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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31일 수요일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 1번 ― 김소옥 / 피오트르 보르코프스키 / 서울바로크합주단

서울바로크합주단 창단 45주년 기념 특별정기연주회Ⅰ

2010년 3월 16일(화) 저녁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 지휘: 피오트르 보르코프스키 Piotr Borkowski
• 바이올린: 김소옥
• 색소폰: 그렉 바나스작 Greg Banaszak
• 오보에: 사토 키아오야마 Satoki Aoyama
• 클라리넷: 히데미 미카이 Hidemi Mikai
• 호른: 마코토 가나보시 Makoto Kanaboshi
• 바순: 모토코 가와무라 Motoko Kawamur

• A.Vivaldi - Concerto for 2 violins & 2 cellos in G major F.IV/1
• F.Chopin - Suite Chopiniana (이윤국 편곡) 한국초연
• Pierre Max Dubois - Concerto for Alto Saxophone & Orchestra
• W.A.Mozart - Sinfonia Concertante for Winds in E-flat Major, K.297b
• 류재준 - Violin Concerto No.1 Op.10 한국초연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연예술창작기금지원사업으로 기획한 국민평가단 평가 자료를 겸하는 글이며, 평가서 항목에 맞추어 썼음을 밝힙니다.

▶ 공연작품의 예술적 수월성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문화예술위원회 평가 대상 공연에서 연주된 다른 창작곡과 견주어 압도적인 예술성을 자랑했다.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연주는 훌륭했으나 악단이 그동안 쌓아온 역사와 전통에 걸맞은 수준에는 조금 못 미쳤으며,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는 현대음악에 어울리는 음향을 충분히 살려냈다 하기 어려웠다.

▶ 공연계획 실행의 충실성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다원주의(Pluralism) 양식을 보이며, 이러한 대목에서 이날 연주된 곡들과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빼면 다른 곡들과 연결고리가 탄탄하다 하기 어려우며, 이날 전체 공연 구성은 '다양성'이라는 말로 미화하기에는 난잡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 공연성과 및 해당분야 발전에의 기여도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이미 낙소스(Naxos)에서 음반으로 발매했을 만큼 뛰어난 곡임이 이미 증명되었으며, 이 곡을 한국 초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번 공연은 그 가치가 높다.

▶ 총평

※ 공연 관계자와 김원철의 친분 관계 요약

김원철은 공연 관계자와 이렇다 할 친분관계가 없다. 그러나 서울바로크합주단 음악감독 김민은 한국바그너협회를 만든 사람으로 자칭·타칭 바그네리안인 김원철이 김민의 업적과 영향력을 존경해 마지 않음을 밝혀 둔다.

작곡가 류재준이 대표이사로 있는 ㈜오푸스에서 내놓은 보도자료를 보면, 류재준 음악을 두고 "네오 바로크시즘이라는 장르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는 특별한 성과"라 했다는 마리안 보르코프스키(Marian Borkowski) 폴란드 쇼팽 음악원 교수의 평이 눈길을 끈다. 원문을 확인해 보아야 하겠지만, '네오 바로크시즘'이라는 말은 류재준을 알리는 데 알맞은 말이라 보기 어려우며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첫째, '바로크'(Baroque)라는 말에 '―ism'을 붙이려면 '바로키즘'(Baroquism)이라 해야 옳다. 'Classicism'(고전주의)와 'Romanticism'(낭만주의)를 흉내 내느라 별생각 없이 '바로크시즘'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모양이나, 음운론에 비추어 보면 무지를 드러내는 말일 뿐이다.

둘째,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와는 달리 바로크 양식에는 본디 '주의(―ism)'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 고전주의·낭만주의를 '―주의'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것이 계몽주의 및 시민사회 담론과 얽힌 사회 이념 또는 운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크 양식은 예술 양식일 뿐이므로 이념을 뜻하는 '주의(―ism)'라는 말을 붙일 까닭이 없다. 다만, 20세기 예술사를 헤아린다면 '네오바로키즘'이라는 말을 어떤 예술사조를 뜻하는 말로 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긴다.

셋째, '네오바로키즘'이라는 말은 바로크 양식에서 무엇인가를 되살렸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서양음악 작곡가들이 바로크 양식을 끌어다 쓴 일은 드물지 않으며, 그러한 작품을 모두 '네오바로키즘'이라 불러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뒤따른다.

'네오바로키즘'이라는 말은 아마도 류재준 스승인 펜데레츠키 후기 양식을 일컬어 때때로 '신낭만주의'(Neo-Romanticism)라 하는 일과 관련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류재준 음악이 '신낭만주의'와 구분되는 특징을 찾던 마리안 보르코프스키는 류재준 음악이 펜데레츠키보다 바로크 양식과 닮은 곳이 더 많다는 사실에 주목했으리라 짐작된다. 자세한 맥락을 알려면 펜데레츠키 음악 양식 변화를 20세기 음악사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한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는 인류가 무한히 발전하리라는 믿음을 바탕에 두었으며, 이것이 모더니즘으로까지 이어졌다. 19세기 기능화성이 12음 기법으로 옮겨갔을 때에도 이러한 패러다임은 바뀌지 않았고, 이른바 총열주의(Total Serialism) 음악은 그것이 발전한 끝에 나타난 결과라 할 수 있다. 드뷔시와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한 몇몇 작곡가가 일찍이 이러한 믿음에 의문을 던지기는 했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이 나타나고 나서야 이것이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리게티와 펜데레츠키 등이 내놓은 이른바 '음향음악'(Klangkomposition)은 '구조'와 '발전'을 따지던 패러다임을 비틀어 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새롭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 음악 전통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펜데레츠키는 1965/66년 《누가 수난곡》에서부터 20세기 작곡가들이 일부러 벗어나고자 했던 전통적 음악 어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른바 '신낭만주의'를 거쳐 다원주의(Pluralism) 양식으로까지 이어졌다.

펜데레츠키는 1982년 『첼로협주곡 2번』으로 신낭만적 음악경향에서 벗어났다. 낭만적 이상과 연결시킴에 따라 때때로 펜데레츠키는 자신의 초기 양식을 부정했어야만 했다면, 여기서 벗어나 자유로운 다원주의를 추구함에 따라 즉 "옛" 펜데레츠키를 다시 새롭게 복원하게 된다. 이 시기부터는 펜데레츠키는 양식의 연속성을 확고히 하고(즉 작곡 양식 발전의 단절을 없애고), 또한 양식의 다원주의를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다원주의 Pluralismus〉는 한편으로 순수한 조성을 사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초기의 소음적 양식을 연결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더 나아가 보다 폭 넓은 차원의 양식을 수용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 오희숙, 『20세기 음악 I: 역사·미학』 (서울: 심설당, 2006). 314쪽.

음악이 발전하리라는 믿음을 펜데레츠키는 이렇게 무너뜨렸다.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이러한 역사를 잇는 작품이며, 많은 곳에서 펜데레츠키 후기 음악 양식이 엿보인다. 펜데레츠키가 즐겨 썼다는 단2도 음형인 이른바 '탄식' 모티프가 작품에 뿌리를 이루고 있으며, 악보 맨 앞에는 이 곡을 펜데레츠키에게 헌정한다는 말이 나온다. 펜데레츠키가 류재준을 후계자로 선언했다고도 한다.

예술 작품이 다른 사람이 쓴 작품과 비슷하다는 말은 으레 칭찬이 아니다. 그러나 베베른과 베르크를 쇤베르크의 아류라 하지 않듯이, 류재준 음악이 펜데레츠키와 닮았다고 해서 류재준 음악을 낮추어 볼 까닭은 없다.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에는 펜데레츠키 작품에서 곧잘 나타나는 탄식과 절망도 있으나 그 못지않게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뚜렷하게 나타나며, 힘찬 리듬이 얽히는 대위법과 "말러처럼 강렬한 클라이맥스"(exquisitely scored, almost Mahler-like climaxes; 마리안 보르코프스키), 정교한 관현악법 등에서 독창성을 찾을 수 있다.

펜데레츠키, 루토스와프스키, 구레츠키와 류재준 등을 묶어서 '바르샤바 악파'라 부르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바르샤바' 하면 쇼팽이 먼저 생각나니 '신 바르샤바 악파'라 해도 좋겠다. 신빈악파와 닮은 말이라 더욱 좋다. '신 바르샤바 악파'의 음악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양식적 다양성을 보이면서 무엇보다 오래 듣기 부담스러울 만큼 진지하고 엄숙하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억지스러운가?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연주는 그저 무난했으며, 다른 작품을 제법 훌륭하게 연주한 일과 견주어 보면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는 곳곳에서 리듬이 뭉개지거나 현대음악다운 음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대목에 아쉬움이 남았다. 지휘자 피오트르 보르코프스키는 세계초연 지휘자이자 낙소스(Naxos)에서 발매한 음반에서도 지휘를 맡은 바 있으니, 아무래도 현대음악 전문 앙상블이 연주했다면 좋았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이 곡에서 가장 멋진 곳이 'Misterioso'(마디 428)부터 끝까지라고 생각한다.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엇갈린 리듬으로 마치 미니어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텍스처를 만들어 내는 가운데 글록켄슈필이 두 차례 맑게 울린 다음, 팀파니와 탐탐 따위가 갑자기 '빠바밤 빠바밤' 하고 세게 두드려대면서 음악이 끝난다. 그러나 이날 연주에서는 마치 사람들이 웅성거리듯 현이 두루뭉술한 리듬을 만들어낸 데다가 글록켄슈필이 이끌어 내는 음색 대비도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으며, 끝내 타악기가 조금은 뜬금없이 쿵쾅거리다 끝나버리고 말았다. 세계초연자이기도 한 김소옥의 협연은 훌륭했다.

2010년 2월 22일 월요일

2010.01.28 김도윤 《디베르티멘토》 / 김정길 《올래, 오름, 그리고 백록담》 / 리게티 《라미피카시옹》 ― 이병욱 / TIMF앙상블

TIMF앙상블 ‘사통팔달[四通八達] 시리즈 1’ 《메타모르포젠》

2010년 1월 28일(목) 오후 8시 00분
호암아트홀

이병욱 지휘
TIMF 앙상블

김도윤 Doyun Kim, 《디베르티멘토》 Divertimento for 13 strings
펜데레츠키 K. Penderecki, 《샤콘느》 Chaconne
김정길 Chung-Gil Kim, 현악합주를 위한 《올래, 오름, 그리고 백록담》, TIMF앙상블 위촉
- 휴식 -
리게티 G. Ligeti, 《라미피카시옹》 Ramification (version for 12 solo strings)
R. 슈트라우스 R. Strauss, 《메타모르포젠》 Metamorphosen for 23 strings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연예술창작기금지원사업으로 기획한 국민평가단 평가 자료를 겸하는 글이며, 평가서 항목에 맞추어 썼음을 밝힙니다.

▶ 공연작품의 예술적 수월성

TIMF 앙상블은 다른 악단과 견주어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했으며 연주회 프로그램도 매우 훌륭했다. 창작곡 또한 다른 공연에서 연주된 작품보다 예술적으로 훨씬 뛰어났다.

▶ 공연계획 실행의 충실성

호암아트홀이 현대음악과 어울리는 연주회장인지는 의심스러우나, 이날 프로그램은 호암아트홀 실내음향과 썩 잘 어울리는 작품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김도윤 작품은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처럼 잔향이 좀 더 짧은 곳에서 연주되었다면 느낌이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창작곡은 전체 공연과 조화를 이루는 본격 현대음악이었다.

공연 시작에 앞서 TIMF 앙상블 예술감독 최우정이 연주회 해설 강연을 열었는데, 내용은 훌륭했으나 사전 공지가 없었고 연주회장 밖에서 어수선한 분위기로 진행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 공연성과 및 해당분야 발전에의 기여도

TIMF 앙상블은 본격 현대음악 전문 연주 단체로, 그것만으로도 예술위원회가 공연창작기금을 지원할 가치가 높다. 연주 실력 또한 매우 뛰어나고 창작곡 또한 훌륭하므로 지원 가치는 더욱 높다.

▶ 총평


※ 공연 관계자와 김원철의 친분 관계 요약

작곡가 김정길은 서울대학교 작곡과 교수였다가 퇴임했고, TIMF 앙상블 예술감독 최우정은 현재 같은 과 교수이며, 작곡가 김도윤은 같은 과 학생이다. 김원철은 같은 과 이론 전공 석사이나 이들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으며, 이론 전공은 작곡 전공과는 사실상 학과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김도윤은 이날 처음 알았고, 최우정은 서로 얼굴 알아보고 인사할 만한 친분은 있으며 서울시향이 최우정에게 위촉한 첼로 협주곡 초연 리뷰를 김원철이 서울시향 월간지 『SPO』에 기고한 일도 있다. 김정길은 작곡과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컸으므로 그 사실만으로 김원철이 완벽하게 객관적인 평을 하지 못하리라 의심하더라도 반박하기 어렵다.

김도윤 《디베르티멘토》는 팸플릿에 있는 작품 설명이 어렵다. 그러나 음 소재를 조각내고 비틀어 음악을 이끌어 간다는 아이디어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멀리는 브람스나 베토벤까지도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요즘 작곡가 가운데에는 크리스 폴 하르만(Chris Paul Harman) 같은 사람도 김도윤과 닮은꼴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짜임새로 나타나는가이며, 무엇보다 이론적인 장난질에 그치지 않고 감상자에게 듣는 재미를 주느냐이다.

김도윤 《디베르티멘토》는 '듣기 좋은' 작품이었다. 현대음악인 만큼 아름다운 선율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는 뜻은 아니다. 현대음악치고 그다지 어렵지 않고 뭔가 엉뚱한 연주법을 쓰지도 않으면서도 어딘가 귀를 즐겁게 하는 곳이 있었는데, 좁은 공간에서 진동하는 듯한 화음 또는 음 덩어리(Cluster)가 조성감을 얼핏 드러내면서도 현대적인 긴장감을 이룬 대목이나 콘트라베이스가 피치카토 음형으로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흥미로운 (악보를 보면 생각보다 머리를 쥐어뜯게끔 하는) 리듬을 이끌어가며 만들어 내는 박진감 따위가 멋졌다. 무엇보다 작곡가가 '변주곡의 원리'를 말한 만큼 음 소재를 짜임새 있게 이끌어 가는 솜씨가 훌륭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작곡가가 1984년생이란다. 이 '어린놈'이 이토록 멋진 곡을 썼다니, 나는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 외쳐주었다. "브라보!"

고백하건대 나는 김정길 작품을 이날 처음 들었다. 현대음악에 거부감은 없으나 국내 작곡가 작품을 일부러 찾아 들을 정도는 아니다 보니 이름은 익히 들어온 작곡가라도 작품은 모르는 일이 더러 있다. 이날 연주된 《올래, 오름, 그리고 백록담》을 들어보니 김정길이 윤이상 제자였다는 사실이 곧바로 떠올랐다. 윤이상 수제자로 보통 호소카와 도시오(細川俊夫)를 꼽는데, 이제 보니 음악 양식만 따지자면 김정길이야말로 윤이상에게서 가장 많은 것을 물려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슈파러(Walter-Wolfgang Sparrer)를 비롯한 음악학자들은 윤이상 음악을 가리켜 "동양의 사상과 음악 기법을 서양음악 어법과 결합시켜 완벽하게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이며 "동아시아적인 것을 서구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을 자국적 전통과 융합시키면서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한국적"이라 했다. 그러나 윤신향은 윤이상 음악이 동서양 음악의 융화가 아니라 "이주민 고유의 전통적 특색들이 서구 사회에 동화해가는 과정 속에서 변화하고 상실되는 원리가 윤이상에게도 적용"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두 세계 사이의 진정한 융화는 작곡자의 삶이 음악어휘를 결정할 때마다 그늘처럼 은폐되는 한국적 정신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그곳에서만 가능하다." (윤신향, 『윤이상, 경계선상의 음악』 파주: 한길사, 2005.)

윤이상 음악이 동서양 '융화'가 아니라 '동화'인 까닭은 음악을 이루는 두 세계가 대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정길 《올래, 오름, 그리고 백록담》은 화음과 장식음 따위가 윤이상과 닮은꼴이면서도 음계와 리듬 등에 한국적인 요소가 조금 늘어서 '두 세계' 사이가 좀 더 균형 잡힌 음악이었다. 20세기 서양음악사와 온몸으로 부대껴야 했던 윤이상과는 여러모로 처지가 달랐으리라.

리게티는 《라미피카시옹》(Ramification)에서 악단을 둘로 나누어 첫째 그룹이 표준 조율법보다 4분음 높게 연주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또한 둘이 섞여 있어서 안개처럼 흐릿한 소리가 되게끔 했는데, 리게티는 두 그룹이 따로 연습한 다음 마지막 연습 때에는 무대에서 따로 앉아 연주하고, 실제 공연에서는 섞여 앉도록 제안했다. 그런데 이날 TIMF 앙상블은 지휘자를 중심으로 두 그룹이 나뉘어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 섞여 앉았다면 연주자끼리 서로 영향을 주면서 오히려 소리가 엉망이 될까 걱정한 탓이 아닐까 싶은데, 어쨌거나 '안개' 음향은 제법 그럴싸하게 살아나서 다행이었다.

전체적으로 연주는 매우 훌륭했으며, 딱 한 군데 아쉬웠던 곳을 말하자면 마디 101에서 콘트라베이스가 악보에서 지시한 만큼 '위협적이고 잔인하게'(minaccioso brutale) 연주하지 못한 대목이었다. 이곳에서 콘트라베이스는 활을 지판 쪽에서 매우 여리고 부드럽게 연주하다가 갑자기 매우 세게 ― ffff에서 ffffff로 크레셴도 ― 폭발하듯 박박 긁어대야 한다. 곧이어 활이 줄받침(bridge)과 지판을 오가며 꾸준히 음색을 바꾸면서 길게 연주해야 하는데, 마디 106에서 바이올린 하모닉스 음형이 더해질 때까지 다른 모든 악기는 침묵하면서 이 대목이 자연스럽게 곡 전체의 클라이맥스가 된다. 그러나 이날은 콘트라베이스 한 대로 이 대목을 연주하느라 음량이 크게 모자랐고, 그 한 사람이 온 힘을 다해 긁어대지도 않았다.

2009년 12월 16일 수요일

레스피기 《고풍적 무곡과 아리아, 모음곡 3번》 / 김성기 《Back to the future》 / 드보르자크 《현악 세레나데》 ― 화음쳄버오케스트라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제33회 정기연주회 〈화음 프로젝트 Op. 86, ‘Back to the future’〉

2009년 11월 24일 (화)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레스피기 ― 고풍적 무곡과 아리아, 모음곡 3번
김성기 ― 화음 프로젝트 Op. 86, ‘Back to the future’
드보르자크 ― 현악오케스트라를 위한 세레나데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연예술창작기금지원사업으로 기획한 국민평가단 평가 자료를 겸하는 글이며, 평가서 항목에 맞추어 썼음을 밝힙니다.

▶ 공연작품의 예술적 수월성

화음쳄버오케스트라는 지휘자가 없는 악단이라 장점과 함께 단점 또한 그대로 드러내었다. 음색과 리듬 따위가 서로 잘 어울려서 연주가 매끈하게 잘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템포와 다이내믹 등에 섬세한 변화가 필요할 때에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곤 해서 연주가 전체적으로 밋밋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악기 밸런스가 때때로 고음에 치우쳐서 저음이 모자란다 싶기도 했다. 김성기 창작곡 《Back to the future》는 친숙한 느낌이 드는 선율이 조각조각 나뉘어 전통적인 ☞기능화성을 쓰지 않았는데도 어딘가 한국적이다 싶었으며, 대중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나름대로 새로움을 담아내려는 시도가 인상 깊었다.

▶ 공연계획 실행의 충실성

음악과 미술을 결합한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프로젝터에서 나는 듯한 소음이 음악 감상에 방해되었다. 악단 규모가 작은 탓도 있었겠으나 이날 사용된 프로젝터가 음악용으로 쓸 만한 저소음 장비가 아니었던 듯하다.

▶ 공연성과 및 해당분야 발전에의 기여도

화음쳄버오케스트라는 CJ그룹이라는 든든한 단체가 후원하고 있어서 정부 지원이 그다지 절실하지 않아 보인다. 이날 보여준 앙상블은 제법 훌륭했으나 정부가 일부러 나서서 지원해야 할 만큼 대단하지는 않았다.

▶ 총평

국내 악단이 보이는 고질적인 문제로 개인 기량은 좋으나 합주를 잘 못한다는 대목이 꼽히곤 한다. 콩쿠르 위주 교육제도나 연주회장 무대음향 등이 원인이라고들 하는데, 직접적인 원인을 따지면 결국 다른 사람 연주를 잘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내악 활성화가 그 대안이라 할 수 있겠으나 10명 이내 악단과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이어주는 중간 단계로 중형 앙상블이 할 수 있는 역할 또한 작지 않다. 그런데 화음쳄버오케스트라는 지휘자가 없는 악단이라 단원이 저마다 다른 사람 연주에 더 많이 귀 기울여야 하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마련된다는 장점이 따른다. 다만, 지휘자 대신 악장에게만 의존하게 된다면 그 장점도 빛바랠 위험이 있으니 실제로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악단 밖에서 알기 어렵다.

지휘자가 없다는 사실은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되기도 한다. 이날 화음쳄버오케스트라는 섬세한 템포 변화가 필요한 곳을 얼렁뚱땅 넘어가곤 했으며, 이를테면 레스피기 《고풍적 춤곡과 아리아 ― 모음곡 3번》 2악장 마디 90―98에서 '조금씩 느리게 ― 본디 빠르기로'(poco rit. ― a tempo)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고, 마디 85를 비롯해 드물지 않게 나오는 ☞모두쉼표(Generalpause)는 거의 생략했다. 드보르자크 《현악 세레나데》 3악장에 여러 차례 나오는 ☞스포르찬도를 비롯해서 곳곳에 나오는 셈여림 기호도 제대로 살리지 못해서 전체적으로 연주가 매끈하기는 하나 맨송맨송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휘자 없이 연주하는 일은 버리기 어려운 장점이다. 그러나 가끔이라도 객원 지휘자를 써서 모자란 곳을 보완해보는 경험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지휘자가 없는 것과 큰 관련은 없겠으나 매우 여린 소리를 잘 내지 못했던 대목도 아쉬웠다. 《현악 세레나데》 3악장에 드물지 않게 나오는 pppppp와 견주어 그다지 다를 바 없게 들렸고, 《고풍적 춤곡과 아리아 ― 모음곡 3번》 2악장 마디 39에서는 '매우 가볍게'(leggiero)라는 나타냄말도 있어서 음반을 들어보면 pp 대목에서는 아예 파트 수석 네 명만 연주하여 합주협주곡 같은 느낌을 살리기도 하는데, 이날 화음쳄버오케스트라는 이곳에서 셈여림 대비를 그다지 뚜렷하게 살리지 못했다.

이날 악단 편성은 내 기억이 맞는다면 '4-4-4-2-1'이었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를 합쳐서 '베이스 성부'를 맡도록 한 모양인데, 서양음악이 4성부(SATB)를 바탕으로 하므로 이것은 나름대로 타당하다. 그러나 베토벤 이전 작품이라면 몰라도 이날 연주된 곡은 모두 19세기 이후 작품이라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따로 움직일 때가 잦아서 이따금 저음이 모자란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게다가 제1 바이올린과 견주어 제2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때때로 너무 뒤로 빠지는 듯해서 밸런스가 고음에 치우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를테면 레스피기 《고풍적 춤곡과 아리아 ― 모음곡 3번》 2악장 마디 84에는 '느리고 장중하게'(Lento con grande espressione)라는 나타냄말이 있으며 제1 바이올린은 G 현으로 연주하도록 하고 있지만, 이날 연주는 저음이 모자라서 그다지 묵직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4악장 마디 24에서는 저음을 중심으로 하는 내림활 소노리티(sonority)가 살아나지 않았고, 마디 33에서는 제1 바이올린 선율을 잇는 첼로 소리가 작아서 주선율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연주자가 한 사람뿐이었던 콘트라베이스는 제법 훌륭했으며, 더욱이 드보르자크 《현악 세레나데》 5악장에서 빠르게 달릴 때에도 굼뜬 소리를 내지 않고 리듬을 또렷하게 잘 살렸다. 누군가 싶어서 나중에 악단 홈페이지에 가보니 미치노리 분야(Michinori Bunya)란다.

김성기 창작곡 《Back to the future》는 연주에 앞서 이른바 '중심음정 기법'이라는 말로 짧게 소개되었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윤이상이 썼던 '중심음 기법'(Hauptton-Technik)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음'과 ☞'음정'이 다른 만큼 두 기법은 맥락이 다르다. 윤이상은 펜 글씨와 붓글씨 비유처럼 음정이 아닌 음 하나가 살아 움직이게끔 하고, 그 음이 모여서 음향복합체를 이루도록 했다. 그러나 그 음악을 귀로 들으면 어딘가 조금은 한국적이다 싶으면서도 그보다는 낯선 느낌이 더 크게 마련이며, 그 기법은 아방가르드 음악과 이어져 있어 현대음악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 따라가기 쉽지 않다.

김성기는 아방가르드와 거리를 두고 서양음악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면 한국적인 요소는 결국 음정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Back to the future》는 조성이 있는 곡이어서 귀로 듣고 주선율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기능화성을 따르지 않을 때가 잦아서 낡아빠진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으며, 어딘가 익숙한 선율이 음정 단위로 조각조각 나뉘어 있어서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비올라 독주에 이어진 합주에서 '옹헤야 어절씨구' 선율이 너무 뚜렷하게 드러나서 살짝 유치하다는 생각도 했으나, 곧바로 새로운 음형이 나타나서 이런 정도는 대중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헤아릴 만하다 싶었다.

2009년 11월 6일 금요일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반지성주의로: 김시형의 《Hope of September 09》에 대하여

소노리테 목관5중주단 테마음악회 “프랑스의 목관음악 - 프랑스 6인조 ”

2009년 10월 14일(수) 오후 8시 00분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홀

Flute 장선우, Oboe 조경은, Clarinet 김종철, Bassoon 이지현, Horn 김호동

E. Satie(1866~1925) - Te Veux (나는 너를 원해) for Flute and Piano
G. Auric(1899~1983) - Trio for Oboe, Clarinet and Bassoon
D. Milhaud(1892~1983) - La Chimineé du roi René (The Chimney of King René) Suite for Woodwind Quintet
김시형(1972~) 세계초연 - Hope of September 09 for Woodwind Quintet
F. Poulenc(1899~1963) - Sextour pour piano, flute, hautbois, clarinett, bassoon et cor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연예술창작기금지원사업으로 기획한 국민평가단 평가 자료를 겸하는 글이며, 평가서 항목에 맞추어 썼음을 밝힙니다.

▶ 공연작품의 예술적 수월성

소노리테 목관오중주단 단원은 부천·인천·원주시향 단원이기도 하다. 저마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음이 이 사실에서 드러나지만, 그것만으로 좋은 실내악 앙상블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노리테 목관오중주단은 이미 한두 번 맞춰보고는 이를 수 없는 수준에 올랐음을 이날 연주회에서 보여주었다. 유럽 일류 악단에 비할 바는 아니나 국내급 연주자들이 길지 않은 시간에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한계치에 가까운 실력이었다.

▶ 공연계획 실행의 충실성

보도자료에는 단원 개개인 소개만 있을 뿐 오중주단 소개가 없다. 홈페이지도 없는 듯하다. 이 악단이 만들어진 지 그다지 오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정황 증거라 하겠는데, 실내악으로 돈벌이하기 어려운 현실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럽 일류 악단에는 있으나 소노리테 목관오중주단에는 없는 것은 역사와 전통,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악단만의 색깔이다.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것은 돈과 시간과 노력이다.

▶ 공연성과 및 해당분야 발전에의 기여도

실내악이 활성화되면 오케스트라 수준까지 함께 올라가는 이중 효과가 있다. 또 단원들이 시향 단원 간판을 밑천으로 사교육 돈벌이에 나설 시간을 아껴서 실내악 앙상블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실내악을 향한 열정과 목표의식이 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예술위원회가 공연창작기금을 지원할 가치가 높다.

▶ 총평

음악학자 타루스킨(Richard Taruskin)은 프랑스 6인조 음악이 '일상'을 예술적으로 변용시켰다 하여 "라이프스타일 모더니즘"이라 이름 붙였다. 이러한 양식은 낭만주의, 표현주의, 인상주의 등을 반대하고 대안을 찾는 가운데 에릭 사티와 장 콕토를 모범 삼아 나타났으며, 사상적으로 다다이즘 및 초현실주의와도 조금씩 닿아 있다.

음악 밖에서는 제1·2차 세계대전 사이 상대적 안정기이자 영화와 라디오라는 새로운 매체가 나타나고 대중문화가 싹트던 "황금의 20년대"를 배경으로 하며, 비슷한 시기 독일에서도 힌데미트, 바일, 아이슬러, 크셰넥 등이 낭만주의와 표현주의 등을 반대하며 '실용적인' 음악을 추구했다.

음악학자 다누저(H. Danuser)는 이 시기 음악이 미학적으로 고급 예술관과 저급 예술관 사이, 양식적으로 진보적 성향과 복고적 성향 사이에 있다고 보고 "중간음악 mittlere Musik"이라 이름 붙였다.

즉 젊은 작곡가들의 사고는 이중의 부정을 통해 나타났다. 그들은 한편 절대 예술음악의 사상을 부정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다이즘에서 주장되는 "예술의 부정" 또한 부정했다. 이들은 예술작품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한 치도 버린 것이 아니다. 전통으로부터의 의식적인 전향은 서로 서로 모순이 되는 음악적 사고들의 병행 또는 공존을 가능케 했고, 이렇게 나타난 작품은 ― 미학적 가치적도로 판단되지 않고 ― 그때 그때마다 요구된 기능의 충족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 오희숙, 『20세기 음악 I: 역사·미학』 (서울: 심설당, 2006). 400쪽.

김시형의 《Hope of September 09》는 얼핏 들으면 프랑스 6인조 사이에 한 자리 꿰차도 될 만큼 미학적·양식적으로 '라이프스타일 모더니즘' 또는 '프랑스풍 중간음악'과 닮은꼴이었다. 티 나지 않게 미니멀리즘 기법을 쓴 대목이 참신하다 할 수 있겠으나, 정통적인 미니멀리즘 기법이 아니라 모티프를 변화·발전시키는 '전통적' 기법에 미니멀리즘을 자연스럽게 녹여내어 새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끔 하고 있었다. (다만, 악보를 보지 못하고 내 청각 경험만으로 판단하는 까닭에 객관적인 판단이라 자신하기 어렵다. 작곡가와 연락해 악보 파일을 받기로 했는데, 이메일을 보냈다고 하나 내가 받은 것은 없다. 자꾸 보채기 뭣해서 그냥 청각 경험만으로 글을 쓰기로 했다.)

김시형이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에 와서 20세기 초 양식을 되살린 까닭은 무엇일까. '중간음악'은 12음 기법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적 신음악과 담론 투쟁 끝에 패배했다. 그렇다면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미니멀리즘은 포스트모더니즘 음악 양식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김시형의 《Hope of September 09》가 '포스트모던'한가?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적 성향을 전통적 음악 양식 속에 꼭꼭 숨긴 이 작품은 미니멀리즘 기법을 부분적으로 활용했다고 해서 곧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음악으로 분류할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김시형은 아마도 현대음악이 청중과 동떨어진 현실을 고민했을 터이다. 전문가 집단이 고립되어 가는 경향은 바로 1920년대 즈음부터 나타났다 할 수 있으므로 김시형이 이 시기 음악에 주목한 일은 자연스럽다.

시민적 문화의 소멸은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확실하게 음악에서 나타난다. 많은 테크닉적 섬세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공허하게 나아간다. 왜냐하면 현대 음악은 사상이 없고 공동체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공동체를 잃어버린 예술은 그 자신을 잃게 된다.

― 한스 아이슬러(Hans Eisler), Musik und Politik Schrifen 1924~1948, G. Mayer(ed.), Leipzig 1973, 32쪽. 재인용: 오희숙, 『20세기 음악 I: 역사·미학』 (서울: 심설당, 2006). 397쪽.

그러나 김시형이 백화점 진열장에서 상품 끄집어내듯 '중간음악'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을 끄집어 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현실은 1920년대와는 또 다르며, 김시형 작품은 바로 오늘날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보면 《Hope of September 09》는 차라리 반지성주의와 닿아 있다 하겠다. 그리고 어쩌면 반지성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한국사회의 특징을 설명할 수 있는 여러 개념 중에 ‘반지성주의’라는 것이 있다. 지금 목도하고 있는 한국사회와 그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이 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을 것 같다. 물론 anti-intellectualism으로 표기하는 영어를 한국어로 ‘반지식인주의’가 아니라 ‘반지성주의’라고 옮기는 건 이 개념에 담겨 있는 복합적인 의미 때문이다. 반지성주의는 지성과 이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지력으로 사물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철학적 태도를 뜻하는 한편으로, 지식인에 대한 직접적인 반감과 불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서 황우석 사태나 〈디 워〉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한국사회의 특성에 들어맞는 의미는 두 번째 항목일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와 두 번째 항목은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관련성을 갖고 있다. 첫 번째에서 언급된 그 ‘철학적 태도’가 자의반 타의반 두 번째에 제시된 ‘지식인들에 대한 적대감과 불신’을 합리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우려와 경고로서 루카치는 『이성의 파괴』라는 큼직한 책을 썼다. 요즘은 누구도 이 책을 거들떠보지 않지만, 각론의 차원은 그렇다고 쳐도, 이 책에서 제기된 문제는 큰 틀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것이다.

(…)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경제학이나 사회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떤 “향락”의 문제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 반지성주의는 바로 이 향락의 지속을 방해하는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이다. 문제는 이런 분노가 오해와 달리 ‘보수주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 이택광, 〈반지성주의에 대해〉 http://wallflower.egloos.com/1650995 (2009년 11월 6일 읽음.)

예술이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는 화두로 돌아가 보자. 《Hope of September 09》는 전통적 기능화성에 기대지는 않으나 무조음악도 아니어서 대중이 귀로 듣고 그 흐름을 인지하는데 근본적인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대중적'인가? 대중음악이 주류로 뿌리내리고 더 나아가 예술음악이 설 자리를 위협하는 오늘날 김시형의 시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차라리 최우정처럼 대중음악 어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클래식 음악 속에 녹여내며 예술음악이 나아갈 바를 찾아야 옳지 않을까? 음악학자 오희숙은 "'중간'이라는 위치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입장을 보이는 가치 절하적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당시의 음악적 위기에 대한 신세대의 해결 모색으로 본다면 그 의미를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변명은 김시형에게도 마찬가지로 할 수 있는가?

한 가지 더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창작곡을 수용하는 주체는 청중만이 아니며, 그 곡을 연주하는 연주자 또한 중요한 작품 수용자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창작곡은 대중에게 이해받기에 앞서 연주자에게 이해받아야 한다. 그리고 한국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이 아방가르드 음악에 느끼는 거부감은 대중과 그다지 다르다고 말하기 어려울 터이다. 그러나 《Hope of September 09》라면 연주자들의 평가가 대중과 다를 수도 있다. 수동적으로 감상하지 않고 연주를 하는 처지라면 《Hope of September 09》가 제법 흥미로운 작품일 수 있으며, 짐작건대 소노리테 목관오중주단은 이 작품을 연주하면서 즐거웠으리라. 《Hope of September 09》는 대중이 아닌 연주자로 하여금 현대음악을 수용하도록 도와주는 '당의정'으로 가치가 있다 하겠다.

2009년 10월 18일 일요일

2009.10.13. 홍성지 〈귀천〉 / 〈Gloria〉-《Missa 'Lumen de Lumine'》 etc ― 박치용 / 서울모테트합창단 /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

2009년 10월 13일 오후 8시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

지휘자: 박치용
협연자: 김영미/sop 유소영/sop 박은주/alt 송기창/bar 김현정/org

Mendelssohn - ‘Magnificat(한국초연)’ ‘Psalm42 op.42’ ‘Hör mein Bitten’
홍성지 - 〈귀천〉, 《Missa 'Lumen de Lumine'》 가운데 〈Gloria〉
박성춘 - 〈눈이 오는 밤〉, 〈바람의 시〉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연예술창작기금지원사업으로 기획한 국민평가단 평가 자료를 겸하는 글이며, 평가서 항목에 맞추어 썼음을 밝힙니다.

▶ 공연작품의 예술적 수월성

서울모테트합창단은 외국 일류 합창단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합창단이 아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가장 훌륭한 합창단이라 할 수 있고, 열악한 환경까지 생각하면 이런 훌륭한 합창단이 20주년을 맞았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깝다. 이날 연주회는 국내 합창단이 보여줄 수 있는 한계 내에서 가장 훌륭한 연주회였으며, 박치용 지휘자의 뛰어난 역량이 돋보였다. 그러나 일부 창작곡의 예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 공연계획 실행의 충실성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은 음향이 제법 훌륭한 연주회장이다. 그러나 홍성지 작품은 일반적인 연주회장이 아니라 잔향이 긴 성당에서 연주했더라면 좋았겠다. 멘델스존 작품도 종교곡인 만큼 잔향이 길면 더 좋았으리라 생각하며, 전자오르간 소리는 성당에서 울리는 진짜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박성춘 곡은 음악 양식이 다른 작품과 어울린다 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연주회 내내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려서 짜증이 났다. 관객이 그랬으리라 믿기는 어렵고 합창단 또는 연주회장 관계자 아니면 기자였을 터인데, 합창단·연주회장 관계자라면 반성이 필요하겠고 기자였다면 감히 '기자님'을 나무라기는 어려웠을 터이니 합창단 측에 위로를 보낼 일이다.

▶ 공연성과 및 해당분야 발전에의 기여도

합창단이 자생하기 어려운 국내 환경을 고려할 때 더 많은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 서울시향처럼 독립 재단 형태로 지원하는 것이 가장 좋겠으나 예술위원회 차원에서도 서울모테트합창단은 공연창작기금을 지원할 가치가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

▶ 총평

작곡가 홍성지는 서울시향이 7개 악기를 위한 〈Beethoven Frieze〉와 피아노 협주곡 〈Prismatic〉을 연주한 일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호감을 느낀다. 홍성지 작품에서는 마치 공기 속에서 빛 알갱이가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하는데, 마침 프로그램을 보니 인용해 놓은 평들이 모두 '빛'과 관련이 있다. 이날 연주된 〈귀천〉과 제목부터 빛이 나는 듯한 《Missa 'Lumen de Lumine'》 가운데 〈Gloria〉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네 곡 모두 '빛깔'은 제각각이었으며, 〈귀천〉이 무지갯빛 뿌연 알갱이가 구름 위로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라면 〈Gloria〉는 교회 스테인드글라스를 뚫고 들어온 빛이 요정처럼 교회 안을 날아다니는 듯했다.

〈귀천〉과 〈Gloria〉는 원래 합창곡이 아니라 각각 여성 4명과 3명이 부르도록 작곡되었으며, 음악 양식을 보면 잔향이 긴 교회 음향에 알맞다고 할 수 있다. 이날 연주회 주체가 서울모테트합창단이므로 합창단이 이 곡을 부른 일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연주회장이 교회가 아니라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이었던 점은 못내 아쉽다. 이곳은 잔향 시간이 관현악곡에 알맞게 맞춰져 있어서 마치 영화관에 햇볕이 쏟아지는 듯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또 작품이 주는 느낌을 제대로 살리기에는 합창단 기량이 모자라는 듯해서 안타까웠다. 특히 〈귀천〉에서 여린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한 대목이 답답했다. 나는 국내 합창단이 'pp'(매우 여리게)를 제대로 내는 모습을 본 일이 없는데, 〈귀천〉은 'pp'보다 더 여린 'ppp'를 정교하게 다스리지 못하면 절반은 실패한 연주라 본다.

매우 느린 템포(♪ = 80) 때문에 길어진 호흡을 합창단원들이 견디지 못하는 듯 리타르단도(점점 느리게)는 있는 듯 없는 듯했고, 여린 음을 제대로 내지 못해서인지 모두쉼표(Generalpause)는 무시되었다. 곡을 끝맺는 음에서는 셈여림표가 ppp인 마당에 몇몇 사람이 중간에 숨을 쉬었다 새로 부르는 바람에 '만득이 현상'마저 나타났다.

이런 문제는 일차적으로 합창단원 개개인에게 원인이 있다 하겠으나 더 따지고 보면 결국 돈 문제, 시스템 문제다. 성악 전공자가 실력이 어느 이상 되면 합창을 하건 오페라 가수로 나서건 유럽으로 가려고 할 뿐 한국에 머무르려 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매력적인 직업이 한국에는 없기 때문이다.

〈Gloria〉에서는 여린 음과 느린 호흡보다는 리듬과 화음이 중요한 까닭에 〈귀천〉과 달리 약점이 드러나지 않고 합창단 솜씨가 돋보였다. 이 곡은 만약 14세기 교회 음악 양식이 새로운 기법을 매우 보수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만큼 중세·르네상스 양식에 현대음악 어법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데, 서울모테트합창단은 안정된 화음을 바탕으로 화려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장식음들을 잘 살렸으며, 이날 연주회를 통틀어 이 곡이 가장 인상 깊었다. 옥에 티 한 가지만 말하자면, 마디 52―66에서 종소리를 흉내 내도록 지시하고 있으나 이날 연주에서는 그냥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나중에 고침: 2010년 4월 26일 최종 수정. 박성춘 작품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썼으나 다음과 같은 사정으로 내용을 지웠습니다. 〈바람의 시〉 등은 서울시구립여성합창단에서 의뢰한 작품으로, 합창단에서는 대중성 있는 조성음악을 의뢰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합창 음악 수요가 매우 적은 현실을 고려할 때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창작곡이 필요하다는 인식에는 저 또한 진심으로 공감하며, 그러한 사정을 헤아리고 나면 박성춘 작품은 흥행성 있는 작품이라고 판단됩니다.

제가 비평문을 쓸 때에는 이러한 맥락을 알지 못했으므로 음악사에 비추어 작품을 판단할 때 양식적·기법적·미학적으로 그다지 새로운 것이 없어 예술적 가치가 낮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박성춘 작품과 다른 합창 음악에 대해 판단 기준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단락 전체를 지웁니다. 다만,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는 이미 삭제되지 않은 전문을 전달했음을 밝힙니다.)

소프라노 김영미는 발성과 딕션이 매우 뛰어나서 반가웠다. 음색이 깊고 어두우며 이탈리아 오페라에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는데, 요즘 유행하는 역사주의 연주와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라서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웠고, 목소리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담아낼 수 있다면 바그너를 하면 좋겠으나 그렇지는 않아 보였다.

소프라노 유소영은 김영미 같은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으나 알토 박은주 목소리가 너무 작고 부드러워서 상대적으로 '강성' 이미지처럼 두드러졌다. 둘이 맡은 성부를 생각할 때 그 반대보다는 훨씬 낫다 하겠으나 좀 더 균형 있는 앙상블이 아쉬웠다.

바리톤 송기창은 묵직하면서도 맑고 단단한 목소리로 멜리스마(melisma; 모음 하나에 장식적인 음형이 길게 이어지는 선율)를 날렵하고 깔끔하게 살려서 매우 인상 깊었다. 소프라노 김영미와 마찬가지로 폭발적인 에너지는 없어서 바그너를 부르기에는 알맞지 않아 개인적으로 아쉬웠으며, 모차르트를 부르면 매우 멋질 듯했다.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는 이름에서 짐작게 하는 탄탄한 재정 때문인지 연주력이 웬만한 지방 시향보다 나아 보였다. 트럼펫과 팀파니가 매우 돋보였고 다른 관악기도 훌륭했다. 단점 하나만 말하자면 현악기 연주자들이 숫자에 적당히 묻어가려는 이른바 '안전빵 보잉'을 들 수 있겠는데, 이것은 한국 오케스트라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고질적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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