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게티: 론타노(Lontano)
선율과 리듬과 화성은 전통적으로 서양음악을 이루는 3요소로 꼽혀 왔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음색'이 그 못지않게 중요해졌고, 1960년대에는 전통적인 화음 개념을 확장한 이른바 음 덩어리(cluster)로 선율 · 리듬 · 화성을 사실상 무력화하고 음색 또는 '음향'을 전면에 내세운 음악이 나타난다. 리게티 〈아트모스페르〉와 펜데레츠키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가 대표적인 예이다.
1967년 작품 〈론타노〉(Lontano)는 음을 덩어리로 쌓아 만든 '음향'을 앞세웠다는 점에서 1961년 작품 〈아트모스페르〉와 비슷하다. 이 곡에서 선율과 리듬은 조각조각 나뉘어 카오스 속에 녹아버리고, 화음은 음 덩어리가 되어 '음'과 '소음' 사이를 넘나든다. 그러나 선율과 화음 일부가 여전히 살아남아 때때로 음악의 표면에 떠오른다는 점에서 〈론타노〉는 〈아트모스페르〉와 차이가 있다. 음악학자 이희경의 말을 빌리자면, 〈아트모스페르〉가 화성적 색채 면에서 잿빛이었음에 비해, 〈론타노〉는 화성적으로 훨씬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 곡에서 음 덩어리(또는 음향복합체)가 순간순간 이루는 '형상'에 집중해 보자. 이 형상은 멈춰 있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며, 자라거나 줄어들고 뭉치거나 흩어지기도 한다. 작곡가는 마치 구름 사이로 한 줄기 빛이 흘러나오는 듯한 심상을 곡 중간에 담기도 했다. 이희경은 '론타노'라는 제목이 공간적으로 '먼 곳'에서, 시간적으로 오랜 과거로부터 울려 나오는 소리를 이중적으로 뜻한다고 보았다. 어쩌면 시간적으로 '먼 곳'이 과거가 아닌 미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곳에서 시간은 공간으로 화한다.
윤이상: 무악(舞樂)
윤이상은 음을 덩어리로 쌓아 만든 '음향복합체'로 음악을 만든다는 리게티 등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음 덩어리를 이루는 개별음을 '살아있는 음'으로 바꾸었다. 서양음악에서 개별음은 고정되어 있어 다른 음과 관계를 맺으면서 음악적 의미가 만들어지지만, 동아시아 음악에서는 개별음이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며 음악을 이룬다. 살아있는 음이 모여 살아있는 화음, 살아있는 음향층을 이루는 것이 윤이상 음악 어법의 핵심이며, 이로써 작곡가는 동아시아 음악의 음향을 서양 악기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무악〉은 동서양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춤으로 소통하는 환상을 담은 작품이다. 윤이상은 궁중무용 〈춘앵무〉(春鶯舞)를 생각하면서 곡을 썼다고 한다. 춘앵무의 반주로 쓰였던 음악은 영산회상, 정확히는 평조회상(平調會相)이다. 〈무악〉에서 작곡가는 평조회상을 직접 인용하지 않으며, 다만 오보에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궁중음악의 음향적 인상을 표현한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유럽적인 음형이 정적이고 명상적인 '평조회상'과 대비된다. 음악학자 볼프강 슈파러는 '서양춤'에 해당하는 음형이 스트라빈스키 발레 음악을 닮았다고도 했다.
〈예악〉(禮樂)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 윤이상 음악과 견주면, 1978년 작품인 〈무악〉은 더 한국적인 울림을 담아내는 방향으로 변화한 양식을 보여 준다. 살아있는 음은 더 활발하게 살아 움직이고, 때로는 1960년대의 첨단 아방가르드 음악 양식을 벗어나려는 듯 뚜렷한 선율과 협화음을 앞세우기도 한다. 이 시기에 작곡가는 음악 외적인 '메시지'를 음악에 담기 시작했고, 때로는 정치적인 신념을 담거나 음악으로 해탈을 추구하기도 했다. 〈무악〉이 전하는 메시지는 동서양이 화합하는 이상적인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