 것이다. 마디 14 역시 동형진행이므로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New York: G. Schirmer, 1904. Plate 26809.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서막 마디 359에서는 리듬이 이상하게 들렸다. 사실은 연주자가 실수하거나 엉뚱한 루바토를 쓰지 않고 오히려 인템포로 연주했는데 왜 그렇게 들렸을까? 답은 템포에 있다. 다음을 들어보자.
이것은 마디 327에 나오는 모티프의 변형이다.
그런데 마디 360의 셋잇단음 스타카토 부분을 강박에 배치하다 보니 원래 모티프와 리듬 윤곽이 다르게 들린다. 이 때문에 리듬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며, 마디 359의 변칙적인 리듬은 마치 연주자가 실수라도 한 것처럼 들리게 한다. 그러나 템포를 느리게 하면 덜 어색해진다. 다음은 <그림 2>에서 템포를 ♩= 120에서 ♩= 80으로 고친 것이다.
이제 훨씬 자연스럽다. (찬가처럼 크게 부풀린 관현악 총주를
상상하라.) 이날 연주는 ♩= 120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 100 이상으로 들렸다.
개인적으로는 ♩= 90 이하의 템포일 때 리듬이 어색하지 않게 들린다. 그 이상의
템포를 원할 경우 4분음 셋잇단 리듬에 루바토를 쓸 필요가 있다. 음반에서는 대개
템포와 상관 없이 루바토를 쓰고 있으며, 루바토를 쓰지 않은 녹음으로는 불레즈의
1979년 녹음이 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녹음에서도 연주자가 완벽하게 기계적인 템포를 소화하지는
못했다.)
2막 전주곡은 바이올린과 비올라에 의한 리듬이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리듬의 변칙성은 언뜻 들어서는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악보를 들여다 보면 사실은
매우 복잡함을 알 수 있다. 이날 연주에서는 '실수를 하나 안 하나 어디 두고
보자!'
하는 심정으로 특별히 주의 깊게 들었는데, 역시 연주회장의 극악한 음향 환경 때문에
현의 운궁이 또렷하게 전달되지도 않았다. 마지못해 내린 결론은 실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New York: G. Schirmer, 1904. Plate 26809.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2막 3장에서 하겐의 "호이호! 호이호호호! 기비히의 대장부들아.
일어들 나시오! Hoiho! Hoihohoho! Ihr Gibichsmannen, machet euch auf!"와
함께 연주되는 스티어호른(Stierhorn) 소리가 빠진 것도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발퀴레> 때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바그너는 하겐이 무대에서
C, 무대 뒤 왼쪽에서 D♭, 오른쪽에서 D로 불어서 입체적인 효과를 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요즘 바이로이트에서는 그냥 오케스트라 피트 관악기 위치에서
트롬본이 연주한다고 한다. 스티어호른 두 대가 동시에 소리 낼 때에는 단2도 또는
장2도 음정으로 강력한 불협화음이 되는데,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역시
스티어호른을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3막에서 지크프리트의 "깨우는 자가
왔소. 그가 입맞춤으로 당신을 깨우고 있소. Der Wecker kam; er küßt
dich wach," 대목(마디 891-899)의 목관과 트럼펫에 의한 리듬은 여린 다이내믹
속에서도 죽어가는 지크프리트의 강렬한 흥분 상태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 부분에서는
피아니시모에서부터 시작하는 섬세한 크레셴도와 데크레셴도가 필요한데, 역시 세종문화회관은 이것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이 부분은 <지크프리트> 3막과도
링크되는데, 그날 연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New York: G. Schirmer, 1904. Plate 26809.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유명한 '지크프리트 장송행진곡'에서는
전체적으로 박진감 있게 잘했으나 몇몇 부분은 아쉬웠다. 마디 926에서 마디 927까지
현에 의해 피아노(p)에서 포르티시모(ff)로 세 단계를 거쳐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크레셴도도
약했고, 마디 960-962에서는 현이 호른 및 베이스 트럼펫과 안티폰(antiphon)처럼
주고받는데, 이때 현의 급박한 다이내믹 변화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물론
일차적으로 연주회장 탓이다.) 마디 953에서 갑자기 터져 나오는 트럼펫의 포르테(f)와
이어지는 크레셴도는 말러의 이른바 '개파(Durchbruch)'를 예견하게 하는 갑작스럽고도
강렬한 국면 전환 효과를 불러오며, 숄티의 녹음에서는 특히 마디 956의 크레셴도를
매우 길게 늘이기도 했다. (라이브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연주자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인간이
아니다.) 이날 연주에서는 그러한 다이내믹의 대비가 크지 않아서 극적 효과가 약했다.
(원인은 연주회장의 극악한 음향과 트럼펫 주자의 기력 소진이 반반일 것으로 생각된다.)
마디 957부터는 트라이앵글과 테너 드럼(Rührtrommel) 등의 롤(roll)을
과장하면 현의 음량 부족에 의해 밸런스가 무너질 것을 걱정할 필요 없이 금관이
강력한 포르티시모를 마음껏 낼 수 있기 때문에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이날 연주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마디 953의 트럼펫 음량부터 지휘자의
의도가 작용했던 것일까? 이 부분에서 현 소리를 버리지 않은 것은 장단점이
있겠지만 극적인 효과는 어쨌든 부족했다.
New York: G. Schirmer, 1904. Plate 26809.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마디 969에서는 서막 마디 359와 같은 템포 문제가 있었다. 마디 969-974에서는 대부분의 음반에서 적당히 루바토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이날 공연에서는 줄곧 인템포로 연주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마디 974 셋째 박에서는 일종의 착청(錯聽; '착시'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착청'도 있다.)을 만들어내야 한다. 서막 마디 360 넷째 박에서는 목관에 의해 유도되는 주선율의 옥타브 도약이 있지만, 같은 모티프로 링크되는 3막 마디 974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이 들려야 한다.
© 2005 김원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심벌즈가 팀파니와 테너 드럼(Rührtrommel)의
롤(roll)을 동반하여 일으키는 강력한 차폐 효과(masking effect)와 그에 이어지는
음고 복원 효과(pitch restoration effect)이다. '음고 복원 효과'란 '음소 복원
효과 (phonemic restoration effect)'를 변형시킨 것으로 내가 지어낸 말이다. 음소
복원 효과는 워렌(Richard M. Warren)이 1970년에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한
논문에서 유래한 용어로, 워렌은 피험자에게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녹음된 문장을
들려주었다:
The state governors met with their respective legislatures convening in the capital city.
여기에서 "legislatures"의 가운데 /s/ 소리는 삭제하고
대신에 기침 소리를 넣었다. 그러나 피험자들은 이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으며, 어떤
소리가 하나 빠졌다고 알려주어도 그 위치를 알지 못했다. 사라진 /s/ 음소는 지각
과정에서 '복원'된 것이다. 후속 실험에서는 제거된 음소(*eel) 대신에 복원된 음소가
문장의 맥락에 따라 다른 음소(wheel, heel, peel, meal 등)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마디 974에서 심벌즈 등의 소리가 충분히 크지 않으면 음고 복원
효과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실제로 몇몇 음반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날 연주에서는 심벌즈 등이 음고 복원 효과를 일으킬 만큼 충분히 컸다.
브륀힐데의
"저기
라인 강가에 강한 장작들을 나를 위해 더미로 쌓아다오! Starke Scheite schichtet
mir dort am Rande des Rheins zuhauf!" 이후부터는 긴 호흡으로 피날레를 향해
서서히 나아가며 주술적인 효과를 일으킨다. 이날 연주에서는 다이내믹의 폭이 좁은
것이 역시 아쉬웠다. (원인은 연주회장의 음향 문제와 연주자들이 지친 것이 반반으로
판단된다.) 다만, 마디 1538부터 바이올린에 의해 연주되는 이른바 '구원(redemption; Liebeserlösung)'의
모티프는 연주회장의 음향 환경을 감안하면 매우 좋았다.
출처: http://www.utexas.edu/courses/wagner/148.html
브륀힐데 역의 올가
세르게예바는 이번 '반지' 시리즈 가운데 최고의 브륀힐데였다. 몸매도 브륀힐데
치고는 매우 날씬한 편이었다. <발퀴레>에서의 브륀힐데와 지클린데 등도 그랬지만,
뛰어난 성량에 비해 몸매는 가냘픈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음색은 귀네스 존스를
닮았다는 의견이 많았다. 극이 후반부로 가면서 고음 처리를 완벽하게 하지 못하고
실제보다 반음 정도 낮은 음을 낸 적이 있었던 것이나, 또는 2막의 이른바 '복수의
3중창'에서 갑작스런 저음 처리를 힘들어했던 것 등은 옥에 티였다. 특히 "그의
피로써 그가 속죄하기를! mit seinem Blut büß' er die Schuld!"에서는
가수와 오케스트라가 완전한 유니즌을 이룰 만큼 대사의 무게가 큰 부분이라 성량이 부족한
것이 몹시 아쉬웠다. <발퀴레>의 브륀힐데를 맡은 적이 있단다.
지크프리트
역의 알렉세이 스테블리안코는 테너 같지 않고 베이스나 바리톤 같았는데, 그것이
원래 목소리인지 이날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덕분에 군터로
변장했을 때에도 베이스-바리톤인 군터의 목소리를 일부러 흉내 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 재미있었다. (오히려 군터 역의 바리톤 예뎀 우메로프보다 낮게 들릴 때도 가끔
있었다.) 새 흉내는 발성은 뛰어났지만 굵은 목소리 때문에 연극적인 측면에서는
낙제점이었다. <신들의 황혼>의 지크프리트는 <지크프리트>의 지크프리트만큼
강력한 헬덴 테너일 필요는 없고 고음처리도 덜 필요하기 때문에 음역이
낮아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크프리트>에서의 레오니드 자코자예프와
음색의 차이가 컸던 점은 좋지 않았다. 게다가 2막 후반부에서부터 지친 기색을 보이다가
3막에서는 목소리가 잠겨서 몇 번이나 기침을 했던 것은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런데
프로필을 보면 의외로 주역 가수인 것 같다. (역시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일까?)
로엔그린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군터 역의 예뎀 우메로프는 <라인의
황금>에서의 알베리히였는데, 알베리히보다는 군터에 어울렸다. (알베리히와 군터를
같은 가수가 소화한다는 것은 사실 넌센스다.) 군터 역할에 역량을 집중했더라면
더욱 뛰어난 가창을 들려줄 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쉽다. "그의 피로써
그가 속죄하기를! mit seinem Blut büß' er die Schuld!"에서
브륀힐데와 마찬가지로 저음을 시원하게 처리하지 못했던 점은 옥에 티였다.
하겐 역의 알렉세이 탄노비츠키는
1976년생의 젊은 가수로 주역이 아닌 모양인데, 그 카리스마는 주연들을 압도할
정도였다. 다만, 뛰어난 연기력에 비해 음색의 사악한 맛은 부족했다. 커튼콜 때에는
공연 중의 카리스마를 무색하게 할 만큼 순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열광적인
박수를 받자 매우 놀라는 것 같았다. 프로필에 따르면,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필하모닉
홀에서 있었던 베르디 레퀴엠 연주회에 대해 한 비평가는 "탄노비츠키의 아름답고
낭랑한 음색, 완벽할 정도로 깔끔하게 표현된 곡, 마치 홀린 듯한 관객들"이라고
평했다 한다. 바그너 경력은 없었던 모양이다.
알베리히
역의 빅토르 체르노모르츠예프는 <지크프리트>에서도 알베리히였는데, <지크프리트>에서
뛰어난 가창을 들려주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단역이라서 별다른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구트루네 역의 발레리아
스텐키나는 훌륭했지만, 단역을 맡은 탓에 특별히 주목받지는 못했다. 쿤드리와 지클린데를
맡았던 적이 있단다. 음색이 지클린데 역에는 잘 어울릴 것 같지만, 쿤드리를 맡기에는 너무
가는 목소리가 아닐까 싶다. 발트라우테 역의 올가 사보바는 <발퀴레>의
브륀힐데였는데, 이번에는 반지를 라인의 처녀들에게 돌려주라며 브륀힐데를 야단치는
역할을 맡은 것이 재미있다. 좀 더 따끔하게 야단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전체적으로 썩 잘했다.
첫 번째 노른 역의 루드밀라 카누니코바는
<발퀴레>의 슈베르틀라이테이다. 원래 단역 가수인 듯한데, 단역치고는 꽤
잘했다. 그런데 의외로 오르트루트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두 번째 노른 역의 스베틀라나 볼코바는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에서 프리카 역으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가수인데, 이날에는 역할 비중이 좀 축소되어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세 번째
노른 역의 타티아나 크라브초바는 <발퀴레>의 헬름비게인데, <발퀴레>에서
깔끔하고 강력한 '하이 C'를 들려주었던 것과는 달리 이날에는 좀 얌전해서 불만이었다.
특히 "끊어졌네! Es riß!"에서의 성량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인
처녀들의 합창은 <라인의 황금> 때보다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고 딕션도 별로였다. 보클린데
역의 마르가리타 알라베르디안은 헬름비게와 <파르지팔>의 꽃처녀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벨군데 역의 리아 셰브초바는 <라인의 황금>에서도 벨군데였으며,
<발퀴레>에서는 게르힐데였다. 플로스힐데 역의 안나 키크나드제는 <발퀴레>의
그림게르데이다.
2막에서의 남성 합창은 지난 6월 13일에 있었던 간사이
니키카이 오페라단의 <탄호이저>와 비교하게 된다. 마린스키의 합창 수준은
매우 높았지만, 간사이 니키카이 오페라단에 비하면 한 수 아래였다. 주역 가수들의
기량은 마린스키 쪽이 월등했던 것을 보면 역시 일본은 합창이 강한 모양이다.
뒷얘기. '신비기인'의 좌석 위치를 확인해 두었다가 공연이 끝나고 나서 결국 말을
걸어보았다. 기억을 더듬어 재구성한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원철: 실례합니다.
신비녀:
안녕하세요?
김원철: 외람된 말씀이지만(과잉 정중 모드), 당신이 그 유명한 바그네리안...
신비녀:
(말 끊으며) 맞아요. 당신은 한국인인가요 아니면 공연 보러 한국에 온 건가요?
김원철:
한국인입니다.
신비녀: 나 이곳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정말 멋진 곳이로군요!
어쩌고저쩌고... (수다 모드로 돌변함.)
김원철: 그렇게 말씀하시니 기쁘군요.
신비녀:
그런데, 연주자 대기실이 어디인지 아세요?
김원철: 모르겠네요. 에, 그러니까,
바그너 공연을 보러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는?
신비녀: 맞아요.
김원철: 존경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 "I adore you!"라고 해버렸다. 남녀 사이에서 'adore'를 쓰면
사랑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런, 나이가 많아 보이던데... 그녀는 그냥 웃더라.)
신비녀:
어쩌고저쩌고... (계속 수다 모드)
김원철: 당신은 유명세에 비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는데, 이름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신비녀: 이번 공연에 대해 TV로 방송이
나갔다던데, 못 봤나 보죠?
김원철: 저는 TV를 안 보거든요.
신비녀: 이러쿵저러쿵... (이름은 안 가르쳐주면서 계속 수다)
김원철: 일본 공연에도 갈 건가요?
신비녀:
물론이죠.
김원철: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
이렇게 해서 <니벨룽의 반지> 한국 초연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는 연주회장의 열악한 음향 환경에서도
상당히 뛰어난 연주를 들려주었다. 물론 이번 공연에 대해 좋게만 평가할 수는 없다.
연주자들은 최상의 상태로 공연에 임했다 할 수 없으며 가수 기용의 적절함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지휘자는, 저 탁월한 기본기를 빼버리고 작품에 대한 해석만 놓고
본다면, 대체로 악보에 충실하기는 했지만 불레즈처럼 확실한 주관을 가지고 차가운
해석을 한 것이 아니라 나이브(naive)하게 악보를 따라가기만 했다. 그럼에도 독일인이
아닌 러시아인이 바그너의 음악을 이만큼 완성도 있게 연주한 것은 대단하다. 무엇보다
이번 공연은 한국 초연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올해는 바그네리안에게 매우 뜻깊은 해이다. <탄호이저>가
원어로는 사실상 국내 초연되었고, <니벨룽의 반지> 국내 초연도 마침내 이루어졌다.
'반지'를 자력으로 무대에 올리려는 움직임도 있다. 10월 20일에는 바이로이트에서 호평받고 있는 베이스 연광철이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마르케 왕의 모놀로그를 부를 예정이며, 10월 30일에는 왕년의 바그너 가수 귀네스
존스가 온다. 그리고 성배의 그 다음 계시는 12월 15일,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이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를 주목하라!
2005년 10월 11일 씀.
2006년
1월 10일 고침.
김원철. 2005.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