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18일 월요일

라 폴리아(La Folía)

한산신문에 연재하는 칼럼 원고입니다.



스탠리 큐브릭이 감독한 영화 《배리 린든》을 아시나요? 풍운아 배리 린든의 성공과 몰락을 다룬 내용, 그리고 18세기 사회를 아름답게 재현한 화면이 멋지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도 영화 내내 흐르던 가슴 시린 음악일 겁니다. 헨델이 작곡한 d단조 모음곡 가운데 '사라방드'인데요, 사실 이 곡에서 되풀이되는 선율은 헨델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것입니다. 라 폴리아(La Folía)라고 하지요.

'폴리아'는 포르투갈 또는 에스파냐 말로 정신이 나갔다는 뜻입니다. 미친 듯이 빠르게 움직이는 15세기 포르투갈 춤에서 유래한 듯한데, 그 음악이 어땠는지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서 오늘날과 같은 '라 폴리아' 음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라 폴리아'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에스파냐 또는 이탈리아 노래에서 온 선율인 듯해요.

'라 폴리아' 선율에 오늘날과 같은 화음을 입힌 사람은 17세기 프랑스 작곡가인 장바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입니다. 이후 아르칸젤로 코렐리, 마랭 마레,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안토니오 비발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안토니오 살리에리 등 적어도 150명이 넘는 작곡가가 '라 폴리아'를 인용한 작품을 남겼지요. 서양음악 역사상 이만큼 많이 인용된 선율은 그레고리오 성가 중 '진노의 날'(Dies irae) 정도일 듯합니다.

이를테면 베토벤은 교향곡 5번 c단조 '운명' 2악장에서 '라 폴리아'를 마치 농담처럼 슬쩍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어? 잘 모르겠다고요? 제법 변형이 되어서 알아채기 쉽지 않은데, 목관악기로 연주하는 행진곡풍 음형을 잘 들어보시면 화성 진행이 바로 '라 폴리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숨은그림찾기 하듯 잘 들어보세요!

라흐마니노프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라 폴리아' 주제를 사용한 곡 가운데 코렐리 바이올린 소나타 d단조 Op. 5-12 '라 폴리아'가 워낙 유명한 탓에 제목을 그렇게 붙인 것입니다.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지난해 10월 통영국제음악당에서 피아니스트 올가 셰프스가 연주한 곡이기도 하지요. 그날 공연을 기억하시는 분은 '아하!' 하실 듯합니다.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도 '라 폴리아' 주제를 따온 변주곡입니다. '라 폴리아'의 말뿌리가 스페인, 그러니까 에스파냐 쪽에서 온 말이라 흥미롭습니다. ('스페인'은 영어식 표기이지만, 곡 제목을 쓸 때는 관례대로 이렇게 할게요.) 그리고 변주 중간에 에스파냐 민요풍 음형이 에피소드처럼 나오는 것이 독특하지요.

지난해 화제가 되었던 TV 드라마 《밀회》에서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가 매우 비중 있게 나온다지요. 집에 TV가 없는 저는 소문을 들은 것이 전부라 자세한 맥락은 모릅니다만, 기회가 되면 언제 한번 보고 싶기는 하네요. 기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만만치 않은 이 곡을 주인공이 어찌 연주할지 궁금합니다.

피아니스트 주세페 알바네세(Giuseppe Albanese)가 5월 29일 금요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를 연주합니다. 주세페 알바네세는 최근 도이치 그라모폰 음반 데뷔 이후 스타 연주자로 발돋움하고 있는 연주자로, 이번 공연은 앞으로 거장이 될 연주자의 젊은 모습을 볼 기회로 기대할 만합니다.

리스트 《2개의 전설》 중 '물 위를 걷는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와 《순례의 해》 중 3곡, 그리고 벨리니 《노르마》 회상, 베를리오즈 《파우스트의 겁벌》 중 실프의 춤,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사랑의 죽음 등 리스트가 오페라 주요 장면을 편곡한 작품이 연주될 이번 공연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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